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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옛날어른이했던놀이
비공개 조회수 4,663 작성일2008.07.06

저는 초6학생입니다

 

저는 민속놀이를 주제로 책을 만드는 중인데요

 

문제는 옛날에 어른이 즐기던 놀이를 몰라서 책을 만들다 말았어요ㅜㅜ

 

어른이 즐기던 놀이 5가지 이상으로 해주시구요

 

유래랑 놀이방법 필수에요!!!

(↑이것이 아주아주 중요☆안하면 추천안함)

 

내공30겁니다

상세하게해줘요

(너무길게말고요 간추리기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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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 답변
1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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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sg****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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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싸움놀이

전남 광산군 대조면 칠석리 윷돌 마을에서 매해 음력 정월 10경부터 2월 초하루에
걸쳐서 벌이던 놀이다. 큰 줄을 꼬아 앞쪽에 고를 짓고 이것을 양쪽에서 밀어서
부딪게 한 다음 상대방의 고를 땅에 내려뜨린 쪽이 이기게 된다.
이 놀이의 유래에 대해 마을 주민들은 윷돌 마을이 황소가 쭈그리고앉은 와우상이라터가 거세기 때문에 이를 풀어주기 위해 시작하였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속설은 전남 일대의 큰 마을마다 퍼져있는 이야기로 믿을 만한 것은 못되며 고싸움놀이를 줄다리기 놀이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먼저 어린아이들의 고싸움으로 시작하여 다음날에는 청소년들, 그리고 본격적으로
청년들의 고싸움으로 커가며 마을간에 대항전을 벌인다.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널뛰기

부녀자들의 대표적인 놀이로 전국에 고루 분포하며 음력 정초를 비롯해 단오,한가위등 큰 명절에 행해진다.마당에 짚이나 가마니로 널밥을 만들어 놓고
기다란 널판을 얹어놓고 두사람이 널의 양편에 각각 올라서서 널을 뛰는 놀이이다.널뛰기의 유래에 대해서 별다른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는 없고 다만
그 성격으로 미루어 폐쇄적 여성관이 자리 잡기 전인 고려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의 여성윤리는 가능한 한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몸놀림을
억제하였는데 이러한 시대에서의 널뛰기는 비인간적 제약 아래에
있던 여성들에게 하나의 탈출구가 되었을 듯 싶다.


★도깨비놀이

사내아이들이 정월밤에 쥐불놀이 할 때 그 중 장난끼있는 아이들이 얼굴에 종이 탈을 만들어 쓰고 바지를 홀쭉하게
입고서 한손에는 횃불을 들고 다른 한손에는 방망이를 들고 기성을 지르며 언덕으로부터 마을로 내닫는데 이 놀이를 도깨비놀음이라 한다.어른들이 보기에 망측스럽고 불이 조심스러워 말려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마디좀놀이

연초 구럭다기날, 가막다기날, 마디좀날은 아낙네들이 모여 즐겁게 노는 날이다.
가막다기날은 정월 16일이며 이날 나들이하면 재수없다 하여 아낙네들이 동네밖에 나가지 않고 모여 논다.
마디좀은 정월 22일날로 이날 놀지 않으면 곡식의 마디마디에 병이 난다고 하여 곡식이 마디 마디 잘 여물라고
아낙네들이 모여 놀았다.


구럭다기날은 2월1일로 이 날놀지 않으면 -구럭이 썬다- 고 한다.이 세날에는 아낙네들이 마을의 큰 집에 모여 음식을 장만해 나눠먹고 북 장구 혹은 큰 대야에 물을 가득 붓고

쪽박을 물위에 엎어 놓고 숟가락으로 때리며 물장구를 치면서 돈돌나리와 같은 소리도 하고 넋두리춤도 추며
즐겁게 놀았다고 한다. 이때 추는 넋두리춤은 매우 간드러지고 흥겨운 춤이라고 한다.


★연날리기

연날리기는 세계 곳곳에서 신분,연령의 구별없이 즐겨오는 놀이다. 대가지를 가늘게 잘라서 연살을만들고 종이를 붙여
연을 만들고 살에 매어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날린다. 때로 다른 사람과 서로 연실을 부벼 끊는 연싸움을 하기도 한다.연을 띄울 때 '송액영복'이란 글자를 써붙이는데 이것은 질병,사고,흉년 등 나쁜 액운은 멀리 사라지고
복이 찾아 오도록 비는 마음에서이다.우리나라에서 연날리기가 널리 민중에게 보급된 것은 조선시대의
영조왕 때라고 한다.

영조왕은 연날리기를 즐겨 구경했고 또 장려하였다고 한다. 정월에 연날리기가 성행하게된 이유중 하나는 일년 사계절 중 이 때가 연날리기에 가장 적당한 바람(북서풍)이 불고 있다는 점이다.

200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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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jso****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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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 - 강강술래는 우리 나라 남해안 일대에 전승되어 오는 민속무용으로서 주로 팔월 한가위 명절에 여성들이 즐긴다. 이 놀이가 어느 때 어떻게 하여 시작되었는지 그 유래에 대하여는 아직 추측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놀이 또는 무용 일반의 기원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옛 농경 사회의 가장 큰 축제는 음력 5월의 기풍제와 10월의 추수 감사제였다. 옛 농민들은 논밭에 곡식의 씨앗을 뿌리고 심을 때, 그 해 농사가 잘 되어 풍년이 들기를 하늘에 기원하는 잔치를 벌였고, 농사일이 끝나면 풍요한 농산물을 수확하게 해 준 하늘에 감사하는 축제를 마련하였다.

  옛 마한의 풍습 속에는 5월과 10월에 축제가 있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과 같이 풍요한 농산물을 바라고 또 그것을 구가하는 범 민중적 잔치였다.
  이 때 서로 손을 마주 잡고 뛰어 놀던 놀이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바, 강강술래의 기원도 이때쯤으로 소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조선 왕조 시의 임진왜란 때, 충무공의 전술과 결부되어 그 유래에 관한 다음과 같은 속설이 전해 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약세에 놓인 우리 군사를 강하게 꾸며 왜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충무공은 마을 부녀자들에게 군복을 입혀 위장시킨 다음, 해변, 언덕 또는 산봉우리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그 주위를 맴돌면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강강술래는 당시 충무공의 의병술에서 연유되었고, 그 후 공의 승전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추석놀이로 계속되어 왔다고 한다. 이는 강강술래가 주로 남해안 일대에서 성행되어 온 바, 자연 충무공의 승전에 관련된 한 속설이 전해 오는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강강술래>란 말은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뜻인 한자어, <강강수월래>라 표기하여 왜적이 물을 건너오니 이를 경계하라는 뜻이라고 풀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우리말 <강강술래>의 한자어 차음으로 생각된다. 또 <강강술래>라는 말은 순수한 우리말로 <강강>은 둘레, 원을 뜻하는 전라도 방언이고, <술래>는 본딧말이 순라(巡邏)로 <강강술래>란 [주위를 잘 지키라]는 구호였다고 한다.

 

가마놀이 - 가마는 옛날 탈것의 한 가지로 작은 집같이 만들어 그 안에 사람이 들어앉도록 하였으며, 밑에 붙은 가마채를 손으로 들거나 끈으로 메고 운반하였다. 고구려 고분 벽화나 신라 기와에 새겨진 그림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도 전통 혼례 때 남자는 말을 타고 여자는 가마를 주로 이용하고 있는데 이 놀이는 열 살 안팎의 소년ㆍ소녀들이 이런 가마타는 모습을 본 떠 즐겼던 놀이라고 한다.

 

고누놀이 - 고누는 우리 조상들이 가장 많이 즐기던 놀이의 하나로 그 기원이나 유래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서민층에서 널리 즐겼던 놀이로서, 쉼의 한때를 간단하면서도 재미있게 보내는 놀이의 하나로 전승되어 왔다. 조선시대 사실주의 화가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에서도 그늘 밑에 잠시 일손을 쉬며 땅바닥에 선을 긋고 돌멩이를 주워 놀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무데서나 손쉽게 할 수 있으며 바둑이나 장기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잘 써야 이길 수 있어 두뇌 발달에도 좋은 놀이이다.

  고누는 우리나라에서 오랜 세월을 거쳐 전해져 온 탓에 고니, 꼬니, 꼰, 꼰질이, 고누 등으로 놀이 자체에 대한 명칭도 다양하다. 또한 각 놀이판의 이름도 다르고 같은 놀이판이라도 지방에 따라 그 놀이 방법이 약간씩 다른 것이 있다. 또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즐기는 놀이여서 나라마다 놀이 방법이 다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두 사람이 특정한 형태로 그려진 놀이판 위에서 정해진 수의 놀이 말을 가지고 겨루면서 상대방의 말을 다 잡아내거나, 못 움직이게 가두거나, 상대방의 집을 먼저 차지하는 등 그 기본적인 놀이 방법은 같다고 볼 수 있다. 대신 놀이판이 다양하여 각 놀이판마다 독특한 재미를 맛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만도 이십 여 가지의 고누판이 있고 전 세계적으로 보면 거의 사십여 가지나 되는 고누판이 있다고 한다.

 

 

고싸움 - 싸움은 민속놀이로서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출장소 칠석동(光州廣域市 南區 大忖出張所 漆石洞)세칭 옻돌마을에서 해마다 음력 정월 열흘경(十日頃)부터 시작하여 16일에 절정(絶頂)을 이루고 2월 초하루에 끝을 맺는 세시풍속(歲時風俗)놀이의 하나이다. 이 민속놀이는 1945년을 전후하여 그 자취를 감추고 거의 인멸 단계에 놓여 있던 것을 1969년에 발굴 재현하여 제1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1970년에는 우리 나라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33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싸움이란 명칭은 「고」라는 낱말과 「싸움」이라는 낱말이 합성해서 만들어진 이름으로서 두 개의 고가 서로 맞붙어서 싸움을 벌린다는 뜻에서 온 것이다. 여기서 고라는 말은 「옷고름」,「고맺음」, 「고풀이」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한 가닥을 길게 빼서 둥그런 모양을 만들어 맺는 것을 지칭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싸움은 이놀이의 기구인 고가 마치 옷고름이나 노끈으로 맨 고와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고, 이 고 두 개가 서로 맞붙어서 싸움을 하는 놀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고싸움놀이는 음력 정월 초열흘경, 어린이들의 「고샅고싸움(골목 고싸움)」부터 시작된다. 위 아래동네 어린이들이 조그마한 고를 만들어 서로 어르고 놀리면서 싸움이 커져 드디어 16일에는 온 동네 남녀노소가 참여하는 본격적인 놀이가 되어 절정을 이루고, 17일부터는 진편이 재도전(再挑戰)하기도 해서 20일까지 계속하다가 그래도 승패가 결정나지 않을 때에는 2월 초하루 고를 풀어 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로 최후 승패를 겨루는 민속놀이이다.

  고싸움놀이의 연원(淵原)과 유래에 대하여는 그에 관한 기록이 없으므로 상세한 것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촌로(村老)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전승지(傳承地)인 옻돌마을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設)로 와우상(臥牛相) 즉 황소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상(相)이어서 터가 무척 거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황소가 일어나 뛰어다니게 되면 전답(田畓)의 농사가 망치게 되므로 일어서지 못하게 황소의 입에 해당하는 곳에 구유(전라도 사투리로「구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파 놓았고, 또 고삐는 할머니 당산(堂山)인 은행나무에 묶어 놓았으며, 꼬리부분에 해당되는 곳에는 일곱 개의 돌로 눌러 놓았다는 것이다.
한편 촌로들은 터가 거세다는 방증(傍證)으로 이 마을은 개(犬)를 갖다 놓으면 곧 죽어버리기 때문에 키울 수가 없어서 부득이 개 대신 집집마다 거위(전라도 사투리로「때가우」)를 기르고 있다고 내세운다. 이에 그 거센 터를 누르기 위하여 고싸움놀이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마을 전설은 전남 일대의 큰 마을에 널리 분포되어 있고, 또 옛날에는 나주군 남평면(羅州郡 南平面)이나 장흥군(長興郡), 강진군(康津郡)등지에서 줄다리기의 앞놀이로 「고쌈」이라는 놀이가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런 속설(俗說)을 떠나 이 놀이와 가장 비슷한 줄다리기와 비교하면서 그 연원을 밝혀 보고자 한다.

  오늘날에도 장흥읍에서 정월 대보름에 「보름줄다리기」라는 민속놀이를 하고 있는데 그 앞놀이로「고쌈」또는 「줄쌈」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 줄의 모양은 다른지방의 것과 별로 다를것이 없으나 줄의 고머리가 특이하다. 줄이 완성되면 메고 마을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길이 4-5미터의 맬대(지렛대라고도 함)7-8개를 줄머리로부터 2,3미터 간격으로 가로로 묶는다. 멜대가 묶어지면 청사초롱(靑紗草籠) 수십 개를 정성들여 만들어 멜대의 제일 앞 멜대위에 세로로 청사초롱 대목(木)을 세우고, 그위에 층층으로 매단다. 어떤 때에는 줄을 보다 호사스럽게 꾸미기 위하여 셋째번 멜대까지 청사초롱을 매달 때도 있다. 청사초롱을 매달고 나면 고머리를 45도 각도로 세워 뻗치지 않게끔 밧줄로 묶어 놓는다. 이 줄을 메고 마을 앞을 돌아다니는데 이 때, 줄머리에 힘센 장정(壯丁) 두·세명이 올라타고 그 뒤에 노래 잘하는 기생(妓生)을 태우고서 노래를 부르며 헹군다. 놀이터인 탐진강(耽津江)의 모래판에 이르면 멜대 위의 청사초롱을 떼어 내고 앞놀이인 고쌈이 시작되는데 이 때, 줄머리가 뻗치지 않게끔 맨 앞 장정이 어깨로 받치고 상대방 고와 맞부딪치면서 밀어낸다. 상대방 고머리를 짓눌른 편이 이기게 되는 것이다. 이 고쌈이 끝나면 다시 멜대를 떼어내고 암줄과 숫줄을 비녀목으로 줄다리가 시작된다. 이상이 장흥지방의 보름줄다리기의 앞놀이인 고싸움놀이의 형태인데 이 고쌈과 옻돌마을의 고싸움이 여러 면에서 유사성(類似性)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줄다리기와 고싸움이 애당초에는 동일한 놀이었거나 또 동일계열의 놀이었던 것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형되어 독립된 놀이로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고싸움의 연원은 줄다리기의 연원은 줄다리기에 비롯된 것이다. 그 형성과정 즉 유래를 나름대로 추리해 본다면 줄다리기의 앞놀이인 고쌈을 할 때 장정의 어깨로 고를 받치고 상대방의 줄머리에 부딪치다 보니 줄머리가 망가지거나 부상자가 생기므로 이를 피하기 위하여 고속에 통대(竹)를 넣어 단단하게 만들고, 또 상대방의 고를 부딪쳐 누르기 위하여 「굉갯대」를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고가 서로 부딪치다 보니 솟구쳐 올라가므로 상대방의 기세(氣勢)를 꺽기 위하여 고머리를 눌러 굴복케 하는 놀이로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고싸움의 고가 줄다리기의 줄처럼 길지 않고 도마뱀처럼 짧아진 것은 줄 위에 탄 줄패장의 명령에 따라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특히 고싸움이 20일까지 승패가 나지 않을 때에는 고를 풀어 다시 긴 줄로 만들어 2월 초하룻날 줄다리기로 최후 승부를 내는 것이 고싸움이 줄다리기에서 비롯되어 독립된 놀이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다 하겠다. 따라서 고싸움의 연원은 줄다리기에 있고 줄다리기의 앞놀이가 독립되어 오늘날의 고싸움이 된 것이다.

 

널뛰기 - 뛰기는 여자들의 활동이 제한적이어서 운동량이 부족했던 시절에 생겨난 놀이로서 출산과 가사 전담을 했던 여성들의 체력 증진 수단으로 설날을 중심으로 정월에 주로 행해진 놀이이다. 처녀 시절에 널뛰기를 하지 않으면 시집가서 아기를 순산하기 어렵고, 정월에 널뛰기를 하면 일년 내내 발바닥에 가시가 찔리지 않는다는 등 다리운동을 많이 시키기 위해서 널을 뛰었다는 이야기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여성을 비하하는 듯한 속설로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처녀들이 담장 밖의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서 널뛰기가 시작되었다는 그럴듯한 이야기와 지금처럼 자유롭게 밖으로 돌아다니지 못하던 시절에 옥에 갇혀 있는 남편들이 보고 싶어 여럿이 힘을 모아 옥의 담장 옆에 널판을 갖다 놓고 팔짝팔짝 뛰어 오르면서 남편들의 얼굴을 훔쳐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널뛰기는 주로 설 명절에 많이 뛰었으나 단오나 추석에도 많이 뛰며 즐기던 놀이이다.

 

비석치기 - 무덤 앞에 죽은 사람의 업적이나 이력 등을 새겨 후세에 알리기 위해 세운 돌을 '비석'이라 한다.

  비석은 중국에서 전해 내려 왔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무덤 앞이나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서 길가에 세웠는데, 그러한 비를 '송덕비'라 하였고, 송덕비가 세워진 곳을 '비석거리'라고 불렀다.

  그런데 뒤에는 백성을 괴롭히는 나쁜 벼슬아치들이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강제로 송덕비를 세우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에 분개하여 비석거리를 지날 때마다 돌을 던지거나 욕설을 하거나 침을 뱉거나 발길질을 하여 화풀이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에서 비석 치기 놀이가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그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던 돌이나 기왓조각 등도 이 놀이를 많이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씨름 - 우리 나라 전통적인 남자 운동경기의 하나로 한문으로 각희, 각렬, 각저라고 하는데, 넓은 마당에서 허리와 다리에 띠나 샅바를 두른 두 장정이 마주 끓어 앉아 각기 한 손으로는 다리의 띠를, 다른 손으로는 허리띠를 잡은 다음 심판관의 호령에 의해 동시에 일어나 먼저 상대방을 넘어뜨림으로써 승부를 결정하는 경기이다.

  만주 통구에 있는 각서총현실 좌우의 벽에 씨름 경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구려 시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고려사에 의하면 충혜왕은 씨름을 즐겨 동왕 5년(1344) 2월과 7월에 이를 관람한 기록이 나타나 있어 고려에서도 성행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경향 각지에서 남자들의 놀음놀이로 단오, 백중날, 한가위, 농한기 등에 행해졌으며, 특히 단오절에는 여자들의 그네뛰기와 함께 연중행사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와 같이 범 민중 놀이로 성장해 온 씨름은 1910년대에 이르러 씨름단체나 기관의 주관 아래 씨름대회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1927년에 〈조선 씨름협회>가 조직되어 1941년까지 6회의 씨름대회를 열었다. 광복 이후에는 〈대한 씨름 협회>가 결성되어 오늘에 이르도록 각종 씨름대회를 주관하고 있다.

쥐불놀이 - 농경 사회에 뿌리를 둔 전래의 놀이 중에 하나인 쥐불놀이는 농사 지을 땅을 기름지게 하고 해충을 제거하여 작물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조상의 지혜가 담겨진 과학적인 놀이이다.

  오래 전부터 음력 대보름에 앞서 쥐 날이 되면 쥐불이라 하여 마을마다 청년들이 마을 부근의 논두렁과 밭두렁에 볏짚을 흩으러 놓고 해가 지면 일제히 불을 놓아 잡초를 태운다. 불은 사방에서 일어나 장관을 이룬다. 쥐불의 크기에 의해 그 해의 풍년 또는 마을의 길흉을 점치기도 하여 각 마을에서는 다투어 가며 불의 크기를 크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마을 사람들과 경쟁을 하는데 이긴 편의 쥐가 진 편으로 몽땅 쫓겨가게 되어 이긴 편 마을에서는 농작물에 해를 입지 않아 그 해 풍년이 든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이 날 들판에 불을 놓는 까닭은 쥐의 피해가 심하므로 쥐를 박멸하기 위함과 논밭의 해충을 제거하고 또한 새싹이 잘 자라게 하는 데 있다.

투호놀이 - 투호놀이는 일정한 거리에 놓인 병 속에 화살을 던져 노는 놀이인데, 두 편이 청·홍색의 화살을 가지고 어느 편이 더 많은 화살을 병 속에 던져 넣느냐에 따라 승부를 가리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경회루에서 직접 즐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주로 궁중이나 고관들의 기로연(耆老宴) 때 여흥으로 즐겼다. 본래 중국 당나라 때에 성행되었던 것으로, 『북사(北史)』「백제전」과 『신당서(新唐書)』「고구려전」의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즐기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마광(司馬光)의 투호격범(投壺格範)에는 “투호병은 입지름이 3치[寸]이고, 귀[耳]의 입지름은 1치이며 높이는 1자[尺]이다. 병 속은 팥으로 채운다. 병은 던지는 이의 앉을 자리에서 2살[矢] 반쯤 되는 거리에 놓고, 살은 12개를 사용하며 그 길이는 2자4치이다. 실수하지 않고 병에 던져 꽂힌 것을 상(上)으로 삼는데, 먼저 120을 채우는 쪽이 이긴다”라는 기록이 있고, 이 투호놀이법은《예기》에〈투호편〉이 들어 있을 만큼 그 의례가 엄격하고도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투호놀이에 사용된 병의 종류나 크기는 여러 가지며, 화살의 크기 또한 다양하다. 노는 법은 일정한 장소에 둔 투호병을 향하여 일정한 위치에서 살을 던져 병 속이나 귀에 던져 넣는 것으로, 살이 꽂히는 데에 따라 득점이 정하여진다. 투입법(投入法)에 따른 요령으로는 던지는 사람의 양쪽 어깨가 균형을 취할 것과 어깨가 기울어지지 않게 주의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기는 것을 ‘현(賢)’ 지는 것을 ‘불승(不勝)’이라 하며 한 번을 ‘일호(一壺)’라 한다. 그 점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헌배(獻杯)·벌배(罰杯) 등이 행하여졌다.
또 만약 항아리 안에 살을 하나도 넣지 못하면 벌로 얼굴에 먹칠을 해서 한 바탕 웃고 즐기기도 했는데 이 투호놀이는 놀이 자체가 우아하고 여유가 있어서 반가에서 주로 즐겼으며 음력 정월 첫 사일(巳日)과 9월 중양절(重陽節:9일) 그리고 명절이나 집안 잔칫날에 친척들이 모였을 때 주로 행해졌다.

사방놀이 - 원래 '망줍기, 망차기 놀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은데 사방치기로 더 알려져 있다. 좁은 공간에서도 즐기며 근력, 지구력, 조정력 등을 기를 수 있는 놀이이다. 놀이 방법도 간단하고 많은 재미를 주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더욱 발전 가능한 놀이라 할 수 있다.

  1930∼1940년대에 많이했던 놀이로 특별한 놀이기구 없이도 즐길 수 있어 유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연날리기 - 날리기는 오랜 옛날부터 어린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즐기던 놀이이다. 음력 정월을 중심으로 밖에서 추위를 이기고 바람에 연을 띄우며 놀이를 즐긴다. 사람들은 연에다 높이 오르고 싶은 소망을 실어 띄운다.

  연을 하늘 높이 올리는 것도 재미있지만 연 싸움이 더욱 재미있다. 연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연 실에 사기그릇 가루를 풀 매겨 실과 실을 부벼 연줄이 끊겨 나가도록 한다. 끊긴 연은 패자가 되어 어디로 인가 정처 없이 바람에 떠 날아가 버린다. 싸움에 살아 남은 연은 하늘을 지배하고 왕자가 된다.

  사람들은 연을 띄울 때 '송액영복 (送厄迎福)'이라는 글씨를 써 붙인다. 이것은 질병, 사고, 흉년 나쁜 액운일랑 멀리 사라지고 복이 찾아오도록 비는 마음에서다. 얼레에 감긴 실이 모두 풀려 나가고 연이 하늘 높이 올랐을 때 연줄을 끊어 버린다. 연이 바람에 실려 어디로든지 자유롭게 날아가도록 한다. 제발 나쁜 액운일랑 연과 더불어 멀리 달아나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나쁜 액운을 연에 실려 멀리 쫓아내고 희망 찬 새 마음을 갖기 위해 연을 날렸다.

 

자치기놀이 - 자치기는 남녀 구분 없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두루 행해지고 있는 놀이이다. 별다른 준비물 없이 막대기 하나만 있으면 길고 짧게 잘라 손쉽게 할 수 있는 놀이이다. 이 놀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기록에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다른 놀이에 비해 넓은 장소로 마당 같은 곳만 있으면 여러 사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 놀이로는 제일 먼저 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치기를 하려면 길이 40~50cm쯤 되는 나무막대와 10~15cm쯤 되는 작은 막대가 필요한데 이 두 개의 막대를 큰맏대와 작은맏대라 부른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큰맏대를 어미자, 작은맏대를 새끼자(토끼)라 칭하기도 한다. 맏대를 만들 때는 나무결이 단단하여 잘 부러지지 않는 잡목을 골라 낫으로 다듬는데, 큰맏대는 한쪽 끝을 대각선 모양으로 깎고 작은맏대는 끝부분을 때리면 잘 솟아오를 수 있도록 양쪽 모두 대각선 방향으로 뾰족하게 깎는다.
지방에 따라 '오둑떼기', '메뚜기치기', '토끼방구'라고도 하며 전라도 지방에서 '자치기'는 무척 즐기던 놀이중의 하나이다.

  자치기는 보통 10명 안팎의 아이들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편을 가르는데 이긴 편이 먼저 공격을 하고 진 편은 수비를 한다. 편이 나누어지면 땅바닥에 동그라미(네모)를 그리고 그 안에는 다시 구멍이나 조가비 모양의 홈을 판다. 바로 이 구멍(홈)이 작은맏대를 올려놓고 자치기를 하는 집이다.

  놀이방법은 정해진 규칙에 의해 큰맏대로 작은맏대를 쳐서 그 거리를 재는데, 놀이가 끝났을 때 자기편의 개개인이 얻은 점수(尺)를 합산해서 더 많은 점수를 얻는 편이 승리한다. 또는 사전에 몇 점(尺) 나기를 해서 먼저 정해진 점수에 도달하는 편이 이긴다. 여기서 '자(尺)'란 큰맏대를 의미하며 '한 자(尺)'는 곧 큰맏대로 한번 잰 거리를 말한다.
쌍륙놀이 - 쌍륙놀이는 악소()·십이기()·육채()라고도 한다. 쌍륙을 노는 데는 판·말·주사위가 필요하다. 외국에서 가장 오래된 쌍륙 형태의 놀이가 발견된 곳은 바빌로니아의 아브라함 성지로 BC 3,000년경에 제작된 놀이판이 출토되었다. 이후로 나일강변의 피라미드, 고대 그리스·로마제국시대의 유적에서 쌍륙판이 발견되었다.

  수천 년을 통하여 전세계에 걸쳐 발전하여 왔기 때문에 시대와 나라에 따라 놀이 방법에는 차이가 있으나, 1920년경 미국과 유럽에서 '백개먼'이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규칙이 자리잡기 시작하였고, 1931년에는 국제규칙이 제정되었으며, 1964년에 첫 세계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한국에는 언제 전래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문헌을 통하여 백제 때부터 존재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성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중국의 한 무제 때에 서역에서 중국에 전래된 이 쌍륙놀이는 우리 나라에 들어와 백제에서 유행했으며, 다시 일본에 전해져서 스고로꾸가 되었다고도 한다. 놀이 방법은 쌍륙판에 흑백의 돌을 12개씩 형식에 따라 벌여 놓고 2개의 주사위[]를 죽통()에 넣어 흔들어서 빼내, 나온 수만큼 돌을 전진시켜 먼저 적진에 들어가면 승리하며 주로 정초에 많이 즐겼으며 한가위나 겨울철 한가한 때에 여럿이 모여 앉아 놀기도 했다. 지역에 따라 놀이의 방법, 쓰는 말도 일정하지가 않다. 여기에 소개한 쌍륙놀이는 원형을 변형시켜 아이들이 쉽게 즐길 수 있게 한 것이다.

 

제기차기 - 제기차기는 남자 어린이들이 주로 음력 정초를 전후한 겨울철에 즐기며 성행하던 놀이이다. 골목 어구나 마당 같은 곳에서 몇몇 소년들이 어울려 제기차는 모습은 요즘도 간혹 볼 수 있다. 구멍뚫린 엽전 등이 흔했던 옛날과는 달리 오늘의 어린이들은 대개 구멍가게에서 파는 플라스틱제 제기를 차고 있다. 때문에 옛 어린이와 같이 손수 제기를 만드는 재미는 별로 맛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제기차기는 어린이들의 정신집중력을 길러주며 온몸 운동도 함께 된다. 한번이라도 더 차 올려야 이기게 되므로 무슨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는 그만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고 약삭빠른 눈속임이나 어떤 편법이 통하지 않는 실력 위주의 놀이이다.
  놀이 도구를 마련하는 데는 얇은 종이와, 엽전과 같이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쇠붙이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제기를 만들어 놀 수 있으므로 어린이들 사이에 크게 성행되어 왔다.
  제기차기가 언제 어떻게 하여 비롯되었는지 그 유래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일설에 의하면 고대 중국에서 무술을 연마하기 위하여 고안된 축국(蹴
) 놀이에서 연유되었다고도 하며, 축국의 놀이기구인 국(, 鞠)은 가죽 주머니 속에 털 또는 헝겊같은 부드러운 물건을 채워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부드러운 물건 대신 바람을 불어넣어 오늘날의 공과 같이 만들어 사용했다고도 하는데 놀이 이름도 우리말 ‘공’을 뜻하는 ‘구’(毬)가 붙어 축구(蹴毬) 또는 타구(打毬)라 했다.
  옛 시절의 놀이방법은 마당 양편에 세운 몇길 높이의 대나무 위에 그물을 얹어놓고 7∼8명씩 편을 지어 서로 공을 그물 위에 차 올리며 많이 차 올린 편이 이겼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 놀아졌던 축구의 자취를 문헌의 기록을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구당서(舊唐書)』에 고구려의 풍속을 들어‘인능축국(人能蹴鞠)’이라 하였다. 이를 미루어 당시의 고구려 사람들 사이에 축국이 성행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신라와 백제에서도 있었음을 옛 기록은 말해주고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축국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축국을 일설에는 오늘날 소년들이 즐기는 ‘제기차기’라고 하나 삼국시대에 행해진 축국은 오늘날의 축구와 같은 스포츠적인 구희(球戱)인 것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 김유신과 김춘추가 축국을 하다가 김춘추의 옷깃이 떨어졌다는 것으로 보아, 축국이 단순한 오늘날의 ‘제기차기’정도라면 김춘추의 옷깃이 떨어졌을 리가 없을 것인즉 당시의 축국이 공을 차고 뺏고 하는 오늘날의 축구와 같은 격렬한 운동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 왕운정의‘축국도보(蹴鞠圖譜)’, 송대(宋代)에 의한 ‘축국도’와 정조 14년(1790) 한교(韓喬) 편술(編述) · 증보(增補)인 당대(唐代)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권4 격구조(擊毬條)에 당시의 『초학기(初學記)』를 인용하여 축국을 설명하기를 ‘국(鞠)은 즉 구(毬) · 구(球)자니 오늘날의 축국은 구희(球戱)인 것이다. 옛날은 털을 묶어서 만들었고 오늘날은 가죽태로써 만든 것이다(생각컨대 소의 ‘오줌통’으로 공을 만든 것이다). 그속에 바람을 불어넣어 이를 찬다’고 하였다. 중무파[仲無頗(당나라 때의 사람)]라고 한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축구에 가까운 구기(球技)이었음이 틀림 없는 것이다.」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에 들어서면 축국에 관한 문헌은 별로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고려 명종때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후집 권6 고율시(古律詩) 96수(首)에

「우연히 기구(氣毬)를 보고 생각되는 바 있어 뜻을 붙여 시를 짓되 ‘공에 바람을 넣어 사람들이 모여 차다 바람이 빠져 사람들이 또 헤어지니 쭈그러진 빈 주머니가 남았다’고 하였다.」라는 시구를 볼 수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한 걸음 발전하여 공에 공기를 넣어서 찬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에 공차기가 그렇게 성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나 전보다는 상당히 진전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2월 월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젊은이들이 축국으로 놀이를 한다. 그 공은 큰 탄환만 한데 위에 꿩털을 꽂았다. 두 사람이 상대하여 서서 마주 차는데 계속하여 차서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훌륭한 기술이다. 생각컨대 유향[劉向(중국의 학자 B.C.77∼A.D.6)]의 별록(別錄)에 ‘한식에 답축[
蹴, 지금의 타구(打毬)]을 하는데 황제가 만든 것이라’하였다. 혹 어떤 이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군대의 세력을 기르기 위한 방법에서 나온 것으로 일명 백타(白打)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지금 풍속도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겨울부터 시작하여 새해에 더욱 성하다.」

 

지신밟기 - 지신밟기는 지신을 위로하여 집집과 온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비는 민속놀이이다.

  잡귀를 쫓아내고 즐거운 새해를 맞기 위해 주로 정월 초사흘부터 보름까지 이 지신 밟기를 한다. 하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크고 작은 명절에도 지신밟기가 행해졌고, 부르는 이름도 마당밟기, 매귀놀이라고도 하며 그절차와 등장인물 등이 조금씩 다르다. 지신 밟기의 정확한 유래를 밝힌 문헌은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놀이의 목적과 내용이 나쁜 귀신은 쫓고 좋은 귀신은 맞아드리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의 제천의식에 뿌리를 둔것으로 볼수 있다.

  이 지신밟기가 끝나면 집집마다 성의껏 곡식이나 금전을 내놓았는데, 그렇게 모인 금품은 마을에 공동 설을 세우거나 마을전체의 공익을 위한 사업에 사용되었다. 지신밟기는 마을 사람 모두가 합심해서 악귀를 밟아 없애버리고 다같이 복을 누리자는 공동체의식이 한껏 발휘되는 놀이다. 또한 우리 마을이나 우리 지방의 땅만을 밟는 것이 아니라 삼천리 금수강산을 고루고루 밟는다는 민족공동체의식이 담겨있다. 놀이방법과 등장 인물이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부산 동래지방의 지신밟기가 제법 흥미롭다.

죽마타기 - 죽마타기의 기원과 유래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옛날 집안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대 장대(간짓대)나 대 빗자루를 가지고 놀던 데에서 유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한자 성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랜 옛날부터 크게 유행했던 놀이로 보인다.이 놀이는 대로 만든 말을 타고 논다고 해서 <대말타기> <죽마놀이> 또는 <죽족>이라고 불리운다.

  죽마타기 형식은 두 가지가 있는데, 방법①은 긴 장대나 마당비 따위를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달리며 노는 방법과 방법②는 장대를 이용하여 디딜 수 있는 발판을 붙여 올라타고 걸어다니는 방법이다.

2008.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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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다리기,윷놀이,장기,바둑

2008.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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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초6학생입니다

 

저는 민속놀이를 주제로 책을 만드는 중인데요

 

문제는 옛날에 어른이 즐기던 놀이를 몰라서 책을 만들다 말았어요ㅜㅜ

 

어른이 즐기던 놀이 5가지 이상으로 해주시구요

 

유래랑 놀이방법 필수에요!!!

(↑이것이 아주아주 중요☆안하면 추천안함)

 

내공30겁니다

상세하게해줘요

(너무길게말고요 간추리기 힘들어요)

2008.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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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싸움놀이

전남 광산군 대조면 칠석리 윷돌 마을에서 매해 음력 정월 10경부터 2월 초하루에
걸쳐서 벌이던 놀이다. 큰 줄을 꼬아 앞쪽에 고를 짓고 이것을 양쪽에서 밀어서
부딪게 한 다음 상대방의 고를 땅에 내려뜨린 쪽이 이기게 된다.
이 놀이의 유래에 대해 마을 주민들은 윷돌 마을이 황소가 쭈그리고앉은 와우상이라터가 거세기 때문에 이를 풀어주기 위해 시작하였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속설은 전남 일대의 큰 마을마다 퍼져있는 이야기로 믿을 만한 것은 못되며 고싸움놀이를 줄다리기 놀이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먼저 어린아이들의 고싸움으로 시작하여 다음날에는 청소년들, 그리고 본격적으로
청년들의 고싸움으로 커가며 마을간에 대항전을 벌인다.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널뛰기

부녀자들의 대표적인 놀이로 전국에 고루 분포하며 음력 정초를 비롯해 단오,한가위등 큰 명절에 행해진다.마당에 짚이나 가마니로 널밥을 만들어 놓고
기다란 널판을 얹어놓고 두사람이 널의 양편에 각각 올라서서 널을 뛰는 놀이이다.널뛰기의 유래에 대해서 별다른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는 없고 다만
그 성격으로 미루어 폐쇄적 여성관이 자리 잡기 전인 고려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의 여성윤리는 가능한 한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몸놀림을
억제하였는데 이러한 시대에서의 널뛰기는 비인간적 제약 아래에
있던 여성들에게 하나의 탈출구가 되었을 듯 싶다.


★도깨비놀이

사내아이들이 정월밤에 쥐불놀이 할 때 그 중 장난끼있는 아이들이 얼굴에 종이 탈을 만들어 쓰고 바지를 홀쭉하게
입고서 한손에는 횃불을 들고 다른 한손에는 방망이를 들고 기성을 지르며 언덕으로부터 마을로 내닫는데 이 놀이를 도깨비놀음이라 한다.어른들이 보기에 망측스럽고 불이 조심스러워 말려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마디좀놀이

연초 구럭다기날, 가막다기날, 마디좀날은 아낙네들이 모여 즐겁게 노는 날이다.
가막다기날은 정월 16일이며 이날 나들이하면 재수없다 하여 아낙네들이 동네밖에 나가지 않고 모여 논다.
마디좀은 정월 22일날로 이날 놀지 않으면 곡식의 마디마디에 병이 난다고 하여 곡식이 마디 마디 잘 여물라고
아낙네들이 모여 놀았다.


구럭다기날은 2월1일로 이 날놀지 않으면 -구럭이 썬다- 고 한다.이 세날에는 아낙네들이 마을의 큰 집에 모여 음식을 장만해 나눠먹고 북 장구 혹은 큰 대야에 물을 가득 붓고

쪽박을 물위에 엎어 놓고 숟가락으로 때리며 물장구를 치면서 돈돌나리와 같은 소리도 하고 넋두리춤도 추며
즐겁게 놀았다고 한다. 이때 추는 넋두리춤은 매우 간드러지고 흥겨운 춤이라고 한다.


★연날리기

연날리기는 세계 곳곳에서 신분,연령의 구별없이 즐겨오는 놀이다. 대가지를 가늘게 잘라서 연살을만들고 종이를 붙여
연을 만들고 살에 매어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날린다. 때로 다른 사람과 서로 연실을 부벼 끊는 연싸움을 하기도 한다.연을 띄울 때 '송액영복'이란 글자를 써붙이는데 이것은 질병,사고,흉년 등 나쁜 액운은 멀리 사라지고
복이 찾아 오도록 비는 마음에서이다.우리나라에서 연날리기가 널리 민중에게 보급된 것은 조선시대의
영조왕 때라고 한다.

영조왕은 연날리기를 즐겨 구경했고 또 장려하였다고 한다. 정월에 연날리기가 성행하게된 이유중 하나는 일년 사계절 중 이 때가 연날리기에 가장 적당한 바람(북서풍)이 불고 있다는 점이다.

2008.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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