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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도덕(p29) '효도와 어른공경'에 대한 사연!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9,350 작성일2004.04.05
효도와 어른공경에 대한 사연을 신문이나 인터넷에 있는것 좀 말해주세요...

불효도이고 어른공경을 안한 것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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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di****
영웅
외국전통문화 5위, 국어 어원, 어휘 100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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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와 어른 곤경의 예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삼국시대 때부터 효가 크게 강조되었다. <<증보문헌비고>>를 보면 신라 경덕왕은 효행이 두드러진 사람에게 조곡 3백석을 내리고, 집과 전답을 하사하여 사회적으로 크게 표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의 눌지왕은 나라가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만 백성들에게 자 비를 베풀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불쌍한 백성들을 돌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해마다 전국 각지의 무의탁 노인들을 불러모아 남당(南堂) 뜰에서 거대한 양로연을 베풀었다. 그 때는 눌지왕도 친히 노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하고 잔치가 끝날 무렵 노인들에게 곡물과 비단을 나이에 따라 분 량을 달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고구려의 유리왕은 늙은 홀아비와 과부, 자식없는 노인,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는 노인들에게 생활을 해나가는데 필요로 하는 물자를 하사해 주었다. 또한 고구 려의 태조도 늙은 홀아비와 과부, 자식없는 노인, 경제력이 없는 노인에게 의식을 지급하였다.
백제의 비류왕도 불우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구빈정책을 실시했음을 <<문헌비고>>가 상세 히 전하고 있다. 또한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은 처음에는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라고 불릴 정도로 효행이 매우 높았다.
신라는 통일 이후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국학을 설치하였는데 8세기 경덕왕 때에는 이를 태학감 으로 개칭하면서 교과내용을 3과로 나누어 구성하였고, 그 중 효사상의 중심 경전인 <<효경>> 을 3과의 공통 필수과목으로 채택함으로써 그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가 족제도는 중국의 가족제도와 다르고, 전통적인 조상 숭배신앙으로부터 발전한 가족윤리가 존재했 기 때문에 유교적 효사상에 대한 지식이 곧 유교적 효윤리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 히려 고려시대까지의 가족윤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불교였다.
신라의 十聖 중의 한 사람이며, 불교를 흥하게 한 三聖 중의 한 사람으로서 신라에 최초로 불교 를 전한 我道和尙은 고구려 여인인 어머니에 의하여 일찍이 출가하였다. 16세 때에 중국으로 가 서 魏人인 그 아버지를 찾아본 다음 거기서 불법을 공부하고 다시 어머니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어머니의 말에 따라서 아직 고구려에도 불교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당시에 신라로 넘어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신라불교의 터를 열어 놓았다. 아도는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여 어려운 구도의 길을 수행했으니 진정한 효자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효자 아도에 의하여 비로소 신 라에 불교가 전해졌으니 결국 신라의 불교는 효로써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진평왕대의 고승 圓光은 평생을 지킬 가르침을 구하는 두 젊은이(貴山과 項)에게 世俗五戒를 주었다.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이 그것인데 여기서 어버이에 게 효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진평.선덕왕대의 고승 慈藏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일찍이 그 의 부모가 삼보에 귀의하여, 아들을 낳게 되면 훌륭한 불자가 되게 하겠다고 서원한 바에 따라 입산하였다. 그리고 그 집을 절(元寧寺)로 삼았다. 이것은 지극한 효성으로 다리 살을 베어서 노 모를 봉양하였던 효자 信孝거사가 그 어머니의 사후에 출가하고 그 집을 절(孝家院)로 삼은 것과 유사하다.
<<삼국유사>>에 보면 義湘대사는 그 제자 眞定의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하여 화엄경을 강설하 여 하늘에 낳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진정법사의 어머니는 의지할 데 없는 늙은 자신으로 인 하여 아들이 출가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는,
"불법은 만나기 어려운데 인생은 너무나 빠르다. 내가 죽은 뒤에 출가하면 늦어지니 머뭇거리지 말고 속히 가거라. 내가 너의 출가에 방해가 된다면 나는 필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므로 네가 내 곁에서 아무리 잘 봉양한다 해도 어찌 그것이 효라고 하겠느냐. 네가 참으로 효도하려거든 내 걱 정은 조금도 하지 말고 어서 떠나도록 해라." 라고 하여 아들을 재촉해서 끝내 수도의 길을 나서게 했다. 의상문하의 十大德의 하나였던 眞定 은 그 노모의 성화같은 재촉으로 출가하여 수학 도중에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는 곧 가부좌하여 7 일 동안을 선정에 들었다가 일어나자 그 스승 의상은 그 망모의 명복을 위하여 3천 제자 앞에서 약 90일간 화엄경을 강의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숭복사비>>에 보면 화엄대덕 決言이 왕명으로 숭복사 낙성법회에서 경을 강론하여 효 를 펴고 돌아가신 부모의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그 비문에는, "政은 仁으로써 근본을 삼고, 예는 효로써 첫머리를 삼아야 한다. 인은 濟衆의 誠으로 추켜올려 야 하고, 효는 尊親의 모범으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 - - 모든 중생을 미로의 지역에서 제도하 고 천상에 나도록 하며, 尊靈을 항상 즐거움의 본고장에 받들어야 하는 것이니, 九親이 화목함은 실로 삼보를 숭상하는 데 있음을 알아야 한다." 라는 기록도 있다. 이런 예는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삼국시대에 출가한 스님 이외에 집에 거주하면서 효를 실행한 불자는 더욱 많다. 신라十聖의 한 사람인 蛇福은 그 어머니가 죽자 원효법사의 도움을 받아 장지에 이르러 풀뿌리 밑에 전개된 華藏세계에 어머니의 시체를 업고 들어갔다고 한다. 이것은 홀어머니에게서 아비없이 태어났던 그 의 효심이 華藏莊嚴 세계에 어머니를 모시고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薛聰은 아버지 원효 가 거주하던 절 곁에 살면서 가까이 모셨는 데, 그 아버지가 입적하자 그 유골의 가루로 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정성을 다하였다. 설총의 정성이 지극하였으므로 아버지의 상이 아들쪽 으로 머리를 돌렸다고 한다.
부모를 위하여 불사를 일으킨 예로는 신문왕의 感恩寺, 효성왕의 奉德寺, 경덕왕의 봉덕사종, 김 지성의 甘山寺 및 미륵 미타이불상, 김대성의 불국사 및 석굴암이 있다. 또 효성이 사원의 연기가 된 사례로는 효자 孫順의 弘孝寺와 효녀 知恩의 兩尊寺 및 성덕산의 觀音寺 등을 들 수 있다. 홍 효사와 양존사는 그들의 집을 절로 만든 것이고, 성덕산 관음사는 맹인 元良의 딸인 효녀 洪莊의 발원에 의한 것이다. 효녀 홍장은 진나라의 황후가 되었다고 하는데, 또한 이 고사는 조선시대에 각색되어 심청전이 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 孝善篇에 실려있는 다섯 개의 효선 미담(眞定師, 大城, 向德, 遜順, 貧女)은 불교 적 인과응보의 생각이 들어 있고, 부처의 가호로 행복하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어 고유의 효사 상에 불교문화가 가미된 새로운 효행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다섯 가지 효에 관한 미담 은 다음과 같다.
1) 진정사 孝善雙美
범사 진정은 신라사람이다. 속인으로 있을 때 군대에 예속되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장가를 들지 못했다. 군대 복역의 여가에는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서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집안의 재산이 라고는 오직 다리 부러진 솥 하나뿐이었다. 어느날 중이 문간에 와서 절을 지을 쇠붙이를 구하므 로 어머니가 솥을 시주했는데, 이윽고 진정이 밖에서 돌아오자 어머니는 그 사실을 말하고 또한 아들의 생각이 어떤가를 살피니, 진정이 기쁜 안색을 나타내며 말했다. '불사에 시주하는 것이 얼 마나 좋은 일입니까. 비록 솥이 없더라도 무엇이 되겠습니까' 이에 와분을 솥으로 삼아 음식을 익 혀 어머니를 봉양했다. 일찍이 군대에 있을 때 사람들이 의상법사가 태백산에서 설법을하여 사람 을 이롭게 한다는 말을 듣고 금시에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 어머니께 고했다. '효도를 마친 뒤에는 의상법사에게 가서 머리 깍고 도를 배우겠습니다.' 어머니는 말했다. '불법을 만나기 어려운데 인 생은 너무나 빠르다. 내가 죽은 뒤에 출가하면 늦어지니 머뭇거리지 말고 속히 가거라. 내가 너의 출가에 방해가 된다면 나는 필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므로 네가 내 곁에서 아무리 잘 봉양한다 해 도 어찌 그것이 효라고 하겠느냐. 네가 참으로 효도하려거든 내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고 어서 떠나도록 하라' 진정은 '어머님 만년에 오직 제가 옆에 있을 뿐이온데 어찌 버리고 출가를 할 수 있겠습니까' 했다. 어머니는 '아! 나를 위하여 출가를 못한다면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 다. 비록 생전에 三牢七鼎으로 나를 봉양하더라도 어찌 가히 효도가 되겠느냐. 나는 의식을 남의 문간에서 얻더라도 또한 가히 천수를 누릴 것이니, 꼭 내게 효도를 하고자 한다면 네 말을 말라.' 고 하였다. 진정은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는데 어머니가 즉시 일어나서 쌀자루를 털어보니 쌀 일 곱 되가 있었다. 그날 이 쌀로 밥을 짓고서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밥을 지어 먹으면서 가자면 더딜까 두려우니, 마땅히 내 눈앞에서 그 한 되 밥을 먹고 엿 되 밥은 싸가지고 빨리 떠나거라.' 진정은 흐느껴 울면서 굳이 사양하며 말했다.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함이 그 또한 자식된 자로 차 마 하기 어려운 일이거늘 하물며 며칠 동안 미음거리까지 모두 싸가지고 떠난다면 천지가 저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세 번 사양하였으나 어머니는 세 번 권했다. 진정은 그 뜻을 어기기 어 려워서 길을 떠나 밤낮으로 3일 만에 태백산에 이르러 의상에게 의탁하여 머리깍고 제자가 되어 이름을 진정이라 했다. 3년 후 어머니의 부고가 오자 진정은 가부좌를 하고 선정에 들어가 7일만 에 일어났다.
2)대성 효2세 부모
모량리의 가난한 여인 慶祖에게는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하여 성과 같았 으므로 大城이라 했다. 집이 군색하여 살아갈 수가 없어 부자 福安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고, 그 집에서 약간의 밭을 얻어 의식의 자료로 삼았다. 이 때 開士 漸開가 육륜회를 흥륜사에서 베 풀고자하여 복안의 집에 가서 보시할 것을 권하니 복안은 베 50필을 보시하므로 점개는 주문을 읽어 축원했다. '단월이 보시하기를 좋아하니 천신이 항상 지켜 주실 것이며,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 배를 얻게 되는 것이니 안락하고 수명 장수하게 될 것입니다.' 대성이 듣고 뛰어 들어가 그 어머니에게 말했다. '제가 문간에 온 스님이 외는 소리를 들었는데,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컨대 저는 宿善이 없어 지금까지 곤궁한 것이니 이제 또 보시하지 않는다 면 내세에는 더욱 구차할 것입니다.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보시해서 뒷날의 응보를 도모하면 어떻습니까.' 어머니도 좋다고 하므로 이에 밭을 점개에게 보시했다. 얼마 지나지 아니 하여 대성은 세상을 떠났는데, 이날 밤 국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있었다. '모량리 대성 이란 아이가 지금 네 집안에 태어날 것이다.' 집 사람들이 모두 놀라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 하게 하니, 과연 대성이 죽었는데, 그날 하늘에서 외치던 때와 같았다. 김문량의 아내는 임신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왼손을 꼭쥐고 있다가 7일만에야 폈는데, 대성 두 글자를 새긴 금간자가 있었으 므로 다시 이름을 대성이라 하고, 그 어머니를 집에 모셔와서 함께 봉양하였다. 이미 장성하자 사 냥하기를 좋아하더니 어느 날 토함산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밑에서 잤다. 꿈에 곰이 변 하여 귀신이 되어 시비를 걸어 말했다. '네 어찌 나를 죽였느냐. 내가 환생하여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두려워서 용서해달라고 청하니, 귀신은 '네가 나를 위하여 절을 세워 주겠느냐'라고 말했 다. 대성은 그러마고 약속했는데, 꿈을 깨자 땀이 자리를 적셨다. 그 후로는 들에서 사냥하는 것 을 금하고 곰을 잡은 자리에는 곰을 위해서 장수사를 세웠다. 그로 인해 마음에 감동하는 바 있 어 자비의 원이 더욱 더해 갔다. 이에 이승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우고, 신림, 표훈 두 성사를 청하여 각각 살게 했다.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설치하여 부 모의 양육한 공을 갚았으나 한 몸으로 전세와 현세의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옛적에도 또한 드 문 일이었다. 그러니 착한 보시의 영향을 가히 믿지 않겠는가. 장차 석불을 조각하고하여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개를 만드는데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분하게 여기다가 어렴풋이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으므로 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 고 개로 급히 달려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했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香嶺이라고 했다. 불국 사의 운제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조각한 技工이 東都의 여러 절 가운데서 이보다 나은 것이 없 다.
3)향득사지 割腹供親
웅천주에 向得이라는 舍知(벼슬이름)가 있었다. 흉년이 들어 그 어버이가 거의 굶어죽게 되자 향 득은 다리를 베어 봉양했다. 그 고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리어 경덕왕이 벼 5백석을 주었다.
4)손순 埋兒
손순은 모량리 사람이니 아버지는 학산이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양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의 이름은 運烏였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 는데 항상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손순은 민망히 여겨 그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소. 그런데 아이가 어머님 음식을 빼앗아 먹어서 어머 님은 굶주림이 심하시니 이 아이를 땅에 묻어서 어머님의 배를 부르게 해 드려야겠소.' 이에 아이 를 업고 취산 북쪽 들에 가서 땅을 파다가 이상한 석종을 얻었다. 부부는 놀라고 괴히 여겨 잠깐 나무 위에 걸어놓고 시험삼아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은은해서 들을만 하였다. 아내가 말했다. '이 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필경 이 아이의 복인 듯 싶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습 니다.' 남편도 이 말을 옳게 여겨 아이와 석종을 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종을 들보에 매달고 두드 렸더니 그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 소리를 듣고 좌우를 보고 말했다. '서쪽 들에 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도 멀리 들리는 것이 보통 종소리가 아니니 빨리 가서 조사해 보 라.' 왕의 사자가 그 집에 가서 조사해보고 그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왕은 말했다. '옛날 곽거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에서 금솥을 내렸더니, 이번에는 손순이 그 아이를 묻자 땅 속에서 석종이 솟아 나왔으니 전세의 효도와 후세의 효도를 천지가 함께 보시는 것이로구나.' 이에 집 한 채를 내리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순후한 효성을 숭상했다. 이에 손순은 예전에 살던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아 弘孝寺라 하고 석종을 모셔 두었다. 진성왕 때에 후백제의 횡포한 도둑이 그 마을에 쳐들어 와서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았다. 그 종을 얻은 땅을 完乎坪이라 했는데 지금은 잘못 전 하여 枝良坪이라고 한다.
5) 貧女養母
효종랑이 남산 포석정에서 놀고자 하자 문객들이 모두 급히 달려왔으나 오직 두 사람만이 뒤늦 게 오므로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들이 대답했다. 분황사 동쪽 마을에 여인이 있는데 나이 는 20세 안팎이었습니다. 그는 눈이 먼 어머니를 껴안고 통곡하므로 같은 마을 사람에게 그 까닭 을 물으니, 말하기를 이 여자는 집이 가난해서 빌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한지가 이제 여러 해가 되 었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걸식해다가 살리기도 어렵게 되어 이에 남의 집에 가서 품을 팔아 곡 식 30석을 얻어서 주인집에 맡겨 놓고 일을 해왔습니다. 날이 저물면 쌀을 싸가지고 집에 와서 잠을 자고 새벽이면 주인집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한 지 며칠이 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전일에 강비(몹시 거친 음식)를 먹을 때는 마음이 편하더니, 요새 쌀밥을 먹으니 창자 를 찌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치 못하니 어찌된 일이냐'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사실대로 말했더 니 어머니는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여인은 '자기가 다만 어머니의 구복의 봉양만을 하고 부모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지 못함을 탄식하여 껴안고 울고 있는 것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것을 구경하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효종랑은 이 말을 듣고 측은해하여 곡식 100석을 보냈다. 낭의 부모 또한 옷 한벌을 보냈으며, 수많은 낭의 무리들도 곡식 1000석을 거두어 보내 주었다. 이 일이 왕에게 알려지자 그 때 진성왕은 곡식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려 주고 또 군사를 보내어 그 집을 호위해서 도둑을 막도록 했다. 또 그 마을을 표창해서 孝養里라 했다. 그 뒤에 그 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고 兩尊寺라 했다.

<효행과 관련된 사례>

1)향덕
향덕은 신라의 웅천주 板積鄕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善이요 자는 番吉인데 천자가 온순하 고 선량하여 온 고을이 그 행실을 추앙하였고 어머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다. 향덕 또한 효도 와 공순으로 당시에 칭찬을 받았다. 경덕왕 14년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유행병마저 더 하여 부모가 주리고 또 병든데다 어머니는 또 옹질이 발생하여 모두 죽게 되니 향덕은 밤낮으로 입은 옷을 벗지 아니하고 정성을 다하여 위안하며 봉양할 것이 없어 자기 볼기살을 베어 먹이기 도 하고 또 어머니의 옹질을 입을 빨아서 낫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에서는 주로 보고하고 주에 서는 왕께 보고하니 왕은 명령을 내려 벼 3백 가마, 집 한 채, 식구 수에 따라 전 얼마씩을 주게 하고 관원을 시켜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여 표본으로 삼게 하였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 땅 을 孝家里라고 부른다.

2)성각
성각은 신라 菁州 사람인데 역사에는 그 씨족이 전하여 지지 않았다. 성각은 세상의 명예나 벼 슬을 즐겨 하지 않고 스스로 거사라하며 일리현 법정사에 의지하였다. 뒤에 집에 돌아가 어머니 를 봉양하는데 어머니가 늙고 병들어 나물밥을 먹기 어려우므로 자기 다리의 살을 베어 먹였고 죽게 되자 지성껏 불사를하여 재를 올렸다. 대신 각간 경신, 이찬 주원 등이 국왕에게 아뢰니 왕 은 웅천주 향덕의 고사에 의하여 근현의 벼 3백석을 상주었다. 사신은 논한다. 宋祁의 당서에 [착 하도다. 韓愈의 論이여 '부모가 병들면 약을 달여 쓰는 것을 효라 하는 것이요, 자기의 신체를 베 어 먹인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것이 진실로 義에 손상되지 않는다면 성현이 모든 사 람보다 앞서 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그로 인하여 불행히 죽게 된다면 毁傷滅絶의 죄를 범하게 되 는 것이니 무엇이 정문을 세워 특이하다고 표할 수 있으랴.] 비록 그러하나 고루한 시골 사람이 학술과 예의의 바탕이 있지도 않은데 능히 제 몸을 버리고 어버이를 생각한다는 것은 성심에서 우러난 것이니 역시 칭찬할만하다. 그러므로 열거하는 것이며 향덕같은 자는 역시 써서 전함직하 다.

3)효녀 지은
효녀 지은은 신라 한기부 백성 連權의 딸인데 천성이 효도에 지극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 고 홀로 그 어머니를 봉양하여 나이 32세가 되었으되 시집을 가지 않고 혼정신성하여 좌우를 떠 나지 아니하며 봉양할 것이 없으면 품팔이도 하고 혹 나가서 밥을 빌어다 먹이기도 하였다. 그러 기를 오래 하자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여 부자집을 찾아가 종으로 팔리기를 자원하여 쌀 10여석을 얻어 두고 종일토록 그 집에서 일하다가 저녁이면 밥을 지어가지고 와서 봉양하여 삼사 일을 지 났다. 그 어머니가 딸더러 이르기를 '지난 날에는 밥을 먹어도 달았는데 요즘은 밥은 좋으나 맛이 전만 못하고 마치 칼로 심장을 에는 것 같으니 이것이 무슨 심사냐'하니 딸이 실정을 말하였다. 그 어머니는 '나 때문에 네가 종이 되었으니 내가 빨리 죽는 것만 못하다.' 하고 이내 소리를 놓 아 크게 우니 딸도 따라 울어 슬픔이 길가는 나그네를 감동케 하였다. 그 때 효종랑이 구경나왔 다가 보고 돌아가 부모님께 청하여 조 백 석과 의복 등속을 실어 보내주고 또 買主에게 변상하여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게 하였다. 낭도 수천 명이 각기 조 한 섬씩을 내어 보내니 진성왕이 듣고 벼 5백 석과 집 한 채를 주고 호세와 출역을 없애며 곡식이 많아서 도둑해 가는 자가 있을까 염 려하여 소속 관원에게 명령하여 병정을 번갈아 보내어 지켜 주게 하고 그 마을에 푯발을 세워 孝養坊이라고 하고, 이어 표문을 지어 그의 아름다운 행실은 당나라의 덕화가 미쳤기 때문이라 하 였다. 효종랑은 당시 셋째 재상의 서발한 김인경의 아들이었는데, 그의 어릴 때 이름이 化達이었 다. 왕이 생각하기를 나이는 비록 어리나 어른처럼 보인다하여 곧 왕의 형인 헌강왕의 딸로서 아 내를 삼게 하였다.


4)설씨녀
설씨녀는 신라 율리 민가의 여자이다. 비록 외롭고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안색이 단정하 고 지행이 순결하여 본 사람치고 부러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진평왕 때 그 아버지가 늙은 나이로 군에 편입되어 정곡이란 곳에 수자리 살러 가게 되자 그녀는 늙고 병든 그 아버지를 차마 멀리 이별할 수도 없고 또 여자의 신분이라 모시고 따라 갈 수도 없어 그 저 답답히 여기고만 있었다. 사량부에 사는 소년 嘉實은 비록 가난한 집안이지만 교양이 있는 바 곧은 사나이다. 일찍이 설씨를 좋아하고 있으나 감히 말은 못하더니 설씨가 자기 어름이 종군하 는 것을 근심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찾아가 설씨에게 청하기를 "내가 비록 용렬하지만 항상 의 기있는 사람이라 자처해왔다. 못난 이 몸으로 귀택 아버님의 출역을 대신하고 싶다."라고 하므로 설씨는 대단히 기뻐하며 들어가 아버지께 아뢰었다. 아버지는 들어오라고하여 보고 말하기를 "듣 건대 그대가 노인의 역사를 대행한다 하니 기쁘고 송구한 마음을 견딜 수 없는 동시에 보답할 것 을 생각해야겠다. 만약 그대가 나의 어린 딸을 어리석고 고루하다고하여 버리지 않을진대 아내로 삼아주고 싶다"고 하였다. 가실은 두 번 절하며 "감히 바랄 수 없으나 그것이 저의 소원입니다"하 고 바로 물러가 혼기를 청하니 설씨는 "혼인은 사람의 대륜이니 갑자기 할 수는 없습니다. 첩이 이미 마음으로써 허락한 이상 죽어도 변함없으리니 낭군이 수자리에 나갔다가 교대하고 돌아온 뒤에 택일하여 성례하더라도 늦지 않소"하고 거울을 반으로 나누어 각기 한 조각씩 가지며 "이것 이 신표니 훗일에 마땅히 합칠 것이오"하였다. 가실이 진작 말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에 당하여 설씨더러 이르기를 "이 말은 천하에 없는 양마이니 뒤에 반드시 쓰게 될 것이오. 지금 내가 떠나 면 기를 사람이 없으니 여기 두고 길러 뒤에 쓰게 해주시오"하고 작별하고 떠났다. 마침 나라에 사고가 생겨 사람을 교대하지 않으니 아버지는 딸더러 이르기를 "처음에 3년을 기약했는데 지금 은 벌써 넘었다. 다른 성씨에게 시집가는 것이 옳겠다"고 하니 설씨는 "그 때 부친을 평안케 하기 위해 굳이 가실과 더불어 언약하였기로 가실이 믿고 여러 해를 종군하여 기한과 노고를 견디며 하물며 적의 경계에 가까이 있어 손에 무기를 놓지 못하며, 호랑이 입에 접근하여 노상 씹힐까 걱정하고 있는 처지인데 신의를 버리고 식언을 한다면 어찌 인정이라 하오리까" 하고 " 끝내 아 버지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으니 다시 말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늙은 그 아버지가 그 딸이 장성한 몸으로 남편이 없다 하여 강제로 출가시킬 양으로 몰래 마을 사람과 약혼하고 날 짜까지 정하여 그 상대자를 데려오니 설씨는 굳이 항거하여 비밀히 도망가려 하다가 못 가고 마 구간에 들러 가실의 남겨둔 말을 보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때 가실이 교대하고 돌아왔는 데 얼굴이 바짝 마르고 의복이 남루하여 집안 사람이 몰라보고 딴 사람이라고 하였다. 가실이 바 로 앞에 나와 파경을 던져 주니 설씨는 받아 들고 흐느끼며 아버지 및 집안 사람이 매우 기뻐하 여 드디어 다른 날에 회합할 것을 언약하여 마침내 함께 해로하게 되었다.
내용출처: http://www2.kongju.ac.kr/hyo/our1.html

사람 사람] ``아버지 생명보다 소중한 건 없어요``

사격 선수 장미씨, 간 이식 위해 아테네 올림픽行 꿈 접어
운동 선수에게 최고의 꿈은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그 꿈을 접었다.

화성시청에서 사격 공기소총 선수로 뛰고 있는 장미(張美.24)씨가 아버지에게 간을 이식해주기 위해 올림픽 대표선발전 출전을 포기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실업 6년차로 1999~2000년 국가대표로 활약한 張선수는 지난달 아테네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준비하던 중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 장덕삼(52)씨가 간 경색으로 쓰러진 것이다.간 이식을 하지 않으면 석달 이상 살 수 없다는 `시한부` 선고가 떨어졌다. 張씨의 무남독녀인 張선수는 의사에게 "아버지에게 간을 이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연습 사격에서 400점 만점을 거푸 쏘며 아테네행의 기대를 부풀려왔지만 아버지의 목숨과는 바꿀 수 없었다.

지난달 15일 1차 대표선발전이 열리던 시간, 張선수는 간 조직검사를 위해 서울 중앙병원의 차가운 병실에 누워 있었다. 다행히 이식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달 25일 부녀는 나란히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아버지는 아직 중환자실에 있지만 張선수는 28일 일반 병실로 옮겼다. 그는 "수술이 잘 돼서 다행입니다. 올림픽이야 다음에도 나갈 수 있지만 아버지는 한 분 뿐이잖아요"라며 밝게 웃었다. 그는 또 "이번 일을 겪으면서 스스로 많이 성숙해졌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가을 전국체전부터는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겁니다"라며 사격선수로서 강한 집념도 드러냈다.

張선수는 2001년에도 `미담의 주인공`이 된 적이 있다. 그해 5월 서울월드컵 사격대회 국가대표로 선발됐지만 후배 강초현(갤러리아)선수에게 대표 자리를 양보한 것.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은메달리스트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강초현이 나서는 게 `대회 흥행` 에 도움이 된다는 사격계의 설득을 받아들인 것이다. 대신 그는 독일 뮌헨월드컵에 출전했다.

화성시청 사격팀의 안광춘 감독은 "체중이 많이 나갔던 장미가 지난 겨울에 맹훈련으로 감량에 성공했고, 기록도 좋았는데 아쉽다"며 "항상 밝고 동료들에게도 모범을 보이는 장미가 2008 베이징(北京)올림픽에는 꼭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張선수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는 경기도 체육회와 경기도 사격연맹 관계자들이 잇따라 방문, 격려금을 전달하며 빠른 쾌유를 기원했다.

정영재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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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아들이 아버지에 간이식



고등학생 아들이 자신의 간을 아버지에게 이식해 주위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주인공은 경기도 부천시 원미고등학교 2년학에 재학 중인 이정안(17)군.




이군의 아버지 현상(43)씨가 간경화 진단을 받은 때는 지난 2001년.

아들과 단둘이 살고 있는 이씨는 택시회사에서 3년간 기사로 근무한 뒤 겨우 개인택시를 몰게 됐지만, 간경화 진단을 받으면서 집안 형편은 걷잡을 수 없는 어려움에 빠졌다.

간경화 치료를 위해 개인택시 면허를 팔 수밖에 없었고, 저축한 돈도 모두 소진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씨의 간경화 증세는 간암으로 진행되면서 간이식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 같은 상황에 처하자 아들 이군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간을 아버지에게 기증키로 결정하고, 강남성모병원에서 혈액 및 조직검사 등을 받았다.

다행히도 이군은 아버지에게 간 기증이 가능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군은 간이식수술 등에 들어가는 3천500여만원을 감당할 수 없어 '간이식 적합' 통보를 받고도 2개월이나 애를 태워야만 했다.

그러다 이 군의 딱한 처지를 알게 된 강남성모병원과 KBS 1TV '사랑의 리퀘스트'가 수술비 일체를 지원키로 해 이씨 부자는 지난달 30일 수술대에 오를 수 있었다.

12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마치고 3일째를 맞는 이군 부자는 현재 특별한 부작용 없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고 의료진은 전했다.

강남성모병원 김동구 교수는 "부자의 건강상태는 양호하다"면서 "앞으로 2~3주 가량 회복기간을 거치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군 부자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3일 오후 7시 10분 KBS 1TV '사랑의 리퀘스트'에 방송된다.(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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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효도이고 어른공경을 안한 것



초등학교 교사가 교감 폭행 중상
경북 울진군내 모 초등학교 교사가 술자리에서 교감과 학교 운영비 문제로 시비끝에 교감을 폭행, 중상을 입힌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울진교육청이 진상조사에 나섰다.

1일 울진교육청에 따르면 지난달 17일 오후 10시께 울진군 온정면 모 초등학교 김모(50)교감의 사택에서 이 학교 김모(34)교사가 김 교감을 때려 눈주변의 뼈가 부러지는 등 전치 5주의 중상을 입고 포항시내 모 병원에 입원 치료중이다.
김 교사는 이날 오후 7시께 모 식당에서 동료교사 7-8명과 함께 신임교사 환영 회식을 하던 중 김교감과 학교 운영비 문제로 시비를 벌인뒤 이를 사과하기 위해 동료교사 1명과 함께 오후 10시께 김 교감의 사택을 찾아갔다가 다시 시비가 벌어져 김 교감의 얼굴을 때려 상처를 입혔다.
부상한 김 교감은 지난달 18일 병가를 내고 병원에 입원했으며, 김 교사는 지난달 31일 병원으로 찾아가 치료비 등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김 교감과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썽이 나자 이 학교 이모 교장은 지난달 31일 울진교육청에 폭행 사건을 보고했다.

두도자 울진교육장은 "뒤늦게 폭행사실을 보고받았다"면서 "폭행한 이유 등을 확인하기 위해 진상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울진=연합뉴스)



치매 노모 내다 버려 숨지게 한 40대 영장

치매를 앓아 오던 60대 노모를 낙동강 인근에 버려 숨지게 한 40대 패륜 아들이 경찰에 붙잡혔다.

부산 해양경찰서는 20일 치료비 때문에 생활이 힘들다는 이유로 요양원에 입원중인 노모를 내다 버려 숨지게 한 혐의(존속유기치사)로 김모(41.기능공.부산시 사상구 감전동)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해경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8일 오후 5시께 부산시 서구 아미동 모 정신요양원에서 치매 증세로 치료중인 어머니 황모(65)씨를 퇴원시킨 뒤 사하구 낙동강 하구둑 을숙도 광장에 버린 혐의를 받고 있다.

황씨는 이틀 뒤인 10일 오후 5시께 강서구 명지동 영남조선소 앞 해상에서 익사체로 발견됐다.

김씨는 "어머니가 5년전부터 정신분열증과 치매증세로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 왔으며 최근 욕창까지 발생해 거동하지 못하는 등 병세가 악화되면서 더 이상 치료비를 부담하기 힘들어 을숙도에 버려두고 도망쳤다"고 말했다.

해경 수사관계자는 "2남 4녀중 장남인 김씨가 어머니 요양비 18만원을 여동생 2명과 분담하면서 형제들간에 갈등을 빚어왔고 최근 욕창치료비를 형제들이 부담하기 않겠다고 버티자 김씨가 어쩔수 없이 납부했다"고 말했다.

해경은 김씨가 치료비와 요양비 등의 부담으로 생활고를 겪어 노모를 버린 것으로 보고 있으나 9년전 황씨 명의로 모 생명보험회사에 재해사망시 2천만원을 받을 수 있는 암보험(납입금 매달 6만5천400원)을 가입한 점으로 미뤄 보험금을 노리고 살해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배제하지 않고 조사중이다. (부산=연합뉴스



80대 실향민, 처지비관 자살
고향인 북한에 생전에 돌아가지 못하고 노약해진 것을 비관한 80대 실향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20일 오전 10시5분께 춘천시 소양로 2가 D여관 1층 객실에서 전모(89)씨가 숨져있는 것을 여관주인 이모(47)씨가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이씨는 "전씨가 지난 19일 오후 1시께 투숙하면서 '다음 날 오전 9시께 깨워달라'는 부탁을 받고 깨웠으나 인기척이 없어 들어가 보니 침대에 엎드려 숨져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숨진 전씨가 "통일이 되면 고향에 가서 죽으려 했는데 월남한 지 55년이 지난 지금 내 생전엔 통일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유서와 함께 "나이가 들어 연고도 없는 자신을 위해 장례비조로 써달라"며 동사무소장에게 70만원, 여관주인에게는 20만원을 남겼다고 밝혔다.

이에 경찰은 전씨가 연고도 없이 노쇠한 실향민인 처지를 비관해 극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중이다.

한편 경찰은 숨진 전씨가 유서에 자신의 성명과 생년월일을 남겼으나 신원 및 지문조회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 신원파악에 나섰다. (춘천=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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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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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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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j****
초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몰라요 ㅠ.ㅠ. 좀알려주세요

 

200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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