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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남평문씨 성숙공파 돌림자 문의드려요...
비공개 조회수 2,009 작성일2018.12.29
남평문씨 성숙공파 돌림자 문의드려요
할아버지 희자돌림으로 가운데셧구요
아버지가 균자 돌림으로 마지막이예요
저는 종자돌림으로 가운데입니다
오늘 아이가태어났는데 족보대로보면 영 .수. 흡 이 돌림자같은데요 위치는 마지막으로 해야하나요?? 중간으로해도상관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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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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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남평문씨 성숙공파 돌림자 문의드려요


할아버지 희자 돌림으로 가운데셧구요
아버지가 균자 돌림으로 마지막이예요
저는 종자 돌림으로 가운데입니다.


오늘 아이가태어났는데 족보대로보면 영 .수. 흡 이 돌림자같은데요 위치는 마지막으로 해야하나요?? 중간으로해도상관없나요?

 

답변 : 님은 남평 문씨이시군요. 돌림자를 쓰실때는 대종회에서 정해 놓은 배차배열(중간자와 끝자)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래 대동 항렬표에는,

 

조부님 : 33세 희(熙)⊙자 돌림이라 하셨고,

부친님 : 34세 ⊙균(均)자 돌림이라 하셨으며,

님은 :  35세손 종(鍾)⊙자 돌림입니다.

자식 :  36세손 ⊙영(泳)자 ⊙수(洙)자 ⊙흡(洽)자 돌림입니다. 돌림자는 끝자입니다.


님의 남평 문씨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행해서 올려드리니 참고하시기 바라며 한문을 쓰는 이유는 그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남평 문에 대한 정보입니다.

 

 

남평 문씨(南平 文氏)에 대()하여 

 

1. 남평 문씨(南平 文氏) 시조(始祖) : 문다성(文多省)

2. 남평 문씨(南平 文氏) 유래(由來) :

 

남평 문씨(南平 文氏) 시조(始祖) 문다성(文多省)에 관()해서는 탄생(誕生)에 관련(關聯)된 일화(逸話)가 있다. 472(신라 자비왕 15) 남평현(南平縣) ()쪽에 장자지(長者池)라는 큰 못가에 큰 바위가 솟아 있는데 그 위의 석함(石函) ()에 피부(皮膚)가 맑고 용모(容貌)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었다. 기이하게 생각된 군주(君主)가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불과(不過) 5세에 문사(文思)에 저절로 통달(通達)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총명(聰明)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달아 문()을 성()으로 삼게 하고 이름을 다성(多省)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그 후()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으로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져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남평(南平)으로 하였다.

 

 

3. 남평 문씨(南平 文氏) 본관(本貫) 연혁(沿革)

 

남평(南平)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시(羅州市) 남평(南平산포(山浦금천(金川봉황면(鳳凰面) 등 동부(東部) 지역(地域) 일대(一帶)의 옛 지명(地名)이다. 백제(百濟)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 지역(地域)이었는데, 신라(新羅)가 이 지역(地域)을 차지한 뒤에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을 두었다. 757(신라 경덕왕 16)에 현웅현(玄雄縣)으로 고쳐 무주(武州 : 光州)에 속()하게 되었다. 940(고려 태조 23)에 남평군(南平郡: 永平郡)으로 바꾸었고, 1018(현종 9)에 나주목(羅州牧)의 관할(管轄)이 되었다. 1172(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어 독립(獨立)했으나, 1390(공양왕 2) 화순감무가 겸()하여 통치(通治)하였다가 1399년에는 다시 감무(監務)를 두었다. 1413(태종 13) 군현제 개편(改編)으로 남평현(南平縣)이 되었다. 오산(烏山)으로도 불렸다. 1895(고종 32)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남평군(南平郡)으로 나주부(羅州府) 소속(所屬)이 되었다가 1896년 전라남도(全羅南道)의 관할(管轄)이 되었다. 1914년 군면(郡面) 폐합(廢合)으로 남평군(南平郡)이 폐지(廢地)되어 나주군(羅州郡)에 통합(統合)되고 1995년 통합(統合) 나주시(羅州市)가 되면서 나주시(羅州市) 남평면(南平面)이 되었다.

 

 

4. 남평 문씨(南平 文氏) 주요(主要) 세거지(世居地)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면 장암리

 

 

5. 남평 문씨(南平 文氏) 계파(系派) 및 분파(分派)

 

주요파는

 

2 공인(公仁) 충의공(忠㦤公)

2 공원(公元) 정경공(貞敬公)

2 가관(可觀) 불교조계종대선사

 

합문지후공 : 충혜공파. 강성군파. 감천군파

 

순평부원군 : 파주파. 이성파. 필천파. 염암파. 영보파. 서흥파. 대현파. 이사파. 남계파. 고성파. 창원파. 고품파. 오곡파. 광릉파. 지례파. 심묘파. 구정파. 천곡파 등이다.

 

충혜공파 : 모계파, 성후, 경후, 충후, 경서,

헌납공파 : 헌납공 어전 등, 수부파,

순질공파 : 14세 경혜공, 15세 현감공파, 16세 참판공파 경숙공파, 17세 고령공파 영해공파, 18세 면수제파, 19세 참판공파, 참의공, 21세 경암공파 22세 첨지공파 참판공파, 목사공파, 진사공파, 참의공파 암계파, 신창파, 영암파, 정주공파, 신제공파, 청도파, 우곡파, 백초당파, 노안파, 망제공파, 용계파, 해례파, 종남파, 남산파, 춘정파, 읍청파, 풍암파, 강진파, 총계당파, 좌윤공파, 주박공파, 사정공파, 박파, 추봉공파, 부사공파, 봉산파, 임파, 월천군파,

의안공파 : 중실 의안공,

시중공파 : 14세 판관파 1~47혈 등, 태길파, 대사성파, 15세 수산파,

성숙공파 : 중게 성숙공 1~60,

남제공파 : 화성이파, 칠머리파, 윤남굴파, 매촌파,

 

공유(公裕)

군사에 관한 사무를 맡아본 병부의 장관으로 문종 때 두었다. 1275(충렬왕 1)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 군부판서(軍簿判書)로 개칭하였다가 1298년 병조상서(兵曹尙書)로 고쳐 상서 2명을 두었고, 1308년 다시 군부판서로 복구하였다. 1356(공민왕 5)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면서 다시 병부상서로 환원되었다. 이후 다시 군부판서, 1369년 총부상서(摠部尙書)로 하였다가 1372년 군부판서로 환원하였다.

 

문다성의 17세손인 문극겸(文克謙)은 남평 문씨의 중흥지조로 불린다. 제주의 남평 문씨는 시조 문다성의 17세손인 충숙공 문극겸(文克謙)을 정점으로 남제공파(南濟公派)와 강성군(江城君)

 

충선공(忠宣公)파가 인맥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벌족을 이루고 있다.

 

문극겸에게는 벼슬이 합문지후(閤門祗侯)에 오른 장자 문후식[충렬공]과 참지정사·

판예부사를 지낸 차자 문유필이 있었다. 충렬공 문후식은 문탄(文誕)과 문작(文綽) 두 아들로 인맥을 이었다. 이 문작(文綽)이 바로 제주도(濟州道) 입도조로서 남제공파를 형성한 파조(派祖)가 된다. 그리고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은 문탄(文誕) 6세손이 된다.

 

제주도 남평 문씨 남제공파 입도조 문작의 입도 시기는 고려 명종 24(1194)에 해당된다. ((() 삼성이 지배하던 탐라에 문작의 입도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고려 조정이 탐라에 문교(文敎)가 빈약함을 안타깝게 여겨 대제학인 문작을 특파하여,

도민 교화 및 흥학의 바탕을 마련하도록 배려한 것이 입도 동기가 된다.

··부의 토착민을 제외하고는 제일먼저 입도 정착한 육지인라는 전통과 함께

제주에서는 고·양씨 다음가는 영화를 누린 가문이 된다.

 

 

 6. 남평 문씨(南平 文氏)역대(歷代) 중요(重要) 인물(人物)

 

문인위(文仁渭)

(高麗 ?1019(현종 10). 고려의 문신. 목종 때의 궁사(宮使). 본관은 장연(長淵). 오랫동안 천추궁(千秋宮:千秋太后 )의 사(使)로 있었는데 성실하고 꾸밈이 없었다. 김치양(金致陽)의 무리가 숙청될 때 천추궁의 궁료(宮僚)가 많이 연좌되어 죽고 귀양 갔으나, 문인위만은 강조(康兆)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1009(현종 즉위년)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고, 2년 뒤인 1011년 우복야(右僕射)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으며, 1019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타계하셨다.

 

문정(文正)

(高麗)

본관 장연(長淵). 시호 정헌(貞獻). 문종 초기에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병부시랑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형부상서 ·참지정사(參知政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다. 1080(문종 34) 행영병마판사(行營兵馬判事)로서 동여진(東女眞)을 정벌, 그 공으로 추충찬화탕구정새공신(推忠贊化蕩寇靜塞功臣)에 책록되었고, 검교사도 문하시랑평장사 판상서예형부사 겸 태자태부 상주국 장연현개국백(檢校司徒門下侍郞平章事判尙書禮刑部事兼太子太傅上柱國長淵縣開國伯)에 봉하여졌다. 선종 때 수태위문하시중(守太尉門下侍中)이 되었다. 만년에는 사학을 열어 12공도(公徒)의 하나인 정헌공도(貞獻公徒)를 세웠다. 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문 익(文 翼)

(高麗 諡號 : 敬節 官職:右散騎常侍)

문종 때 문과에 급제, 1098(숙종 3) 좌우찬선 대부를 거쳐 급사중에 이르렀다. 이듬해 고주 겸밀진사로서 원자 책봉을 청하려고 요나라에 다녀왔다. 1102(숙종 7) 직문하성으로 서북면 병마사가 되고 1103년 우산기상시에 올랐다.

 

문공인(文公仁)

(高麗 初名 : 公美 諡號 : 官職 : 平章事 南平伯)

문과에 급제, 1115(예종 10) 호부시랑으로서 사은 겸 진봉부사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우부승선을 거쳐 1117(예종 12) 전중소감우승선 겸 태자 우찬선, 1122년 예빈소경추밀원 지주사, 이 해 인종이 즉위하자 추밀원 부사가 되었으나. 최사전(崔思全)의 모함으로 권신 이자겸(李資謙)에 의해 충주로 유배되었다.

1126(인종 4) 이자겸이 몰락하자 이듬해 이부상서예부상서지제고동지추밀원사 등을 거쳐 1129(인종 7) 지문하성사판상서형부사참지정사에 이르렀다. 1131년 판병부사를 거쳐 검교사도중서시랑 평장사감수국사판국자감사 등에 오르고, 상주국 남평현개국 백에 식읍 삼천 호, 식실봉 삼백 호를 받았다.

 

문공원(文公元)

(高麗 諡號 : 貞敬 官職 : 平章事)

음보로 기용되고, 예종 때 문과에 급제, 인종 때 우정언지제고에 발탁, 1130(인종 8) 전중시어사로 지어사대사 이주연(李周衍)과 함께 시폐를 상언하여 시정토록 하였다. 1135(인종 13) 낭중으로 금나라에 가서 만수절을 축하, 1148(의종 2)어사대부지추밀원사판삼사사가 되었다. 1150(의종 4) 지공거로 전선을 관장, 참지정사를 거쳐 판형부사가 되고, 이어 중서시랑평장사판이부사에 올라 수사공이 되었다. 1152(의종 6) 서경유수가 되고, 그 후 문하시랑 동평장사로 치사했다.

 

문공유

(고려 : 亢迪 諡號 : 敬靖 官職 : 判三司事

문과에 급제, 1122(예종 17) 합문지후로서 최사전의 모함으로 권신 이자겸에 의해 형 공인가관과 함께 유배, 뒤에 복직되어 사신으로 금나라에 다녀왔다. 1133(인종 11) 시어사로서 묘청(妙淸)의 도참설에 현혹된 인종에게 상소를 하다 충주목 부사로 좌천되었다. 1148(의종 2) 시우산 기상시보문각 학사서북면 병마사를 거쳐 이듬해 시형부상서판삼사사에 이르렀다. 1151년 지추밀원사예부상서형부상서동북면 병마부사를 지내고 남평개국자에 식읍 3백호를 받았다. 글씨에 능하여 묘향산 보현사 창사비문을 썼다. 그의 서풍은 당송간에 드날렸으며, 서체는 북송의 4대가 채양(蔡襄)의 서풍을 바탕으로 하여 개성을 살렸고 해서 전성시대에 행서 비문으로 회유 가치가 있다. 남평의 장연서원(長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극겸(文克謙)

(高麗 字 : 德柄 諡號 : 忠肅 官職 : 平章事

음보로 산정도감 판관으로 있다가 의종 때 문과에 급제, 좌정언이 되어 환자 백선연(白善淵)을 탄핵 하다가 도리어 황주판관진주판관으로 좌천되었으나 이는 언로를 막는 일이라는 유사의 상주로 합문지후로 전임, 전중내급사로 승진되었다. 1170(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앞서 좌정언으로 직언하여 좌천된 일로 해서 화를 면했고, 의종 역시 그의 말을 좇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한다. 이 해 명종이 즉위하자 우승선어사중승이 되어 많은 문신들을 화에서 구해내고, 무신들로부터는 고사의 자문을 받았고, 용호대장군을 겸임, 후에 상장군까지 겸하여 문무 겸직의 시초가 되었다. 대부소경예부시랑추밀원 부사태자태보를 거쳐 1183년 중서시랑평장사판호부사가 되고, 1187(명종 17)권판상서 이부사가 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남평의 장연서원에 제향되었다.

 

문후식(文候軾)

(高麗 諡號 : 忠烈 官職 : 兵馬使)

1177(명종 7) 문과에 급제, 한림원 학사로 여러 관직을 거쳐 합문지후이부시랑전중내급사를 역임하고, 1198(신종 1) 대부경 동북면 지병마사가 되었다.

 

문유필(文惟弼)

(高麗 諡號 : 孝惠 官職 : 參知政事)

명종 때 추밀원사를 거쳐서 고종 때 판삼사사가 되었다. 1221(고종 8) 수사공 좌복야, 이듬해 지문하성사가 되고, 1227(고종 14) 참지정사판예부사를 지냈다. 남평의 장연서원에 제향되었다.

 

문극검(文克儉)

(高麗 字 : 貞夫 諡號 : 靖烈 官職 : 禮部尙書)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 좌정언좌사의를 지내고, 1314(충숙왕 1) 판도판서를 거쳐 개성윤이 되었다.

 

문숙선(文叔宣)

(高麗 字 : 德芳 號 : 淸道 諡號 : 忠貞 官職 : 提學)

1351(충정왕 3) 문과에 급제, 한림원 학사좌정언지제교사간원 헌납으로 원종훈에 책론되고, 보문각 제학을 지냈다.

 

문달한(文澾漢)

(高麗 諡號 : 忠翊 官職 : 贊成事)

우왕 때 대호군이 되고, 동지밀직사사 때 추성익조공신이 되었으며, 지문하성사를 거쳐 1388(우왕 14) 문하평이로서 양광경상도 도체찰사로 왜구 1천여 명이 옥주보령 등지를 침범하고 개태사에 침입, 계룡산 일대를 노략질하자 왕안덕(王安德) 등 여러 장수와 함께 적을 대파하였다. 후에 우왕의 비위에 거슬려 삭직되었다가 다시 문하평리기 되어 추충익대보조공신의 호를 받고 찬성사가 된 후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다. 김제의 저산서원(楮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재도(文載道)

(高麗 官職 : 平海郡事)

1382(우왕 8) 왜적 수천 명이 영천지방에 쳐들어와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 그는 아버지를 업고 산골에 가 숨었는데. 왜적이 찾아와 아버지를 쏘아 맞혔다. 곧 살촉을 뽑고 칼을 휘둘러 왜적을 베었더니 왜적들이 굴복했다.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명정되었다.

 

문세봉(文世鳳)

(高麗 諡號 : 康獻 官職 : 判典農寺事)

문장과 도학이 뛰어났으며, 1375(우왕 1) 나주 목사를 거쳐 판전농시사에 이르렀다.

 

 문익점(文益漸)

(高麗 字 : 日新 號 : 思隱 又 三憂堂 諡號 : 忠宣 官職 : 提學)

초명은 익첨(益瞻), 경덕재에서 수학하였다. 1360(공민왕 9) 문과에 병과로 급제, 직강박사 등을 거쳐 좌정언으로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다. 원나라 순제는 최유(崔濡)가 추대하는 덕흥군을 왕위에 대립시킬 계획으로 공민왕 폐위에 가담하기를 권유하였으나 불사이군의 충절을 내세워 강경히 거절, 이로 인하여 운남성(交趾)으로 유배되었다. 원 순제는 후에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석방, 귀국케 하였는데 당시 금수품으로 되어 있던 목화씨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에서 재배, 우리나라 의류 및 경제상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은 충의에 감복하여 중현대부 예문관 제학에 임명하였으며, 1375(우왕 1) 좌사의대부우문관 제학동지경연사에 오르고 시무팔조를 상소하였다. 그 후 전제개혁에 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이림(李琳) 등의 편을 들어 병을 핑계러 서명하지 않으므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사직, 낙향(落鄕)하여 삼우의 뜻을 품고 은거(隱居)하였다. 고려(高麗)가 망()하자 9년간이나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고 이태조가 친히 불렀으나 굳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효행(孝行) 또한 지극하여 왕의 특명으로 효자비가 세워지고 그가 사는 동네 이름을 효자리라 명명하였다. 성리학에도 밝았다. 태종 때 참지의정부로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지고 부조묘를 세웠으며, 1440(세종 22) 영의정에 추증, 부민후(富民侯)에 추봉되었다. 1461(세조 7) 사당이 세워졌다. 남평의 정연서원(長淵書阮), 산청의 도천서원(道川書阮)에 제향되었다. 문익점(文益漸)의 후손(後孫)인 강성군파(江城君派) 가문(家門)이 가장 번성했다.

 

남평 문씨(南平 文氏) 강성군파(江城君派) 족보계보(族譜系譜) 12세손 문익점(文益漸)

 

 

문달한(文達漢)

(高麗)

우왕(禑王) 때 대호군(大護軍)이 되고, 밀직사동지사 재임시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에 책록되었다. 1388(우왕 14)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양광경상도도체찰사(楊廣慶尙道都體察使)로 나갔을 때, 옥주(沃州) ·보령(保寧) 등을 침략하여 계룡산 일대를 노략질한 1000여 명의 왜구를 왕안덕(王安德) 등과 함께 추격, 공주 반룡사(盤龍寺)에서 대파하였다.

사소한 일로 우왕의 미움을 사게 되어 삭직되었다가, 최영(崔瑩) 등의 노력으로 문하평리에 복직,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이어 탐학이 심하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합포 ·철원 등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이림(李琳)의 일파로 탄핵되어 다시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 1392(공양왕 4) 순평군(順平君)에 책봉되었다. 김제 저산서원(楮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중성(文中誠)

(高麗 諡號 : 純質 官職 : 諫議大夫)

1385(우왕 11) 5월에 문과에 급제, 한림원 학사가 되고, 합문지후간의대부로 사직했다. 창왕 때 병부상서에 임명됐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405(태종 5) 강성군의 후예라 하여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문중계(文中啓)

(高麗 號 : 滄洲 諡號 : 成淑 官職 : 禮部尙書)

문과에 급제하고 예부상서가 되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은거, 1395(태조 4)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문효종(文孝宗)

(朝鮮 諡號 : 胡簡 官職 : 判中樞院事)

음보로 등용되어 좌군총제를 지내고, 1425(세종 7) 진향 겸 등극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판중추원사를 지내고 치사, 궤장을 하사 받았다.

 

문 화(文 和)

(朝鮮 字 : 養中 : 晩隱 諡號 : 景惠 官職 : 都承旨)

1397(태조 6) 낭증이 되고, 승정원 도승지예문관 직제학상서원정경연참찬관춘추관 수찬관 등을 지냈다.

 

문 빈(文 彬)

(朝鮮 諡號 : 平翼 官職 : 僉節制使)

1400(정종 2) 2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고, 1401(태종 1) 좌명공신 4등으로 월천군(越川君)에 봉해졌다. 1409년 풍해도 첨절제사를 지냈다.

 

문 래(文 萊)

(朝鮮 字 : 子蓬 號 : 理谷 諡號 : 靖惠 官職 : 學者)

경사에 통하고 천문지리음양산수척도등에 밝았으며, 물레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문 영(文 英)

(朝鮮 號 : 海隱 諡號 : 襄敏 官職 : 直提學)

1393(태조 2) 문과에 급제, 홍문관 교리를 거쳐 직제학이 되었다. 그는 베 짜는 방법을 창안해 냈는데, 베가 되어진 것을 문영(文英)이라 한 데서 무명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문천봉(文天奉)

(朝鮮 字 : 以敬 官職 : 漢城判尹)

1400(정종 2) 사복시 부정으로 방간(芳幹)의 난 때 태종을 호위한 공으로 포상을 받고, 한성판윤을 지내고, 개령군(開寧君)에 봉해졌다.

 

문 민(文 敏)

(朝鮮 官職 : 判通禮門事)

1431(세종 13) 호군을 거쳐 1441년 판서운관사, 이듬해 판통례문사에 이르렀다. 딸이 세종의 친선으로 세자의 승휘(承徽)가 되었다.

 

문충세(文忠世)

(朝鮮 官職 : 右都知管)

1402(태종 2) 세습되어 온 탐라국의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를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 문충세를 우도지관으로 삼았다.

 

문승서(文承瑞)

(朝鮮 字 : 顯照 官職 : 水軍節度使)

무과에 급제하고, 부승지로 공충도 수사를 지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녹훈되었다.

 

문치창(文致昌)

(朝鮮 官職 : 監察)

문종 때에 사헌부 감찰이 되고, 1455(세조 1) 노산군(단종)의 화를 구하려다가 연폄되었다. 1461(세조 7) 국형을 받았으나 충신의 후예라 하여 사유되어 구성으로 유배되었다. 저서에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가 있다.

 

문여령(文汝寧)

(朝鮮 官職 : 監察)

1427(세종 9)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 검열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황제로부터 의대를 상으로 받고 귀국 후 홍문관 교리헌납이 되었다.

 

문상행(文尙行)

(朝鮮 諡號 : 敬肅 官職 : 禮曹參議)

생원으로 1411(태종 11) 문과에 급제, 판관주부를 거쳐 용담현령에 이르렀다. 뒤에 예조참의에 올랐다.

 

문회지(文繪地)

(朝鮮 號 : 錐錁齋 官職 : 學者)

사마시에 장원하여 생원이 되었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가 피화되자 은거하여 도학에 전념, 실천궁행에 힘썼다.

 

문익성(文益成)

(朝鮮 字 : 叔 號 : 玉洞 官職 : 府使)

1549(명종 4) 사마시를 거쳐 1566(명종 21)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사헌부 지평과 성균관사예를 지냈다. 합천의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 치(文 致)

(朝鮮 字 : 思成 諡號 : 忠襄 官職 : 漢城判尹)

1506(중종 1)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 정국공신 4등으로 문원군(文原君)에 봉해졌으며, 한성판윤 겸 지의금부사를 지냈다.

 

문자수(文自修)

(朝鮮 字 : 道叔 號 : 勉修齋 官職 : 縣監)

세종 때 생원시에 합격, 1454(단종 2) 7월 장흥고 부직장에 이르고, 1455(세조 1) 12월 녹사로서 좌익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이어 곡성함열의 현감을 지내고 난향, 능주향교에다 사마재와 향사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했다. 능주의 삼현사(三賢祠)에 제향되었다.

 

문려(文 勵)

(朝鮮 字 : 子善 號 : 雲溪 官職 : 大司諫)

1553(명종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 정자가 되고,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토적의 공으로 2등 공신이 되고, 왕을 호종하여 선무공신 1등에 녹공 되었다. 헌납교리를 거쳐 대사간을 지냈다.

 

문경동(文敬仝)

(朝鮮 字 : 欽之 號 : 滄溪 官職 : 司成)

1495(연산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벼슬을 거쳐 비안현감강원도 도사를 역임, 종부시첨정으로 승진, 춘추관 편수관을 겸했다. 1508(중종 3) 양산군수가 되고 1510년 삼포왜란 때 왜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사성이 되었으며, 예천군수청풍군수를 지냈다. 시문에 뛰어났다. 영양의 창계서원(滄溪書阮)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창계집(滄溪集)이 있다.

 

문 걸(文 傑)

(朝鮮 初名 : 彬 字 : 彦章 官職 : 府使)

1480(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의정부 사록, 회덕영동의 현감, 헌납을 지내고 1499(연산군 5) 양양부사가 되었다.

 

문 근(文 瑾)

(朝鮮 字 : 士輝 號 : 梅溪 官職 : 參判)

사마시에 합격, 1495(연산군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고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여러 청환직을 역임하고, 김해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1508(중종 3) 금산군수로 치적을 올려 상을 받았다. 1516년 대사간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를 지냈고, 특히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신진사류로 중종의 신임을 받아 경상도 관찰사로 전직, 1910(중종 14)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처형을 통박하다가 파직되었다. 1521년 다시 참판에 기용 되었으나 또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용궁의 기천서원(箕川書阮) 제향되었다.

 

문 관(文 瓘)

(朝鮮 字 : 伯玉 號 : 竹溪 官職 : 掌令)

사마시에 합격, 1507(중종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안음현감으로 부임하여 전임인 정여창(鄭汝昌)과 같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전정(前鄭)후문(後文)이라고 찬양했다. 지평을 거쳐 1518년 주청사의 검찰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장령장악원 첨정을 지냈다. 용궁의 기천서원에 제향되었다.

 

문 위(文 緯)

(朝鮮 字 : 順甫 號 : 茅溪 官職 : 縣監)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대장 김면(金沔)과 함께 왜군과 싸웠다. 후에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동몽교관이 되고, 이어 선공감 주부감찰을 역임, 광해군이 즉위하자 낙향했다가 인조반정 후 고령현감이 되었다. 거창의 용원서원(龍元書阮)에 제향되었다.

 

문덕교(文德敎)

(朝鮮 字 : 可化 號 : 東湖 官職 : 刑曹佐郞)

1585(선조 1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전적형조좌랑을 지냈으며 문명이 높았다. 임진왜란 때 일가족이 왜적과 항거하다가 순절하였다.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阮)에 제향되었다.

 

문 삼(文 參)

(朝鮮 字 : 汝魯 號 : 白草堂 孝子)

진사로서 형 벽()과 함께 극효하더니 부모상을 당하여 3년 여묘할 때 근처의 초엽이 빛을 잃다가 3년 후에 복영하니 그 마을을 백초동이라 하였다. 장흥의 백동사(白洞祠)에 제향되었다.

 

문홍운(文弘運)

(朝鮮 字 : 汝幹 號 : 梅村 官職 : 進士)

 1612(광해군 4) 진사가 되고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원종훈에 책록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행의가 독실해서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 합천의 임천서원(臨川書阮)에 제향되었다.

 

문홍원(文弘遠)

(朝鮮 號 : 慕杜軒 官職 : 內禁衛將)

1603(선조 36) 무과에 급제, 임해군이 역모죄러 정배당하자 내금위장으로서 궁내의 경비를 맡아보다가 3개월 만에 불귀사(不歸詞)를 짖고 고향에 돌아가 은거하였다.

 

문경호(文景虎)

(朝鮮 號 : 嶧陽 官職 : 察訪)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더불어 창의하였다.

 

문광복(文光福)

(朝鮮 字 : 仲綏 號 : 奎軒 官職 : 習讀官)

명종 때 진사가 되고 음보로 훈련원 습독관을 지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호섭(虎燮)과 함께 금산성 싸움에 참가, 왜적과 싸우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아들과 함께 순사하였다.

 

문위세(文緯世)

(朝鮮 字 : 叔章 號 :楓庵 官職 : 牧使)

1567(명종 22) 진사가 되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朴光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 조달 등으로 공을 세워 1595(선조 28) 용담현령이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읍민을 동원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많은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1600(선조 33) 파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의 아들 원개(元凱)영개(英凱)형개(亨凱)홍개(弘凱)가 모두 차의하니 충절의 모범이 되었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다. 장흥의 강성서원(江城書阮)에 제향되었다.

 

문홍헌(文弘獻)

(朝鮮 號 : 敬庵 官職 : 進士)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진사로서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금산에서 싸우다가 패하자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막하에서 진주성에서 집결한 의병장들과 합류하여 분전, 성이 함락되자 최경희와 함께 강에 자결했다.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되었다.

 

문희성(文希聖)

(朝鮮 號 : 止軒 官職 : 知中樞府事) 

1594(선조 27) 무과에 급제, 1597년 정유재란 때 전공을 세웠고, 광해군 때는 광주목사를 거쳐 방어사로서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요동 싸움에 출전하여 강홍립과 함께 후금에 투항했다. 화의 후 돌아와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문재도(文載道)

(朝鮮 字 : 戒器 號 : 休軒 官職 : 左水使)

1597(선조 30) 정유재란 때 백의로 관군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603(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3군 수령을 거쳐 경상좌도 수군절조사가 되었다.

 

문기방(文紀房)

(朝鮮 官職 : 守門將)

무과에 급제, 수문장을 지내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남원에서 싸우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격전 끝에 전사했다. 남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문석생(文石生)

(朝鮮 號 : 竹溪 官職 : 義兵)

1624(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막하에서 싸우다가 강도(江都)에서 순절했다.

 

 (文 晦)

(朝鮮 字 : 自明 官職 : 義禁府事)

1624(인조 2) 이괄의 난을 고변하여 진무공신 3등으로 오천군(鰲川君)에 봉해졌다. 동지의금부사를 지냈다.

 

문상례(文尙禮)

(朝鮮 官職 :將軍)

1627(인조 5) 정묘호란 때 의주 서성의 장군으로서 역전 끝에 전사했다. 구암사(龜巖祠)에 제향되었다.

 

문덕겸(文德謙)

(朝鮮 官職 :敎官)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병이 동래를 침공하자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역전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순절했다.

 

문희순(文希舜)

(朝鮮 號 : 太古亭 官職 :副護軍)

1636(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여산까지 갔다가 강화가 이루어지자 분개하여 고향에 태고정을 짓고 은거하였다.

 

문성흠(文聖欽)

(朝鮮 官職 :都摠管)

무과에 급제,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웠고, 벼슬을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다.

 

문수빈(文守彬)

(朝鮮 歌人)

숙종 때 김수장(金壽長)김천택(金天澤) 등과 함께 경정산 가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해동가요(海東歌謠)에 그의 시조가 전한다.

 

문동도(文東道)

(朝鮮 字 : 聖源 號 : 敬菴 學者)

일찍이 성리학을 강마하여 학행으로 문명을 떨쳤다. 숙종 때 후릉참봉과 세자익위사 부솔에 임명되었으나 불취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행의와 문장이 뛰어났다. 합천의 용연서원(龍淵書阮)에 제향되었다.

 

문도신(文道新)

(朝鮮 字 : 聖甫 官職 : 節制使)

영조 때 무과에 급제, 나숭대(羅崇大)의 반란이 있자 동생 도환(道桓: 구례현감)과 같이 토평, 그 공으로 부산 병마절제사를 지냈다.

 

문시룡(文始龍)

(朝鮮 字 : 賢之 官職 : 戶曹佐郞)

1753(영조 2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교검을 거쳐 예조좌랑호조정랑춘추관사가 되었다.

 

문봉익(文鳳翼)

(朝鮮 字 : 德徵 官職 : 禮曹參議)

1798(정조 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을 거쳐 예조참의가 되었다.

 

문응규(文應奎)

(朝鮮 官職 : 五衛將)

 1811(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공을 세워 그 공으로 오위장이 되었다. 의주의 학봉사(鶴峰祠)에 제향되었다.

 

문기호(文基浩)

(朝鮮 號 : 養吾 義士)

1811(순조 11)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정주에 가서 홍경래를 설득하려고 성에 들어가 난군을 초유하려다가 살해되었다. 의주의 학봉사에 제향되었다.

 

문학천(文學天)

(朝鮮 字 : 明普 號 白雲處士 學者)

천성이 고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친상에 삼년여묘할 때에 호랑이가 엄호했다. 이어 둔적하여 결초암(백운암)을 세운 후 비바람을 무릅쓰고 종신토록 조석으로 성묘를 했고 학문에 힘썼다. 정재규(鄭載圭)정의림(鄭義林)과 종유, 개탄시가를 지었으며 행의로 이름이 높아 세인이 백운처사라 일컬었다. 저서에 백운집(白雲集)이 있다.

 

문달환(文達煥)

(朝鮮 字 : 德卿 號 : 遯齋 義士)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 그는 스승을 따라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1906 6월 관군일군과 격전 끝에 패전하자 최후까지 스승을 따르다가 체포되어 12의사로 칭송되었다. 그 후 감옥에서 풀려나와 은거생활로 학문에만 전심, 1982년 독립유공자로 포상이 내려졌다. 능주의 부춘사(富春祠)에 제향되었다.

 

문태수(文泰洙)

(韓末 義兵將)

1908(융희 2)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호서 일대에서 활약, 호남 의병장이 되었다. 이듬해 지례군안의군용담군남원군 등지에서 일본군을 무찌르다 피체되어 사형당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문병현(文炳鉉)

(韓末 字 : 士日 抗日鬪士)

국운이 쇠퇴하여지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덕유산 원통사를 거점으로 군사를 양성하고, 박춘실(朴春實)을 선봉장으로 일본군과 싸워 큰 전공을 세웠다. 후에 체포되어 경성미결소에서 죽었다.

 

문석환(文奭煥)

(韓末 字 : 英伯 號 : 雲樵 抗日鬪士)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참판 민종직(閔宗直)과 더불어 창의하여 홍양에서 의거,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경성 감옥에서 대마도로 이송되고, 최익현(崔益鉉)과 옥중생활을 같이 하였다. 경술합방이 발표되자 울분으로 병을 얻어 죽었다.

 

문양목(文讓穆)

(韓末 獨立運動家)

미국에 건너가 대동보국회 회장으로 있다가 1908(융희 2) 한국정부의 외부고문 스티븐스가 귀국하여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보호정치를 찬양하자 이에 격분하여 재미 애국단체와 화합하여 진상규명 총대 4명의 한 사람으로 뽑혀 그를 방문, 여전히 일본의 보호정치를 지지함에 격분하여 구타했다. 이 해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등이 스티븐스를 살해하자 그들의 변호비용으로 의연금 7백 달러를 모금한뒤 판사 전담위원이 되었다.

 

문용기(文鏞祺)

(韓末 獨立運動家)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있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리역 광장에서 개최된 익산군민대회에서 연설, 궐기할 것을 호소하다 왜경의 칼에 찔려 순국했다.

 

문창범(文昌範)

(韓末 獨立運動家)

 시베리아에 망명한 후 1917년 쌍성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를 결성하고 그 회장이 되었다. 1919 4월 임시정부 수립 당시 국민의회 대표로 참여, 초대 교통총장이 되었다가 5 25일 개각 때 사임하고, 그 후에도 계속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문창수(文昌秀)

(韓末 獨立運動家)

유학자호 학문을 닦다가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항일(抗日)투쟁(鬪爭)을 전개, 나중에 일본군에 체포되어 악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눈알을 뽑히면서도 끝까지 항쟁하였다.

 

문창숙(文昌淑)

(韓末 獨立運動家)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참가하였고 나중에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하였다. 그 후 서로군정서에 들어가 부사를 거쳐 중대장이 되었고, 1923년에는 부하 하순경(河舜卿) 5명을 거느라고 평북 강계에 잠입,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의 밀정 홍종락(洪鍾洛)을 암살한 후 돌아갔으나, 재차 국내에 잠입하다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문창학(文昌學)

(韓末 一名 : 彦俊 獨立運動家)

일본 헌병보조원으로 있다가 전향하여 31운동에 참가하고 만주에 망명, 서로군정서에 가입,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국내에 밀파되어 신건원(新乾阮) 주재소를 습격하다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문명훤(文明烜)

(韓末 獨立運動家) 

31운동 때 맹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 1920년 임시정부 내무서기사 되고, 1921년 미국에 갔다가 1923년 귀국하여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3년간 복역했다.

 

문일평(文一平)

(韓末 號 湖巖 史學者)

1910년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치학부를 중퇴, 상해로 건너가 대공화보사에 근무했다. 뒤에 귀국하여 중동중앙배재송도 중학에서 교편을 잡고 중외일보 기자로 있다가 1933년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취임, 7년간 논설을 집필하고, 국사연구에 정진하여 많은 논문을 남겼다.

 

문세영(文世榮)

(韓末 號 : 靑嵐 한글학자)

배재교보를 졸업, 뒤에 배재고보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윤재(李允宰)와 함께 사전 편찬 사업에 종사했으며, 1939년 최초로 국어사전인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을 간행했다. 이듬해수정증보조선어사전(修正增補朝鮮語辭典)을 출판하고, 1954년 국어사전간행회에서 수정증보국어대사전(修正增補國語大辭典)으로 다시 개편하여 출판, 그 밖에도 여러 권의 국어소사전과 이와 유사한 사전을 간행했다.

 

1 : 문익(文翼)

중시조(中始祖)의 휘()는 익()  이시고 시호(諡號)는 경절공(敬節公)이시다 성품이 곧아 왕께도 직간을 서슴치 않았고, 국교(國交)가 불교(佛敎)인 상황(狀況)에서도  유교의 정대한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여 기대와 촉망을 받으셨다.

남평 문씨의 가장 오래된 기록인 휘() 공원(2) 선조의 지석과 묘지명에 근거하여 대종회 상고위원회에서 천강(天降)~() 12대는  의계로 처리하는 내용을 밝히고 합의하기를 경절공 () 선조(先祖) 1(중시조, 기세조)로 하여 대동보(大同譜)를 제작(製作)하고 재론하지 않기로 하였으나 남제공파는 불복하여 참여하지 않았고 이후(以後)에 발행(發行)된 남제공파보와 시중공파보에는 의계를 넣어 파보(派譜)를 만들었으나 대종회(大宗會)에서는 아무런 조치(調治)가 없었습니다. 2009년 남제공에서는 남제공파는 물론 충선공파까지 의계와 7-9대 문제(問題)까지 넣은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종회(大宗會)의 결정도 지켜볼 일입니다만, 대수를 다시 정의함은 일가님들께 혼란을 주는 일이나 겪어야 할 일이라면 빠른 것이 좋습니다.

 

중시조(中始祖) : ()

2 : 공유(公裕)

3 : 극겸(克謙)

4 : 후식(候軾)

5 : ()

6 : 양부(陽夫)

7 : 영희(永禧)

8 : ()

9 : 창우(昌祐)

10 : 공제(公濟)

11 : 승서(承瑞)

12 : 신보(臣補)

13 : 충세(忠世)

14 : 방지(邦智)

15 : 첩공(疊恭)

16 : 치정(致貞)

17 : () 칠머리파  

 

 

6. 남평 문씨(南平 文氏) 충선공(忠宣公) 순질공파(純質公派) 세계도(世系圖)

 

1 : 문익(文翼)

중시조(中始祖)의 휘()는 익()  이시고 시호(諡號)는 경절공(敬節公)이시다 성품이 곧아 왕께도 직간을 서슴치 않았고, 국교(國交)가 불교(佛敎)인 상황(狀況)에서도  유교의 정대한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여 기대와 촉망을 받으셨다.

남평 문씨(南平 文氏)의 가장 오래된 기록(記錄)인 휘() 공원(2) 선조(先祖)의 지석과 묘지명에 근거하여 대종회 상고위원회에서 천강(天降)~() 12대는  의계로 처리하는 내용을 밝히고 합의하기를 경절공 () 선조를 1(중시조, 기세조)로 하여 대동보를 제작하고 재론하지 않기로 하였으나 남제공파는 불복하여 참여하지 않았고 이후에 발행된 남제공파보와 시중공파보에는 의계를 넣어 파보를 만들었으나 대종회에서는 아무런 조처가 없었습니다.2009년 남제공에서는 남제공파는 물론 충선공파까지 의계와 7-9대 문제까지 넣은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종회의 결정도 지켜볼 일입니다만, 대수를 다시 정의함은 일가님들께 혼란을 주는 일이나 겪어야 할 일이라면 빠른 것이 좋습니다.

2 : 문공유(文公裕)

3 : 문극겸(文克謙)

4 : 문후식(文侯軾)

5 : 문정(文挺)

6 : 문중연(文仲連)

7 : 문장영(文章永)

8 : 문득준(文得俊) 의안공(毅安工)

9 : 문극검(文克儉) 정렬공(靖烈公)

10 : 문윤각(文允恪) 한림학사(翰林學士)

11 : 문숙선(文叔宣) 충정공(忠貞公) 4개파

12 : 문익점(文益漸) 충선공파(忠宣公派) 1 5분파 헌납공파(獻納公派), 순질공파(純質公派) 1, 의안공파(毅安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성숙공파(成淑公派)

 

충선공( 익점) 선조(先祖)는 충숙공의  몇 대손이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종전의 족보에는 충숙공의 7대손으로 기록하여 왔으나, 1983(임술)년과 1995(을유)년 발행된 대동보는 9손으로 기록하였습니다.6세 중연(仲連), 7세 장영(章永) 두분을 삽입하고 12세로 하니 9대가 되었습니다. 6세 중연(仲連) 선조는 생졸년과 배위 기록이 없고 벽상공신 상주국 문하시중이라 적었고, 7세 장영(章永) 선조도 생졸년과 배위 기록이 없고 문과 급제 후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여 다른 선조들의 기록에 비해 부실한 편입니다.

충선공 휘 익점 선조님은 아들 다섯 분이 계시며 후손(後孫)모임으로는

 

1. 장남계(長男係)인 헌납공파, 2. 4남계(四男係) 인시중공파, 5남계(五男係)인 성숙공파의 종회가 운영되고 있으며 차남계(次男係) 순질공파는 결성중이며 3남계(三男係)인 의안공의 후손 모임은 2004 12 28일 부산의 동래파종중(의안공 평파)에서 발의하여 창립준비 위원회를 개최하여 창립준비위원장과 위원을 선출하였습니다. 창립준비위원회에서 회칙과 세부사항을 의논하여 2006년도에 창립총회를 하였습니다. 첫 번째 사업은 의안공의 설단을 후손들의 성금으로 건립하는 일인바 소문중의 협조로 많은 진척이 있어 경남 산청이 헌납공 단비 옆에 설단작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13 : 문중성(文中誠)

14 : 문화(文和) 경혜공(景惠公)

15 : 문염(文琰) 현감공파

16 : 문상염(文尙廉) 첨지공파(첨지공파), 상능(尙能) 승지공파(승지공파) 상검(상검), 상덕(尙德), 경숙공파(경숙공파),

17 : (), (), () 고령공파, () 영해 부사공파

18 : 자수(자수)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무성공(武成公) 항렬표(行列表)

五一世

四四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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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六世

五四世

四七世

五五世

四八世

五六世

四九世

 

 

 

五七世

五十世


충선공(忠善公) 순질공파 상계도

 

순질공(중성)-영해부사공파2(참판공파, 참의공파)

 

수정작업은 전남 장흥의 남주님께서 하셨습니다. 교위공(23 응지가승보(2010년 발행 380) 입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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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公裕

극겸克謙

후식侯軾

중연仲連

장영章永

득준得俊

극검克儉

윤각允恪

숙선淑宣

익점益漸

중성中城

상행경숙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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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행尙行 (경숙공파 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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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부사공파 파조)

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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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감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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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사공)

(참판공)

(참의공)

구연

九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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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주致周

응주應周

필주弼周

계주繼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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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遇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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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천

위지

위세(풍암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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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개

영개

원개

형개

홍개

여개

괄개

월파

공파

문파

우곡파

백초당파

노안파

망제공파

용계파

해례파

종남파

남산파

춘정파

읍청파

 

 

 

 

 

 

강진

앞장으로 이동

 

 

 

 

 

 

 

 

남평 문씨(南平 文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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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남평 문씨(南平 文氏) 인구수(人口數)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남평 문씨는 118,491가구 총 380,530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2018.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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