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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5·18이 민주화 운동이 아닌가요.....
비공개 조회수 2,488 작성일2019.02.13
5·18이 민주화 운동이 아닌가요..?
살면서, 학교에서, 줄곧 민주화운동이고 그 덕에 자유롭게 살고 있는걸로 배웠어요 1987 영화도 그렇고..
근데 네이버 기사에 댓글이나 실시간 반응 뜨는거 있잖아오 거기엔 죄다 빨갱이 폭동이라고 세금 등쳐먹는 기생충이라고 욕만 써있던데...
518 유공자 명단이 있긴한가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돌아가셨을텐데 그분들 이름이 다 기록되는게 가능하긴 한가요?

1. 왜 정치쪽에서 갑자기 518문제가 대두됐는지
2. 518운동의 내면(실상, 팩트)
3. 보편적인 사람들의 생각 (언론의 생각) 현재 다수가 생각하는 이 사태의 대한 의견
4. 국가에사 518유공자에게 주어지는 혜택

3번 질문은 좀 애매한데ㅋㅋㅋ 네이버 기사라던지 유튜브댓글? 그런 네티즌들의 의견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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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신
1. 왜 정치쪽에서 갑자기 518문제가 대두됐는지

1980년에 일어난 518사태는 원래 법적으로도 폭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1995년에 갑자기 민주화운동으로 바뀝니다.

이 시기는 김영삼이 대통령이고 제 1야당의 수장은 김대중입니다.
문제는 이 두사람이 바로1980년의 소요사태를 사실상 선동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 시절의 소요사태에 이 두사람의 영향력이 있었는데 자기들이 잘못했다고 할리가 있겠어요?

사람들은 흔히 민주당이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바꾼것으로 아는데
아닙니다. 

현재의 자유한국당이 518특별법을 만들고,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 관련자들을 넘겨서
재판받게 하였고 이때 518이 민주화운동이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전에는 폭동이었던것이 민주화운동이 되려면 설득력있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시절 검찰의 기소된 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차용하면서 
재판상의 해석만 180도 바뀌었으니 이를 정치적 합의로 보고 
이를 인정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거죠.

자한당의 수장이었던 김영삼은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박정희 정권에 대들고
사람들을 부추켜 소요를 일으키던 사람이고 그런면에선
김영삼은 김대중과 전혀 다를바 없는 사람입니다.

자한당은 전두환+박정희당+김영삼당이 합쳐진 결과물이며 지금은 김영삼 라인의
사람들이 힘이 쎕니다. 이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먼저 민주당측에 건의해서
박근혜를 아웃시켰죠. 이들중 일부는 현재 바른미래당이고 일부는 자유한국당에 남아 있습니다.

자한당은 이념에 있어 민주당과 각을 세우고 있지만, 제가 볼땐 
반대를 위한 반대인것 같고요.(그나마 정치적인 책략)

박정희 시절 자기들이 부추키던 일들에 대해서 '민주화'라는 그 정체도 불분명한
용어를 덮어 합리화해왔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건국때부터 삼권분립의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가졌습니다.
국민들의 수준이나 정치인들의 수준이 법의 수준을 못따라워서 미숙한점이 있었지만
처음부터 민주공화국이었기 때문에

이를  '민주화'를 시킨다는 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행위를 합리화 시키기 위한 구호정도로
저는 이해 하네요.



2. 518운동의 내면(실상, 팩트)

김대중과 김영삼이 당시 최규하 대통령을 향해 대통령자리를 빨리 내놓을것을 요구하며,
불응시 전국적인 봉기 및 파업을 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전두환이 최규하를 설득하여 이들 체포작전에 나섭니다.  
1980년 5월 서울시내에 전국의 많은 운동권 대학생들이 분개하여 모입니다.

청와대까지 물리적으로 진격을 하려했으나 서울대총학생회장 생각엔
군인들이 진압작전에 나서면 개피 볼것 같아서 포기하고 해산합니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소요사태가 계속 진행됩니다.

당시 조선대 총학생회장이 관계기관에 납치되어 실종된것 같다는 루머의 확산등으로
흥분한 대학생들이 계엄령하에서 경계를 서던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며 도발을 시작합니다.
돌을 던지고 시내쪽으로 도망갑니다.

이에 맞서 국군은 몽둥이를 이용해서 강력한 진압작전에 나섭니다. 
젊은 남자들은 그냥 다 얻어맞았고 심지어 사망자도 발생합니다. 

국군이 민간인들을 진압한것은 대추리 사건등 노무현시절에도 있었던 일이나
문제는 일이 커져서 시민들이 버스로 경찰 4명을 깔아뭉게고, 군인도 이에 대해
자위권 조취로 총을 쏘는등 난리가 납니다.

시위대가 낫으로 군용 지프 차량을 14대를 탈취하여 반격을 시작합니다.
4시간만에 44곳의 광주지역 무기고를 탈취하여 총으로 무장을 하고
2종 운전면허자도 극히 드물던 시절에 장갑차와 군용차량 374대를 탈취하며 
몰고 다니는 일이 생깁니다.

물론 국군과 교전도 했습니다.

교도소를 수차례에 걸쳐 습격하는등 상황이 심각해지고 나중엔 전남도청에 TNT를 설치하고 국군과 대치합니다.

아래는 펀글입니다.
우파쪽에서 북한쪽 침입썰을 반박하기 위한 자료같은데 여기서 간접적으로
당시 무장한 시민군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짐작할수 있을것 같네요.


당시 국방부가 기록한 사건사례 일부.
- 5.20 밤10시경 콘티빵 특약점에 불을 지른다고 위협하여 100만원 상당 빵 강탈
- 5.21. 09시경 풍광식품 난입 몽둥이 휘두르며 빵 5천개 탈취
        10시경 금성센타 난입 경상도 사람 운영한다며 전자제품 방화
        13시경 양림동 등대주점에 시위청년 침입하여 현금 1백만원 강탈
        시민 협박 오늘 밤 쌀과 돈을 가지고 나오라며 서명을 받음
        비폭력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이 폭도 난동 만류하다 폭행 당함
- 5.22 황금동 박순휴 외과병원 폭도 2명 침입, 현금 귀금속 등 2백만원 강탈
        양동 우진아파트 침입 폭도 침구 강탈
        삼익아파트 주민 등 식사 제공 강요
        주유소에 들어가 탈취 차량에 강제 급유
        학동 지원동 일대 폭도들이 집을 비우라고 총기 위협 내쫒음
        목포 보해양조 현금 35만원, 행남사 1백만원 아세아전자 시계 10개 강취
        상점마다 음료수 빵 요구, 거절하면 쏘아버리겠다고 총구 들이댐
        가가호호 방문하여 사망자들 장례비 명목 금품 요구
- 5.25 11시경 황금동 금은방 병원 침입, 공포 위협 후 3백만원 강취
       오후 3시20분 광천동 양곡수송차량 1대 탈취
- 5.26 새벽 학운동 거주 최득춘 일가족 3명 살해=>가족간의 다툼이라고 합니다.
       황금동 박비뇨기과병원 폭도 3명 침입 공포 위협 후 3백만원 강취
       동명동 3가구에 무장 폭도 침입 재물 강취
 
안기부의 상황일지
5. 21.
 ․17:00∼20:00 한국낙농 급습, 매일우유 9백상자, 요구르트 1백만원 상당
 ․20:00∼23:00 삼립식품 식빵 676상자, 영일식품 식빵 86,592개
- 5. 22.
 ․08:45∼09:35 광산 서창, 아파트 침입 군인가족 색출
 ․10:00∼11:45 광주 일원, 민가 및 방위산업체 기습 약탈
 ․15:00∼20:00 도내 일원, 무장 폭도 도내 주민 살상
               해남, 식칼소지 폭도 10여명 계엄분소장 공관 침입 기도타 검거
               지산동, 광주 법원 앞 민가 침입 약탈(쌀 생필품 및 현금)
 ․ 20:00∼22:00 풍향동, 민가 약탈 강도 자행
- 5. 23.
 ․00:30∼05:00 함평, 문장고개에서 행인 대상 금품 탈취(계엄군 1명 검거)
               목포 응해, 민가침입 강도 약탈 자행(현금 40만원, 다이아 1개 등)
 ․06:00∼12:00 도청 앞, 무장폭도 시체 59구 전시 후 호별방문 장례비 강제징수
- 5. 25.
 ․08:00∼14:00 도청, 무장폭도 강경파간 내분 발생 총격전(민간인 2명 사망)
               황금동, 무장폭도 금은방 및 병원 침입 현금 3백만원 탈취
 ․14:00∼22:30 지원동, 무장폭도 민가침입 1가구 3명 사살
- 5. 26.
․07:55∼08:10 학운동, 무장폭도 민가침입 최득춘 등 일가족 3명 사살
              학운동, 무장폭도 의상실 침입 및 가족 3명 사살
              황금동, 폭도3명 청자여관 영향약국 해동식당 침입
              총기 난사 후 금품 약탈
  
*가족3명 살인 사건은 모두 같은 사건으로서 가족내 원한으로 인한 다툼이라 하네요.
어쨌든 탈취된 총기를 이용해 살인사건도 일어남.




아래의 사건들은 법원 판결문도 있다고 합니다.

○ 5.23. 01:00경 유동 소재 피해자 집에 침입하여 칼빈총으로 공포 1발을 발사한 후, 현금 12만원 강취
 · 동일 01:30경 신안동 소재 피해자 집에 침입 칼빈총으로 위협하여 현금 x만원 상당 강취(금액 판독 불가)
 · 동일 02:30경 임동 소재 김창길 집에 침입하여 칼빈총 16발을 발사하였으나 피해자 반항으로 미수(피고인 4명)
○ 5.23. 10:00경 양1동 소재 복개식당에 침입하여 주인 등 2명의 여자를 수류탄으로 위협하여 소주1홉을 무전취식하여 공갈
○ 5.26. 22:00경 주월동 테니스장 앞 길에서 피해자를 칼빈소총으로 위협, 금 114,000원 강취하고, 주월동 세탁소 골목길에서 또 다른 피해자로부터 시가 32만원 상당의 오토바이를 강취
 

*사실 저게 다가 아니고, 여기저기 기록이 많습니다만, 일단 제가 퍼온것에는 저것만 써있네요.



헌법재판소는 1995년 국민을 헌법기관으로 명명하고, 518때 시위대를 헌법수호를 위해 봉기했다고 정당화 시키며, 반대로  계엄군을 '폭도'라 정의를 내립니다. 그리고 이 판결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봉기했다는 시위대가 정작 김대중이 구속 되버리자 더 이상 시위 안하고 5공화국을 맞이한 이유는 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광주시위대의 요구는 유신잔당 물러가라는 요구도 있었거든요. 헌법을 수호할 목적이 맞다면 유신헌법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인 최규하의 계엄령을 따랐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이게 헌법수호 운동이라 생각 안합니다.



3. 보편적인 사람들의 생각 (언론의 생각) 현재 다수가 생각하는 이 사태의 대한 의견

지금 언론은 거의 민주화운동이라 합니다. 그 이상을 거론하거나 토론하는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위에 거론했듯이 김영삼, 김대중이 정권을 잡으면서 부터 그 반대파가 없어졌습니다.
당시의 계엄군을 편들어주거나 명예를 회복 시켜줄 세력이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 전두환과 개인적 앙금으로 518을 바로 잡기는 커녕
역대 정권 아무도 못했던 전두환 집의 가택수색까지 해버립니다.

사실 일반인들은 518에 대해서 거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전두환 정권내내 518 자체가 거론이 잘 안되었고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태우 시절부터 언론에서 거론되었을때는 
반대파들이 여론선점을 하여 군인이 민간인을 죽였다!! 는식의
감성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었을뿐.

당시 계엄당국의 입장이나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
누구도 가르쳐주지는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그 시절 사람들이 그러하니 지금 댓글다는 10대, 20대들이 하는 말은
거의 상상력에 가까운거죠. 

대부분 사람들은 여야가 합의했으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라고 생각하는것 뿐입니다.

201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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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

보기에따라 다른거죠 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잡은데에 반대하여 봉기가 일어났으니

봉기에 찬성한사람은 민주화운동이고 군부를 지지하면 폭동인거고

국회의원 공인이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해서 이슈가됬고요 군부정부였다고 민간인이

탄압받고 못사는 그런상황은 아녔던듯해요 그렇다고 518을 성역화하고

건들면 타도하는 잣대도 올타고는 보지않습니다

201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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