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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레지스탕스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2,741 작성일2011.06.25
레지스탕스는 어떤 집단이었나요?? 메이플스토리 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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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
은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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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스탕스(Resistance)란 프랑스어로 ‘저항’이라는 뜻이다.

주로 프랑스에서 활발했으며, 프랑스 외에도 베네룩스와 기타 북유럽 국가들에서도 레지스탕스들이 활약했다. 특히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시행될 때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는 파리에서 봉기를 일으켜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1945년 프랑스가 해방하면서 레지스탕스도 해체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넓은 뜻으로는 파시즘 정권에 대한 저항을 가리키며, 좁은 뜻으로는 프랑스인민의 독일점령군과 비시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을 가리킨다.

즉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하여 점령된 프랑스·덴마크·노르웨이·네덜란드·벨기에·유고슬라비아·체코슬로바키아·그리스·폴란드·소련 등의 유럽 제국()에서 비합법적으로 전개된 독일에 대한 저항운동을 가리킨다.

원래 레지스탕스는 침략당한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한 애국투쟁이었으나, 침략자인 독일이 나치즘이라는 인간 멸시의 전체주의적 체제를 그들의 점령 하에 있는 각국에게 강제하려고 하였던 점에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려는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각국의 레지스탕스는 각각 연합군의 대()독일전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특히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활동이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신을 믿는 자도 믿지 않는 자도, 반()체제주의자이거나 체제주의측 세력이거나를 막론하고 전체가 일치단결하여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조직하였으며, 1944년 6월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에 호응하여 문자 그대로 국민 총봉기를 결행하여 침략군 격퇴에 필사적으로 협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통일전선의 기초 위에 신()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활동기에 대해 살펴본다.

① 제1기(1940.6∼1941.6):1940년 6월 프랑스의 페탱 정부가 독일 침략군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을 때부터 1941년 6월 독 ·소 개전() 때까지이다. 프랑스가 항복하였을 때 너무나 비참한 패배의 모습에 프랑스 국민의 대부분은 오히려 안도의 숨을 내쉴 정도였다. 나중에 레지스탕스의 중심세력이 된 프랑스공산당까지도 당시의 독 ·소 불가침조약에 방해되어 대()독일 레지스탕스에 소극적이었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 있던 프랑스 국민에게 레지스탕스의 제1성을 외친 것이 당시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소장() C.드골이었다. 그는 1940년 6월 18일 밤, 런던에서 라디오를 통하여 승리의 희망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프랑스 국민에게 고하여,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불길이 꺼져 없어져서는 안 되며, 또한 꺼지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호소하였다. 드골은 처음에 런던에서 자유프랑스위원회(나중에 ‘싸우는 프랑스’로 개칭하였다)를 조직하여, 약간 남아 있던 해외식민지, 즉 적도() 아프리카 제국, 시리아, 레바논 등을 수중에 넣었으나, 당시의 프랑스 본국에서의 레지스탕스는 아직 미미한 상태였다.

② 제2기(1941.6∼1942.11):프랑스의 레지스탕스가 활발하게 움직이게 된 것은 1941년 6월 22일 독 ·소 개전 후부터이다. 그때까지 소극적이던 프랑스 공산당이 행동의 제1선에 나서 독일군의 암살과 군사시설 파괴 및 철도수송 방해 등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물론 희생도 컸지만, 레지스탕스가 참다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각종 저항운동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일을 실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하였다. 이 임무를 담당하여 그것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이 바로 드골의 전권대표로서 본국에 밀입국한 젊은 정치가 장 물랭이었다. 이 때를 계기로 런던의 자유프랑스와 국내 레지스탕스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강화하게 되었다.

제3기(1942.11∼프랑스의 해방까지):1942년 11월 8일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과 함께 국내 레지스탕스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갔다. 1년 반에 걸친 장 물랭의 헌신적 노력이 결실되어 마침내 1943년 5월 27일, 드골을 지도자로 한 ‘싸우는 프랑스’의 기치 아래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주요한 레지스탕스운동을 결집시킨 ‘전국저항평의회()’가 성립되었다. 이로 인하여 드골의 위신이 급상승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편으로는 레지스탕스도 또한 국민적인 운동으로 부상되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레지스탕스는 특별한 용기를 가진 소수의 엘리트만의 운동이 아닌 대중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점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일은 전황()의 약화에 따라 더욱더 위급해진 독일은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수십만의 프랑스인() 노동자를 강제 징용하였는데, 이들 중에서 기피자가 속출하고, 그들이 레지스탕스의 일대 저수지로 화한 것이다. 그들은 각지에서 ‘마키[:잠행자군]’를 형성하여 여러 형태로 독일점령군에 저항하였다.

1943년 초 그 숫자는 이미 4만 명 가량이나 되었고, 그로부터 1년 후에는 약 1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마키’의 무장화() 진행에 따라 국내에서의 모든 무장조직은 프랑스국내군(FFI:Forces Franaises de I’Intérieur)의 이름 아래 통합되어, 드골이 임명한 장군 케니그의 지휘에 복종하여 행동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상륙을 신호로 하여 FFI를 중핵으로 한 전국민적인 무장봉기가 개시되었으며, 연합군과 대치하고 있던 독일군의 배후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독일군의 패주()를 촉진시켰던 것이다. 특히 파리에서는 8월 18일 이래 전시민적 봉기가 시작되어 히틀러가 파리 방위 독일군 사령관인 장군 호르티츠에게 내린 파리 파괴령의 수행을 저지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4년간의 독일점령군에 협력하여 온 페탱 정부는 비참하게 붕괴되고, 9월 초 레지스탕스를 배경으로 한 드골의 프랑스공화국 임시정부가 파리에 수립되게 되었다. 

기타국가의 레지스탕스

독일 침략군에 점령되었던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레지스탕스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프랑스의 경우처럼 드골과 같은 초당파적인 위대한 인물 밑에서 레지스탕스의 국민적 통합이 실현된 나라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공산당 세력이 약하였던 벨기에·덴마크·노르웨이 등은 별도로 하고 그리스·폴란드·유고슬라비아에서는 소련과 관계를 맺은 공산당계 레지스탕스와 미국·영국 등과 관계를 맺은 반()공산당계 레지스탕스와의 대립이 심각하였다.

그리스에서는 공산당이 사실상의 지도권을 장악하던 민주주의정당의 연합조직인 인민해방군(ELAS)과 장군 제르발이 거느린 그리스민주국민동맹(EDES)과의 두 당파가 끊임없이 항쟁을 계속하였으며, 1944년 9월 발칸반도에서 퇴로가 끊겨질까 두려워한 독일군이 그리스에서 철수한 후에도 양자 사이에서 격렬한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 내전은 ELAS의 패배로 끝나게 되었지만, 그것은 처칠과 스탈린 사이에서 체결된 비밀협정에 의하여 ELAS가 스탈린에게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미하일로비치가 지휘한 레지스탕스와 티토가 지휘하는 레지스탕스가 서로 내부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미하일로비치가 패배하고 티토가 전()레지스탕스를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가장 비참하였던 것은 폴란드의 경우이다. 폴란드에서는 런던의 망명정부 지도하의 레지스탕스와 스탈린의 지지를 받은 폴란드공산당이 서로 대립하였으며, 1944년 8월 1일 전자가 바르샤바에서 독일점령군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스탈린이 이것을 방치하였기 때문에 수만 명의 시민이 독일군에게 학살당하였다. 이와 같은 저항운동도 오늘날에는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볼 수 있듯이 강력한 군사적 저항으로 변모하여 레지스탕스라기보다 빨치산이라 부르고 있다.  

201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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