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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레지스탕스의 정신?
비공개 조회수 838 작성일2009.07.07

레지스탕스의 정신이란 무엇인지 가르쳐주세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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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n****
수호신
세계사 24위, 한국사 70위, 사회학 1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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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프랑스'와 레지스탕스활동

 

(1) 드골의 자유프랑스 성립과 그 활동

전쟁초기 몇 군데에서 독일군의 진군을 저지하였던 드골도 결국 전체 패전의 기운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국방차관보로 마지막 전투를 지휘하던 드골은 독일협상을 주장하던 페탕 원수의 수상 취임 그 다음날 사실상 영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는 프랑스를 대표할 아무런 권위도 없는 '외로운 모험자'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는 패배주의에 빠진 프랑스 지도자들에게 큰 실망을 느끼고 있던 영국의 처칠 수상으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보로도 정부'가 항복을 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드골은 처칠의 동의를 얻어 BBC방송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독일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영광스런 군인의 이 불쌍한 그림자가 노령의 허영을 위해 자신의 명예와 조국을 팔았다"고 페탕을 비난하였다. 이미 프랑스는 연합국의 명단에서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드골의 존재와 그의 항쟁 선무방송은 의미가 컸다. 무기를 들고 독일군에 저항하라는 이 방송은 동시에 대독항복협상을 추진하고 있던 프랑스 지도자들에게 반항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정부가 마침내 독일과의 협상에 조인하였을 때 드골에게는 개인적 고난이 예정되어 있었다. 1940년 7월 5일 프랑스 군법회의에서 드골에 소환장을 보낸 사실이 알려졌다. 적전항명죄와 항명선동죄 혐의로 그는 비시정권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페탕은 그를 '내 가슴속에 키운 독사'라고 비난하였다. 드골의 고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아무런 자금도, 군대도 없이 영국정부의 호의로 작은 사무실 한칸을 얻어쓰고 있을 뿐이었다. 영국의 외무성 역시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드골의 지지가 그나마도 페탕원수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것에 대한 우려때문이었다. 프랑스 정부가 유명인사들에 대한 드골의 접근을 막아 이들이 '자유프랑스'에 가담하는 것을 원천봉쇄하였다. 그러나 중진 정치인의 부재는 드골이 휴전체제에 저항하는 유일한 지도자로 남게 하였고 따라서 '정복되지 않은 프랑스'의 유일한 대표가 되었던 것이다. 드골은 단순히 군사적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해 7월말에는 이미 7천명의 해외 거주 프랑스인들이 모여들어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의 진영을 강화하였다. 드골만이 유일한 대안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영국은 정부와 민간차원에서 성원의 손길이 줄을 이었다. 비쉬정권을 나치독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게 하고 프랑스령 아프리카와 프랑스 보유의 군대와 자원을 독일에게 넘겨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에서 영국정부가 벌인 비쉬정권과의 접촉은 수포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럴수록 '자유프랑스'의 도덕적, 실질적 가치는 높아갔다. 드디어 1943년 6월 3일 알지에에서 수립된 '프랑스전국해방위원회'(CFLN)는 도골이 주재한 '자유프랑스'의 정부기구로서 유일한 합법적인 권력으로 규정되었다. 이 위원회는 영.미.소등 연합국의 공식승인을 받았으며 해외영토와 나치점령하의 프랑스 영토도 당연히 그 주권이 미치는 영토로 규정되었다. 프랑스가 해방된 후 CFLN은 임시정부로 자동적으로 전환되는 법적 권위로 기능하였다.

한편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자유프랑스' 소속 군대의 활동이 증대되고 그 과정에서 작전권과 휴전권등을 둘러싸고 드골과 영국정부와의 갈등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른바 'Saint Jean D'Acre'휴전을 둘러싼 '자유프랑스'와 현지 영국군과의 관계 악화는 최악의 갈등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드골을 통제할 체제로서 그 허가없이는 어떠한 정책도 입안,결정할 수 없는 위원회의 설치 논의로 이어졌다. 드골의 태도는 영국에게는 오만함으로, 각종 결정과 국제회의등에서의 소외는 프랑스의 무시로 상호 오해되어 끝없는 갈등으로 이어졌으나 적어도 대독전선의 협력관계 자체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이 불안한 동거는 전쟁이 끝나고 드골의 프랑스 복귀와 함께 비로서 얼마나마 해소되었다. 1944년 마침내 그 지리한 망명의 계절이 끝나고 드골은 영웅이 되어 그리던 고국의 땅을 밟았다.단지 패배한 국가의 초라한 망명군인이 당당한 연합국의 일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드골의 신화가 과장될 수는 없다. 드골과 그의 '자유 프랑스'만이 프랑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운 것은 아니었다. 1941년 독일의 러시아 침공 이후 프랑스 공산당이 대독무장전투에 전면적으로 나섰고 그 대열에 기독교민주당, 신부,군인, 중소기업인등이 합류하였다. 이들 모두가 드골을 지도자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상당수는 안전한 런던에서 싸우는 드골을 비난하기 조차 하였다. 드골과 함께 또는 그와는 별도로 국내에서 싸웠던 수많은 전사들이 있었다. 이른바 레지스탕스였다.

(2) 레지스탕스의 활약과 공헌

처음부터 레지스탕스 활동이 활발했던 것은 아니다. 가장 손쉽고 상식적인 것은 막강한 권력 그 자체를 묵인하는 길이었다.더구나 레지스탕스 활동은 위험했고, 당시까지만 해도 나치의 악행이 한꺼번에 드러난 것이 아니었으며, 나치의 패망 이후에도 별다른 희망을 느끼지 못했다. 더구나 보다 더 높은 도덕의 이름으로 사람을 살상하는 레지스탕스의 활동이 정당화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도덕적 회의도 적지 않았다. 또한 유럽의 가장 강력한 지하조직을 구축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도 나치-소련 평화협정(Nazi-Soviet Pact)이 유지되고 있는 한에는 저항 보다는 평화를 택했다. 그러나 프랑스를 비롯한 나치 점령하의 전 유럽에서 레지스탕스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담벼락에 비난 낙서와 슬로간 쓰기에서부터 사보타지와 암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저항운동이 벌어졌다. 특히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에 따라 유럽 공산주의자들의 히틀러에 대한 저항활동은 곧바로 시작되었다. 가장 헌신적이고 조직적인 이들의 활동은 다른 어떤 그룹보다도 위협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가 보다 본격적으로 조직되고 활약하게 된 것은 두가지 특별한 계기에 의해서였다. 즉 개별적 저항 활동이 보다 조직적 형태를 띄고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 첫째 계기는 1942년에 시작된 비쉬정권의 강제동원체제(Service du Travail Obligatoire)였다. 처음에는 자원에 의해 시작된 이 제도가 점차 강제적으로 프랑스의 젊은이들을 독일의 공장노동자를 비롯한 전쟁수요에 응하는 시설로 징용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자 이를 피해 레지스탕스에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1943년 2월부터는 독일 공장에서 일하도록 모든 연배의 프랑스 청년들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젊은이들은 독일 공장행 기차를 타거나 또는 레지스탕스가 되기 위해 산으로 가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가련다 . 둘째 계기는 민병대(Milice)의 설치였다. 나치에 의해 고무되고 비쉬정권에 의해 창설된 이 민병대는 결국 자신의 동족인 레지스탕스를 섬멸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오히려 레지스탕스 강화의 계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민병대는 레지스탕스와 무고한 민간인들을 아무런 사법절차없이 마구 처형하면서 그 잔학성을 보였다. 1942년 여름 유태인의 강제수용이 시작되면서 카톨릭이 비쉬에 대한 반대입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43년 초가 되면서 나치의 패배가 보다 명확해 지면서 나치는 서유럽의 점령지역에서의 공출과 징집을 강화하였고 이것이 레지스탕스의 대중적 활동의 물적, 인적, 심리적 기초가 되었다.

레지스탕스가 벌인 활동은 눈부신 것이었지만 '성급한 폭력'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드골은 1941년 당장의 성과도 없이 젊은 생명들의 소모를 개탄하기도 하였다. 최종의 결전을 준비하여야 한다는 준비론과 당장의 행동을 중시하는 결행론 사이의 분열이 언제나 있었다. 또한 독일군의 축출에만 관심을 둔 측과 프랑스 사회의 근간을 청소하려는 측과의 갈등도 심각하였다. 정규군 출신의 무장병력과 빨치산 활동세력 사이의 '보이지 않는 내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전자는 독일군에 저항하지만 사회의 기득권을 보존하려 하였고 후자는 사회의 변혁을 갈구하였기 때문이다 . 대체로 프랑스의 일반 국민들은 독일군으로부터의 자유를 희구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혁명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레지스탕스의 규모는 한계가 있었다. 이 가운데 10만명이 그 활동 가운에 목숨을 잃었다. 또한 비쉬정권 당국자들과 나치 게쉬타포는 이러한 레지스탕스 활동을 볼쉐비키와 연결시키려 하였다. 레지스탕스를 공산주의자들과 동일시함으로써 프랑스 국민의 반감을 조장하려 하였던 것이다. 나치독일에 못지않게 공산주의자들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던 다수의 프랑스 국민들은 이러한 선전에 쉽게 현혹되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비쉬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정통성을 주장하는 두 정권 아래에서 프랑스 국민은 많은 혼란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지스탕스운동을 벌인 프랑스인은 엄청난 숫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30만명이 공식적으로 레지스탕스 경력자로 인정받았다.이 숫자는 당시 성년 남자의 2%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들의 활동은 군사적으로도 독일점령군과 비쉬정권에게 타격을 입혔지만 사회 문화적 영향은 더욱 큰 것이었다.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카톨릭에서부터 공산주의자에 이르는 다양성을 보이고 있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적어도 전후의 질서를 그대로 복원하기 위하여 그들이 투쟁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새로운 정치,경제,사회질서의 형성을 그들의 머리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의회민주정치의 복귀를 원했지만 그러나 전전의 부패구조는 배제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이들 레지스탕스의 공헌과 헌신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보상과 응답을 받았다. 1944년으로부터 1947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주로 좌익으로 구성된 레지스탕스 세력은 정계의 다수를 이루었다. 상대적으로 전통적 우익을 포함하여 우익 정치세력은 비쉬정권의 몰락과 함께 거의 회복불능의 상황을 맞이하였다. 비쉬정권에 손을 들어주었거나 직접 비쉬정권에 참여하였던 302명의 하원 및 상원의원들이 피선거권을 잃었다. 이 가운데 반이 넘는 163명이 1936년에 중도 또는 우익에 속하는 의원들이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레지스탕스 신문들이 전체 일간신문 구독율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공산주의계열의 신문 구독자수는 전전보다 네배를 넘어섰다. 레지스탕스라는 이름은 일종의 성스러운 상징이 되어 "모든 문을 여는 열쇄'로 간주되었다.

2010.01.17.

  • 출처

    박원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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