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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하근찬의 일생과 가치관
eand**** 조회수 5,126 작성일2010.11.28

하근찬님의 일생과 가치관을 조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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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
우주신
철학, 심리철학 5위, 사회, 도덕 7위, 국어, 한문 5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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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사람의 눈으로   -유종호(柳宗鎬)


  작가 하근찬은 1931년 경북 영천에서 출생했다. 전주사범을 다니다 교원생활을 했고, 동아대학의 토목과를 다니다가 중퇴를 했다. 195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수난이대(受難二大)>가 당선된 뒤 작가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군에 입대한 시절을 제외하고 그는 계속 교육관계를 전문으로 다루는 신문사와 잡지사에 관여하다가 최근에는 직장을 갖지 않고 창작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의 교원생활은 많은 작품에 나오는 어린이의 세계에 대한 공명적 파악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되어 줄 것이다. 국민학교 아동들의 대화나 여실한 묘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붉은 언덕> 같은 작품이 그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학교 생활이 다루어진 자전적인 작품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농촌학교는 그의 많은 작품의 배경이 되어 있다. <삼각의 짐> 등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서는 서울을 무대로 한 작품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이 작가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그 이유는 작가의 유년 시대와 청년 시대의 개인적 경험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고향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우쭐우쭐 활개짓을 하며 부르는 <칭칭이>를 참으로 좋아한다. 달밤 같은 때 먼 곳에서 이 칭칭이 소리가 흘러오면 절로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어떤 공동의 운명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나 할까……팔도의 가지가지 민요의 가락 속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은 슬픔인 것이었다. 슬픔이라는 어휘가 좀 정확하지 않은 것 같은데, 뭐라고 할까, 한이라고 할까 정한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유의 것임에 틀림없었다.

  작가로서의 자신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하근찬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농촌과 농촌인구에 대한 혈연적 동정이야말로 하근찬 세계의 핵심이고 그것은 그가 그의 고향에 대한 애정에서 작가로서의 근거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농촌 사람 쪽에 서서

  하근찬은 굉장한 과작가(寡作家)이다. 이것은 그가 넘치는 정력으로 호적부와 경쟁하겠다고 나서 2천 명의 등장인물을 창조하고 조종한 발자크류의 창조적 정력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쓸데없는 요설이나 기능적이 아닌 말을 일체 배제한 작가임을 드러내는 사실이다. 작가란 무슨 말을 했는가도 중요하지만 무슨 말을 하지 않았는가도 중요하다. 불필요하거나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말을 적극 배제하고 꼭 필요한 말만을 꼼꼼하게 조직했다는 의미에서 그는 8·15이후 아마도 가장 순수한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제작의 동기와 결과에 있어서 시장성을 배제하고 시장의 유혹을 철저히 물리쳤다는 점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순수하다. 그런 뜻에서 그는 말의 장사꾼, 말재주와 글재주와 빌려온 생각들을 이리저리 꿰매고 발라 맞추어 억척스럽게 말로 된 상품을 찍어내는 말의 장사꾼들이 아우성치는 문학시장에서 창자에서 나온 말만을 엮어낸 문학상품시대의 외로운 시인됨을 지켜왔다.

  작가는 현실을 드러내고 현실에 관해서 얘기를 한다. 그것이 아무리 환상적이고 공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살이를 다루고 있는 한 사회 현실에 대한 논평이거나 보충임을 면할 길이 없다. 현실을 다루고 현실에서 벌어진 얘기를 다루는 한, 작가는 하나의 관점 혹은 입장에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사공평의 비정적 초원을 의식적으로 노리는 경우에도 그의 관점이 어떤 입장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더 꼬집어 말하면 사회 현실을 다룸에 있어서 그는 한 사회계급이나 계층의 시각을 통해서 관찰하고 처리하게 마련인 것이다. 신과 같은 초월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거의 주제를 갖지 않은 채 자족적인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책을 쓰고 싶어하는 불가능한 꿈에 들려[憑]있던 플로베르도 보기와는 달리 속악스러운 프랑스 제2 제정 시대의 부르즈와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았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저금하듯이 아껴 쓰는 그의 글버릇, 민중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혐오, 혁명에 대한 병적인 공포증, 노동이 없는 삶의 공허성을 아름다움의 생산에 의해서 보상하고 정당화할 수 있다는 기만적인 믿음, 이 모든 것은 그가 되풀이 공언한 부르즈와 혐오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와 의식이 근본적으로 부르즈와의 테두리에 머물러 있었음을 증거해주는 것이다.

  흔히 얘기되는 작가와 작품의 부침현상도 캐어보면 작가가 취하고 있는 관점에 연관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 얼리자베드조(朝) 시대의 시와 연극의 부침의 역사는 극히 시사적이다. 당대의 최대 시인 스펜서는 현대 독자들에게는 극히 호소력이 적고 소수의 연구자를 제외하고서는 일반독자의 관점 밖에 서있는 시인이다. 이에 반해서 당대 최대의 극작가인 셰익스피어는 오늘날에 있어서조차도 그 호소력을 증가해 사고 있는 실정이다. 이 차이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스펜서는 당시 후원자를 찾고 또 후원자의 애고(愛顧)를 유지하기 위해서 귀족계급의 취향과 세계관을 선택하여 그들의 심미안과 판단력에 호소하였다. 즉, 그는 귀족계급의 관점을 선택함으로써 그들의 후원과 애고를 얻어 그들의 취향에 호소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대변했던 귀족계급이 사실상 사라진 오늘날 스펜서의 문학은 터무니없이 시대착오적이고 우리 세계와 동떨어져 있게 되고 그 결과 현대독자에의 호소력을 거의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다양한 계층들이 출입하는 극장을 위해서 각본을 썼고 또 이 때문에 단일한 귀족계급에의 호소를 노리지 않아도 되었던 셰익스피어는 작품 속에 귀족계급의 편협한 취향과 세계관을 벗어나고 그렇게 함으로써 보다 폭넓은 호소력을 획득할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작가의 관점은 작가의 작품세계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 호소력의 범위와 영역조차도 결정하는 것이다.

  처녀작 <수난 이대>에서부터 하근찬이 끈질기게 현실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관점으로 채택한 것은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농촌 사람들의 그것이다. 이는 그가 주로 농촌 사람들을 다루고 그들의 가난함과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그가 그들을 깊은 공감과 사랑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그것도 작가가 의식적으로 농촌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고 작중인물과 작가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근본적인 동일성에서 똑바로 나오는 공감이요 사랑이다. 헐벗고 기운 없는 한국의 시골 사람들이 적어도 50년에서 60년에 이르는 고달픈 시기에 하근찬에게서 아주 친근한 대변자를 찾게 된 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굳이 농민이라는 말을 피하고 농촌 사람들이라든가 시골 사람들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다. 사실 하근찬 소설의 작중인물들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농민만은 아니다. 가령 이무영이라든가 박경수의 소설에 나오는 농사꾼은 아니다. 그런 농사꾼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나 농촌에 살고 있는 여러 가지 생업에 종사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들이 농민의 위치를 벗어난 것은 오랜 얘기가 아니지만 땅에만 매여있는 사람만은 아니다. 농민과 함께 농촌에 정주하면서 도회인들과 외래인들을 먹여 살리기에 등골이 휘어버린 사람들을 기용하여서 겨레의 고난과 없는 사람들의 고달픔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작가의 말에서 하근찬은 민요에 대한 공감을 얘기한 바 있지만 그의 작품은 적지 아니 민요적인 대목과 민요의 발생을 상기시켜주는 민요 발생의 원점 같은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아주 시사적이고 또 하근찬을 얘기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어떻게 보면 8·15 전후에서 6·25에 이르는 시기에 겪은 겨레의 수난을 한 사람의 민요시인이 치밀하고 단단한 수법으로 엮은 민요의 세계가 그대로 이 작가의 작품세계인 것이다.

  그러면 농촌 사람들의 관점을 선택했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겨레의 최대 다수 구성원의 입장을 대변하였기 때문에,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어떤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특정관점의 채택이 그대로 작품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문학에 있어서 다수자의 관점의 채택이 그대로 작품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문학에 있어서 다수자의 관점의 채택이 그대로 문학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이러한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시험적으로 다음과 같이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농촌 사람들의 관점을 취함으로써 갖가지 허위의식이나 자기 기만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우리의 현실을 관찰하고 증언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겨레의 수난을 가장 무방비 상태로 당해야 했고 또 가장 가혹한 형태로 겪어야 했던 농촌 사람들의 고단함을 보여줌으로써 그는 겨레의 수난과 삶의 실상을 가장 정직하고 참되게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은 하근찬 문학이 거둔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전쟁에 대하여

  농촌 사람들의 삶을 다룸에 있어서 전후작가의 한 사람인 하근찬이 각별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50년 전쟁의 파괴의 흔적이다. 그의 작품으로서 동시대의 전후작가들이 흔히 그랬듯이 전쟁을 전쟁현장에서 다룬 것은 거의 없다. 그가 다루고 있는 것은 전쟁이 국토의 대부분의 주민들에게 끼친 상흔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에 서로 다른 전쟁통에 불구의 몸이 되는 재앙을 다루고 있는 <수난 이대>에서부터 작가의 관심은 전쟁의 야수성을 고발하는 것으로 작가적 출발을 도모하고 있다. <나룻배 이야기> <홍소> <흰 종이 수염> 등이 모두 전쟁의 직접 피해자를 다루고 있다. <나룻배 이야기>의 두칠이도 <흰 종이수염>의 아버지도 불구의 몸으로 돌아온다. 더욱 기막힌 것은 불구인 그들을 도와주는 아무런 사회적 장치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홍소>에서는 많은 전사자들이 배경으로 나오고 이들의 가족에게 재앙의 소식을 차마 전달하지 못하는 마음씨 약한 우체부의 얘기가 나온다. <붉은 언덕>은 전쟁이 끝난 후 엉뚱하게 피해를 입은 어린이들의 얘기이다. 전쟁의 파괴적 영향력으로 인한 황폐성이 하근찬 소설의 집념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면 전쟁에 대한 작가의 반응, 아니 작가가 대변하고 있는 농촌 사람들, 즉 민중들의 반응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거절이다. 재앙과 쓰라림을 가지고 올 뿐 그들의 복지나 복리를 위해서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전쟁을 그들은 철저히 배격하고 거부한다. 전쟁은 그들의 원수요 재앙의 샘이다. 그것을 어떠한 이름으로도 합리화하기를 거부한다. 이 점 하근찬은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다. 누구의 탓이라느니, 필요악이라느니 하면서 사실은 묵시적 내지는 우회적으로 전쟁을 기정 사실화하고 그 필연성을 인정하는 투의 엉거주춤한 태도가 없다. 이러한 거부의 태도는 그것이 농촌 민중들의 자연 발생적인 반응과 태도를 허위의식으로 왜곡시키지 않고 그대로 떳떳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소집영장을 마을을 전하러 오는 경관의 배타기를 거절하는 <나룻배 이야기>의 결말은 실효성 없고 부질없는 사보타지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유머 속에 표출된 가장 뼈대있는 저항문학의 실례라 불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비슷하게 인분으로 저항하는 <분(糞)>도 유머러스한 문학적 저항의 또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문학작품에 있어서의 인물과 행동이 갖는 의미는 그것이 외부 현실에 대한 일직선적인 대응관계에 의해서 의미를 갖기보다는 (그런 경우도 흔하지만) 상징적인 대응관계로 빚어지는 수가 많다. 그 점 <나룻배 이야기>나 <분> 속에 드러나 있는 상징적인 거절은 문학에서 허용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이고도 암시적인 저항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점 하근찬 문학은 전후에 나온 가장 탁월한 반전문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50년의 전쟁이 끼친 파괴적 영향력과 그 문화적 의미를 하나의 상징적 축도로 보여주는 <왕릉과 주둔군>이나 전쟁의 비인간성을 깊은 산마을 단위에서 보여주는 <산울림>에서나 사정은 마찬가지다. 다시 올 수도 있는 무의미한 살상에 대해서 가장 큰 소리로 거절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하근찬은 가장 뼈대 있는 전후의 증인작가요 반전작가라 할 것이다.


일본에 대하여

  우리 현실의 식민지적 상황에 대한 부단한 상기도 하근찬 문학의 집요한 모티프의 하나다. 일제시대를 다루고 있는 <그 욕된 시절> <일본도> 등이 모두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에 대한 묵시적 비판을 담고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지난날의 상기에서 끝나지 않고 현재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비판은 8·15 이후의 상황이 일제하의 상황보다 어느 만큼 식민적 상황을 극복하고 있느냐는 간접적인 의문제기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식민지하의 군국주의적·전체주의적 상황이 얼마만큼 극복되었느냐는 의문제기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 전집에 수록돼 있는 <기울어지는 江>은 이러한 의문제기가 잘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작품 <기울어지는 강>은 하근찬 소설에 자주 나오고 또 작가가 솜씨자랑을 곧잘 하게 되는 어린이의 시점을 통해서 본 어른들의 세계, 특히 학교라고 하는 특수사회의 양상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시대는 일제말의 이른바 비상시로 돌입한 1940년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속악하고 품위 없고 한국인 멸시를 장기로 알고 있는 일인 교장과의 충돌로 공립학교의 교사직을 쫓겨난 한재명은 호남 지방의 한국인 설립 사립학교로 부임한다. 소규모의 약간 초라한 건물과 시설의 시골 학교이기는 하나 억압적인 식민지 교육을 상징하는 구호가 걸려있지 있고 전직원이 한국인 동포로만 구성된 이 학교에 주인공은 비상한 애착과 호감을 가지고 아동 교육에 임한다. 그러나 이내 비상시의 회오리바람은 이 시골 사립학교마저도 무풍지대로 방임해 두지 않는다. 장학관이 몰려오고 교장이 물러서고 이내 삭발과 전투모 쓰기가 강요된다. 창씨도 강조된다. 동료 여교사가 반일운동을 조직했다고 구금되고 정세는 나날이 악화되어 간다. 마침내 체제적응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저항적이었던 주인공마저도 삭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일제시대는 하근찬에게 있어 그리운 시절이 아니다. 식민지의 치욕적이고 억압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어린 날을 형성하고 있는 시절은 그리운 시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근찬에게 있어선 치욕적인 식민지 상황이 사적으로도 그리운 시절로 변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욕된 시절>일 뿐이다. 그는 사적 시간이 어디까지나 공적시간에 편입되고 계류되고 있으며 그 선명한 구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 점 외적현실과 내적현실을 구별하는 '긍정적' 문화의 나쁜 영향에서 그는 자유롭다. 민족의 어둠은 그대로 주인공과 얘기꾼인 어린이의 어둠으로 이어지고 있다. 주인공을 추방한 일인 교장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그러나 자꾸만 잊어버려 가고 있는, 일본 식민지주의의 고약한 하수인으로 나타난다. 그 점 그는 식민지적 상황의 상기의 주된 계기로 등장한다. 그 다음 식민주의 권력에 맥없이 조종되고 말려들어가는 비상시의 상황이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것은 정치권력에의 굴종이라는 소망스럽지 못한 교육체계의 실상을 드러내면서 8·15 이후의 현실에 대한 묵시적 비판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실 비상시라는 이유로 획일적인 조직사회로 나가고 있는 사회의 획일화에 대한 비판이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가에 있어서의 일제시대의 상기는 그대로 현실의 획일화에 대한 비판적 상기인 셈이다. 이 작가는 누구에게 있어서나 원초적 체험의 보고를 이루고 있는 어린 시절을 상기하면서 동시에 독자들에게 '독자들의 오늘'을 상기시키고 그 연속성에도 주의를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소 단선적으로 파악된 식민지 현실의 제시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 이중적인 상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이 작가가 농촌 사람들의 눈으로 현실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재구성한다는 것을 말했다. 또 그가 전쟁을 거절하고 그 전제에 저항하는 발전작가임에 주목하였다. 또한 그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를 부단히 상기시킴으로써 묵시적 현실비판을 되풀이 수행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우리가 그를 중요하고 뛰어난 작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식에 호소력을 부가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의 솜씨를 간과할 수는 없다. 그는 간결, 절제, 균형을 존중하는 단편작가이다. 단일한 주제의 집중적 탐구로 해서 그의 단편은 언제나 단편소설의 고전적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민요 속에 흐르고 있는 토착적 농촌 인물의 유머러스한 저항의 관점과 함께 문체의 근대적 세련이라는 양면성을 솜씨 있게 조화하고 있는 균형의 작가이다.

  첫머리에서 우리는 그가 즐겨 어린이들을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에 유의했지만 영남 사투리의 묘미 있는 활용은 그의 작품의 중요한 매력의 하나이기도 하다. 60년대 이후 방송극 특히 텔레비전 방송극의 광범위한 생활 침투와 함께 사투리 대화의 활용은 이제 우리에게 혐오감마저 자아내게 한다. 하근찬 작품의 대화의 묘미는 이러한 새 추세로 적지 않게 훼손되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외래어의 주착없는 범람과 그것이 상징하는 문화적 병폐가 세력을 떨치고 있을 때 순수한 우리의 토착어를 정성들여 다듬고 세련시킨 회유한 작가의 한 사람이란 명예를 안고 있다.

2010.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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