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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작가 하근찬에 대해서
비공개 조회수 6,349 작성일2010.03.05

제가 학교에서 작가 하나씩 선택해서 조사를 한다음에 ,,,

선생님 앞에서 5분동안 보고를 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질문! 전 하근찬이라는 작가를 하게 되었는데..

작가 하근찬에 인생이나 삶,에 대해서 자료좀 써주시구요...

그 인생이나 삶이 즉 경험,문화 배경 등이 그의 작품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냐...

이걸 쓰라는 건데요..... 자료 충분히 주시면 감사하겠구요...

제가 5분동안 무슨 말을 주로 해야 할 지 전문가들 충고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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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하근찬에 대해서

 

 농민들의 삶의 작품화에 연유되어 현실의 어두움을 그리면서도 해학미를 잃지 않고 작품을 쓴 소설가.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주요 작품으로 《수난 2대》《흰 종이 수염》《삼각의 집》 등이 있다.

 

 1931년 10월 21일 경상북도 영천군 영천시 금로동에서 출생하여 1948년 전주사범학교를 중퇴하고 몇 년간 교사로 근무하다가 1954년 부산 동아대학교 토목과에 입학, 1957년 중퇴했다. 군복무를 마친 뒤 교육자료사 및 대한교육연합회 등에서 일했다.

1955년 신태양사가 주최한 전국학생문예작품 모집에 단편소설 《혈육》이 당선되었고, 1956년 교육주보사가 주최한 교육소설 현상모집에 《메뚜기》가 당선되었다. 1957년 일제하의 세계대전과 6·25전쟁이라는 양대 전란을 통하여 민족적 수난을 집약한 단편소설 《수난 2대(受難二代)》가 《한국일보》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처음에 농촌을 소재로 하여 형성되었다. 그 농촌이 폐쇄된 자연이 아니고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 연관된 현실인 점에서 중요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른바 실존주의의 영향과 전후파적(戰後派的) 취향이, 소설에 지적 허영 내지 관념적 난삽을 적지 않게 유행시켰던 1950년대 후반에 무지하고 가난한 시골 사람들 이야기를 들고 나온 사실 자체가 획기적이었다.

 

 그가 그려내고 있는 농촌은 사회적 변화에서 유리된 자연공간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수난과 고통을 가장 절실하게 축적해온 삶의 현장이다. 농촌의 삶과 현실이 역사적 상황의식에 대응되어 문제성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이 《수난 2대》이다. 전체적인 내용이 생활 속의 절실한 인정(人情)과 역사적 수난의 아픔이며, 그 아픔을 이기고 일어서는 삶에의 강한 집념인 점에서 창작의 당연하고도 새로운 본령을 일깨웠다.

 

 또 《흰 종이 수염》(1959)이나 《왕릉과 주둔군》(1963)은 주체적인 민족의식이 토착적인 세계 속에서 외래적인 것과 갈등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들로서, 이처럼 농민 생활과 농촌 현실에 대한 그의 꾸준한 관심은 1950년대를 넘어서면서 농민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자기 아들을 징용에서 빼주지 않는다고 면사무소에서 대변을 보는 아낙네를 그린 《분(糞)》(1961), 전사통지서를 배달하지 않고 물에 띄웠다는 죄로 해고당하고 웃는 《미소》 등에서는 역사적 현실 속에 드러난 사회의 모순에 대해 강한 고발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교과서에 실린 작품의 작가인 만큼 친숙한 작가인 하근찬. 하지만 생각만큼 그의 작품세계가 친숙하지만은 않다. 이는 그에 대한 논의나 연구의 대부분이 그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수난이대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연구에 있어 한 작품만을 논하는 것은 전반적인 작품세계의 이해에 있어 큰 걸림돌일 수 있다. 다양한 작품들 속에서 반복되는 지점을 찾아 논의를 발전시킨다면 달라질 수 있는 문제도 한 작품에 치우쳐 방향이 어긋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경상도 어느 산골 마을이 공간적인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바로 고향의 이미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작품 속에 나타나는 언어 역시도 대부분 위의 배경과 맞물려 생생한 방언으로 구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957년부터 그는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고 세간에 인정받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단편 <수난이대>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고 1959년에는 단편 <나룻배 이야기>와 <흰 종이 수염>을 발표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교육 주보사 기자로 입사하게 되는데 앞서의 교직 생활이나 당시의 기자 생활은 모두 경험으로 축적되어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나게 된다. 이듬해인 1960년에는 단편 <홍소>를 발표하고 그 다음해인 1961년에는 단편 <분>을 발표하며 그 때에 소속을 변경하여 교육 자료사 편집 기자로 입사한다. 그리고 1963년에는 단편 <왕릉과 주둔군>을 발표하고 다시 이직하여 대한교육연합회 새교실 편집부 기자로 입사한다. 1964년에는 단편 <산울림>과 <붉은 언덕>을 발표하고 1969년에는 이전에 몸담았던 대한교육연합회를 퇴사하여 본격적인 집필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그의 작품 세계를 시기별로 나누어 볼 때에 초기에 해당하는 시간이 된다.

 

 하근찬은 현실의 어두움을 그리면서도 해학미를 잃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전후문학의 주역들과는 달리 농촌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농민들의 삶과 그 애환을 작품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유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대부분의 전후작가들이 전쟁의 상처로 황폐해진 도시 소시민의 내면세계와 메커니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인정과 향토성이 짙은 농촌을 배경으로 그들이 겪는 민족적 수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1970년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83년 조연현문학상, 1984년 요산문학상, 1988년 유주현문학상 등을 받았다.(2007년에 작고함)

 

 주요 작품으로는 《낙뢰(落雷)》(1957), 《산중고발(山中告發)》(1958), 《나룻배 이야기》(1959), 《붉은 언덕》(1965), 《삼각의 집》(1966), 《족제비》(1970), 《일본도(日本刀)》(1971), 《야호(夜壺)》(1971), 《필례 이야기》(1973), 《서울의 개구리》(1973), 《화가 남궁씨의 수염》(1985), 《은장도이야기》(1986)를 비롯한 많은 소설과 《전쟁의 아픔을 증언한 이야기들》(1985), 《전쟁과 수난-수난 2대》(1985) 등의 평론이 있다.

 

 

<출처: 자료 검색> 

201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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