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인수대비가 윤씨를 폐위한 이유는?
mich**** 조회수 47,456 작성일2008.02.05

자세히 보진않았지만, 왕과비에서는 윤씨가 성종을 빼앗는 것 같다는 질투심이 많이 보였고 (이건 초반부에서였나;;)

왕과나에서는 자신에 대한 위협과 윤씨의 행실에 대해 주로 거론하는데..

 

인수대비의 지나친 권력욕이 크다고도 하는데,  어떻게 윤씨가 권력을 많이 잡고, 어느정도였길래

인수대비가 폐위를 시킬 정도 였고 과연 인수대비의 욕심은 어느정도였는지 궁금하네요;

드라마만 보다보면 인수대비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밖에 떠오르질 않아서..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9 개 답변
6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yuki****
중수
한국사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인수대비 한씨는 소혜왕후라고도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의경세자의 아내였습니다.

의경세자는 세조의 큰아들이었는데 원인모를 병을 앓다가 젊은 나이로 죽었지요.

당시 인수대비에게는 딸 한 명과 아들 둘이 잇었는데 큰 아들이 월산대군, 작은 아들이 자을산군입니다.

자을산군은 훗날 성종이 되지요.

 

인수대비 한씨의 집은 명나라와 사돈관계에 놓여 있는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는 집안이었는데

인수대비의 고모, 즉 아버지 한확의 누이인 한씨가 명나라 성조가 가장 총애했다고 알려진 '려비(麗妃)'이고

둘째 딸은 명나라 성조의 손자인 선종의 후궁인 공신부인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어쩔 수 없이 명나라의 공녀로 바쳐졌다가 하루아침에 황제의 후궁이 된 행운의 여성들이죠.

대국의 사돈이라는 지위가 막강하여 당시 조선에서는 국왕조차 청주 한씨 집안을 홀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가문에서 태어난 인수대비는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여성이었지요.

인수대비의 언니 한씨 역시 세종의 아들 계성군(세종과 신빈 김씨 소생)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계성군이 주색에만 빠져 가정을 소홀하다보니 언니 한씨의 지청구가 끊일 날이 없었다고 하죠.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응 찬탈하자 그녀의 지아비 도원군은 세자로 책봉이 되었고

당연히 아내인 그녀는 세자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소문에 의하면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저주로 그리 되었다고 입소문이 파다했죠.

세자가 죽자 그녀는 더이상 궁궐에 남아있을 수가 없어 아이들을 데리고 사가로 나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수빈의 빈호가 하사되었고 사가에서 아들을 키우고 있던 중, 시아버지의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예종에 책봉이 되었죠.

그러나 예종은 얼마 살지 못하고 죽게 되었는데 그 역시 꿈 속에서 현덕왕후 권씨가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요절했다는 속설이 있지요.

 

그가 죽고, 누구를 왕위에 내세우느냐에 관건이었는데 당시 유력한 후보는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었습니다.

허나 어느 편에서는 의경세자가 세자의 위에 있었고 장남이었는데다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다시 관심은 월산대군에게 쏠리게 되었는데 수빈이 먼저인지, 한명회가 먼저였는지 두 사람은 정치적 결탁을 하여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을 보위에 오르게 만들죠.

 

당시 두 사람의 정치적인 결탁은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을 가진 한명회가 수빈에게 둘째 아들을 다음 보위에 올려주겠다 대신 우리 딸을 왕비로 맞이해 달라 라는 요구를 했지요.

수빈은 지략가 한명회와 그의 권세를 너무도 잘 알고 터라 그의 제안을 이기지 못해 그리 하자고 합니다.

그리하여 잘산군이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성종이 되고 한명회의 딸은 공혜왕후가 되죠.

 

허나 한명회의 딸은 열 아홉살이 되던 해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도 단종의 모후 현덕왕후의 귀신을 보고 숨졌다는 말들이 오갔습니다.

 

두번째 왕후는 그 유명한 폐비 윤씨입니다.

폐비윤씨의 본관은 함안인데 당시 성종보다 12살, 위인 띠동갑이었습니다.

그녀는 후궁으로 간택되어 들어온 여자였는데 성종은 엄마 같은 그녀의 모성애에 반해 그녀를 왕후로 올리려고 했지요.

그러나 한미한 가문의 여식이다보니 그녀를 받들어줄 사람이 전혀 없었던 탓에 인수대비는 그것이 걱정되어 결단코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보다 자신이 양육하고 있는 파평윤씨 가문의 딸 윤숙의를 총애하여 그녀를 왕후로 올릴 욕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윤숙의는 두 살이 되던 해, 인수대비가 직접 양육하여 길렀는데 성종보다 8~9세 정도 연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윤숙의는 인수대비와 인척관계에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폐비윤씨는 처음부터 그렇게 못된 여자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궁중의 대소사를 죽은 왕비대신 잘 처리했고 무엇보다 검소하고 미덕이 있어 아랫사람들의 칭송을 자자하게 얻었는데 시어머니 인수대비와의 알력싸움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죠.

 

폐비윤씨가 왕비가 된 것은 연산군을 임신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러 후궁들이 있었지만 임신을 하여 왕자를 생산한 여자는 폐비윤씨가 처음이었고

자신에게 첫아들을 선물해준 아내가 너무도 고마워 성종은 그 자리에서 "그대를 정궁으로 맞이하고 싶소."라는 말을 하게 되죠.

당시 왕은 허언을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지라 그 약속을 굳게 믿은 윤씨는 그후로 얼마 되지 않아 꿈에도 그리는 정궁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폐비가 교태전의 주인이 되는 것을 마뜩치 않게 여긴 인수대비는 온갖 트집을 잡아 폐비를 압박하기 시작했지요.

게다가 당시 원자로 책봉된 아들이 시름시름 앓은 탓에 월산대군의 집으로 피접을 가 있던 상태였습니다.

후궁 정씨와 엄씨가 틈만 나면 인수대비에게 윤씨의 험담을 입에 올렸고 그녀를 정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요.

 

일설에는 폐비의 집안이 군공하여 가례를 올릴 때 예물을 소박하게 해온 일이 있었죠.

인수대비는 윤씨가 해온 예물을 처다보지도 않았고 오히려 예단을 적게 해온 일을 책망했다고 합니다.

 

침잠례(왕후가 후궁들을 데리고 누에를 치는 행사)가 있는 날, 숙용정씨가 참석하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윤씨는 예전부터 자신을 업신 여기는 정씨를 괘씸하게 여겼습니다.

사람을 보내 정씨를 데리고 오라 하였는데 정씨가 하는 말이 "몸이 불편하여 거동을 할 수 없으니 죄송하다 전하거라." 라는 말만 보내왔을 뿐이죠.

화가 난 윤씨가 숙용 정씨를 땡볕아래 댓돌에 세워놓은 석고대죄를 청하라 일렀고 이 일로 정씨가 쓰러지는 사태가 발생하자 인수대비는 윤씨가 투기를 한다며 칠거지악(부녀자가 저질러서는 안되는 일곱가지 죄목)의 으뜸인 투기를 한다고 생각하여 그녀를 고깝지 않게 봅니다.

 

또한 당시 중궁전과 대비전의 알력다툼이 심심찮게 일어났는데 심성이 고운 숙의하씨와 명빈 김씨가 중재를 하여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리고자 했으나 잘 되지 않았고 급기야 남편 성종은 몇 달 째 윤씨를 독수공방 시켜놓고 다른 내인을 찾아가거나 후궁들을 찾아가 잠을 자곤했지요.

성종은 영웅호색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는데 그의 여성편력은 선원록에 나와 있지 않은 여자들만해도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술을 좋아해서 지금으로 치면 알콜중독 증상에 가까울 정도였다는데 한번씩 기침을 하면 피를 밭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들은 아파서 피접을 나가있지, 남편이라는 사람은 주색에 찌들려 생활을 하지...... 이런 처지인데 스트레스 안 받을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날, 성종이 눈여겨 본 내인에게 승은을 입혀주려 그녀의 처소로 발걸음을 했다가 소리소문도 없이 윤씨가 그 앞을 막고 섰더란 거죠.

너무도 당황한 성종이 "곤전. 여기는 왠 일이오?"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윤씨가 "이제는 내인에게까지 손을 뻗으시는지요?" 라고 독기어린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죠.

당황하고 창피한 성종은 급기야 화를 내기 시작했고 두번다시 윤씨를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어울우동을 죽인 것 또한 민간으로 피접을 자주 나간 때에 어울우동을 만나 사랑의 정을 키웠다고 하죠.

실제로 드라마에서 각색한 이야기가 아닌 성종이 어울우동을 만났다는 대목은 실록에도 은근히 기제가 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윤씨가 손톱자국을 낸 것은 사실이 아니라 합니다.

실록 어디에도 그런 대목은 없다고 하죠.

다만 내인의 처소로 발걸음하는 바람피는 성종을 눈앞에서 목도한 윤씨의 투기와 스트레스가 하늘을 치솟고 있었고 불난 집에 기름 붓는다고 그 기름을 붓는 역할을 인수대비가 하고 있었죠.

인수대비는 이 참에 중전을 갈아엎을 생각을 했고 이 생각에 성종이 통하여 그녀를 폐비하겠다는 윤지를 내리게 됩니다.

억울하게 궁중암투에서 희생된 윤씨는 폐비가 되어 사가에서 살다가 한명회와 한씨의 결탁으로 인해 사약을 받게 되죠.

 

그러나 성종이 그 후로도 폐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폐비를 시킨 것을 후회하여 어린 연산군을 생각해서 그녀를 다시 궁궐로 불러들일 생각을 하여 내관을 보내 윤씨의 동태를 살피라 일렀는데 그 때 정씨, 엄씨 두 후궁이 내관에게 뇌물을 먹이고 폐비가 전혀 지난 날을 뉘우치지 않고 있다고 전하라고 윽박질렀다고 합니다.

그러자 내관이 거짓을 고하게 되고 화가 난 성종이 폐비에게 사약을 내리게 됩니다.

 

이 일을 안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켜 한명회를 부관참시(죽은 자의 관을 꺼내 다시 목을 쳐 죽임)하고, 당시 폐비 사건과 연루되어 있는 자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손수 때려 죽이죠.

또한 할머니 인수대비에게 박치기를 해서 죽게 만들고 아버지의 두 후궁을 처참하게 죽였으며

동생인 진성대군을 수시로 겁을 주기도 했습니다.

 

2008.02.06.

  • 채택

    질문자⋅지식인이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자필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lemo****
고수
한국사, 한국드라마, 전통 예절, 의식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안녕하세요 전 우리나라역사에관심이많은사람입니다 ^^

 

인수대비가 중전윤씨를 폐위한이유가여러가지가있습니다

투기가심하고 정사에관여하고 여인의행실에맞지않는둥... 여러가지가있습니다

그이유는 실록에도실려잇는데 너무많아서 서술을못하겠구요 ㅠㅠ

 

그런데 인수대비가 절대적으로 윤씨를폐위했던이유는

 

중전의자리에오른후, 대군을낳아서 윤씨의권력은 하늘을치솟았습니다

모든권력이 윤씨에게집중되자 인수대비는 자신의 권력을잃을까하는마음에

폐위를서둘러시킨거죠,

 

 

2008.02.06.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7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탈퇴한 사용자 답변

일단 드라마 <왕과 나>에 나오는 폐비윤씨(廢妃尹氏)에 관한 내용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역사보다는 재미에 초점을 맞춰 지어낸 허구입니다. 예전에 KBS에서 방영한 <왕과 비>는 역사에 촛점을 맞춰 정석대로 폐비윤씨에 대해 그려냈으나 폐비윤씨가 인수대비, 즉 소혜왕후(昭惠王后)에 의해 폐위되고 사사되기까지는 아마 그녀의 약한 집안이 가장 큰 작용을 했지않나 싶습니다.

 

소혜왕후는 위엣분이 상당히 잘 답변하신대로 아주 명문 가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명문가의 여식으로 호화스럽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종친(宗親)가문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인 도원군과도 금슬이 좋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습니다. 그러다 시아버지가 세조(世祖)로 왕위에 오르자 세자빈이라는 높은 자리에 올랐습니다.

 

도도하고 곧은 성품의 그녀에게 세자빈이라는 자리는 별 무리가 없었던 겁니다. 때문에 다른 초창기 세자빈들처럼 왕실의 일원으로서 받는 스트레스도 적었으니 자신의 그 권력을 이용하기가 아주 좋은 때였죠. 불과 소혜왕후의 나이 겨우 10대 후반 쯤의 일입니다.

 

그러나 소혜왕후가 스물 한 살이 되었을 때, 그만 남편이 죽고 맙니다. 젊은 나이에 일순간에 모든 걸 잃은거죠. 사랑하는 남편도, 세자빈의 지위도, 권력에도 큰 타격이 왔던겁니다. 졸지에 왕실의 겉가지에 지나지 않는 처지가 되어버린 겁니다. 당시의 법대로, 그녀는 수빈()이라는 작호를 받고 2남 1녀의 자녀들을 데리고 사가로 나가 살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자식들을 통해 대리만족합니다. 즉, 요즘에도 일부 어머니들에게서 나타나는 성향인데 자식들을 지나치게 완벽하게 키우고 싶어했던거죠. 학문면에서 3명의 자녀들에게 매우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그러다가 첫 아들인 월산대군도 혼인하여 제 가정을 꾸리고, 작은 아들인 자을산군(성종) 또한 한명회의 딸을 부인으로 맞으면서 자식 키우는 낙도 없어졌는지 당시 건강까지 매우 위독해졌었습니다.

 

그 쯤, 궁궐에서는 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소혜왕후의 시동생 예종이 어린 자녀들만 남기고 죽으면서 촛점은 소혜왕후의 아들들에게 비춰졌습니다. 이 때, 가장 유력한 후보가 바로 자을산군이었는데, 자을산군은 예종의 양아들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조선시대 때에는 양아들로 삼는 조건이 나이가 어려야하고 그 가문의 대를 이을 책임이 있는 장남이 아니어야 했는데 월산대군처럼 장남도 아니고 그에 비해 어렸던 자을산군이 왕이 된 거죠.

 

자을산군, 즉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는 그동안 자신을 뼈빠지게 길러온 소혜왕후에게 무척 효도했습니다. 소혜왕후 또한 성종이 자신의 아버지 도원군,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면서 소혜왕후는 일개 과부에서 왕비로 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대비가 되어 궁궐에 들어와 살았죠. 어느 정도 그녀의 바람이 채워진 겁니다. 높은 지위와 권력, 효도하는 아들, 착한 며느리 등.

 

그러던 중, 공혜왕후가 몸이 약해 후사를 잇지 못하자 간택 후궁을 들이게 됩니다. 그녀들 중 한명이 바로 폐비윤씨인데, 그녀는 양반 가문의 딸이기는 했으나 권력이 약하고 집안이 매우 가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혜왕후는 그때만해도 그녀를 별로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들만 낳아주면 되는 존재였으니까요.

 

그러나 성종이 아름다운 폐비윤씨에게 홀려 그녀만을 찾으면서 아마 점차 어미의 품을 떠납니다. 이에 소혜왕후는 아들에게 서운하고, 폐비윤씨에게는 묘한 질투를 했을겁니다. 흔히들 파이드라 컴플렉스라고 하는데 아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가만히 있는 며느리에게 묘한 감정을 품게되는거죠. 여기서부터 아마 둘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폐비윤씨는 성종의 지극한 사랑 아래, 첫 아이는 낳은 후 일찍 잃고 뒤이어 연산군을 낳게됩니다. 그 해에 공혜왕후가 그만 일찍 승하하여 폐비윤씨는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여기서 소혜왕후가 매우 탐탁치 못하였는데, 바로 후궁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중전의 자리를 감당할 수 있는 재력이 없었던 겁니다. 공혜왕후는 다른 후궁들에 비해 나이도 어렸고 몸도 비실비실 약했는데도 불구하고 중궁으로서의 체면이 높았습니다. 온화한 그녀의 천성도 천성이겠으나, 그녀의 아버지가 당시 큰 권력가였던 한명회였던거죠.

 

그에 반해, 중전이 가져야할 권력을 채워주지 못한 집안에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았을 폐비윤씨는 점차 멀어져가는 성종에게 불안한 마음을 느끼게 되고, 가난한 집안의 폐비윤씨가 중전이 되자 후궁들은 너도나도 중전이 될 수 있으리라 야망을 품습니다. 그래서 소혜왕후가 폐비윤씨를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대비전을 뻔질나게 찾아가 아양을 떨었죠.

 

이 때, 폐비윤씨가 연산군만을 믿고 가만히 있었으면 될 것을, 또 이에 대한 분노와 설움을 행동으로 표출했던 것 같습니다. 야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긴 하나,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내었다던지, 방중술을 이용해 궁궐을 더럽혔다던지..

 

이래서 소혜왕후는 그동안 꾹 눌러왔던 폐비윤씨에 대한 악감정을 성종이 폐비윤씨에게서 소원해지자 이를 발판삼아 그녀의 폐위에 앞장서서 공(?)을 세웠던 것 같습니다. 그 때, 폐비윤씨의 소생인 연산군은 겨우 4세로, 아직 어미에 대한 사랑을 채 알지도 못할 어린 나이였습니다. 성종은 이 때, 연산군의 그 비극을 조금이나마 생각을 했는지 폐비윤씨에 대해서는 일체 얘기도 하지말라 어명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아예 폐비윤씨를 죽여 깨끗이 윤비의 일을 마무지짓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연산군의 귀에 들어가 결국 시대에 길이 남는 패륜아가 되었지요..소혜왕후 또한 연산군에게 가격을 당해 얼마 후 죽었다고 합니다.

 

결론은, 짧게 요약하자면 폐비윤씨에 대한 악감정과 약한 집안으로 인한 컴플렉스로 흔들리는 윤비가 매우 못마땅해했던 것 같습니다. 당차고 도도한 시어머니와 가난한 집안에 대한 컴플렉스로 이리저리 불안해하고 휘둘리는 며느리.. 죽이 잘 안 맞았던거죠.

2008.02.07.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kims****
중수
한국사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폐비 윤씨에게는 원자(후에 연산군)이 있잖아요~

 

그래서 윤씨가 원자를 믿고 (방패막이) 권력을 잡고 할까봐 두려워서 그랬을 것 같네요.

 

2008.02.06.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5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youb****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원래 인수대비는 한낫 왕족의 부인에 불과했으나,

세조가 왕이 되면서 인수대비도 왕비의 꿈을 꾸게 되었는데

의경세자가 병으로 죽으면서 예종이 세조의 뒤를 잇고 인수대비는 궁밖에서 살게되는데

예종이 일찍 죽음으로써 자을산군(성종)이 뒤를 잇게 됩니다.

사실 예종에게도 아들(제안대군)이 있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한명회등의 권력층에 의해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고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면서 인수대비도 드디어 권력을 잡게 됐는데요.

성종이 인수대비의 말을 잘들어서 인수대비는 많은 범위에서 권력을 휘들렀었는데..

폐비윤씨가 연산군을 낳고 성종의 총애를 받는것에 위험을 느낀 인수대비는

많은 후궁을 두어 경계에 들어갔지요..

폐비윤씨가 폐비가 된것은 사실은 폐비윤씨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폐비윤씨는 한미한 가문의 여식이였는데 후궁이되었고, 성종의 총애로 왕비가 된 경우였는데,

나머지 후궁들은 뒤에 업은 권력도 있었기 때문에 사실 성종이 총애해주면 좋지만 아니여도 나쁠것 없는 경우였지만 폐비윤씨는 성종의 총애마저 없으면 끝이니 여자 입장에서 투기가 아주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인수대비는 폐비윤씨가 없으면 자신의 권력을 잇는데 좋고 성종도(여색밝히기로 유명한 왕이지요..) 윤씨에게서 마음이 떠나던차라 급히폐위를 시켰는데 폐위 시킨 걸로도 모자라 폐비윤씨가 사약을 받게하는데 일조를 한것 또 인수대비이니 상당한 권력욕이라 하겠지요..

이쯤하고나니 이제 연산군이 알것이 두려워 모든사람들에게 함구하라 명을 내렸는데

연산군이 나중에 폐비윤씨의 어머니인 심씨에게서 피묻은 적삼을 보고 미쳐서 엄귀인 정귀인을 패죽이고

인수대비도 죽였다고 하죠..

인수대비의 권력욕이 부른 벌이 아니였을까 하고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제가 글을 잘 못써서 이렇게 두서없이 썼습니다만,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2008.02.06.

  • 출처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