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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세계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이며 군 의료 개혁의 선구자

[ Florence Nightingale ]

출생 - 사망 1820.5.12. ~ 1910.8.13.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에 대한 대중적인 관념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성스럽고 희생적인 여성,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안락한 삶의 즐거움을 내던진 가냘픈 처녀(...)죽어가는 병사의 침상을 자애의 빛으로 신성하게 만드는 광명의 여인(...)그러나 진실은 다르다. 실제의 나이팅게일은 손쉬운 상상으로 채색되는 바와는 다르다. 그녀는 뭔가 다른 방식으로 일했고, 뭔가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실제의 나이팅게일에게는 전설의 나이팅게일보다도 흥미로운 점이 더 많다. 반면 유쾌한 점은 더 적다.” 리튼 스트레이치

출생에서 간호사로 자원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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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1820년 5월 12일에 이탈리아 피렌체를 여행 중이던 영국인 부부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피렌체’(Firenze)를 영어로는 ‘플로렌스’(Florence)라고 하는데, 그녀의 이름은 바로 이 지명에서 비롯된 것. 영국으로 돌아와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난 플로렌스는 17세 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본인은 하느님으로부터 간호사가 되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가족은 결사 반대했다. 빅토리아 시대까지만 해도 간호사는 비천하고도 부도덕한 직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플로렌스처럼 버젓한 집안에서 태어난 처녀가 자원할 일은 아니었던 까닭이다. “마치 내가 식모가 되겠다고 말한 것 같은 반응이 나왔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그 당시 가족의 반응을 훗날 이렇게 설명했다.

최초의 시도가 좌절된 이후, 플로렌스는 여러 차례 청혼을 거절해 가면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집에 있을 때에는 의학 및 병원 관계 문헌을 입수해서 읽었고, 가족을 따라 국내외 여행을 할 때에는 혼자 인근의 병원과 요양소, 빈민수용소 등을 견학했다.

31세 때인 1851년에는 이집트 여행 중에 다시 한 번 자신의 소명을 확신했고, 33세 때인 1853년에는 드디어 런던에 있는 소규모 자선 요양소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제는 부모도 과년한 딸의 독립적인 활동에 간섭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정마저 깡그리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플로렌스의 어머니는 언젠가 친구들 앞에서 울먹이며 이렇게 한탄했다고 전한다. “우리는 오리인데 어쩌다가 야생 백조를 낳았을까.” 하지만 전기 작가 리튼 스트레이치의 말마따나 “그 가련한 부인의 생각은 틀렸다. 그들이 낳은 것은 백조가 아니라 독수리였으니까.”

크림 전쟁과 나이팅게일의 활약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영토인 흑해 북부의 크림 반도는 기후가 온화한 휴양지로 유명하다. 1854년에 이곳에서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및 동맹국)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표면적인 원인은 종교 갈등이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이에 대한 다른 유럽 각국의 견제였다. 군인이며 전쟁사가인 버나드 몽고메리는 “크림 전쟁은 ‘이렇게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 교훈을 남겼다”고 평가했는데, 왜냐하면 전략과 병참 모두가 지극히 비효율적이어서 사상자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던 까닭이었다. 오스만 측을 지원한 영국군의 경우에도 전사자가 5천 명이었던 반면, 전염병으로 인한 병사자가 1만 5천 명으로 무려 세 배에 달했다. 이에 영국에서는 뒤늦게야 부상병 간호를 위한 자원 봉사대가 조직되어 급파되었는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전쟁이 몇 년 일찍 발발했다면 그녀는 그러한 일을 하기에는 지식, 그리고 아마도 능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반대로 몇 년 늦게 발발했다면 그녀는 십중팔구 자신이 종사하던 업무의 일정에 매여 있었을 것이며, 게다가 나이가 더 들어 있었을 것이다.” 스트레이치의 평가처럼 크림 전쟁은 나이팅게일의 인생에서 그야말로 적시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마침 그녀의 친구인 시드니 허버트가 육군성 고위직으로 근무하고 있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으며, 그는 나중까지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가장 큰 동지이며 후원자가 된다. 1854년 11월 4일, 나이팅게일은 38명의 간호사와 함께 전쟁터인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의 스쿠타리(위스퀴다르)에 도착해서 영국군 야전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스쿠타리의 야전병원에서 부상병을 맞이하는 나이팅게일] 영국의 화가 제리 배럿의 그림.

당시 영국군의 의료 체계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병사를 소모품 정도로 생각한 군부의 아집과 편견 때문에 후방으로 수송된 부상병을 위한 시설은 형편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보급품과 의약품도 물품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웬만한 자선병원과 빈민가의 참상에도 눈 하나 꿈쩍 않았던 나이팅게일조차도 질렸을 정도였다. “나는 유럽 대도시의 최악의 지역에서 집들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었지만, 이곳 막사 병원의 밤 상황과 비교할 수 있는 곳은 가본 적이 없다.” 그녀는 군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묵살당하기 일쑤였고, 병원의 의사들로부터도 협조를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인맥과 자금을 이용하여 야전병원의 조달 업무를 총괄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특유의 성실함과 결단력으로 찬사를 얻게 되었다.

행정가로서 탁월한 능력 발휘

크림 전쟁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이후인 38세 때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1858년

오늘날은 ‘간호사’의 대명사인 나이팅게일이지만, 사실 크림 전쟁에서 그녀가 한 일은 지금 같은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간호’와는 적잖이 거리가 있었다. 약품은 고사하고 침대와 이불조차 부족한 상황에서는, 치료에 앞서 청소와 세탁과 조리 같은 허드렛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나이팅게일은 혼란의 와중에서 야전병원의 체계를 하나하나 세워나가는 일에 돌입했다. “지금 나는 영국 군대에 옷을 만들어 입히고 있어요.” 시드니 허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이팅게일은 헐벗은 병사들에게 옷과 양말을 구해 입히고 신기는 일이 급선무라고 털어놓았다. 어느 여성 자원봉사자가 “어서 가서 저 불쌍한 병사들을 ‘간호’해야겠다”고 비장한 어조로 말하자, 나이팅게일은 “지금 제일 필요한 일은 ‘빨래’를 하는 것뿐”이라고 냉정하게 응수했다.

전쟁 내내 나이팅게일은 후방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렀다. 영국 정부와 군부, 그리고 터키 정부에 만연한 관료주의와 씨름을 해가면서 야전병원을 운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이팅게일의 가장 탁월한 능력은 간호사로서의 자상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행정가로서의 철저함이었다. “그녀가 스쿠타리 병원을 혼란에서 구하여 질서를 세운 일, 사재를 털어 영국 군대에 옷을 마련해 입힌 일, 관청의 빡빡하고 다루기 힘든 권력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확대한 일은 온화한 친절과 여성적인 자기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엄격한 방법, 단호한 규율, 세세한 것에 대한 정밀한 관심, 끊임없는 노력, 불굴의 의지와 확고한 결의를 통해서였다. 그녀의 냉정하고 조용한 태도 밑에는 맹렬하고 열정적인 불꽃이 숨어 있었다.”(리튼 스트레이치)

오늘날 나이팅게일이라고 하면 “백의의 천사”라는 표현이 떠오르지만, 크림 전쟁 당시 그녀의 별명은 “등불을 든 여인”이었다. 게다가 ‘흰색’이 아니라 짙은 색의 검소한 옷을 입었고, 성격 역시 ‘천사’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야전병원에서 밤마다 육군성의 시드니 허버트에게 써 보낸 편지에는 전장의 섬뜩한 현실뿐만 아니라, 군대와 병원에 가득한 자신의 적들을 향한 격렬한 비난이 담겨 있었다.

나이팅게일이 등장한 지 6개월 만인 1855년 봄부터 야전병원의 운영은 훨씬 원활해졌고, 철저한 위생 관리 덕분에 환자의 사망률은 42퍼센트에서 2퍼센트로 뚝 떨어졌다. 전장은 물론이고 본국에서도 그녀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고, 빅토리아 여왕도 치하를 보냈다. 1856년 2월에 파리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3년여 만에 전쟁이 끝나자, 그해 7월에 나이팅게일은 드디어 스쿠타리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온다.

군 의료 체계 향상을 위해 노력

크림 전쟁 당시의 활약은 나이팅게일의 명성을 확립해 준 계기가 되었지만, 실상 그 기간은 그녀의 90년 생애 가운데 불과 2년 반에 불과했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36세였고, 그녀에게는 앞으로도 반세기가 넘는 생애가 남아 있었다. “그 알려지지 않은 수고 기간에 그녀가 달성한 바로 말하자면, 차마 크림에서의 업적보다 더 영예롭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히 중요성만큼은 더 컸다. 진정한 역사는 그 신화보다도 훨씬 더 낯설다. 나이팅게일 본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크림에서의 모험은 단순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그녀의 경력에서 유용한 디딤돌 이상이 아니었다. (...) 그녀의 진정한 삶은 대중의 상상력 속에서 사라진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되었다.”(리튼 스트레이치)

“그런 두뇌! 나는 그녀가 육군성에서 근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나이팅게일을 직접 만나고 나서 이렇게 평가했다. 물론 당시로선 여자가 육군성에 근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대신 나이팅게일은 크림 반도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군 의료 체계의 대대적인 개선을 제안했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한 행동에 돌입했다. 정부와 군부 곳곳에서 갖가지 반발과 핑계가 나왔지만, 그녀는 길고도 꾸준한 싸움으로 하나하나 승리를 쟁취해 갔다. 필요하다면 개인적 명성에 호소하기도 했고, 영향력 있는 친구나 친지까지 인맥을 총동원했으며, 때로는 크림 반도에서 보고 들은 영국군 야전 병원의 끔찍스러운 실태를 대중 앞에 폭로하겠다며 군부 고위층에 협박까지도 불사했다.

크림 전쟁 당시 영국 육군의 사망 원인을 보여주는 보고서에 수록된 ‘나이팅게일 로즈 다이어그램.’ 1858년

1859년, 그녀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시드니 허버트가 육군성 장관이 되면서 군 의료 개혁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불과 2년여 뒤에 허버트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나이팅게일은 정계에서 강력한 후원자를 잃어버렸지만, 이때부터는 가난과 질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대하면서 전반적으로 의료 및 위생 수준이 향상되었다. 나이팅게일은 크림 전쟁 당시에 영국에서 조성된 ‘나이팅게일 기금’을 이용해서 1859년에는 세인트토머스 병원에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를 설립했고, 이후 여러 곳에서 유사한 간호사 양성 기관이 설립되었다. 같은 해에 펴낸 [간호론]은 비록 일반 독자를 위한 저술이지만 오늘날은 간호학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1869년에 나이팅게일은 영국 최초의 여자 의사인 엘리자베스 블랙웰과 함께 ‘여성 의과대학’을 설립했다.

비록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이팅게일은 고전어와 외국어를 독학해 상당한 실력을 쌓았다. 그런가 하면 본인의 신앙을 해설하기 위한 신학 서적도 집필했는데, 그녀가 피력한 신비주의 사상은 그 당시의 주류 기독교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나이팅게일의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업적은 통계 분야에서 이루어졌으니, 본인이 조사한 영국군 야전병원의 여러 가지 현황을 한눈에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고안한 새로운 방식의 그래프 작성법으로 찬사를 얻었고, 1859년에 여성 최초로 왕립 통계학회 회원이 되기도 했다. 1910년 8월 13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잠자던 도중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생전의 공적을 인정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하자고 제안했지만, 친척들의 사양으로 햄프셔의 이스트웰로에 있는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

나이팅게일의 유산

영국 워털루 플레이스에 있는 나이팅게일 동상. ‘등불을 든 여인’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한손에 등잔을 들고 있다.

“만일 어떤 환자가 추워한다거나, 고열에 시달린다거나, 쇠약해 있다거나, 음식을 먹고 괴로워한다거나, 또는 욕창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대체로 질병 자체로 인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간호에 기인하는 것이다. (...) 간호는 투약하거나 습포제를 바르는 것 정도로 그 의미가 제한되어 왔다. 그러나 간호는 환기, 채광, 난방, 청결, 정숙 등의 적절한 활용과 식이의 적절한 선택과 관리 등, 환자의 체력소모를 최소화하면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의미해야만 한다.”([간호론] 중에서)

나이팅게일은 근대 간호학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특히 철저한 위생 관리, 충분한 영양 공급, 아울러 정서적인 안정을 강조한 것은 당대의 통념에 당당히 도전한 탁월한 통찰로 손꼽힌다. 물론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일부 틀린 주장도 있지만, 이는 지극히 합리적인 인물이었던 나이팅게일이 당대의 ‘상식’에 근거해 행동한 까닭에 생긴 자연스러운 한계로 봐야 한다.

나이팅게일에 대한 평가는 이른바 ‘백의의 천사’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가 되기 십상이었다. 즉 그녀를 인류애가 충만한 빅토리아 시대의 헌신적인 여성으로, 또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기여한 혁명가로 보는 것이다. 영국의 전기 작가이며 블룸스버리 서클의 일원으로 유명한 리튼 스트레이치는 저서인 [빅토리아 시대 명사들]에서 기존의 그런 통념이 오해일 수 있음을 지적했다. 대신 그는 탁월한 행정가이며 조직가로서 나이팅게일의 재능과 좌절에 주목하자고 제안했다. 문화사가 자크 바전도 비슷한 평가를 내린다. “나이팅게일의 천재성은 간호 분야에서만 발휘된 것이 아니었다. 기나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도 행정가로서 발군의 능력을 과시했다. 행정가로서 인정을 받으려면 정치적 감각도 남달라야 했는데, 나이팅게일에게는 바로 그런 능력이 있었다.”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의사에게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있다면 간호사에게는 ‘나이팅게일 선서’가 있다(물론 나이팅게일이 직접 지은 것은 아니고, 1893년에 미국 디트로이트의 한 간호학교에서 처음 제정한 것이다). 나이팅게일의 생일인 5월 12일은 매년 ‘세계 간호사의 날’로 기념된다. 나이팅게일은 1975년부터 1994년까지 영국의 10파운드 지폐 뒷면에 등장하기도 했다. “그녀의 영웅적이고 거룩한 헌신의 전통은 역사의 기록 속에 길이 보존될 것이다.” 크림 전쟁에서 나이팅게일의 활약상을 전해들은 앙리 뒤낭이 한 말이다. 훗날 솔페리노 전투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뒤낭은 국제적인 인도주의 구호 단체의 설립을 위해 노력했고, 그 공로로 1910년에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국제적십자-적신월운동’이었다.

참고문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의 간호론](김조자 외 옮김, 현문사, 1997), 리튼 스트레이치, [빅토리아 시대 명사들](이태숙 옮김, 경희대학교 출판국,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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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 출처: 체육학대사전

발행일

발행일 : 2010. 06. 22.

출처

제공처 정보

  • 박중서 출판기획자, 번역가

    글쓴이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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