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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서양철학에 대한 시기별 등장,발전에 대한 흐름에 관해 질문드립니다.
alsk**** 조회수 12,191 작성일2017.10.22
안녕하세요 철학수업을 듣고 철학에 흥미가 생겨 글을 올려봅니다.
일단 철학이라는 의미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었는데요
서양철학의 흐름에 대해서 확실하게 봤으면 좋겠습니다.
철학(존재론,인식론,논리학,가치론)이 있는걸로 알고있는데요
형이상학이 먼지도 궁금합니다.

제가 알고싶은 것은 시기별 흐름을 알고 싶습니다.
@@론 다음에 어떤 사건을 계기로 ##론이 나오고 @@론은 사라졌는지 아니면 다른 @@론으로 바뀌었는지 ##론 다음에는 어떤 론이 나왔는지 시기별로 어떤어떤 철학이 등장했고 유명세를 탔다. 이런 것을 간단명료하게 적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전문가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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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마
태양신
40대 이상 남성 교육인 #과학철학 과학 2위, 철학, 심리철학 27위, 과학 37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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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시기별 흐름

기원전 사람들도 일단 신에 대한 관심과 자연에 대한 관심, 그리고 사람에 대한 생각들을 시작했다.

신화  + 자연철학 + 우주론 +  (존재론,인식론,논리학,가치론)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


적어도 BC 4세기 이후에는, 최초의 그리스 철학자가 BC 6세기 전반에 활동한 밀레토스의 탈레스라는 사실이 널리 공인되었다. BC 6세기에는 아직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라는 말이 없었다. 탈레스는 신화적 요소를 철저히 버리고 세계의 기원을 순수하게 자연에 기초하여 설명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물에서 나온다고 주장했으며 이 주장은 깊은 내륙에서 바다동물의 화석을 발견한 데 근거한 설명이었다.

탈레스의 제자이자 계승자인 밀레토스의 아낙시만드로스(BC 6세기 중엽)는 질서있는 세계(우주)가 ' 아페이론', 즉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어떤 것에서 발달했다고 주장했다. 이 아페이론 안에서 어떤 것이 생겨나 뜨거움과 차가움이라는 대립물을 낳았다. 이 대립물은 즉시 서로 투쟁하기 시작하여 우주를 형성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후계자인 밀레토스의 아낙시메네스(BC 6세기 후반)는 공기가 모든 사물의 근원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탈레스처럼 특별한 종류의 물질을 세계 발전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그러나 선배 철학자들과는 달리 최초의 물질에서 다른 사물이 생겨나는 방식을 농축과 희박이라는 말로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콜로폰의 크세노파네스(BC 560경~?)는 신은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강하므로 덜 강한 어떤 것에서 생겨났을 리 없다. 또 가장 강한 것보다 더 강한 것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신은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뀌지도 않았다. 분명히 이 논증은 무에서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고 존재하는 어떤 것도 실제로 사라질 수 없다는 공리를 바탕으로 삼았다. 이 공리를 극단으로 밀고간 사람은 엘레아 학파의 창시자인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BC 5세기 전반)였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은 생성하거나 소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이 생성하거나 소멸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에서 나오거나 무가 되어야 하는데 무란 본성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이 움직이고 생성하고 소멸하는 세계는 우리에게 낯익은 사견(邪見)의 세계일 뿐이다.

그뒤 두 세대 동안 대부분의 철학자는 아무것도 생성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는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를 사람들의 감각이 제시한 증거와 들어맞게 만드는 길을 찾으려고 애썼다.
원자론자인 레우키포스(BC 5세기 중엽)와 데모크리토스(BC 5세기 후반)도 파르메니데스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레우키포스는 파르메니데스의 논증과 반대로 무가 어떤 방식으로 즉 빈 공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해답을 구했다. 빈 공간과 꽉 찬 공간은 물리세계의 2가지 근본원리이다. 그리고 꽉 찬 공간은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자는 아무것도 그 속으로 파고들어 쪼갤 수 없으므로 절대 나눌 수 없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데모크리토스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의 다양한 현상을 그 원자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설명하는 전체적 체계를 세웠다. 파르메니데스 이전의 모든 철학자는 진짜 세계가 사람들이 지각하는 세계와 다르다고 전제했다. 이때문에 인식론의 문제들이 발생했다. 인식론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은 엘레아의 제논(BC 5세기 중엽)이었다.

그는 운동과 다원성이 있다고 가정하면 매우 이상한 귀결이 나온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이 증명을 위해 제시한 것이 유명한 역설, 즉 아킬레스가 거북이의 출발점에 도달하면 거북이는 좀더 앞으로 갔을 것이고 이 과정이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에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는 역설이었다 (→ 색인 : 아킬레스의 역설).

BC 6세기말경에는 또 한 종류의 철학이 생겨났는데 이 철학은 얼마 뒤에 이전의 철학들과 상호관계하기 시작했다. 사모스의 피타고라스(BC 572~492)는 "모든 사물은 수(數)이다"라는 학설을 개진했다. 이 명제는 모든 사물의 본질과 구조는 그 사물 속에 담겨 있는 수적 관계를 찾아냄으로써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들은 이 원리를 모든 분야에 적용하려 했다. 그중 한 사람인 메타폰툼의 히파소스는 BC 450년경 정다각형의 변과 대각선 사이의 양적 관계를 정수비로 나타낼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발견 때문에 피타고라스주의 철학은 분리되었으며, 그중 한 학파는 뛰어난 수학적 발명에 몰두하여 모든 정량적(定量的) 과학의 기초를 놓았다


BC 5세기 중엽 그리스 사상은 소피스트의 출현을 통해 약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소피스트라는 이름은 "창의력있고 똑똑함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뜻의 동사 'sophizesthai'에서 파생했는데, 이 이름은 이전까지 등장한 철학자들과 달리 가르치는 대가를 요구하는 소피스트의 성격을 잘 묘사해준다. 그들은 진짜 세계가 현상세계와 매우 다르다는 믿음을 낳은 이전까지의 철학 흐름에 반기를 들었다.

소피스트들은 사람들이 이른바 진짜 세계에 살지도 않는데 "그런 사변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아브데라의 프로타고라스(BC 5세기 중엽)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인간은 모든 사물의 척도이며, 있는 사물에 대해서는 그것이 있다는 척도이고 없는 사물에 대해서는 그것이 없다는 척도이다."

또 소피스트들은 대부분의 행위규칙이 관습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인생에서 성공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영향력을 얻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칼케돈의 트라시마코스(BC 5세기 후반)는 "더 강한 사람이나 더 나은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 올바른 것", 달리 말해서 다른 사람을 자기 뜻에 따르게 하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선언했다. 소피스트들은 교묘한 논증방식 때문에 점점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리스 철학의 기본 사상가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교묘한 논증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로 여겼으나, 그는 대가를 바라고 가르치지도 않았고 그의 목표는 소피스트의 목표와 아주 달랐다. 그의 삶과 활동에 대한 모든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무엇이든 직접 가르치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늙든 젊든, 높은 신분이든 낮은 신분이든 모든 사람과 끊임없이 대화했으며, 질문을 통해 그들의 의견과 행동 속에 있는 모순점을 밝혀내려 애썼다.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가장 중요한 제자는 아테네의 귀족가문 출신인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젊은시절에 소크라테스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항상 개인의 태도에 관심을 기울인 스승과는 달리 정치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린시절 플라톤은 아테네 대중이 야망에 찬 정치가들의 찬란한 계획에 현혹되어 무모한 정복에 가담했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하는 사건을 목격했다.

이 재난의 결과 민주주의가 무너졌을 때 플라톤은 처음에는 30인의 참주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특히 그들의 지도자인 크리티아스는 플라톤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러나 곧 참주정권보다는 그동안 멸시한 민주주의가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두정치가 무너지고 회복된 민주주의가 BC 399년 새 법전을 채택했을 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처형에도 불구하고 다시 큰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몇 해 지나지 않아 플라톤은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거나 통치자가 철학자가 되지 않으면 정치사정은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플라톤은 철학자들을 교육하는 기관인 아카데메이아를 세웠다. 그뒤 여러 해 동안 그는 몇몇 대화편 외에도 대작 〈국가 Politeia〉를 써서 이상 국가의 윤곽을 그렸다. 사회에서 모든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감정과 욕망이기 때문에 이성의 지배만을 받고 충성스러운 전사계급이 뒷받침하는 엘리트가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 두 통치계급은 개인재산을 가져서는 안 되며 극도로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후기의 정치 저작인 〈정치가 Politicus〉와 〈법률 Nomoi〉에서는 오직 신만이 〈국가〉의 철인통치자들이 지닌 절대권력을 위탁받을 수 있음을 밝히려 했다. 삶이 일반법규로 지배하기에는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모든 법은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하지만, 인간 통치자들은 엄격한 법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플라톤이 이론철학에 가장 많이 이바지한 것은 이데아론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방법을 사용하여 이데아론을 이끌어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자들에게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행동이 좋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경건하다거나 용감하다고 말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냐고 자주 물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러한 진술을 할 때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플라톤은 때때로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좋다'고 할 때 자기 앞에 보고 있는 에이도스 또는 이데아, 즉 상(像)이 무엇인지 물었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분명한 대답은 없다. 그리고 질문의 의도는 대화상대자가 그러한 진술을 할 때 분명하게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를 어떤 방식으로든 본다는 사실을 알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들은 감각세계를 넘어선 다른 세계에서 오는 것처럼 보이며 플라톤은 이 세계를 이데아계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감각으로 지각하는 모든 사물은 영원한 이데아의 매우 불완전한 모사인 것으로 보인다. 이 이데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은 선(善)의 이데아이다. 선의 이데아는 "존재와 인식을 넘어서" 있지만 존재와 인식의 기초이기도 하다.

이 맥락에서 ' 존재'란 존재 자체를 의미하지 않고, 어떤 사람, 어떤 사자, 어떤 집 등 성질이나 모양으로 정의되는 특정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인식은 이 현세의 모양에 대한 지각에서 출발하지만 더 높은 이데아의 영역으로 올라간다. 〈국가〉의 제7권에 나오는 유명한 동굴 이야기에서 플라톤은 보통 사람을 동굴에 앉아 벽을 바라보는 사람에 비유했는데 이 사람은 자기 등 뒤에 있는 진짜 사물의 그림자만 보고 있다고 했다 (→ 색인 : 동굴의 신화).

그리고 플라톤은 철학자를 밝은 곳으로 나와 이데아의 진짜 세계를 본 사람에 비유했다. 그 사람이 동굴로 돌아가면 밖에서 본 빛 때문에 눈이 멀어 그림자를 이전보다 잘 분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실재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가장 위대한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감각으로 지각하는 개별 사물들이 불완전하게 모사할 뿐인 초월적 이데아들의 영역이 따로 존재한다고 가정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지각된 사물들의 세계가 진짜 세계이고, 사물에 대한 인식체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그 사물들의 특정 유형이나 집단에 관해 어떤 점이 일반적으로 참이라고 말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 또는 합목적성 이론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중요한 요소를 보존했다. 그는 모든 생명체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더 완전한 상태로 발달하며 그뒤에는 자손을 낳으면서 다시 쇠퇴하고 결국 죽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모든 개체가 똑같은 정도의 상대적 완전성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질문에 대답하면서 인간은 뛰어난 사회적 동물이므로 개인으로서는 인간 자체에 가능한 완전성들 가운데 불과 몇몇에만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몇몇 개인은 특수한 종류의 활동을 하기에 매우 뛰어난 재주와 성향을 타고 난다. 그들은 이 성향을 따를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이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여를 할 것이다.

또 어떤 개인은 다양한 기능에 남보다 쉽게 적응할 수 있고, 따라서 한 활동에서 다른 활동으로 옮겨다니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다른 동물이 가질 수 없는 인류의 엄청나게 큰 장점이다. 왜냐하면 이 장점 덕분에 인류는 모든 종류의 환경에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개인도 인류 전체에 가능한 모든 완전성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이 장점은 상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경험관찰에 철저히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그는 학생들에게 법과 정치제도가 어떻게 작용했고 어느 지점에서 그 창시자들이 잘못 이해했는지를 알기 위해 모든 유명한 도시와 국가의 법·정치제도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라고 권유했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독단적 철학자로 여겨졌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는데, 그 이유는 그의 탐구결과들이 절대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는 위대한 경험주의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뒤 제자들이 그의 연구를 이어나갔다. 다음 60여 년 동안 페리파토스 학파는 문학사와 물리과학이라는 2가지의 서로 다른 방향으로 퍼져나갔다. 그뒤 이 학파는 잠시 쇠퇴했으나, AD 1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 원고가 다시 발견된 후 그의 저작을 주석하는 큰 학파가 생겨났으며, 이 학파는 중세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헬레니즘과 로마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사후의 시대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붕괴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 도시국가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계승한 헬레니즘 시대의 왕들이 벌인 권력 다툼의 저당물이 되었다. 이 어지럽고 불안한 환경에서 2개의 독단적 철학체계, 즉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이 생겨났다.

스토아 학파
스토아 철학체계는 키티온의 제논이 만들었다. 그는 상인으로서 아테네로 가다가 바다에서 재산을 잃어버렸다. 견유(犬儒)학파의 크라테스는 제논을 위로하면서 물질 재산이란 인간의 행복에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제논은 아테네에 머물면서 자신의 철학을 세우고 가다듬은 뒤 스토아 포이킬레(여기서 스토아주의라는 이름이 나옴)라는 공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제논은 인간 행복의 기초는 (자기 자신과) '합일하여' 사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훗날 정식으로 "자연과 합일하여 사는 것"이라고 바뀌었다. 인간에게 유일한 선은 덕을 가지는 것이며, 부나 가난, 건강이나 병, 삶이나 죽음 등 다른 모든 것은 아무 관계도 없다. 모든 덕은 올바른 인식에만 기초한다. 즉 자제는 올바른 선택에 대한 인식, 인내는 무엇을 참아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 정의는 '분배'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기초한다.

모든 악의 원인인 정념은 무엇이 참으로 좋은지를 잘못 판단한 결과이다. 세계는 신의 로고스(본래의 뜻은 '말' 또는 '이야기'임)가 지배한다. 이 로고스가 세계를 완벽하고 질서있게 유지한다. 인간은 이 질서에서 벗어나거나 이 질서에 저항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질서를 교란할 수는 없고 자신을 해칠 뿐이다.

에피쿠로스 학파

제논과 같은 시대의 에피쿠로스는 제논에 반대한 사람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여러 면에서 타당하다. 스토아 학파가 쾌락과 고통은 인간의 행복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친 반면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행복한 생활의 본질로 삼았다. 스토아 학파는 신의 섭리가 있다고 믿었으나 에피쿠로스는 신들이 인간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두 철학은 이처럼 대조적이지만 몇 가지 중요한 면에서는 똑같다. 비록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좋은 생활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결코 방탕한 생활과 주색잡기를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가 생활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주장한 것은 소박한 쾌락이었다.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 카루스(BC 95경~55)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De rerum natura〉라는 시에서 에피쿠로스가 인류를 모든 종교적 두려움에서 해방시킨 사람이라고 찬양했다. 에피쿠로스 자신도 이러한 해방이 자기 철학의 1가지 목적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신들은 너무나 탁월하므로 번거롭게 유한한 생명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지만, 인간은 신들을 완전한 존재로 바라보는 일이 중요하고 그래야만 완전성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에피쿠로스주의가 방탕한 생활을 정당화한다고 오해하기 시작한 것은 로마 시대에 들어와서였다.

회의주의와 그밖의 학파

엘리스의 피론이 창시한 회의주의 학파는 아무도 어떤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없으며, 자기가 감각으로 지각한 것이 환상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피론은 자기 생각의 실천적 결론을 철저히 수행했다. 심지어 그는 거리를 걸을 때 마차나 그밖의 장애물을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실한 제자들이 항상 따라다니며 그가 다치지 않게 했다고 한다.

피론을 지지한 후기 인물인 섹스토스 엠피리코스(AD 2~3세기)는 〈독단론에 맞서 Pros dogmatikous〉라는 대작을 써 이전 철학자들의 글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는데, 그 덕분에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를 많은 글이 보존되었다. 데이비드 흄과 이마누엘 칸트는 고대철학에 관한 대부분의 지식을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의 저서에서 얻었다.

BC 4세기에 생긴 아테네의 모든 철학 학파와 분파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교도적 성격을 이유로 AD 529년 폐쇄 명령을 내린 고대 말기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 약 1,000년에 걸친 이 기간에 늘어난 새 학파는 신피타고라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뿐이었다. 그중에서 신플라톤주의가 철학의 역사에는 훨씬 더 중요했다.

신플라톤주의는 주로 플로티노스의 연구에서 나온다. 플로티노스는 저서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의 철학은 제자 포르피리오스가 그의 글을 정리하여 묶어 내놓은 〈엔네아데스 Enneads〉를 통해 알려져 있다. 비록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을 연구함으로써 나온 것이지만 당시의 종교적·신비적 경향과 일치하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철학이다. 플로티노스는 존재에 여러 층이 있다고 가정했다. 그중 가장 높은 층은 일자(一者) 또는 선(善)의 층이며 이 두 층은 동일하지만 인간의 언어로 묘사할 수는 없다.

중세철학

중세철학은 중세, 즉 4~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부터 15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 서양에서 일어난 철학적 사변을 가리킨다. 이 시기에 철학은 계속 그리스도교 사상 특히 신학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고 주요철학자들은 성직자였다.

중세 초기 철학

중세 초기는 12세기까지 이어졌으며 이 시기에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그리스도교 문화가 서유럽에 점차 정착했다. 이 어지럽고 어두운 시대에 철학을 키운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354~430)·보이티우스(480경~525경) 등 후기 로마 사상가와 안셀무스(1033~1109) 같은 수사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이 시대의 철학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그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 방법과 이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들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 세계 너머에 진리의 영원한 정신적 영역이 있으며, 이 영역은 인간정신의 대상이고 인간의 모든 노력의 목표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이 진리를 그리스도교의 신과 동일시했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정신의 내부로 향하고 이 정신을 뛰어넘어 진리를 보여주는 지성의 빛으로 나아감으로써 진리와 미의 이신적 세계와 만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두 실체, 즉 육체와 영혼의 복합체이며 그중 영혼이 훨씬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에서 육체를 배제해서는 안 되며 죽은 뒤 육체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보증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Confessions〉(400경)과 〈삼위일체론 De Trinitate〉(400~416)에는 인식·지각·기억·사랑 등에 대한 날카로운 심리학적 분석이 가득 차 있다. 〈신국론 De civitate Dei〉(413~426)에서 인간 역사의 전체 이야기는 인류가 신의 구원을 받아 결국 창조주 안에서 안식하는 진보적 움직임으로 나타나 있다.

보이티우스와 교부들

안셀무스
수사들은 변증법과 철학에 민감한 관심을 보였다.

 안셀무스는 이탈리아인으로서 프랑스 베크 수도원의 대원장이 되었고 그뒤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 안셀무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신앙과 이성을 모두 사용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신앙이 먼저지만 이성이 반드시 뒤따르면서 사람들이 믿는 것에 이유를 제공한다.

수사들이 성서의 권위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고 이성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는, 신에 관한 모범적 명상록을 써달라고 요청함에 따라 그는 〈독백론 Monologium〉(1077)을 썼는데, 이 속에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근거해서 쓴, 신의 존재에 대한 3가지 증명이 들어 있다. 그는 다수의 선한 것은 최고로 선한 것 또는 신에서 생겨나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와 아벨라르

즉 보편자는 사실상 정신적 개념이지만, 보편자가 의미를 가지는 까닭은 오로지 개체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보편자는 개체들의 공통적 종(種)을 의미하며 이 공통적 종은 신이 개체들을 신의 똑같은 관념에 따라 창조한 결과이다.

스콜라 철학으로의 이행

12세기에는 그뒤 서양철학의 전역사에 영향을 끼친 문화혁명이 일어났다. 자유학예를 기초로 삼아 문법과 라틴어 고전을 강조한 낡은 교육양식은 논리학·변증법·과학분야 등을 강조한 새로운 방법으로 바뀌었다. 철학에서는 플라톤주의가 쇠퇴하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점점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12세기 후반과 13세기초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라틴어로 번역됨으로써 일어났다. 그리스·아랍과 유대교에서 유래한 많은 저작이 당시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유럽에 '지식 폭발'을 일으켰다.

아랍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책 가운데에는 이븐 시나(980~1037)의 글도 있었다. 그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슬람 철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을 존재로서의 존재(ens qua ens)에 관한 학문으로 보았다는 해석, '존재'·'본질'·'실존' 등 많은 형이상학 용어에 대한 분석, 신 존재에 대한 증명 등은 그리스도교 집단들도 찬성하건 반대하건 자주 인용했다.

모제스 벤 마이몬이라고도 불린 마이모니데스는 〈혼란에 빠진 자들을 위한 길잡이 Dallat alhrn〉(1190경)에서 이성과 신앙은 모두 신에게서 나오므로 둘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으며, 겉으로 보이는 모순은 성서나 철학자들 중 어느 한쪽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양 학자들이 이 새로운 사상 학파들을 융합하고 있는 동안 스콜라 철학의 중심이 된 대학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파리대학교(1150~70 창설)와 옥스퍼드대학교(1168 창설)이다. 스콜라 철학이란 이 대학 교수들의 신학적·철학적 가르침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단일한 하나의 스콜라 철학 교리란 없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각각 자기 나름의 교리를 전개했으며 이 교리는 종종 동료 교수의 교리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의 시대

그로스테스테와 베이컨

그로스테스테의 제자 로저 베이컨(1220경~92경)은 인간은 추론과 경험을 통해 지식을 얻고 경험이 없으면 그 지식을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베이컨은 모든 과학을 포괄하고 신학에 의해 조직된 보편적 지혜를 만들어내려고 애썼다. 또 교황의 지도 아래 모든 사람을 연합할 수 있는 단일한 전세계적 사회 또는 '그리스도교 공화국' 건설을 제안했다.

오베르뉴의 기욤

파리대학교에서 오베르뉴의 기욤(1180경~1249)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이교사상과 이슬람교 사상의 위협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세계가 영원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 그리스도교의 창조관을 위배한다고 반대했으며, 신과 창조에 관한 견해 때문에 이븐 시나의 개념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세계를 영원히 필연적으로 창조하는 이븐 시나의 신은 세계를 자유롭게 직접 창조하는 그리스도교의 신 개념과 반대였다.

보나벤투라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 보나벤투라(1217경~74)도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에 대한 아랍인 주석가들이 점점 인기를 얻는 것에 경계심을 나타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연 과학자로 존경했지만 형이상학자로서는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를 더 좋아했고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를 최고로 여겼다. 보나벤투라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동료들에 대해 가한 가장 큰 비판은 그들이 신적 이데아들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점이었다.

그결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이데아들에 따라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보나벤투라는 철학과 신학을 실제로 구분하는 데 반대했다. 철학은 신앙의 안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철학은 신을 보는 데서 절정에 이르는 높은 수준의 인식으로 나아가는 한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마그누스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13세기에 크게 번성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마그누스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1224/25~74)는 스승과 마찬가지로 고대 철학자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최근의 아랍과 유대 사상가들을 높이 평가했다. 그에 따르면 이성과 신앙은 똑같은 신적 원천에서 나온 것이므로 서로 모순될 수 없다. 당시 보수적인 신학자와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의심하고 있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해 가치있음을 당시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주석서들을 썼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이보다는 못하지만 플라톤주의가 그리스도교를 위해 유용한 도구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이 사상들로부터 빌려온 모든 것을 변형하고 심화시켰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그리스도교를 억지로 조화시키지 않고 철학원리, 특히 존재개념을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둘 사이의 조화를 이룩했다. 그는 존재를 현실태로 생각했다. 그에게 신은 순수존재 또는 현실태이다. 창조물은 그 본질에 따라 존재에 관여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이나 본질이 허용하는 정도로만 존재 또는 현실태에 관여한다. 신과 창조물 사이의 기본적 차이는 창조물이 본질과 실존의 실제적 혼합에 의해 구성되지만 신의 본질은 바로 신의 실존이라는 점이다.

중세 후기 철학

중세 후기에도 이전의 철학하는 방식들이 계속되었고 특정의 사상학파들로 형성되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에서는 토마스주의(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과 철학)를 항상 엄격하게 신봉하지는 않았지만 토마스주의가 공식 가르침이 되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중세 후기 내내 토마스주의와 경쟁한 새로운 양식의 신학과 철학을 개발했다.

둔스 스코투스

 둔스 스코투스에게는 제일원동자나 존재 자체라는 개념보다 무한한 존재라는 개념이 신에 대한 인간의 가장 완전한 개념이었다.

오컴
 신은 창조할 때 미리 생각해둔 이데아를 사용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우주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그결과 창조물들은 공통적인 본성이나 본질이 없다. 실재는 없고 개별 사물만 있을 뿐이다.

오컴은 신의 절대적 자유를 철학적·신학적 설명의 원리로 자주 사용했다. 자연의 질서는 신이 자유롭게 창조했기 때문에 지금과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 불은 열을 내지만 차가운 것이 될 수도 있었다. 또 도덕 질서도 다른 것이 될 수 있었다. 신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인간에 대한 미움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진리에 이르는 데 인간 이성의 힘을 지나치게 신뢰하지 않는 것이 오컴의 특징이었다. . 오컴이 내놓은 또 하나의 원리는 가설의 수를 불필요하게 늘려서는 안 된다는 원리이다. 이 사유의 경제성 원리는 ' 오컴의 면도날'이라 불린다.

근대철학

르네상스와 근대 초기

유럽의 르네상스는 동양에서 3가지 기계 발명품이 들어온 직후 일어났다. 첫째, 화약은 봉건체제의 요새를 폭파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그결과 교회의 지배를 위협한 민족주의라는 새 정신의 촉진제가 되었다. 둘째, 인쇄술은 학문을 널리 퍼뜨리고 세속화했으며 교회 상류층의 지식 독점을 줄였고,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철학·고전을 복원했다. 셋째, 나침반은 서반구를 개방한 신대륙 탐험여행을 일으켰으며 육체적 모험의 새로운 정신과 자연의 구조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관심을 상징했다.

정치이론·인문주의·자연철학

르네상스가 교회의 군림, 권위, 스콜라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대해 반기를 들기 시작하자, 시민사회·인간·자연에 초점을 맞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높아졌다. 이 3가지 관심은 르네상스 철학의 유력한 3갈래, 즉 정치이론·인문주의·자연철학으로 정확히 재현되었다.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민족적·국제적 문제가 새롭게 관심의 초점이 되자 유럽에서는 정치철학이 성장했다.
'자연법' 사상은 자연적 정의와 도덕적 책임에 관한 절대적 신조들이 본래 인간의 이성 속에 있으므로, 이것은 주권국가의 횡포에 의해서도 바뀔 수 없으며 오히려 막강한 정치권력의 자의적 행사에 맞서는 억제책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인문주의는 과학에 대한 의심과 종교에 대한 무관심에서 생겨났다. 인문주의가 인간의 개인적 책임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자신을 창조할 가능성을 강조한 것은 대부분 여러 주요고전 원문들을 재발견한 결과였다. 이 고전 원문들은 중세 학문의 흐름을 뒤바꾸는 데 이바지했다. 플라톤에 대한 열광은 메디치 가문이 지배한 피렌체와 그 주변에서 부활했다.

도덕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은 르네상스 교육의 요구에 들어맞았으며 관료와 신사에 대한 르네상스의 이상을 새롭게 뒷받침했다. 또 플라톤은 수학의 철학적 중요성을 강조했고 수와 정확한 계산으로 자연의 비밀을 발견하려는 피타고라스의 시도를 다시 보여주었다. 플라톤주의의 이 측면은 인문주의에서 르네상스 과학의 영역으로 넘쳐 흘러들었다.

현대세계에서 철학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좁게 정의하여 종교·과학과 구분하려 했다. 그러나 이렇게 초점을 좁힌 것은 철학의 역사에서 매우 최근에야 이루어졌으며 그 시기는 적어도 18세기 이후였다. 피타고라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 초창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물리세계에 대한 이론가들이었지만 철학과 자연과학을 구분하지 않았다.

르네상스는 이 폭넓은 생각을 유지했다. 갈릴레오와 데카르트는 수학자·물리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였다. 그리고 물리학은 적어도 아이작 뉴턴 경이 1727년 죽을 때까지는 ' 자연철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까지 우주는 위계적·유기적이며 신이 정한 것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우주는 다원적이고 기계 같으며 수학적 질서를 가진 것이었다. 중세에 학자들은 의도, 목적, 신의 의향 등의 견지에서 생각했고, 르네상스 시대 학자들은 힘, 기계적 동인, 물리적 원인 등의 견지에서 생각했다. 이 모든 점은 15세기말에 이르면 뚜렷이 나타났다.

피렌체의 위대한 예술가·과학자·인문주의자이자 역학의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노트 Notebooks〉 속에는 다음의 3가지 명제가 있다. 첫째, 경험은 누구든 좋은 글을 쓴 사람의 정부(情婦)였으므로 나는 경험을 나의 정부로 삼아 모든 문제에서 그것에 호소한다. 둘째, 도구과학 또는 역학은 가장 고귀하고 다른 어떤 과학보다 더 쓸모있으며, 움직이는 모든 활기찬 물체는 이 과학을 바탕으로 작용한다.

셋째, 수리과학이나 수리과학에 기초한 과학 중 어떤 것도 적용할 수 없는 곳에는 확실성이 없다.


이 3가지 명제를 통해 표현된 것은 첫째로 경험론의 원리, 둘째로 기계론적 과학의 옹호, 셋째로 수학적 설명에 대한 신앙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과 철학은 바로 이 3가지 정식을 기초로 삼았다.

갈릴레오의 연구에서 르네상스 과학의 매우 독창적인 경향들이 모두 무르익었다. 이러한 경향은 알렉산드리아 수학의 부활, 실험에서 렌즈와 망원경 같은 새로운 도구의 사용, 수학이론을 틀림없이 응용할 수 있는 기초를 가진 물리학에서 확실성의 추구, 운동하는 물질이 수학적 단순성을 가진 모형과 일치하기 때문에 과학에서 절대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일은 정당하다는 기본적 신념 등이었다.

경험론과 합리론의 등장

베살리우스의 엄밀한 관찰기법과 갈릴레오의 수학이론에 대한 의존 사이의 과학적 대조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철학과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 사이의 대조로 다시 나타났다. 경험론과 합리론 사이의 이 대조는 17~18세기의 철학논쟁을 지배했다. 르네상스 경험론의 탁월한 주창자인 프랜시스 베이컨 경(1561~1626)은 철학이 자연과학을 굳건한 토대 위에 재건해야 할 새로운 추론기법이라고 생각했다.

〈신 오르가논 Novum Organum〉(1620)에서 "철학의 참된 작업은 지성을 구체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조사에 응용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철학의 특징에 대한 그의 핵심 주장은 철학이 바로 이런 조사를 위한 기법이라는 점이었다.

베이컨은 사실에 대한 깊은 의식과 관찰의 우선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법칙과 일반명제를 이끌어냈다. 또 형상에 대한 그의 견해는 매우 비플라톤적인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형상은 본질이 아니라 영원한 기하학적·역학적 구조였다. 그러나 철학의 역사에서 그가 계속 자리를 차지하는 까닭은 경험을 타당한 인식의 유일한 원천으로 철저하게 옹호했기 때문이다.


 홉스는 모든 인식의 기원이 감각인상이고 모든 감각은 외부의 물체가 감각기관에 작용함으로써 생긴다고 생각했다.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철학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과거의 영향들을 결합하여 놀라울 정도로 독창적이면서도 당시 과학의 경향에 맞는 사상을 종합했다. 그뒤 모든 역사가는 마음 속으로 그를 현대 철학정신의 창시자로 꼽는다.

 위대한 수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해석기하학을 창시했고, 많은 물리학적·해부학적 실험을 했으며, 갈릴레오의 연구를 잘 알고 깊이 존경했다.

데카르트는 베이컨처럼 감각과 개연성이 아니라 절대적 확실성 원리를 자연과학의 기초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러므로 그의 형이상학은 본질면에서 3가지 원리로 구성되었다.

 첫째, 의심할 여지가 없는지에 대한 시험을 거치지 않은 모든 생각을 배제하기 위해 완벽하고 체계적인 회의 절차를 채택한다( 회의주의).

 둘째, 명석판명하지 않고 모순이 없지 않은 어떤 관념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수리주의).
셋째, 모든 인식을 자기의식의 확실성이라는 기반 위에 세우고,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의심하여 흔들 수 없는 유일한 본유관념이 된다( 주관주의). 데카르트는 자아를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완전한 신이 존재한다고 연역했다.

그리고 완전한 존재는 틀리거나 속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신이 인간의 마음 속에 불어넣은 물질세계에 대한 관념들도 틀림없이 참이라고 추론했다. 이와 같이 자연세계에 관해 확실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신의 완전성과 신의 선물인 명석판명한 관념이 보증했다.

대륙 합리론의 전통은 2명의 철학자, 즉 네덜란드 유대인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1632~77)와 같은 시대의 박학한 라이프치히 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가 이어받았다. 스피노자는 철학이 삶의 지혜를 얻고 인간의 완성을 이루기 위한 개인적·도덕적 탐구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러한 탐구를 수행하면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기본 도구 중 많은 것을 빌려 썼는데, 특히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 Stoicheia〉에 나온 기하학적 본보기를 사용하여 철학 지식을 연역체계로 바꾸려는 수학적 방법을 빌려 썼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을 통해 우주를 전체로서 인식할 때 철학이 찾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라이프니츠는 처음으로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를 구별했고, 논리학과 수학에 나오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타당한 '필연적' 명제와 과학에 나오는 특정 존재조건에 대해서만 타당한 '우연적'(또는 경험적) 명제를 구분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데카르트·스피노자와 공유한 극단적 합리론에 있다.  "참된 추론은 필연적 진리 또는 영원한 진리에 의존하며, 이러한 진리는 관념들의 의심할 수 없는 연관과 틀림없는 결론을 확립해준다".

계몽주의

또한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는 수학을 자연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데 기초한 최초의 위대한 물리학적 종합이었다. 이성이 권위와 자율성을 지닌다는 기본적인 생각은 근본적으로 뉴턴 연구의 귀결이었으며, 18세기에 모든 철학작업을 지배했다.

전통적 영국 경험론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자연의 실재에서 정신의 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관심을 돌리고 그 정신의 장치들을 경험적으로 설명하면서, 르네상스의 초점이었던 단순한 수학적 인식요소보다는 감각적 인식요소에 의존했다. 이른바 영국 경험론 학파는 칸트 시대 이전까지 계몽주의 철학을 이끌어나갔으며 사물보다는 관념, 본유적·필연적 원리보다는 경험을 기반으로 철학을 연구했다.

존 로크의 〈인간 오성론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690)은 진리의 새로운 기준을 제안함으로써 근대 철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결정적으로 뚜렷이 보여주었다. 이 책의 본래 의도는 "인간 인식의 기원, 확실성, 범위를 탐구하는 것"이었으며, 여기에는 다음의 3가지 과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첫째 인간 관념의 기원을 찾아내는 것, 둘째는 이 관념의 확실성과 증거로서의 가치를 밝히는 것, 셋째는 덜 확실한 모든 인식의 권리를 검토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일반 관례에 따라 로크는 ' 관념'을 "인간이 사유할 때 지성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모든 합리론 학파에게 관념의 확실성은 그 자명성, 즉 그 명석성과 판명성의 함수였던 반면 로크에게 관념의 타당성은 분명히 그 관념이 생기는 양상과 방식에 달려 있었다.

〈인간 오성론〉에서 로크는 기초적 감각의 벽돌들을 가지고 인간이 개념적으로 경험하는 전세계를 만들어내려 했다. 그의 인식론의 기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 관념의 궁극적 원천은 감각이고, 모든 정신작용은 단순한 감각자료를 결합하고 혼합하여 복잡한 개념적 도구를 만드는 것이다 (→ 색인 : 감각 여건). 로크는 굳기·형태·연장(延長)·운동·정지 등 대상 자체의 실제 특성인 ' 제1성질'과 색·맛·냄새 등 정신이 대상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에 따라 나타나는 내적 결과일 뿐인 ' 제2성질'을 구분했다.

로크를 계승한 조지 버클리(1685~1753)가 극복하려 애쓴 것은 바로 이러한 제1성질과 제2성질의 이원론이었다. 버클리는 궁극적으로 제1성질이 제2성질로 환원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경험론은 추상적 관념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그는 일반 개념이란 마음이 꾸며낸 허구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상과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감각 인상을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했다. 그리고 과학은 물질이라는 개념이 없어도 잘될 수 있다고 논증했다. 자연은 인간이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일 뿐이며, 이 말은 감각자료를 '실체에 붙어 있는 성질'이라기보다 '마음의 대상'으로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회의론자 데이비드 흄(1711~76)도 인식의 기원을 감각인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로크가 마음의 능력에 믿을 만한 질서가 있다고 보고 버클리가 어떤 정신적 능력을 나타내는 심성 자체를 인정한 반면 흄은 집요한 분석을 통해 외부세계뿐 아니라 마음에도 우연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에 따르면 지각경험의 모든 통일성은 '마음의 연합능력'에서 나온다.

'관념들의 연합'은 사실이지만 이 연합이 만들어내는 유사성·인접성·인과성 등의 관계는 본질적 타당성을 지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관계는 설명할 수 없는 '정신적 습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든 인식이 기초로 삼는 인과원리는 사물들 사이의 필연적 연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그 사물들이 항상 연결되는 우연적 사건일 뿐이다.

그밖의 계몽주의 운동

영국 경험론 학파가 18세기에 탄생한 유일한 철학 유형은 결코 아니었다. 지적·철학적 표현면에서 계몽주의의 본류에서 갈라진 경향들이 많이 생겨났다. 라마르크의 기사인 장 바티스트, 조르주 퀴비에, 뷔퐁 백작인 조르주 루이 르클레르 등은 동물 분류체계를 완성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콩도르세 후작인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와 몽테스키외, 이탈리아의 잠바티스타 비코, 영국의 애덤 스미스 등은 역사학·경제학·사회학·법률학이 과학으로서 출발하는 모습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흄, 제러미 벤담, 영국의 도덕철학자들은 윤리학을 전문적 철학 연구분야로 만들고 있었다. 샤프츠버리 백작 3세인 앤소니 애슐리, 에드먼드 버크, 요한 고트셰트, 알렉산더 바움가르텐 등은 체계적 미학의 기초를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인식론 외에 계몽주의가 크게 기여한 분야는 사회·정치 철학이었다.

로크의 〈시민정부론 Two Treatises of Civil Government〉(1690)과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Du contrat social〉(1762)은 그 시대의 더욱 새로운 정치적 요구들을 바탕으로 정치 결사를 정당화했다. 로크와 루소에게서 모든 근대 자유주의의 싹, 즉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시민의 자유, 인간의 근본적 존엄 등에 대한 신념을 볼 수 있다.

18세기는 민주주의 혁명의 시대였다. 정치문제는 자유와 불평등의 문제였으며, 정치이론은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의 관점으로 표현되었다. 로크의 정치이론은 왕의 신성한 권리와 주권자의 절대권력을 분명하게 거부했다 (→ 색인 : 왕권신수설). 그는 모든 사람이 자유와 평등의 자연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본래 살고 있는 자연상태는 무언가 불편한 점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단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살기 위해서" 서로 뭉쳐 사회를 만들었다. 정치권력은 결코 그 궁극목적인 공익과 무관하게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 루소의 경우에도 사회계약이라는 협약이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모든 합법적 권위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러나 개인의 모든 권리가 일반 의지에 예속되는 만큼 자연상태의 자유는 시민사회의 자유에 종속되어야 한다. 루소에 따르면 국가는 하나의 도덕적 인격체로서 그 생명은 구성원들의 결합이고, 그 법은 일반의지의 행위이며 그 목적은 시민의 자유와 평등이다. 정부가 국민의 권력을 찬탈할 때 시민은 저항할 의무가 있다.

이성에 대한 칸트의 비판적 고찰

쾨니히스베르크대학 교수 이마누엘 칸트는 계몽주의 철학의 진정한 절정을 뚜렷이 보여준다. 칸트의 실질적인 위대한 업적은 인식에서 감각적 요소와 선천적 요소를 관련시킴으로써 라이프니츠의 극단적 합리론과 흄의 극단적 경험론 사이의 불화를 해소한 것이었다. 칸트는 또 철학의 새로운 정의, 철학의 방법에 대한 새로운 견해, 철학 서술의 새로운 구조적 모형 등을 제시했다.

칸트의 견해에 따르면 철학의 유일한 과제는 이성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철학은 "모든 인식과 인간 이성의 본질적 목적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리고 철학의 진정한 목표는 건설적(순수이성에서 생기는 모든 인식의 체계를 묘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비판적(한계를 잊은 이성의 망상을 폭로하는 것)이다. 철학자는 인간인식의 원천·범위·타당성과 이성의 궁극적 한계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이 과제를 수행하는 데는 특별한 철학방법이 필요하다.

칸트의 방법은 선천적으로 판단하는 이성의 능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성이 경험없이도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 방법의 기초는 인간의 인식이 대상에 일치해야 한다는 가정이 아니라 대상이 인간의 인식기구에 일치해야 한다는 가정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인식기구의 정확한 성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와 그밖의 문제에 대답하려는 시도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의 과제였다.

그러나 칸트의 위대한 목적은 이성을 어느 한 영역만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각 영역에서 고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성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일은 사유(과학)에서는 〈순수이성비판〉, 의지(윤리학)에서는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 감성(미학)에서는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1790)이 각각 다룬다.

19세기

정치적으로 19세기는 나폴레옹의 통령정부로 시작하여 빅토리아 여왕의 60주년 기념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철학적 중요성을 가진 것은 그 사이에 일어난 지적·사회적 변화들이다. 19세기초의 낭만주의 운동은 감성을 받들고 이성에 반대한 문예 반란이었다. 산업혁명은 사회에 엄청난 불행을 낳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외침을 불러일으켰다. 1848년 파리·독일·빈에서 일어난 혁명은 계급의 분화를 상징했으며 유럽인의 의식 속에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심었다. 마지막으로 다윈은 생물과학에 격동을 일으켰고 생물학적 진화관념을 도입했다.

독일 관념론

19세기초의 뚜렷한 특징은 철학에서 형이상학 정신의 부활이었다. 독일 관념론은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사변적 주장을 최고수준으로 되살렸다. 이러한 전환은 주로 철학이 종교와 새로 동맹을 맺은 결과였다. 이 종교적 제휴의 결과 철학적 관심은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 책에서 그는 자연과학을 설명하려 했고 형이상학에서 확실한 인식을 얻을 가능성을 부인했음)에서 〈실천이성 비판〉(이 책에서는 도덕적 자아의 본성을 탐구했음)과 〈판단력 비판〉(이 책에서는 전체로서 우주의 합목적성을 제안했음)으로 옮겨갔다.

절대적 관념론은 다음의 3가지 전제를 기초로 삼았다. 첫째, 철학의 주요사항은 인간의 자아와 자기의식이다. 둘째, 세계는 전체로서 정신적이며 사실상 우주 자아와 비슷한 것이다. 셋째, 자아와 세계에서 지성보다는 의지와 도덕성이 더 중요하다.

요한 피히테(1762~1814)는 인간의 자기의식이 1차적인 형이상학적 사실이고, 이 사실을 통해 철학자는 '절대자'인 우주의 총체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한다고 보았다. 철학의 유일한 과제는 '의식의 명료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의식의 최고단계는 철학자가 성취한다. 왜냐하면 철학자만이 '마음' 또는 '정신'을 실재의 중심원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은 이러한 사유노선을 더 밀고 나갔다. 칸트가 이성을 정신이 세계에 부과하는 형식으로 본 데 반해 헤겔은 이성을 세계 자체를 구성하는 것, 즉 정신이 부과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정신이 발견하는 어떤 것으로 보았다. 피히테가 의식을 정신에서 현실로 투영했다면 헤겔은 이성을 투영했다. 그결과로 나온 헤겔의 주장인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와 "진리는 전체이다" 등은 이전의 철학자들이 논리학과 형이상학, 주관과 객관, 사유와 존재 사이에 설정한 통상적 구분을 희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절대자 또는 전체는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며 정지해 있지 않고 시간적으로 중요한 발전을 거친다. 헤겔은 이 진화를 '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불렀다. 헤겔은 이 과정을 강조함으로써 이성 자체가 영원하지 않고 '역사적'임을 지적했고 인간 사회의 변화하는 역사 상황에 새로운 의미와 관계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헤겔은 철학이 이전에 지니지 못한 문화적 차원을 철학의 과제에 추가했다.

헤겔의 견해에 따르면 철학자의 사명은 의식을 통해 절대자에 접근하고, 절대자를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발전시키는 정신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투쟁이 정신적 존재의 본질이고 자기 확대가 그 존재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지성과 문화의 다양한 분야, 즉 심리학·사회정치학·미학·종교·철학 등은 세계정신이 펼쳐지는 단계들이 된다.



현대의 철학사상은 이미 19세기 중엽의 헤겔 철학에 대한 반동에서 서서히 태동하였고, 1930년대를 전후하여 그 전체적인 윤곽을 드러내었다. <script type="text/javascript"> var currentPlayer; var wT = document.title; function setCurrentPlayer(_id) { if (currentPlayer != undefined && currentPlayer != _id) { var player = nhn.FlashObject.find(currentPlayer); player.stopSound(); } currentPlayer = _id; document.title = wT; } function flashClick() { document.title = wT; } window.onload = function() { document.title = wT; } </script>

19세기 독일 철학의 정상이었던 헤겔 철학의 붕괴는 헤겔학파 내에서 L.포이어바흐의 헤겔 반박을 거쳐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탄생시켰고, G.W.F.헤겔의 합리주의적인 절대관념론에 반발하고 나선 S.A.키에르케고르와 A.쇼펜하우어의 비합리주의 철학은 F.W.니체를 통해서 현대의 생의 철학과 실존 철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는 경험주의를 토대로 한 신실재론()과 분석 철학에서는 빈의 논리실증주의가 결합되어 발전해 갔다.

헤겔 철학의 반박에서 시작된 철학의 여러 경향과 함께 신()칸트주의 철학은 20세기 철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현대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상가들은 1930년대까지 출판된 저서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무렵에는 M.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 K.야스퍼스의 《철학》(1932), B.러셀과 A.N.화이트헤드의 《수학원리》(1910∼13), R.카르나프의 《세계의 논리적 구성》(1918), L.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1921)를 비롯하여 J.듀이, E.카시러, H.베르그송, E.후설, G.E.무어, G.루카치 등 현대철학자들의 핵심적인 사상을 담은 저서들이 출판되었고 이들이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어 오늘날까지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현대철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자연과학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플랑크의 양자물리학을 비롯한 현대과학의 성과들은 근대철학이 기반으로 삼았던 뉴턴 물리학에 도전하게 되었다. 실체개념이나 절대시공()의 관념 위에 세웠던 근대철학의 절대이념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또한 생물학의 발전은 인간 이해에 대한 새로운 측면을 제시하였고, 특히 S.프로이트나 C.G.융의 심리학은 인간의 무의식 세계의 탐구를 토대로 지금까지 신뢰해 왔던 이성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의심을 가지게 하였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수학의 발전은 철학의 대상과 방법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현대철학 형성에 영향을 끼친 다른 요인은 정치사회적인 변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제1, 2차 세계대전은 인간존재의 생존에 대한 불안을 가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양극현상을 심화시켰다. 이에 따른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좀더 구체적인 인간문제와 사회문제로 집중되어 갔다.

이와 동시에 산업혁명 이후 가속화된 공업화는 현대사회에 필연적인 부조리를 안겨주어 이 문제의 극복이 철학적 관심의 주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건 아래 현대철학은 근대철학에서와는 전혀 다른 자기 모습의 새로운 전개가 요청되었다. 그러므로 현대의 철학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 이유로서는 현대의 철학사상들이 점진적으로 유럽 중심에서 탈피하여 지역적인 특성에 따라 발전해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며, 또 모든 철학사상간의 상호영향 관계가 밀접하게 이루어져 한 철학사상을 어떤 뚜렷한 철학사적인 입장에 고정시켜서 이해할 수만은 없게 된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현대철학의 유형은 대체로 지역에 따라 유럽 철학과 영미 철학() 및 동유럽 철학으로 나누어 이해한다. 유럽 철학에는 삶의 철학과 실존철학, 구조주의철학과 네오 마르크스주의(비판이론)를 포함시켜 논의하고, 영미 철학 영역에는 실용주의와 논리실증주의 그리고 분석철학과 신실증주의(비판적 합리주의)철학 등을 포함시킨다. 동유럽 철학은 국가철학이 되어버린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의미한다.


2017.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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