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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프랑스 시민혁명이랑미국의독립혁명내용좀...
dudg**** 조회수 4,584 작성일2018.08.28
프랑스 시민혁명이랑미국의독립혁명내용좀알려주세요
목요일까지해야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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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프랑스혁명은 사상혁명으로서 시민혁명의 전형이다. 여기서 시민혁명은 부르주아혁명(계급으로서의 시민혁명)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국민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평등한 권리를 보유하기 위하여 일어선 혁명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혁명의 이념은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에 의해 약 반세기에 걸쳐 배양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루소의 문명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인민주권론이 혁명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프랑스왕권은 루이 14세(재위 1643∼1715)가 완성한 절대주의 체제에 의해서 여전히 국왕친정과 신권이론()을 받들고 국가와 인민 위에 군림을 계속하였다.

신권왕정 밑에서는 모든 국민이 단순히 국왕의 신하에 불과하다. 그 위에 소수의 귀족·성직자들만이 별도의 특권신분을 구성하고, 국민의 90%를 차지한 평민층의 근로와 납세에 기생하면서 우아하고 무위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모순은 처음부터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루이 16세(재위 1774∼92)의 정부는 미국독립혁명을 지원한 군사비 때문에 재정궁핍에 빠졌다. 재정총감 칼론은 1787년 2월에 명사회()를 소집하고, 특권신분에게도 과세하는 ‘임시지조()’를 제안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귀족·성직자들은 국왕을 뒷받침하던 사법관료의 핵심인 파리 고등법원과 결탁하고 고등법원이 가진 법령심사권한을 이용해서 왕정고문부의 재정안()에 저항하였다.

이렇게 왕권 내부에서 투쟁하는 사이에 재정총감 칼론과 그 후임자 브리엔이 실각하고, 1788년 8월에 네케르가 재차 재정총감으로 기용되었다. 네케르는 고등법원의 요구를 받아들여,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던 전국 삼부회를 다음해에 소집할 것을 국민에게 약속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랑스 혁명 [French Revolution] (두산백과)



미국독립혁명

[American Revolution음성듣기, ]

요약 영국 본국의 가혹한 지배와 중상주의 정책에 반항하여 미국 13주(州) 식민지가 협력하여 독립을 달성한 전쟁과 식민지 내부의 사회개혁을 포함한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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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월리스장군의 항복미국의 화가 트럼블의 작품.(John Trumbull). 콘월리스는 런던 출생으로 독일 기타 등지에서 종군한 다음, 1776년 영국 본국군 사령관으로서 미국 독립전쟁 진압을 위해 파견, 남부 진압에는 성공하였으나(1780∼1781), 1781년 .미국 독립혁명 전쟁의 결말을 지은 결정적인 싸움인 요크타운 전투에서 식민지 ·프랑스 연합군에게 항복하였다.

이 혁명은 영국 본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며, 사회개혁은 그에 따라 행하여진 것으로, 후의 프랑스혁명 등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보수적인 정치형태를 타도하고 보다 민주적인 정치형태를 수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혁명은 식민지의 본국에 대한 반란이며, 또한 같은 영국인 사이의 싸움으로서 내란으로 볼 수도 있다.

원인

1760년 조지 3세가 국왕이 되기까지는 영국 본토와 식민지 사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과거 1세기 이상 식민지는 각각 식민지의회를 가지고 있었고, 자치도 허용되어 있어 식민지의 영국인은 본국의 영국인과 거의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였다. 그러나 조지 3세의 식민지 정책은 매우 가혹한 것이었고, 따라서 식민지인의 본국에 대한 항쟁은 종래의 권리·자유·특권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1763년 7년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고 파리조약에 의하여 미국 대륙에서 프랑스 식민지가 소멸한 것을 계기로, 영국은 캐나다를 포함한 미국 식민지 전체를 본국의 통제하에 두고자 하였다. 그 첫번째 시도가 1763년에 발표된 국왕선언()이었다. 이 선언에 따르면 식민지인은 인디언과 통상을 할 수 없으며 동부의 앨러게니 대지() 서쪽으로 이주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으나 이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정책이었다. 치안유지와 법률 시행 감시를 위하여 영국군이 상주하고, 그것을 위한 경비분담이 강요되었다.

영국 본토의 다음 정책은 중상주의 강화 겸 세입증가를 위한 정책으로서 이것도 식민지인의 이해와 대립되고, 종래의 관행()을 깨뜨리는 처사였다. 그렌빌 내각은 지금까지 묵과해온 밀무역(貿)의 단속을 강화하고 관세징수를 엄중히 시행하고자 1764년 설탕조례()를 시행하였다. 다시 1765년에는 인지조례()를 제정하였는데, 미국의 상인·저널리스트·변호사·목사 등 모든 계층이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그것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1766년 인지조례는 철폐되었으나 타운센드 제법()이 이에 대신하게 되자 식민지인들은 본국의 모든 과세에 반대하였다. 1765년에 제정된 군대숙영법(宿)에 대한 식민지인의 반감은 70년의 보스턴학살사건을 불러일으켰다. 1772년 청원에 의하여 어려움을 제거하려는 방법이 효과도 거둘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식민지인들은 각지에 통신위원회를 설치하고 연락을 취하면서 비합법의 반항운동에 들어갔다.

1773년에 일어났던 보스턴차사건()에 대하여 1774년에 본국이 보스턴항() 봉쇄,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자치권 정지 등을 포함하는 징벌적인 여러 법을 부과하게 되자 식민지 쪽은 그것을 ‘참을 수 없는 법()’으로 규정, 버지니아의 제창으로 제1회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서 ‘권리와 호소()의 선언’이 채택되고, 국왕에게 1763년 이후 취하여진 탄압조치의 철회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해 영국의회는 퀘벡조례를 제정하고, 캐나다 서쪽 지역을 확대, 이 지역의 프랑스인을 위하여 가톨릭교를 승인하였다.

식민지인들에게 이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영국국왕이나 의회는 식민지에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다. 식민지에는 자치가 행하여지고, 자유가 대폭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인은 자기들의 자유가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경과

1775년 4월 미국 보스턴의 서쪽 교외 렉싱턴과 콩코드 부근에서 최초로 영국군과 급진파 사이에 무력충돌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5월에 제2회 대륙회의가 서둘러 소집되고, 식민지인의 권위 아래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며 워싱턴을 식민지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군사적으로 약세인 식민지군이 승리를 했는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다. 최초에는 해군은 전혀 없었고 대부분의 병사가 훈련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장기전()에 견뎌낼 수 있는 군대로 만들기 위해 워싱턴은 어려운 전투를 계속하였다.

7년 동안에 식민지군의 병력은 대체로 40만에 가까워졌으나 워싱턴은 한꺼번에 2만 1000 이상의 병력을 가져보지 못하였다. 혁명전쟁 당시 식민지인의 1/3은 본국 지지파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776년 1월 T.페인의 팸플릿《커먼센스》가 나왔는데, 그는 여기서 국왕과 군주제()를 공격하고, 식민지인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이 팸플릿은 식민지인의 독립에 대한 결의를 굳게 하였다.

이처럼 식민지인의 높아가는 여론을 배경으로 하여 1776년 7월 4일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이 대륙회의에서 채택되었다. 그는 생명·자유·행복을 추구할 자유권을 지키기 위하여 계약에 의해 정부를 세우며, 그 정부가 기본 인권을 범할 때 국민은 그 정부를 전복할 권리를 보유한다고 혁명권()을 주장하고, 국왕의 폭정을 열거하였다. 독립선언은 독립 달성에 필요한 군사적 원조를 얻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었다. 특히 프랑스는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전에 패하여 식민지 제국() 부활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혁명 원조의 정당화를 위하여서도 독립을 권고하였다.

전쟁 중 식민지측은 재정의 곤란으로 통화를 증발()하고, 공채()를 발행할 수밖에 없었으나 B.프랭클린, J.애덤스의 활약으로 프랑스 ·에스파냐 ·네덜란드 등지로부터 돈을 빌려올 수 있었다. 영국의 작전은 허드슨강에서 식민지를 양단하는 것이었으나, 식민지군은 77년 새러토가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하였다. 이 승리는 독립전쟁의 대세를 일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는 새러토가전투를 계기로 식민지측의 승리를 예상하고, 78년 미국 ·프랑스 동맹을 맺었다.

다른 유럽 제국도 80년에는 무장중립동맹을 조직하여 영국을 견제하였다. 무력하였던 식민지군 해군도 80년 이후에는 프랑스 군함의 응원으로 영국군과 대항하게 되었다. 식민지군은 자체의 과감한 전투력과 함께 외국의 원조로 영국군을 추격, 81년 육 ·해군이 요크타운을 포위하여 10월 영국군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사실상 독립전쟁은 끝났다.

영국측은 전쟁에 지쳐 82년 평화를 원하게 되었으며, 교전 각국의 의도가 일치하지 않아 강화조약은 시간이 걸렸으나 83년 파리조약이 성립되었다. 영국은 이 조약에서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서쪽은 미시시피강, 남쪽은 동 ·서 플로리다, 북쪽은 오대호()까지 이르는 광대한 미국영토가 확정되었다.

의의

미국독립전쟁을 치르는 동안 영국국왕을 지지하던 많은 식민지인이 추방되어 영국 본토, 캐나다 또는 서인도제도로 도피하였다. 그들의 재산은 몰수, 재분배되었다. 또 이것을 계기로 북부 여러 주는 노예를 해방하고, 장자상속제() 등의 봉건적 잔재를 폐지하고, 많은 주에서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게 되었다. 독립혁명군에 의하여 공화제()가 실시되었으며, 사람들은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혁명에 의한 사회개혁은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으며, 그 뒤에도 계속되어 19세기 전반에는 남자보통선거도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잭소니언 데모크라시 시대를 맞아 독립혁명·사회혁명의 이상()도 달성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국독립혁명 [American Revolution, 美國獨立革命] (두산백과)


2018.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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