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꾼 쌀뒤주로 유명한 정구례가옥(현재는 정종수고택)은 전북 김제시 장화동 210-1(장화2길 150-5) 후장마을에 있다. 삼한시대 저수지인 벽골제에서 불과 2.5km 떨어진 곳이다. 1989년 김제군이 시로 승격되기 이전에는 월촌면 장화리였다. 1998년 교촌동과 월촌면을 병합하면서 관할은 교월동이 되었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김제평야 한 가운데 있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효녀가수 현숙이 기증한 ‘전장·후장’ 마을 표석이 서있다. 현숙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월촌초등학교와 김제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 본래 마을 이름은 꽃잔 또는 화산이었다. 마을 서쪽의 야산 이름은 화초산이다. 이로 보아 꽃잔은 마을 모양이 넓게 퍼진 꽃받침처럼 생긴데서 유래한 것 같다.

꽃잔을 한자로 장화(張華)라고 한 사람은 문종 1년(1450) 성균관 진사였던 정임(鄭任)이다.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김제에서 명당으로 소문난 이곳에 내려와 살았다. 이후 후손들이 번창하였는데 곡창지대인 만큼 만석꾼이 나왔다. 만석꾼은 지금으로 치면 대기업 총수다. 마을이 점점 커지자 도로 입구에 있는 마을은 전장(전장화), 안쪽에 있는 마을은 후장(후장화)로 나누어졌다.

정임의 후손 중에 구례 군수를 지낸 정준섭이 있었다. 그를 정구례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는 조상 때부터 많은 토지를 소유한 만석꾼이었다. 인심이 좋아 매일 공적·사적으로 이집을 찾는 사람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는 이들을 풍족하게 대접했다. 길 가는 과객이라 할지라도 단순히 밥만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때는 쌀을 한 보따리씩 싸주었다. 그러다보니 대형 뒤주가 필요했다.

정준섭은 고종 2년(1864) 안마당에 가로·세로 2.1m, 높이 1.8m의 초대형 뒤주를 만들었다. 쌀이 무려 70가마가 들어갔다. 그런데도 한 달 식량으로 부족했다하니 얼마나 많은 식객이 드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것이라며 칭찬한다. 이 말은 프랑스어로 귀족(노블레스), 책임(오블리주)의 합성어로 상류층들의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한다.

서양에서만 이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문화가 있었다. 경주 최부집이 대표적 사례인데 전국 곳곳에 이를 실천한 집안이 많았다. 흔히 만석꾼은 백리 안에, 천석꾼은 십리 안에, 백석꾼은 동내에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도덕적 의무이기도 했지만 부자들의 생존전략이기도 했다.

부자들이 평소 선행을 베풀면 난이 발생했을 때 그 덕을 본다. 옛날에 민란이 발생하면 부잣집이 먼저 털렸다. 성난 군중들은 재산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들의 목숨까지도 해쳤다. 동학혁명이나 6.25때도 그랬다. 그러나 평소 선행을 베푼 집안은 마을사람들이 나서서 이집만은 안 된다며 보호해주었다. 부자들이 대대로 재산을 유지하는 비결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재벌 3세들이 명심할만하다.

이곳의 산세는 모악산(795.2m)에서 매봉산(251.4m)을 거쳐 평지로 내려온 맥에서 비롯된다. 야트막한 야산 줄기로 이어지는데 산이라고 해야 고작 10~50m 높이다. 승반산(26.2m)을 거쳐 김제 시내의 주산인 성산(41m)을 만들었다. 성산은 백제시대에 쌓은 토성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부터는 남서방향으로 산줄기가 이어진다. 그 대부분 야산이거나 밭이다. 그러나 그 변화만은 매우 활발하다. 평지 맥도 변화가 활발하면 대혈을 맺는 법인데, 이곳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현무봉인 마을 뒷산은 화초산(30m)으로 모악산에서 내려온 산맥의 끝자락이다. 그 중심에서 야트막하게 내려온 맥이 정구례 가옥 안채로 이어진다. 마을 좌우측으로는 해발 10m 정도의 청룡·백호가 감싸며 보국을 형성하였다. 특히 백호가 크게 원을 그리듯 마을을 감싸주었다. 보국 밖에는 전장마을이 있는데 앞은 끝없이 펼쳐진 김제 들녘이다. 풍수는 야트막한 능선이라도 감싸준 안쪽이 길하다. 후장마을이 전장마을보다 더 잘 사는 이유라 하겠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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