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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사실상 세조(수양대군)의 지지세력으로 왕족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굳이 대군에서 보자면 영응대군 이염(세종의 8남)정도? 또한 임영대군의 아들이었던 구성군 이준
의산군 남이장군 정도입니다.
세조 주변에는 최측근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사실상 세조를 왕으로 만든 사람들입니다.
상당부원군 한명회, 하동부원군 정인지, 신숙주 등이 대표적으로 세조의 최측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도 대군층은 아니지만 양반층은 물론 맞긴 합니다.
감사합니다 ^^
2016.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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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큰형인 양녕대군과 수양대군의 동생인 임영대군과 영응대군, 신빈 김씨의 아들인 계양군이 수양대군을 지지했습니다.
양녕대군
자신의 실행으로 권력에서 배제되었지만, 양녕대군은 정치적 관심이 적지 않은 인물이었다고 판단된다. 특히 그는 세조의 집권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1453년(단종 1)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을 때 양녕대군은 종친의 가장 어른이라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세조의 강력한 정적인 안평대군 (安平大君)의 사사를 강력히 주청해 관철시켰다(10월 17일).
6개월 뒤 양녕대군은 단종의 사사라는 훨씬 중요한 문제에 개입했다. 그는 영의정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단종과 금성대군 (錦城大君)ㆍ송현수 (宋玄壽) 등의 처단을 강력히 주청했고, 역시 윤허를 얻어냈다. 이런 문제들은 그의 개입이 없었어도 결국은 관철될 사안들이었다. 그러나 종친을 대표한 양녕대군의 적극적인 발언은 그것의 실현을 촉진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뒤 등극한 세조가 양녕대군을 후대한 것은 당연했다. 만년에 양녕대군은 치료차 온천에 자주 갔는데, 그때마다 세조는 관찰사와 환관 등을 보내 극진히 수행케 했다. 또한 양녕대군이 죽음을 앞두고 병고에 시달리자 그의 서자인 이순(李諄)과 이심(李諶)을 승진시켜 기쁘게 해주기도 했다(1462년〔세조 8〕 6월 24일).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6534
종친들 중 세종대왕의 큰형 양녕대군과 수양대군의 동생인 임영대군, 영응대군, 신빈 김씨의 아들 계양군 등도 수양대군을 지지했는데 이 중 양녕대군은 대놓고 수양대군의 야심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동생인 세종이 재위기간 중에 그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쉴드를 쳐줬는지 생각하면 동생의 아들더러 동생의 적손을 몰아내고 왕이 되라고 하는 건 배은망덕한 짓이나 마찬가지다.
https://namu.wiki/w/%EA%B3%84%EC%9C%A0%EC%A0%95%EB%82%9C
계양군
조선시대의 왕족. 세종의 둘째 서자. 세종의 총애가 지극했고, 학문을 즐기고 글씨에 능했다. 한명회·한확 등과 수양대군 일파로 안평대군을 제거했다. 좌익공신 1등에 책록됐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948&cid=40942&categoryId=33383
2016.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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