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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하느님은 세상을 왜 만들었다고 생각하세요?
비공개 조회수 674 작성일2019.02.11
하느님께서 세상을 왜 만들었다고 생각하세요?

심심해서?

그리고 세상을 왜 만들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죄악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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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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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체
물신
정형외과, 생활영어, 회화, 연애, 결혼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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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 재밌는 상상을 하시네.ㅎㅎ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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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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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아래의 글을 올려드립니다. 중략된 내용은 성경의 모든 내용이 한절씩 이해하기 쉽게 설명되어 있는 네이버 카페 "마음의 율법"이라는 곳에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얻으시기 위하여 창조하셨고, 인생이라는 불완전체인 피조물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성장하게 하기위하여 놓여진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 곧 영이 사는 방법을 성경에 제시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영이 살아야하는 이유와 방법과 과정등 모두 영적인 내용만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부분적으로 끄집어 내어 육적관점에서, 유한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 하나님이 부자를 만들어주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 복” 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부터 보겠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이란 “말씀을 따라서 유한한 인간적 자신을 죽이고 나서 영이 사는 결과를 얻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신에는 “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또 보겠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라고 말씀하셨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봅시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은 내보내고 이삭 하나를 얻고 죽었습니다. 이것이 유한한 인간적 시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달라집니다. 영이 산 아브라함은 죽는 존재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으로 그 안에서 낳아지는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후손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가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어떤 시각에서 읽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진리냐 아니냐로 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악이다” 라는 말에서 “악” 이란 “나쁜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악이란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윤리적, 법적 범위 안에서의 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또한 성경을 인간적 관점에서 이해했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적 결과인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유한” 의 범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비진리입니다. 그래서 “악”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 악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린 아기도 죄인인가요?"


원죄라는 말이 있으니 그것이 궁금하셨던 것입니다. 도무지 아기에게 죄가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답을 드렸습니다.


죄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악"이라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죄란 "본질적으로 안 좋게 하는 원인"이며 악이란 "본질적으로 안 좋은 것"을 뜻합니다.


가령, 아버지께서 한국에 계신다고 합시다. 그리고 아버진 "한국말"밖에 모르신다고 합시다. 그리고 아버지와 당신이 동일한 한국 사람이어서 당신도 일본말을 모른다고 합시다. 아버지께 가야 하고, 또 아버지와 교통도 해야 하는데 한국말을 쓸 수 있는 키보드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교통할 수 없는 일본말만 쓸 수 있는 키보드가 바로 "죄"입니다. 에덴 밖에 있는 인생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교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준법적 제사"입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받으시니까요. 하지만 가인의 "비준법적 제사"는 "일본어 키보드"와 같습니다. 그것으로는 아버지와 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 있는 자식이 원하는 것은 아버지와의 키보드를 이용한 채팅이며 의사소통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할 수가 없는 것이 곧 "죄"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불법 안에 있다는 것, 죄 중에 있다는 것은 "나쁜 곳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소통 불가능한 곳에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그 자식에게 "좋음"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식은 아버지께서 그 "좋음"을 주실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한국말이 써지는 키보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죄란 그렇게 "소통할 수 없음"입니다. 그것이 "안 좋음"이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안 좋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은 본질적으로 세상에서의 모든 것이 "안 좋음"임을 알고 "본질적 좋음"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선만 행하시는 분입니다. 인생이 좋아서 그저 인생만 사는 사람들은 아버지와 소통할 수 없는 "죄" 중에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안 좋음"의 상태는 아닙니다. 나름의 "좋음"에 취해 있기 때문에 일단은 "안 좋음"처럼 보이는 자기부인의 길과 자기십자가를 지는 길을 가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길에 대하여 싫음을 나타내는 것은 그들이 "나름의 좋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해 사는 것이 "좋은" 그들이 곧 "죄인"이지만 그들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위에 살면서 "나름의 좋음"을 느끼며 살기 때문에 여전히 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인들에게도 "좋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이 "본질적으로 좋을 수 없는 상태"임을 느낀 자가 본질적 좋음을 찾아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찾아진 하나님이 옳다 하심, 곧 "하나님의 의"에 자기를 스스로 묶고 본질적으로 좋은 좋음을 향하여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하나님과의 소통법인 한글 키보드를 가지고 아버지와 소통을 합니다. 그 소통하는 자가 곧 의인입니다. 물론 그 의인의 길은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그 힘든 길을 가는 자는 "본질적 좋음"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있기에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역시 "좋음"을 채우기 위하여 가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다가 그 의인이 "악"을 행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악을 행한 악인은 "안 좋음"을 택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악인도 자신의 "좋음"을 따라 악을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한 본질적으로 보자면 "안 좋음"이지만 악을 행한 그에게 있어서 "안 좋음"이 아닙니다. "좋음"입니다. 안 좋음을 스스로 택하는 인생은 아예 없습니다. 물론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새디즘을 가진 자도 "좋자고" 새디즘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그 역시 "좋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죄나 악이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 위에 인생들을 놓으시고 악인이나 선인이나 의인이나 죄인이나 모두 "좋음"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죄나 악은 "본질적 나쁨"이며 의와 선은 "본질적 좋음"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한 "죄" 중에서 "악"을 행하는 자는 본질은 어디로 갔든지 "당장의 좋음"만 추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옳다’ 하시는 ‘의’ 중에서 선을 행하는 자는 본질적 좋음을 추구하며 ‘당장의 괴로움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악에 대하여 그것이 "안 좋음"이라는 생각, 혹은 "나쁨"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에서의 법 앞에서는 죄나 악이 "나쁜 것"이지만, 하나님의 법 앞에서 죄나 악은 모두 "본질적 안 좋음"이나 당장 그것을 행하는 이들에게는 "좋음"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적 좋음을 아는 자들은 일본에서는 필요를 못 느끼는 한국말 키보드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본질적 좋음을 모르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한국에 계신 아버지와의 소통이 불가능한 키보드를 가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나쁨"이 아닙니다. 그저 "다른 것"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각각 다른 것을 가지고 각각의 "좋음"을 추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중략....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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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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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62위, 가톨릭 63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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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즉 사람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을 통하여 영광받으시기 위함이요 

이와 같은 목적은 인간편에서는 하나님의 법과 그 뜻대로(성경말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나라를 실현하고 회복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요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요 또한 이 목적을 위하여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새역사의 창조의 일부분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교제의 상대로서의 필요성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사야서에 나와 있는 다음의 말씀에 잘 표현 되어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또한 에베소서 1장 6절에 보면 우리 인간은 “그(하나님)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 이라고 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보다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우주에 잘 드러낼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성품을 본받고 따라 살기를 힘쓰면서 서로 사랑하고 상부상조하면서 평화롭고 윤택하고 아름다운 삶의 향기를 나타내며 사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영광스럽게 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성품으로, 행위로, 하나님의 품성을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타락했던 인간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복음의 능력으로 죄의 권세를 극복 승리하고 순결한 사람이 되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정립하고 또한 회복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되는 오묘야말로 “천사들에게 조차 구경거리가 될”만큼 흥미로운 것이며,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들이 그런 복음의 비밀을 터득하고 아름답고 복된 삶을 이루고 경험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땅이 다시 최초의 에덴동산과 같이 아름답게 회복되어 새 땅이 되는 날,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과, 창조에 나타났던 그 복음이 완성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시 73:25-28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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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jm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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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이유와 방법 -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왜 창조하신 거예요?"


그 답은 창세기 1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좋으려고' 창조하신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면 인생은 왜 하나님을 믿는 것일까요?


역시 '좋으려고'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인생을 '좋지 못하게' 했을까요?


우리는 인생으로 태어나서 '수고를 받은' 인생의 삶을 살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저렇게 때때로 '좋은' 때가 있었습니다. 크게는 무엇엔가에 도전을 하고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와, 작게는 소풍 가는 길, 배고프다 밥을 먹게 되었을 때, 잘 자고 일어났을 때... 대략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쁨들은 잠깐에 지나지 않으며 이내 또 다른 수고를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짧은 '좋음'을 위하여 대부분은 오랜 수고를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럼, 지금 아무 일이 없는 상태에서의 '나'는 어떤 때에 기분이 좋을까요?


작은 눈 앞의 소망이나 먼 무지개 빛의 희망을 생각할 때 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모든 시간을 채우던 '수고'의 원인은 바로 그 소망과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렇게 될지 말지를 알 수도 없는 몽상에 불과하며 단지 생각일 뿐임에도 그 허상으로 실상인 내 시간을 '좋다'고 느끼면서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합격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을 하면서 공부를 합니다. 그러면서 합격 뒤의 생활은 순정 만화처럼 머리 속에 그려집니다. 하지만 실제로 합격을 하고 나서는 돈 걱정, 사람들과의 유대 관계, 진로 등등의 염려로 오히려 '좋지' 않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세상에서 이리저리 살아 보고 결국에 얻은 것은 '헛됨'이었고, 끝이 날 줄을 모르는 나의 욕구는 끝이 없다는 것도 알았고, 그 욕구의 끝에서 몸의 기운이 쇠하여지면 더 이상 머리만큼 내 육신이 따라 주지를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현실을 직시하고 난 뒤에는 나의 희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나는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미 했던 것은 해 봐서 갖게 되고, 얻게 되고, 이루게 되어도 만족이 없고, 못해 본 것은 할 능력이 없고... 그러다가 의지 박약의 상태에 빠져 마음은 우울한 상태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다시 '뭔가 길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을 하고, 더 큰 힘의 도움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생이 종교를 찾고 절대자이든 하나님이든 다른 무엇을 찾는 것은 또 다른 희망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좋음'을 위하여 창조를 하셨고, 우리도 '좋음'을 위하여 이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하나님은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좋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좋음'은 궁극적으로 한 번 채워 가지면 그것으로 좋음이 끝나고 마는 인생의 소망에 의한 '좋음'이 아닙니다. 만일 인생의 '좋음'과 같이 합격의 기쁨과 동시에 찾아오는 수고가 또 다시 있는 '좋음'이라면, 저는 오히려 여러분에게 이 길로 가지 말라고 권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으로 인한 '좋음'과 인생을 살면서 수고하고 나서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따라서 '쉬는' 그 쉼으로 인하여 느끼는 '좋음'은 다음에 이어지는 괴로운 수고를 동반하지 않습니다. 그때부터의 수고는 오히려 기쁨을 동반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좋은' 것과 세상에서 달성하면 '좋은'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것은 '채움'으로 인한 좋음이냐, '비움'으로 인한 좋음이냐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채움으로 인한 좋음은 또 다른 채움을 원하게 되고, 그 또 다른 채움을 위하여 인생은 수고를 멈출 수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비움으로 인한 좋음은 '채움'으로 좋음을 느끼던 인생에게 '생소한' 좋음을 얻는 방법이라서 '과연?'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하지만 일단 한번 비우고 나서 그 좋음을 느끼고 나면 그때부터는 아주 쉽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좋고 나서 다음에 오는 또 좋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에, 이 비움으로 인한 좋음을 느끼는 데 필요한 '수고'는 '수고'가 아니라 들거나 잡고 있던 것에서 손을 놓는 것으로 그 수고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담아 가지고 있던 것이 많았던 사람이든지 적었던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한꺼번에 모두 내려놓을 수 있으므로 다음에 이어지는 수고는 뒤따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인생이 비움으로 인한 기쁨을 느끼지 못해 보았기 때문에 망설임으로 인하여 아주 조금씩 비울 때에는 '채움을 추구하던 마음'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울 때마다 그 불안함은 오히려 점점 커집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현재 이런 상태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조건을 거셨습니다. 그것은 [마가복음 8:34]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입니다.


인생은 그 말씀을 듣고 '그래 인생에서는 찾지 못하였으니 헛된 인생을 그만 마감하기 전에, 죽는 것을 원하기 전에, 어차피 한 번 죽는 인생인데 이 길로 한 번 가 보고나 죽자.'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이 하나님을 향하는 길을 가는 데 기본 조건은 우선 '인생의 헛됨'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 인지가 바탕에 없는 상태에서 '낮아짐과 비움'의 길을 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전도서는 [전도서 1:2]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라고 해 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하여 헛됨을 미리 강조하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일단 그것을 인지했다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이어 가겠습니다.


하나님과 인생은 피차간의 '좋음'을 위하여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 거래는 짧은 인생 중에 느낄 수 있는 '좋음'을 향한 마음을 일단은 '포기'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 다음에 자기는 포기했던 것이 '포기'가 아니라, 자기를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리는' 것임을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를 드리고 난 뒤에는 '자기의 원'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을 따라 '수고'를 다시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실상 부여받게 되는 그 '수고'의 시작인, '아들이면 누구나 받는 징계'로 표현이 되어 있는, '연단의 수단'으로 인한 괴로움은 한꺼번에 내려놓지 못하는 '자기'로 인하여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방법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높음과 채움을 향한 마음을 지우지 못함 때문에 겪는 괴로움이지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괴로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람마다 그 괴로움의 깊이와 기간에는 차이는 있지만 그 길을 다 가고 나면 그때부터는 '쉼'이 좋다는 것을 조금씩 인지하게 됩니다. 그런 뒤에 온전히 '자기의 원'이 없어진 상태, 즉 "자기를 십자가 앞에서 스스로 죽인 상태"가 되면 하나님과의 '좋음'을 위한 '거래'의 조건은 모두 지불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 자기의 '좋음'을 위하여 행하는 '거래'에서 하나님께 지불하는 대가는 하나님을 위하여 지불하는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리석은 자신으로 인하여 스스로 겪는 괴로움을 스스로 이기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인생이 이 거래에서 지불하는 대가는 '없음'입니다.


길 가는 방법도 가르쳐 주고, 그 조건이 될 수 있도록 '도움'도 주고, 힘들어하면 도울 수 있는 조건도 부여해 주셔서 '피전도자'인 인생을 위하여 '전도자', '교육자', '인도자'도 붙여 주시고, 넘어지면 일어날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공짜'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값없이 줌'인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은 그저 자기의 마음에서 '나의 원'만 내려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원을 내려놓는 일을 은혜로 마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인생의 일도 그랬듯이 '또 다른' 수고가 부여가 됩니다. 그 수고는 인생이 '좋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상대적 사고'를 통한 좋음을 느끼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좋음'을 느끼는 데 절대적이지만 인생은 상대적입니다. 안 좋은 것이 없이 '좋음'을 느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불편한 것이 있어야 편한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는 이미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을 자본금으로 하여 하나님이 주신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것이 곧 '전도'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수고'가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고'는 맞는데, 인생의 수고는 힘겨움이 동반되는 것과 달리 '즐거움'이 동반된다는 것이 다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즐거움이 더해지는 수고를 하면서 살게 될 때부터 하나님은 '먹고, 입고, 자야' 하는 인생의 기본적인 과제인 의식주 문제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이 되고, '좋음'을 느낄 수 있는 '수고'가 있는 상태이면 이제 인생은 '고민 없는' 세상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고민이 없는 인생의 세상에서의 삶에 대하여 성경은 "땅에서 하늘에서의 날을 살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그 수고를 하면서 살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먹고 마시는' 낙은 언제나 좋을까?" 하는 점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언제나 했던 똑같은 스토리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하는 일이 언제나 즐거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또, 섭리적 은혜로 준비하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엄청난 규모의 논리를 가진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과제'를 성경에 '앎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방편'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 광대한 과제를 평생 동안 풀면서 '즐거운 수고'를 하면서 길을 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사람을 만드셔서 이 고생을 하게 하는 거야? 난 그런 하나님 안 믿어!"


이 말이 말이 되는 듯 하지만 실은 문장 자체가 비논리적인 문장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이 제시하신 길을 가고 나서 이런 말을 해야 합니다. 또, 믿지 않는다는 전제가 마음에 있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좋으시려고 인생을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생은 자기 좋자고 인생을 살았고, 그 인생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았던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가기 싫은 인생에게, 알기 싫은 인생에게, 이 길을 가라고, 이 성경의 논리 글을 보라고 억지로 잡아다가 놓은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 스스로 이 길이 좋다고 생각을 하고 이 길로 온 것이고, 이 글이 논리적으로 맞다고 생각을 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힘들다고 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을 할 말이 없습니다. 믿지 못하겠으면 그냥 가면 그만이고, 믿는다면 헛된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참된 것을 따라 힘들어도 가야 할 것이며, 참된 것이라고 믿는다고 해도 아직 인생을 다 안 살아 봐서 헛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되고, 인생이 나름대로 즐거운 것이 있다고 생각이 된다면, 인생이 헛된 것이라고 충분히 느끼게 되는 때에 다시 오면 됩니다.


중략..



네이버 까페 "갈릴라이아"에 있는 글입니다.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쉽게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놓은 성경 까페입니다. 님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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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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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3차원이 물리 세상도 천국으로 통합하시려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물리 세상에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육체로써

이 지구땅을 통치하며 살아가야 하는 때문에


그하나님 닮은  육체를 시기하는 사탄에 의해서

아담하와가 타락하게 된 것이 이땅에 죄가 들어오고 저주가 발생하게 된 원인입니다


사탄이 만든 죄로써 아담을 유혹하여

죄인이 된 아담하와는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이 안되는 때문에

그렇게 아담하와를 죄인되가하여 하나님과 이간시키려



아담을 선악과사건으로써 죄인되게 만든 것이지요

그래서 아담하와가 이 지구땅을 황폐하게 한 죄인이 되고


 이 3차원물리땅에도 아담육체가 영생하는 육체를

도로 잃게 된  이유이며


그게 사람과 사탄과의 첫영적 전투이며

이 3차원 물질땅에서 아담이 사탄에게 패배한 첫 전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탄을 심판하는  종말에는


하나님을 믿는 아담하와만의 후손들을

 다시 영생하는 육체를 허락하시고

영혼육체를 모두 구원하시는 부활휴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땅은  심판을 받아서 사탄이 무저갱에 갇히고

1000년왕국 이후에는


 이 3차원 물리땅도 천국에 통합되는게 성경내용입니다

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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