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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시장백과

이천 관고시장

요약 관고시장은 쌀밥과 도자기로 유명한 이천 시내에 위치한 전통시장이다. 이천의 시내에 위치하고 있는 중심 시장이며, 특산물인 쌀을 비롯해 농산물과 수산물, 채소와 과일, 생활용품 등을 거래하고 있다.
분류 > 지역 경기 > 이천
소재지 관고동 10-13번지 일원
시장 유형 상설시장, 정기시장(매월 2, 7일)
형성 시기 2008년(등록)
시장 현황 점포 수 71곳, 3,904m2
특산물 쌀, 도자기
먹을거리 쌀밥
같은 지역 다른 시장 장호원시장
주변 볼거리 이천 온천, 설봉공원, 이천도예마을, 산수유마을
전화번호 이천 관고시장 상인회 031-633-4243

1. 이천 관고시장 개요

이천 지역은 수도권과 멀지 않고 땅이 비옥하고 기름져서 많은 특산물이 생산되었다. 왕실의 진상품이던 자채쌀과 지금의 이천쌀, 풍부한 고령토를 중심으로 발전한 도자기는 이천의 대표 특산물이라 할 수 있다. 남북으로 긴 모양인 이천 지역은 이천과 장호원으로 나뉘어 시장이 형성되고 상권이 발달해 왔다.

장호원은 충주에서 서울로 가는 유일한 통로로 과거 원이 설치되어 교통의 중심지로 시장이 발달했다. 그러나 이천을 지나는 수원과 여주를 잇는 수려선이 개통되면서 장호원시장이 쇠퇴했다. 한편 수려선은 이천과 여주의 비옥한 땅에서 생산된 엄청난 양의 쌀이 일제에 의해 수탈되는 통로가 되었다.

오늘날 이천을 대표하는 중심 시장은 관고시장이다. 관고시장은 군 당국의 공원 조성 계획에 따라 철거된 공터에 노점이 하나둘 생기면서 형성된 시장이었다. 한때 중앙시장 등의 개설로 상권이 위축되는 등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시장 현대화 작업을 통해 시설을 정비하고, 전통시장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관고시장 또한 이천을 대표하는 시장으로 부상했다.

이천관고시장의 내부 모습

이천관고시장의 내부 모습

2. 이천 관고시장의 어원

이천 지역은 삼국시대에 남천(南川)이라고 불렸다. 이천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고려 때의 일이다.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할 때 서목이라는 사람이 군대가 물을 편하게 건널 수 있도록 도운 뒤로, 이롭다는 의미에서 이천(利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와 달리 태조가 이 고을에 군대를 주둔하고 점을 쳤을 때 이섭대천(利涉大川), 즉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다는 점괘가 나왔다는 것에서 앞뒤 글자를 따서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도 있다. 관고시장이라는 이름은 시장이 형성된 곳이 관고동이었기 때문에 생겨났다.

3. 이천의 지리적 특색과 시장 형성 과정

이천 지역은 낮은 구릉지가 많고, 여러 강들이 흘러들면서 곳곳에 평야가 발달했다. 그래서 예부터 땅이 기름지고 농사를 짓기에 좋고, 수도권과 가까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이천에서 생산된 쌀이 왕실의 진상품이 되었는데, 그것은 기름진 땅에서 생산되어 밥맛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 후 이천쌀은 그 지역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이천에서는 예부터 시장이 개설되어 발달해 왔다. 조선시대 후기의 기록인 《동국문헌비고》(1770)에는 이천 지역에 4곳에서 장이 개설되어 있었다고 나온다. 즉 이천 읍내장(2, 7일), 군량장(5, 10일), 장해원장(4, 9일), 돌원장(2, 7일)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군량장은 읍지에서는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장해원장은 관리들의 숙소와 편의시설이 있던 장해원 자리에 장이 섰는데, 훗날 장호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가운데 글자가 바다[海]에서 호수[湖]로 바뀌었는데, 그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천 지역의 시장은 이천 읍내장과 장호원장을 두 축으로 상권을 형성해 왔다. 그것은 지리적으로 이천이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북쪽의 이천읍과 남쪽의 장호원읍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장호원읍은 충청도와 바로 인접해 있어 독자적인 상권을 형성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장호원시장이 크게 활성화될 수 있던 것은 장호원이 예부터 충주 동쪽부터 서울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또 여객의 왕래가 많던 한강의 물길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발생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일제강점기가 본격화하기 전인 1909년 장호원시장은 음죽군 남면에서 개설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처럼 끝자리가 4, 9일로 끝나는 날에 장이 섰고, 당시 연 거래액은 16만 5,600엔을 기록했다. 주요 거래 품목은 곡류, 건어물, 잡화, 소, 땔감, 기름, 소금, 면포 등이었다. 장호원시장에 집산되는 물품은 주로 충주와 청주, 진천, 음성, 여주 등 충청도 지역이 훨씬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든 1913년에는 이천군 읍내시장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이천군 읍내시장은 연 거래액이 공식적으로 12만 3,450엔이었고, 실제적으로는 13만 6,100엔이었다. 이천군 읍내시장을 찾는 사람들은 이천군 주민들을 비롯해 인접한 광주와 여주의 주민들이었다.

상인들은 경성을 비롯해 수원과 여주, 안성 등지에서 왔고, 시장에 나온 상인들은 많게는 600명, 평균 300명을 기록했다. 한편 시장을 찾아온 주민들은 많을 때는 2,700명, 평균 1,500명이었다.

이천의 읍내시장은 관의 소유지에 개설되었고, 1914년 4월부터 부지를 작은 구획으로 나누고 점포 하나에 사용료로 2원을 징수했다. 또한 1914년 4월에 800원을 기부 받아 구획 확장을 도모했다. 그리하여 수원과 여주, 경성과 충주를 잇는 도로 양편에 상설점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동상인들 일부는 정기시장이 아닌 상설점포를 가진 상인으로 정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같은 해 장호원시장은 1909년처럼 동일한 장날에 시장이 개설되었다. 연 거래액은 공식적으로 15만 1,820엔, 실제적으로는 17만 320엔으로 4~5년 전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장호원시장에 나오는 상인들은 많게는 700명, 평균 500명이었다. 시장을 찾는 고객은 많게는 1만 2,000명, 평균 5,800명으로 많은 사람들이 장호원시장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장호원시장 또한 관의 소유인 관유지에서 장이 섰다. 장호원시장은 과거부터 이동 상인이 장소를 사용하기 위해서 일정한 지역을 관리하는 음식점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정육점이나 포목점 등은 작은 장옥을 짓고 건물과 함께 권리금을 받고 매매하기도 했다.

다만 시장의 위치가 물가와 가까워서 매년 시장이 잠기는 피해가 있었기에 1860년에 시장을 이전했다. 그런데 옮긴 시장의 장터가 좁아서 매우 불편했다. 호황 때에는 매번 장날마다 1,000석의 곡물이 시장이 나왔고, 주변의 거래를 흡수해 독점했다.

여기에 철도가 부설되면서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오히려 장세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1915년 무렵에는 300석 정도로 줄어들었다. 곡물은 사는 사람들에게 전체의 1푼, 소 한 마리에 10전, 해산물은 100분의 1을 수수료로 받으며 시장에서 중개했다.

1920년대의 이천의 읍내시장은 쌀의 매매가 많았기 때문에 쌀을 감독하는 두감고(斗監考)가 있어 가격을 감정했다. 또한 두감고는 매매하는 사람들이 합의 결정을 해서 거래량을 정했다. 소는 중개인이 있어 감정한 후 정해진 가격에 거래되었다. 포목과 기타 잡화는 서울의 가격에 따라 직거래했다. 소의 거래는 소 마리당 15전, 송아지는 10전, 쌀은 1석 당 10전의 수수료를 받았다.

1920년대 이천에는 이천 읍내장과 장호원시장 외에도 현방시장과 오천시장이 더해져 모두 4곳에서 장이 서고 있었다. 1925년의 기록을 보면 이천 지역에 있는 시장의 현황이 소개되어 있는데, 거래액은 3월 한 달 동안을 기록한 것이다.

먼저 읍내시장을 살펴보면 축산물이 가장 많이 팔려 1만 9,915원이었고, 그 뒤로 농산물(3,564원), 직물(1,344원), 기타 잡화(1,136원), 수산물(29원) 등이 뒤를 이었다.

장호원시장은 직물의 거래가 가장 많아서 2,271원의 거래액을 기록했고, 기타 잡화(1,664원), 축산물(1,626원), 수산물(161원), 농산물(76원) 등이 뒤를 이었다. 읍내시장과 달리 농산물의 거래가 적음을 알 수 있다.

현방시장은 잡화가 163원으로 가장 높은 거래액을 기록했고, 농산물(129원), 직물(122원), 수산물(81원), 축산물(36원) 등이 뒤를 이었다. 오천시장은 수산물이 245원으로 가장 높은 거래액이고, 직물이 145원, 농산물 52원, 기타 잡화가 22원을 기록했다.

오천시장에서 수산물의 비중이 높았던 것은 시장 주변에 복하천이 흐르는 것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이천 지역에 큰 교통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수려선이었다. 수려선은 수원과 여주는 잇는 철도로 1931년에 개통되었다. 이천 지역에서 수려선이 지나는 대표적인 역은 이천과 오천이었는데, 이곳에는 각각 시장이 발달했다. 한편 기존의 도로 교통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던 장호원은 수려선의 개통으로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잃고 상권이 약화되는 등 타격을 입었다.

수려선은 남한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어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는 이천과 여주에서 생산되는 쌀을 대량으로 유통시키기 위해 부설되었다. 실제로 1931년 용인역에 하역된 쌀의 양을 살펴보면 한 해 234만 t, 도정되지 않는 벼가 725t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수려선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행되었는데, 1972년부터 기관차의 노후 때문에 객차의 운행은 정지되고 화물만 운송했다. 하지만 1972년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같은 해 3월 31일 폐선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후반에 해당되는 1930대 말 이천 지역에는 위에서 살펴본 4곳의 시장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 즉, 일제강점기 때에 이천 지역의 시장은 상권의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시장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다만 땔감시장은 과거부터 있었던 시장으로 이천 읍내장이 서는 장터 주변에서 매일 땔감이 거래되었다. 땔감시장은 오늘날의 관고동사무소에서 양정학교 쪽으로 올라가는 곳에 신탄시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1930년대 말 이천 지역의 정기시장 개설 현황

1930년대 말 이천 지역의 정기시장 개설 현황
시장 이름 소재지 장날 연 거래액(원)

이천장

이천군 이천읍 관고리

2, 7일

510,897원

현방장

이천군 박사면 현방리

3, 8일

16,545원

오천장

이천군 마장면 오천리

3, 8일

22,380원

장호원장

이천군 미청면 오남리

4, 9일

160,826원

신탄장

이천군 이천읍 관고리

매일

9,440원

자료: 《조선의 시장》 문정창, 1941년

위에서 내려다본 장날 풍경

위에서 내려다본 장날 풍경

4. 시장의 발달 및 변천 과정

이천 지역은 한국전쟁으로 관청과 주택 등 많은 것들이 파괴되었다. 이런 과정을 딛고 이천 지역은 서울에 인접한 지리적인 환경의 이점을 잘 살려서 발전했고, 1996년 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과거 일제강점기 때 개설되어 있던 5곳의 시장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화했고, 이천장과 장호원장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5곳의 시장 가운데 땔감을 판매하던 신탄장은 석유와 가스 등으로 연료가 바뀌면서 1970년대를 전후해 사라졌고, 현방시장과 오천시장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라지고 말았다.

도로변에 나물바구니를 조금씩 펼쳐놓은 소규모 노점상

도로변에 나물바구니를 조금씩 펼쳐놓은 소규모 노점상

1) 관고시장

오늘날 이천시의 중심 시장은 관고동에 있는 관고시장이다. 과거 이천의 읍내장이 섰던 곳도 관고리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관고시장은 이천 읍내시장의 명맥을 이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천에 관고시장이 형성된 것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 사이였다. 그 계기는 1969년에 이천 당국은 오늘날의 관고시장 뒤편 놀이터 자리에 공원을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공원을 만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그곳에 있던 낡은 건물들이 모조리 철거됐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 공터가 생겨났다. 그런데 애당초 세웠던 공원 설립 계획이 지연되면서 공원 부지는 계속 공터로 남았고, 그 자리에 노점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이곳에 노점들이 들어선 것은 가까운 곳에 버스터미널이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둘씩 모여든 노점들은 곧 시장으로 변화했다. 파라솔과 같은 간이 포장을 치고, 옷이나 옷감을 파는 노점이 많았다. 지리적 이점 때문에 관고시장은 큰 번영을 누렸다. 과거 읍내시장의 명맥이 사라진 이후 이천에 달리 시장이 없었기에 노점에서 형성된 관고시장이지만 중심 시장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관고시장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것은 1979년에 이천중앙시장이 개설되었기 때문이다. 중앙시장은 중리동에 상가건물을 짓고 분양하면서 이천의 중심 상권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동성약국 골목을 중심으로 이천공설시장이 개설되면서 관고시장은 된서리를 맞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관고시장의 유일한 장점이던 버스터미널이 1984년에 폐쇄되고, 이천 중앙시장 옆으로 이전하면서 시장의 존속을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이후 관고시장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지금의 중리천로의 골목에 몇몇 점포만 남았을 뿐이었다. 관고시장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비가림막 설치 작업이었다. 관고시장의 상인들은 기존의 간이포장을 철거하고, 비와 눈을 막기 위한 비가림막을 세웠다. 오늘날의 아케이드는 아니지만 비를 가릴 수 있게 되었고, 시장이 하나의 공간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1990년대가 되면 전국적으로 대형마트와 백화점들이 등장하면서 전통시장들은 전반적으로 위기에 빠지게 되는데, 이천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이천의 전통시장들도 침체에 빠졌다. 이런 상황은 2000년대에 들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바로 2006년에 이천 중앙시장을 폐쇄한 것이었다. 한때 이천의 중심 시장으로 상권을 이끌던 중앙시장은 건물 노화 등의 이유로 입주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고, 2006년에 재건축 결정과 함께 폐쇄되었다.

이에 대해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한 법안이 만들어지고, 지역 경제의 중심이던 전통시장에 대한 지원이 확대되면서 이천에서는 장호원전통시장(2004), 사기막골도자기시장(2006), 그리고 관고시장(2008)이 차례로 인정 시장으로 등록되었다.

관고시장도 시장 현대화를 위해 점포의 간판을 깔끔하게 정비하는 작업부터 도로 정비, 조형물 설치 공사가 진행되었고, 2010년에는 기존의 비가림막을 제거하고 아케이드를 설치했다. 아케이드는 제1구간이 폭 10m, 길이 60.4m, 제2구간이 폭 6m, 길이 65.1m의 규모로 설치되었다. 그 이후에도 시설 정비를 해서 과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전통시장으로 거듭났다.

아케이드를 설치하고 깔끔하게 단장한 관고시장

아케이드를 설치하고 깔끔하게 단장한 관고시장

시장이 변화하자 고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관고시장은 2014년 중소기업청과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서 실시한 ‘2014년 온 국민이 단골이 되는 매력 넘치는 시장 만들기 캠페인’에서 최우수 시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나물을 봉지에 담는 상인

나물을 봉지에 담는 상인

메모하는 상인

메모하는 상인

감자를 고르는 사람들

감자를 고르는 사람들

어물전

어물전

2) 장호원전통시장

장호원은 경기도의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장호원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가면 충북 음성이 된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은 다리를 사이에 두고 음성 장호원과 이천 장호원으로 부른다. 시장의 규모는 이천 장호원이 더 크다. 장호원시장은 직행버스터미널에서 상설시장까지 약 1km에 이르는 길에 정기시장이 개설된다.

장호원시장의 장터에는 농산물을 파는 사람들이 많다. 예부터 이천과 함께 쌀이 좋아서 쌀 거래가 활발하고, 계절에 따라 배와 게걸무, 복숭아 등이 장터를 가득 메운다. 게걸무는 이 지역의 특산물로 겨자처럼 맵고 속이 단단해서 소금에 절여 땅에 묻었다가 다음해 여름에 꺼내 먹는다.

장호원시장은 가축시장으로도 유명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음성 장호원 장터 서쪽에 있는 왕장4리에 우시장이 있었다. 이천 장호원에도 우시장이 있었지만 음성 장호원의 것보다 더 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에 우시장은 이천 장호원에 있었다. 그래서 해방 이후에 음성 장호원의 소장수였던 이경화가 시장 번영회를 만들어 이천 장호원의 우시장을 빼앗기 위해 노력했다.

이 갈등은 꽤 오래된 것이었다. 또 단순히 이천 장호원과 음성 장호원의 문제가 아니라 경기도와 충북의 갈등으로 확산될 정도였다. 한때는 다리를 막고, 오가는 화물을 차단하기까지 했다.

그 이후 이 갈등은 계속되었고, 1977년에 결국 우시장은 음성 장호원으로 넘어갔다. 음성 장호원은 우시장을 중심으로 시장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우시장이 약화되면서 오늘날에는 시장의 장세가 약화된 상태이다.

3) 사기막골도자기전통시장

사기막골도자기전통시장은 이천시 사음동에 위치해 있다. 도예품을 전문으로 파는 53개의 점포로 구성되어 있는 전통시장이다. 사기막골도자기전통시장은 도예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시장이기 때문에 도예품의 구입 및 체험도 가능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천시의 도자기는 16세기 초반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미 이천의 특산물로 꼽을 정도로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동안 이천의 도자기는 위축되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인근 경기도 광주에 왕실에서 필요한 도자기를 굽는 관요가 생기면서 이천의 도공들이 많이 이주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천의 도자기시장이 되살아난 것은 1960년대 이후로, 당시 2~3곳에 불과했던 가마가 1980년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계기로 100곳까지 늘어났고, 2006년에 전통시장으로 확장되었다.

이밖에도 이천 시내에 약 500m 구간에 걸쳐 중앙통문화의 거리가 있다. 차가 다니지 않는 거리로, 쇼핑과 음식점 등이 밀접해 있으며, 이천의 중심 상권을 형성한 곳이다. 거리의 중심에서 크고 작은 문화 행사가 자주 행해진다.

사기막골도자기전통시장에 가면 다양한 도예품을 둘러보고 구매할 수 있다

사기막골도자기전통시장에 가면 다양한 도예품을 둘러보고 구매할 수 있다

사기막골도자기전통시장에 가면 다양한 도예품을 둘러보고 구매할 수 있다

5. 시장의 위치와 거래 품목

관고시장은 이천 시내에 위치하고 있다. 이천버스터미널에서 접근하면 중리사거리와 이천중앙로 문화의 거리를 지나면 곧 관고시장이 나타난다. 관고시장의 서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설봉공원과 설봉산이 위치하고 있다. 관고시장에는 질 좋은 쌀과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구입하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도 많이 찾아온다.

무와 양파

무와 양파

플라스틱 채반에 담긴 생선들

플라스틱 채반에 담긴 생선들

머위

머위

꼬막

꼬막

장호원시장은 장호원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남쪽으로 조금 가면 곧바로 나타난다. 장호원시장은 청미천과 가깝고 청미천을 건너면 충청북도 음성 지역이다. 장호원시장에서는 농산물과 수산물, 잡화 등을 팔고 있으며 계절에 따라 특산물인 복숭아와 배 등이 시장에 선보인다.

채소를 파는 노점상

채소를 파는 노점상

말린 고사리

말린 고사리

관고전통시장의 간판이 보이는 시장 입구

관고전통시장의 간판이 보이는 시장 입구

6. 이천의 특산물과 볼거리

이천 지역은 동북부지방으로 광주산맥, 남쪽으로 차령산맥이 지나고 있어 북쪽과 서쪽은 높은 산이 많지만 동쪽과 남쪽은 낮은 산지와 구릉지가 발달해 있다. 이들 산지와 구릉지 사이로 중심 하천인 복하천이 지나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하천 주변에는 비옥한 땅이 위치해서 예부터 농업이 발달했다. 특히 쌀이 품질이 뛰어나 왕실에 진상되었다. 쌀을 중심한 농업은 지금도 활발하고, 이 외에도 밭작물인 무, 배추 등이 많이 생산된다. 왕실에 진상된 쌀은 자채쌀이라고 불렀는데, 자채는 올벼라는 의미이다.

이천의 산업은 영동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가 십자 형태로 지나가면서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교통의 변화와 함께 공업이 크게 발달했고,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로 인해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이천은 특산물이 많은 지역이다. 기존의 쌀 외에도 도자기, 복숭아, 산수유 등을 꼽을 수 있다. 도자기는 이천 지역에서 고령토가 많이 생산되어 예부터 이천의 특산물로 꼽혔다. 오늘날에도 예술 작품부터 생활에 필요한 자기까지 다양한 물품들이 생산되고 있고, 격년으로 세계도자비엔날레가 개최되어 이천도자기의 우수함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산수유를 대표하는 것은 산수유마을이다. 산수유마을은 조선시대에 조광조의 이상 정치를 추구하다가 몰락한 신진사대부들이 이천으로 낙향해서 느티나무와 산수유를 심은 것에서 유래했다. 아직도 당시에 심었던 산수유나무가 남아있다. 그래서 3~4월이 되면 산수유마을은 노란 산수유 꽃으로 뒤덮인다. 산수유는 한약재로 쓰이고 차나 술로도 많이 즐긴다. 산수유마을에서는 매년 산수유축제가 열린다.

장호원의 특산물로 꼽히는 것은 복숭아와 배이다. 장호원의 복숭아는 ‘햇사레’라는 브랜드로 이름이 났으며, 복숭아철에는 햇사레장호원복숭아축제가 개최된다. 복숭아나무는 예부터 있었지만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이며, 오늘날처럼 과수원에서 과일로 대량 생산해 낸 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복숭아의 주산지 가운데 하나가 이천 장호원과 음성 감곡이다. 두 지역은 청미천을 지나는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천은 수도권과 인접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관광지 가운데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곳이 온천이다. 이천 온천은 약 600년 전부터 형성되어 온천배미라고 불렸던 곳이었다. 본격적으로 온천이 개발된 것은 100여 년 전에 근처에 살던 농부가 이 물로 세수를 하고 눈병을 고친 이후의 일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온천이 폐쇄되기도 했지만 1959년에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온천의 하나로 인정을 받았다.

한때 온양이나 유성 온천에 밀리기도 했지만 주변의 도예마을과 스키장 등과 연계되면서 다시 각광받고 있다. 이천 온천은 나트륨이 많아서 피부 질환과 미용,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천도예마을도 사기막골도자기전통시장과 연계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700여 명이 넘는 도예가와 300여 개의 요장이 있어서 1,000년의 도자기 전통을 잇고 있다.

또 하나 이천의 문화를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설봉공원과 설봉산이다. 이곳에서는 도자기축제와 이천쌀문화축제가 개최된다. 넓이가 10만 m2의 면적에 둘레가 105km에 달해서 많은 사람들이 산책과 등산을 위해 공원과 산을 찾는다.

7. 먹을거리

이천의 대표적인 먹을거리는 단연 이천쌀밥이다. 이천쌀밥은 이천에서 생산된 품질이 뛰어난 쌀로 밥을 지어 찌개와 생선조림, 잡채, 여러 김치 등 한정식으로 차려서 먹는 음식이다. 이천 지역에 쌀밥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였다. 이천도자기축제가 시작된 이후 몇 년 뒤부터 수광리 지역에 쌀밥집들이 하나둘씩 생겨났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쌀밥집이 유명세를 타면서 쌀밥을 파는 음식점도 늘어났다.

이천쌀밥

이천쌀밥 이천쌀로 밥을 짓고 다양한 반찬을 함께 내는 한정식.

참고문헌

  • 《東國文獻備考(동국문헌비고)》
  • 《朝鮮の市場(조선의 시장)》 조선총독부, 1924년
  • 《市街地の商圈(시가지의 상권)》 조선총독부, 1925년
  • 《朝鮮の市場(조선의 시장)》 문정창, 1941년
  • 장터순례》 이철호, 유림, 1991년
  • 사라져가는 우리의 오일장을 찾아서》 주영하 외, 민속원, 2003년
  • 〈이천내각시장의 거래액〉 동아일보, 1925년 5월 6일자
  • 〈이천관고전통시장〉 경기일보, 2014년 10월 30일자
  • 이천시청 : www.icheo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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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고시장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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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덕

    문화인류학 박사. 현재 대학에서 경제인류학, 아시아문화, 종교문화, 축제와 신화 등을 강의하고 있다. 쓴 책으로 《길 위에서 마주친 우리 문화》, 《인문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 곁에서 만나는 동서양신화》, 《하룻밤에 읽는 그리스 신화》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고민하는 힘》,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등이 있다.

  • 사진, 촬영 박재영

    홍익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전공과 관련 있는 전통건축을 주제로 오랜 시간 사진작업을 해오고 있으며, 전통건축에 녹아 있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미적 감성을 찾는 데 노력을 기울여왔다. 20여 년 전국을 유랑한 결과물로 '우리공간 이야기', '지붕', '선' 등 서너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사진집으로 《오감으로 느끼는 전통건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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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디언과 시루, 2개의 브랜드로 혁신과 지속 성장에 필요한 경제 · 경영서와 실용서, 사람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역사서와 인문교양서를 출판하고 있습니다. 대표서적으로 《하루 10분의 기적》, 《3불 전략》,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식객II》(전3권)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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