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가루로 끼니 때우던 전쟁시절
- 피난 온 이북민의 냉면 대체음식
- 가진 것 없고 배고픈 이들에게
- 싼값으로 배불리던 '착한' 음식

- 감칠 맛 덜한 밀가루면 보완하고
- 강하고 자극적인 매콤한 양념과
- 약재 더한 깊고 진한 사골 육수로
- 부산사람의 입맛에 맞게 재탄생

부산을 조금이라도 안다는 사람에게 부산 대표 음식, 또는 부산 향토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돼지국밥과 밀면을 꼽는다. 부산이 한층 매력적인 관광지로 떠오른 뒤, 부산 와서 돼지국밥 한 뚝배기, 밀면 한 그릇 안 먹고 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 것 보면 틀린 말도 아닌 듯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자면 우리 부산이 가진 고유한 전통음식, 부산의 향토음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개인적 의견이다. 지금 부산의 향토음식들은 외부 환경에 의해 급속하게 재편된, 타의에 따라 급조된 음식들이기 때문이다.

'향토음식'이라 함은 그 지역의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나는 음식재료로 만들고, 그 지역의 환경에 의해 오래도록 길들여진 입맛으로 먹되, 지역사회 전체가 향토음식으로 공유하는 '자연발생적인 음식'을 뜻한다.

그러나 부산의 고유 향토음식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부산 고유의 음식문화를 계승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음식문화가 우리 밥상을 넘나들었고, 한국전쟁 때는 식재료의 절대적 결핍도 한몫했겠지만, 부산에 정착한 여러 지역의 피란 이주민들의 음식문화를 수용함으로써, 부산 고유의 향토음식은 자연스레 다른 지역 음식문화와 혼용, 통합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하여 현재 부산의 향토음식은 다른 지역 식문화와 어우러지며 새롭게 재가공 또는 재창조되는 형식으로 '새로운 형태의 향토음식화 과정'을 거쳤다. 그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돼지국밥과 밀면이다.

돼지 살코기로 만든 맑은 육수의 '돼지 고깃국'이, 돼지머리나 부산물, 사골 등 다양한 베이스의 육수를 활용하는 현재의 돼지국밥이 되고, 이북 지역의 냉면이 밀가루 면을 활용한 밀면으로 재창조된 것. 특히 밀면은 한국전쟁 당시 이북 지역 출신 피란민들이 고향에서 먹던 냉면을 생각하며 당시 구하기 힘들었던 메밀 대신 원조물자로 들어온 밀가루로 실향의 아픔을 달랬던 음식이다. 이북 냉면이 현재 우리 부산 사람의 입맛에 맞는 밀가루 냉면, 즉 '밀면'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개성 있고 강한 육수로 '부산 맛'

밀면은 '밀가루 냉면'으로 불리며 주머니가 가벼운 이들에게 제공되었다. 가격은 냉면의 반값 수준. 메밀 대신 밀가루를 사용하고, 쫄깃함을 더하기 위해 고구마 전분을 소량 섞어 면을 뽑았다고 한다. 그러니 밀면은 '대용의 음식'이라는 인식이 짙었다.

음식값도 냉면에 띠라 좌지우지되었다. 냉면값의 절반이 밀면 값. 주머니 가벼울 때 냉면 대신 밀면을 먹거나. 두 사람이 함께 먹어야 할 때 한 사람 가격으로 함께 먹어야 했던 음식이 밀면이다.

밀면이 부산 사람의 정서와 함께하면서 그 인식은 서서히 바뀌게 된다. 그 시작은 밀면의 조리법이 부산화 과정을 거치면서부터이다. 밀면은 감칠맛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밀가루 면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강하고 자극적인 양념을 쓰고, 육수에 약재를 첨가하는 등 육수가 밀가루 면의 심심함을 보완한다.

이는 부산 음식의 특징인 맵고 짜면서도, 시원하고 진한 풍취를 자아내는 조리법에 근접해 있다. 또한 부산 사람의 얼큰하면서도 속 시원한 '국물' 사랑과도 맞닿아 있다. 뜨거운 것도, 차가운 것도, 맵고 짠 것도 훌훌 들이마시며 "어허, 시~원하다!" 하는 부산 사람의 성정이 반영되었기에 그렇다.

그러다 보니 겨울을 비롯한 사철음식 개념인 냉면과 비교하면, 맵고 짜고 시원한 육수의 밀면은 여름철 갈증을 해소하는 별미로 먹는 계절음식의 성격이 짙다. 양념이나 육수가 깊고 차분한 냉면과는 본연적으로 차별화되는 것이다. 부산의 "아싸리~!(기면 기고 아이면 아이다)" 정서가 투영된 음식이다.

그러하기에 비록 피란 도시의 '대용음식'이자, 실향의 아픔을 달래주던 '망향의 음식'으로 만들어졌지만, 탄생의 과정과는 달리 부산사람의 성정과 맞아떨어지면서 서서히 부산의 정서를 음식 안에 담게 된 것이 바로 밀면이다.

■다소 거친, 대체의 음식으로 출발

지금의 밀면은 여름철이면 부산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을 정도로 좋아하고 자주 먹는 부산 고유 음식이다. 부산에서 유래되어 오래도록 부산 사람 정서에 맞춰진 음식이다. 부산의 정체성과 어우러지기에 지금에 와서는 떳떳하게 부산의 향토음식이라 불리는 것이다.

밀면은 가게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밀가루와 고구마 전분, 감자 전분 등을 배합하여 만든 면에다, 소 사골과 여러 가지 한약재, 채소 등으로 우려낸 육수를 살얼음으로 살짝 얼려 시원하게 먹는 음식이다. 냉면처럼 물밀면, 비빔밀면 두 가지로 대별된다.

밀면은 우선 다양한 채소와 한약재, 사골을 푹 고아 만든 육수의 맛이 일품이다. 깊고 진한 국물에 한약재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고, 게다가 살얼음이 동동 떠 있어 시각적으로도 시원하다. 살얼음 육수를 살살 걷어내어 건져 먹는 밀면 가락은 쫄깃하면서도 질기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쫀득하여, 씹는 맛이 여간 아니다.

비빔밀면은 부산 사람들 성정처럼 벌건 고춧가루에 마늘, 양파 등을 다져 넣은 다진 양념으로 비벼서 먹는데, 화끈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이열치열의 음식으로도 아주 괜찮다.

열악한 시대 상황 속에 탄생했기에 맛의 깊이가 질박하고 다소 거친 느낌의 음식인 밀면. '정통의 음식'이 아닌 '대체의 음식', '최선의 음식'이 아닌 '차선의 음식'이지만, 같은 값이면 넉넉하게 함께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공유의 음식'이자, 같은 양이라도 값이 싸 여러 사람 먹일 수 있었던 '배려의 음식'이 밀면이었다.

■부산 사람 정서를 담게 된 밀면

더욱이 밀면의 창시자인 우암동 내호냉면의 고 유복연씨는, 다섯 평 가게에서 장사하며 쪽방에서 여섯 식구가 한데 자던 시절에도 '음식을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된다' '싸면서도 영양가 높은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고 유언처럼 말을 남겼다고 한다. 유 씨의 이 말에서 서글펐던 시절의 밀면 탄생의 정신이 부산 사람들의 정신으로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밀가루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 조금 부족하고, 조금 열악한 음식이었지만, 다함께 먹고 살자고 시작된 음식이면서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싼값으로 제공됐던 음식. 따뜻하고 푸근한 마음의 음식, 마음만은 배부른 착한 음식이 밀면이었다.

밀면은 우리 부산음식의 특징과 성정을 품은 부산다운 음식이다.

문화공간 수이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