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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박정희 전 대통령이한 나쁜 일들 적어주세요
kymb**** 조회수 4,477 작성일2019.04.02

박정희 전 대통령이 했던일중에 나쁘다고 생각한는  일들 을 모두 적어주세요

(토론주제: 박전희 전 대통령은 옳은 일을 했는가?)반대 주장 입니다 자루롭게 적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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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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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체결을 통해 얻어낸 막대한 청구비용으로 1960년대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음

-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한국의 국익에 부합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한국의 경제 발전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관계 정립에 필수 요건임을 확신하고 밀어붙였는데, 일본을 이용해 발전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3년 말부터 야당은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투위'를 구성해 투쟁에 나섰고, 이듬해 6월 3일에는 서울의 18개 대학생과 시민 등이 시위를 벌였다. 이는 6.3 사태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는데, 한일회담 막후 주역으로 공화당 의장을 맡고 있던 김종필이 사표를 내고 외유를 떠날 정도로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과 이에 부속된 협정 4개 및 문서 25개에 서명함으로써 한일협정은 타결되었다. 이로 인해 청구권 및 경제협력협정에 따라 무상 공여 3억 달러, 유상 재정 2억 달러를 각각 10년에 걸쳐 분할해서 제공받기로 했으며, 양해 사항으로 민간 차관 3억 달러가 제공되었다.

이러한 한일협정은 경제 회생을 위한 의도도 있었지만 집권당인 공화당의 정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36년간 '일제 식민통치의 한'까지 팔아먹은 전형적인 매국 외교라며 격렬한 비난이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2005년 8월 26일 노무현 정부는 156권, 총 3만 5354쪽의 한일회담 전 과정이 담긴 외교 문서를 모두 공개했는데, 당시 민간위원으로 문서 공개에 참여해 샅샅이 문서를 살피고 정리한 전현수 경북대 교수는 2005년 8월 26일에 다음과 같이 문서공개관련 회견을 가졌다.

"나도 한때는 한일협정이 굴욕 회담이라고 생각했는데, 3만 6000장을 일일이 검토하면서 우리 정부가 국익을 대변하기 위해 비교적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굴욕적인 36년 식민 지배를 통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손해에 상당하는 보상은 부족하지만, 협상은 상대가 있는 것이다. 일본은 당초 8000만~1억 5000만 달러만 주려 했는데 우리 대표단이 최대한 액수를 끌어올렸다. 과거 청산이나 국익 유지와 옹호를 위해 당시 대표단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사실, 이미 한국은 1951년 8월 13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서명국 자격을 얻지 못해 일본을 상대로 배상 요구를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지금의 시점으로 봤을 때, 일본의 이러한 행태들을 본다면 한일협정에서 우리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시간을 더 끌어 시일이 지난 뒤에 협정을 가졌다면 아예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도 지적을 했듯이 말이다.

분명 당시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는 1960년대 한국 경제를 경이적으로 발전하도록 이끈 견인차였다. 당시 한국의 총 외환 보유고가 2억~3억 달러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일본에서 유입될 자본은 엄청난 금액이었고, 덕분에 수교 이듬해인 1966년에 무려 12.4%라는 놀라운 경제 성장률을 달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한일 국교 정상화의 결과물이었다. 이를 통해 제1차 5개년 계획을 연평균 8.5%로 초과 달성했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를 2년 앞당겨 1969년에 초과 달성한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 자립을 위해 '산업의 쌀'인 철강산업을 육성시켜 세계적 규모의 철강업체 기반을 다짐
 
- 1968년에 포항제철이 설립되어 1973년부터 조업을 시작한 이후, 한국 경제 발전과 중화학공업의 근간을 이루며 포스코는 세계적 규모의 철강업체로 발전했다. 포항제철이 건설되기 이전, 우리의 철강 산업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자립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제일 먼저 '산업의 쌀'인 철강산업의 육성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이는 1965년 존슨 미국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면서 피츠버그 철강공업지대를 시찰하고,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의 포어 회장을 만나 사업 실현에 필요한 외자를 조달하기 위해 국제 제철차관단을 구성할 것을 제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66년 12월, 미국의 코퍼스를 중심으로 5개국 8개사가 참여하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 :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그러나 1968년 세계은행(IBRD)은 한국의 종합제철 사업이 시기상조라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한국의 제철소 건설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고, KISA도 차관도입에 난색을 표함으로써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포항제철을 강하게 추진하면서 결국에는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규모의 철강업체를 만드는 데에 기반을 닦았다. 이 세계적인 포항제철은 박정희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철산업의 적임자를 찾던 중 박태준을 떠올렸고, 즉시 그를 청와대에 불러 포항제철소 건설을 부탁했다.

박태준도 부담이 되어서 여러 차례 거부를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고 끝내 박태준이 포항제철을 건설하도록 설득했다. 그리고는 원래 KISA가 한국에 조강 능력 6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1972년 9월까지 완공하며 300만 톤까지 철강을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하기로 했다.

또한 건설 자금은 총 1억 3,070만 2,000달러이며, 그중 외자는 무려 9,570만 2,000달러, 내자는 3,500만 달러였는데 외자 지급이 거부된 것이다. 하지만 이 자금은 바로 한일협정 청구비용에서 충당하게 되었고, 포항제철 건설은 국제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경제기획원은 전담반까지 설치하면서 포항제철 건설을 지원했다.

이렇게 1970년 4월 1일 착공식이 거행되었고, 드디어 포항종합제철의 1기 용광로 공사가 완공되어 점화로에 불을 붙였다. 쇳물이 나오기까지 21시간이 걸렸고, 마침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대한민국 한반도 포항에서 최초의 쇳물이 쏟아진 것이었다. 이 포항제철은 일관제철소 설비를 가동시킨 지 단 1년 만에 그동안 투입된 외국자본을 모조리 갚고도 남는 4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박정희의 전적인 지원과 격려, 그리고 박태준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포항제철은 선진국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준공되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이후 포항제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적자를 낸 적 없는 국가의 중요 수출산업으로 성장했다. 조강 생산능력은 세계 1, 2위를 다투는 등 국가 발전의 최고 핵심산업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이라는 포항제철을 건설한 CEO의 위대한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결단력과 포항제철 창업단의 불도저와 같은 리더십, 포항제철은 이러한 긍정적인 사고가 밑바탕이 되어 이제는 세계 굴지의 제철공장이 되었다. 포항제철의 성공은 단순하게 포항제철의 성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포항제철은 국내의 철강산업을 선도하면서 한국경제를 선두에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다.

2019.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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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신

 박정희 전 대통령이한 나쁜 일들

 

 

1. 광복군 잡는 일본군 장교가 된것

2. 손가락을 잘라 왜놈 왕에게 충성맹세를 한것

3. 왜놈의 개가 되어 충성을 하겠다고 한 것

4. 해방 후에는 김일성이에게 충성한 남로당 간부가 된것

5. 한국 군인이 되어 한국 정부를 공격한 내란을 일으킨 것

6. 대통령이 되어 공부하는 학생을 간첩 누명 씌워 사형 시킨 것

7. 유신 독재를 한 것

8. 일본에게 굴욕적인 한일 협상을 한 것

9. 엉터리 합의로 사우디 매장량 10배 규모 원유, 천연가스 매장의 7광구를 2029년 이후 일본에 영유권을 뺏기게 만든 것

10. 베트남전쟁 참전용사 "전투수당"을 주지 않은 것

11.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하여 원성을 듣게한 것

12. 월남 파병으로 수많은 고엽제 피해자를 만든 것

 

 

 

 












2019.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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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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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했던 나쁜 일을 찾기 어려웠나요?

나쁜 일을 알아서 뭐 하시게요? 그분은 지금 이 세상에 안 계십니다.

박정희대통령이 옳은 일을 했던가? 당연하죠!

겨우겨우 하나 있는 박정희대통령의 상암동 기념관에 가면 그분이 5,000년 가난을 없어고

미개했던 국민을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 지 알 수 있습니다.

뭔가 그렇게 비난하고 싶은 '독재자' 라는 말? 독재자가 뭔지 아세요?

독재자는 자기 국민을 무지하게, 배 곪게 하는데 독재자 입니다. 아랍, 남미, 특히 북한처럼 말입니다!

등따시고 배부르면 이게 민주주의 입니다. 왜냐구요? 등 따시고 배 부르면 그 다음 뭘 생각할 수 있겠어요?

더 맛있는 거, 더 낳은 삶! 선택! 이게 바로 민주주의 라는 겁니다.

당신의 성향을 모르지만, 좋은 거만 보고, 좋은 거만 생각하고 사세요.

박정희대통령을 독재자로 비난하고 싶으면, 당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거, 전부 다 버리고

60년대 원시시대로 가서 다시 생각해 보세요.

화 내지 마시고 상암동 가서 그분이 이 나라를 가난에서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 지 잘 공부 하세요.

감사하며 사세요.

2019.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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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
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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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대국으로 갈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했다는 거죠. 그 열매를 따 먹으면서도 은혜를 모르는 것들에게도 잘살도록 말입니다

2019.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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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공손한 바퀴벌레
수호신
북한 동향, 정세 2위, 파일공유, P2P 2위, 대통령선거 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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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1917년생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완전히 나라를 빼앗긴것이 1910년이므로 박정희가 태어나보니 벌써 왜놈들 세상이었지요.


일본의 식민지가 된 나라에서 자란 박정희는 어찌어찌하여 학교 선생이 됩니다.


그런데 일본인 교장이나 일본인 교사들로부터 무시당하는 일이 많았어요.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이나 울분이 생길만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네. 자기도 일본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학교 선생이라는 직업은 굶어죽을 일도 없고 전쟁터에 끌려나갈 일도 없는 제법 괜찮은 직업이었지요.


그런데 박정희는 조센징이라 불리는 입장이었으므로 출세가 어렵다 판단하고 진짜 일본인이 되기 위하여 일본이 만주에 세운 괴뢰국가인 만주국의 신경군관학교에 지원을 합니다.


하지만 이미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지요.


그러자 박정희는 손가락을 베어 나온 피로 혈서를 써서 일본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을 적어 보내고 이것이 신문에 나오게 되고 이를 계기로 신경군관학교에 입교하게 됩니다.


이후 일본육사까지 졸업하게 되면서 박정희는 진짜 일본인이 됩니다.


일본군 장교가 된거죠.



당시의 일본은 아시아 최강이었습니다.


중국도 때려잡고 러시아도 때려잡고 막 엄청 잘 나갈때였어요.


그래서 박정희는 다른 사람들은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목숨걸고 독립운동할적에 독립운동은 커녕 실컷 나라를 팔아먹고 독립군을 때려잡고 다녔죠.


강대한 일본이 아무리 못해도 백년은 갈거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아뿔싸!  일본이 미국을 공격했다가 뒤지게 쳐맞고 핵폭탄 두 발 더 쳐맞고 항복을 해버렸네요?


출세하려고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고 일본인이 되었는데 그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겁니다.


일본인으로서의 출세길은 물 건너간거죠.


그러자 박정희는 슬그머니 광복군에 합류해서 귀국을 하고 이번에는 국군으로 변신합니다.


국군장교가 되어 지내다가 공산세력이 득세할거라는 판단이 들자 이번에는 남로당 빨갱이로 변신해서 군사반란을 준비하다가 붙잡혀서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습니다.


남로당이란 남조선노동당을 줄인 말인데 지금의 김정은이가 노동당 위원장인걸 보면 노동당이 뭔지 알겠죠?


암튼 그렇게 빨갱이질을 하다가 붙잡혀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는데 같이 활동하던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불러주고 같이 나라 팔아먹던 일본군 출신 선배들의 노력으로 감형이 되고 형집행정지로 풀려나서 목숨만은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빨갱이가 되어 군사반란을 준비하다가 쫓겨났으니 더 이상 갈곳이 없었죠.


그때에!  극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네. 김일성이라는 개호로쌍놈의 새끼가 6.25를 일으킨거죠.


그 당시 우리나라의 군사력은 형편없었고 북한군을 막기 위해 박정희도 군대로 돌아갈 기회가 생깁니다.


이후 박정희는 군내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진급을 거듭하게 되고 드디어 이승만의 독재가 끝나는 4.19혁명이 일어나지요.


이승만이 쫓겨나듯이 하야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도망가자 국내의 정치상황은 엄청나게 혼란스러워졌고 박정희는 이 틈을 타서 정말로 군사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대통령 자리에 올라서 무려 18년간이나 김일성과 다를바 없는 독재정치를 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간첩 빨갱이로 몰아서 잡아죽이고 기업가들로부터 뇌물을 받아처먹고 일본과 굴욕적인 한일협상을 맺고 부녀자들을 데려다가 겁탈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 빨갱이냐? 박정희가 무슨 빨갱이란 말이냐? 라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제로 박정희는 빨갱이였습니다.



경제발전을 했으니 나라 팔아먹어도 되고 빨갱이질 해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러나 그 경제발전은 국민을 위해서 한것이 아닙니다.


국민을 위한 경제발전이었다면 독재를 하면서 국민을 죽이지도 말았어야죠.

2019.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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