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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세종대왕의 일생좀 알려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학교 조사물.
flor**** 조회수 1,105 작성일2019.05.13

학교 조사물 때문에..빨리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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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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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 #트랜스유라시아어족 #폐쇄은둔족 한국사, 지구과학, 화학, 화학공학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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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1418∼1450.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 태종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이다. 비는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進封)되었으며,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개와 매[鷹]에 관계된 사건을 비롯해,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행동과 사건들로 인해 태종의 선위에 대한 마음이 동요되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과 왕권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양녕대군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태종의 마음이 이미 세자 양녕대군에게서 떠난 것을 알게 된 신료(臣僚)들은 그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소(疏)를 올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이 때 태종에게는 왕후 민씨 소생으로 양녕·효령(孝寧)·충녕 등 세 대군이 있었고, 양녕대군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를 폐하고 새로이 세자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세자 폐립에 관해 의론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은 이미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쏠려 있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라고 해 택현(擇賢: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의 명분을 주어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충녕대군에 대한 세자책봉은 태종의 뜻에 따라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를 환영하였다. 두 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선위를 이어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세종이다.

세종 2년(1420) 집현전(集賢殿)을 확충, 궁중에 설치하여 학자를 키우고, 학문을 숭상하며, 옛 제도를 연구 검토하게 함으로써 정치와 문물제도를 정리하여 행정체제를 확립하였다. 역사, 지리, 정치, 경제, 천문, 도덕, 예의, 문자, 운학, 문학, 종교, 군사, 농사, 의약, 음악 등에 관한 각종 저서를 하게 함으로써 문화 생활에 막중한 지침서가 되게 하였다.

한편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새 활자를 만들고 판짜기를 개량하여 인쇄 능률을 올렸는 바, 새로 주조한 활자는 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 갑인자(甲寅字)와 납활자인 병진자(丙辰字)와 효시의 한글 활자가 그것이며, 이 중 갑인자와 한글 활자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활자들이다.

세종 15년(1433) 천체측각기인 혼천의(渾天儀)와 간의(簡儀),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고, 세종 16년(1434)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발명하고, 세종 23년(1441)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와 하천수(河川水)를 재는 수표(水標)를 발명하였으며, 천문, 역서(曆書)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과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펴냈다. 그 중 측우기의 발명은 이탈리아 사람 베네데토 카스텔리(Benedeto Gastelli)의 측우기(1639)보다 거의 200년 앞선 세계 최초의 것이다.

화전(火箭), 화포(火砲)를 개량하여 우리 나라 무기사상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도량형(度量衡)의 고정(考正) 실시로 물량거래(物量去來)의 공정을 기하고, 경제적인 정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책상의 제도 마련 기준에 공헌하였다.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 반포케 하여 농업 발전에 기여하고, 조세제도(租稅制度)를 정할 때 온 백성의 민의를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전국 8도의 관민(官民)에게 공법(貢法)에 대한 가부를 조사(민주적 여론조사)하는 한편,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종래에 모순이 많았던 조세제도를 연분구등(年分九等), 전분육등(田分六等)의 54등급으로 확립 실시하여 조선조 5백년 간의 조세제도를 확립하였다.

의료기관을 정비하고,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류취(醫方類聚)》 등의 의서를 편찬하여 향약(鄕藥)을 개발함으로써 의료 활동의 합리화를 기하였다. 죄수(罪囚)들의 건강을 염려하여 감옥 시설을 개선해 주는 한편, 남형(濫刑)을 금하고 억울하게 죽는 이가 없게 하기 위하여 삼심제도(三審制度)인 삼복법(三覆法)을 실시하였고, 배태법(背胎法)을 둔태법(臀笞法)으로 바꾸어 등과 같은 인체의 중요 기관을 치는 고문을 엄금시키었으며, 법의학서(法醫學書)인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 발간함으로써 인명치사(人命致死)의 사건이 생겼을 때에는 살상 검증(殺傷檢證)에 관한 검시(檢屍)의 제도를 실시하게 되니, 형정(刑政)에 획기적 발전을 보게 되었다.

15세 미만인 어린이와 70세가 넘는 늙은이는 살인죄나 강도죄가 아니면 가두지 못하게 하고, 10세 이하와 80세 이상인 이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범했더라도 가두지 못하게 하였으며, 천민인 노비(奴婢)를 하늘이 낸 백성으로 인정해 주었다. 관비(官婢)의 출산 휴가를 대폭 늘려 주었다.

세종 25년(1443) 친히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 이에 대한 자세한 풀이를 집현전 학사 등에게 하게 하여 만든 해설서인 《훈민정음》이란 책을 만들어 이와 함께 세종 28년(1446)에 반포하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게하고, 운서인《동국정운(東國正韻)》,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등을 편찬 발간하게 하는 한편 스스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어 내기도 하였고, 한문으로 된 경서(經書)와 문학서 및 불경(佛經)을 번역하게 하였으며, 또 이과(吏科)와 이전(吏典) 시험에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으로 정하는 등 훈민정음 보급에 크게 힘썼으니, 우리 문자 생활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다.

박연(朴堧)을 시켜 향악(鄕樂)과 아악(雅樂)을 짓거나 정리하고, 편경(編磬)과 편종(編鐘) 등의 악기(樂器)를 제작하게 하였으니, 정간보(井間譜)의 창안은 동양 최초의 유량악보(有量樂譜)이고, 《세종악보(世宗樂譜)》는 우리 아악의 연총(淵叢)일 뿐 아니라 동양의 고전 음악 연구에 절대적인 자료이다.

역사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고려사(高麗史)》 등을 편찬하고, 《효행록(孝行錄)》과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지어 풍속을 권려하였고, 《명황계감(明皇誡鑑)》을 지어 후세에 제왕의 일락(逸樂)을 방지하고자 하였고,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와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엮어 흥망 성쇠를 본받도록 하였고,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엮어 전쟁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전주 출척(銓注黜陟)의 법이 지극히 정밀하고 잘 갖추어져 현량(賢良)이 등용되었다.

종교에 있어서도 유교를 장려하여 도의 정치를 구현하는 한편 세종 6년(1424)에는 불사(佛寺)를 정리하여 선종(禪宗), 교종(敎宗) 36사(寺)만을 남겨 불도(佛道)를 정하게 닦도록 하였으며, 세종 30년(1448)에는 경복궁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불교 서적의 국역 간행 배포와 과거 승과(僧科)를 설치하는 등 불교 발달에 노력하여 유교와 불교 내지 도교(道敎)가 조화된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세종 원년(1419)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하게 하여 항복을 받음은 물론 경상도에 예속시켰고, 세종 15년(1433)에 최윤덕(崔閏德)에게 명하여 파저강(婆猪江) 일대의 야인들을 토벌하여 사군(四郡)을 설치하고, 세종 16년(1434)에는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동북 변경 지방의 여진(女眞)을 토벌하여 육진(六鎭)을 설치함으로써 동북과 서북쪽의 땅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확장, 우리 강토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한편, 나라안의 지리(地理)를 조사하게 하여 지리지(地理志)를 편찬하게 하고, 실측지도를 제작하게 하였으니, 그것이 정척(鄭陟)과 양성지(梁誠之) 등에 의해서 세조 9년(1463)에 편찬된 [동국지도(東國地圖)]이다. 이렇듯 세종은 겨레 생활을 존중하는 모든 제도의 완성을 이루어 국태 민안 문화 찬란의 황금 시대를 이룩하였다.

세종대가 우리 민족의 역사상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안정 기반 위에 세종을 보필한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사람됨이 그 바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유교와 유교정치에 대한 소양,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문화에 경도(傾倒)되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고집, 노비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던 인정 등 세종 개인의 사람됨이 당시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적 모든 여건과 조화됨으로써 빛나는 민족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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