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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리나라 역사 왜곡에 대한 질문
비공개 조회수 3,271 작성일2018.10.21

제가 한국사 역사왜곡에 대한 프로잭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 진행과정에서 생긴 궁금증이 있는데 역사 고수님들 해결 좀 해주세요.


1. 고조선 남쪽에 진나라라는 나라가 있었지 않습니까?그런데 왜 우리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그에 대한 글이 일절도 없나요?


2. 위만이 조선인 이라는데 그에 대한 근거 중 위만이 흰 옷과 상투를 틀고 있었다는데 그것이 조선만의 의류 문화라고 해서 조선인으로 정의하는 것은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조선인이라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진나라에 가있었냐는 거죠. 그리고 또다른 근거 중에 고조선 왕이 위만을 북쪽 지방을 지키라고 할 정도로 신뢰가 갔다는 것이 있던데, 그렇게 따지면 위만이 진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던 것 또한 당시 진나라 왕이 위만을 신뢰했다는 것이니까 위만은 중국인 이라고 할 수도 있는것 아닙니까? 이에 대해 답변해주세요!


3. 이것 이외에도 여러 우리나라의 역사 왜곡에 대해 알려주십시오. 예를들어 환단고기...등등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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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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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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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39위, 고고학 1위, 역사학 26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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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조선 남쪽에 있던 진나라에 대한 내용.


문헌에 따르면 고조선 남쪽에 진이 있었고 후에 삼한이 되었다고 하지요.


삼국지, 후한서 등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한 두 줄이 진나라에 대한 내용의 전부이며


진나라의 국가 형태, 풍습, 문화 등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전무하다시피합니다.


즉, 외국(중국)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진'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 진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교과서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것입니다.


다루더라도 있었다 정도로만 다루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교과서라는 것은 최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내용을 토대로 써야 합니다.


때문에 진나라에 대해 학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논쟁들은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지요.


학계에서는 진나라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문헌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보완하려고 하지요.


그렇지만 문헌자료가 매우 적은 것에 더해 고고학적으로도 뚜렷한 실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즉, 마한 진한 변한은 고고학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도 뚜렷하게 나타나지요.


그런데 삼한 이전에 있었다고 하는 진나라는 애매모호합니다.


한반도 중남부를 영유하고 있었던 집단이었다고 하는데


유적과 유물로는 좀.....맞다고 하기도 뭐하고 아니라고 하기도 뭐한... 그런 상황입니다.


때문에 진나라를 하나의 통합된 '국가' 형태의 집단이 아니라


여러 소국들로 쪼개져 있던 집단을 뭉뚱그려서 '진'이라고 불렀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마한 진한 변한도 보면 마한이 50여 개의 국(國)으로 이루어졌고


진한 변한도 각각 여러 개의 국으로 이루어졌다고 되어 있지요.


즉, 진나라도 이렇게 자잘자잘한 집단들을 한데 모아 불렀던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교과서는 최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부분만 적어야 하는 관계로


아직 논쟁이 있는 부분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진나라에 대한 서술이 부족할 수 밖에 없지요.


2. 위만의 국적.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한족(漢族)과 한족(韓族)


즉, 민족(民族)이라는 것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민족이란 단어는 근대 이후 서양의 민족주의(Nationalism)가 들어오면서


Nation을 번역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옛날에는 민족이란 단어 자체가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나라의 경우 남북국시대 이후...그러니까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인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문화, 언어, 풍습 등이 융합되어 한민족이라고 하는 민족의 근간을 이루었습니다.


그 이전...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문화가 많이 달랐습니다.


언어는 기록을 종합했을 때 통역이 필요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100% 같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의 경우 고구려 토기, 백제 토기, 신라 토기...한 눈에 구분될 정도로 다릅니다.


사람들이 살았던 주거지...이 것 역시 다르지요.


성곽을 쌓는 방법...삼국 모두 달랐습니다. 무덤도 달랐습니다.


즉,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서로 달랐던 집단들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삼국은 서로를 외국으로 보았습니다.


때문에 신라가 민족을 배반하고 당나라와 손잡았다는 것도


현대적인 관점에서 과거를 바라본 '왜곡'된 시선의 평가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본론으로 돌아와서


삼국시대가 저 정도인데... 고조선은 얼마나 더 심했을까요?


다시말하면 위만이 조선인인지 중국인인지에 대한 구분조차


현대 민족이라는 개념에서 바라본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한' 논쟁이란 것입니다.


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없거나 매우 희박한 시대상황에서


위만의 국적이 어디인지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리고 위만은 혼자 쫄래쫄래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혼자 왔다면 준왕이 단번에 위만을 등용하거나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필시 한 무리의 집단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왔을 가능성이 있고


고조선으로 오면서 고조선에 없는...좀 더 우수한 기술이나 물품 등을 가지고 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야 왕의 눈에 더 잘 띄겠지요.


무튼 그런 상황에서 위만은 마지막에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좀 더 알아볼 것이


고조선의 왕(王)은 마치 고려 조선에서 보는 것과 같이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왕정이 공고하게 자리잡고 왕에게 절대권력이 주어지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이지만


삼국도 초창기에는 왕권이 불안했습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 처럼 초기엔 자기 집단에서 돌아가며 왕을 하다가


형제집단끼리 왕을 하고, 좀 더 나아가면 자기 혈육만 왕을 하는..


쉽게 말해서 왕을 할 수 있는 범위가 점점 좁아지고


그만큼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때가 되어야 우리가 생각하는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전의 왕은 말 그대로 대표자일 뿐 권력이 약했던 것이지요.


부여를 보면 농사가 흉년이 들거나 재해가 오면 왕을 갈아치웠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고조선은 왕권이 더 약했으면 약했지 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위만이 준왕을 몰아낸 것도


마치 큰 반란을 일으키고 역성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3. 환단고기에 대한 부분은 제가 다른 답변에 쓴 것으로 대체합니다.


내용이 워낙 길기 때문에...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293160382&qb=7ZmY64uo6rOg6riw&enc=utf8&section=kin.qna&rank=1&search_sort=0&spq=0


4. 우리나라의 역사왜곡...


링크 답변의 마지막에도 써있지만


환단고기와 비슷한 부류인 '유사역사학 혹은 사이비역사학(Pseudo History)'집단이 있습니다.


이들 집단은 아무런 근거가 없거나 근거자료가 매우 부실한 것들을 토대로


역사왜곡을 일삼는 집단입니다.


과학에도 유사과학이라고 하는 집단이 있듯이 역사학에도 존재하지요.


이들은 두음법칙이 식민지 시절 국어의 잔재라고 주장하고


현재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일본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주장합니다.


문헌 및 고고학적으로 현재 우리가 배우는 역사가 곳곳에서 입증되고 있음에도 말이지요.



2018.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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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신

역사왜곡 영화는 많아요 


반일종족주의가 없는 고문도 만들어내고 

나라팔아먹는 고종을 미화하고 이완용 및 대신만 매국노 친일파 등등 만들죠

위안부 징용  거짓말 지어내고  수탈설 일제시대 일제강점기 악의적 묘사하죠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거짓과 증오로 묘사하구요



우선 이전에 쓴글 적으니 많은 사람들이 관점을 바꾸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군요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501&docId=327861765&qb=7JyE7JWI67aA&enc=utf8§ion=kin&rank=4&search_sort=2&spq=0

한일관계 최근 쟁점 3가지

요즘 한일 관계에 있어서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내공 최고로 드립니다

kin.naver.com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327814494&qb=7JyE7JWI67aA&enc=utf8&section=kin&rank=9&search_sort=2&spq=0

외국의 위안부 대우는?

우리나라 말고 위안부 피해를 받은 국가들은 위안부 대우가 어떤가요? 외국에서는 위안부 최초증언을 누가 하셨나요? 유럽에서 위안부는 어떤가요?

kin.naver.com





군함도’ 역사왜곡, 위안부 영화 ‘귀향’과 복사판? 넘실대는 '반일민족주의'

영화는 영화다?라고 한다면...정통 역사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로 군함도 역사왜곡 톺아보기

영화 ‘군함도’의 개봉을 계기로 언론과 시민단체, 정치권이 기다렸다는 듯이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우며 반일민족주의 총공세를 펼치고 있다. 

물론 영화는 창작의 영역이다. 따라서 영화 내용 자체는 가공된 이야기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비난 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영화 군함도의 수상한 제작 의도와 한일관계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은 이 영화를 단지 블록버스터 상업영화로만 이해할수 없도록 만든다. 


▲ 지난달 26일 개봉한 영화 군함도는 개봉 첫날 스크린 2189개에서 상영됐다. 이는 역대 최다로 스크린 독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군함도 관객수는 600만명 선에서 정체된 부진한 모습이다. 영화는 허구가 허용되는 영역이지만, 언론과 방송에서 끊임없이 군함도에 얽힌 조선인 징용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 사진=군함도 공식 포스터.


▲ 영화 ‘귀향’은 학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 ‘일본군 헌병에 의한 위안부 강제연행설’을 선정적으로 묘사해 역사 왜곡 영화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귀향’의 배우와 제작진은 조총련계와 연계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사진=영화 ‘귀향’ 포스터

우선 시기적으로도 영화 군함도는 좌파 학계가 꾸준히 공론화해온 조선인 징용에 관한 역사왜곡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는 모양새다. 

이른바 ‘강제징용’에 관한 최초의 문제제기는 1960년대 조총련계 재일사학자로부터 시작됐다. 국내 국사학계는 그동안 이 시각을 답습해왔다. 그러다 지난 2015년 군함도(일본명 하시마섬)를 포함한 메이지시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강제징용은 이제 한일 관계의 주요 쟁점사안으로 떠올랐다. 

‘강제연행 위안부’에 이어 이제 새로운 신화가 된 ‘강제징용 노동자’

군함도는 신화(神話)가 되어가는 중이다. 노동단체와 좌파 시민단체들은 군함도 시사회를 열고 여세를 몰아 곳곳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설립하고 있다. ‘강제연행 위안부 소녀상’에 이어 또다른 반일민족주의의 상징물이 등장한 것이다. 

문제는 신화가 되어버린 역사는 어떠한 반론이나 이견도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일본 관련 역사는 특히 그러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단지 또다른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여성주의·평화주의 학자인 박유하 교수가 형사고소까지 당한 필화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본지는 군함도가 상징하는 ‘강제징용’에 관한 언론의 왜곡과 학자들의 비양심(非良心)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시리즈를 차례차례 보도한다. 본지는 영화 군함도는 일단 영화로서 두고, 대신에 진실을 이야기할 의무가 있는 방송과 언론, 학계의 역사왜곡 여부를 세세히 검증할 것이다. 모든 국민이 역사의 정확히 진실을 알고  말 그대로 ‘영화는 영화’로만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래 시리즈 첫 회는 우리 역사를 정면으로 다루는 유일한 TV프로그램인 ‘역사저널 그날’의 악의적인 역사왜곡에 관한 보고서다. 


▲ 일본이 군함도를 포함한 '메이지 산업혁명 문화유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했던 2015년 당시 국내 언론방송은 앞다퉈 군함도를 '강제징용'의 상징으로 설명하는 역사왜곡 방송을 내보냈다. 역사저널 그날은 정통 역사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그 폐해가 더욱 심각했다는 지적이다. 사진=역사저널그날 캡쳐.


▲ 현재 EBSi와 이투스교육에서 한국사를 강의하는 최태성 씨는 군함도에서 조선인 광부들이 일본인에게 채찍질을 당했다는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도, 근거를 내놓지 못했다. 그는 "한일 문제에선 사료보다 증언이 중요하다"는 황당한 주장도 펼쳤다. 사진=역사저널 그날 시즌2 예고편 캡쳐.

민감한 시기 방영된 ‘역사저널 그날’ 군함도 편

지난 2015년 6월 28일, 인기 역사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군함도의 두 얼굴, 숨겨진 진실’ 편을 방영했다. 

이날 방송의 연출은 문지혜 PD가 맡았고, 책임프로듀서는 황대준, 강희중 씨였다. 자문은 장편소설 ‘군함도’의 작가 소설가 한수산 씨가 맡았다. 출연진은 고정출연자인 최원정 아나운서,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최태성 이투스 한국사 강사, 류근 시인, 이윤석 개그맨였고, 여기에 강동진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가 특별 패널로 참가했다.

이 프로그램이 방송된 2015년 6월 당시는 우리나라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군함도(일본명 하시마섬)를 포함한 ‘메이지시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해, 후보로 올라있던 시기였다. 전 국민적인 반일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 역사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방송 프로그램이라면 한층 진지하고 조심성 있는 프로그램 제작 태도가 요구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날 역사저널 그날의 방송은 군함도의 실상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선 사교육업체 이투스의 한국사 강사로 현재도 역사저널 시즌2에서 메인 MC로 활약하고 있는 최태성 씨의 노동자들에 대한 ‘채찍질’ 발언은 그 근거를 확인할 수 없는 표현이었다. 

한국사강사 최태성 “조선인 채찍질 당해” 황당 주장

최 씨는 이날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인 노무자들이 일본인 감독관에게 채찍질을 당했다고 발언했다. 노동자가 채찍질을 당하는 모습은 흑인노예 영화에서나 볼법한 끔찍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조선 광부들은) 하루에 2교대씩 12시간씩 일을 했고, 어떤 경우에는 8시간씩 2번, 그렇게 16시간을 일하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1분1초도 쉴수가 없었다고 그래요. 잠깐이라도 힘들어서 쉬려고 하면 채찍질이 들어오고, 할당량이 정해져 있어서 그게 끝나지 않으면....”

“이게 사실 채찍질을 맞지 않아도, 그냥 움직이는 과정에서 계속 몸이, 피부가 긁히면서 상처가 굉장히 심하게...”


최 씨의 발언은 실수로 헛 나온 말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프로그램 제작진도 군복을 입은 일본인이 벌거벗은 조선인 노동자들을 채찍질 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생생하게 재현해 자료화면으로 내보냈기 때문이다. 

먼저 이 자료화면에서는 안전모조차 쓰지 않은 벌거벗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줄지어 갱도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 중엔 허리가 90도 가까이 굽은 노인까지 있었다. 잠시후 일본군이 맨몸이나 마찬가지인 조선인 노동자의 등을 채찍으로 사정없이 내리치는 장면이 이어진다. 매 맞는 조선인의 등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새겨졌다.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보다도 더 끔찍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 역사저널 그날의 자료화면은 군함도의 조선인 광부들을 완전한 노예로 묘사하고 있다. 벌거벗은 조선인 광부가 군복을 입은 일본인에게 채찍질은 당하는 장면까지 그려넣었다. 사진=역사저널그날 캡쳐.


실증학자 이우연 연구위원 “공개매질은 말도안돼”

최태성 씨의 채찍질 발언에 대해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말이 안될 뿐 아니라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위원은 전시기 조선인 징용에 관해서 실증적 연구를 해온 거의 유일한 국내학자다. 

이우연 연구위원은 “군국주의 시대 특성상 구타는 일본의 기업문화로 조선인과 일본인 공통적으로 발생한 문제였다”며 구타 가능성은 인정하면서도 “당시는 일본군이 총력전인 상황이라 생산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본 정부가 기업들을 엄격하게 관리감독 했기 때문에, 공개적인 매질과 채찍질이 있었다는 주장은 말이 안될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사료도 찾아볼 수 없다. 연구자로서 오히려 그 발언의 근거가 궁금하다”고 설명했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국가의 생산능력을 총동원하고 있었으므로 석탄광산의 노무자 관리에 철저했다는 것이다. 조선인 노무자들이 산업 생산의 핵심자원인 석탄 생산량의 상당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채찍질과 같은 심한 공개 매질은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란 얘기다. 만약 조선인들이 집단으로 반발해 파업을 하면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단체를 결성 파업도 벌였던 조선인 광부들

실제, 당시 일본 내 탄광에서 일하는 조선인 광부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쟁의를 일으킨 사례가 있다. 책 ‘지쿠호오 이야기: 규슈 지쿠호오 탄광을 중심으로 한 격동의 민중사(오오노 세츠코, 커뮤니티)’에 따르면, 1932년 조선인 광부들 최초의 쟁의인 ‘아소오쟁의’가 일어났다. 이 장면은 ‘역사저널 그날’의 자문을 맡은 한수산의 소설에도 등장한다. 

“우석의 마음을 휘어잡아 떨리게 한 것은 후루까와탄광에서 있었다는 조선인 광부들의 저항이었다. 밀린 임금을 내라. 최저임금을 보장하라. 그것이 후루까와탄광 조선인 광부들의 주장이었다. 갱도 입구에 주저앉으면 파업을 시작한 광부들은 갱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이어갔다. 회사에서는 밀린 임금의 시급한 해결을 약속하며 상여금이라면서 일인당 50전씩읠 지급했다. 그러나 거기에 현혹될 광부들이 아니었다. ‘한 사람도 입갱하지 말라.’ ‘회사를 두렵게 여기지 말고 다 나오시오.’ 광부조직쟁의단 본부가 광업소 여기저기에 한글 격문을 써 붙였다. 탄광 측이 보안요원이라는 진압부대를 동원해 갱 안으로 진입하자, 결국 광부들은 밖으로 나와 신사 안에 집결했다.”


조선인 광부들은 스스로 쟁의본부를 조직하고 한글 격문을 써 붙였으며, 최저임금과 밀린 임금의 지급을 요구했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다. 최태성 씨와 제작진이 묘사한 노동현장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는 얘기다. 따라서 당시 일본의 탄광은 일본인이 조선인을 마치 노예 부리듯 하며 마음대로 채찍질을 할 수도, 하지도 않았다는 게 이우연 연구위원의 분석이다. 

2019.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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