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한국사 역사왜곡에 대한 프로잭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 진행과정에서 생긴 궁금증이 있는데 역사 고수님들 해결 좀 해주세요.
1. 고조선 남쪽에 진나라라는 나라가 있었지 않습니까?그런데 왜 우리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그에 대한 글이 일절도 없나요?
2. 위만이 조선인 이라는데 그에 대한 근거 중 위만이 흰 옷과 상투를 틀고 있었다는데 그것이 조선만의 의류 문화라고 해서 조선인으로 정의하는 것은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조선인이라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진나라에 가있었냐는 거죠. 그리고 또다른 근거 중에 고조선 왕이 위만을 북쪽 지방을 지키라고 할 정도로 신뢰가 갔다는 것이 있던데, 그렇게 따지면 위만이 진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던 것 또한 당시 진나라 왕이 위만을 신뢰했다는 것이니까 위만은 중국인 이라고 할 수도 있는것 아닙니까? 이에 대해 답변해주세요!
3. 이것 이외에도 여러 우리나라의 역사 왜곡에 대해 알려주십시오. 예를들어 환단고기...등등
감사합니다!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1. 고조선 남쪽에 있던 진나라에 대한 내용.
문헌에 따르면 고조선 남쪽에 진이 있었고 후에 삼한이 되었다고 하지요.
삼국지, 후한서 등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한 두 줄이 진나라에 대한 내용의 전부이며
진나라의 국가 형태, 풍습, 문화 등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전무하다시피합니다.
즉, 외국(중국)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진'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 진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교과서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것입니다.
다루더라도 있었다 정도로만 다루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교과서라는 것은 최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내용을 토대로 써야 합니다.
때문에 진나라에 대해 학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논쟁들은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지요.
학계에서는 진나라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문헌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보완하려고 하지요.
그렇지만 문헌자료가 매우 적은 것에 더해 고고학적으로도 뚜렷한 실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즉, 마한 진한 변한은 고고학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도 뚜렷하게 나타나지요.
그런데 삼한 이전에 있었다고 하는 진나라는 애매모호합니다.
한반도 중남부를 영유하고 있었던 집단이었다고 하는데
유적과 유물로는 좀.....맞다고 하기도 뭐하고 아니라고 하기도 뭐한... 그런 상황입니다.
때문에 진나라를 하나의 통합된 '국가' 형태의 집단이 아니라
여러 소국들로 쪼개져 있던 집단을 뭉뚱그려서 '진'이라고 불렀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마한 진한 변한도 보면 마한이 50여 개의 국(國)으로 이루어졌고
진한 변한도 각각 여러 개의 국으로 이루어졌다고 되어 있지요.
즉, 진나라도 이렇게 자잘자잘한 집단들을 한데 모아 불렀던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교과서는 최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부분만 적어야 하는 관계로
아직 논쟁이 있는 부분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진나라에 대한 서술이 부족할 수 밖에 없지요.
2. 위만의 국적.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한족(漢族)과 한족(韓族)
즉, 민족(民族)이라는 것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민족이란 단어는 근대 이후 서양의 민족주의(Nationalism)가 들어오면서
Nation을 번역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옛날에는 민족이란 단어 자체가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나라의 경우 남북국시대 이후...그러니까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인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문화, 언어, 풍습 등이 융합되어 한민족이라고 하는 민족의 근간을 이루었습니다.
그 이전...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문화가 많이 달랐습니다.
언어는 기록을 종합했을 때 통역이 필요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100% 같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의 경우 고구려 토기, 백제 토기, 신라 토기...한 눈에 구분될 정도로 다릅니다.
사람들이 살았던 주거지...이 것 역시 다르지요.
성곽을 쌓는 방법...삼국 모두 달랐습니다. 무덤도 달랐습니다.
즉,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서로 달랐던 집단들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삼국은 서로를 외국으로 보았습니다.
때문에 신라가 민족을 배반하고 당나라와 손잡았다는 것도
현대적인 관점에서 과거를 바라본 '왜곡'된 시선의 평가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본론으로 돌아와서
삼국시대가 저 정도인데... 고조선은 얼마나 더 심했을까요?
다시말하면 위만이 조선인인지 중국인인지에 대한 구분조차
현대 민족이라는 개념에서 바라본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한' 논쟁이란 것입니다.
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없거나 매우 희박한 시대상황에서
위만의 국적이 어디인지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리고 위만은 혼자 쫄래쫄래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혼자 왔다면 준왕이 단번에 위만을 등용하거나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필시 한 무리의 집단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왔을 가능성이 있고
고조선으로 오면서 고조선에 없는...좀 더 우수한 기술이나 물품 등을 가지고 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야 왕의 눈에 더 잘 띄겠지요.
무튼 그런 상황에서 위만은 마지막에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좀 더 알아볼 것이
고조선의 왕(王)은 마치 고려 조선에서 보는 것과 같이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왕정이 공고하게 자리잡고 왕에게 절대권력이 주어지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이지만
삼국도 초창기에는 왕권이 불안했습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 처럼 초기엔 자기 집단에서 돌아가며 왕을 하다가
형제집단끼리 왕을 하고, 좀 더 나아가면 자기 혈육만 왕을 하는..
쉽게 말해서 왕을 할 수 있는 범위가 점점 좁아지고
그만큼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때가 되어야 우리가 생각하는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전의 왕은 말 그대로 대표자일 뿐 권력이 약했던 것이지요.
부여를 보면 농사가 흉년이 들거나 재해가 오면 왕을 갈아치웠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고조선은 왕권이 더 약했으면 약했지 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위만이 준왕을 몰아낸 것도
마치 큰 반란을 일으키고 역성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3. 환단고기에 대한 부분은 제가 다른 답변에 쓴 것으로 대체합니다.
내용이 워낙 길기 때문에...
4. 우리나라의 역사왜곡...
링크 답변의 마지막에도 써있지만
환단고기와 비슷한 부류인 '유사역사학 혹은 사이비역사학(Pseudo History)'집단이 있습니다.
이들 집단은 아무런 근거가 없거나 근거자료가 매우 부실한 것들을 토대로
역사왜곡을 일삼는 집단입니다.
과학에도 유사과학이라고 하는 집단이 있듯이 역사학에도 존재하지요.
이들은 두음법칙이 식민지 시절 국어의 잔재라고 주장하고
현재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일본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주장합니다.
문헌 및 고고학적으로 현재 우리가 배우는 역사가 곳곳에서 입증되고 있음에도 말이지요.
2018.10.21.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역사왜곡 영화는 많아요
반일종족주의가 없는 고문도 만들어내고
나라팔아먹는 고종을 미화하고 이완용 및 대신만 매국노 친일파 등등 만들죠
위안부 징용 거짓말 지어내고 수탈설 일제시대 일제강점기 악의적 묘사하죠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거짓과 증오로 묘사하구요
요즘 한일 관계에 있어서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내공 최고로 드립니다
우리나라 말고 위안부 피해를 받은 국가들은 위안부 대우가 어떤가요? 외국에서는 위안부 최초증언을 누가 하셨나요? 유럽에서 위안부는 어떤가요?
군함도’ 역사왜곡, 위안부 영화 ‘귀향’과 복사판? 넘실대는 '반일민족주의'
영화는 영화다?라고 한다면...정통 역사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로 군함도 역사왜곡 톺아보기
“(조선 광부들은) 하루에 2교대씩 12시간씩 일을 했고, 어떤 경우에는 8시간씩 2번, 그렇게 16시간을 일하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1분1초도 쉴수가 없었다고 그래요. 잠깐이라도 힘들어서 쉬려고 하면 채찍질이 들어오고, 할당량이 정해져 있어서 그게 끝나지 않으면....”“이게 사실 채찍질을 맞지 않아도, 그냥 움직이는 과정에서 계속 몸이, 피부가 긁히면서 상처가 굉장히 심하게...”
“우석의 마음을 휘어잡아 떨리게 한 것은 후루까와탄광에서 있었다는 조선인 광부들의 저항이었다. 밀린 임금을 내라. 최저임금을 보장하라. 그것이 후루까와탄광 조선인 광부들의 주장이었다. 갱도 입구에 주저앉으면 파업을 시작한 광부들은 갱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이어갔다. 회사에서는 밀린 임금의 시급한 해결을 약속하며 상여금이라면서 일인당 50전씩읠 지급했다. 그러나 거기에 현혹될 광부들이 아니었다. ‘한 사람도 입갱하지 말라.’ ‘회사를 두렵게 여기지 말고 다 나오시오.’ 광부조직쟁의단 본부가 광업소 여기저기에 한글 격문을 써 붙였다. 탄광 측이 보안요원이라는 진압부대를 동원해 갱 안으로 진입하자, 결국 광부들은 밖으로 나와 신사 안에 집결했다.”
2019.05.31.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