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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금산에 자랑거리를 답사하기
hgj 조회수 1,479 작성일2010.06.02

3-1학기 숙제에요 내일까지라서 급하니까 빨리 댓글달아주세요!!!!!금산에 자랑거리를 답사하기 내공100%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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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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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의 자랑거리)

 

1.금산인삼


하늘의 뜻과 땅의 기운, 사람의 정성이 하나로 어우러진 지극함의 산물, 금산인삼

 
인삼은 그 이름부터가 그러하듯이 생김새가 사람의 모습을 닮았고, 한방에서 으뜸 약재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소중한 인삼이 금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1,500년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개안 부락에 강씨성을 가진 선비가 있었는데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효성이 지극한 선비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께서 병들어 자리에 눕게되어 세상에 좋다는 약을 구해서 어머니께 드렸으나 효과는 보지못하고 병은 날로 악화되던 중 금산의 명산인 진악산 관음굴에서 정성을 들여 모친의 쾌유를 빌면서 백일기도 중 꿈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진악산 관음봉 암벽에 가면 빨간 열매가 3개 달린 풀이 있으니 그 뿌리를 달여드려라.그러면 네 소원이 이루어 질 것이다" 하고는 사라져 꿈속에서 본 암벽을 찾아 가보니 과연 그런 풀이 있어 뿌리를 캐어 어머니께 달여드렸더니 어머니의 병은 완쾌되었고 그 씨앗을 남이면 성곡리 개안 부락에 심어 재배하기 시작, 그 뿌리가 사람의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인삼이라 불리어져 재배되었다고 합니다.

 
강씨 총각이 인삼을 처음 심었던 곳이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946번지의 밭으로 지금도 가면 알아볼 수 있도록 비석이 세워져 있다. 예전에는 매년 인삼의 새싹이 돋아 오를 무렵 이곳에서 제물을 차리고 치성을 드렸다.

 

성곡리 개안에 있는 인삼의 처음재배가 시작한 곳을 [개삼터]라 하며 1983년 건립한 개삼각은 진악산 산신령을 모신곳으로 강선비의 고택을 복원 하였으며 향토문화 제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마을이름을 개안이라고 하게 된 것도 "인삼의 눈을 트게 한다"는 뜻이다.

 

그 밭머리에는 [개삼터]라는 비석을 세웠는데, 나중에 건물을 지어 [개삼각]이라 하고 매년 벌이는 금산인삼축제를 이곳에서 시작하여 그 뜻을 기리고 있다.

 

1500년 역사가 살아있는 최고의 약재, 금산인삼

 
인삼은 우리나라 한반도에서 산출되는 영약신초이다. 우리의 인삼이 하도 유명하다보니 비슷한 것들에 인삼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 나타났다.

 

일본의 죽절인삼, 미국에서 나는 미국인삼(화기삼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삼칠인삼 등은 문자 그대로 어중이 떠중이이다. 또한 한방에서는 현삼, 단삼, 사삼, 고삼, 자삼의 다섯 가지를 오삼이라 하며 외람스럽게도 인삼과 합쳐서 육삼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옥석동궤의 폐단을 막기 위해 우리나라의 인삼을 '고려인삼'(Korean Insam)이라고 별도로 구분하고 인삼의 '삼'자도 초두가 붙은 '삼(蔘)'자를 쓰기로 했다.

 

고려인삼은 오갈피나무과에 속하는 학명이 파낙스 진생인 식물이다.

 

죽절인삼, 미국인삼, 삼칠인삼 등은 식물학적으로 고려인삼과 과와 속만 같을 뿐 별개의 식물이다.

 

2.적벽강  
                 

소 재 지  충남 금산군 부리면 수통리

 

금강은 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뜬봉에서 발원하여 유유히 북쪽으로 흐르다가 창남에 들어서서 동남쪽에 물굽이를 틀어 서쪽 금산군 부리면 방우리에 들어선다. 여기서부터 층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산 사이를 뚫고 금강이 흘러 수통리에 이르르면 그 앞의 넓은 시야로 좌측으로 기암을 이루는 절벽이 있으니 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을 적벽이라 부르고 그 아래에 흐르는 금강을 "적벽강"이라 한다.

 

적벽은 바위산이 붉은 색이란 데서 유래된 것으로 30m가 넘는 장엄한 절벽에는 강물 아래로 굴이 뚫어져 있으며 이 산에는 또한 기화요처가 자리잡고 있어서 더욱 신기한 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을에는 불붙는 듯한 단풍이 강물에 투영되어 절경을 이루며 창파에 저녁노을 질 무렵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적벽절경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겨보는 것도 일품이다.

 

적벽 아래 흐르는 금강은 마치 호수와 같이 잔잔히 흐르며 모래사장이 길게 깔려 있어 더욱 운치를 돋군다. 일설로는 중국 양자강 상류에 있는 천의절경 적벽강과 흡사하다하여 적벽, 적벽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봄철에 해가 뜨면 춘화가, 여름에는 푸른 소나무 잎이 가을에는 단풍이 겨울에는 설화가 강물에 비쳐 비단에 수놓은 푸른 물결과 함께 절정을 이루는 적벽강에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배를 띄워 강물을 헤치는 것도 절경이다. 요즘 여름철에는 적벽강 모래사장에서 많은 피서객의 피서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3.십이폭포 
    

소 재 지  충남 금산군 남이면 구석리

 

금산군 남이면 구석리에서 동남쪽으로 2km 시냇물 따라 골짜기로 들어 가면 무성한 숲과 층암 절벽 사이를 누비며 내려 쏟아지는 크고 작은 12개의 폭포가 있다. 이곳이 유명한 12폭포로 그 이름도 폭포의 수를 따라 지은 것이다. 가장 큰 폭포는 높이가 20m나 된다. 물이 맑아서 은하수가 거꾸로 쏟아지는 듯한 웅장한 모습과 산골짜기에 울려퍼지는 우렁찬 물소리와 옥같이 부서지는 물방울은 절경을 이룬다. 가히 조물주의 위대한 창조품이라 말할 수 있다.

 

이곳은 옛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 바위마다 많은 글자들이 새겨진 글귀 등은 자연풍과 어울려 그 품위를 더해주고 있다. 봄철의 화전놀이, 여름철의 피서, 가을철의 단풍놀이로 찾아드는 이들이 끊일 사이 없다. 계곡에 얽힌 전설은 자연의 신비스러움 더해준다. 주위의 지형과 산세로 보아 옛절이 있음직한데 애석하게도 확인할 바 없고 다만 남쪽 산밑에 큰 주춧돌이 흩어져 있으나 고증할 길이 없다.


4.보석사   
      

소 재 지  충남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금산읍에서 약 6km 떨어진 진악산 (732m)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보석사는 신라 헌강왕 12년(866년)에 조구대사가 창건한 역사깊은 절이다. 교종의 대본산이며 한국불교 31본산의 하나로 지난 날 전라북도 불교의 이사중추기관이었고 현재는 충남 교구 산하로 되었다.

 

보석사라는 이름은 절 앞산 중허리의 암석에서 금을 캐내어 불상을 주조하였다는 데서 이름지어졌다. 사찰에 들면, 울창한 숲과 암석이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져 있어서, 속세를 떠난 듯하다. 절 안에는 대웅전, 기허당, 의선각, 산신각 등의 건물과 부속암자가 있으며, 인근에는 절경의 12폭포가 있다.

 

특히 높이 40m, 둘레가 10.4m나 되는 1,100년 수령을 자랑하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65호)가 있어 좋은 휴식처를 제공해 주며, 200~300미터 정도의 전나무길이 나 있어 호젓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 의선각

보석사 대웅전 앞에 있는 건물로 의병승장 영규대사가 머물러 수도하던 곳이다. 영규대사는 공주 계룡산의 갑사와 보석사를 내왕하며 도를 닦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집하여 중봉의 의병과 합세하여 금산이 왜적을 격퇴하려다가 700 의사와 함께 전사한 분으로 그 용맹과 담력은 출중하여 싸움마다 크게 공을 세웠던 것이다. 의선각은 영규대사가 보석사에 계실때 우거하던 곳으로 창녕위 김병주의 글씨로 된 의선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5.신안사    

 

소 재 지  충남 금산군 제원면 신안리 52번지

 

금산군 제원면 신안리 동북쪽에 있는 해발 677m의 신음산 국사봉에서 내려온 지맥의 산록에 있는 신안사는 신라 26대 진평왕 5년에 무염선사가 창건했다.

 

신안사라는 이름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충북 영동군 양산면에 있는 영국사에서 수학할 때 이 절에 가끔 들러 유숙하였는데 '주위 환경이 맑고 아름다워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하여 신안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신안사에는 대광전, 진향각, 극락전, 요묵당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대광전(유형문화재 제 4호)과 극락전(제117호)만이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불상은 10기가 봉안되어 있었으나 병화로 소실되어 태고사 등으로 5기를 이봉하고 현재 5기만이 봉안되어 있는데, 단정하고 우아한 모습은 참배자에게 불심을 일으키게 하는 조선 미술의 걸작품이다.

 

이 절이 흥할 때에는 반승 3,000여명이 수학하였다 하며 불경, 불기 등 여러가지 비품이 많았는데 6.25 전란을 겪으면서 모두 소실되어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절 앞을 흘러내리는 계곡의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다.

 

6.칠백의총

 

종 목  사적  제105호 
면 적 135,693㎡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52-1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1592) 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700명의 병사들을 위한 무덤과 사당이다.

 

조헌(1544∼1592)은 의병장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을 거쳐 보은현감으로 나갔으나, 여러 번 재등용되었는데 사직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시호는 문열이다.

 

그들이 전사한 후 조헌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칠백의총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가 세워지고, 인조 25년(1647)에 종용사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셨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의총을 허물고 순의비를 폭파했으나, 금산군 사람들이 비석 조각을 감추어 보존하였다. 1963년, 국가에서는 묘역을 확장하고 1970년에 기념관·순의탑을 새로 지었다.

 

7.권율장군 이치대첩비

 

종 목  문화재자료  제25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 산83 
시 대  근대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승리로 이끈 이치대첩을 기념하고 있는 비이다.

 

이치는 대둔산 중허리를 넘어 전북 완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상 중요한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와 충청도 일대를 휩쓸고 승승장구하던 2만여 병력의 왜적이 호남으로 나아가 군량미를 얻고자 이곳을 넘으려 하였다. 이 때 먼저 길목을 지키고 있던 권율 장군이 1,500여 군사를 이끌고 결사전을 벌인 끝에 적을 섬멸하여 그들의 호남진출을 막아 내었다. 이 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보다 앞서는 임진왜란 최초의 육지에서 승리한 싸움이다.

 

고종 3년(1866) 도원수 권공이 비와 함께 사당을 세웠으나, 1944년 일제에 의해 폭파되어, 1963년 이 대첩에 참여한 사람들의 후손과 지역 유지들이 지금 장소에 다시 건립하였다. 

 

8.귀암사

 

종 목  문화재자료  제301호
지 정 일 1988.08.30
소 재 지 충남 금산군  부리면 평촌리 422 
시 대  일제강점기


양성지(1414∼1482)를 기리기 위해 1922년 세운 사당이다.

 

양성지는 조선시대 문신으로서 호는 눌재이다. 대사헌·이조판서 등 여러 벼슬을 지냈고 항상 나라를 위해 현실적인 정책을 연구한 인물이다. 민생을 위해 각 지방에 의료기관 설치를 주장하였고 우리나라 고유의 풍습이 중요함을 강조했으며 과거 시험에 대해서도 현실에 맞도록 바꾸길 요구하였다. 또한 귀암사 사숙을 열어 향토 교육에도 이바지하였다.

 

귀암사에는 선생의 공적을 적은 눌재 양선생 묘비가 있다.

 

9.조헌사당(표충사)

 

종 목  문화재자료  제20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금산군  복수면 곡남리 210 
시 대  조선시대


문열공 조헌 선생을 모신 사당으로 조선 인조 때에 세운 것이다.

 

조헌 선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이며 유학자이다. 조선 명종 20년(1565)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567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조 1년(1568)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교수를 역임하였고 선조 5년(1572)에는 교서관에 속하였다. 선조 15년(1582)에는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었다. 그러나 왕의 진노를 사서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데 전념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등 1,600여명을 모아 청주성을 수복하였으나 전라도로 진격하던 중 왜군을 만나 모두 전사하였다.

 

10.금산향교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121호
면 적 3,835㎡
지 정 일 1997.12.23
소 재 지 충남 금산군  금산면 상리 4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금산향교를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처음에는 지금의 금산읍 하옥리 백학동에 있었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조선 숙종 10년(1684)에 지금 있는 자리에 다시 지었다.

 

제사지내는 공간으로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고, 교육 공간으로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다. 대성전 안쪽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과 우리나라의 성현들을 모시고 있다. 이 밖에 건물로 요사채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201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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