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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한국 패션디자이너
taes**** 조회수 95,619 작성일2004.02.22
한국 패션디자이너 20명과
디자이너 및작품세계좀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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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sh****
중수
제품디자인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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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길연수
옷을 최고의 예술로 생각하는 신세대 패션 디자이너 길연수. 그는 고졸의 학력이지만 천부적인 재능으로 94년 한국패션대전과 중앙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금상과 은상을 수상했고 95년엔 '아시아 패션대회 95'에서 대상을 타며 패션계의 꿈나무로 부상했다.

대입에 실패한 그는 과감히 대학을 포기하고 우연히 본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의 패션쇼에 감명을 받아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어 에스모드 서울에서 3년간 정식 패션 교육을 받은 후 남성복 쉬퐁의 디자이너로 패션계에 입문했다.

그에겐 쟁쟁한 학벌도 든든한 배경도 없다. 돈 없는 젊은 디자이너 길연수는 하루종일 시장을 누비며 옷감, 단추, 실을 직접 구하러 다닌다. 그렇게 하루종일 뛰어다녀도 피로감은 어느새 뿌듯함으로 다가온다. 그의 스승은 바로 그 자신의 끼이기 때문이다.

[우먼드림제공]

2)강희숙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생활 자체인 옷'을 만드는 것이 디자이너 강희숙의 패션철학이자 그녀의 브랜드 '강희숙'의 컨셉이다. 그녀는 옷을 만들 때 '어떤 사람을 위해 옷을 만드느냐'를 먼저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옷에 대한 관심이 유난히 많았던 그녀는 당시 구하기 힘들다는 일본 책을 구해 손수 패턴을 만들어 보며 이론을 습득했고, 영화를 보면 영화의상에 대한 생각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러나 주위의 편견을 극복하지 못한 그녀는 결국 미대로 진학했다. 결혼 후에도 옷에 대한 미련은 계속되었고, 결국 이대입구에 '강 의상실'이라는 맞춤 전문 숍을 오픈했다. 그리고 79년에 처음으로 압구정동 한양쇼핑센터(현재 갤러리아 백화점 생활관)에 '강희숙'이라는 기성복 브랜드를 런칭했다. 또한 현재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본 보스토'의 안주인이기도 하다.

[우먼드림제공]

3)김동순
평범한 주부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6년간의 톰보이 실장에서 83년 '김동순 울티모'라는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까지… S.F.A.A. 창립 10주년이 되는 올해 회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그녀는 S.F.A.A. 컬렉션을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한 개근생이다.

그의 라인은 전통적인 편안함과 모던한 세련미를 모두 갖추고 있으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으로 여성의 인체 곡선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그의 옷에 숨어있는 남다른 형태감이라던가 색감은 그가 대학에서 전공했던 조소의 잔영이 남아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이런 요소를 패션쇼를 통해 발견하는 것은 또다른 즐거움일 것이다.

몇 시즌 전부터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나온 딸 송자인이 옆에서 그의 손발이 되어주고 있어 더욱 힘이 난다고. 이제 혼자가 아닌 모녀의 팀으로 변신한 '김동순 울티모'의 컬렉션을 기대해 본다.

[우먼드림제공]

4)김선자
섬유 도시 대구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김선자. 수더분한 인상으로 디자이너라기보다 알뜰 주부같은 그는 사실 옷에 파묻혀 사는 일벌레. 그에게 있어 옷을 만드는 것은 일이라기보다는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미스김테일러'가 처음 선보인 것은 1970년으로 결혼 후 1년 만에 벌인 자신만의 꿈같은 사업체였다.

엘레강스한 여성미를 단순하고 화려한 색채와 함께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전개해 가는 그의 디자인이 인정받아온 것은 소량 생산 전략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한 번 사면 최소한 10년은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일관해 온 터라 그의 매장에는 맞춤 손님이 늘 북적댄다.

디자인 영감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면 자신의 초창기 시절 옷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는다는 그는 '밀라노 프로젝트'의 중심에 서서 대구 패션계의 세계화를 주도하고 있다.

[우먼드림제공]

5)김수현

남성복 디자이너 김수현. 아직은 낯선 이름이지만 이미 작년 가을의 2001 S/S 서울 밀레니엄 컬렉션을 비롯해 다섯 차례나 큰 컬렉션을 가진 당찬 신인이다. 그녀는 단정하고 깔끔한 댄디 스타일을 추구한다. 의상 공부를 해보라는 가족들의 권유로 떠나게 된 미국. 93년에 미국 F.I.D.M에서 소재-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후 곧 바로 얻은 첫 직장이 현지의 '누벨 바그'라는 브랜드였다. 여기서의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1998년에 자신의 브랜드 '네오 나토'를 런칭했다. 현재는 2000년에 런칭한 Digitalian 21을 떠나 keis homme에서 디자인 실장을 맡고 있다. 패션디자인과 일상생활의 사건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발전해 나간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김수현. 그녀는 디자인이란 머리가 아닌 일상생활을 통해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때문에 김수현은 현시대의 흐름과 경향을 파악하여 패션에 접목시키는 작업을 즐긴다.

김수현의 홈페이지: http://www.digitalian21.com

[우먼드림제공]

6)김연주
디자이너 김연주는 96년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KFDA)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3년동안 그 역할을 맡았을 정도 리더십과 인화력이 남다르다.

젊은 디자이너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등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든든한 선배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그녀는 바잉이 없는 열악한 국내 패션 환경 속에서도 KFDA 정기 컬렉션을 주도해 작품성 위주의 아트적인 패션쇼에서 탈피한 웨어러블한 기성복 컬렉션을 주도했다.

해외시장에도 눈을 돌려 96년에는 중국의 초청을 받아 대련에서 KFDA 컬렉션을 열었고 미국 LA 현지에 있는 캘리포니아 마트에 쇼룸을 오픈해 좋은 성과를 올렸다.

홍대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이모와 어머니가 운영하던 이대 앞의 의상실을 물려 받아 본격적으로 패션계에 입문한 그녀는 책을 읽거나 그림을 감상하다가 겪는 일상 생활에서 주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그녀가 지향하는 디자인은 고급원단과 편안한 테일러링으로 품격을 최대한 살려주면서도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잃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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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문영희
한국적인 요소를 모던하게 표현해 세계인이 공유하는 라인을 만드는 꾸준한 행보를 해 온 디자이너 문영희. 96년부터 2001 S/S 파리 컬렉션까지 줄곧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 참가를 하고 있는 그녀는 IMF 여파로 국내 디자이너들이 파리 컬렉션 참가가 주춤한 가운데서도 파리행을 멈추지 않는다. 파리 진출에 있어 컬렉션은 중간에 포기할 수 없는 가장 큰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파리 컬렉션에 참가하면서 늘 '한국적'이라는 화두를 마음에 새긴다. '이것이다'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옷을 보면 어디엔가 한국적인 유려한 선의 미가 들어 있다. 힌국적인 요소를 모던하게 표현해 세계인이 공유하는 옷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녀는 파리 진출을 위해 15년간 준비했다. 시장조사, 상법 공부, 현지법인설립 등을 천천히 그러나 단계적으로 꼼꼼하게 추진해 온 것.

그녀는 파리와 한국의 차이를 하늘에 비교한다. 파리에서 보는 하늘과 서울에서 보는 하늘은 너무 다르다는 것. 파리에서 디자인한 것을 서울에서 보면 이상하고, 서울에서 디자인한 것을 파리에서 보면 이상하게 보인다. '문영희'를 국내에 선보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어릴 때 돼지 저금통을 털어서 복장학원에 다녔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스스로 강사를 할 정도로 기본기가 튼튼하다. 대학은 의상학과보다 파리 진출을 염두에 두고 불문학과를 택할 정도의 치밀한 계획과 꾸준함이 오늘의 그녀를 있게 한 것이다.

[우먼드림제공]
(오~문영희쌤...^ ^)

8)박윤수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한 그는 스물여섯살 때 중앙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차지한 것이 인연이 되어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의 옷을 보면 통통 튀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자칫 촌스러워 보이기 쉬운 화려한 원색도 그의 손을 거치면 얄미울 만큼 세련된 이미지로 탄생된다.

특히 라이브 무대를 응용한 컬렉션은 늘 역동성이 엿보여 패션쇼와 음악을 잘 조화시킨다는 평을 종종 듣는다. 최근에는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 가수 이주노의 무대 의상과 이혜영의 무대 의상을 만들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의 디자인은 생활에서 나온다. 영화를 보다가,. 거리를 지나가다 연상되는 것을 메모해두면 언젠가 그 아이디어는 옷으로 변신해 패션쇼를 통해 보여진다. 최근 인터넷에 심취한 그는 21세기형 디자이너의 선두주자임에 틀림없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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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박윤정

디자이너 박윤정과 함께 떠오는 것은 영화의상이다. 그녀는 <아마게돈>, <구미호>, <은행나무 침대>, <단적비연수> 등의 영화 의상을 제작했고 개봉 예정인 이윤기 감독의 <클럽 샴페인>의 스타일링을 끝낸 상태다. 최근에는 <패왕별희>를 만든 첸 카이거 감독의 영화의상을 맡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국내 톱 디자이너 이신우의 딸로서 수순을 밟듯 디자이너로의 길이 탄탄대로였던 그녀지만 돌이켜 보건데 지나 온 삶은 영화처럼 변화무쌍하다. New York School of Design을 졸업한 후 어머니가 만든 브랜드 '오리지날 리'와 '이신우'의 디자인 실장으로 일하면서 부도를 겪은 뒤 제일 모직의 월급쟁이 디자이너로 회생했고, 주위의 우려 섞인 시선을 뒤로하고 자신 이름의 브랜드, 박윤정(Vack yunzung)으로 홀로서기를 선언했다. 늘 그 중심에서 자신의 색깔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디자이너 박윤정. '이신우의 딸'이 아닌 '제 2의 이신우'를 꿈꾸는 그녀의 새 출발이 주목된다.

박윤정의 홈페이지: http://www.otr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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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박은경

매드믹스를 기억하는가? 93년부터 몇 년간 모든 메이저급 백화점의 명당자리를 차지했던 브랜드 '매드믹스'를 만든 장본인이 디자이너 박은경이다. 의상학과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패션에 별다른 열정을 느끼지 못한 그녀였지만 결혼 후 남편과 함께한 독일 유학 중 패션에 대한 숨겨진 자신의 열정을 확인했다고. 그때부터 그녀는 7년이라는 세월을 패션 공부에 몰두했다. 어학코스부터 시작해서 창작디자인, 스케치와 누드크로키, 패턴과 재단, 봉제 등 모든 과정을 다시 밟은 것이다. 귀국 후 중앙디자인 콘테스트에 입상, 국제 패션 디자인 연구원 강사 등을 거쳐 압구정동에 '매드믹스'를 오픈했고, 현재는 '이즘'이라는 브랜드를 'ism thru Park, eungyung'으로 리뉴얼하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밝고 다양한 컬러를 아기자기하게 조합하는 장기를 가지고 있는 박은경. 정교한 재단과 기발한 아이디어의 패턴에서 그녀만의 색깔을 찾을 수 있다.

[우먼드림제공]


11)박춘무
절제된 아방가르드와 블랙의 조화로 정리되는 독특한 라인을 전개하는 디자이너 박춘무. '심플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옷'이 그녀가 추구하는 디자인이다.

세계 트렌드가 화려한 로멘티시즘으로 흘러도 그녀는 늘 무채색 컬러와 절제된 디자인, 베이직한 라인으로 일관해 왔다. 옷을 입었을 때 화려함으로 인해 그 사람의 개성이 가려져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녀의 디자인 철학이기 때문.

박춘무는 늦깍이 디자이너이다.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인해 화가가 되고 싶었던 꿈을 접고, 어머니를 도와 조그만 옷가게를 차려 직접 만든 옷을 판매한 것이 바로 브랜드 '데무'의 탄생 배경이다.

97년 오사카 컬렉션을 계기로 해외시장에 눈을 돌린 그녀는 미국과 파리, 네덜란드 등지에서의 전시와 쇼를 통해 해외 바이어와 에이전트 개발에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나가고 있다. 99년 6월에는 뉴욕 소호 거리의 대안으로 등장한 로리타 거리에 국내와는 다른 뉴욕식 버전의 직매장을 오픈했고 2001년에는 파리에도 직매장을 오픈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가을 시즌부터는 내셔널 브랜드로 볼륨화된 '데무'와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디자이너 브랜드 '박춘무'를 런칭, 수출 주력 브랜드로 키울 계획이다.

박춘무의 홈페이지 http://www.dem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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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배용

대학에서 문예창작과를 전공한 배용은 71년 배용 패션을 오픈 하고 73년 개인 의상 발표회를 연 이래 S.F.A.A. 컬렉션을 비롯해 약 70여 회의 패션쇼를 가졌다. 젠틀한 미소와 친화적인 분위기 때문에 '무대 위의 신사'로 통하는 그는 명실공히 부산 패션의 대표.

93년 패션지 <멋>이 선정한 '올해의 디자이너'상을 수상했고, 98년에는 서울패션인상 '올해의 디자이너상'상을 수상했다.

그의 쇼를 보면서 떠오르는 단어는 바로 '클래식'. 갖가지 패치워크 테크닉을 통해 소대를 재가공하거나 극도로 절제된 미니멀 원피스에 정교한 비즈 장식을 수놓은 그의 컬렉션은 정확한 패턴과 함께 기성복 이라기보다는 고급 맞춤복에 가깝다.

'정서와 안 맞는 과장된 옷차림이나 유행만을 쫓아가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다. 패션은 사회적이어야 하며 입는 사람에게 좋은 느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디자인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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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변지유

아트적인 요소가 없는 옷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변지유. 그녀는 옷에 아트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생동감을 불어넣는 디자이너다. 뉴욕과 파리의 <프레타 포르테>, 도쿄 오사카 홍콩의 <인터내셔날 패션 페어>, 독일 베를린과 퀼른 그리고 뉴욕의 <패션 아트전>등 다수의 해외 행사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그녀. 미술을 전공한 변지유가 아트적인 요소를 띄는 디자이너가 된 것은 그녀가 85년 일본에서 우연히 보게 된 '이세이 미야케'의 패션쇼에서 동기를 찾을 수 있다. 모든 일에 열정적이고 추진력이 강한 그녀는 주로 해외에서 패션공부를 하면서 그녀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쎄콜리 패션 스쿨, 마랑고니 예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뉴욕의 F.I.T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열심히 혼을 바쳐 일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변지유. 끊임없이 방출하는 그녀의 에너지에서 열정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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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손정완
시즌과 트렌드가 바뀌면 쇼윈도의 풍경도 바뀌게 마련인데 손정완의 매장은 언제 보아도 한결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결혼할 때 누구나 한 번쯤 예복으로 입고 싶어하고,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때의 정장으로도 그만인 옷이 손정완의 색깔이다. '예쁜 옷이란 지적이고 세련되면서 섹시미를 갖추어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옷은 전형적인 페미니티 자체로 언제 봐도 깔끔하다.

숙명여대 산업공예학과를 다니던 중 학원에서 패션 디자인을 배운 그녀는 87년 '손정완 부티크'를 오픈 했다. 일에 파묻혀 살면서 왜 결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서른 다섯이 될 때까지 독신을 주장하던 그는 서른 여덟이 되던 해 '운명'적인 한 남자와 결혼했는데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초등학교 때 짝꿍이라고. 탤런트 최화정과 20년지기 친구로 최화정은 패션쇼가 있을 때면 늘 동료 연예인들과 함께 그의 쇼 앞자리를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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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송지오
송지오는 '장 폴 고티에'나 '비비안 웨스트우드'같은 화려하고 다이나믹한 연출로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디자이너이기보다는 크리에이터가 되기를 갈망한다.

그의 영원한 테마 '블루이즘'은 여성을 우아하고 섹시하게, 그리고 때로는 파격적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그의 패션쇼에서는 극적인 요소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92년 '지오 에 지아 에스빠스 블루'라는 다소 긴 이름의 디자이너 부티크를 오픈한 그는 LG 패션의 '옴스크'와 계약제 디자이너를 통해 디자이너와 기업의 전략적 제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2000년 F/W 시즌부터 여성라인을 일시 중단하고 '송지오 옴므'라는 남성복을 선보였다. 여성 라인을 중단한 이유는 자신의 라인인 '섹시즘'이 요즘 트렌드가 아니기 때문이라며 트렌드가 돌아오면 다시 특유의 '블루이즘'이 담긴 여성 라인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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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오은환
독특한 소재 사용이 특징인 오은환은 이화여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국제복장학원 연구 과정을 졸업한 후 65년 '꾸망 의상실'을 오픈 했고, 79년 기성복인 '오은환 부티크'를 오픈 했다.

90년부터 S.F.A.A. 컬렉션에 참가하고 있는 그는 20대의 어린 나이에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선택하며 친구와 한 약속을 지금도 가슴에 새기고 있다. '결코 남 앞에 화려하게 나서지 말고 고비를 장애물 넘듯이 넘겨가며,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을 평생의 직업으로 생각하자'가 그 약속이라고.

그래서인지 그는 무척이나 현실적이다. 과장이나 허영은 절대 금물이며 어느 한 부분만의 발전과 국제화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너무나 높고 험하게만 느껴지는 해외시장 진출에의 높은 벽을 느낄 때마다 장거리 육상 선수의 마음자세로 장기 레이스를 떠올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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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우영미

여자가 봐도 탐나는 남자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 우영미. 그녀는 '솔리드 옴므'라는 남성 브랜드로 국내 남성패션을 업그레이드한 장본인이다.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럽고, 입기 편한 남성복을 만드는 디자이너. 그녀는 무난한 듯 보이면서도 절묘한 컬러 매치로 그녀만의 스타일을 제안한다. 성균관대 의상학과 졸업 후 반도패션에서 실무를 경험한 그녀는 86년 제1회 오사카 인터내셔날 패션쇼에서 3위를 수상하면서 패션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이후 '피에르마', '레드옥스' 등의 남성복 브랜드에서 경력을 쌓았고 88년에 비로소 황폐했던 남성복 불모지에 '솔리드 옴므'를 런칭, 13년째 이끌어 오고 있다. 특히 그녀는 지난 97년부터 파리 SEHM 전시회와 독일 KOLN 전시회에 매 시즌 참가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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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이경원
대학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에서 니트 디자인을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패션과 인연을 맺은 이경원. 니트 프로모션 디자인을 하면서 자시만의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갑갑함을 느껴 '아가씨'라는 니트 전문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녀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무미건조한 니트 웨어에 대한 편견을 익살스럽게 바꿔버렸다. 그녀의 디자인 방법은 특이하다. 특별한 공식 없이 장난 삼아 실을 섞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라 옷으로 만들면 어느새 그 결과물들은 '아가씨' 그 자체가 된다.

홍대 앞에 있는 그녀의 아뜨리에에 가면 로보트 태권브이와 같은 장남간과 키치한 물건들이 마치 만물상을 방불케 한다. 아들과 함께 만화보기를 즐긴다는 그녀는 만화를 보면서 많은 디자인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그녀는 '뉴웨이브 인 서울'의 멤버로 96년부터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참가해 박춘무, 박은경과 함께 주목 받은 코리아 3인방으로 현지 언론과 바이어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최근에는 인터넷 사업에도 진출해 쇼핑몰(http://www.agaci.com)을 오픈 했다. 다양한 콘텐츠와 전자 카탈로그를 만들어 영업력을 확보하는 등 새로운 발상과 도전력으로 '사이버 아가씨'를 꾸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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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이보미

98년 말총의상으로 프랑스 국제 신인 디자이너 콘테스트에 입상하여 유명세를 탄 새내기 디자이너 이보미. 그녀는 당시 매미날개처럼 섬세하고 투명하여 다루기 까다로운 소재인 말총의 조형적 특성을 이용한 관모기법으로 오트 쿠튀르풍의 의상을 선보여서 화제를 모았다. 수상 이후 디자이너 정구호로부터 여성복을 해 볼 것을 권유 받은 그녀는 편집매장 '콜렉티드'를 통해 자신의 브랜드 VETO의 판매 라인을 갖추었고, 비로소 대중들의 호응을 얻게 됐다. 이를 발판으로 갤러리아 백화점의 GDS에 입점했고 작년 겨울 청담동에 자신의 숍을 오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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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이상봉
시원한 헤어 스타일과 구렛마루가 매력적인 이상봉. '디자인이란 고여있는 것이 아닌 움직이는 것'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그는 99년 서울 패션인상 '올해의 디자이너 상'을 수상했다. 독일 여성복 박람회인 'CPD 2000년 가을/겨울 패션파워'에 참가하는 등 해외 진출을 모색중이다.

83년 중앙 디자인 콘테스트에 입상하면서 디자이너가 된 그는 패션쇼를 퍼포먼스적으로 대중에게 어필하는 어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광주 비엔날레, 국제 미술 의상전, 죽산 국제 예술제의 패션 퍼포먼스를 통해 패션과 예술과의 접목을 꾸준히 시도했다.

그에게 있어 패션이란 전체적인 이미지와 실루엣에 맞춰 즐기는 라이프 스타일이자 문화이다. 철학이 있는 패션, 옷을 문화로서 사랑하는 삶, 그리고 시대를 읽는 방법을 패션쇼와 퍼포먼스의 접목으로 연출하는 그의 쇼는 늘 색다르고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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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일 존경하는 디자이너^ ^)


21)이신우
30년 넘게 패션 디자이너로 한길을 걸어 온 한국 패션사의 산증인, 디자이너 이신우.

지난 98년 IMF의 여파에 회사의 부도라는 시련을 겪었으나, 그녀를 아끼는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작게나마 컬렉션을 이어 나갔다. 부도 후의 첫컬렉션은 그녀의 좌절을 염려했던 지인들과 마니아들에게 안도감을 줄 정도로 이신우다운 옷들이 소개되었다.

조용하고 다소곳한 성격과 작은 체구로 줄곧 성공 행진을 이어 온 이신우. 60년대 말 '오리지날 리'를 시작으로 '영우' '쏘시에' '이신우' '이신우 옴므' '이신우 콜렉션'에 이르기까지 디자이너 브랜드의 기업화라는 성공 신화를 이끌었다. 또한 93년에는 국내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참가, 세계무대 진출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91년에는 일본 마이니치 패션 대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했는데, 이 상은 이세이 미야케, 요지 야마모토, 레이 카와쿠보가 수상한 신인 디자이너 상이다.

화려한 성공 뒤에 겪은 부도의 아픔이 30년 넘게 앞만 보고 달려왔던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이신우. 컬렉션을 통해 당당히 다시 일어난 작은 거인의 행보는 '비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하게 굳는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22)이영선

2000년 '올해의 디자이너 상'을 받은 이영선는 그녀의 브랜드 '에꼴드 빠리'를 10년 넘게 성공적으로 지켜오고 있다. 그녀는 73년에 시작한 '에땅드'라는 작은 의상실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업을 이어 패션사업을 시작했다. 72년에 성균관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을 전공하고, 국제 복장학원과 일본문화 복장학원, 미국 F.I.T까지 수료한 그녀는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춘 디자이너로 손꼽힌다. 디자이너로서 자신이 가진 가장 큰 축복은 풍부하고 정렬적인 감성이라고 한다. TV를 봐도 여행을 가도 오직 젊은 여성들의 옷차림에만 시선이 향한다는 이영선. 2003년에는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영선의 홈페이지: http://www.ecoledeparis.co.kr

[우먼드림제공]


23)이영희
세계 복식사전에 '한복'이라는 공식 복식 용어를 등장시킬 정도로 고집스럽게 한복을 세계에 소개한 디자이너 이영희. 그녀는 86년 프랑스에서 열린 자신의 한복 쇼를 마치고 한 기자로부터 '우리도 입을 수 있는 옷으로 만들어달라'는 말을 듣는 순간 한복의 세계화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녀의 한복을 본 프랑스인들은 한복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선과 오묘한 색의 조화에 '바람의 옷'이라는 애칭을 선물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93년부터 한복이 아닌 기성복으로 파리 컬렉션에 첫 발을 디딘 이후 이번 2001 S/S 파리 컬렉션까지 줄곧 컬렉션을 통해 한국 패션의 세계화에 일조하고 있다.

그녀는 한복 디자이너보다 패션 디자이너로 불리길 원한다. 한복을 그대로 선보이는 것이 아닌 한복의 선과 소재를 응용한 기성복 라인을 만들기 때문. 또한 일상 생활에서 입을 수 있는 '생활 한복'이라는 장르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패션이란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우러 나와야 한다'는 디자인 철학을 고수하는 그녀는 국내 패션디자이너 최초로 홈 컬렉션 '메종 드 이영희'를 런칭해 미국과 유럽 백화점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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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이정은
확실히 튀는 신세대 디자이너이자 '탱크걸' 이정은. 그녀는 핑키, 관능, 퇴폐, 섹스어필이라는 키워드로 브랜드 '라바우먼'을 이끌어가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외국 패션지를 사서 보고 유명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평할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경원대 미대를 진학해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키워오던 중 이탈리아 패션 명문 '마랑고니'로 유학을 떠나 자신의 재능을 키워갔다.

유학시절 오로지 옷을 만드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을 정도로 열정을 가졌던 그녀는 95년 X-rei Studio의 신규 브랜드 David의 총괄 디자인 담당자로 스카우트 될 정도로 현지 기성 패션 업체의 인정을 받았다.

귀국 후 97년 압구정동에 오픈한 그녀의 단독 매장은 온통 보라색인 벽과 바탁, 핑크색 의자 등로 장식한 인테리어와 과감한 의상으로 패션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파격적인 디자인과 현란한 색상이 특징인 그녀의 옷은 연예인들이 특히 선호해, 에로배우 이승희가 주연한 <물 위의 하룻밤>에 나오는 의상을 협찬하기도 했다. 또한 박지윤의 신곡 <성인식>의 무대 의상을 맡기도 했다.

그녀의 옷은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미 미국과 일본에 진출해 있는 라바 우먼은 98년 후쿠오카 컬렉션과 오사카 컬렉션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2000년 홍콩 패션위크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해외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정은의 홈페이지 http://www.lavawom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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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진태옥
S.F.A.A. 초대회장을 역임한 진태옥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의 대표적인 톱 디자이너. 특히 그는 20세기 세계 패션을 총결산하는 <더 패션 북>이라는 책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20세기의 디자이너'로 선정되어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어깨를 같이했다.

늘 한국 디자이너로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는 그는 진정한 한국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만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1년에 두 번씩 컬렉션을 준비할 때마다 사무실에서 패션쇼에 사용할 음악을 들으면서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원단들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옷을 입히기보다 옷을 만들자'라는 패션 철학을 가지고 있는 그는 셔츠 한 벌을 만들어도 그저 입혀지기보다 왜 입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담고자 노력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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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트로아 조
성공적인 뉴욕 입성으로 한국 패션의 저력을 선보인 트로아 조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신초이, 젬마강, 주사라리와 같은 젊은 디자이너들의 꿈이자 우상이다. 동양인은 진출이 어렵다는 뉴욕 메디슨 애비뉴에 당당히 매장을 열고 뉴욕에서 성공한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이기 때문이다.

63년 국내에서 '트로아 조 부티크'를 오픈해 오늘날까지 기품 있는 고급 기성복 라인을 유지하는 트로아 조는 오뜨 꾸띄르적인 요소를 페미닌하고 모던하게 기성복으로 재창조해 냈다. 그녀는 일찌감치 장기적인 안목으로 브랜드 경영상의 시스템 구축과 국제 무대로의 진출을 꾸준히 실행해 왔다. 80년대의 판매 위주 방식에서 탈피, 90년대 이후는 마케팅과 프로모션으로 승부하는 시대가 될 것을 예견한 트로아 조는 96년 브랜드명을 '트로아 조'에서 '트로아'로 탈바꿈하고 뉴욕에서 정기 컬렉션을 갖는 등 브랜드의 글로벌화에 적극 나섰다.

뉴욕 입성의 발판이 된 뉴욕 FIT 유학 시절에는 색채학과 의상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미국적인 감각과 함께 풍부한 색채감과 패브릭의 중요상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 변함없이 지켜오는 그녀만의 키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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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한송(트로아 조의 아들..?1)

젊은 꾸띄리에 한송은 '입을 수 없는 옷'이라는 개념이 지배적인 꾸뛰르 시장에서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이다. 그는 화려한 디테일보다 심플한 선을 위주로 디자인한다. 그가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숙명과도 같다. New York University 정치학과 졸업 후 어머니의 브랜드 '트로아 조'의 경영을 담당한 그는 어느날 우연히 점퍼를 스케치하고 스와치를 붙여놓았는데, 그것을 본 어머니가 그의 아이디어로 의상을 만든 것. 아들의 감각을 높이 산 트로아는 아들에게 디자인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디자이너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최근 한송은 홍콩에서의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의 쇼는 홍콩은 물론 영국의 바이어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은 것. 또한 올 7월 홍콩 컬렉션에 참가하기로 해 그의 홍콩 진출은 일단 안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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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홍미화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옷은 디자이너에게 무의미하다'는 그녀는 옷을 통한 대중과의 의사소통을 원한다. 일본에서 패션 기획 디렉터와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패션계에 뛰어든 그녀는 87년 데코의 '텔레그라프'를 통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94년에 파리 컬렉션에 참가해 지극히 동양적인 디자인과 소재로 독창적인 내추럴리즘을 선보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

그녀의 옷에서는 '자연'과 '여유'가 느껴진다. 귀여운 소녀의 잠옷 같기도 하고 섹시한 외출복 같기도 한, 구분되어지지 않는 자유로운 디자인 속에서 인체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애정이 엿보인다. 또한 풍성한 실루엣과 흑백 컬러는 여백이 멋스러운 한 편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패션은 예술이 아닌 비즈니스라고 말하는 그녀는 파리뿐만 아니라 세계로 진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며 우리 패션계의 미래를 짊어질 후진 디자이너 양성에 관심을 쏟고 있다. 과거의 원형을 소중히 하면서도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아우르는 디자인 철학으로 대중과의 거리 좁혀 나가는 그녀의 행보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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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홍은주
97년 '엔주 홍'을 런칭한 홍은주의 전직은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다.

삼남매에게 직접 옷을 지어 입히기 위해 복장학원을 다닐 정도로 감각이 뛰어난 어머니를 그대로 닮은 그녀는 84년 패션공부를 위해 무작정 파리 에스모드로 유학을 떠났다. 졸업 후 외국인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동기들을 제치고 크리스찬 디올에 유일하게 입사해 재능을 인정 받았다.

92년 '홍 컬렉션'이라는 브랜드로 파리 컬렉션에 참가한 그녀는 한국인 최초로 파리 레알에 단독 매장을 오픈하면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13년의 파리 생활을 접고 귀국한 그녀가 선택한 것은 '동양적인 선'이었다. 가장 한국적인 요소들이 디자인 영감으로 연상되기 시작한 것.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과 에너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를 좋아한다는 홍은주. 한국에서 다양한 스타일을 경험하며 오리엔탈적인 요소와 아방가르드한 디테일을 오묘하게 크로스오버하는 그녀는 퓨전디자이너라는 닉네임을 얻으며 자기 찾기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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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양성숙
"내가 이 옷을 입는다면 만족할까?" 디자이너 양성숙이 옷을 만들 때마다 늘 자신에게 되묻는 말이다. 대학에서 서양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78년부터 약 10년간 크레송. 동일 레나운 등의 내셔날 브랜드에서 디자인 실장을 지낸 뒤 87년에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 "Y&M 양성숙"을 런칭했다. 이어 90년과 91년에는 파리와 뉴욕 프레타 포르테에 참가,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리기도. 그녀는 소재의 차별화가 곧 디자인의 차별화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소재 선별에 각별히 신경을 쓰며, 새로운 소재 개발에 많은 공을 들인다.

[우먼드림제공]

2004.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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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출저 - Vogu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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