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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팔만대장경...
dptm**** 조회수 8,865 작성일2014.01.30
팔만대장경은 언제 유내스코에 등록됬나요?
내공15!!!자세한설명도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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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팔만대장경은 아주 소중한 유산입니다

 

이 글속에 귀하가 찾으시는 답이 있을 거예요

 

 

팔만대장경 [八萬大藏經]

 theTripitaka Koreana  

 (Consisting Over Eighty Thousand Blocks).

  
가로 70cm
세로24cm
두께2.6cm
 
 
출처 : 시사상식사전
 
해인사에 소장된
'고려대장경 및 제경판'이 곧 '팔만대장경'으로 잘 알려진
8만7000여 장의 고려시대 불교 경판이다.
한마디로 부처님에 말씀을 글로서 남긴것입니다
이 대장경은 고려시대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몽골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고 새긴 것이다.
이를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현존하는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로,
2007년6월에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특히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인 장경판전이
1995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보관시설과 보관물이 함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가 더해지고 있다.
'재조대장경'이라고도 불리는 팔만대장경은 내용의 정확함과 자체(字體)의 아름다움,
목판 제작의 정교함이 동양의 대장경 가운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 불교의 높은 수준과 문화의식의 바탕이 되어 왔다.
 

고려 고종대에 판각되어 현재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대장경.
팔만대장경 경판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 경판, ...
팔만대장경 /해인사 장경각 내부에 진열된 ...
국보 제32호.
 
목판본은1,516종에 6,815권으로 총8만 1,258매인데 이 가운데 후대에 판각된15종의 문헌은
보유판(補遺板)이라고 한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이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된 뒤 1236년(고종 23) 당시의
수도였던 강화에서 시작하여 1251년9월에 완성되었다.
이 사업은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주관했으며,
제주도·완도·거제도 등에서 나는 자작나무를 재료로 사용했는데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먼저 나무를
바닷물에 절인 다음 그늘에서 충분히 말려 사용했다.
이 대장경은 조선 초기까지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해인사로 언제 옮겨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1398년(태조 7)에 옮겼을 것이라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때 2,000명의 군인들이 호송하고,
5교양종(五敎兩宗)의 승려들이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보관함의 순서는 천자문 순서대로 배열했으며,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거의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색에 의해서 그 내용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첫째, 인류 최초의 한문대장경인 송나라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며,
현재 전하지 않는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의 내용을 짐작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특히 〈대승법계무차별론 大乘法界無差別論〉 권1은 어느 대장경에서도 볼 수 없다.
둘째, 사전류의 저술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법원주림 法苑珠林〉·〈일체경음의 一切經音義〉·
〈속일체경음의 續一切經音義〉 등 중요한 전적과 〈대승보살정법경 大乘菩薩正法經〉·
〈제법집요경 諸法集要經〉 등 중요한 대승경론이 포함되어 있다.
셋째, 자체(字體)의 예술성이다.
하나의 목판에 대략 가로23행, 세로 14행으로310자 내외를 새겼는데
그 정교한 판각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조선의 명필인 한석봉은 이를 두고 "육필(肉筆)이 아니라 신필(神筆)이다"라고 경탄했다.
이 팔만대장경은 뒤에5차례나 간행·유포되었다는 역사기록이 있는데 고려말에 이색(李穡)이 인출한
대장경 1부가 여주 신륵사에 봉안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까지 왜구들이 빈번하게 침략해와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을 요구했는데 1389~1509년에 83차례나 요구했지만 대부분 거절하고 간혹 인본(印本)을 주었다고 하며,
1410년(태종 10)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관찰사에게 도내에서 생산되는 인경지(印經紙) 267묶음을
해인사로 보내 인경(印經)하도록 명했으며,
세조는 신미(信眉)·수미(守眉)·학열(學悅) 등으로 하여금 해인사 대장경50부를 인출하여
각 도의 명산 거찰에 나누어 봉안하도록 했으며,
1898년 용악(聳岳)이4부를 인출하여 통도사·해인사·송광사 등에1부씩 봉안했다.
고려 중반부터 장경도량(藏經道場)이라는 이름으로 봄·가을에 6, 7일씩 거의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으며, 현재 해인사에서는1년에 1번씩 대장경판을 머리에 이고 탑 주위를 도는 행사를 하고 있다.
팔만대장경의 특수성은
첫째, 사상적인 것으로 국토가 유린된 상황에서 이 커다란 불사(佛事)를 통해 경전을 수호한 호법적(護法的)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 호국신앙). 이규보(李奎報)의 〈군신기고문 君臣祈告文〉은
이 대장경조조의 사상적 의의를 천명한 글로 몽골을 야만시하고 문화적 긍지를 드러내고 있다.
둘째, 경제적인 것으로 대장경의 역사(役事)에 대한 막대한 경비를 정부가 부담하므로
국민에 대한 재투자적인 면이 고려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내용적인 것으로 과학적인 배열과 엄격한 자료수집으로 정평이 나 있는 것이다.
고려대장경 이후에 편집된 중국판 빙가장경,
일본판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등은 모두 이것을
모본으로 하여 판각된 것이다.
즉 이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한문대장경의 완벽한 '연원'이라고 할 수 있다.
1976년 동국대학교에서는 팔만대장경의 원본을 영인 축소하여 영인본 47권과 전대장경에 대한
내용·주소(註疏)·번역자·연구서 등을 상술한 해제 색인본1권을 합쳐서 총 48권을 간행했다.
또한1967년부터 이 한문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한글판 대장경을 간행하고 있는데
현재120권이 출판되었다.→ 고려대장경, 대장경
관련 멀티미디어 (총 4건)

팔만대장경 속 부처의 가르침 재조명

 서울신문 | 입력 2011.10.13 04:11

 

꼭 1000년 전인 고려 현종 2년,
거란의 침략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당하는 위기 속에
불력을 빌려 나라를 지키고자
대장경을 새기는 최초의 작업이 시작된다.
76년 만에 완성된 초조대장경은 당대 불교경전 일체를
한자로 새긴 기록문화의 결정체다.
1232년 몽골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은 불타 없어졌다.
하지만 고려왕조는 몽골에 대한 항전의지를 담아
두 번째 대장경인 재조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한다.
1251년 완성된 결실이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이다.


 
KBS가15일 첫선을 보이는4부작 특집 다큐멘터리
'다르마'(Dharma·진리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는
팔만대장경에 담긴 부처의 가르침을 재조명해 인간의 삶과 죽음,
고통과 해탈이라는 인류 공통의 난제에 대한 답을 모색한다.

윤찬규PD는 11일 서울 여의도 KBS 신관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자의적 해석을 배제하려고 내레이션을 없앴다.
대장경의 역사를 개괄하는 1편을 제외하고 2~4편은
지구 반대편 두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전개했다."고 설명했다.

15일 밤 8시에 방송되는
1편 '붓다의 유언'에서는 미국 버클리대 루이스 랭커스터교수의
3차원(3D) 입체 대장경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세계인들이 붓다의 최후를 기록한
고려대장경을 릴레이로 읽어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세계 최초로 팔만대장경의 영문목록을 작성한
랭커스터 교수는 고려대장경 목판 전체를
가상공간에서 검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2편 '치유'(16일)에서는 미국 매사추세츠의 유매스 메모리얼 병원과 영국 런던 외곽의
아마라바티불교사원을 넘나들며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알아본다.
특히 약물을 쓰지 않고
불교의 수행법을 통해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MBSR (정신에 기초한 스트레스 감소법) 프로그램이 인상적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우울증, 뇌졸중 등으로
고통을 겪는 30명의 환자가 8주간 진행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3편 '환생과 빅뱅'(22일)에서는 빅뱅 실험이 벌어지는
유럽핵물리학 연구소와4100m 고원에 있는 티베트불교수행처가 교차되며
'우리는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4편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23일)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성 베네딕트 수도원과
 지리산 쌍계사의 절경을 통해 행복의 의미를 고민한다.

다큐멘터리는 해설 없이 출연자의 육성과 음악으로만 구성된다.
베르나르도 베스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로1988년
아카데미 영화음악상을 받은
일본의 세계적인 영화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가 음악을 맡았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박상국 문화유산연구원장

“팔만대장경은 남해서 판각했다”

  오늘 동국대 특별법회서 발표

   

     동아일보 

 

입력 2011.10.13 03:30

수정 2011.10.13 03:34



 "초조대장경은 1011년부터 1087년까지 77년 동안 판각(板刻)했고,
해인사 대장경판(팔만대장경)은 강화 선원사에 대장도감을 설치해
1236년부터 1251년까지 판각했다고 일제강점기 일본학자들에 의해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다르다."

불교서지학자인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사진)이
초조대장경과 팔만대장경의 제작 시기와 제작 장소에 관해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박 원장은 동국대 정각원이13일 오후5시 서울 동국대 중강당에서 개최하는
'고려대장경간행 1000년 기념 특별법회'에서 이를 발표한다.
발표 주제는 '고려대장경의 진실'.
박 원장의 새로운 견해 가운데 하나는 초조대장경의 제작 기간.
그는 초조대장경을 제작하는 데77년 걸렸다는 지금까지의 학설이 비상식적이라고 말했다.
박 원장은 "팔만대장경은 내용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판각했는데도 16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초조대장경 판각에 77년이 걸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초조대장경은 북송대의 개보판(開寶版) 대장경을 저본(底本·원본)으로 삼아
새겼기에 오래 걸릴 일이 아니다.
송의 개보판 대장경은 7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그동안 이규보의 '각대장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나오는 내용을
잘못 이해해 1087년을 완료 시점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1011년에 제작을 시작해10년을 넘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두 번째 새로운 견해는 팔만대장경 제작 시기. 팔만대장경은 그동안 1236년에
판각을 시작해1251년에 제작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박 원장은 대장경 각 경전의 간행기록과 '고려사' 등의 기록을 정밀 검토한 결과
1233∼1236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1237년부터 1248년까지 12년 동안 판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1251년은 팔만대장경 완성을 기념하는 경축행사를 치른 시기이지 제작을 완료한 시기가 아니다.
그동안 경축행사를 종료 시점으로 잘못 이해했다.
대장경은 이미 그3년 전인1248년에 마무리됐다"고 설명했다.

박 원장은 또 "해인사 대장경판은 강화 선원사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해
판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판각 장소는 선원사가 아니라 경남 남해"라고 말했다.
팔만대장경 제작 장소에 관해선 그동안
△강화 제작설
△남해 제작설
△강화 남해 공동제작설 등이 제기돼 왔다.

박 원장은 "'조선 태조가 강화 선원사에서 옮겨온 대장경을 보러 용산강에 행차했다'는
'태조실록'의 기록에 따라 그동안 강화도에서 만들었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선원사는 1245년에 창건됐는데 이때는
이미 팔만대장경 판각이 90% 이상 완료된 시점"이라고 설명했다.
즉 강화 선원사는 팔만대장경과 관계가 없다는 뜻이 된다.

그는 "그동안 팔만대장경 제작을 위해 강화 선원사에 대장도감을,
남해에 '분사(分司) 대장도감'을 설치했을 것으로 추측해 왔으나
대장도감 판본과 분사대장도감 판본을 조사해 본 결과
두 곳은 동일한 장소였고 그곳이 바로 남해였다.
남해에서 100% 판각된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1.팔만대장경의 크기

팔만대장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4㎝이다.

무게는3㎏ 내지4㎏이다.

 

2.팔만대장경의 높이

 높이(두께)는2.6㎝ 내지 4㎝이다.

 

3.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있는곳

 해인사 장경판전

 

4.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까닭!!!!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군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아래는 팔만대장경과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에 대하여 설명을 올립니다.

 

팔만대장경 (해인사 대장경판)


종 목  국보  제3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0 해인사 
시 대 고려시대


대장경은 경()·율()·논()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4천 번뇌에

해당하는 8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24㎝내외이고

두께는2.6㎝ 내지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1,496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또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해인사 장경판전

종 목  국보  제52호 
지 정 일1962.12.20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해인사길 73-4)  해인사
시 대 조선시대


가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3년(802)에 지은 사찰로,

왕후의 병을 부처의 힘으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3대 사찰 중 하나이며,

8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른다.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14년(1622)과 인조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

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해인사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대장경판과 고려각판을 포함하여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팔만 대장경

the Tripitaka Koreana

 

불교 경전을 종합적으로 모은 것을 말한다.

팔만 대장경은 16년 간의 대역사 끝에 간행되었으며,

판수가 8만여 개에 8만 4천 개의 경전 말씀이 실려 있어

팔만 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팔만 대장경을 만든 이유는

민심을 모으고

부처님의 힘으로 몽고군을 물리치고자 하는 마음에서이다.

한글자 한글자 새길 때마다 절을 세 번씩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천만 개의 글자가 하나같이 그 새김이 고르고 잘못된 글자가 거의 없다.

오늘날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경판으로,

 팔만 대장경이 보존되어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해인사 대장경판(海印寺大藏經板) 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

국보제32호로, 

고려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고자

고려 고종23년(1236) 강화에서 조판에 착수하여

고종 38년(1251) 완성한 고려의 대장경이다. 

2007년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었음.

1.1236년 경기 강화도에서 제작

2.고려 고종이 지시하여 1차 대구 부인사 2차 흥왕사 등 유명사찰에서 제작

3.유래 총 8만 1,137매(枚)의 대장경이므로 팔만대장경이라 합니다

 

1,가치, 의의

활자인쇄의 신기원 조상들의 불심과 서적인쇄에대한 남다른 목적

대장경의 조판으로 인쇄술의 발달과 출판 기술에 큰 공헌을 하였다.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 1995년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역시 그 과학적 기술의 탁월함으로 말미암아

국보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팔만대장경판 역시 2007년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었다.

또한 팔만대장경 인쇄본도 강원도 평창군 등에서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2.과정

강화도에서 몽골의 침입을 막아보고자 대대적인 조판 사업이 진행되었다.

동왕 23년(1236) 강화도에 장경도감(藏經都監)을 설치하여 사업에 착수,

동왕 38년(1251) 총 8만 1,137매(枚)의 대장경을 완성하니,

이것이 유명한 팔만대장경.

 

3.만든 이유

불교를 숭상한 고려는 외침(外侵)을

부처의 힘으로 막고자 방대한 대장경의 간행사업을 추진했다.

제1차는 거란의 침입으로 곤경에 직면했을 때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대구부인사(符仁寺)에 도감(都監)을 두고,

『대반야경(大般若經)』

『화엄종(華嚴宗)』

『금광명경(金光明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 6,000여 권을 조조(彫造)하였다. 

현종때 시작하여 문종때 완성된 이 초판 고본(古本)

대장경은 고종19년(1232)의 몽골 침입 때 불타고,

일부가 일본에 전한다.

 

4.우수성

인쇄술의 발달과 출판 기술에 큰 공헌

 


 

  

해인사 대장경판 (팔만대장경판)


종 목  국보  제3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해인사길 73-4)  해인사 
시         대 고려시대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로

2007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

 

‘내가 죽어보는 날’

 

 

 

기사입력 2013-05-18 03:00:00

기사수정 2013-05-18 08:54:12

 

 

 

 

인천 용화선원 송담 스님의 선화(禪畵).



 

 
 
내가 죽어보는 날’
 조오현(1932∼)

부음을 받는 날은
내가 죽어보는 날이다

널 하나 짜서 그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죽은 이를
잠시 생각하다가
이날 평생 걸어왔던 그 길을
돌아보고 그 길에서 만났던 그 많은 사람
그 길에서 헤어졌던 그 많은 사람
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
나에게 꽃을 던지는 사람
아직도 나를 따라다니는 사람
아직도 내 마음을 붙잡고 있는 사람
그 많은 얼굴들을 바라보다가

화장장 아궁이와 푸른 연길,
뼛가루도 뿌려본다
    
    
그제 본보1면에 실린 조오현 스님 인터뷰를 찬찬히 읽었다.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줄이면
남의 눈에서 눈물나게 하지 마라’
‘사람 차별하지 마라’는 거다.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윤회를 받는다고 생각해
 한 순간 한 순간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라.
 
부처가 바라는 세상을 이루는 길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
남편 아내 직장동료를 부처님으로 여기는 거다….
어리석은 나 같은 중생도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게 풀어준 깨달음의 말씀들이다.

시(詩)는 가장 간결한 글이며 말(言)의 사원(寺)이라 했던가.
오현 스님은 2007년 ‘아득한 성자’로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기도 하다
불교적 상상력과 간결한 언어를 압축한 그의 시와 시조는 오도(悟道)의 세계를 정공법으로 파고든다.

‘우리 절 밭두렁에
/벼락 맞은 대추나무
/무슨 죄가 많았을까
/벼락 맞을 놈은 난데
/오늘도 이런 생각에
/하루해를 보냅니다.’ (‘죄와 벌’) ‘
 
그 옛날 천하 장수가
/천하를 다 들었다 놓아
/한 티끌 겨자씨보다
/어쩌면 더 작
/그 마음 하나는 끝내
/들지도 놓지도 못했다더라.’(‘마음 하나’)

한글 선시(禪詩)처럼 오묘한 삶의 이치와 통찰을 문학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스님은 ‘
내가 죽어보는 날’에서 우리가 접하는 일상의 부음을 화두로 법문을 한다.
타인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듯 우리 자신의 죽음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대하는 경지를 일깨운다.
삶과 죽음이 원래 하나인데 굳이 경계를 나누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분별심을 돌아보라 이른다.

이 시를 보면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췌장암 진단 1년 후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한 연설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을 앞에 두고 그는 “
죽음이 인생에서 가장 멋진 발명품”이라며 “
죽음 앞에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는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
내가 곧 죽는다는 생각은 인생에서 큰 결정을 내릴 때 도움을 준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도 했고 “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이라고도 했다.
인류의 삶을 뒤바꾼 첨단기업을 일궈낸 인물의 생각은 돌고 돌아
2500년 전의 첨단 세계관이었던 부처의 마음과도 닿아 있는 것인가.

‘부처님 오신 날’
황금연휴를 맞아 고속도로는 꼭두새벽부터 쓰나미처럼 밀려든 차로 분주했다는 소식이다.
어디로들 가는 순례길일까.
전국의 스님들도 바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불교계에서는 평생을 수행에만 전념한 송담 스님을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선지식
(善知識·수행자들의 스승)으로 꼽는다.
기교 대신 수행의 내공이 묻어나는 그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불경 대신 다시 오현 스님의 시를 읽어본다.
시를 시시하게 보는 시절에 여느 설법 못지않은 사자후로 가슴을 때린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해인사 팔만대장경견문록

  (평화복지지역아동센터(bissung7153) 분명 퍼왔음)

 

1.종 목 : 국보 32호

2. 정식 명칭 : 해인사대장경판

3. 분 류 : 목판류

4. 수 량 : 81,258매

5. 지 정 일 : 1962.12.20

6. 소 재 지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0 해인사

7. 시 대 : 고려시대

8. 소유자와 관리자 : 해인사

9. 설 명 :

팔만대장경은 고려가 불교의 힘을 빌려 원나라의 침략을 극복하고자 만든 불교 목판경이다.

경판의 개당 총 길이는68 혹은78㎝이며

폭은 약24㎝,

두께는 2.7-3.3㎝의 범위이다.

무게는 경판의 재질에 따라

4.4kg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3∼3.5㎏정도이다.

경판의 재질은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다.

1398년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로 옮겼는데

필체가 아름답고8만장이 넘는 판본에서 오자가 없는등,

고려불교문화의 결정체이다.

팔만대장경은 세계의 대장경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팔만대장경 역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었다.

 

1. 서 론

우리 민족의 문화재 가운데 세계에 자랑할 만한 민족유산인

'팔만대장경'이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팔만대장경이1251년에 완성되어져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목판이 8만1258장(문화재청에서 밝힌 공식 숫자)이며

전체의 무게가 무려 280톤으로,

경판의 한 장 두께는 4센티미터,

8만1258장을 전부 쌓으면

그 높이는 3200미터로 백두산(2744미터)보다 높다는 것과

팔만대장경을 그대로 목판 인쇄해 묶으면 웬만한 아파트에 꽉 찰 정도로

거대한 분량이 된다는 것까지는 많은 이들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경주 역사지구,

종묘,

창덕궁,

수원화성,

해인사 장경각,

고인돌,

석굴암과 불국사등 7개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팔만대장경이 세계유산에 포함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제목에서 보이는 것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해인사 장경각이 포함된 것이지

장경각 안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 지정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팔만대장경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장경각보다 가치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는 대상은 유적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문화재청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팔만대장경의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이번 학술답사 동안 방문하게 될 해인사에서 막연한 유물로의

팔만대장경만이 아닌 그 유물과 그러한 유물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문화적 유산들을 다시금 되돌아보고 인식을 새롭게 다지는 기회를 가지기 바라며

이번 주제를 이끌러 나가고자 한다.

 

2. 본 론

1) 대장경이란 무엇인가?

대장경의 원래 뜻은 범어인 트리피타카(TRIPITAKA)가 말해주듯 ‘

세 개의 광주리’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經),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지켜야할 도리를 담은 율(律),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해놓은 론(論),

이 세 가지 큰 광주리를 합쳐 대장경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불교경전 일체를 총괄하는 것이기에 일체경(一切經)이라고도 한다.

경전은 부처님이 멸도하신 뒤에 부처님의 설법을 정리해서

성문화할 필요를 절실히 느낀 제자들이 모여 편찬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성립한 경전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소승경장과 대승경장이 바로 그것으로,

이는 불교발달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처음으로 성립한 경전들은 부처가 멸도하신 후4백여 년까지4회에 걸친

결집(6회의 결집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을 통해서 이른바 소승불교의 핵심 장경인

소승경장,

소승율장, 소승론장을 확립하게 된다.

이 경전들은,

기원전4세기에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 마우리아 왕조가 설립되고 열렬한

불교 신자인3대 아쇼카왕이 즉위하면서 국세가 비약적으로 팽창함과 더불어 널리 전파되어,

캐시미르와 간다라지방을 비롯한 인도 전 지역과 그리스식민지인 박트리아,

나아가 스리랑카,

미얀마등 남방 지방으로 퍼져나가4세기경에는

남방불교의 기본 경전으로 뿌리 내렸다.

그 가운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래된 주된 불교경전은 이른바 대승삼장으로서,

이들은 부처가 멸도하신 후 약 600여 년 뒤인 기원전 1세기쯤에 일어난

대승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경전들이다.

부유층이나 왕실이 제공한 승원(僧院)을 중심으로 출가주의를 내세우며 경전을 연구?

주석하면서 고답적인 독신주의에 치우쳐 있던 당시 불교계를 반성하고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재가불교도 중심의 이 대승불교운동은,

출가와 재가의 구별을 초월하여 널리 사회를 구제하려는 실천적 신앙운동으로 확대되면서

수많은 대승경전들을 출현시킨다.

1세기 후반에 북인도부터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기반으로 성립한

쿠샨왕조제 3대 카니시카왕 때에 이르러 불교는 또 한 차례 흥왕기를 맞는다.

그이 적극적인 불교 보호 정책에 힘입어 대승불교운동은 중국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해서

학승들이 차례로 중국으로 건너가 불전을 한역하는 데 힘을 쏟게 되었다.

『반야경』종류를 필두로,

『유마경』,

『법화경』 등의 유명 대승경전들이 차례로 나타나 한역되고,

그에 따라 대승불교사상의 근본 사조를 정착시키는 『중론송』같은

대승논장들도 등장하여 7세기쯤에 이르러서는 중국 및 한국,

일본에까지 대승삼장이 확고한 위치를 점하면서 한자문화권의

중요 문화요소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2) 대장경의 성립과 조성 역사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수많은 경전들이 주로 서역에서 건너온 승려들의 손으로 속속 번역되었다.

기원후 1세기인 후한 효명제 때부터 본격적으로 한역된 불전들은

당나라초기인 8세기에 들어와서는 대승 및 소승삼장은 물론

유명 고승 전기류까지 약2,300종에 7,000여 권이 넘어섰다.

이에 따라 불교계에서는 불전을 편찬 ?

정리하여 가르침의 혼란을 경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는데,

동진(東晋)의 도안(道安 314~385)이 한대 이래의 각종 경전 총목을 작성한 것을 시작으로

이들 경전을 체계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 가운데 한자권 대장경의 모델이 된 당나라 초기의 지승(智昇)이 쓴

목록집『개원석교록』20권(730년)이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송나라 불교문화의 정화이자 한자권 대장경의 효시로 유명한

북송관판대장경(개보판대장경 또는 촉판대장경이라 부르기도 함)은 지승이 쓴

『개원석교록』에 수록된 5,048권 480함의 불전을 빠짐없이 판각한 대장경으로서,

송 태조 연간인 개보4년(971)에 착수하여 다음 대인

송 태종 태평흥국8년(983)에 완성되었다.

그 후 송 진종 함평 연간 (998~1003)에는 그 사이에 한역되어 새롭게 선보인 경전들을

추가하여 편찬한 원조(圓照)의『정원석교록』에 수록된 경전을 판각하여 펴냈다.

당시의 한자문화권에서는 문명국의 위치가 불교문화의 성숙도에 따라 좌우 되었다.

따라서 송나라의 대장경 조성 사업은 불교가 훌륭했던

고려의 문화적 자긍심을 크게 자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럴 즈음에 송나라를 압박할 정도로 강성해진 거란이 고려에 쳐들어오자,

고려에서는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는 동시에 부처님의 가호가 담긴 법보인 대장경을 조성하게 된다.

송나라에서 첫 대장경을 낸 지 꼭30년 뒤의 일이다.

그것이 고려초조대장경이다.

그리고 송 ?

고려와 함께 동북아시아권을 삼분하고 있던 거란도경쟁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거란은 고려초조대장경 조성 작업보다 20년이 뒤지는

요나라 경복 연간(1031)에 대장경 조성 작업을 시작해서,

고려가 초조대장경을 다 완료하기 전인 요나라 중희 23년(1054)에 완성을 보게 된다.

이『거란본대장경』은

『북송관판대장격』보다99함이나 많은 579함에

약 6,000권의 불전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러나 이 거란본대장경은 당시에 이미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귀중본을 많이 담고 있었고,

그 편찬 내용이 지극히 엄밀해서 고려팔만대장경을 조성할 때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한편 송나라에서는 관판대장경이 처음 나온 뒤 지방에서도

대장경을 조성하는 예가 생겨났다.

복주(福州) 동선사(東禪寺)가 송 휘종 2년(1112)에 완성한 숭녕만수대장,

복주 개원사가 남송 고종18년(1148)에 조성한 대장(개원사대장),

호주(湖州) 사계(思溪) 법보자복사(法寶資福寺)가 남송 고종 연간에 조성한

대장경, 같은 지방의 원각선원(圓覺禪院)이 남송 이종 원년(1334)에 조성한

대장경들이 그것이다.

이 사판(私版) 대장경들은 여건상 충분한 지원이 없어서인지

그 정확성이 떨어진 경전으로서의 면모가 부족했을 뿐더러,

지금은 거의가 소실되고 일부분만 남아 있을 뿐이다.

고려에서는 초조대장경을 완성한 뒤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을 중심으로

각국 고승들의 저술들을 모아 속장경을 편찬,

고려 선종 8년(1091)부터 고려 숙종 연간에 걸쳐 간행했다.

그리고 고려 고종 대에 들어와 초조대장경과 속장경 모두가 몽고군의 침입으로 불타버리자,

16년에 걸친 집중적인 조성 작업 끝에 고종 38년(1251)에

고려팔만대장경을 다시 완성하게 된다.

 

3) 고려 팔만대장경의 성립

① 팔만대장경의 조성 동기

고려팔만대장경의 조성은 고려 고종 19년(1231) 몽고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과 속장경이 불에 타 소실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몽고는 끝까지 저항하는 고려를 침입,

대구 부인사에까지 쳐들어와 고려인의 호국정신을 상징하는

대장경을 한줌의 재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강화로 피난하여 임시 수도로 정하고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던

고려 왕실과 실권자인 최우(최이 催怡라고도 부른다)를 중심으로 한

군신들은 현종 때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위력을 빌어 외적을 퇴치하려는 대발원에서,

고종23년(1236) 강화에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 조성사업을 결행하게 된다.

또 다른 이유로는 몽고의 침입으로 이전까지의 수도였던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를 함으로써 최씨 무신정권이 백성들을 버렸다는 불신감을 낳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대장경 간행사업을 펼친 것이다.

이로써 최씨 무신정권은 민심의 수습과 “

불교 문화국”으로의 부흥을 한꺼번에 꾀하게 된 것이다.

 

② 조성시기

팔만대장경판이 만들어진 시기는 문헌기록과 현 팔만대장경판의 각 권 끝에 나와 있는

간지(干支)에 의하여 명확히 밝혀져 있다.

고려사고종38년(1251)9월25일조에 보면 “

현종 때 만든 초조대장경 판본이 임진년 몽고의 난 때 불타버린 후

임금과 신하가 도감을 세우고 발원하여 16년간에 걸쳐 경판을 완성하였다.

이에 고종은 백관을 거느리고 성의 서문 밖에 있는

대장경 판당에 행차하여 낙성 경찬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낙성식을 거행한 고종38년을 대장경판을 완성한 해로 보고

경판을 새기기 시작한 시기는 거꾸로 계산하여 추정해 보면 시기적으로

16년 전인 고종23년(1236)이 되며 이에 따라 오늘날 우리는

팔만대장경판이 고려 고종 때16년에 걸쳐 새겼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고종 24년에 쓴 이규보의『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에는

“이제 여러 재상 및 문무백관들과 더불어 큰 소원을 세우고

주관하는 관청으로서 귀당관사를 두고

이를 중심으로 공사를 시작코자 하옵니다.”하여

이 해에 판각이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금의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에는 대부분의 경판이 각 권의 마지막 경판 맨 끝에

정유, 무술, 기해, 경자, 신축, 임임, 계묘, 갑진, 을사, 병오, 정미 등의

간지(干支)가 새겨져 있어서 실제 제작한 해를 알 수가 있다.

간지는 초조대장경에는 없는 팔만대장경만의 특징이고,

내용에서도 중국의 연호를 쓰지 않고 당당히 고려국 이라는 이름과

또 황제가 쓸 수 있는 용어인 봉칙(奉勅)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적어도 대장경판을 새기는 기간만은 몽골과 전쟁 중 이었으므로

우리의 역사 속에 항상 어깨를 짓눌러 왔던 대륙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국임을

경판에 아로 새긴 것이다.

그런데 경판에 새겨진 간지를 정밀 분석해 보면 경판을 새긴 기간이

고려사 기록에서 계산한 16년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것과는 달리

실제의 기간은 약간 차이가 있다

실제로 판을 조성한 기간은 고종 24년(1237)에서35년(1248)까지의 12년간이고

고려사의 기록 16년과는 4년의 차이가 있다.

또 연도별로 경판을 만든 양도 크게 달라1243년의3년간에 새긴 것이3,816권에 이르러

대장경 전체6,265권의 절반이 넘는 분량이다.

따라서 정확한 판각 기간은 16년이 아니라 12년으로 보아야 옳다고 생각되면 이와 같이

고종 35년에 실제적으로 경판이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낙성경찬회가 3년이나 뒤인

고종 38년(1251)에 이루어진 것은 팔만대장경 판각을 주관하였던 최우가

고종36년(1249)에 죽는 등 정치적 격동기를 겪었던 탓으로 보인다.

경판을 새기기 시작한 연도는 고려사에는1236년,

이규보의 기록과 간지 분석결과는 1237년이어서 1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경판을 제작하는 데는 준비기간이 적어도3~5년이 소요되었을 터이므로

경판을 새기기로 결정하고 목재 수집 등 착수한 시기는

1232년의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린 직후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③ 팔만대장경의 조성 과정

군신과 백성이 하나가 되어 호국의 일념으로 시작한

대장경 조성사업은 워낙 대규모의 국가사업인지라 따로 진주지방 남해연안에

분사도감을 설치하여 판각을 나누어 진행하였다.

분사도감 장소로서 진주 남해가 정해진 까닭은 그곳이 몽고의 병화가 미치기에 쉽지 않은

남해안 지방인데다 당시 무신권력의 핵심인 최우의 근거지였기 때문이었고,

더구나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기 위한 경판 재료를 가까운 거제도에서 마음껏 구하여

바닷가에서 제대로 제작할 수 있는 지리적인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장경 판각에 앞서 그 내용을 교정하고 새로이 편찬하는 책임자로는

당대에 화엄학승으로 명망이 높았던 개태사(開泰寺) 승통 수기(守其)대사가 맡았다.

그는 30여명의 학승들을 거느리고 팔만대장경 경문을 교정 할 때 기존에 인출해놓은

우리의 초조대장경본과 송나라 대장경인 북송관판대장경본, 그 사이에 나온

거란대장경본을 엄밀히 비교 ?

대조하여 착오를 상세히 정정하고 빠진 부분을 보완했으며,

그 동안 각 나라에서 모은 독자적인 불전들과 그 밖에『개원석교』과『정원석교록』같은

일급 불전목록을 참고자료로 삼아 완벽한 대장경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일명 고려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23년인1236년부터 38년인 1251년까지 16년간에 걸쳐 제작된81,258여장의 목판이다.

만드는 과정을 추정해보면 하나의 완전한 경판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손길이 가야 했는지,

그 대규모의 까다로운 공정을 어떻게 하나처럼 완벽히 수행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경판자체가 부패하거나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하고 나무 재질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원목을 바닷물에 삼 년 동안 담가 두었다가 꺼내어 판자로 짠 다음,

다시 그것을 소금물에 삶아내서는 그늘에 말려낸 뒤 깨끗하게 대패질하여 판을 만든다.

완성된 밑판은 판각하는 곳으로 옮겨지고,

판각수들은 여기에다 편찬 교정이 끝난 경의 내용을 구양순(毆陽詢)필체로

경판 수치에 알맞게 정성껏 써놓은 사경원(寫經員)들의 판하본을 붙여 한자 한자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는다. 그런 다음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양끝에 각목으로 마구리를 붙이고 옻칠을 하고 마무리 손질을 가한 다음, 마지막으로 네 귀에 동판(銅版)으로 장식하여 한 장의 경판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장경판의 재질은 지금까지 자작나무로 알려져 왔으나

전자현미경을 이용한 조사결과 산 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고

자작나무는 거의 없었다.

경판은 가로2척 3촌(약 69.7cm), 세로 8촌(약 24.2cm), 두께 1촌2분(약 3.6cm)이며,

약 3.5kg쯤 무게가 나간다.

판면은 가로 1척5촌(약 45.5cm),

넓이7촌5분(약 22.7cm)으로 위아래에 경계선을 그었고,

한 면에 23행씩 행마다 14자씩 앞뒤 양면에 444자쯤 새겼으며,

새긴 글자의 크기는 사방 5분(약 1.5cm)쯤 이다.

또한 판의 뒷면 끝에 새긴 경의 제목,

장수(張數),

천자문차례에 따른 함 이름을 새겼고,

경판 양쪽 끝 각목에도 같은 표시를 새겨 정리하고 찾기 쉽게 해놓고 있으며,

글자 역시 구양순체로서 한 사람이 쓴 것처럼 거의

동일한 필치로 오자나 탈자가 거의 없다.

게다가 현재 경판의 보존상태는

750여년이 지난 목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기에 놀라울 따름이다.

 

4) 대장경의 옮긴 시기에 대한 논의

몽고와의 처절한 항쟁을 하면서 수도마저 강화도에 옮겨놓은 누란의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제작한 팔만대장경의 경판은 어디에서 제작하였으며

오늘날 해인사에 보관되게 된 과정은 어떠하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한 사실을 알 수 없으며

몇몇 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이다.

그 이유는 이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이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다.

이하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종34년(1247)까지 대체적이 판각작업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정리를 한 후

고종38년(1251) 드디어 고려국의 오랜 염원이었든 고려재조대장경은 햇빛을 보게 되었다.

위로는 임금과 문무백관,

아래로는 일반서민에 이르기 까지 불심으로 뭉쳐진

국민들은 장장16년간에 걸친 고난과 희생의 결정체인 팔만장이 넘은

대장경판을 완성 후 조정에서는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어려운 시기지만

대장경판의 완성에 대한 축하행사가 뒤따랐고 이것은 고려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幸城西門外 大藏經板當 率百官行香 顯宗時板本 燃壬辰蒙兵王與君臣 更願立都監 十六年而功畢}.

즉 고종은 문무백관의 신하를 이끌고 성의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가서 임진년 몽고침략으로 타버린 초조대장경을 대신하여

16년에 걸쳐 도감을 세우고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대역사가 끝나고

임금과 신하가 모두 참여한 가운데 성대한 축하행사를 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때는 아직 개성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이므로 성의 서문 밖이라 함은

강화도의 임시 수도를 말 하는 바 대장경 판당의 위치는

강화도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후1251년에서 태조 7년(1399)에 이르는 150 여 년 동안 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조선왕조가 들어서는 등

정치적인 격변기를 겪으면 서도 우리의 역사기록에는 대장경에 관한 내용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어디다가 어떻게 보관하였고 인쇄는 몇 번이나 하였는지 또 도장(道場)을 열어

대장경을 강의하고 토론하였다는 흔적도 찾아보기어렵다.

다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대장경판은 현 강화 읍에 절터가 남아있는

선원사에 봉안되어 있어든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그래서 강화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장경 판이 언제 해인사로 옮겨졌는지에 대해서는 증명할만한 자료가 매우 불충분하여

현재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고,

그에 대해 심지어는 대장경판은 강화도에서 옮겨온 것이 아니라

남해나 거제도 등에서 새겨서

해인사로 가져왔다는 재래설도 주장되어 상당히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① 재래 설(在來說)

신라 애장왕때 창건된 천년 고찰 해인사에는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고문서가 있는데

몇 고문서의 기록을 근거로 경판을 새긴 당시부터 해인사에 있었다는 주장으로,

대장경판과 직접 관련을 지어 볼 수 있는 문헌은 해인사 유진

팔만대장경 개간 인유(留鎭 八萬大藏經 開刊 因由)와 해인사 사적비(事跡碑)가 있다.

먼저 팔만대장경 개간 인유를 보면 신라 때 이거인(李居仁)이란 사람이 거제도에서

경판을 새기고 해인사로 운반한 것을 기념하여 축하 법회를 연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 있다.

내용 중 {당대중 임술년}과 {신라}라는 말이 이 기록을 믿지 못하게 하고 있다.

대장경판에는 말미에는 {고려국대장도감 봉칙조조(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라 하여

고려 고종때 각판하였다는 사실은 너무 명백하여 이론을 제기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해인사 사적비는 조선 영조45년(1769)에 새운 것인데 비문 내용 중에

{....高麗文宗時藏大藏經板 我惠莊大王 戊寅歲 重修板閣又印其經文焉....}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고종보다 거의 200여년이나 앞선 고려문종(재위기간1046-1083)시대에 경판을

해인사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으로서 이 역시 같은 이유로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다.

 

② 강화출육설(江華出陸說)

당시의 피난수도였던 강화도에 대장도감이란 관서를 설치하고

대장경판을 새겨서 보관하고 있다가 고려 말에서 조선조 초에 이르는 어느 시기에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설로서,

『강화출육설』은 다시 고려 말 설,

정축년 출육설,

태조 7년 설 등으로 나누어 각각의 주장들을 살펴보았다.

이 설은 옮긴 시기에 대한 논란은 있기는 하나 가장 널리 인정되는 학설이다.

 

⑴ 고려 말 설(高麗末說)

이는 다카하시(高橋亨)라는 일본인 학자 등에 의하여 주장된 것으로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국왕이나 개인이 대장경을 인출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신라 때부터 이조 숙종조에 걸쳐 시문을 모아 엮은 동문선(東文選) 68권의 박전지가 지은

영봉선 용암사중창기를 보면 충숙왕5년(1313) 임금은 구 대장경이 부식되어있음을 보고

이 절의 주지에게 명하여 새로이 인출하여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내용 중에 {취강화판당인출궐함궐권궐장이래(就江華板堂印出闕函闕卷闕張而來)}라는

구절이 있어 강화판당에서 인출하여 가져온 것을 알 수 있어서 이때까지도

대장경판은 강화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동문선76권에 보면 이숭인이 지은 신륵사대장각기(神勒寺大藏閣記)가 있는데

이는 이색이 우왕 7년(1381)에 죽은 부친의 뜻을 따라

대장경을 인출하고 신륵사에 대장각을 세워 안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또 이숭인의 도은집(陶隱集)에는

{수암장로인장경우해인사헌정(睡庵長老印藏經于海印寺獻呈})}이라는

시(詩)구절에서 수암장로가 해인사에서 대장경을 인경하여 바쳤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상의 자료를 근거로 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옮겨온 것은

고려 충숙왕5년(1318)에서 우왕7년(1381)에 걸치는 63년간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유일한 근거라고 할 수 있는 수암장로 시구절의{장경}이 지금도

해인사에는 고려 중기 및 말기에 새긴 삼본화엄경등 사간(寺刊)경판이 많이 있으므로

이것이 정장 고려대장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거의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다.

 

⑵ 정축년출육설(丁丑年出陸說)

태조3년에서 정조원년사이의7년간에 옮겼다는 설로서,

해인사 사간장에서 발견된 석화엄교분기 원통초

『석화엄교분기원통(釋華嚴敎分記圓通)』에는

제 10권10장 판의 윤곽 바깥쪽에

<정축년출륙시 차실 여지식도원동원개판입상 을유십월일 수좌현

(丁丑年出陸時 此失 與知識道元同願開板入上 乙酉十月日 首座玄)>이라 음각되어 있는데,

내용인 즉 {정축년에 강화도로부터 내올 때 이 경판을 잊어버렸으므로

수좌 충현이 지식 도원과 함께 불사를 일으키고

을유년 10월에 판을 새겨 넣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판이 대장경판을 옮긴 후 정리를 할 때에 원통초10권10장판이 없어진 것을 알고

정축년에서 9년 후인 을유년에 판을 새겨 넣었는데 뒤에 인경작업등을 하다가

원본을 찾아내었으므로 새로 새긴 충현의 판은 잡판으로 돌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정축년(1398)에 출육한 대장경판은 이후 을유년(1406)까지9년에 걸쳐

해인사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정축년이 이조실록의 태조7년(1399)조의 출육기록과는1년의 차이가 있고

정장이 아닌 잡판에 있는 점을 들어 후세의 가짜 판각일수도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⑶태조7년설(太祖七年說)

조선왕조 태조 7년 5월10일과 정조 원년의1월 9일 사이에

대장경판을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설이다.

이에 관하여는 이조실록 태조7년(1399) 5월조에

{병진 행용산강 대장경판 수자강화 선원사 정사우무오우 령대장대부이천인 수경판우지천

사명검참찬문하부사유광우 행향 오교양종승도 송경 의장고취전도

(丙辰 幸龍山江 大藏經板 輸自江華 禪源寺 丁巳雨戊午雨 令隊長隊副二千人 輸經板于支天

寺命檢參贊門下府使兪光祐 行香 五敎兩宗僧徒 誦經 儀仗鼓吹前導)}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

이태조가 1399년5월 10일 한강으로 행차하여

대장경판이 강화도 선원사로부터 가져오는 것을 참관하였다.

비는 10일부터 12일 까지 계속되었고 2천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지천사로 옮겼다.

검참찬문하부사 유 광우에게 명하여 향을 피우게 하고 오교양종의 승려가 경을 외우고

의장을 갖추어 나팔을 불며 인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지천사의 위치는 서울 서대문밖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는 강화도에서 옮겨온 대장경판이 전부 혹은 일부인지,

정장인지 속장인지 나아가서는 여기서 말하는

대장경판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대장경판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경판인지도 명확히 알 수 없다.

이에 대해서 다시 이조실록의 정종 조를 보면 정종원년(1540) 정월9일에

경상감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태상왕욕이 사재인성대장경 납동북면 궐축숙율오백사십석우단길양주창 환해인사방근

제주미두

(太上王欲以 私財印成大藏經 納東北面 厥畜菽栗五百四十石于端吉兩州倉 換海印寺傍近 諸州米豆)} 즉

"대장경 인쇄에 참가할 승려들을 공양하기 위하여 태상왕 이성계는 동북 면에

저축한 콩과 밤 540석의 사재를 내어놓았는데 거리가 멀어 직접 가져 갈 수 없으니

단주와 길주 두 고을 창고에 납입하게 하고 해인사근방의 여러 고을에서

쌀과 콩을 대신 내주도록 하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기록을 비교해보면 1540년 정월에

대장경판은 벌써 해인사에 있었고 만약 강화도에 팔만대장경 판이 보관되어 있었다면

지천사로 옮긴1539년의5월10일과는 불과 8개월의 기간밖에 없으며 이 사이에

대장경은 서울의 지천사에서 해인사로 옮겨온 셈이 된다.

이 주장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출처가 분명한 자료의 기록이고 명확한 연대가 있는 점을

들어

가장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8개월 동안에 과연 그 많은 경판을 해인사로 옮겨올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논란의 여지가 많다.

 

5) 팔만대장경의 특성

일반적으로 팔만대장경의 특성에 대해서는 다음 네 가지를 꼽는다.

첫째, 국토가 유린된 상황에서 이 커다란 불사를 통해 경전을 수호한 호법적 성격을 띤다.

특히 외침을 받고 있는 절박한 상황임에도 이를 완성하여 인류 문화사에 있어 불후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는 것은 고려인의 끈질긴 민족정신과 신앙심 높은 불심을 엿보게 하며,

둘째로, 대장경을 만드는 막대한 경비를 정부가 부담하여 국민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었고

오히려 재투자적인 면이 고려되었다. 또한

세 번째로, 경전의 내용은 방대하지만 과학적인 배열과 엄격한 자료 수집에 의해

작성되었다.

당시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으로 있던 수기(守基) 등이

북송판(北宋板),

거란본,

초조대장경 등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여 탈자,

오자,

누락된 글자 등을 바로 잡아 가장 정확한 대장경을 만들었다.

더욱이 인류 최초의 한문대장경인 송나라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거란판 대장경의 내용까지 짐작하게 해준다.

특히 '팔만대장경'은 중국의 대장경을 모본으로 했지만 '

팔만대장경'에만 수록되어 있는 불교 전적들도 포함되어 있다.

'법원주림'이나 '일체경음의'처럼 '

팔만대장경'이 아니었으면 알려지지 못했을 불전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

팔만대장경'보다 훨씬 늦게 간행된 남송의 '

사계대장경'이나 원나라의 '

원판대장경'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김종명은 적었다.

이처럼 '

팔만대장경'은 내용이 풍부하기 때문에 일본의 '

대정신수대장경'의 모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빈가정사대장경'과

1980년대에 편찬된 대만의 '

불광대장경'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수적으로 방대한데다가

5200만여 자에 달하는 글자가 한 결 같이 고르고 정밀한

서각(書刻)예술품이라는 점에서도 크게 평가된다.

5200만여 자가 얼마나 큰 숫자인지는 조선왕조 500년 내내 만들어온

'조선왕조실록'의 전체 글자 수와 맞먹는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6) 해인사와 장경판전연혁

해인사는 창건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찰로 해인사의 창건 연대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권1 애장왕 3년 8월조)에 “가야산해인사를 창건하였다.”라는 기록이 적혀 있으며,

애장왕 3년은 서기 802년에 해당한다.

창건 연대와 더불어,

해인사는 그 창건 경위 역시 비교적 자세하게 알 수 있는데,

기록이 남아있는 대표적인 문헌으로 최치원이 효공왕4년(900)에 쓴

「신라가야해인사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

(『동문선』권64)와 고려 태조26년(943)의 문헌이라고 전하는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조선사찰자료』상)이 있다.

이 두 기록에 의하면, 순응(順應) 대덕이 가야산 토굴에서 그의 제자인 이정(利偵)스님과 정진하던 중

왕후의 불치병을 법력으로 치료해준 인연으로 왕실의 도움을 받아 창건했다고 하며,

최치원이 썼다는「신라가야산주원벽기」에는 순응이 정원(貞元)18년(802) 10월16일에 터를 잡아

해인사를 창건했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창건이후 신라시대해인사 건축 조영과 관련된 내용은 최치원이

해인사 사역(寺域)을 확장한 사실을 쓴

「신라가야산해인사결계장기(新羅伽倻山海印寺結界場記)」에 보이는데,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고 다만 “

3겹(層)의 집을 세우고,

4급(級)의 누(樓)를 올렸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다음으로 전하는 해인사 건축조영에 대한 기록은 창건된 때로부터

약 130년이 지난, 고려 건국 초기의 「균여전」에 나오는데 기록에 의하면

해인사의 희랑(希朗, 889-967)대덕은 신라 말에

해인사 주지로 있으면서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왕건은 희랑을 더욱 공경하며 모시기 위해 토지를 주어

옛 사우(寺宇)를 중신(重新)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국가문서를 보관케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로 미루어 보건데 해인사는 창건 이후 희랑대사에 의하여

고려 태조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사찰의 면모를 갖추며 새롭게 중창된 것으로 짐작되며

시기적으로 대략 서기 93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해인사는 균여대사,

대각국사등 많은 고승 대덕을 배출하게 되는데, 사우의 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다만『고려실록』과 주요 전적을 해인사에 보관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수차례 나오는데

(권22 세가 제22조, 권134 열전 제47 신우2년조,권122열전 제25 백문보조등),

이러한 사실은 해인사가 전화(戰禍)에

안전한 입지조건을 갖춘 곳에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절 내부에 실록과 전적을

보관할 규모와 시설을 갖춘 건물과 터가 있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와서 고려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봉안되면서 사격(寺格)은 더욱 높아지게 되는데,

이렇게 고려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봉안된 연대와 옮긴 경로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정종실록』에 해인사에서 대장경을 인출하게(정종 원년 정월 9일조)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대장경판은1399년 이전에 해인사로 봉안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뜻하는 것은 고려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지는데 있어,

해인사에 대장경판을 보관할 만한 규모의 건물이 있었음을 뜻하고,

그 건물은 앞에서 언급한 고려실록과 여러 전적을 보관한 건물 이었을 것이다.

해인사가 지금의 규모로 확장된 시기는 성종 19년(1488)에서21년(1490)까지다.

이 기간에 이루어진 불사는 성종 22년(1491) 조위(曺偉, 1454-15030)가 쓴

『해인사중수기(海印寺重修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장경판전과 관계되는 내용을 보면.

“세조는…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와 등곡(燈谷) 학조(學祖) 등으로 하여금

장경 판당을 시찰케 한 결과 비좁고 허술하므로 경상감사에게 명하여 40여 칸을 다시 짓게 하였다.

12년 뒤 무자년(1468)에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희(貞喜)왕후가 큰 뜻을 정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니 깊은 은혜가 사방에 미쳤다. …

신축년(1483)에 주지를 제쳐놓고,

학조로 하여금 절을 맡아 관리케 하더니,

마침 흉년이 들고 나라에 일이 많아 미처 시작하지 못한 채

계묘년(1483)에 정희왕후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자 인수(仁粹)왕대비와 인혜(仁惠)왕대비 두 분이…

정희왕후의 뜻을 두고 이루지 못한 것을 애달프게 여기어

학조로 하여금 역사를 감독케 하고,

도료장(塗料匠) 박중석 등을 보내어 관당30칸으로 고쳐짓고,

보안당(普眼堂)이라 이름 하였다.

그리고 관당 중에서 불전 3전을 뜯어 대적광전서쪽에 옮겨 짓고,

해행당(解行堂)이라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해인사중수기』의 기사를 보면,

성종 당시 이루어진

해인사 불사는 사역 전체에 걸치는 아주 규모가 큰 불사였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은 희랑대사가 중창한 이후 가장 규모가 큰 중창이었고,

해인사 가람의 면목을 일신한 것으로서 지금의

해인사 가람배치의 틀은 이때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성종19년(1488)에 세워진 판전은 30칸 규모로,

지금 판전일곽에 앞뒤로 나란히 위치한 수다라장전(修多羅藏殿)과 법보전(法寶殿)은

각각 정면 15칸,

측면 2칸인30칸 규모의 건물인데,

위의 기록은 두 건물의 정면의 칸 수만을 합산하여30칸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최흥원(催興遠, 1705-1786)의『백불암문집(百弗庵文集)』권13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도 “

대장경각은 전후로 각 15칸이고,

건물은 각각 4가(架)이다.”고 하였고,

신필청(申必淸, 1647-1710)의 『죽헌문집(竹軒文集)』권7에는 “

장격각은 모두120가(架)이다.”고 하였는데,

120가는30칸,

4가 규모의 건물임을 말한다.

이로써,

성종19년에 세워진 판전은 두 건물인데 정면의 크기로는30칸,

건물 규모로는60칸으로,

지금의 장경판전은 이 때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해인사 장경판전이 1488년 건립되었다는 사실은

1943년 법보전 지붕의 기와를 교체할 때 ‘

홍치원년(弘治元年.1488)’이라고 양각(陽刻)된 암막새가 나옴으로써 더욱 확립해졌다.

또한 판전은1964년에서65년에 걸쳐 있었던 보수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여

수다라장전은 천계(天啓)2년(광해군14년, 1622) 중수하였고,

법보전은 천계4년인 인조 2년(1624)에 중수하였음을 알게 되었으며,

천계4년의 중수공사는 성종 19년(1488) 판전 건립으로부터136년이 경과한 해였다.

조선후기에 들어 해인사 중수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다만 숙종 21년(1695)부터 고종 8년(1871)에 걸쳐

해인사에 일곱 차례 화재가 나면서 일으킨 불사를 통하여

해인사에 무슨 건물이 화재를 당하였고,

또 새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조선후기의 화재에 관해서는

1876년 2월 퇴암(退庵)스님이 찬술한『해인사실화적(海印寺失火蹟)』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철종 11년(1860) 에는 판전이 한쪽으로 기울어 새로 손을 보고 바로 잡은 적이 있으며,

1871년에는 혜봉(慧峰)화상이 판전의 담장과 축대를 수축하고 번와(?瓦)하였으며,

1888년에는 범운(梵雲)장로가 번와하였다.

또한 1899에는 보정(普淨)스임이 대장경 인출을 마치고,

판전4면의 담장을 수축하였다.

이후 광무 3년(1899)과10년(1906)에는 각각 인쇄 및 경판과 마구리,

금속장식등에 개한 수리가 잇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1925년에는 만응(萬應)스님이 판전의 돌계단을 새롭게 수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이루어진 판전에 대한 개보수 공사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다만,

수다라장전의 중앙통로 좌우 판자벽에 인접된 판가가 벽에 붙여 고정된 점 등으로 미루어

이 중앙통로는 일제시대에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개조된 것으로 추측된다.

1964년 3월부터 1965년8월 사이에 법보전과 수다라 장전 보수공사를 하였는데,

이때 판전 서측,

북측의 담장을10미터 밖으로 확장하였으며,

현존하는 판전 관리실도 1965년에 건립하여 이후에도 판전에 대한 보수공사가 자주 있게 되었다.

 

7) 장경각의 가람구조

현재 장경각 즉,

판전건물은 해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이 판전 일곽에 들어가려면 팔만대장경을

‘보안’한다는 뜻을 지닌 문인 보안문을 지나야한다.

장경판전의 일곽은 길이가50미터가 넘고,

깊이가15미터가 넘는 길쭉한 마당 둘레로 배치된 네 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판전 일곽의 앞쪽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한 긴 건물은 하전(下殿)인

수다라장전(修多羅欌殿)이고,

뒤에 있는 안쪽의 긴 건물은 상전(上殿)인 법보전(法寶殿)인데,

이 두 건물의 동ㆍ서쪽 양끝 사이에 있는 작은 두 동의 건물은

각각 동사간판전(東寺刊版殿),

서사간판전(西寺刊版殿)이다.

이 수다라장전과 법보전은 각각 정면15칸 측면 2칸

(수다라장전 길이 60.54m,

깊이 8. 61m,

법보전 길이 60.45m,

깊이 8.61m, 넓이 520.47㎡)되는 큰 규모의 건물이고,

동사간판전과 서사간판전은 각각 정면2칸 측면1칸

(동사간판전 길이 7.50m,

깊이 3.43m,

넓이 25.73㎡,

서사간판전 길이 7.43m,

깊이 3.40m, 넓이 25.26㎡) 되는 건물이다.

수다라장전 가운데 칸에는 판전일곽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로를 내었는데,

통로 좌우 양측으로 수다라장전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나있다.

그중 수다라장전 정면의 통로 개구부는 음전하게 생긴 둥그스름한 곡선으로 처리하였고,

후면의 통로 개구부는 그냥 상하 인방과 문설주만으로 짠 직사각형문들이 달려있고,

문을 달지 않았다.

한편 법보전은 수다라장전 뒤로 약 16m 떨어져있고,

건물 중앙의 전면 한 칸에는 벽을 쳐서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그 양쪽에 문수,

보현보살을 모셨으며,

건물의 규모나 구조 형식은 기본적으로 수다라장전과 같다.

그리고 이 두 건물은 모두 높지 않은 기단 위에 놓인 덤벙초석 위에 기둥을 세운 초익공계,

5량구조,

홑터마의 우진각지붕 건물로서,

내부에는 판가가 배열되었고,

연등천장을 하였으며,

평면으로 보아 건물 앞뒤에 갓기둥 계열과 내부 중앙에 높은 기둥 열을 배치한 형식이다.

여기서 갓기둥은 두리기둥으로 약간의 배흘림이 있고,

높은 기둥은 네모기둥으로 배흘림이 없다.

또한 동ㆍ서사간판전은 익공계,

3량구조,

홑처마의 맞배지붕이고,

내부는 연등천장이다.

이렇듯 4동의 건물들은

모두 기둥의 배흘림,

귀솟음,

안쏠림이 보이며,

전반적으로 건물의 가구(架構)형식은 간략하고 소박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판전 건물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능은 경판을 보호하고,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적당한 환기와 온도로 경판의 부식을 방지하여야 한다.

따라서 장경각은 건물의 통풍이 잘되도록 건물의 외벽에 붙박이 살창을 두었는데

벽면의 아래위와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살창 크기를 달리함으로써 공기가 실내에 들어가서

아래위로 돌아 나가도록 아주 절묘한 기술을 발휘하여 처리하였다

수다라장전 건물의 전면 벽에는 양측 기둥 사이에 중방을 걸치고,

붙박이 살창을 아래위로 두었는데,

이렇게 창을 서로 다르게 낸 것은 건물 뒤쪽에서 내랴오는 습기를 억제하고

건물 안의 환기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다.

한편 장경판전 뒤 담장 밖에는 수미정상탑이 있는데,

이 자리에는 1972년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한국을 대표하는

해인사의 대장경판이 목조여서 화재와 폭격같은 돌발적인 재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특명으로 기존의 장경판전과 같은 형식으로 설계한

지하1층,

지상1층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 건물을 지금은 수미정상탑 자리인 법보전 바로 뒤 쪽에 세우도록 하였으나, 당시 해인사 스님들이 해인사 가람배치의 풍수적 특성,

목조문화와 콘크리트 문화의 정서가 주는 이질감 등을 이유로 강경하게 반대하여

그 자리에서 짓지 못하고 결국 판전에서 동쪽으로 약 120m 정도 되는 곳에 있던

극락전자리에 최신 현대 기술과 설비를 갖춘 새 건물을 짓고 극락전은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그렇게 해서 건물 완공 후 일부 대장경판을 새 건물로 옮긴 적이 있으나

경판을 옮겨 모시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적합하다고 판정되어 방치되어 있다가

1984년부터 해인사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장경각의 구조와 역사 속의 예를 통해 이 건물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알 수가 있는데

그 중 첫 번째는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판을 봉안하기 때문에 사격(寺格)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점으로,

해인사의 일주문,

봉황루,

해탈문,

구광루를 거쳐, 또 부처님이 모셔진 대적광선을 지나서 그 뒤,

즉 해인사 경내에서 가장 뒤편,

가장 높은 곳에,

가장 위계가 높게 판전건물은 자리 잡고 있고,

이것은 곧 법보사찰 해인사의 상징이 된다.

다음으로,

판전은 그 건물이 자리 잡을 입지문제와 건물 자체의 과학적,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경판을 봉안할 수 있도록 처리하여 지은 점이 주요하다고 볼 수 있다.

 

8) 장경판전 건물의 과학성

장경판전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대장경판을 봉안하기 때문에

해인사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건물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점 외에도,

이 건물이 자리 잡은 입지조건과 건물에 구현된

과학적,

기술적인 처리로 경판을600년이 넘도록 온전히 봉안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크게 돋보인다.

이러한 이유 로 판전은 그 건축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는데,

이는 판전건물이 자리 잡은 위치,

건물배치와 좌향,

건물구조와 창호처리,

판가(板架)구조,

경판배열 등의 측면에서 통풍이 잘되고 일조량도 적당하며,

목판을 보존하는데 최적의 조건인

항온,

항습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들어가게 되면 우선 판전 건물이 자리 잡은 곳은

해발 1,430m인 가야산의 중턱인655m 되는 고도이고,

건물은 서남향으로 앉아 있다.

서남향은 해인사 뒤에 있는

가야산 주봉,

앞의 암산 제일봉,

그 어느 산봉우리와도 일직선상의 축을 형성하지 않는 좌향으로

오히려 이 좌향은 바람의 흐름과 크게 상관되는데 판전을 서남향으로 한 것은

해인사 주변에 부는 바람의 주 흐름 방향인 동남향을 하지 않게 한 것과 연관된다.

즉, 서남향으로 건물을 않힘 으로써 남쪽 아래에서 동남풍으로 불어

올라오는 온 공기의 습기가 많은 바람이 자연스럽게 판전을 타고 돌아

건물 옆으로 비스듬히 스쳐지나가게 하였다.

또 이 지점은 계곡에서 불러 올라 온 공기의 습도가 어느 정도 떨어지는 고도이기도 하는데,

이는 곧 건물 내부의 적절한 습도 유지,

적절한 통풍과 직결된다.

판전은 이와 같이 통풍과 습도조절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조건을 갖춘

가야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판전 건물이 서남향을 하고 있는 좌향은 일조와도 관련된다.

서남향은 건물주변 어느 곳에도 영구 음영이 생겨나지 않는 배치이기도 하며,

이렇게 건물 주변에 영구 음영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은 판전의 일조환경 조절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맑은

여름철 하루 일조 시간은12시간,

봄, 가을은 9시간,

겨울은 7시간이나 된다.

또한 가장 중요한 사항인 경판의 변형이 적게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온도,

습도,

통풍 등 실내기후의 조절이 중요한데,

건물 내부의 통풍이 원활하고,

계절과 밤낮에 따른 습도와 온도의 변화가 적어야 할 뿐 아니라

실내에는 항상 일정한 공기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판전 건물에는 자연적으로 기후조절이 되도록 하는 장치가 있다.

판전 일곽의 중심이 되는 건물인

수다라장전,

법보전 두 건물 각 벽면에는 아래위로 두 개의 창을 이중으로 내어

아래 창과 위 창의 크기가 서로 다르게 되어있다.

그리고 건물의 전면 창은 위가 작고 아래가 크며,

뒷면 창은 아래가 작고 위가 크게 되어있다.

이것은 큰 창을 통해 건조한 공기가 건물 내부로 흘러 들어오게 함과 동시에,

그 공기가 될 수 있으면 건물내부에 골고루 분포되게 한 후

밖으로 빠져나가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에 대해 과학적으로 조사해본 결과에 의하면,

판전 내부의 온ㆍ습도는 외기의 온ㆍ습도에 따라 변하는데,

온도는 외기에 비해 섭씨 0.5-2도 낮게 유지되며,

습도는 외기 습도에 비해 5-10%높다.

목판의 경우 적정한 습도는 최소 60-70% 이상으로 너무 높으면 썩기 쉽고

너무 낮아도 뒤틀리는 특성이 있어 적정치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는데

해인사 주변의 습도는 연중 인근지역에 비해 6-10% 가량 높다.

그럼에도 경판이 온전히 보관돼 온 것은 판전이 위치한 곳이

지역적 특성상3개의 계곡이 만나는 지점으로부터 바람이 항상 불어 자연적인

습도조절이 이뤄지기 때문인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판전 내부는 흙바닥인데 깊이 5㎝까지는 석회가 혼합된 층이며,

5-40㎝ 깊이 까지는 기와와 돌조각,

목탄 알갱이가 발견되는 층이며,

40㎝ 이하에서는 가뜸 숯이 발견되는 층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렇게 바닥을 처리함으로써 실내온도가 높을 때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건조할 때는 습기를 내뿜으며 자연적으로 습도가 조절되도록 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경판의 변형을 줄이는 동시에

곤충이나 해충의 침입을 막는 효과도 있다.

그리고 경판을 보관한 판가 역시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배열돼 있는데 원래 판전 내부에는 다섯 단으로 된

판가가 건물 가운데와 뒤쪽에만 남쪽과 북쪽

벽면과 평행을 이루며 두 줄로 길게 세워져 있었다.

남쪽 벽을 따라 비워 둔 앞쪽 공간은 인경(印經)작업을 위한 곳이다.

건물 앞면의 아래 창이 큰 것은 통풍뿐만 아니라 인경작업을 하는데

충분한 채광을 얻기 위해서도 필요한 해결 방안이다.

경판은 뒤틀리지 않게 양끝과 각목(角木)으로 마구리를 붙였는데,

손잡이가 되는 이 마구리 부분은 두껍도 글씨를 새긴 경판 부분은 얇은데

이는 판과 판사이가 쌓이면서 서로 손상을 주지 않도록 조치한 것이다.

그리고 경판들은 판가 각 단에 두 줄로 세로로 세워 쌓였는데,

마구리 부분보다 얇은 경판과 경판 사이에는 자연적으로 공간이 생기는데

이 공간은 공기가 아래에서 위로 자연스럽게 유통할 수 있는 굴뚝같은 통로가 되며,

이렇게 해서 모든 경판이 공기를 접하도록 되어 있은 셈이다.

이렇듯 창을 통해 들어온 공기가 건물 내부에서 앞뒤로 흐르고,

또 판가에서는 경판과 경판 사이를 통해 공기가 아래위로 흐르기 때문에

판전 내부의 온도와 습도는 자연히 고르게 유지된다.

이처럼 외부의 풍향이나 온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판전 안에서는

공기의 유동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내에 상승기류가 생기지도 않고,

또 상부가 하부보다 기온이 높지도 않는데 이것이 경판의 변형을 줄이는 비결인 것이다.

이것에 대한 그 동안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판전 내부의 모든 공간의 온도 습도는 균일하다.

그리고 경판표면의 온도와 습도는 이들 환경과 달리,

여름에도 28°C이내에 머물고 일교차가 대략 5°C내외에 머물며

습기는 통상 건조한 시점과 다양한 때를 제외하고는 75-85% 범위 내외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온도조절기능은 곰팡이나 썩음 균등의 서식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이 같은 온ㆍ습도 조절에는 판전지붕의 기와도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는 구운 기와만이 가지는 보습기능 때문이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글자를 새긴 목판 표면에는 먹물을 칠하거나 콩의 전즙과 송연으로 처리한 뒤

판가에 보관하는 것이 보통인데 해인사 대장경판은 경판을 보존하고,

치장을 하기 위해 특별히 옻칠을 했다.

그리고 팔만대장경판의 표면 바탕에는 진한 먹으로 밑칠을 한 다음

그 위에 안료가 섞이지 않은 생옻을2-3차례 칠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일반적인 목기와 다름 점은 칠공정의 일부가 생략되었는데,

이것은 칠 재료의 절약과 일손을 덜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경판의 특성상 칠막이 지나치게 두꺼울 경우 양각된 글자의 윤곽이 무디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배려 때문으로 분석됐다.

이와 같은 장경각의 과학적인 처리는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온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처리야 말로 자연을 최대한 이용한 하이테크로서

판전 건물의 외관 및 배치방식에 깔린 독특한 구성미와 간결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은

우리 선조들이 지니고 있었던 우리 민족 특유의 과학성과 합리성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 맺 음 말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당시의 민족혼이 서려있던 민족유산인

팔만대장경과 그러한 민족유산을 보호하기위해 조성됐던 장경판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들 유산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을 담은 민족자산이면서도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의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팔만대장경이 지니고 있는 특성들은 단순히

우리들에게 문화유산에 대해 만들 때의 노고만이 아니라 그것을 보존함으로써

주어지는 가치에 대해서 다시금 느끼게 하는 계기를 심어주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답사여행을 통해 지난 흔적들의 겉으로 들어난 역사적 사실만이 아닌

그 유물과 유적들이 지금까지 우리 곁으로 내려져 오기까지 겪게 되었던

역사적 풍파와 그 흔적들을 살펴봄으로써 지금은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 과거의 여러 흔적들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앞으로 남은

우리의 민족 유산들에 대해 어떻게 온전히 보전하고,

그것들의 가치에 대해 후세에 올바른 사고와 인식을 가질 수 있게

전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 고종 23년(1236)부터

38년(1251)까지 15년에 걸쳐 완성한 대장경.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었는데,

경판(經板)의 수가 8 1258판에 이르며,

현재 합천 해인사에서 보관하고 있음.

 

팔만대장경 -

목판에 새긴 고려인의 불심

 
팔만대장경이란?
대장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불경을 모두 모아 집대성한 것을 말합니다.
고종 23년(1236)에 대장도경을 설치하고 제작하기 시작하여
고종 38년(1251)에 완성했습니다.
총 81,258개의 목판 양면에 새겨 넣은 것으로 팔만대장경이라 불러옵니다
팔만대장경은 모든 판목의 글자체가 동일하고 아름다워
당시 우리나라의 뛰어난 목판 인쇄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왜 만들었을까?
거란족이 두 번째 쳐들어왔을 때 전라남도 나주까지 피난 간 현종은
신하들과 함께 초조대장경을 만들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거란족이 화의3)를 맺고 물러간 일을 두고
사람들은 부처의 도움으로 평화가 찾아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몽골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초조대장경의 판목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다급해진 무신들은 민심을 모으고,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쳐 다시 한 번 나라를 구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먼저 지리산에서 벌목한 자작 나무,
산벚 나무 등을 바닷길을 따라서 강화도까지 운반하였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근 다음 그늘에서 말려.
큰 가마솥에 넣어 다시 쪄서 말린 후 옻칠을 하여 판목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판목을
세로 8치,
가로 2자,
두께 1치 2~3푼으로 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목수와
서예가,
불교인들이 이 작업을 담당했는데,
경판의 1면에 23행,
1행은 14자로 판목 양면에 글자를 새겼습니다
.

 

팔만대장경은 어떻게 보관하고 있을까?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은

1995년 팔만대장경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해충과 습도로부터 경판을 보호하여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국보 32호 팔만대장경 분류 잘못해 원본에 톱질

특별취재팀 askme@joongang.co.kr
 
 제353호
 
 20131215 입력 
 
팔만대장경이 위태롭다.
대한민국 국보 제32호가
부실한 분류,
원판 훼손,
불량 수리,
바꿔치기 의혹,
화재 위험 등 5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해인사가
2012년 동아대에 발주한 ‘팔만대장경 중복판 첫 정밀조사’ 결과 드러났다.

중앙SUNDAY가 단독 입수한 ‘
해인사 조사과제 II 현장조사 및 판각기법’ 자료에 따르면
▶205장의 중복판 중 49장이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경판임에도 원판이 아닌 중복판으로 분류됐고
▶고려시대 원판 14장이 톱으로 절단되었으며
▶경판 17개는 1975년 조사와 비교해 오차범위인 3mm를 초과해 바꿔치기 의혹이 일고 있다.

또 보존수리 과정에서 경판을 깨거나 글자를 지워버리는 등 오히려 훼손하게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허술한 관리체제로 늘 화재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점도 드러났다.
또 수년 전 예비조사에서 연 보험료가 거액이어서 보험에도 가입돼 있지 않다.

부실 분류의 예로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 126권 19, 20장 경판 3개를 들 수 있다.
13세기 중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초기 원판,
1915년 제작된 다이쇼(大正) 보각판,
그리고
1977~2007년 사이 만들어진 최근 보각판이다.
이 중 팔만대장경 ‘원판’으로 분류된 경판은 어떤 것일까.
바로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다이쇼 보각판이다.
 
고려시대 초기 원판은 최근 보각판과 함께 ‘
중복판’으로 분류돼 판전 선반 위로 자리가 밀렸다.

이렇게 잘못 분류되면서 심각한 ‘
원판 훼손’의 문제가 발생했다.
 
일부 원판의 경우 네 모서리를 모두 톱으로 잘라낸 데 이어
오른쪽 하단 경판 글자 세 줄 25자까지 뭉텅 도려낸 것이다.
 
오른쪽 상단에 있던 글자도 다섯 자를 잘라냈다.
이 부분은 톱질을 성글게 한 탓에 나뭇결에 따라 경판이 갈라졌다.
 
해인사 장경판전에 있는 대장경판은 모두 국보이기 때문에 중복판이라도 훼손해선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잘못된 분류가 3종이다.
▶일제판을 원판으로 분류한 사례가 8건
▶고려시대 후기판을 원판으로 만든 경우가 13건
▶조선시대판을 원판으로 분류한 것이 30건이다.
이처럼 원판을 중복판으로 분류한 49개 판 가운데 14개 판은 톱으로 절단됐다.

바꿔치기 의혹을 받는 경 가운데 하나로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2권 19, 20장이 있다.
경전이 새겨진 각판 너비가
1977년 보고서에서는 500㎜였던 것이
2013년 보고서에서는 554㎜로 무려 54㎜나 늘어난 것이다.
17개 판에 길이·폭·너비 등이 크게 차이가 난다.
 
문제는 이번 조사가 205개 중복판만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다.
팔만대장경판을 모두 조사하게 되면 어떤 문제가 더 불거져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현재로서는 팔만대장경판이 정확히 몇 개인지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해인사 관계자는 “
1962년 국보 지정 당시 목록도 없었고 이후 제대로 된 조사를 한 적이 없다”며
“94년 해인사 내에 대장경 보존국이 생겼지만
사찰의 능력만으론 기초조사도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2014.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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