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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고양시 문화재 ㅎㅎ
뭉게구름 조회수 4,906 작성일2014.12.07

안녕하세요??

전 아직 4학년입니다.

그런데 학교 숙제로 고양시 문화재에 대해 조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양시 문화재에 대하여 좀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그리고 답변해 주실 때 문화재랑 그 문화재를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내에 해주시면 아주좋고요.

 내공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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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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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의 문화재)

 

1.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종 목 보물 제611호  

지 정 일 1977.08.22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5

시 대 고려시대

 

태고사 법당 바로 옆에 위치한 원증국사의 탑비이다.

 

원증국사(1301∼1382)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13세에 출가하여 회암사의 광지선사에세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후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배움에 전념하였다. 46세 때에는 중국에까지 다녀왔는데 이후 다시 중국에 갔을 때에는 순제가 그 소식을 듣고 법의를 하사하였다 한다. 공민왕의 스승이 되기도 하였으나 곧 소설사로 들어가 지내었고, 우왕 8년(1382)에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받침돌의 머리는 용의 머리를 하고 있으며, 등에는 길쭉한 육각무늬를 채워두었다.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의 무늬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고려 우왕 11년(1385)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이색이 짓고, 명필 권주가 글씨를 썼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형식에 그치고 있어 퇴화된 느낌을 준다.

 

2.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

 

종 목 보물 제749호

지 정 일 1983.12.27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5

시 대 고려시대

 

고려 후기의 승려인 원증국사 보우의 사리탑으로,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로 탑신을 올린 후 독특한 모습의 머리장식을 얹었다.

 

기단의 맨 밑단이 되는 4각의 아래받침돌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새겼으며, 그 윗면에는 굵은 선으로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8각의 가운데받침돌은 각 모서리에 원기둥을 새긴 후 면마다 큼직한 꽃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원형에 가까운 윗받침돌은 굵은 선으로 연꽃을 새겼고, 꽃잎 안에 고사리무늬를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원형으로 위쪽이 좁아져서 지붕돌 밑면에 들어 맞게 되어있다. 지붕돌은 처마가 거의 수평을 이루며, 각 귀퉁이마다 꽃장식이 투박하게 솟아 있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있다.

 

태고사원증국사탑비(보물 제611호)의 건립이 고려 우왕 11년(1385)이므로, 이 사리탑은 그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3.고양 행주산성

 

종 목 사적 제5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산26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1592)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험한 절벽을 이용하면서 펼쳐지는 넓은 평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전기의 산성 형식과 같다.

 

산꼭대기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내성과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2중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자연적으로 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의 땅이었으며, 서해안과 연결된 수로의 거점지역으로 남북 교통의 요충지대이다.

 

성 안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조각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많이 나오고, 물고기뼈무늬를 새긴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서 고려시대까지도 사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선조 26년(1593)에 왜병과의 전투에서 성 안의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 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이 산성은 한강 유역에 있는 다른 산성들과 함께 삼국시대 이후 중요한 방어요새의 역할을 한 곳으로, 현재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남아 있으며, 권율 장군을 모시는 충장사가 있다.

 

4.고양 벽제관지

 

종 목 사적 제144호

지 정 일 1965.02.02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55-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성종 7년(1476) 11월에 세운 벽제관은 우리나라에 오는 중국 사신의 공용숙박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중국 사신들은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예를 갖추어 서울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또한 이곳이 중국으로 통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 사신들도 여기서 머물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이끄는 군대와 왜군과의 벽제관 싸움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지금의 자리는 인조 3년(1625)에 고양군을 옮길 때 세운 객관으로, 그 후의 보수흔적은 확실하지 않다. 한국전쟁으로 불타고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벽제관은 관서지방으로 가는 큰 길에 설치된 첫 역관이었으며, 또한 국왕이 중국 사신을 친히 배웅하고 맞이하던 모화관에 버금가는 곳이다.

 

5.북한산성

 

종 목  사적  제162호 
지 정 일 1968.12.05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1외 서울 은평구,성북구,강 
시 대 삼국시대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로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 졌고, 대서문과 장대지·우물터·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6.고양 공양왕릉

 

종 목 사적 제191호  

지 정 일 1970.02.28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1, 산65-6

시 대 조선시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재위 1389∼1392)과 그의 부인 순비 노씨의 무덤이다.

 

공양왕은 이성계 등에 의해서 즉위한 이름뿐인 왕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원주로 추방 되었다가 태조 3년(1394)에 삼척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태종 16년(1416)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왕과 함께 묻힌 왕비는 노신의 딸로 숙녕·정신·경화 세 공주와 창성군을 낳았으나 고려가 멸망한 후 왕과 함께 폐위되었다.

 

무덤은 쌍능 형식으로 무덤 앞에는 비석과 상석이 하나씩 놓여 있고, 두 무덤 사이에 석등과 돌로 만든 호랑이 상이 있다. 이 호랑이 상은 고려의 전통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조선 초기의 왕릉인 태조와 태종 무덤의 것과 양식이 비슷하다.

 

무덤의 양쪽에는 문신과 무신상을 세웠다. 무덤 앞에 만들어 놓은 석물은 양식과 수법이 대체로 소박하다. 비석은 처음에 세운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공양왕고릉’이라는 글씨가 있는 무덤을 표시하는 돌은 조선 고종 때에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양왕의 무덤은 이곳뿐만 아니라 그가 살해된 삼척 지역에도 무덤이 전해지고 있다.

 

7.고양 서오릉

 

종 목  사적  제198호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시 대 조선시대


서오릉은 5개의 왕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오릉 지역이 무덤지역으로 선택된 이유는 세조 3년(1457)에 세자 장(덕종)이 사망하자, 풍수지리설에 의해 경릉이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서오릉은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무덤인 창릉, 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제2계비 인원왕후의 명릉,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무덤인 익릉, 21대 영조와 정성왕후의 무덤인 홍릉을 말한다.


서오릉은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왕조 왕실의 가족무덤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품격에 따라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 왕의 생모·왕세자·빈의 무덤은 ‘원’, 대군·공주 등의 무덤은 ‘묘’로 구분하여 불렀다. 서오릉에는 5개의 능 이외에도 조선왕조 최초의 ‘원’으로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의 무덤 순창원과 숙종의 후궁으로 많은 역사적 일화를 남긴 희빈 장씨의 무덤이 있다.

 

 

8.고양 서삼릉


종 목  사적  제200호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 
시 대 조선시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무덤인 희릉과 인종과 부인 인성왕후 박씨의 무덤인 효릉이 들어서면서 왕실묘지가 된 곳이다. 이후 주변에 후궁이나 대군, 공주의 무덤이 조성되었고 철종과 그의 부인 철인왕후의 무덤인 예릉이 들어오면서 서삼릉이 되었다.


서삼릉의 경내에는 3원과 46묘, 태실 54기가 있다. 3원중 가장 처음으로 들어선 소경원은 소현세자의 무덤이고, 의녕원은 의소세손의 무덤이며, 효창원은 문효세자의 무덤이다. 묘는 46기가 있는데 이 중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묘인 회묘와 경선군묘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곳에 있다.


왕릉에는 후궁, 왕자, 공주의 무덤를 만들 수 없으나, 일제시대에 멸망한 왕실의 무덤를 집중관리 한다는 이유로 왕실의 무덤을 모아놓은 것이다. 서삼릉의 영역에 후궁, 왕자, 태실을 모아놓은 것은 무덤 경내를 공동무덤으로 변형시켜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낮추고자 한 일제의 의도적인 계획에 의한 것이다.

 

 

9.북한산성 행궁지


종 목  사적  제479호  
지 정 일 2007.06.08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69번지 
시 대 조선시대


북한산성행궁은 도성 외곽의 전략적인 요지인 북한산성에 위치한 행궁으로서 남한산성 행궁, 강화행궁과 더불어 전란을 대비한 임시궁궐이며, 도성 방어의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다른 행궁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중요한 문화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북한산성 행궁은 조선 후기 집권층의 국가의식과 애민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 현재는 행궁으로서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지만 1999년에 실시한 지표조사 결과 행궁지의 과거 모습을 알 수 있는 유구들이 노출되고 지하에도 유구가 매장되어 있는 중요 유적이다.

  

 

10.행주대첩비<구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

지 정 일 1978.10.10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산26-1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1537∼1599) 장군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장군의 부하들이 세운 비이다. 현재 2기가 전하는데 하나는 처음 세워진 구비(옛 비)이고, 다른 하나는 옛 비의 상태가 좋지 못하여 새로 세운 중건비이다.

 

행주대첩은 조선 선조 26년(1593) 권율장군이 서울을 되찾기 위해 군사 2,300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진을 친 후 일본군 3만여명과 치열하게 격전을 벌여 마침내 승리로 이끈 대첩으로,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이다.

 

덕양산 정상에 있는 구비는 받침돌이 땅에 묻히고, 비몸이 어깨부분에서 밑부분까지 금이 가 있어,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선조 35년(1602)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최립이 짓고 한호가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이 비의 명칭을 썼다. 비의 뒷면은 장군의 사위인 이항복이 글을 짓고, 김현성이 썼다.

 

충장사 앞에 놓여 있는 중건비는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헌종 11년(1845)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구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비의 뒷면에 조인영이 일부 내용을 추가하여 비문을 짓고, 이유원이 글씨를 썼다.

 

11.북한산성 금위영이건기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7호  
지 정 일 1979.09.03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32 
시 대 조선시대

 
북한산성 내의 대성암이라는 암자 아래에 놓여 있는 비로, 수비를 맡고 있던 금위영의 터를 옮긴 후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북한산성은 삼국시대 이래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백제 개루왕 5년(32)에 처음 지었다. 그 후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산성의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지자 숙종 37년(1711) 대대적인 공사를 하게되었다. 이 산성의 수비대장은 영의정이 겸하였고,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을 설치하여 이 지역을 수비하였다. 원래 금위영은 동소문 안에 있었으나 그 지대가 높아 무너지기 쉬우므로, 보국사 아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비는 누워있는 일종의 와비의 형태로, 뒷면은 흙속에 묻혀있고, 비몸 한쪽으로 낙수면을 새긴 지붕돌의 일부가 보인다.


비에 새긴 기록에 의하면, 조선 숙종 41년(1715)에 이 비를 세웠으며, 도제조 이이명이 비문을 지었다 한다.

 

 

12.최영장군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3호 
지 정 일 1975.09.05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 
시 대 고려시대


고려 후기의 명장이며 충신으로 고려를 끝까지 받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처형된 최영(1316∼1388) 장군의 묘소이다. 부인 문화 유씨와의 합장묘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다.


그는 공민왕 1년(1352) 조일신의 난과 공민왕 3년(1354) 장사성의 난을 평정한 것을 비롯하여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큰 공을 세웠다.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고 수십 차례에 걸친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는 등 흔들리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는 역할을 했다.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영토를 빼앗으려 하자 요동정벌 계획을 세워 우왕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군하였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왕 14년(1388) 이성계 등의 신진세력에 의해 처형되어 선친인 최원직의 묘소 앞에 안장되었다.


이성계는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는데, 그의 무덤에는 풀이 돋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13.유형장군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50호 
지 정 일 1978.10.10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산698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무신인 석담 유형(1566∼1615) 장군의 묘이다.


장군은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과 함께 크게 활약하여 관직에 오르게 되었고, 선조 27년(1594)에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충성을 다해 나라에 은혜를 갚겠다는 ‘진충보국’4글자를 등에 새겼다고 한다.


선조 30년(1597)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총애를 받으며 왜적을 물리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선조 35년(1602)에 충청·전라·경상 3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관직에 올랐다.


유형 장군은 군사를 부리는 기술이 능하였으며 적들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 확립에 주력하다가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지내다 죽었다.


현재 묘역 안에는 묘비와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묘역 근처에는 이정구가 짓고 정학교가 쓴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14.북한산 중흥사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36호 
지 정 일 1992.12.31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259 
시 대 고려시대


중흥사터는 북한산성내 장군봉과 구암봉 사이에 있는 옛 절터이다.


중흥사는 고려 전기에 지어졌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며, 고려 말기에 고승 보우가 고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북한지』에 의하면 이 절은 본래 30칸 정도의 작은 규모에 불과했으나 숙종 39년(1713) 외적에 대비하여 북한산성을 축성하고서 숙종 41년(1715)년에 늘려 지어 136칸의 큰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8도의 절에 명을 내려 1년에 6차례 번갈아 의승을 뽑아서 산성내의 절에 주둔시켰다.


승군들이 주둔하였던 용암사, 노적사, 경흥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원각사, 국녕사, 서암사, 태고사, 진국사, 중흥사을 관리하였던 중요한 곳이었으나 현재는 1915년 홍수로 무너진 뒤 중건되지 못하여 주춧돌과 축대만 남아있다.

 

 

15.고양 독산 봉수대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93호 
지 정 일 2003.09.04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문봉동 산12번지 
시 대 고려시대


독산봉수는 고양시 일산구 문봉동과 사리현동, 지영동의 경계지점인 해발 133.4m의 나지막한 구릉 정상에 유지가 잘 보존되어 있다.


독산봉수의 설치시기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봉화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기 봉수제의 성립과 더불어 설치되었거나 혹은 그 이전으로 여겨진다. 독산봉수는 북쪽으로는 파주 성산→파주 대산, 동쪽으로는 모악→해포→안현 등으로 북쪽노선은 일정한 정형성을 유지한 반면, 동쪽노선은 때에 따라 변화가 심했다.


사방으로 주위가 잘 조망되며 서쪽으로는 고봉봉수를 바로 마주보고 있는 곳에 설치되었다. 원형의 석축 봉수대로 지형 여건을 고려하여 축조하였다.

 

 

16.멸절산 유적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95호 
지 정 일 2004.05.06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법곳동 740-22외3 
시 대 백제


멱절산은 고양시에서 최초로 발굴조사된 백제 한성도읍기 유적으로 경기도박물관이 2003년 유적의 범위와 성격파악을 위한 긴급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유구는 수혈주거지 8기, 수혈구덩이 2기, 구상유구 1기, 적석유구 5기, 근래에 조성된 수혈구덩이 9기, 민묘 5기 등이 확인되었고, 유물은 고배, 삼족기, 호, 시루, 장란형토기 등 백제토기 1000 여 점과 철촉, 철도자, 철부 등 철기 25점 등이 출토되었다.


확인된 유구 외에도 멱절산 유적 전체에 백제토기편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멱절산 전체에 유적이 형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한강 하류에 위치한 점과 각 층위별로 출토된 다량의 유물로 볼 때, 백제가 중국과 교류하는데 있어서 중계역할을 했던 장소로 추정된다.
 

 

17.일산읍 밤가시초가

 

종 목 경기도 민속자료 제8호

지 정 일 1991.10.19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일산구 일산동 350

시 대 조선시대

 

‘밤가시 초가’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집으로 정발산 북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름은 예전 이 마을에 많았던 밤나무를 주요 생활용품과 건물의 재료로 사용한 것에서 유래했으며 19세기 전반 이전 건축물로 추정한다.

 

문에 들어서면 안마당 가운데 지붕에 하늘 구멍을 뚫어 놓았고 그 아래 마당을 한단 낮추어 꾸미고 있다. 이는 비나 눈이 올 때 떨어지는 낙숫물이 다른 곳으로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안채는 안방·대청·건넌방·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당을 지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오른쪽이 안방, 왼쪽이 건넌방이다. 안방에서 ㄱ자로 꺾여 자리잡고 있는 부엌은 대문과 마주하고 있어 들여다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별도로 벽을 만들었다.

 

서민 가옥의 소박한 느낌을 주는 건축물로 조선 후기 지방 농가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18.고양향교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9호

지 정 일 1985.09.20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306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양향교는 조선 숙종(재위 1674∼1720)때 처음 지었으며, 이후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명륜당, 전사청, 외삼문은 1984년에 새로 만들었고, 그 외 건물들은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고 한다.

 

건물 배치는 교육 공간을 앞쪽에, 제사 공간을 뒤쪽에 둔 전학후묘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앞쪽에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으며,뒤쪽에는 대성전과 동무·서무, 전사청이 있다.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지붕은 옆면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전사청은 서무 뒤쪽에 자리하며 지금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을 교육시키고 교관이 머물던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19.행주서원지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1호 
지 정 일 1985.09.20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162-1 
시 대  조선시대


권율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권율(1537∼1599) 장군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임진왜란 때 활약한 명장이다. 특히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 전투에서는 1만명 미만의 군사로 3만의 왜군을 무찔렀다.


이 서원은 이곳에 장군을 모시는 건물이 없자 헌종 8년(1842)에 왕의 명령으로 세웠다.


서원에는 현재 강당만 남아 있는데, 앞면 5칸·옆면 1칸 반 규모이다. 서원 안에 있던 행주대첩비는 헌종 11년(1845)에 세운 것으로, 1970년 행주산성 내에 새로 지은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 옆으로 옮겨 놓았다.

  

 

20.월산대군사당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지 정 일 1989.12.29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427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제 9대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을 모신 사당이다.

 

월산대군은 덕종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형으로 성종 2년(1471)에 월산대군으로 봉해졌고 예종 즉위년인 1468년에 현록대부에 임명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성품은 침착 결백하고 산수를 좋아했으며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 시호는 효문이다.

 

처음 지은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숙종 19년(1693) 이전에 세운 것으로 보이며 지금 있는 건물은 정조 10년(1786)에 고쳐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201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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