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서울을 떠나 강화도 도장리에 터를 잡은 뒤 작가가 맞닥뜨린 것은 ‘문화 충돌’이라기보다 ‘생활의 발견’이다. 도시와 촌락 간의 생활 차이만 이겨내면 심신이 일용할 양식을 흙이 거저 줄 것 같은 ‘시골 팬터지’의 수명은 길지 않았다. 삽 하나와 낭만으로는 땅을 일구기 어렵고(‘삽 한 자루 달랑 들고’), 돼지는 스스로 자라지도, 저절로 팔리지도 않는다(‘지워져 버린 시’). 매인 곳이 없다는 것은 환희이자 두려움이지만 때마침 경쟁력이 없다면 뒤쳐지고 쓰러지는 나약한 오리 신세가 될 법도 하다(‘오리야, 농사꾼 오리야’).

하지만 ‘발견한 생활’도 곧 일상이 된다. 별빛이 조명이 되는 집마당에서 고즈넉한 시낭송회가 집들이 대신 펼쳐지고(‘기분 좋은 밤’), 한 해 땀이 절은 쌀이 묵으면 미련 없이 가래떡이 되어 온 동네 먹을거리가 된다(‘나누어 먹기’). 습관처럼 “쌀값 떨어지면 농사 그만 하라는 거지”라고 되뇌어도 이웃들 잔잔한 사랑은 가을벼처럼 무르익고 비로소 자신도 일부가 된다. 거름 위에 만발하는 채송화(‘길에서 스승을 만나다’)의 삶을 닮은 양 흐뭇해지는 것이다.

수채화풍이 농군의 따뜻한 시선을 잘 담았다. 특히 군데군데 사진첩처럼 몇 장의 풍경 그림에 이야기를 덧댄 구성(‘문방구의 하루’, ‘밤길’ 등)은 정중동의 시골을 맛깔스게 살려놓았다. 다만 자신의 이야기가 뼈대가 된 1권과 주변 이야기 중심의 2권 사이 그림체가 약간씩 엇갈린다. 1권에 눈이 익은 독자에게 다소 서두른 듯 거칠고 뭉툭한 필선이 많은 2권이 부담이 될 수도 있겠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런 와중에서 마음이 평온할 수는 없었지만, 될수록 학문적인 것 이외 문제들에는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나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한국사회에 관한 보다 정확한 파악을 위한 조사연구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까 하는 데 집중됐다. 그럴 무렵 서대문에 있는 적십자사병원 바로 옆 건물에 ‘사회과학연구도서관’이라는 기구가 설립되어 사회과학도에게 연구비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나는 이 연구도서관에 농촌사회 구조의 연구를 위한 연구계획서를 제출해 승인을 얻어냈다.

조사에 착수하기 전에 나는 얼마전 이화여자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설립한 고황경(高凰京) 이효재(李效再) 두 교수의 요청에 의해서 그분들이 계획한 한국 농촌가족에 관한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연구에는 서울대 사회학과의 이행연 교수와 젊은 사회학도인 김경동군이 조수로 참여했다. 이 조사는 전국적 규모의 조사로, 중부지방을 대표하는 군으로 천안군을 선택하여 이효재 교수가 이 지역의 현지조사를 지도했다.

그리고 호남의 조사지역인 담양군은 강해영 교수, 영남의 군위군은 내가 담당했다. 이 연구가 완결되기 전 나는 앞에서 말한 농촌사회구조 현지조사를 같은해 12월 착수하였다. 조사 지구는 경기도 광주군과 용인군에서 모두 6개 촌락을 선정하였다. 그중 3개 촌락은 지금의 성남시 남쪽에 위치한 곳이며, 후에 생긴 모란시장 동쪽 부근의 촌락들이었다. 또 하나의 지역은 지금의 분당에서 동남 방향에 위치한 촌락이었다.

내가 농촌사회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앞에서(6회분) 언급했지만, 50년대 말에 실시한 농촌가족과 사회구조에 관한 두가지 현지조사를 통해 관찰한 농촌에서는 이미 농지개혁이 실시되어 농민의 약 3분의 2가 자작농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농민들의 생활은 무척 가난했다.

◇1964년 농촌조사 활동에 참여한 동료들과 함께 기념촬영했다. 왼쪽에서 네번째가 필자.

이 조사를 한 지 11년 뒤, 그러니까 69년에 같은 6개 촌락에서 같은 내용의 조사표를 가지고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때는 이미 박정희 정권이 출범한 지 10년이 된 시기이며,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려고 할 무렵이었다. 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된 근대화 작업으로 농촌의 많은 인구가 도시로 흘러가는 동시에 비료 공급, 수리사업의 발전, 농사 지도 활성화 등으로 농촌은 점차 윤택해지기 시작했다. 또 도시로부터 편리한 공업제품들이 농촌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여러 측면에서 심화되기 시작했다.

제2차 농촌현지조사가 실시된 다음해 공화당 정권은 새마을사업을 단행했다. 새마을운동으로 시작한 이 독특한 한국적 지역개발사업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비단 외국의 개발도상국가뿐 아니라 선진국가로부터도 주목을 받았다.

다시 11년이 지난 80년에 나는 역시 같은 6개 촌락을 같은 조사표로 현지조사를 하였다. 그때는 이미 성남시에 편입된 3개 촌락은 서울시의 팽창으로, 그리고 성남시 자체 발전으로 농촌의 모습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약 10년 전 나는 50년대 말부터 거의 4반세기에 걸쳐 조사한 이 지역을 한번 돌아본 일이 있다. 그리고 작년 늦가을에 또 다시 이 지역을 둘러보았다. 이미 이때에는 성남지역은 말 할 것도 없고 또 하나의 지구인 광주군 오포면과 용인군 모현면이 접한 지역도 농촌의 모습을 크게 잃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