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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中1학년 숙제 거든요 제발 help도와주세요~!
dbsw**** 조회수 2,033 작성일2005.03.13
구로구에 있는 문화재 좀 알려주세요.

그리구 구로구에서 중학교를 나온 유명인도 알려주세요.

무조건 올려주시면 만점 올려드릴게요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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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y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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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및 인물

1. 문화유적


1) 함양여씨 묘역

구로구 고척동 산 6의 3호에 위치한 함양여씨 묘역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80호로 지정된 조선초기의 묘역이다. 총 넓이가 1,025㎡로 묘역 내 묘 2기, 묘비 1개, 상석 2개, 문무관석 4개가 있다. 묘지에 설치된 기단석과 묘비, 문무관석 등은 조선초기 묘지 양식 연구에 도움을 주는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문화재 관리는 함양여씨 종친회가 관리단체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1991년 12월 24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면서 관리단체인 함양여씨 종친회에서 정화사업을 벌인 바 있다.


2) 정선옹주 묘역

정선옹주 묘역은 구로구 궁동 54의2호에 위치하고 있다. 정선옹주(貞善翁主)는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대왕의 7녀로 안동권씨 권대임(權大任)과 결혼하여 지금의 구로구 궁동 67번지 일대에서 궁궐같은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현재 궁동이라고 하는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정선옹주가 시집을 간 안동권씨 집안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과 그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의 대공을 세운 도원수 권율(權慄)이 있다. 또 영의정을 지냈던 이항복(李恒福)은 권율의 사위로 역시 이 집안과 관련이 있다. 정선옹주의 남편인 권대임은 안동권씨라는 집안의 배경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글씨 또한 잘 써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여기에 선무공신의 칭호를 받고 예조판서를 지낸 권협(權협)의 손자이며 부인 또한 임금의 딸이라 그의 집은 가히 궁궐 못지 않았으며 때문에 궁동이라는 명칭이 유래된 것이다.

묘역에는 정선옹주와 그 남편 권대임의 묘를 비롯하여 여러 기의 안동권씨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흔히 풍수가에 의해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힌다. 궁동의 북쪽 끝 와룡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쪽으로 뻗어 내린 줄기가 좌청룡(左靑龍)을 이루고, 와룡산 서쪽으로는 궁동 서부를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우백호(右白虎)를 이룬다. 주산에서 좌우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한 가운데를 다시 짧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뻗었고, 그 끝에 저수지가 있다. 고추처럼 생긴 그 산줄기가 낮은 언덕을 이룬 곳이 궁동의 한 복판이다. 이것이 풍수지리설에서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 즉 금계포란형(金鷄包卵型)으로 찬탄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 고추 모양 언덕 끝 부분에 안동권씨 문중묘가 있으니, 누가 보아도 명당 중의 명당이다.

궁동 명당의 혈이 되는 이 권씨문중묘는 그 고추 끝 부분의 10m 폭에 약 150m 가량 길게 남북으로 뻗어 내린 언덕에 위로부터 아래까지 모두 8기의 무덤이 있다.

제일 위의 것이 권대임의 할아버지인 길창군(吉昌君) 충정공(忠貞公) 권협과 정경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의 무덤이다. 그 아래에 부마도위(駙馬都尉) 길성군(吉成君)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무덤이 있는데, 권협의 무덤보다 규모는 크지만 비석이 작고 비문도 간략하다. 권대임의 아래에 아버지인 길흥군(吉興君) 권신중과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무덤이 있다. 그 아래는 권대임의 아들 권진(권진)과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권대임과 아버지 권신중의 순서가 바뀌었음이 눈에 띤다. 이는 권대임이 왕의 부마라는 특례를 인정하여 부자간의 순서를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묘역 아래 저수지가 있는 언저리를 비석거리라고 하는데, 남쪽 끝에 권협의 신도비가 있고, 서북쪽 끝에도 새로 세운 비가 있다. 정선옹주 묘역 내에는 신도비 외에도 이같은 묘비 등이 다수 남아 있어 당시 묘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3) 주막거리 객사

구로구 오류2동 120번지 경인로변 동부제강과 동부제강 사원연수원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주막거리 객사는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까지 한양과 제물포를 왕래할 때 관원들이 쉬어가거나 또는 숙박을 하던 곳이다.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서울과 인천을 왕래하려면 그 중간이 되는 오류동에서 쉬어가거나 점심을 들기도 하고 바쁘지 않은 여행객은 숙박을 하고 가는 주막이 필요했다. 서울에서 인천간은 약 100리로 빨리 걸으면 하룻길이다. 개화기에 인천에서 서울로 사인교(四人橋)를 타고 오던 외국인 여행기에 보면 아침 일찍 출발하면 점심 때 오류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경인로는 폭이 1~2m밖에 되지 않아 수레로는 왕래할 수가 없고 말이나 가마를 탈 수밖에 없었다. 네명의 교군 하루 품삯은 30냥으로 여느 품삯의 10배나 되었는데, 좁은 길에서 가마를 메고 걷는다는 것은 여간 고된 노동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출발하기 전에 해장값으로 1냥 정도의 팁을 주지 않으면 점심 때까지 오류동에 대주지 않았으며, 오류동에서 반주값 1냥을 팁으로 주지 않으면 서울의 도성문이 닫히는 인정(人定) 때까지 대주지 않았다. 이 까닭에 오류동은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여행자들이 점심을 먹는 휴게소로 항상 붐볐고, 여기에서 노자를 많이 썼을 경우 "오류주모에게 간 씹혔구나"라는 말도 유행하였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임오군란(1882년)에 관여한 관계로 청나라 군대에 체포되어 천진(天津)의 보정부(保定府)에 연금되었다가 1886년(고종 22) 풀려나 인천을 통해 귀국하던 길에 이곳에서 쉬어갔다고 한다.

이 주막거리 객사에는 1930년대까지 일본인 고미네(高峰)가 살았는데, 고미네는 조선말의 일본인 첩자로 일제 때 동양척식회사 관계자로 알려져 있었다. 한때 이 집은 개성에 있던 전국의 무당본부를 옮겨왔다가 여론이 좋지 않자 서울로 이전해 가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조준기씨가 살았다. '주막거리 객사'는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안채와 행랑채 등의 부속건물이 있었는데, 최근에 건물 신축을 위해 철거되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4) 유순정(柳順汀)의 묘

구로구 오류동 안오류골 미래빌라 뒷산으로 이어지는 자락에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유순정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그가 죽은 후 중종은 그의 후손들에게 오류골, 온수골 일대와 부천시 여월동, 학동 일대에 이르는 30여 만평을 묘역으로 하사하였고, 후손들이 묘역 관리를 위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인물편 참조)



5) 노숭(盧嵩)의 묘

천왕골과 항동의 경계선이 되는 삼각산 줄기가 동쪽으로 향하여 뻗치는 산등성이 자락에 위치한다. 전에는 신도비만 있고 비석이 없었으므로, 누구의 묘인지도 모르고 다만 노정승묘라고 불러 왔지만, 그후 묘의 주인공이 노숭임이 밝혀졌다. 1979년 후손들이 비석과 석등 및 몇 개의 석물과 함께 부인 두 분의 묘를 노숭의 묘 앞으로 이장해 옴에 따라 3기(基)의 분묘가 앞뒤로 나란히 놓여 있게 되었다. 최근 다시 재실 및 각종 석물을 설치하는 등 대대적으로 정화작업을 벌였다. (인물편 참조)



6) 유진오 별장

궁동저수지 뒷편에는 현민(현민) 유진오(兪鎭午)의 소유 임야에 토막집이 한 채 있다. 일명 유진오 별장이라고 불리는 이 집은 1989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인해 대부분이 불타고 한쪽 벽만 남아 있다. 이 별장이 있는 옆길을 따라 약 2㎞ 더 가면 궁동약수터가 있다. 유진오 별장 못미쳐 삼거리에도 유진오 집이라는 별장 형태의 조그만 양옥이 있다. 붉은 벽돌로 건축한 이 집의 내부에는 페치카가 있어 마치 그림 속의 한 장면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유진오가 가끔씩 거주하며 글을 썼던 곳이라고 한다. 약수터쪽의 별장은 이따금 산책을 하며 기거하던 곳이라고 한다.



7) 봉수대 터

오류동과 개봉동과의 경계가 되는 천신(天神)마을 뒷산을 개웅산으로도 부르고 봉화대(烽火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조선시대 이 산에서 봉화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봉화란 밤에 불을 피워서 신호를 삼는 통신수단인데, 낮에는 불보다 연기를 내어 알리며 이러한 수(燧)를 합쳐 봉수(烽燧)라고 한다. 봉수는 국가의 중요한 통신제도로 국경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이나 변방에 알리는 동시에 일반국민에게 알려서 대응하도록 하는 군사적 목적에서 운영되었다.


8) 오류장(梧柳莊)

오류장은 오류역 남쪽 개웅산 기슭의 군부대 내에 있었다. 일제 때 이곳에서 온천수 보다 온도가 조금 낮은 온수가 나왔으므로 일본인이 요정을 짓자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이 이곳에서 자주 연회를 열었고, 그때마다 서울에서 인력거로 기생들을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오류장은 이광수의 소설에도 종종 등장한다.



구로의 중학교를 나온 사람은 모르겠구..
초/중/고 ㄷㅏ 합쳐서 해드릴게요..

우선 조갑경이 구로 초등학교를 나왔구요//
임성언이 영남중학교를 거쳐 영등포여고를 나왔구요
추자현이랑 논스톱4에서 최민용 동생으로 나온애가 구일고 나왔구여..
그 외는 모르겠어요.. 많은 도움이 되셧길..
+ 구로고가 한때 농고? 농구 잘하는곳이였데요
남고였었을때요, 공학된지 5년쯤 됬는데,
그땐 명문소리도 들었었는데 지금은,, 쿨럭,ㅋ
구로고 출신 유명한 농구선수도 있다네요~ 여기까지.ㅋㅋ

2005.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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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로구청 홈페이지.+ 내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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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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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2008.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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