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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계남면의 문화재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528 작성일2018.08.04

전북 장수군 계남면의 남아있는 문화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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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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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의 문화재)


1.화산사


종 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34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화산길 24-21 (화음리 136) 
시 대 조선시대


파은 박수기·눌재 박상·충암 김정·안재 박지견·사암 박정·육유정, 박지효 선생 등의 절의와 충정을 받들고 이를 후손에게 전하고자 세운 재실이다.


눌재 박상 선생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연산군 2년(1496)에 진사가 되었고, 1505년 전라도사를 지냈다. 중종 6년(1511)에는 담양부사가 되었으며, 1515년에는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1526년에는 문과중시에 장원하였으며 1529년에는 병으로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저서로는 『눌재집』이 있고 시호는 문간이다.


충암 김정 선생은 조선 전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중종 2년(1507)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1514년에는 순창군수가 되었다. 눌재 박상과 함께 중종이 왕후 신씨를 폐출한 처사가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김정 선생은 시문과 그림에 능하였으며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개혁정치를 펼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충암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이다.


1961년 세운 이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2.수열비


종 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40호

지 정 일 1984.04.01
소 재 지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화음리 935-4 
시 대 조선시대


수열평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조선시대 중기의 오씨 부인이라는 여인의 절개를 기리고 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장수지방에 침입하였던 왜적들이 집집마다 약탈을 하며 불을 지르기도 하면서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일이 잦았다. 화평 마을에 살고 있는 양사무의 부인 오씨부인은 아침에 들이닥친 왜적들에게 가슴을 잡히는 등 모욕을 당하게 되자, 자신의 가슴을 칼로 베어 그들의 얼굴에 뿌리면서 “짐승만도 못한 오랑캐들아! 젖이 욕심나거든 이것을 들고 네 나라로 돌아가라”며 크게 외쳤다. 부인의 위엄에 눌린 왜적들은 곧 달아나고, 피를 많이 흘린 부인은 그 자리에 쓰러져 운명하였다. 훗날 이러한 사연을 나라에 올려 아뢰니, 조정에서는 부인을 위한 비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비각안에 서 있는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구조로, 비몸의 윗변이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앞면에는 비의 이름을 길게 새기고, 뒷면에는 ‘수열평’이라 썼는데, 이 때부터 ‘화평’이라는 마을 이름도 ‘수열평’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비문은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우의 글씨이다. 


3.흥학당


종 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7호

지 정 일 1999.07.09
소 재 지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유천길 40-1 (화양리 97-2)
시 대 조선시대


지역 11개 성씨 대표가 모여 인재 양성을 위해 세운 서당으로, 숙종 43년(1717)에 세워 영조 31년(1755)과 고종 2년(1898)에 고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입덕문’이라는 현판이 걸린 출입문을 들어서면 흥학당이 있는데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ㅡ자형 건물이다.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방을 구성하여 세울 당시의 평면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지역 명문학당의 기능은 사라졌으나 이 지방 미풍양속의 맥을 이어오는 계남향약 발상지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또한 건물의 구조나 세부 기법에서도 광무 2년(1898) 고쳐 세울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전통적인 건축 기법을 엿볼 수 있다.


4.침령산성


종 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6호 
지 정 일 2000.12.29
소 재 지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침곡리 산73-2외 
시 대 삼국시대


이 산성은 백제말에 신라와의 전투를 위해 쌓은 전방기지로 추정되는 것으로서 오랜 세월이 흘러 성벽의 많은 부분이 붕괴된 상태이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이미 폐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산성은 두 봉우리와 그 중간부를 감싼 석성으로서 둘레는 500m 정도이다. 수구가 있는 동남쪽은 60m에 걸쳐 7.7m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으며, 드물게 수구 석벽에 암거까지 설치된 곳도 있다.


또한 남쪽 동·서 양단 모서리 부분에는 폭 4m 내외의 돌출된 대지가 설치되어 있어 치와 같은 시설로 추정되고 있다.

 


5.근수루


종 목  장수군 유형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2015.06.03
소 재 지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궁양리 산94-1 장안초등학교뒤
시 대  조선시대


근수루는 조선조 효종 9년(1658) 이 지방에 살고 있던 보성 오씨, 남원 양씨, 전주 박씨 가 자신들의 자녀교육을 위하여 창건한 것이라 한다. 처음에는 고백이골에 강당 4칸, 고직사 4칸, 정문 3칸을 신축하여 자녀들의 교육을 시작하였다.숙종 20년(1694) 이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남, 한, 송, 곽, 유, 권, 이 정, 황씨 등을 영입하여 새로운 계를 조직하고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조선조 말에는 다시 이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김씨와 최씨를 영입하였다. 1929년에는 개화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이 근수루 서당을 개편 신명의숙을 설립하였다


그 뒤 1936년 장안 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근수루의 건물은 모두 장안초등학교 교사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근수루에 소속되어 있던 토지는 이 때 장안초등학교의 운동장에 편입시켰다.현재 이 근수루는 1970년 장안초등학교의 교사 증축으로 말미암아 축소되어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정면 3칸 .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6.김남택 신도비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호덕리 757-3 원호덕입구마을
시 대  현대


김남택의 자는 성수, 호는 손재 본관은 함창이다. 그는 고려말 공민왕 19년(1370) 현 계남면 침령마을에서 태중대부 원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그는 조선조에 들어와 세종조에 예조판서를 역임하다 아우 남중과 함께 경상도 하동으로 은퇴하였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 세종 18년(1436) 죽었다. 이 신도비는 최근에 이르러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7.이동화ㆍ이정근부자 효자려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가곡리 48 곡리마을
시 대  조선시대


이동화는 성주인으로 고은 지활의 후예이자 전명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자로 세상의 칭송이 자자했다. 또한 학식과 덕망을 겸했다. 조정에서는 이 효자에게 증직으로 "증사헌부감찰가선대부예조참판동질의금부사"의 벼슬을 내려 효성을 칭찬했다. 이정근은 이동화의 아들로 부모를 지성으로 1891년(고종 28년) 명정의 특전이 내려 계남면 곡리마을에 정문을 세우고 부자효행을 칭송했다.


 


8.서산정씨지려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침곡리 1438-24 부근 
시 대  조선시대


1643년(인조21년) 계미 6월 8일에 남편이(서문 배) 하인을 데리고 들에 나간 사이에 흉한이 침입해서 정씨의 손목을 잡으니 손목을 끊어 버리고 식음을 전폐한지 7일만에 목 매어 자살하였다.(1643. 6. 15) 이는 고 열부 왕응의처 이씨 와 다를 게 없는데 죽기까지 했으니 그 열에 감복하여 동년 8월1일 정려를 건립 세상에 본을 삼도록 하였다 


 


9.풍욕정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호덕리 647-6

시 대  현대


장계,계남면 유지 15명이 친목을 도모하고 시와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1962년 건립하였다. 풍욕정이란 현판글씨는 강암 송성용(1913~1999)선생이 썼다.



10.벽남정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장수군 계남면 화음리 장안산로 63 (화음리 산29)
시 대  현대


1985년에 세운 누각으로서 사방으로 돌아가면 난간이 있다. 정자 안에는 11개의 현판이 있는데 이 글들은 대개 을축년과 병인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



11.진양유씨 효열비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호덕리 1174

시 대  현대


부인은 진주유씨이며 수산후 학생 정석의 처이다. 자라나면서 재질이 과인하였고 자태가 아름답고 강상예절이 뚜렷하였다. 출가하여서 시부모의 환우에 머리를 베여서 팔고, 남의 고용살이를 하여 부양하였고, 남편이 병이나서 위태로워지자 단지하여 선혈을 수혈, 며칠간 생명을 연장시켰다. 삼강의 예행을 다하였기 때문에 후일에 본군 유생들이 입비하였다.



12.충주박씨 기행비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화양리 1013-85(계남 중학교 뒤 솔밭)

시 대  현대


충주 박씨 기석의 딸로 연안 송인갑에게 출가하여 일제때 남편이 화태(지금 사할린)로 끌려가는 바람에 홀로 자녀들을 키우던 중 1956년 홍수때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외아들을 구하고 타계하였다. 아들이 모친을 추모하는 비를 세웠다.



13.김해김씨 효열비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화양리 630-3(중방)

시 대  조선시대


부인은 임진왜란 당시 귀화한 증 병조판서 모하당 김충선 장군의 9대손 김세원의 딸로 장성하여 문절공 양사도의 후예 우재규식에게 출가 90대의 시부에게 효도를 다하였다. 1891년 남편이 병에 걸려 위독하자 자신의 허벅지를 도려 회복케 하였다. 나라에서는 부인을 포상하고 후손들은 비석을 세웠다.



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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