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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양정동을 토박이말로 뭐라고 하나요??
nabi**** 조회수 2,741 작성일2006.05.17

중1 생활국어 숙제가 나왔는데요 ;;

 

우리가 사는 동네 (양정동)을 토박이 말로 조사해 오라고 하네요

 

그런데 잘 모르겠네요.....;;

 

아시는 분은 가르쳐 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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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하구

 다대포 패총,괴정동 패총 등의 유적으로 미루어 선사시대부터 주거가 시작되었으며 낙동강의 하구에서부터 취락이 형성되어 발전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동래부 사천면 하단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조선후기에는 사하면으로 바뀌었다. 일제말 1942년 부산부의 사하출장소가 설치되고 해방후 구제실시로 서구사하출장소로 바귀었고 1975년 시 직할 출장소로 승격하였다.
 1983년 서구에서 분구되어 사하구로 되었고 이때 북구 대저 2동 일부인 을숙도와 일응도가 편입되었다.

1)괴정동

 사람이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아온 곳이다. 구덕산이 '용호머리'이고 낙동강 쪽으로 뻗어내린 괴정 뒷산 줄기를 아랫머리라 부른다. 구덕산의 강안에 뻗어 말맥이 병풍처럼 둘러져서 세찬 북풍과 낙동강을 불어 내려온 강풍을 막아주고 동쪽에는 시약산이 솟고 남쪽에는 금치산이 솟아 그 줄기가 서쪽으로 나지막한 구릉을 이루어 해풍을 막아주는 방파제 구실을 한다. 그리고 서쪽에는 두송반도 줄기가 강풍을 막아주고 '배오개'(배고개,즉 밝아오는고개)를 넘으면 낙동강이다. '아랫머리'의 서단을 돌면 바로 하낟에 이르며 유유히 흐르는 강류가 눈앞에 전개되고 끝없는 갈밭 사이로 삼각주가 발달한 낙동강 하구의 김해델타에 접하게 된다.
 괴정동은 동래부지에 나오는 목장리로 괴정리였다 이 무렵 목장은 군마를 길러 나라에 헌상하던 곳인데 부산에서는 영도에 규모가 큰 목장이 있었고 낙동강 지역에는 괴정,하단,감천,신평,장림,다대 등 여러 곳에 있었다. 특히 다대진 관하의 목장으로는 괴정동의 목장이 가장 규모가 컸던지 괴정동을 목장리라고 부르게 되었고 희망촌 일대를 마꼴이라 부르게 되었다
 괴정동은 다대첨사의 폭정이 심하여 마을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을 정도가 되자 동민들이 팔정자 나무 밑에  모여 이를 성토하고 항거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 팔정나무는 지금 부산시 시보호수로 지정된 회화나무로 여기에서 이름지어졌다.

2)하단동

 하단의 옛 마을 이름은 평림리라고 불린 일이 있으며 하단리라고 불리기도 했다. 동래부지에 의하면 동래군 사천면을 다시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는데 상단은 사상지역이고 하단은 사하지역이다. 그런데 당리,괴정,감천,구평,신평,장림,다 대를 모두 사천명,하단이라 하였는데 이중 한 마을을 또 하단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선 구덕산이 용호머리이고 거기서 강을 향해 괴정뒷산줄기를 이루어 뻗은 곳이 아래머리이니 이 끝이 아래치로 불리워졌다는 설이 있다. 또 낙동강 하류 맨 아래쪽이라는 뜻에서 하단이란 이름이 생겼다고도 하며 또 다른 설로는 사천면 하단 중에서 인구가 가장 번창하는 대표적인 지역이라 사천면 하단의 지명이 이곳에 붙게 되었다고도 한다.


2.서구

   암남동  패총등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주거가 시작되어 조선시대에는 동래부 사천면 하단의 구초량리란 이름이었고 1910년 한일합방으로 부산부에 편입됨에 따라 일본인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해방 후에는 1951년 구제 실시를 전제로 서부 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57년 서구로 발족하였다.

1)대신동

  대신동의 옛 지명은 '닥밭골' 또는 '고분도리'이다. 이는 닥나무가 많이 나는 골이라는 뜻으로 고분도리란 고리짝을 만드는 들이란 뜻으로 볼 수 있다. 닥나무나 버드나무 그리고 고리짝들 등을 생각해보면 이 일대에 부족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대신동은 일본인들이 보수천의 호안공사를 하고 일본인들이 대거 밀려오므로 생긴 새로운 시가지로 이를 한새벌이라 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한새벌의 '한'은 크다는 뜻이 있으므로 큰 대(大)로  새는 새롭다는 뜻에서 새로운 신(新)으로 벌은 넓은 땅이란 뜻이 므로 마을 동(洞)으로 바꿔 쓰여지게 된 것이다.

2)부용동

  부민동에서 분리되어 중도정이라 하다가 개칭된 것이다.
  부용동이 도시가 되기 이전의 지형을 보면 시약산에서 근원한 계류가 서대신동 중앙지대를 흘러 현 부민초등학교 뒤쪽을 돌아 보수천으로 들어가는 시냇물이 있으며 그 작은 지류들이 흐르기 때문에 이 일대는 마치 시냇물에 둘러싸인 섬처럼 보이는 지대였다. 그래서 한복판에 박힌 섬과 같은 곳이라 하여 중도정이라 한 것이다.
  이 중도정이 1947년 중,서구의 동명을 개정할 때 부용동으로 바뀌어졌다. 이는 부민동에서 분리 되었기 때문에 부민의 '부'라는 글자와 부를 상징하는 부용화가 겹쳐 가장 화려하고 뜻이 좋은 동명으로 지어졌던 것이다. 

 

3. 중구

    중구는 1910년 종전의 동래부에서 부산부로 속하게 되었으며 일본인의 전관 거류지로 발전하였다. 중구라는 명칭은 1951년 구제 실시를 전제로 6개의 출장소가 설치될 때 부산의 중심부에 위치하므로 중부 출장소라고 하였는데 1957년 구제 실시에 따라 중구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대청동

   대청동은 남일 초등학교 자리에 개항전 왜관의 부대건물로 연향대청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 일대를 대청동이라고 불러오고 있다.즉 1901년 9월 1일부터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연향대청을 보통 연대청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조선시대 때에 대마도에서 오는 일본 사신에게 연향을 베풀어주는 곳이었다.

2)영주동

   영주동의 옛이름은 임소라 하였는데 이 임소의 유래는 다음에서 유래한다. 개항 후 외교 통상 업무량이 늘어나 1890 년 (고종 27년)부터 이에 관한 사무처리의 전담부서로 감리서가 설치되어 감리서의 장을 감리, 또는 감령이라 불렀는 데 그 지위는 첨사보 다 높았으며 그 관아 시설이 현재의 봉래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감리서가 있었다는 것과 관원 이 근무하는 직소라는데서 임소라 불렀다.
  그리고 영선 고개는 영선산에 있어 불려진 이름이다. 영선산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영선이 아니고 용선이라는 설이다. 용선이라는 설은 이 산은 왜관 안의 일본인과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이 고개의 동광문이 있어 상방이 선물을 보낼 때는 감리에게 허가를 받아 역관이 이곳까지 와서 역관의 입회 아래 용인 선물한 다는 데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하는 설이다.
  또 다른 한 설은 영선산이 두 개의 봉우리 되어 양산 또는 쌍악이라고 하는데 숙종 때 두모포 왜관을 초량 왜관으로 이설할 때 초량 왜관을 건축하고 수리하는재목이 이 고개를 통해 운반되고 또 일부의 부재는 이 산에서 공급되었기 때문에 영선산이라는 것이다.
  초량 왜관이 건립되고 우리나라의 관리인 훈도 별차의 근무처가 바로 감리서 자리였는데 이들은 글을 아는자들로 자기들이 거처하고 근무하는 일대를 신선이 사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라 이름하고 자기들은 선인에 비유하여 영선산이라 하였다. 

 

4.동구

  배산임해의 지형으로 평지가 적어 조선 이전의 거주 활동은 전하지 않는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동평면의 일부로 한일합방때 부산부로 편입되어 경부선철도의 가설로 지세를 넓혀갔다. 조선 중기에는 수정동 지역에 왜관이 설치되어 운영되었으며 중구지역으로 이전되자 두모포,개운포,등의 수군 진관이 이설되어 국방의 요새가 되기도 했다.

1)고 관

  오늘날 수정동 시장일대에서 초량동에 이르는 일대를 고관 또는 구관이라고 부른다. 구관또는 고관은 구왜관,고왜관 의 약칭으로 이곳에 과거 두모포 왜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2)좌천동

  좌천이라는 이름은 동래부지에 나오는좌자천이라는 이름의 약칭이다. 좌자천은 가야산 및 감재에서 발하여 지금의 수정동 중앙을 흘러 부산진 동쪽을 거쳐 바다로 들어가는 작은 개천을 말한다.

 

5.영도구
 영도구는 동삼동  패총을 비롯 아치섬, 청학동,영선동 등의 패총으로 보아 부산 지방에서 가장 먼저 주거가 시작되었던 곳이다. 영도라는 말은 절영도가 줄어서 된 말인데 통일 신라 시대부터 이 곳은 말이 유명하여 이곳 말이 달리면 너무나 빨라 그림자조차 볼 수 없다 하여 절영도라 칭하였다한다. 1881년에 절영도 진이 설치되었는데 이 후 영도란 명칭이 사용되었다. 개항 이전 영도는 극소수사람만이 살았으나 개항이후 어항으로 발전, 도시화 되었다.

1)청학동

 선사시대의 조개무지가 남아 있으며 옛부터 주거지였음이 확실시되나 임진왜란 후 영도의 공도책에 따라 인적이 끊
어졌다. 그 이후 어장 개발에 따라 여러 해안지명이 생기고 이후 '조내기'라는 지명도 생겼다. 조내기란 이 곳의 바닷
가는 낮고 개펄이 많아 썰물 때는 물이 군데군데 고여있는 곳이 많아 붙여졌다고 한다. 한편 조엄이 일본에서 고구마
를 가져다 여기서 처음 재배했다고 해서 조내기라고하는 설도 있다. 이 조내기를 임익준이 신선이 타는 학의 형상이
라 해서 청학동이라 고쳤다. 

2)신선동

 언제때의 묘당인지 모르나 세칭 하씨당이라는 당집이 있었다. 이는 영도 초등학교 전신인 사립 옥성학교 시절까지 수
림 사이에 있었으나 학교부지 확장에 따라 훼손되었다.
 당의 주인이 여신선인 까닭에 1885년 첨사 임익준이 영도의 지명을 정할 때 새로운 신선이 사는곳이라는 뜻으로 신
선이라 지었다고 한다. 


6.부산진구

  부산진구는 조선시대에 동래구의 동평면 일부와 서면 일부 지역이다. 이 명칭은 임진왜란 전후에 부산진성이 있었던 것이 동기가 되어 1936년에 출장소가 설치될 때 부산진출장소라 하였으며 이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여 부산진구가 되었다.

1)부전동

 조선시대에는 동래구 동평면 부현리에 속했으며 이 부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하나는 부다대현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당감동에서 부암로타리 밑 고대리로 난 고개라는 설이며 마지막 하나는 오늘날 하마정에 서 양정 송상현 동상까지의 마비현의 별칭이라는 설이다.
  조선시대의 동래부는 오늘의 당감,부암,가야,범천,좌천,초량,수정등을 포함하는 동평면과 사직,거제,초읍,양정,범전
전포,만덕등을 포함하는 서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중 부현고개 아래의 범전,전포와 연접하는 곳을 부전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이며 1936년 시구명 정비에 따라 공식적으로 부전동이란 이름이 붙여지고 이 일대를 통상 서면이라 부르고 있다. 

 

  범전이란 명칭은 동평동 금용산에서 발원하는 범천가의 평지라는 뜻으로 풀이되며 이 명칭이 오래전부터 사용된 것 처럼 보이며 패총의 흔적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주거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7.동래구

  동래라 함은 내산(萊山)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의 약칭이다. 동래구는 삼한때 변진 독로국의 유지이며 한때 거칠산국의 치소로서 신라에 병합되면서 거칠산군으로 되었다. 신라 경덕왕때 지방 행정 제도를 개혁할 때 동래군으로 개칭되면 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수민동

 옛부터 동래부사가 집무를 보던 동헌이 위치한 관계로 동래의 중심지역이 되어 왔다. 현재에도 이동은 중앙로,충렬로 등에 이어지는 교통상 요지이며 여러 행정기관들이 밀집되어 있기도 하다. 수민동이란 이름은 1957년 수안동과 낙민 동이 병합되면서 생긴 것이다. 수안동은 동래 토박이들이 수안(首安), 수안(水安)으로 쓰는 걸 보아 수안(首安)이란 것은 동헌이 있어 가장 으뜸되는 관아 란 뜻이고 수안(水安)은 지금도 땅 밑을 조금만 파 내려감녀 물이 나오는 등 물이 흔해 칭해진 것으로 풀이된다.
 이 지역은 1960년대만 하더라도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물구덩이로 미나리꽝이거나 연밭이었으나 매축되어 아파트가 조성되었다.  

2)명륜동

 옛부터 내낫들이라 불렀는데 이는 옛날 동래부사가 신임 및 전임시 이곳에서 이속 군졸과 육방관속들이 환송,환영식 을 했는데 그 행렬들이 자못 장엄하여 큰 나들이라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동래부 읍내면의 신향교동 객당동, 범어동이라 칭했으며 1906년에 3개부락을 합하여 교동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해방후 명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향교가 있는 동네는 통상 교동이거나 명륜동으로 불리는데 명륜동은 향교의 중심건물인 명륜당의 이름을 따서 부 르는 것이다
명륜동은 교리,삼성대,시실마을등의 오래도니 마을명이 있었으나 시가지 발전에 따라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우며 이중 삼성대는 동래의 토성인 안,송,옥 등 세 성의 시조가 살았던 곳이란 전설이 전해진다.
 관내에 여러 교육시설이 많고 행정기관등도 밀집해 있다.. 


8. 연제구
 

1)거제동

 조선시대 서면에 속하며 동리명을 거벌리라 하였다. 거벌(居伐)은 거벌(巨伐)로 표기되어 큰 벌을 뜻하는 원야를 의미한다. 이 원야는 오늘날 거제동과 연산동 일대에 펼쳐있는 넓은 들을 말하는 것이나 오늘날 발전으로 인해 찾아보 기 힘들다. 한일합방후 동래천에 제방을 쌓고 상습침수지역이던 일대를 수해로부터 방지한 뒤 큰 제방이 있는 마을이 란 뜻으로 옛이름과 비슷하게 거제리란 이름을 지어 동래읍에 소속시켰다.
 한편 거제리에 있었던 옛 전차정류소 지점과 그 인근을 홰바지라 불렀다. 홰바지는 해받이라고도 불리는데 동래부에 서 부산진으로 나들이갔다 돌아오면 하루해가 걸 리는 지점이라는 설과 횃불을 들고 마중가는 지점이라는 두가지 설이 있다.  부산진장은 옛날 5일장으로 열렸는데 매우 성시를 이루어 영남에서 대구장 다음가는 큰 시장이었다. 동래에서 부산진장에 가서 물품을 매매하고나면 해가 지므로 동래나 그 인근 촌락에 사는 사람들은 짐을 짜 짊어지고 집으로 오는데 모두 보행이어서 가족들이 횃불을 들고 이 곳까지 마중을 나왔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2)연산동

 조선시대에는 원래 거벌리에 속하였는데 연산동은 당시 농작물이 되지 않는 저습지대로 수련이 만발하였고 홍수기가 되면 동래천이 범람하여 물바다가 되기 일쑤였다. 일제가 조선 병합후 동래천에 제방을 쌓고 거벌리라는 이름을 없애고 이 땅을 분할하여 서쪽은 거제동, 동쪽은 연산동이라 새 동리명을 부여하였다.
 연산동이란 지명은 낮은 늪지대에 수련이 많고 배산 및 황령산 쪽은 산지로 되어 있어 연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과 이 동네 중심산은 황령산 지맥인 금련산에서 연산을 따왔다는 설로 구분된다.
 연산동 고분군의 유적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이 입증되며 배산성지 또한 삼한사회의 성축으로 비정되고 있다.  

  

9.남구

조선시대 동래부의 남촌에 속했다가 일제초에 동래군 서하면, 용주면으로 되었다가 곧 남면으로 되었다.

1)대연동

 옛부터 속칭 못골이라 했다. 이는 오래전부터 못이 있었기 때문에 이같이 부른 것이며 큰 못을 의미하는 오늘날의 대연이란 지명은 못골이란 명칭을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만들어낸 이름이다.
 이 못은 왜정때까지 남아 있어 부산부사원고 편자인 도꼬오는 이 못의 축조양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신라시대 이전 못으로 추정하였다. 동래부읍지는 이 못을 둘레가 3백 73척이고 물 깊이는 6척 5촌이라 하여 못이 깊고 넓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오늘날 대연동에 살고 있는 사라들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 이주해 온 사람들로써 대체로 10대를 넘기지 않고 있다. 죽산 박씨를 비롯한 가장 오래된 집안은 8-10대로 300년을 넘기지 못한 실정이다. 임진왜란 후 새로 이주해온 주민들 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옛마을 이름을 모르고 오래된 못이 있기 때문에 못골이라 부르다가 한문식으로 동명을 표기할 때 대연이라 불리어지게 된 것이다.  

2)용호동

 옛 이름은 분개였다. 조선시대 용호동은 인가라고는 거의 없었고 소금굽는 동이만 여기저기 있어 동이가 있는 갯가라 는 뜻에서 분개라 불려졌다. 염전은 중앙에 찰흙으로 1평정도 구덩이를 파놓은 것이 있는데 이 구덩이를 서실이라 하 며 서실 속에는 깨끗하고 결고운 모래를 넣어 두었는데 이를 펴내어 염전에 얿게 서리질하여 둔 다음 해수를 끌어들이 면 햇빛에 물기는 증발하고 염분도 모래에 엉켜 보얗게 간이 된다. 이 간이 된 모래를 다시 서실에 넣고 해수를 길어와 부으면 염도가 아주 짙은 소금물이 서실밖으로 넘쳐나는데 이를 작은 개울을 통하여 가마에 받아 끊인 것이 소금이다. 이 서실은 한자로 표시할 때 분이라 불렀다. 분개에는 당시 거득분,신분,동분,강개분,보리분,광이분 등 여섯 개의 분이 있었다고 한다.
 분개가 용호동으로 개칭된 것은 일제시 일인들이 이 곳 염전을 수탈하여 통감부에서 이 곳에 시험제염 용호 출장소를 설치한 때를 전후하여서이다. 

 

10. 수영구

 

1)수영동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다. 수영이란 이름은 수군절도사영의 약칭으로 관아명이 동리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된 것이다. 경상좌수영은 동국여지승람이나 문헌비고를 고찰해볼 때 조선 태종이전에는 부산 감만포에 있었으나 태종때 이를 울산 태현면의 개운포로 이전하였고 이후 다시 동래 해운포는 오늘의 부산 좌수영의 구성지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그러나 당시 사천의 홍수로 말미암아 수로가 매몰되어 병선의 출입과 정박이 불편하여 인조 13년 에 다시 감만이포로 옯겼으나 효종 3년에 다시 오늘의 좌수영에 옮겨 고종 32년까지 약 250년간 존치하였다. 수영에는 성이 쌓여져 이 성 내부만 수영동이라 하였다가 점차 확대되었다. 1975년 남구 발족으로 이에 속하다가 1995년에 수영구에 편입되었다.

2)망미동

 동래부지상에 남촌의 북문외리 서부리에 해당된다. 이 일대는 광의의 수영지역에 포함되나 수영동의 설치에 따라 배산주변은 망미동으로 호칭되었다. 망미동이란 지명은 배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폴이되고 있다.
 배산은 동래부지에 척산 또는 영산이라고 불리며 산위에서 신선 김겸효가 살았다는 겸효대가 있다고 전한다. 배산의 연산동 기슭에는 성황당이 있어 그 신주는 배미산 산신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현재의 주민들도 이 산을 배미산 또는 잘미산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현재의 수영동과 망미동 사이 산을 망산이라 하는데 망미동은 망산의 망자와 배미산의 미자가 합쳐서 된 명칭으로 풀이된다.  


출처 : http://user.chollian.net/~yj971019/mainframe.htm

에서 퍼왔습니다.

200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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