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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 대해서[내공최대한!!]
gara**** 조회수 26,322 작성일2003.07.25
오스트레일리아[호주]의 독특한 풍습과 호주의 음식 , 호주와 우리나라와의 관계 , 호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4-6가지 정도]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알려주시는분께 제가 걸 수 있는 내공 최대한을 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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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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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호주에서는 향후 이민정책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호주 이민성이 인구현황에 관련된 자료를 발표하였다. 발표된 자료를 보면, 지난 10여년간 호주의 인구증가율은 연간 1.5% 수준으로 OECD 국가들 중 비교적 높은 수준이며, 이는 매년 평균 8만여명 정도의 이민자를 포함하여 연간 17만명 정도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연간 인구증가율의 거의 절반이 이민자들의 유입에 의한 것이며, 현재 호주 인구 4명당 한 명은 해외에서 출생한 사람들이다. 반면, 자연적인 인구증가율은 지난 20년 동안 지속적인 감소 추세에 있다. 자연 인구증가율은 곧 출산율을 의미하는 것으로, 호주는 지난 1950년대에 성인 여성 일인당 3.6명의 자녀를 출산하였으나, 경제적인 풍요가 시작되는 1960년대부터는 출산율이 감소하기 시작하여 1990년대에는 성인 여성 일인당 출산율이 0.02명으로 제로 출산율에 가깝게 떨어졌다가 지난 2000년부터 1.74명으로 회복세에 돌입하였다. 한편, 해외로부터 유입되는 이민자는 1980년대 초반에 연간 9만명 수준이었으나, 존 하워드(John Howard)의 자유-국민당 연립정부가 집권하기 시작한 1996년부터는 8만명 수준에 머물고 있다.

지난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노동당의 밥 호크(Bob Hawke)수상과 후임 폴 키팅(Paul Keating)수상 집권 시절, 호주 인구증가의 50% 이상을 이민자들이 차지하였으며, 이 사이에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이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지난 1970년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던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가 기승을 부리면서 부활한 전례가 있었다. 폴린 핸슨(Pauline Hanson)이라는 여성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국회 기조연설을 통해 인종차별주의를 표방하는 발언을 하면서 호주 국민 가운데 유색인종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던 극우주의자들을 자극해 연방정부가 이민정책을 전면 쇄신하여 향후 아시아계 유색인들의 이민을 절대 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커다란 정치·사회적 이슈가 된 바 있다.

현재 호주 인구 구성을 볼 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구의 고령화와 생산력 있는 젊은 노동력의 급격한 감소이다. 통계적으로 보면, 1999년 현재 호주인구의 평균 연령은 35세이나, 오는 2008년에는 고령인구가 12%, 노동가능 인구가 68%인 것을 정점으로 2051년에는 평균 연령이 45세를 넘어서면서 노동가능 인구가 60%로 하락함과 동시에 고령인구가 24%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현 정부는 과거 노동당이 가족 재결합 이민 쿼터를 증가시켜 이민자 대부분이 고령 부모를 동반하는 사례가 급증하였다고 비난하면서, 앞으로 이민정책에 있어서 고급기술로 숙달된 젊은 층의 흡수를 최우선 과제로 꼽고 있다. 기술이민을 통한 해외 고급 두뇌의 유입은 곧 호주의 앞날이 달려 있을 정도로 심각하기에, 이민성은 그 동안 수 차례의 발표를 통해 기술이민 카테고리를 연차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이민성은 최근 2001~2002년 이민쿼터를 93,000명으로 확정 발표하면서, 고급 기술 보유자를 흡수하기 위한 기술이민 쿼터를 46%에 이르는 53,500명으로 배정하였다. 이 같은 기술이민 쿼터는 지난 10년 사이 가장 많이 증가된 것이다. 또한, 2001년 7월에 개정된 이민법 조항에 의하면, 해외 유학생들을 호주 대학 졸업 후 호주에 머무르면서 이민신청을 할 수 있도록 개정하여, 많은 해외 유학생들이 기술이민 카테고리를 통해 이민신청이 쇄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민성은 2001년 7월 이후 호주에서 대학을 졸업한 해외 유학생들이 이민 신청하는 경우가 매월 5,000여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중 90%가 실제로 영주권을 부여받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아시아 및 제3국 출신으로 말미암아 영주권 심사에서 차별 받는 일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호주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호주에서 수학중인 해외 유학생은 2000~2001년에 86,000명이었으며, 이 수치는 1994~1995년의 40,000명 수준에 비해 배가 증가한 셈이다.

현재 호주는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와 더불어 고급기술자 이민유치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출산율이 저조한 영국과 독일 등 일부 유럽 국가들도 해외 고급두뇌 이민 유치를 위한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실제로 지난 10~20년 사이 남아공화국에서는 많은 수가 해외 이민을 떠났으며,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많은 수의 홍콩 고급두뇌가 캐나다를 이민의 목적지로 선택한 경우가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현재 호주는 매년 수만명의 대학 졸업생들이 영국 및 미국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아 고급두뇌의 막대한 해외유출이 발생하고 있으며, 그 공간을 채우기 위해 해외 유학생들을 호주의 새로운 경제주체 인력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호주는 전통적으로 인권 옹호를 위한 난민수용정책을 펼쳐왔으나, 최근 들어 호주 내 여론형성 및 정치적 목적에 위해 난민수용이 전과 같지 않은 상황에서 난민 이민자보다는 기술이민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에 더욱 치중하고 있는 실정이다. 호주 정부는 1천명의 난민을 수용하는데 3천만달러의 경비를 지불해야 하지만, 같은 숫자의 기술이민자들을 받아들이면 이들의 활발한 경제활동으로 인해 5천만달러의 조세수입을 거둘 수 있다는 분석이다. 호주정부가 연간 53,500명에 달하는 기술이민쿼터를 설정한 것은 지난 1996년부터 2000년까지 호주가 받아들인 전체 기술이민자수가 96,525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비추어 볼 때 급격하게 증가한 수치임에 틀림없다. 이와 같이 호주의 이민정책이 난민수용을 외면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면서 외부로부터 이민정책이 인종차별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불법 입국자나 밀입국자에 대해서도 강력한 규제방침을 고수할 방침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직도 호주 국민 중 상당수가 과거에 비해 호주 인구가 너무 많아 더 이상 해외 이민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으며 불필요하게 해외 이민자 특히 유색 인종들을 받아들인다면 호주의 전반적인 삶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와 같이 이민자 쿼터를 증가시킨다면 오는 2050년에는 3천8백만명, 2100년에는 6천8백만명으로 인구가 증가하게되며, 이 같은 증가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향후 이민자격을 완화하게 된다면 수준이 낮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현재 필립 러독(Philip Ruddock) 이민성 장관이 밝힌 향후 호주 정부의 이민정책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을 고려하여 책정되고 있다. 첫째, 젊고 고도의 기술력을 가진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호주의 국제경쟁력을 제고한다. 둘째, 노동력 감소폭이 전체 인구감소에 비해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노동력 확충을 위해 호주 국민들의 노동 참여를 적극 유도한다. 셋째, 출산율 하락에 따른 심각성을 인식하고 출산율 저하의 원인 규명 등 체계적인 연구와 대책마련이 요구된다. 넷째, 인구증가에 따른 환경훼손 등 환경문제를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지난 1975년부터 1983년 사이 호주 수상을 지낸 말콤 프레이저(Malcolm Fraser)는 “지리적으로 호주 북쪽에는 인구 대국들이 위치하고 있다. 만약 우리 인구가 2천5백만 정도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인구로는 영토를 방어할 능력도 국제 경쟁력을 갖출 조건도 없다”라고 단호히 경고한 바 있다. 사실상 호주는 한반도 면적의 35배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어 해외 기업은 물론 국내 기업들에게조차 충분한 소비력을 갖춘 시장이 아니며, 국제사회에서도 크게 대우받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이러한 점들을 상기시킨다면 향후 반세기 또는 100년 후를 내다본 적극적인 이민정책 수립이 필요하다 하겠다.

2003.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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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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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태즈메이니아섬 등을 국토로 하는 영국연방(英國聯邦)에 속하는 나라.

위치 :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면적 : 768만 6850㎢
인구 : 1935만 8000명(2001)
인구밀도 : 2.5명/㎢(2001)
수도 : 캔버라
정체 : 입헌군주제
공용어 : 영어
통화 : 호주달러
환율 : 20.03호주달러=1달러(2001.9)
1인당 국민총생산 : 2만 950달러(1999)

면적은 768만 6850㎢, 인구는 1935만 8000명(2001)이다. 인구밀도는 2.5명/㎢(2001)이다. 정식명칭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Commonwealth of Australia)이다. 수도는 캔버라이고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북쪽은 티모르해(海), 동쪽은 산호해·태즈먼해, 남쪽과 서쪽은 인도양으로 둘러싸여 있다

1. 자연
1) 지형·기후
오스트레일리아섬은 대륙으로 불리지만 대륙으로서는 세계 최소이며 그 지형은 다른 어떤 대륙보다도 변화가 적고 단조롭다. 둘레 약 2만km에 이르는 해안선도 굴곡이 적어 오랜 기간 안정상태를 유지해온 대륙임을 알 수 있다. 대륙의 동쪽 해상에는 브리즈번 근처에서 북상하여 뉴기니섬 부근에까지 이르는(약 2,000km) 세계 최대의 산호초,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大堡礁]가 뻗어 있다. 대륙 주변의 대륙붕은 육지에서320~2,400km에 걸쳐 있어, 북쪽 아라푸라해(海)의 수심은 약 30m이고 남쪽 태즈메이니아섬을 격하는 배스 해협은 수심 70m이다.

육지는 전체적으로 기복이 없이 평탄하여, 세계 전 육지의 평균 해발고도가 약 767m인 데 반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평균 해발고도는 330m에 미달, 해발고도 700m 이상의 지역은 전체의 1/12 이하이다. 지형적으로는 서부대고원(西部大高原), 중동부저지(中東部低地), 동부고지(東部高地)의 셋으로 나뉜다.
① 서부대고원:대륙의 약 40%를 차지하는 평균 해발고도 330m의 암석사막지대이다.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州)와 노던테리토리의 절반,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와 퀸즐랜드주의 일부에 해당하며 고생대(古生代) 이전의 편암·편마암·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서부의 해머즐리산맥·오프탈미아산맥과 중부의 맥도널산맥·머스그레이브산맥과의 사이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과우지대로, 극도로 건조하다. 그 대부분은 풀과 관목으로 덮여 고정되어 있으며 이동하는 사구(砂丘)는 거의 없다. 하천은 간헐성(間歇性) 하천으로 염호가 많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이 지역에서 광물자원, 특히 방대한 철광석과 보크사이트가 발견되었다.

② 중동부저지:대륙의 중앙부에서 동쪽으로 펼쳐진 이 저지대의 평균 해발고도는 150m 이하이다. 이 지대는 예전에는 해저(海底)가 되었던 곳으로 백악기(白堊紀)의 어패류 화석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의 에어호(湖)와 같이 해면 아래 약 10m의 염호도 있다. 중동부저지의 북부는 열대권에 속하며 강수량은 풍부하나 목축 외에는 중요한 산업이 없다. 중부∼남부 지역은 기후적으로는 건조하나 자분정(自噴井)이 많으며 중부의 대찬정 분지(大鑽井盆地)는 세계 최대의 자분정 분지로서 양의 사육이 성하다. 서쪽의 에어호 분지는 강수량이 연간 100mm 이하로 극히 적어 일부에서 양을 사육할 뿐, 거의 개발되지 않았다. 남부의 머리강(江) 유역에서는 대규모의 양치기 외에 밀·과일·벼 등이 재배되고 있다. 이들 생산물의 집산지·반출항으로서 애들레이드시(市)가 발전되어 있다.

③ 동부고지:요크곶 반도에서부터 대륙의 동부를 북에서 남으로 대분수산맥(大分水山脈:그레이트디바이딩레인지)이 뻗어 있다. 그러나 이 산맥은 고지의 연속일 뿐, 높은 산은 없다. 고원 위는 넓은 평탄면을 이루어 농·목축업에 이용된다. 퀸즐랜드주의 바틀프리르산(1,612m)을 제외하면 북부와 남부에는 해발고도l,500m 이상의 산이 거의 없다. 남부의 오스트레일리아 알프스산맥은 7·8월의 적설기에 겨울 스포츠의 최적지가 된다. 이 산맥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최고봉인 코지어스코산(2,234m)이 있다. 그 남쪽에는 빅토리아주(州)의 보공산(1,985m)이 있고, 산맥이 일단 배스 해협으로 침몰하였다가 태즈메이니아주의 오사산(1,617m)에 이어진다. 코지어스코산의 북쪽에서 발원하는 스노위·머럼비지·머리 등 하천을 다목적으로 개발하는 스노위 산지계획이 1949년에 착공되어 총 5,200㎢의 범위에 걸쳐 수력발전소 7개소, 대규모 댐 16개소, 터널 145km, 수로(水路) 80km 등이 1974년에 완성되었다. 대분수산맥의 동쪽은 기름진 평야로서, 너비 50∼400km의 장대한 연안평야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경제의 심장부가 되어 있다. 대분수산맥에서 평야지역에 걸쳐서 석탄이 개발되어 외국으로 수출된다.

2) 생물상
오스트레일리아는 백악기 말엽에 아시아 대륙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이 대륙에 원시적 생물상이 보존되어 있다. 식생은 식물분포구의 하나인 남대(南帶)에 해당하여특색있는 식물상을 보이며, 수목으로는 유칼리과(科)와 아카시아과의 것이 대부분이다. 유칼리과는 높이 1m 미만의 카리와 90m 이상에 달하는 마운팅 애시 등 500종 이상 되며, 용재(用材) 및 펄프 원료로 이용된다. 아카시아과는 600종 이상 되며 경제적 이용가치는 거의 없지만 독특한 향기로 해서 오스트레일리아를 상징하고있다.

동물은 동물분포구의 하나인 오스트레일리아구(區)로서 세계적으로 특색있는 동물상을 나타내는데, 오스트레일리아 고유의 동물은 약 400종류이다. 유대류(有袋類)로는 캥거루·코알라·태즈메이니아데빌·주머니여우 등이 있고, 단공류(單孔類)로는 오리너구리·고슴도치가 있고 파충류로는 목도리도마뱀 등이 있다.

담수어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살아 있는 화석’인 네오케라토투스(肺魚)이다. 조류는 700종, 타조와 흡사한 에뮤·화식조(火食鳥) 외에 하프새·웃는쿠카부라 등을볼 수 있다. 매·독수리 같은 맹금류(猛禽類)도 있다. 이 대륙에는 큰 맹수가 없기 때문에 목축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2. 주민

오스트레일리아의 주민은 80%가 앵글로색슨계(系)이며 유럽 및 아시아계가 18%이다. 원주민은 백인이 들어올 당시에는 30만 명이었는데 백인이 정착한 이후 수가 감소되어 원주민은 전체인구의 2%이다. 백호주의(白濠主義) 결과로 유색인종이 적다. 언어도 영어이긴 하나 런던의 시정(市井) 말투가 섞여 있어서 알아듣기 힘들다. 종교도그리스도교(敎)가 73%를 차지하며 구체적으로는 성공회가 23.9%, 로마가톨릭교가 26.1%, 연합회가 7.6%이고 그밖에 무교가 25%, 기타 종교가 2%이다. 1870년 초기까지는 백호주의정책으로 유럽계 이주민만 받아들였기 때문에 사회적 인구증가 및 자연증가도크지 않았다. 그러나 1973년 백호주의 폐지로 인하여 이민이 자유로워 인구가 증가하였다.

3. 역사
1) 식민 이전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 인도양의 남쪽에 있는 ‘미지의 대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럽인이 실제로 이 대륙에 들어온 것은 17세기부터이다. 1606년 네덜란드의 두이프겐(Duyfken)호가 대륙 북부의 카펀테리아만(灣)에 내항(來航)한 것이 최초로, 그로부터 가끔 네덜란드의 배가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게 되었다. 17세기를 통하여 네덜란드인은 이 대륙의 북안(北岸)·서안 및 태즈메이니아섬 등의 지역을 묶어 ‘신(新)홀란드(Nieu Holland)라고 불렀다.

영국인으로서 이 대륙에 최초로(1688) 온 사람은 영국의 항해가 W.댐피어였고, 지금까지 유럽인이 가보지 않은 동해안 전체를 자세히 조사하고 문명인이 살 수 있는땅임을 밝혀 영국 영유(領有)에의 길을 연 사람은 제임스 쿡이었다. 그는 1777년 뉴질랜드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남동단에 이르러 시드니쪽을 북상하여 보터니만(灣)에 상륙, 다시 북상하여 요크곶 부근의 한섬에 영국 국기를 게양하고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동부의 영유를 선언하였다. 뉴사우스웨일스라는 명칭은 이때 생겼다.

2) 식민

1776년 미국독립혁명이 발발하여 그때까지 미국으로 보내고 있던 죄수를 처리하지 못하게 된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새로운 유형식민지로 이용하게 되었다. 1788년 1월 11척의 영국 선단(船團)이 1,030명(그중 유형수는 726명)을 태우고 보터니만(灣)에 도착하였고, 개발의 근거지로서 시드니가 건설되었다. 1993년에는 최초의자유이민 11명이 도착하였다.

1813년 시드니 서쪽 블루산맥 너머에 광활하고기름진 들판이 발견되었다. 그해부터 양모의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목축업이 시작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 발전의 제l기가 시작되었다. 1830년대에는 호바트·브리즈번·멜버른·애들레이드 등에 새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에스파냐 원산인 메리노종(種)의 양이 도입되고, 개량되어 1807년에는 양모가 처음으로 런던에 수출되었다. 1810년에는뉴사우스웨일스주(州0의 양 사육수가 늘었다.

이민과 자연증가로 인구도 늘어났다. 자유이민이 증가함에 따라 유형을 중지하라는 요구가 높아져서 1840년에는 태즈메이니아섬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를 제외하고는 유형이 중지되었다. 1851년에는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서부에서, 또 빅토리아주에서, 다시 1862년에는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에서도 금광이 발견되어 세계 각지에서 이민이 쇄도하였다.

제2기의 대륙 개발은 이 금광에 의하여 촉진되었고, 금광 채굴자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밀의재배 및 기타 농업이 발달하였다. 그후 이 나라의 농업은 영국 본국에 대한 중요한 식량 공급원이 되었으며, 낙농과 더불어 육류가공·냉동업도 발달하였다. 1880년대부터백호주의정책이 제창되기 시작하였고, 1888년에는 중국인 이민의 제한이, 1896년에는모든 유색인종의 배척이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3) 주권 확립기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각 식민지는 영국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식민지 상호간의 연락도 원활하지 못하였으므로 자치권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았고, 1823년 이래 입법원(立法院)의 설치가 각 식민지에서 차례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1840~50년대에는 권한이 더욱 확대되었다.

1855년에는 3권분립 ·양원제 ·책임내각제를 중심으로 하는 뉴사우스웨일스주의 헌법이 영국 본국의 인정을 받았고, 이어서 다른 각 주가 같은 내용의 헌법을 제정하여 주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방 ·이민 ·주(州)상호관세 등 각 주 공통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기관이 필요하였다.

4) 연방의 성립
오스트레일리아는 1893년 이래 각 주 총리회의(總理會議)가 개최되면서 각 주를 통일하는 연방을 설립하려는 기운이 성숙, 1900년에 연방헌법이 제정되었고, 1901년 l월 l일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연방이 발족되었다.

연방헌법에 따라 연방의 수도가 잠정적으로 멜버른으로 정해졌으나 1911년에 수도지역(首都地域:Australia Capital Territory)이 결정되었고, 그 중심에 해당하는지역을 1913년에 캔버라로 명명하였다. 1922년에 최초의 연방의회가 열렸다.


4. 정치
1) 연방의 권한

오스트레일리아는 지방분권제가 발달하여 연방정부, 주정부(6개주 및 2개 특별구역), 지방정부(약 700개)간 권한이 분산되어 있다. 연방정부는 외교·통상무역·국방·징세(관세·물품세·소득세)·우정(우편·전신·전화)·통신·은행업무·TV·라디오·고용·소득 및 법인세·이민 및 세관·여권·연금·항공 등의 권한을 보유하며,주정부와 공동으로, 과세·이민·검역·국세조사·통계·저작권 등의 권한을 행사한다. 각 주정부는 보건·교육·도로·철도·재판·경찰·농정·임정(林政)·자동차등록·산림·소방·야생동물 보호 등을 관할한다.



2) 연방의 입법
연방의회는 상 ·하 양원제이다. 하원은 124개의 연방선거구(인구 비례)에서 한 사람씩 선출된 의원으로 이루어지며 의원의 임기는 3년이다. 내각은 영국식 의회주의에 입각하여 하원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단일정당 또는 정당연합에 의하여 구성되며 그 정당의 총재가 총리가 된다.

주요정당은 자유당 ·노동당 ·농민당 등의 3개당이고 의석이 없는 정당은 공산당을 비롯하여 6개당이 있다. 1990년 2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자유 ·국민 보수야당연합을 근소한 차로 누르고 노동당이 1983년 이래 4차 연속집권에 성공하였다. 상원은 의석수 64, 임기 6년(3년마다 반수를 개선)으로 하원의 지나친 활동을 견제하는 임무를 가진다.

영국연방의 국민으로서 일정한 기간 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한 18세 이상의 남녀는 연방의회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가진다. 무기명투표의 방법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최초로 채택된 것이며, 여성 참정권은 뉴질랜드에 이어서 세계에서 2번째로 실시되었다(정치활동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가정 생활에서도 여성의 발언권은 크다). 각 주 역시 양원제 의회를 가지고 있다(퀸즐랜드주의 상원은 폐지되었다).


3) 엽방의 행정

오스트레일리아의 각부 장관은 총독이 주재하는 행정평의회의 멤버가 되며 이평의회가 법적으로는 최고 행정기관이다. 관행으로서 비공식적으로 내각이 구성된다.국무회의에서는 총리가 의장을 맡으며, 12명의 각내(閣內) 장관(Cabinet Minister)으로 구성된다. 각외(閣外) 장관(Outer Minister)은 소관업무와 관련하여 초청될 경우에만 국무회의에 참석한다. 국무회의는 비공개이다.

총리는 헌법상 기관은 아니나 관례적으로 하원 다수당에서 선출하며 총독이 임명한다. 1996년 3월 실시된 총선에서 승리한 자유당의 존 윈스턴 하워드(John Winston Howard)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정부의 부(部)·청(廳) 외에 약 50개의 관청에 준하는 법인(法人)이 있는데, 연방은행·연방과학산업연구청(통칭 CSIRO)·오스트레일리아방송위원회·트랜스 오스트레일리아항공회사 등이다.

4) 사법

오스트레일리아의 연방최고재판소는 멜버른에 있다. 정년 70세의 대법원장과 6명의 대법원 판사로 구성되는데, 내각의 권고에 따라 총독이 임명한다. 연방의 사법기관으로는 이밖에도 연방법원·파산(破産)재판소·산업재판소가 있다. 각주에는 주최고재판소·민사재판소·형사재판소 외에 아동재판소나 산업계의 분쟁을 해결하는 조정재판소·중재재판소 등 독특한 제도가 있다. 선거소송법원은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5) 외교
제2차 세계대전 당시까지의 오스트레일리아의 외교는 영국정부를 통하여 행하여졌고 런던에는 고등판무관(高等辦務官)이 파견되어 있었다. 1940년부터는 직접 국제외교에뛰어들었다. 1976년 l월 현재 41개국에 대사를, 18개국의 영국연방 제국에 고등판무관을 파견하고 있고, 68개국의 외교 대표가 오스트레일리아에 파견되어 있다.

동남아시아의 안정과 번영은 이 나라의 중대 관심사이며 1954년에는 미국이 제창한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에 가맹하였다. 미국 및 뉴질랜드와는 앤저스(ANZUS) 방위협정이 체결되었다. 유엔 가맹국으로 자주 안전보장이사회 ·경제사회이사회의 이사국(理事國)으로 뽑혀 왔고, 유엔신탁통치이사회의 멤버이기도 하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나 유엔의 지역기구인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 : 1974년에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 ESCAP로 개칭)의 창설에도 공헌하였고, 1963년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콜롬보 계획의 가입국으로서 아시아 각국에 경제기술협력을 제공, 50∼74년에 총액 3억 오스트레일리아 달러를 지출하였다.

영국의 EC가입, 동남아시아의 정정(政情)의 변화 등은 오스트레일리아로 하여금 외교정책의 중점을 아시아쪽에 두게 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로서는 과거에 ‘극동(far east)’이었던 나라들이 지금은 ‘근북(近北:near north)’으로 바뀌었고오스트레일리아 국민 스스로가 ‘백색 아시아인(white Asian)’이라고 칭하기에 이르렀다.

6) 군사

오스트레일리아의 국방정책은 영토보전과 공산주의 세력의 남하 저지를 목표로 한다. 아시아의 반공국가들과 긴밀한 연락 및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영국·미국·뉴질랜드 및 유엔과 제휴하여 집단안전보장체제를 취하여 SEATO(Southeast Asia TreatyOrganization:동남아시아 조약기구)·ANZUS 동맹(미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3국 안전보장조약) 등에 가입하고 있다. 6·25전쟁 때는 한국에, 베트남전쟁 때는 베트남에 육군·공군을 파견하였다.

현재 말레이시아에 있는 영국연방 전략예비군에영국·뉴질랜드와 협동하여 포병부대·공군·해군을 파견하고 있다. 1990년 9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응징하기 위해 다국적군에 가담하였고, 1992년 말 소말리아에도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파병하였다. 1999년 9월 동티모르 독립으로 인한 내전에도 참전하였다. 국방비는 약 138억 호주 달러로 국가 예산의 약 7%(2000~2001년 예산)이며국내총생산의 1.8%를 차지한다. 병역은 지원제이며 2000년 2월 현재 군사력은 정규군이 5만 1050명으로 육군 2만 4290명, 해군 1만 2807명, 공군 1만 3953명이다.

5. 경제
1) 광물자원

과거에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제개발은 낙농의 도입과 19세기 후반의 금광개발에 의하여 촉진되었으나 새로운 발전은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종래에 개발된 금·납·아연 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보크사이트·점결탄(粘結炭)·철광석·구리·니켈·망간·석유·천연가스·우라늄 등의 자원이 방대하게 부존(賦存)되었음이 밝혀져 개발이 추진되기에 이르렀는데, 종래 농·목축업 위주의 오스트레일리아 경제에 광업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현재 오스트레일리아는 세계 최대의 알루미늄·석탄의 수출국이며, 그밖에 철광석·금·우라늄·구리·아연·원유·천연가스·니켈 등도세계적 수준의 생산·수출국이다.

광물자원 중에서도 보크사이트·철광석·원료탄의 발견 및 개발은 특히 주목되고, 보크사이트는 1955년 이래 웨이파(케이프요크반도)·고브(노던테리토리)·달링 산맥(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등 각지에서 유망한 광상이 잇달아 발견되었다(총 매장량 55억t). 이들 광상의 개발과 공장 건설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국내자본뿐만 아니라 미국·영국·캐나다·프랑스·스위스 등의 외국자본도 투입되어 있으며, 종래 알루미늄의 수입국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는 1964년부터 수출국으로 전환하였다. 철광석은 들백산맥(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얌피사운드(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이미 양질의 광석이 발견되어 이용되고 있었는데, 1963년 이후대규모 개발이 진전되어 해마다 증가한다.

석탄자원은 퀸즐랜드와 뉴사우스웨일스의 2주에 적어도 2000억t의 매장량이 확인되어 있고 그중 절반 가량이 채산(採算)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탄은 철광석 다음으로 생산량·수출량이 2위를 차지한다. 서부의 철광석과 동부의 석탄으로 외화수입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각종광물자원의 탐사도 증가되었다. 총생산량의 절반을 뉴사우스웨일스에서 생산한다.

구리의 주생산지는 퀸즐랜드의 마운트아이자와 태즈메이니아의 마운트라이엘이다. 마운트아이자의 생산량은 전체의 65%를 차지한다. 석유는 1963년에 브리즈번의 서쪽300km 지점인 무니에서 유전이 발견되어 원유 생산이 개시되었는데 현재 정유능력의 68%를 국산 원유로 충당한다. 최대 유전은 빅토리아 연안 배스해협의 깁슬랜드 대륙붕의 해저유전으로 채굴 가능한 원유 매장량 2억 7559만㎥ 중 2억 3135만㎥가 이 해협에 있다.

천연가스는 1954년에 퀸즐랜드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현재 각지의 가스전(田)에서 멜버른·브리즈번·애들레이드·퍼스·시드니 등 각 주도(州都)에 5,600km 길이의 송유관으로 공급된다. 이밖에 주석·니켈·망간·우라늄 등의 광물자원도풍부하다. 1999년 현재 광업 및 제조업은 국내총생산에서 16.6%, 전체 취업인구에서 13.4%를 차지한다.

2) 농목축업

오스트레일리아의 1차 산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털이다. 1976년의 경우 농목(農牧) 생산액의 13%가 양모였다. 전세계 양털 생산량의 1/3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생산된다. 국토의 약 66%가 농목지로 되어 있는데 그중 90%가 방목지(放牧地)이며, 농경지와 집약목지(集約牧地)는 8%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물이 부족한 것이 큰 원인이다.

국민총생산 중에서 농목축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7∼8%이나 이는 총수출의 50%를 기록하여, 광산물과 공업제품이 증가하였음에도 외화획득원으로서의 농목축업 비중은 크다. 곡물 중에서 중요한 것은 밀이다. 밀은 주로 남회귀선 이남, 강우량이 적은(연간 250∼600mm) 지역에서 경작되고 있으며, 총생산의 50% 이상이 인도·일본·이집트·칠레·중국 등으로 수출된다. 사탕수수는 퀸즐랜드의 해안평야에서 재배되며, 조당(粗糖) 생산의 3/4이 캐나다·미국·동남아시아 등지로 수출되고 있고, 그밖에 목화나 벼도 생산된다.
농산물은 1999~2000 회계연도의 총수출에서 973억 호주 달러로 26%를 차지하였다.

3) 산림자원
오스트레일리아의 삼림면적은 국토의 약 6%이며, 활엽수인 유칼리종(種)의 수목이많다. 오늘날의 벌채량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생산가능 삼림자원의 25%이다. 1997년 11월부터 각지에서 산불이 발생하여 주민이 대피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4) 수산업

수산업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주요산업이며 어획지역은 세계 최대규모이다. 일본, 홍콩, 타이완, 중국, 싱가포르 등 아시아지역에 대한 주요 수산물 수출국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인은 대체로 해산물을 즐기지 않으나, 소라고둥·새우·게·다랑어 등이 풍부하며 어획량도 매년 증가한다. 특히 굴의 양식이 활발하며, 특히 세계에서 가장 큰천연전복 생산지로서 연간 약 5,100톤을 생산한다.

5) 제조업

오스트레일리아 경제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크다. 특히 과거 20년간의 공업 발전은 괄목할 만한 것이며,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변화해왔다. 제조공업확대의 중심은 기계·자동차·화학·건축자재 등이다. 그중 기계·자동차·화학·건축이 전체의 29%를 차지한다.

철강생산의 공장은 뉴사우스웨일스의 포트켐블라와 뉴캐슬,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의 와이알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의 퀴나나 등에 있다. 조선(造船)은 와이알라·뉴캐슬·브리즈번의 3대 조선소가 있다. 1948년 이래 자동차 생산 증가도 두드러진다. 미국·영국·유럽의 회사들이 투자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디자인의 자동차를 생산한다. 화학공업이나 펄프공업·석유화학의 발전 등으로 외국인의 투자가 늘어나고 있다. 1999년 현재 광업 및 제조업은 국내총생산에서 16.6%, 전체 취업인구에서 13.4%를 차지한다.

6) 연료동력

오스트레일리아의 각주는 독자적으로 전력개발을 추진하고 있으나 공통적인 것은 석탄을 연료로 하는 화력발전이다. 화력발전이 전력 생산의 89.85%를 차지하며, 수력발전은 8.35%이고 수자원이 풍부한 태즈메이니아와 뉴사우스웨일스 등에서 행하여진다. 전력소비는 공장의 증가, 가전기기(家電機器)의 보급, 농촌의 전화(電化) 등으로급격히 증가하였고, 일반소비부분의 전력사용량이 늘어났다. 1998년 현재 전력생산은1863억 8700만kWh, 전력소비는 1733억 4000만kWh이다.

7) 무역

20세기 초기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수출의 70%는 영국본국을 상대로 하였다. 1967년 이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수출품의 중요 수입국으로 일본이 등장하였다. 공업생산품의 최대 수출상대국은 뉴질랜드이다. 수입상대국에서도 수출의 경우와 비슷한 변화가 초래되었고 그 변화는 수출의 경우보다도 뚜렷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영국으로부터의 수입이 수입 총액의 40∼50%를 차지하였으나 1975∼1976년에는 23%로 저하하였다. 이에 대신하여 미국·일본·독일로부터 수입도 하였다. 다른 EC(European Community:유럽공동체) 국가와 캐나다로부터의 수입도 늘어나고 있다. 이런 변화는 국내산업의발전과 다각적인 무역대응책에 기인한다. 1999~2000년 회계연도의 수출은 972억 6200만 호주 달러, 수입은 1102억 3400만 호주 달러이며, 주요 수출품은 석탄, 돈, 원유,철강석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승용차, 원유, 통신기기, 컴퓨터 등이다. 주요 수출국은 일본, 미국, 중국이고 주요 수입국은 미국, 일본, 중국이다.

8) 교통통신

오스트레일리아는 적은 인구로 광대한 땅을 개발해야 하므로 교통이 발달하여멀리 떨어진 중심도시(각주의 주도는 각기 600~5,000km나 떨어져 있다) 사이의 연락을 위해 특히 항공이 발달하였다. 1999년 현재 공항 409개가 있다. 교통체계는 항공로가 24만km, 도로가 91만 3000km, 국유철도가 3만 3819km, 내륙수로가 8,368km에 달한다. 서해안의 퍼스와 동해안의 시드니·브리즈번·멜버른 사이는 표준궤도(標準軌道)로접속되었고, 이 철도망과 연결하기 위하여 애들레이드로부터의 철도건설도 착수되었다. 식민지시대부터 우편·전신·전화는 철도와 마찬가지로 국영으로 되어 있다.

6. 사회
1) 인구·이민

오스트레일리아는 주민의 대부분이 연안지대, 특히 남동부에 편재하는 여러 도시에 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집단이주한 유럽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2000년 현재 인구증가율은 1.02%, 출생률은 1,000명당 13.08명, 사망률은 7.12명, 영아사망률은 5.04명이고 15세 이하 인구는 21%이다. 평균수명은 79.75세로 남자는 76.9세,여자는 82.74세이다.

1901년 백호주의정책을 고수해오다가 1973년 이를 폐지하였다. 아시아계 이민이 급증하자 경계심이 고조되어 1991년 투자이민을 제한하고, 자영업 기술이민을 촉진하기로 결정하였다. 호주 정부는 매년 경제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민자수를 결정하는데, 2000/2001 회계연도에는 7만 6000명의 이민자를 받아들이기로 하여 1980년대 말의 14만 명에 비해 상당히 감소하였다.

2) 사회보장

오스트레일리아는 사회보장제도가 발달되었고 근대적 복지국가의 표본이 되어있다. 1909년부터 국민복지를 위한 정부역할이 증대하여 고령자연금·장애연금 및 산업수당제도를 도입하였다. 1984년에는 국민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였다. 현재 출산수당·육아수당·실업자급부금·질병급부·과부(寡婦)연금·부양가족을 거느린 모친에의급부 등 각종 수당이 있다.

건강보험제나 신체장애자에 대한 보호제도가 있다. 남자는 65세, 여자는 60세 이상이 되면 노령연금을 받을 수 있다. 정부는 교회나 복지단체에 대해서도 보조금을 교부한다. 연방 및 주정부의 주택정책도 추진되어 자택소유자가 전체의 70%이다. 무료의무교육제도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처음으로 실시되었으며 기간은 초등·중등과정 10년이다. 대학을 제외한 공립 교육과정(12년)은 무상으로 실시된다. 대학의 재정은 연방·주의 보조금과 민간의 보조금·기부금으로 충당되고 각종 장학금도 많다.

언론은 존 페어팩스(John Fairfax), 뉴스사(News Limited), 오스트레일리아연합프레스(Australian Consolidated Press) 등의 그룹이 주도하고 있으며, 그밖에 비영어사용 인구를 위한 소수민족 신문 및 라디오, TV가 있다.주요 일간지로는 《오스트레일리안 The Australian》, 《오스트레일리안 파이낸셜 리뷰 The Australian Financial Review》, 《데일리 커머셜 리뷰 The Daily CommercialNews(80,000부)》가 있고 여러 도시에서 700여 종의 신문이 발행된다.

7. 문화

오스트레일리아는 기본적으로는 다민족·다문화사회(multicultural society)를 지향하나, 예술은 오랫동안 유럽의 전통에 기초해왔으며 부분적으로는 환경, 역사,원주민의 문화 및 이웃나라들과의 관계도 영향을 끼쳤다. 연방 및 주정부와 방송협회등에서 음악·미술·문학 등에 각종 상금이나 보조금·장려금을 주며 국내 예술가의양성에 힘쓰고 있다. 화가인 러셀 드리스데일, 시드니 놀란, 아서 보이드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원주민예술은 정부의 권장에 힘입어 그 위치를 굳히고 있다. 1896년 이래 큰 인기를 누리던 영화사업은 잠시 침체되었다가 1969년 이후 연방정부의 지원으로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6개주의 주도와 캔버라, 태즈메이니아의 론세스턴에는 식물·동물·광물·고고학·인류학의 자료를 수집한 박물관이 있다. 공립 도서관·미술관·동식물원 등이 각지에 설치되어 이용된다. 캔버라 서쪽 교외에 있는 남반구 최대의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 부속천문대, 우메라의 우주개발연구소, 1926년에 설립된 연방과학산업연구기관(CSIRO) 등이 있다.

8. 과학기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1976년 텔레콤 오스트레일리아가 설립되어 국내 통신을담당하게 되었으며, 198년 위성통신을 담당하는 오샛이 설립되었다. 1987년 텔레콤 오스트레일리아는 이동 전화 서비스인 모빌넷을 운영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통신시장은 텔스트라, 옵투스, AAP텔레콤뮤니케이션이 시장을 거의 장악하고 있다. 통신 사업을 주관하는 통신예술부(DCA)는 멀티미디어, 위성, 방송, 영화 등의 분야에 대해 정부에 정책자문과 지원을 하고 있고, 1997년 7월 통신자유화 이후 12개 서비스 제공업자가 면허를 취득하였다.

1992년까지는 국내 통신을 담당하는 회사인 오스트레일리아 텔레콤과 국제통신을 담당하는 해외 전기통신사가 있었으나 1992년에 두 회사가 통합되어 오스트레일리안 앤 오버씨 텔레콤뮤니케이션사(AOTC)가 탄생하였고, 1993년 텔스트라 OTC 오스트레일리아로 개칭하였다가 1995년 텔스트라사로 결정하였다. 옵투스 콤뮤니케이션은 1991년에 설립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 제2의 통신사업자이다.

텔스트라사는 2000년까지 교환망을 100% 디지털화할 계획을 진행중이다. 셀룰러전화 서비스는 텔스트라, 옵투스, 보다폰에 3개 업체가 제공하고 있으며 1998년 현재529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다. 인터넷 서비스는 텔레스트라 멀티미디어사가 빅폰드홈과 빅폰드 비즈니스라는 이름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1999년 현재 인터넷 서비스제공 사업자는 709개사가 있다. 1998년 6월 현재 약 20만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다.

1998년에 제정된 법령으로 디지털 방송 도입이 본격화되었고, 2008년까지 기존의 아날로그 방송을 계속할 예정이다. 방송사는 전국방송을 실시하는 국영방송사인 오스트레일리안 브로드캐스팅사(ABC) 외에 4개 방송사가 있고, 지역방송사로는 1968년 설립된 채널 4를 비롯해 75개사가 있다. CATV방송사는 앙코르사 외에 9개사가 있다. 위성방송은 캘럭시사가 8개 채널을 독점 방송하고 있고, 아시아샛을 통해 일반가구는 스타 TV를 시청할 수 있다. 라디오방송사는 국영 ABC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281개(국영 133, 상업 148)가 있다.

9. 대한관계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는 1963년 5월에 국교를 수립하였다. 북한은 1974년 노동당정부 시절에 오스트레일리아와 수교하였다가 1975년 10월에 공관을 철수하였으며2000년 5월 8일 양국관계를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는 1965년에 무역협정(1975년 개정)을, 1971년에 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1992년 8월에는 한·호(濠) 형사사법공조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두 나라는 혐의자 수사, 압수수색 등에 공조할 수 있게 되었다. 1999년 9월에는 과학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1982년 5월 총리 프레이저, 1984년 2월 총리 호크, 1993년 6월 총리 키팅, 2000년 5월 총리 존 하워드가 방한하였고 한국에서는 1994년 대통령 김영삼, 1999년대통령 김대중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였다.

2000년 현재 대한(對韓) 수입은 26억 600만 달러, 대한 수출은 59억 5900만 달러이다. 주요수출품은 광산물, 농축산물 등 1차산품 등이며 수입품은 자동차, 전자제품, 통신기기, 타이어, 석유화학제품 등이다. 2000년 6월 현재 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은 약 2만 900명, 체류자는 약 2만 900명이다.

200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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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태즈메이니아섬 등을 국토로 하는 영국연방(英國聯邦)에 속하는 나라.

위치 :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면적 : 768만 6850㎢
인구 : 1935만 8000명(2001)
인구밀도 : 2.5명/㎢(2001)
수도 : 캔버라
정체 : 입헌군주제
공용어 : 영어
통화 : 호주달러
환율 : 20.03호주달러=1달러(2001.9)
1인당 국민총생산 : 2만 950달러(1999)


면적은 768만 6850㎢, 인구는 1935만 8000명(2001)이다. 인구밀도는 2.5명/㎢(2001)이다. 정식명칭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Commonwealth of Australia)이다. 수도는 캔버라이고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북쪽은 티모르해(海), 동쪽은 산호해·태즈먼해, 남쪽과 서쪽은 인도양으로 둘러싸여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기본적으로는 다민족·다문화사회(multicultural society)를 지향하나, 예술은 오랫동안 유럽의 전통에 기초해왔으며 부분적으로는 환경, 역사,원주민의 문화 및 이웃나라들과의 관계도 영향을 끼쳤다. 연방 및 주정부와 방송협회등에서 음악·미술·문학 등에 각종 상금이나 보조금·장려금을 주며 국내 예술가의양성에 힘쓰고 있다. 화가인 러셀 드리스데일, 시드니 놀란, 아서 보이드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원주민예술은 정부의 권장에 힘입어 그 위치를 굳히고 있다. 1896년 이래 큰 인기를 누리던 영화사업은 잠시 침체되었다가 1969년 이후 연방정부의 지원으로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6개주의 주도와 캔버라, 태즈메이니아의 론세스턴에는 식물·동물·광물·고고학·인류학의 자료를 수집한 박물관이 있다. 공립 도서관·미술관·동식물원 등이 각지에 설치되어 이용된다. 캔버라 서쪽 교외에 있는 남반구 최대의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 부속천문대, 우메라의 우주개발연구소, 1926년에 설립된 연방과학산업연구기관(CSIRO) 등이 있다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는 1963년 5월에 국교를 수립하였다. 북한은 1974년 노동당정부 시절에 오스트레일리아와 수교하였다가 1975년 10월에 공관을 철수하였으며2000년 5월 8일 양국관계를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는 1965년에 무역협정(1975년 개정)을, 1971년에 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1992년 8월에는 한·호(濠) 형사사법공조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두 나라는 혐의자 수사, 압수수색 등에 공조할 수 있게 되었다. 1999년 9월에는 과학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1982년 5월 총리 프레이저, 1984년 2월 총리 호크, 1993년 6월 총리 키팅, 2000년 5월 총리 존 하워드가 방한하였고 한국에서는 1994년 대통령 김영삼, 1999년대통령 김대중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였다.

2000년 현재 대한(對韓) 수입은 26억 600만 달러, 대한 수출은 59억 5900만 달러이다. 주요수출품은 광산물, 농축산물 등 1차산품 등이며 수입품은 자동차, 전자제품, 통신기기, 타이어, 석유화학제품 등이다. 2000년 6월 현재 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은 약 2만 900명, 체류자는 약 2만 900명이다

200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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