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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혼천의,자격루에 대해 알려주세요.내공30
mido**** 조회수 5,699 작성일2018.12.15
혼천의,자격루에 대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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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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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던 천문관측기다.
조선시대 (1433년 6월)에 만들었다.
유형문화제 제199호이다.
삼국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만들어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록에 나타난 바로는 1432년(세종 14) 예문관제학 정인지(鄭麟趾), 대제학 정초(鄭招) 등이 왕명을 받아 고전을 조사하고, 중추원사 이천(李蕆), 호군 장영실(蔣英實) 등이 1433년 6월에 최초로 제작하였다.
처음에는 재료로 목재를 사용하였으나 뒤에 구리로 제작하였다. 1657년(효종 8)에는 최유지(崔攸之), 1669년(현종 10)에는 이민철(李敏哲)과 송이영(宋以穎)이 각각 제작하였다.
효종 때의 혼천의는 시계장치를 연결하여 혼천시계로 만들어진 것이다.
기형의 기(璣)는 하늘은 공[球]처럼 둥글다고 생각하고 그 표면에 일월성신의 운행을 설명할 수 있는 천구의(天球儀)를 뜻하고, 형(衡)은 천구의를 통하여 천체를 관측할 수 있는 관(管)을 의미하는데, 크기는 ≪서경≫에 따르면 기경(璣經)은 8척, 둘레 25척, 형장(衡長)은 8척에 그 구경이 한치였다. 그리고 ‘혼천의’의 혼(渾)은 둥근 공을 말하는 것으로서 동심다중구(同心多重球)를 의미한다.
구조는 세겹의 동심구면으로 되어 있다. 제일 바깥층에서 중심으로 지평환(地平環)·자오환(子午環)·적도환(赤道環) 등 세 개의 환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개의 환이 교착되어 그곳에서의 천구를 알 수 있고, 천구의 상하와 사방을 추측할 수 있다 하여 이 환들을 육합의(六合儀)라 한다. 가운데 층은 황도환(黃道環)과 백도환(白道環)으로 구성되어, 해와 달 그리고 별을 관측할 수 있다. 따라서, 가운데 층을 삼진의(三辰儀)라 하는데 여기서 황도는 태양의 길, 백도는 달의 길을 의미한다.
안쪽 층은 적경쌍환(赤經雙環)·극축(極軸)·규관(窺管)으로 구성되며, 망원경과 같이 천체를 관측하는 규관을 통하여서는 동서남북 사방을 볼 수 있으므로 사유의(四遊儀)라 한다. 이들 각 층의 각 환에는 필요한 수의 눈금을 표시하여 정확하게 관측하였다.
혼천의는 아침·저녁 및 밤중의 남중성(南中星), 천체의 적도좌표·황도경도 및 지평좌표를 관측하고 일월성신의 운행을 추적하는 데 쓰였다.


자동으로 시보를 알려주는 장치가 되어 있는 물시계.

1434년(세종 16) 왕명으로 장영실·김조·이천 등이 제작하였다. 시(時)·경(更)·점(點)에 맞추어 종과 북·징을 쳐서 시각을 알렸으며, 경복궁 경회루 남쪽 보루각에 있었던 것은 3개의 파수호(播水壺)와 2개의 수수호(受水壺), 12개의 살대, 동력전달장치와 시보장치로 되어 있었다.
작동원리는 다음과 같다. 파수호에서 흘러내린 물이 수수호로 들어가 살대가 떠오르면 부력(浮力)이 지렛대와 쇠구슬에 전해지고, 쇠구슬이 떨어지면서 동판 한쪽을 치면 동력이 전해져 나무로 된 인형 3구가 종과 북·징을 쳐서 시보장치를 움직인다. 나무인형 둘레에는 12신을 배치하여 1시부터 12시의 시각을 알리도록 하였다. 이 물시계는 1455년(단종 3) 2월까지 사용한 뒤 철거했다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
1438년(세종 20) 경복궁 서쪽 흠경각에 설치한 것은 종이로 7척 정도 되는 산 모형을 만들고 그 속에 옥루(玉漏)와 기계바퀴를 설치하여 물의 힘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여기에 금으로 태양을 만들어서 밤에는 산속에 두고 낮이 되면 밖으로 나타나게 하여 하루 1바퀴씩 돌게 하였다. 이 물시계는 명종 초기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554년(명종 9)에 다시 만든 것이다.

2018.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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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형
물신
시외, 고속 버스, 시내, 광역 버스, 청주시 27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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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정전 앞 앙부일구 >

 

사정전 앞에 앙부일구라 불리는 해시계가 있다. 일구(日晷)는 해시계란 뜻이고, 솥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앙부(仰俯) 라고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오목판 해시계를 뜻하는 이름인 셈이다.

 

  앙부일구는 시간과 절기를 동시에 알려준다. 앙부일구 남쪽면에 불꽃 모양을 한 큰 바늘(영침)이 붙어 있다. 오목한 판에는 시간과 절기를 나타내는 선을 그려 놓았다.

  길게 세로로 새겨진 시간선은 모두 12개다. 간(굵은) 시간선을 따라 둘에에 왼쪽(서쪽)부터 오른쪽(동쪽)으로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등을 새겨 지금 몇 시인지 쉽게 알 수 있게 하였다. 각 시간을 오늘날 시계로 알기 쉽게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에는 한 시간을 넷으로 나눠 사용하였으므로 작은 칸 하나가 지금 15분에 해당된다. 작은 칸 4개면 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태양이 동에서 서로 움직임에 따라 영침 그림자는 반대로 서에서 동으로 움직여 가며 시간을 알려준다.

 

  앙부일구는 여름철에는 짧아지고 겨울에는 길어지는 그림자 성질을 이용하여 절기도 알려준다. 해시계에 새겨진 가로선이 절기를 나타내는 선이다. 계절선은 모두 13개이다. 제일 바깥선은 동지를 나타내고 제일 안선은 하지를 가리킨다. 가운데 11줄은 봄과 가을 두 절기씩을  22절기를 가리킨다. 해시계 왼쪽 오른쪽 둘레에는 24절기가 12개씩 새겨져 있다. 계절이 가을과 가까우면 영침 오른쪽 면을, 봄과 가까우면 왼쪽 면에 새겨진  절기 이름을 보면 지금 절기를 알 수 있다.

 

  절기가 몇 월 며칠인지 알기 쉽게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 남산 과학교육원의 모형 해시계 >

 

  그럼, 실제로 앙부일구가 얼마나 정확하게 맞는지 알아보자.

위 사진은 5월 16일 12시 20분경 남산에 있는 앙부일구를 찍은 것이다. 사진을 보면 해시계 그림자는 오시(午時)에서 약간 왼쪽으로 가 있다. 대략 11시 45분 쯤이다. 우리가 차고 있는 시계하고 앙부일구가 차이가 있다. 그것은 앙부일구는 우리나라 서울이 지나는 동경 127° 선에 태양이 남중하는 시각을 정오로 정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차고 있는 시계는 동경 135° 선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당연히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으며 , 오히려 차이가 나지 않으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래의 보정표를 보면 5월 16일 무렵에는 약 30분 정도를 더해야만 됨을 알 수 있다.

절기는 봄과 가까우니 왼쪽에 있는 절기 이름을 보면 될 것이다.그림자를 따라 가로줄을 따라가면 소만에 가까움을 알 수 있다.


< 보정표 > - 계절에 따라 더 해 주어야 할 시간을 그려준 표

 

  해시계는 종류가 다양하고 크기도 다양하다. 종로1가 혜경교와 종로3가 종묘 앞에는 대형 해시계가 있었다. 일반 백성들이 지나가면서 언제든지 시간을 볼 수 있었다. 작은 것으로는 4~5cm의 휴대용 해시계도 있었다.

 

 

< 휴대용 앙부일구 >

 

  해시계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세계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왜 앙부일구를 독창적인 발명품이라고 할까? 그 대답은 앙부일구의 솥과 같은 형태에 있다. 대개의 해시계는 시계판이 평면 해시계는 눈금을 일정한 간격으로 표시할 수 없다. 앙부일구는 시계퍈을 구면으로 만들어서 이를 극복하였다. 평면과 달리 구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눈금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창조성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세종 때 만들어진 앙부일구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사정전 앞에 보이는 해시계는 모조품이다. 영릉 전시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해시계는 17,8 세기 전후에 만든 것이다. 

 

 

 

 

 

측우기에 대해

 

 

만든시기

1441년(세종 23) 8월에 예조가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다음해 5월에는 측우에 관한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서울과 각 도()의 군현()에 설치하였다

 

모양

측우기는 안지름이 주척()으로 7인치(14.7cm), 높이 약 1.5척의 원통으로 되어 있다

 

쓰임새

1441년(세종 23) 8월에 호조()가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다음해 5월에는 측우에 관한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서울과 각 도()의 군현()에 설치하여 강우량의 분포를 알아내는 데 사용하였다

 

편리하고 우수한점

원래 측우기가 쓰이기 이전에는 각 지방의 강우량의 분포를 알아내는 데 매우 불편하였다. 즉, 비가 내림으로써 흙속 깊이 몇 치까지 빗물이 스며들었는지를 일일이 조사해 보아야 하는데, 이때 흙에는 마르고 젖음이 같지 않아 강우량을 정확히 알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측우기는 일정기간 동안 그속에 괸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그 곳의 강우량으로 하기로 되어 있다.

조선 세종 때의 측우기가 과학사상 뜻깊은 것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쓰였다는 사실이다

 

조선 세종 이후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쓰인 기구로 1441년 세종 23년 8월에 호조가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다음해 5월에는 측우에 관한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서울과 각 도의 군현에 설치하였다.

 조선 세종 때의 측우기가 과학사상 뜻깊은 것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쓰였다는 사실이다

 각 도의종 때의 계에서 가장 먼저 쓰였다는 사실이다








 

반적으로 다른 사각형이나 삼각형태일 경우 비록 같은 둘레라고 하더라도 원형으로된 용기가 더 많이 담을 수 있다는 것하고, 하늘에서 빗물이 떨어 질 때 모서리 부분이 각이 져 있으면 물이  튀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정확 양(일정한 규칙적인 양)이 용기에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둥그런 원통형을 사용합니다. 

 

또한 다른 용기로 담았을 경우, 다시 측정하기 편리한 용기로  옮겨하는 번거로움도 들 수 가 있겠습니다.

 

측우기 사용방법

 

 

측우기는 안지름이 주척()으로 7인치(14.7cm), 높이 약 1.5척의 원통으로 되어 있는데,

 비가 올 때 이 원통을 집밖에 세워 두면 빗물을 받을 수가 있다. 측우기에 괸 물의 깊이는 자[]로 측정한다.

 즉, 대()를 관상감에 만들어서 측우기를 대 위에 올려놓고 비를 받도록 하는데,

관상감의 관원이 직접 주척으로 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보고한다.

 중앙에는 관상감에, 지방에는 각 도의 감영()에 설치하였다.

처음에 철로 만들었으나, 뒤에 구리로 만들어 쓰기도 하였고,

지방에서는 자기()·와기() 등을 쓰기도 하였다. 주척은 나무 또는 대나무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자격루는 물을 이용하여 시각을 측정하고 소리로 시각을 알려 주는 장치이다.

[자격루의 특징]


 

>> 역사적 사실-조선시대에도 매우 과학적인 장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보존 상태-조금망가지기는 했으나 아직 옛모습을 잃지 않았다.

 

>> 가치와 의의-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이다.

 

>>있는곳-서울 중구 정동 5-1 궁중유물전시관

 

>> 만든 사람-장영실

 

>> 만들어진 이유-시간을 정확히 알아야 절기가 바뀌는 것을 알수 있어 백성들이 절기의 바뀜에 따라 농사일을 할 수있었기 때문에 자격루가 만들어 졌다.

 


1. 구성
현재 남아 있는 보루각 자격루는 1536년(중종 31년)에 만든 것이다. 다른 장치들은 다 없어지고 청동으로 만든 큰 물통 1개와 작은 물통 2개, 물을 받는 긴 통 2개만 남아 있다.

2. 크기
큰 물통은 지름이 93.5㎝, 높이는 70㎝나 된다. 그리고 작은 물통은 지름이 46㎝, 높이가 40.5㎝이다. 물받이 통은 바깥 지름이 37㎝, 안쪽의 지름이 34㎝이고, 높이는 196㎝이다.

3. 작동 원리
(1) 큰 물통에서 작은 물통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 작은 물통의 물이 물받이 통에 들어간다.
(2) 물받이 통 안에 있는 대나무로 만든 둥근 모양의 살대가 떠오르면서 지렛대와 쇠구슬을 치면 구슬이 떨어진다.
(3) 구슬이 떨어지면서 시각을 알리는 장치를 움직여 시각을 알려 준다.

[자격루의 과학성]

1. 뛰어난 금속 주조술
자격루는 오래 쓸 수 없는 나무나 가마에서 구울 때 변형이 올 수 있는 도자기, 옹기 등으로는 만들 수 없다. 이 때문에 자격루를 구성하는 물통, 쇠구슬, 시패, 부전, 등은 모두 쇠이다. 자격루의 여러 부품들은 표면이 매끈하고 정확한 치수로 만들어야 했는데,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의 금속 주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준다.

2. 시대를 앞선 정밀 기술
자격루는 불어나는 물의 높이를 측정하여 하루 12시간과 밤 시간인 오경(五更)을 자동으로 알려 주는 자동화 시스템이다. 물시계와 자동 시보 장치(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장치)를 하나로 합친 기술이 오늘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밀하다. 

 

 

기술적가치

 

이 시계의 시간을 천체를 관측하여 얻은 시간과 비교해 보면 털끝 만큼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나무사람이 종, 북, 징을 쳐서 각각 시(時), 경(更), 점(鮎)을 알리고 시를 알리는 팻말을 들고 시의 경과를 알려주는 자동보시장치가 붙은 시계였다. 궁궐과 도성에서의 정사(政事)와 일상생활은 모두 이 시계가 알려주는 시각에 따랐다. 아울러 이 시계의 시각을 분(分)단위까지 잘게 쪼개어 정확성을 기하고 천문역구에도 활용했다.

 

역사적 가치

 

 보루각자격루는 창경궁에서 조선 말기까지 쓰였으며 유물은 1938년에 현재 보관중인 덕수궁 광명문안으로 옮겨 왔으며 1985년 8월 3일 국보 229호로 지정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 유물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만원권 지폐의 도안으로 올라 있으며 우리의 과학 문화재이자 세계적으로도 몇 개 남지 않은 귀중한 유물이다. 

제작시기- 처음 만든시기는 4대 세종16년(1434년),두번째 만든시기는 11대 중종31년(1536년)

 

제작목적 및 쓰임

 

제작목적은 세종때 궁궐에서 쓰고 있던 물시계인 경점지기(하룻밤을 다섯으로 나누어 5경으로 했는데, 각 경을 알려 주는 물시계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전에는 긴 겨울의 밤의 각 경과 짧은 여름밤의 각 경의 시간 길이가 달랐다)는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지켜보아 시각을 알리는 관리가 만약 착오가 있으면 중벌로 다스리는 폐해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여 시각에 따라 스스로 알릴 수 있는 자동시계를 만든 것이다. 쓰임은 궁궐과 도성에서의 정사(政事)와 일상생활은 모두 이 시계가 알려주는 시각에 따랐다.

 

제작과정 및 제작방법

 

제작과정은  맨 위에 있는 큰 물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주면 그 물이 아래의 작은 그릇을 거쳐, 제일 아래쪽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미리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장치해 놓은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의 쇠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이 쇠 구슬은 다른 쇠 구슬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과 징·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나타나 시각을 알려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물시계는 쇠 구슬이 굴러 조화를 이루던 부분이 없어진 채, 물통 부분들만 남아있다.


 

[자격루] 


  

자격루는

 

1434년(세종 16)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처음으로 만든 자동시보장치가 된 물시계이다.

구조에 대하여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국조역상고(國朝曆像考)>에 실려 있으며, 보루각(報漏閣)의 자격루와 흠경각(欽敬閣)의 자격루가 기록되어 있다.

 

세종 때 만든 자격루는 모두 없어지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536년(중종 31)에 만든 것이 있다. 청동으로 된 1개의 큰 물항아리(지름 46.5, 높이 71cm)와 2개의 작은 물항아리(지름 46.5, 높이 40.5cm)가 있으며, 앞에는 2개의 청동제 물받이통(지름 37, 속지름 33, 높이 196)은 원통형이며 그 사이를 청동 대롱으로 물이 흐를 수 있게 되어 있다.

 

작동원리는 물항아리 3개로 위에 1개, 아래 2개로 2단으로 놓아 흘러내리는 물의 압력과 양을 조절하여 일정하게 물받이통에 물이 흘러 들어 와서 물이 고이게 되면 그 속에 물에 뜨도록 만든 거북이가 떠오르면서 거북이 등에 세운 자막대도 올라가서, 청동구슬을 건드려서 굴러 떨어진다.

 

떨어진 구슬이 청동판 한쪽을 치면 다른 한쪽이 들리면서 시간을 맡은 인형의 팔을 건드려 앞에 걸어 놓은 종을 쳐서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게 된다. 계산에 의하면 흘러내리는 물의 양은 1시간에 약 15리터 가량이고 지렛대 장치의 수가 약 150~200개, 청동구슬이 70여개가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자격루를 만드는 동기를 보면, 세종때 궁궐에서 쓰고 있던 물시계인 경점지기(하룻밤을 다섯으로 나누어 5경으로 했는데, 각 경을 알려 주는 물시계 : 그러므로 예전에는 긴 겨울의 밤의 각 경과 짧은 여름밤의 각 경의 시간 길이가 달랐다)는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지켜보아 시각을 알리는 관리가 만약 착오가 있으면 중벌로 다스리는 폐해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여 시각에 따라 스스로 알릴 수 있는 자동시계를 만든 것이다.

 

자격루는 불어나는 물높이를 재서 하루 12시간과 밤시간인 오경(五更)을 재서 물시계와 측정된 시간을 자동으로 알려 주는 시보장치로 되어 있다.

 

시보장치는 십이지와 5경 25점을 시각과 청각으로 알리는 장치인데, 매시간과 경점을 알리는 매우 복잡한 인형기구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능을 갖추어진 자격루는 오늘날 일컬어지는 전형적인 자동화 시스템으로 시간측정과 시보를 자동으로 성취한 제어공학과 정밀기술의 극치이다.

 

 

 

 

혼천의에 대해

 

 

1.만들어진 시대

조선시대

 

2.만든사람

1433년 6월 9일 정초, 박연, 김진 등이 최초로 제작했습니다.

1438년 1월 7일 세종은 장영실에게 흠경각을 짓게하고, 이곳에 혼천의를 설치하였습니다.

 

3.만들어진 이유

 - 당시 세종과 세자는 매일 간의대에 숙직할 정도로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 기후를 예측하기 위한 천문관측에 사용하기 위해서

2018.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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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선생님)나의 답변

혼천의: 해, 달, 별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기구임. ->이를 바탕으로 조선에 맞은 칠정산이라는 달력을 만들고 여러 종류였던 달력을 하나로 통일했습니다.

자격루: 스스로 종을 쳐서 시각을 알려주는 물시계 이다.

ㆍ2시간마다 십이지 신에 해당하는 동물 인형이 종과 북을 울려 시각을 알려 주었다.

ㆍ자격루에서 알려 준 시각은 광화문에서 서울 시내로 전달되어 백성들이 시각을 알 수 있게 했다.

ㆍ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정확하게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지식공유해요^^

채택 부탁!

201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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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