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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영도의 문화재
비공개 조회수 3,418 작성일2015.05.10
내일까지 학교 숙젠데 영도의 문화재에 대해..
1.태종대랑 영도다리도 문화잰가요?
2.그외에 영도 문화재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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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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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태종대랑 영도다리도 문화잰가요?

 

태종대와 영도다리(영도대교0는 문화재입니다.

 

1.태종대


종 목  명승  제17호 
면 적 1,640,063㎡(지정구역)
지 정 일 2005.11.01
소 재 지 부산 영도구  동삼동 산29-1 등 
시 대 시대미상


부산 태종대는 아름다운 암석의 단애로 이루어진 절승으로 부산을 대표하는 해안경관지로서 울창한 해송 숲과 함께 기암절벽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왕성한 해안침식에 의한 해식동굴, 해식애 등 아름다운 지형을 형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부지역의 임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곰솔군락, 팽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식생경관도 경관적으로 매우 뛰어나다.

 

2.영도대교


종 목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6호

지 정 일 2006.11.25
소 재 지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영도구, 대교동
시 대  일제강점기


영도대교는 1932년 3월에 착공하여 1934년 11월에 개통된 길이 214.7m, 폭 18.3m의 우리나라 최초의 연육교이다.

 

하루 총 6회씩 도개하여 부산의 명물로 자리하였지만 1966년 9월 증가하는 차량통행으로 인하여 도개 기능이 멈추었다.

 

일제강점기부터 부산시민과 애환을 함께 해 온 영도대교는 8.15해방과 6.25전쟁 이후 생활고에 지친 피난민들이 애환과 망향의 슬픔을 달랬었던 장소였다.

 

전쟁 당시 영도대교에 가면 친인척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영도대교 인근은 피난민으로 가득 메웠고, 이들의 사연을 듣고 상담하는 점집들이 성업하는 등 우리나라 근대사와 함께 해온 구조물인 동시에 근대 부산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 다리이다.

 

영도대교의 건설은 부산항 물류장 확충과 간선도로의 개설과 함께 근대 부산의 도시 발달에서 중요한 사업이었으며, 특히 영도는 부산 도심과 육로로 연결되고 전차가 개통되는 등 도시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영도구 도시발달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다.

 

영도대교는 교량 뿐 아니라 영도대교를 구성하는 건축물들도 건축적인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교대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화강석으로 바른 층 쌓기를 하여 교대를 형성하고 모서리 돌은 직사각형 화강석으로 모접기 등을 하는 등 정교한 디테일을 갖고 있다.

 

교대 좌우측 화강석 계단, 교량 입구의 교문주와 난간 등은 영도대교의 구성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교량 입구 광장인 다리목 광장은 영도대교의 얼굴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근대 교량의 형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영도대교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단엽식 도개교로 희소가치가 매우 높은 교량이며, 일반적인 도개교와는 달리 안벽부에 도개장치를 설치하고 있는 등 도개교량의 형식에서도 특이성이 인정되는 등 한국 교량사(토목)에 있어서도 유례가 없어 근대 교량사를 연구하는데에 대단히 중요한 교량으로 보존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겠다.


2.그외에 영도 문화재좀요

1.부산 동삼동 패총


종 목  사적  제266호 
면 적  8,158㎡
지 정 일 1979.07.26
소 재 지 부산 영도구  동삼동 750-1 
시 대 석기시대


패총은 선사시대에 인류가 먹고 버린 조가비와 생활쓰레기가 쌓여 이루어진 것으로 조개더미 유적이라고 한다.

 

이곳은 동삼동 바닷가 언덕 비탈에 위치하며 신석기 시대 전 기간에 걸쳐 쌓인 층이 드러난 곳이다. 층위는 5층이며, 이곳에서 석기, 짐승뼈, 조가비들로 된 살림살이 유물과 농사짓는데 쓰이는 연장이 나왔다.

 

문양 없는 원시무문토기,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상들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2.복천사 지장시왕도


종 목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1호

지 정 일 2005.12.27
소 재 지 부산 영도구  신선동 3가 산6 (복천사) 
시 대 조선시대


화면 중앙에 지장보살이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대좌 앞쪽에는 선악동자가 금색 원광을 배경으로 피어오른 연꽃을 밟고 서 있다. 그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시립하고, 옆쪽과 후열에는 시왕이 좌우 5위씩 배치되어 있다. 시왕의 뒤쪽에는 판관·사자·옥졸·시녀 등 제권속이 좌우대칭으로 2열을 이뤄 배치되어 있다.

 

본존인 지장보살은 신체는 머리가 크고 어깨가 넓은 편이나, 무릎너비가 좁은 편이다. 오른손을 가슴 위로 치켜 올렸고, 투명 보주를 든 왼손은 배 앞에 위치하고 있다. 민머리 위에는 어깨까지 덮은 두건을 썼고, 정수리 끝에서 백색 투명 방광이 좌우로 뻗어나가고 있다.

 

지장보살이 앉아 있는 연화좌는 옅고 짙은 군청색으로 겹겹의 연꽃잎을 나타내고 있으며,. 원형 두광은 녹색을 바르고 가장자리에 백색·주색·군청색의 원형 띠를 두르고 있고, 원형 신광은 녹색·주색·군청색·백색의 파상문을 그려 넣고 가장자리는 두광과 동일하게 처리하였다.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은 측면관이기는 하지만 얼굴 표현이 본존과 비슷하며 도명존자는 민머리형에 청색 장삼과 주색 가사를, 무독귀왕은 붉은색 원류관을 쓰고 있고, 붉은색 포를 걸치고 있다. 시왕상은 일월관 혹은 원류관을 쓰고 양손으로 홀을 받쳐 들거나 합장형이다. 화면의 상단부에 위치한 우두귀졸과 마두귀졸의 육신부는 백색을 펴바르고 육신선을 따라 먹을 옅게 펴 발라 음영을 주고 있다. 판관이 쓰고 있는 관모의 윤곽은 녹색안료를 도드라지게 표현한 돋을 기법을 사용하고 있어 특징적이다. 하단 선악동자의 육신부와 육신선 표현은 도명존자와 동일하다. 붉은색과 녹색의 뭉게구름으로 화면의 여백과 인물 간의 구획을 표현하고 있다.

 

본 작품은 화기를 통해 1892년에 경기도 과천 관악산 관음사에서 만든 작품으로, 이후 어떤 연유로 복천사에 전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부분적으로 본지의 손상이 일부 확인되나 본지의 규모가 2m에 이르는 비교적 큰 작품이고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으로, 조선후기 지장시왕도 도상 연구 및 화승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이다. 


 

3.복천사 아미타극락회상도


종 목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2호

지 정 일 2005.12.27
소 재 지 부산 영도구  신선동 3가 산6 (복천사) 
시 대 조선시대


화면 중앙에 아미타여래가 결가부좌하고 있고, 앞쪽 전면에는 천부복식의 범천·제석천상이 합장형으로 시립하고 있다. 본존 좌우에는 보관에 화불이 있는 관음보살과 정병이 있는 대세지보살이 윤왕좌를 취하고 있고, 좌우 바깥에는 보살 2위씩 총4위의 보살이 합장한 모습으로 시립하고 있다. 화면 하단 전면에는 사천왕상이 배치되어 있고, 상단에는 아난과 가섭, 2위의 금강, 10위의 나한상 등이 대칭을 이루며 이룬다.

 

아미타여래는 육계가 뾰족하게 솟아올랐고, 황색과 주색을 번갈아 사용하여 정상계주와 중간계주를 각각 표현하였다. 얼굴은 둥글고 평평하며, 이목구비가 중앙으로 몰린 형상이다. 신체비율은 어깨가 넓고 무릎너비가 넓어 안정적이다. 광배는 녹색 원형두광과 금색 원형신광을 갖추었다.

 

좌우 보살상은 육신부와 육신선, 두부와 얼굴 표현 등은 본존과 동일하며, 보관과 영락장식들은 돋을기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적이다. 본존 전면 좌우의 범천과 제석천의 육신부는 백색이며 육신선은 담묵선 위에 옅은 붉은색을 겹쳐 그었다. 천공의 상단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구름은 인물군들의 구획에 사용되었으며, 각각 녹색과 주색으로 채색하였다.

 

본 작품은 화기를 통해 1892년에 관악산 관음사 만든 작품으로 이후 어떤 연유로 복천사에 전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본지의 규모가 세로 178.6, 가로 224.5cm로 비교적 큰 작품이며 보존상태도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며, 조선후기 아미타극락회상도 도상 연구 및 화승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이다.
  


4.복천사 조상경


종 목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5호

지 정 일 2006.07.03
소 재 지 부산 영도구  신선동 3가 산6 (복천사) 
시 대 조선시대


조상경은 조선시대 승려인 지탁이 찬집한 1권 1책의 불교의식집으로 여러 경전에 산재하여 있는 불·보살상의 조성에 따른 제반 의식과 절차에 관한 내용을 모아 체계화한 책이다.

 

<조상경>은 사찰에서 불·보살상을 조성할 때의 의식 절차를 설명하고 그 의식의 종류마다 의의를 부연하였는데, 이를 행할 때 외우는 주문은 범어·한문·한글을 병기하여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조상경>이 편찬되기 이전에는 모든 사찰마다 각기의 주관에 따라 불상을 조성하고 의식절차를 행하였기 때문에 통일성이 없었으나, 이 책의 발간으로 인하여 일정한 법식에 따라 의식을 행하게 되었다. 권말에는 시주자의 명단이 첨부되어 있다.

 

현존하는 <조상경>의 주요 판본으로는 ①용천사 판본(전라도 담양 추월산, 1575) , ②능가사 판본(전라도 흥양 팔영산, 1697), ③부산 서구 내원정사 수장본(1720,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43호), ④금룡사 판본(경상도 상주 운달산, 1746), ⑤유점사 판본(강원도 금강산, 1824) 등이 있다.

 

복천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상경>은 현존하는 최고본인 1575년에 간행된 용천사 판본으로, 이 판본은 고려대학교에서는 희귀본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 책은 <조상경>의 초기 내용과 모습을 지니고 있어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책으로 서지학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된다.


5.선원제전집도서


종 목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6호

지 정 일 2006.07.03
소 재 지 부산 영도구  신선동 3가 산6 (복천사) 
시 대 조선시대


<선원제전집도서>는 중국 화엄종의 제5조(祖)인 규봉종밀성사의 만년작으로서 자신이 저술한 <선원제전집> 101권 전체에 대하여 서문을 지은 것이다. <선원제전집>이 현재 전해지지 않으므로 <선원제전집도서>를 통해 <선원제전집>의 내용을 짐작할 수 밖에 없다.

 

선교양종이 서로 적대하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규봉은 화엄종의 입장에서 선교일치를 주장하여 당시의 불교계를 회통시켰는데, 이러한 선교일치를 주장한 대표적인 저술이 <선원제전집> 101권과 <선원제전집>에 대한 <선원제전집도서> 2권이다. 그 중 <선원제전집>은 원나라 말에 판본이 소실되어 현재 전하지 않고 <선원제전집도서> 2권만 전하고 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벽암각성(1575~1660)이 <선원집도중결의> 1권을 저술한 것으로 보아 벽암 이전에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선교겸수의 정신과 잘 어울려 중국에 못지않게 크게 유통되어 전문강원에서 사집과의 한 과목으로 학습되어 왔다.

 

1579년 지리산 신흥사에서 간행한 목판본인 복천사 소장 <선원제전집도서>는 우리나라에 전래된 <선원제전집도서>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는 책으로 우리나라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간행 연대도 임진왜란 이전으로 오래되어 서지학적으로도 귀중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6.복천사 석가영상회상도


종 목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5호

지 정 일 2005.12.27
소 재 지 부산 영도구  신선동3가 산6 
시 대 일제강점기


복천사 대웅전에 모셔진 본 작품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현보살, 관음·대세지보살, 미륵·제화갈라보살, 지장보살과타방불, 그리고사천왕과 범천·제석천을배치하였고, 석가여래의 두광 좌우로 10대 제자와사자왕·상왕, 용왕·용녀를 대칭적으로 배치한 군집구도의 불화이다.

 

주존인 석가여래상은 연화좌 위에 설법인을 취하고 있으며,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균형적인 신체비율과 안정적인 모습이다.

 

머리 부분은 육계가 비교적 높게 올라오고, 얼굴은 장방형이며 이마 중앙에는 백호를 표현하였으며, 목에는 삼도를 호선형으로 가늘게 그렸다.

 

석가여래의 좌우에는 문수·보현, 관음·대세지, 미륵·제화갈라, 지장보살과 타방불을 배치하고 있는데, 각각의 지물을 들고 서 있다. 민머리형의 지장보살을 제외한 6위의 보살과 타방불은 영락이 많이 달린 화려한 보관을 썼고 긴보발이 귀를 돌아서 어깨를 타고 허리까지 흘러내리고 있다.

 

화면 상·하단 가장자리에는 비파를 합장한 손 안으로 끼고 있는 동방 지국천왕, 용과 여의보주를 쥔 서방광목천왕, 장검을들고 있는 남방 증장천왕, 보탑과창을 든 북방 다문천왕 등 사천왕이 화려한 갑옷과 천의를 입고 역동적이고 당당한 자세로 여래를 향해 서 있다.

 

본존과 보살상의 몸색과 두광 테두리, 보살의 보관·장식·지물, 사천왕의 견갑·복갑·허리띠·보관장식·지물등에 금박을사용하였으며, 금분은 옷의 문양에사용하여 전체적으로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1921년 완호에 의해 제작된 본 작품은 1924년에 제작된 부산 연등사 소장 석가영산회상도와 매우 흡사하며, 화풍상 뛰어난 작품으로 섬세함이 돋보이는 수작일 뿐만 아니라 20세기 초 부산·경남 지역에서 활약한 수화승 완호의 작품으로 중요시되는 문화재이다.

  


7.복천사 독성도 및 복장유물 일괄


종 목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8호

지 정 일 2007.09.07
소 재 지 부산 영도구  신선동3가 산6
시 대 조선시대


액자로 된 본 작품의 뒷면 중앙에는 세로로 1행의 다라니가 붉은 글씨로 적혀있고, 그 가운데 정사각형의 틀이 있으며, 그 안에 다라니·진언·기문 등의 복장물이 확인되었다. 뒷면 네면 모서리에 붉은 글씨로 동서남북을 표시한 한자씩의 다라니가 쓰여 있다.

복장 품목으로는 한지 위에 붉은 글씨로 쓴 발원문인 복장기문을 비롯하여 황색비단보자기, 진언지 5매, 한지를 원형으로 잘라 그 위에 주서로 ‘사리함’이라 쓴 것이 2매, 그리고 역시 원형으로 자른 한지 위에 오륜종자, 보신축, 화신축, 진심종자도, 준제구자도를 그려 넣은 것과 오색실에 팔엽개 및 준제구자천원지도, 후령통, 둥근거울, 오보병을 연결한 것, 열금강지방지도와 범자를 적어놓은 한지 3매 등이 발견되었다.

 

화면에는 성승 1위가 향우측 상단에서 시작하여 향좌측 하단으로 연결되는 구릉 위에 향좌측을 향해 3/4분면 자세로 반가좌를 취한 모습이다. 향좌측 계곡 사이에는 폭포수가 있고, 향우측 구릉 위에는 한그루의 노송이 위치하며, 소나무 뒤편에는 잔잔하게 흐르는 구름을 표현하였다. 향우측 구릉 앞쪽에는 녹청색 풀과 태점이 그려진 녹청색 암산이 표현되어 있다.

 

본 작품은 복장기문을 통해 광서 18년(1892)에 금어 응륜을 비롯하여 환일, 현조, 윤화, 긍조, 치연, 축인 등이 관여하여, 경기도 관악산 관음사에 봉안하였던 독성도 임을 알 수 있다.

 

본 작품은 화격은 뛰어나지 않으나 조성 기문을 통해 제작 년대가 뚜렷하고 복장유물이 일괄 남아 있어 불화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로 평가된다. 

  
 

8.복천사 현왕도 및 복장유물 일괄


종 목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9호

지 정 일 2007.09.07
소 재 지 부산 영도구  신선동 3가 산6번지(복천사) 
시 대  조선시대


현왕도는 사람이 죽어서 3일 후에 받는 심판을 주재하는 현왕을 중심으로 묘사한 불화이다. 현왕은 염마왕을 여래화 시킨 것으로 법당 안의 현왕단에 봉안되는데, 현왕단은 대체로 약사전에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액자형의 이 탱화는 액자 뒷면 중앙에 높이 9.5㎝, 가로 12.0㎝, 폭 3.0㎝ 크기의 네모난 틀이 있고, 그 안에 후령통을 싸는 황색비단보자기를 비롯한 복장물을 봉안하고 있다.

 

복장품목으로는 후령통을 싸는 황색비단보자기를 비롯하여 한지 위에 그린 팔엽대홍연지도, 진언지 3매, 준제구자천원지도, 열금강지방지도, 오륜종자도 그리고 오색실과 오보병 및 내용물, 역시 한지로 만든 우산 모양의 오산개와 양면원경 등 오경이 발견되었다.

 

화면 중앙에는 현왕을 중심으로, 좌우 앞쪽 전면에 판관, 녹사, 사자, 동자 등 6위씩 모두 12위의 존상이 대칭을 이루며 시립하고 있다.

 

본존은 용두 장식이 있는 의자에 앉아 있고, 본존 앞으로는 나무 결 느낌을 그대로 살린 책상이 놓여져 있다. 책상 위에는 벼루와 붓, 두루마리 문서가 올려져 있고, 아랫부분으로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배경에는 3곡 병풍이 둘러져 있는데 병풍의 바탕은 황색을 베풀고, 담먹으로 독수리와 소나무를 그려 넣고 백색으로 음영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같은 시기의 화조도에서도 유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본 현왕도는 조성 시기가 다소 늦은 근대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나,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할 뿐 아니라 특히, 복장물이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어 불화 연구에 자료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로 평가된다.

  
 
9.복천사 석조석가여래 및 보살좌상


종 목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9호

지 정 일 2008.12.16
소 재 지 부산 영도구  신선동3가 6번지 
시 대  일제강점기


원래 복천사에는 석가여래좌상,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지장보살상 등 5존상(이 있었으나, 1970년대 초에 관음, 지장, 문수보살상을 도난당해 지금은 석가여래좌상, 보현보살상과 문수보살상의 대좌였던 사자좌만 남아있다.

 

석가여래좌상과 보현보살좌상의 바닥에는 새겨진 명문을 통해서 이 상들이 1922년에 완호비구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완호스님은 1921년 복천사의 주지로 부임하여 전각을 건립하고 그 안에 봉안될 불상과 불화를 조성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불상들은 양식면에서 조각승 희장(1639-1661)을 수화사로 하여 순치 18년(1661)에 조성된 범어사 대웅전 석가삼존불상과 같은 17세기 불상 양식을 기초로 하고 있으나, 얼굴에 부드러운 조형감을 더하고 옷주름 표현에서도 유려함이 돋보이며, 금속제 환형의 광배를 등에 꽂은 표현에서 근대적인 요소가 나타나고 있어 조선후기에서 20세기로 이어져 내려온 불교 조각의 전통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특히, 금속으로 별도로 주조되어 불보살상에 끼운 고리형태의 두광은 일본의 헤이안 후기 조각에서부터 유행하였던 요소로서, 복천사 불상들에서 이와 같은 외래요소가 새롭게 차용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복천사 석조석가여래좌상과 보살좌상은 1922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으며 근대 불교조각의 한 획을 긋는 완호비구의 작품으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더욱이 근대 불교조각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지금의 상황에서 복천사 석조석가여래좌상과 보살좌상은 근대 불상조각의 흐름을 알려주는 기준작인 동시에 편년작으로서 미술사적인 자료로서의 가치도 작지 않다. 

   


 

201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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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직접정리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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