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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도선사의 청담스님?
yb**** 조회수 12,641 작성일2002.10.04
오는 10월 20일은 불교 조계종의 토대를 놓은 청담(靑潭·1902∼1971) 스님 탄신 100주년이 되는 날이라고 합니다. 청담스님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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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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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10월 20일 : 경남 진주에서 출생
1927년 : 고성 옥천사에서 남규영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30년 : 개운사에서 박한영 스님 사사. 대원불전 대교과 졸
1955년 :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
1956년 : 조계종 종회의장
1966년 : 조계종 통합종단 2대 종정
1970년 : 조계종 총무원장
1971년 11월 15일 : 세수 70세, 법랍 45세로 도선사에서 입적

이청담(李靑潭) 스님의 생애는 곧 한국 근세사의 한 단면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그들 자신의 생애가 당시의 역사와 필연적으로 조우하게 되지만 대체로 그대로 거기에 묻혀 버리게 된다. 그것은 피할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이청담스님의 생애를 돌이켜 볼 때 그는 그 자신의 생애가 한 역사의 배면에 스며 사라지는 것을 거부한 수행자였다. 끊임없는 도전과 창조를 통해 자신이 새역사 창조의 주역이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는 결코 산 속에서만 은거하는 소극적인 수행자가 아니다. 바깥 세상 속에서 불타의 정견(正見)을 펴기를 서원한 행동하는 수행자였다. 따라서 근세의 고승들이 그들대로의 투철한 정진을 통해서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면 이청담 스님은 그러한 내면적 견성(見性)보다는 중생 속에서 자기의 원력을 성취함으로서 성불에 갈음하고자 했던 것이다.

근세의 고승들이 그렇듯 청담스님도 격동의 구한말, 이미 나라의 존망이 다해가고 있던 1902년 11월 19일 경남 진주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화식(李化植), 어머니는 제주 고씨로, 스님의 이름은 찬호(讚浩)였다.

1902년이면 20세기가 개막되던 때이었으나, 우리 나라는 풍전등화의 순간이었다. 이른바 '을사조약(1905년)이 맺어지기 3년 전이었으니 그 짐작함이 어련하랴. 1909년 이토오 히로부미가 안중근(安重根) 의사에게 의해 사살되고 1910년 마침내 망국을 만난다. 어린 시절을 진주 남강 기슭에서 자란 그는 총명한 소년들이 그렇듯 끝없는 우울과 고뇌 속에서 살았다. 남강은 논개의 충혼이 깃든 곳이기도하여 소년의 마음은 늘 여러 가지 일로 명상에 잠기곤 하였다. 인근 호국사(護國寺)에도 들러 불교와 간접적인 인연을 갖기도 하였다.

할아버지의 고집으로 서당에 다녔으므로 그가 진주 제일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은 18세가 되어서였다. 만학인 셈이다. 이 해가 바로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해이었다. 진주에서도 조용할 리가 없었다. 학생들끼리 만세운동을 계획했는데, 늘 조용하기만 하던 찬호가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달렸다. 이 '만세사건'으로 일본 관헌에 붙잡혀 1주일간 훈계를 받았다. 그는 이 일로 말미암아 항일의식이 크게 눈떳다고 회고하고 있다. 제일보통학교를 나와 진주 농고에 입학했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이미 이때는 당시 사회 관습에 따라 차(車)씨와 결혼한 몸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으나 뜻맞는 학생들과 학우단(學友團)을 조직,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런중에 찬호는 불교와 결정적인 인연을 맺게 되었다. 여름방학 때 호국사에 놀러갔는데 여기에서 노승 박 포명(朴抱明) 스님을 만난 것이다. 스님을 몇 번 만난 찬호는 이 때까지의 '불교는 미신'이라는 막연한 불교관을 고치게 되고 마침내 출가를 결심한다. 처를 가진 사람으로서 이미 범상한 인물이 아니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해인사로 가서 출가를 간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다시 백양사를 찾았다. 그곳에 33인의 한분인 백용성(白龍城) 스님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용성 스님은 그곳에 없었다.

농고를 졸업하자 일본 유학의 길이 열렸다. 항일의식이 높았던 그가 도일(渡日), 유학의 길에 올랐던 것은 이율배반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을 알아야겠다는 생각과 일본에 가서 불교를 배워야겠다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25세때(1926)에 도일, 병고현(兵庫縣) 송운사(松雲寺)에 들어간 찬호는 아끼모도 준가 스님 밑에서 9개월간 행자수업을 했다.

일본에서 1년 반만에 귀국한 스님은 마침내 고성 옥천사(玉泉寺)에 가 남규영(南圭榮) 스님을 은사로 입산 축발했다. 이때 받은 불명이 청담(靑潭)이다. 이듬해 스님은 세속적인 시련을 만난다. 봄날 속가에 내려온 스님은 어머니로부터 간곡한 청을 받는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청을 그는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그날밤 부인과 속연(俗緣)을 맺은 그는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울로 향했다. 그후 뼈를 깍는 정진과 고행을 했다. 그는 훗날 "부끄러운 파계였지만 그로 인해 어렵고도 괴로웠던 정진에 도움이 되었다."고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서울로 온 스님은 개운사 대원불교전문 강원에 들어가 당대의 대 강백 박한영(朴漢永) 스님에게 사사, 경·율·론 삼장(三藏)을 마쳤다. 이런중에도 민족독립 운동은 계속해 이때 문경 대승사에서 왜경에 잡혀 7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출옥 후 금강산 마하연 만공(滿空)회상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운수 행각을 하였으나 각(覺)의 본처는 찾을 길 없으니, 앞으로는 조용한 암자에서 견성대오(見性大悟)의 소식이 있기전에는 절대로 나오지 않으리라……'(자서전의 일부)는 각오로 3년동안 참선을 하였다. 스님의 정진은 대단하였다. 마침내 만공스님이 그를 인가하였으나 '아직 멀었다'며 다시 수도행각에 나서기도 하였다. 멀리 북간도에까지 운수행각을 하고 온 스님은 다시 서울의 박한영 스님과 덕숭산 정혜사에서 만공스님을 찾아 교학과 선지를 함께 섭수했다.

스님의 승단 정화는 그가 대원불전 재학 때부터였다. 아마도 한국 근세승 중에 승단정화에 대해 그렇게 투철한 인식을 가졌던 스님이 있었을까. 뜻을 가지고 저돌적으로 밀고 나간 스님은 아마도 청담스님이 대표격일 것이다. 그는 한국불교가 왜색화되어 기강이 바로 서 있지 않고 부패해 가고 있는 것을 한탄하였다. 이를 바로 잡는 것은 승단 정화뿐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대원강원에서 학인대회를 결성하기도 하였으나 일경의 심한 간섭으로 무산돼버렸다.

그에게 있어 원력이 성취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1945)이 되고도 10여 년후인 1954년이다. 서울 선학원에서 학인대회가 아닌, 전국 승려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스님은 '불법에 대처승이 없다'는 뜻을 역설했다. 불교가 속화된 것은 모두 승려가 취처를 하기 때문인 것이었다.

동산(東山)·효봉(曉峰)·금오(金烏)스님과 더불어 불교정화에 매진했다. 스님의 원력으로 62년 이른바 통합종단(統合宗團)이 이루어지는데 성공했으나 현실적으로 조계·태고로 나뉘게 되었고 아직도 응어리는 남아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비구·대처 분규에 있어 어느 스님보다 강경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소년시절과 청장년기를 살아오면서 축적된 항일정신 때문이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항일운동으로 옥고까지 치른 그로서는 왜색불교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수행인이라는 차원을 넘어 대처불교는 한국불교의 존폐에 암적 존재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과격했다. 일부 정화주도 스님들이 "비구승은 수도할 몇 사찰만 갖자"고 했을 때, 화까지 냈다는 것을 보아도 짐작되는 바가 없지 않다.

1966년 12월, 64세에 한국불교에 최고 지도자인 宗正에 추대된 스님은 그 자리를 놓고 도선사에 들어가 「호국참회원」건립에 착수했다. 비구승단인 조계종에 종권 다툼이 시작됐다. "한국불교는 절간만 남았다. 이제 宗旨는 사라졌다"고 개탄하며 화합을 호소했으나, 누구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스님은 정화주도자로서 참으로 부처님께 참괴스러웠다.

1969년 여름, 스님은 조계종을 탈퇴했다. 조계종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기 대문이다. 그러나 그후 70년, 전 불교도의 간곡한 호소가 있어 70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총무원장직을 맡았다. 마지막 봉사로 임하였다. 71년 한국종교협의회 회장을 맡아 종교간의 유대와 화해를 주도하고 세계 고승법회를 주재하여 한국불교의 세계적 위치를 확보하는 등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미 노령인지라 몸은 쇠약해, 마침내 71년 11월 15일 입적했다. 세수 70세, 법랍 45세였다.



진주 3·1만세 운도에 앞장서


찬호(靑潭스님)의 유년기는 늘 고독하고 우울하였다. 망국의 슬픔속에 어른들은 모두 심기가 불편하였는데, 어린 나이이긴 하여도 감수성이 예민한 그로서는 이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던 것이다. 그는 남강가에서 논개를 떠올리고 국가의 장래를, 자신의 삶의 의미를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가뜩이나 튼튼치 못한 놈은 더욱 부실했고, 얼굴은 늘 깡 말라서 퀭한 눈만 보였다.

서당의 친구들은 그를 '부엉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늘 고독한 명상에 잠겼다. 그런데 하루는 짓궂은 친구가 '부엉이 부엉이'하며 놀려댔다. 그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친구에게 대어들어 아무것이나 집어 던졌다. 돌멩이·부지깽이·장독도 던졌다. 아수라장이었다. 스승이 이를 보고 노발 대발했다.

"이놈! 고약한 놈 같으니라구. 설사 서우(書友)가 잘못했다 치더라도 깨우쳐 이해시켜야지, 그렇게 원수처럼 대드는 법이 어디 있는고. 우리 서숙에서는 너 같은 독종은 필요 없으니 나가거라."

찬호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길로 책보를 싸들고 서당을 나왔다. 부모가 다시 서당에 나가도록 설득하였으나 그는 완강히 거절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를 보통학교에 입학시키게 된 것이다. 그에게 있어 보통학교의 입학은 새로운 세계를 안겨 주었다. `맹자 왈(孟子 曰)'은 답답하였다. 그는 다른 급우들 보다 앞서기를 원했다. 공부도 잘해 1, 2 등을 다퉜다.

17살에 3·1운동을 만난 그는 진주거리를 앞장서 뛰었다. 그 덕분에 그는 7일간 심한 신문을 당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조국이 무엇이며 우리의 현실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성적이 우수한 그가 진주 농업학교에 불합격 된 것이다. 3·1만세 사건의 주모자였으므로 그를 불합격시킨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 찬호는 저들의 횡포를 그대로 방관할 수 없었다. 농고 교장을 찾아가 따졌다. 그러나 반응이 없었다. 매일 교장에게 따졌다. 닷새째 되던 날 교장은 `내일부터 등교하라'고 허락했다. 그는 재학중 학우단을 조직 학생 자치적으로 학생 활동을 하도록 했다. 이미 그 때부터 스님의 지도력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중에 찬호에게 드디어 놀랄만한 현상이 나타났다. 즉 '마음'이란 말이었다. 어느 날 남강 서장대의 기슭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목이 탔다. 그 기슭 아래에 있는 호국사에 가 물을 얻어마셨다. 한참 물을 마시고 있는데 한 스님이 그의 모습을 보고 물었다.

"왜 사람은 물을 마셔야 하느냐?"

찬호는 당장 뭐라고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이 물을 마시고 싶다고 요구하기 때문이지…."

"…"

"마음이 뜨겁다고 생각하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그 스님이 바로 유점사에서 수도하고 있던 박포명 스님이다. 뒷날 청담스님의 '마음 법문'은 이 때의 충격을 그대로 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속 풍속대로 결혼을 한 그는 1차 출가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런데 유학일이 잘 안돼 송운사(松雲寺)에 머무르게 되었다. 청담스님의 이 송운사 시절은 그의 수행에 있어 큰 괘적으로 남는다. 그 절은 교종(敎宗) 절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그는 禪宗에 들어가고 싶었다) 주지의 시봉아닌 시봉 노릇을 하였다. 반야심경을 5일만에 떼었다. 그는 공양, 종 치는 일, 마당쓰는 일, 채소 가꾸는 일, 빨래 하는 일을 도맡아 혼자해야 했다. 스님은 그때 일을 이렇게 회고한다.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내가 손님께 접대를 어떻게 하는가를 물었을 때 '그것을 몰라 묻느냐? 보면 알지'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하고 무안스러워 고개를 숙여 버렸지만 나는 스님의 그 말에서 '모든 것은 스스로 보아라'라는 한 마디를 깨우쳤다고 생각한다."


유년기와 청년기, 그리고 송운사를 거치면서 쌓아올린 그의 각별한 내적 체험이 그가 덕숭산 정혜사(定慧寺)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거절한 연유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결코 겸손이 아니다. 스님은 늘 앞장서기를 좋아하였는데, 그것은 끊임없는 추구를 통해 '완성'을 획득하려는 천성이었으므로 이를 알고 있는 만공스님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당대의 문장가인 춘원 이광수(李光洙)와의 만남도 그런 것이었다. 상원사(上院寺)에서 나온 스님은 봉선사로 운허스님을 만나러 갔는데 여기에서 춘원의 이야기가 나왔다. 춘원은 운허스님의 육촌 형이다. 춘원이 '법화경'을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운허스님은 "춘원이 비록 '법화경'을 10년간 연구하였다고 하나 아직 불법을 옳게 체득하지 못하였으니 필경 오역이 있을 것이므로 이를 중지토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청담스님은 운허 스님과 뜻을 같이 했으므로 자하문 밖 소림사 근처의 춘원의 집을 찾아갔다.

청담스님은 '법화경'은 불타가 설한 경 가운데 최고의 경전임을 말하고 비록 춘원이 10년간 공부하였다고 하나 누구보다 영향력이 있는 선생이 잘못 번역하면 그만큼 패해가 클 것이므로 중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춘원은 이 경의 이치를 그대로 놔두면 많은 사람이 언어의 장벽으로 읽지 못할 것이니 번역을 해야겠다고 하였다. 이러기를 3일, 4일, 급기야는 춘원은 스님의 설득에 넘어가 이를 중지하였다. 청담스님의 '완전'주의의 승리였다. 그런데 뒷날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때 춘원이 '법화경' 번역을 밀고 나갔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나타내고 있다.

청담스님을 말할 때 '불교정화'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늘 "설령 금생의 성불을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사람을 다 건져놓고 부처가 되겠다"고 했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의 원력을 함축하고 있다. 스님은 승단이 살기위해서는 3대 사업을 펼쳐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즉 도제양성·역경·포교가 그것이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이룩한 종단이 파벌과 권력 싸움에 휘말리자 그는 크게 낙심했다. 그가 한때 조계종을 탈퇴한 것은 '희생'을 자청한 것이다. 이 '쇼크 요법'은 성공했다. 다시 총무원장에 추대되는데, 그러나 이미 스님의 육신은 노쇠해 있었다. 71년 11월 15일 스님은 입적했다. 입적 며칠 전 육군 법당 법웅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육신에는 죽음이 있으나 법신은 불멸한 것이다. "라고 .

그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도 당당하였다. 김수환 추기경, 한경직 목사 앞에서 '당신들이 예복을 벗으면 나도 이 가사장삼을 벗겠다' 고 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스님의 이러한 독보적인 행위는 그 속에 철저한 종교적 신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세를 중요시해


청담스님의 사상의 요체는 그의 많은 법문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듯이 윤회사상의 존재론적 풀이와 법신(法身)의 탄생, 즉 유심철학까지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가 늘 말한 '사람이 산다는 것은 바로 죽는다는 것'이란 말은 전자에 속하고, '육신은 비록 죽어도 법신은 살아있다'는 말은 후자를 잘 대변해 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청담스님은 현세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세계(중생)에서 자기의 원력을 성취함으로써 성불에 값하겠다는 서원을 세웠고, 승단 정화에 대한 끝없는 투쟁으로 일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담스님은 늘상 출가승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차원에서 사바세계를 헤매는 중생과 더불어 함께 살며 그들의 고뇌와 아픔을 자신의 고통으로 인식하며 살기를 원한다. 근세와 현대를 통해서 이러한 서원을 실현시킨 대표적인 스님이 바로 청담이다. 스님은 항상 번뇌 많은 이 세상을 성직자연하며 내려다 보지 않고 도리어 삶의 무의미(惑)·죄책감(業), 그리고 생과 사의 공포를 중생과 똑같이 느끼며 호흡했다.

중생의 삶의 현장, 고아원과 교도소에서도 이러한 원력은 그의 입적 전까지 일관된다. 자신의 자기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중생과 더불어 끝까지 고통을 나눈 것은 구도적 결실에 연연할 수 없는 그의 인간적 골격으로 풀이된다. 그는 자신의 조그만 성취를 남과 더불어 나누고, 그리고 민족과 더 크게는 우주 삼라만상과 더불어 나누어 가지고 섬기며 사는 가장 보편인 큰길(大道)을 택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분별(分別)의 극복이다. 부처는 그 마음에 있다. 기나긴 정진 속에 스님은 바로 이 부처의 경지에 들었고 그 마음은 성(聖)과 속(俗)의 두 갈래를 가리지 않고 넘나든다는 것을 그는 스스로 보여준 것이다. 여기에는 끊임없는 고뇌와 정진, 그리고 자기와의 처절한 싸움이 있었던 것이 물론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스님을 평할 때 그저 투철한 원력보살(願力菩薩)로, 불출세의 호국보살로, 격조 높은 대승보살로 추앙하는게 일반적인데, 그러한 청담스님의 실상은 무의미 속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는 페러독스를 긴 세월에 걸쳐 피땀으로 극복해 온 수련의 고독이 깔려 있음을 간과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사실 청담(靑潭)스님은 '나'라는 소우주와 '대아'라는 대우주를 수시로 넘나들며 서원의 여행(勵行)에 그때마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대하는 영원한 구도자였다. 말하자면 부처님의 단순한 진리의 표현이 아니고 참된 인간고통의 현실을 해결해 주는 혁명적인 힘, 사회의 불의를 이기는 절대적으로 새롭고 어두움을 이기는 광명으로서 본 것이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자비 속에서 자기 고통의 위안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과 악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회적으로 행동하는데서 만이 구원한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곧 청담 사상의 근본이 되고 있다. 그는 '일체 만물이 부처님의 진리로 인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시점까지 자신의 성불을 미룰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불교를 통한 사회정의와 인간의 자유를 실현키 위해 행동하고 그것을 위해서 온갖 고난을 기쁨으로 짊어진 청담스님을 이 땅의 '최후의 비구'로 평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청담스님의 행적·언어·시 그리고 그의 입적에 조차 그 하나 하나가 항상 새롭게 비춰지고 있고 젊고 순수해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청담스님의 사상은 단순히 신앙을 통해서 얻은 개인적인 삶, 피안의 극락세계로만 이해하지 않고 사회적 차별 속에 나타나는 인간. 즉 주권자이면서 고통받고 소외된 대중과 더 나아가 국제간의 남북 문제, 인종 차별, 이데올로기의 대결들의 긴장된 세계체제 속에서 떨고 있는 인류의 구제를 위한 현실적 욕구 속에서 주어진 불법(佛法)의 전통적인 사상의 단순한 해석이 아니다. 신앙의 내적 조화로부터 인류해방을 위한 구체화 된 신·해·행·증(信解行證)을 바탕으로 한 '원력(願力)의 행동' 그것이었다. 다시 말해 청담스님이 주장한 불교사상의 특징은 '실천불교학'이나 교리학 부문으로서의 윤리나 신앙의 결과만 따진 것이 아니라 사화적 질서 속에 나타나는 인간, 즉 삶의 전 영역이 정치적 차원의 현실 속에서 인간의 미래지향적 소원과 개혁을 통한 정토건설에 있었다. 따라서 청담스님의 사상의 핵심은, 중생이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질서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이므로 불법이 단순히 인간의 자기해탈의 도구로만 존재해서는 안되며 여러 가지 질곡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오늘의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데 있다.

이를 요약하면 '원력의 불교학'으로서 오늘의 이 세계에 불교적 가치관을 주입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특징, 청담스님의 퍼스낼리티를 원력보살적 인간성으로 발전시켰고, 그러한 원력보살적 인간성이 여러 부문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승단의 정화운동으로 나타난다.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한국불교는 호국적 사상이 크게 돋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라통일의 원동력으로서 불교, 그리고 몽고로부터의 침략을 막아보려는 고려의 호국불교, 그리고 조선조의 구국불교, 일제시의 애국불교는 모두 나라를 호지하려는 이 민족의 비원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호국불교와 불교로서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한 청담스님이 조선조의 억불과 일제의 왜색화로 처참하리만큼 상처를 입은 한국불교의 위상을 다시 찾으려는 원력을 갖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이 원력 보살적 인간성이 구체화 된 것이다. 이러한 정화원력은 호국·애국·구국불교의 역사적 가르침에서 바탕이 찾아진다. 청담스님은 국가를 민족의 운명공동체로 보았으며, 따라서 한국불교는 한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호국불교를 그 누구보다 주장하였고, 불교의 위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그가 불교정화의 기수로 나선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청담스님의 '성불을 미루고서라도 중생을 구해야겠다'는 말은 단순히 중생구제 차원이 아닌 승단자체의 정화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승단 정화와 더불어 교단의 3대 사업을 주장했다. 그리고 승단정화 뒤에는 신도정화도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통합종단이 생긴 이래 조계종은 스님의 뜻대로 진행돼 가지 않았다. 종권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조계종을 탈퇴한 것은 그로서 결코 제스처가 아니다.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원력 성취를 위한 고행의 하나였다. 청담스님의 이러한 원력 못지 않는 주된 사상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을 스스로 자득했고, 이를 중생에 널리 알린 것이다. 청담스님은 '마음'의 설법자였다. 그의 모든 법문에는 마음이란 말을 제외하고 다른 말이 별로 없었다. 그는 그만큼 마음을 중시했다. 마음이 우주와 나와 모든 것을 주관한다고 말한다. 사실 이 '마음 법문'은 그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청담스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마음'은 생명과 광명을 잉태하게 하는 근본이므로 오늘에도 늘 새롭고 귀중하게 살아있다.

누구보다 현실적이며 불교운동가였던 청담스님이 떠난 지 25년이 된 오늘의 한국불교는 어떠한가. 스님의 원력이 얼마나 결실을 맺고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스님의 위대한 행동과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한국불교에 자양이 되어 불교 중흥의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

http://bgs.hs.kr/dapsa/kyungnam/51-chungdam.htm

2002.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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