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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부여군 부여읍의 문화재 - 국가지정
dlqh**** 조회수 2,346 작성일2019.06.25

아...제가 뭘좀 하느라고 ㅠㅠ요새 막막 이런거 알아보고 댕기는데 ㅠㅠ

그닥 좋은게 없드라구요..하하하..

좀 무리 일수도 있지만 제발 부탁드립니다 ㅠㅠ흑흑흑...

위에 질문 제목과 같이

부여군 부여읍내 국가지정 문화재 되도록 중요한 것들만이요.

문화재는 무조건 많이요 =  =....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ㅠㅠ부탁드려용!

내공 많이걸게요 -ㅁ-v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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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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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의 문화재 - 국가지정)

1.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종 목 국보 제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정림로 83 (동남리 364)

시 대 백제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2.백제 금동대향로

종 목 국보 제287호

지 정 일 1996.05.30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백제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1.8㎝,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키는 아래의 몸체는 하나하나의 연잎의 표면마다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입체적이며 세부의 동물과 인물상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백제시대의 창의성과 뛰어난 조형성을 바탕으로 당시 도교와 불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 공예기술 및 미술 문화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게 해주는 백제 금속공예 최고의 걸작품이다.

3.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종 목 국보 제288호

지 정 일 1996.05.30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백제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 자리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이 훼손된 상태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터널형으로 높이 74㎝, 가로·세로 50㎝이다. 감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었으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턱이 마련되어 있다.

감실의 좌·우 양 쪽에 각각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인 예서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다. 명문에 의하면 성왕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위덕왕)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의 따님이자 창왕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으로 파악된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으로서 그 중요성이 크다.

4.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종 목 국보 제293호

지 정 일 1997.01.0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삼국시대

1907년에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의 절터에 묻혀 있던 무쇠솥에서 다른 하나의 관음보살입상과 함께 발견된 보살상으로 높이는 21.1㎝이다.

머리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진 관을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가느다란 목걸이를 걸치고 있고, 가슴에 대각선으로 둘러진 옷은 2줄의 선으로 표시되었다. 양 어깨에서부터 늘어진 구슬 장식은 허리 부분에서 자그마한 연꽃조각을 중심으로 X자로 교차되고 있다. 치마는 허리에서 한번 접힌 뒤 발등까지 길게 내려와 있는데 양 다리에서 가는 선으로 주름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은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으로 작은 구슬을 살짝 잡고 있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져 옷자락을 잡고 있다. 보살이 서 있는 대좌는 2중의 둥근 받침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형태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얼굴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미소와 비례에 맞는 몸의 형태, 부드럽고 생기있는 조각수법을 통해 7세기 초 백제시대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5.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

종 목 보물 제2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신라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부소산에 세 조각으로 깨진 채 흩어져 있던 것을, 그 자리에 비각을 세워 복원해두었다가 해방 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비는 비몸돌의 앞면이 조금 깨어져 나갔고, 머릿돌도 부분적으로 깨어져 있으며, 비문은 몸돌 앞·뒷면에 새겨져 있으나 심하게 닳아 있어서 알아보기가 힘들다.

비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부분은 각이 없이 둥글다. 특히 머릿돌은 여섯 마리의 용조각이 매우 사실적인데, 좌우 양 쪽에서 세 마리씩의 용이 올라가 서로의 몸을 휘감고 중앙에 있는 여의주를 서로 다투고 있다. 이는 당나라 전기의 화려한 수법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문은 유인원의 가문과 생애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생애에 대한 부분은 주로 그가 당나라 태종에 의해 발탁된 이후의 활동상을 적고 있다. 그는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뛰어난 공을 세웠으며, 660년에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뒤 백제유민들의 부흥운동도 평정하였다. 그 이후의 행적은 비문이 지워져 더 이상 알 수 없다.『대동금석서』에서는 이 비문을 유인원이 썼다고 하고 있으나, 이 설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문무왕 3년(663)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에 비문을 새긴지 3년 후이다.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비문 중에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사실과 부흥운동의 중요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6.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종 목 보물 제10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부여군 임천면에 있던 보광사의 중창을 기념하여 건립한 비석으로 중창을 주도한 원명국사 충감(1275~1339)의 행적과 중창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원래는 충남 부여군 성주산의 보광사터에 있던 것을 1963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비문은 2차에 걸쳐 새겼는데, 앞면은 건립당시인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새겼고 뒷면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추가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원명국사는 19세에 등과하여 선원사에서 뜻을 펴오다가 공민왕 원년(1351) 65세로 입적하였다. 죽으면서 문도들에게 비나 탑을 세우지 않도록 당부하여 6년이 지나서야 비가 세워졌다. 뒷면의 추가된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기록을 적은 비도 알아볼 수 없으므로 주지인 석능일이 고쳐 새긴다고 되어있다.

현재 비받침과 비머릿돌이 없고, 비몸만 남아있다. 비몸의 가장자리는 덩굴무늬를 띠 모양으로 둘러 새겼다. 석재는 편마암이고 윗쪽의 양끝을 사선으로 잘라냈다. ‘보광사중창비’라고도 하는 이 비는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석비양식과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7.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종 목 보물 제10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정림로 83 (동남리 364)

시 대 고려시대

충청남도 부여의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8.부여 석조

종 목 보물 제19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정림로 83 (동남리 364)

시 대 백제

부여현의 동헌건물 앞에 있었던 것을 일제시대에 옛 박물관 뜰로 옮겼다가 현재의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부여석조는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있는 백제시대의 유물로, ‘工’자형의 받침대 위에 둥근 꽃망울 형태로 올려져 있다. 받침대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간결한 모양이다. 그 위에 놓인 석조는 입구가 약간 오므라들면서 밖으로 둥글게 원호를 그리며, 바닥은 평평한 듯 하나 완만한 곡선이다. 표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8개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고,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의 1층 탑몸돌에 새겨진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내용과 같은 글을 새기려던 흔적이 보인다.

이 석조에는 연꽃무늬 장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사찰과 관계된 유물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본래 이 석조가 있었던 장소가 백제시대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 왕궁에서 쓰이던 석련지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형태가 풍만하면서도 깔끔한 곡선으로 처리된 석조로, 백제인의 간결하고 소박한 미적 감각이 잘 나타나 있다.

9.금동정지원명석가여래삼존입상

종 목 보물 제19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삼국시대

하나의 광배에 불상·보살상을 함께 주조한 삼존불로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배의 뒷면에는 정지원이라는 사람이 죽은 아내를 위하여 금으로 불상을 만들어 저승길을 잘 가게 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본존불의 얼굴은 갸름하면서 살이 오른 모습으로 눈·코·입의 윤곽이 큼직해서 시원해 보인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U자형의 주름을 지으면서 묵중하게 흘러내렸는데, 양 팔에 걸친 옷자락은 새의 날개깃처럼 양 옆으로 길게 뻗쳐있다. 손은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고 손끝은 아래로 향하고 있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의 양쪽 끝에는 합장하고 있는 두 협시보살이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수법이며 길게 날리고 있는 옷자락은 광배의 가장자리를 이루고 있다. 왼쪽 협시보살은 얼굴만 남아 있고 신체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머리광배 위에는 연꽃속에 앉아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작은 부처 1구가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조각양식이나 표현 수법이 고구려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19호)과 같은 계통으로 중국 북위시대에 유행한 불상양식을 수용한 것이다. 금동계미명삼존불(국보 제72호)이나 금동신묘명삼존불(국보 제85호)과 같은 양식에 속하지만 그보다 조각수법이 약간 떨어지고 무늬가 간략화 되었으며 조형적인 탄력도 많이 감소되었다.

10.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

종 목 보물 제33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삼국시대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은 1936년 충청남도 부여 군수리 백제 절터를 조사할 때 발견된 금동보살이다.

머리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관을 쓰고 있고, 얼굴 좌우로 두꺼운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둥글고 원만하며, 깊이 있는 내면의 웃음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백제인의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다. 신체는 두꺼운 옷에 싸여 있으나 비교적 양감이 있고 당당한 모습이다. 배에서 X자형으로 교차되는 옷은 발목 부분까지 길게 늘어져 새의 날개깃처럼 양쪽으로 퍼진 모습이며, 발목까지 내려온 또다른 옷자락에는 U자형의 주름이 표현되어있다. 오른손은 네번째 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을 구부린 채 위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손등을 보이면서 아래로 내리고 있다.

이 불상은 옷모양, 손모양 등이 시대적 특징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넓은 얼굴과 풍만한 미소는 백제불상에 즐겨 묘사되는 것으로 백제인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6세기 불상으로 보인다.

11.이색초상 - 영모영당본

종 목 보물 제1215-2호

지 정 일 1995.03.14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고려말 3은 중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의 초상화는 원래 관복차림과 평상복차림의 두 종류가 있었으나 현재는 관복차림만 전해진다. 관복차림의 그림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것으로 모두 4본 5점이 전해진다.

가로 85.2㎝, 세로 150.7㎝ 크기의 문헌서원본은 목은영당본과 동일한 형식으로 1755년에 새로 옮겨 그린 것이다. 목은영당본에 비해 수염처리와 옷의 묘사 등의 표현기법이 떨어지는데 이는 화가의 기량 차이 때문인 것 같다.

12.부여 사택지적비

종 목 보물 제1845호

지 정 일 2014.12.3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백제

부여 사택지적비는 백제 의자왕대의 인물인 대좌평 사택지적이 은퇴 후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석비의 형태를 갖춘 유물로서 백제인의 손으로 제작된 유일한 경우이다. 특히 대성팔족의 하나인 사택씨 출신의 사택지적은 "일본서기"에서 대좌평의 지위로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사실이 확인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사찰의 전각과 탑상을 조성하며 새긴 비석인 만큼, 문화적・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사택지적비는 백제 후기 귀족들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고 백제 관등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 격조 높은 문체와 서법은 백제의 수준 높은 문화를 잘 보여준다.

13.부여 부소산성

종 목 사적 제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 (쌍북리 산4)

시 대 백제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의 성벽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비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14.부여 능산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15

시 대 백제

부여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이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내부구조와 재료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호 무덤(동하총)은 네모형의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무덤으로 널길은 비교적 길고 밖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형이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는 각각 사신도와 연꽃무늬, 그리고 구름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2호 무덤(중하총)은 무령왕릉과 같이 천장이 터널식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호 무덤(서하총)·4호 무덤(서상총)은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히 만든 후 판석을 덮은 평사천장이고 짧은 널길을 가졌다. 이 형식은 부여지방에 많으며 최후까지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파편·도칠목관편·금동투조식금구·금동화형좌금구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무덤들 서쪽에서는 절터가 발굴되어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능산리 무덤들이 왕실 무덤지역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15.부여 청마산성

종 목 사적 제3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1외

시 대 백제

부여 능산리 월명산에 있는 백제 산성으로 당시 수도였던 사비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다.

성의 둘레는 약 5~6㎞이고, 흙과 돌로 쌓은 산성이다. 성벽이 많이 무너진 상태이나 서쪽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계곡의 물이 흐르는 서쪽 성벽에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성이라 적이 쉽게 침입할 수 있는 남문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성안에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높이 쌓은 망대와 각시우물이라 전하는 우물터, 경룡사터, 의열사터 등 건물터가 남아있다.

백제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으로, 석성산성·성흥산성·증산성과 함께 도읍을 보호하기 위한 외곽 방어시설로서 의미가 크다.

16.부여 군수리 사지

종 목 사적 제4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 19

시 대 백제

부여 군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의 절터로,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1935년 일본 사람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그 결과 중문·목탑·금당·강당 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 1금당의 구조임이 밝혀졌다. 백제 사찰에서의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는 이 절터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는데,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을 일직선으로 배치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금당터의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것이 특징이며, 유물은 절터에서 골고루 출토되었다. 먼저 강당터 남쪽에서 금동관 조각이 나왔고, 금당터 주위와 탑터에서는 약 1,150점의 옥과 금당 서쪽에서는 금동제방울·구두 모양의 금구가 출토되었다. 또한 연꽃무늬·덩굴무늬가 아름답게 조각된 상자 모양의 벽돌과 금제고리·작은 구슬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탑의 중심부에서는 군수리 금동미륵보살입상(보물 제330호)·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29호)과 칠지도·철못·삼족토기를 비롯한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칠지도이다. 칠지도는 중심에서 양쪽으로 각각 세가지씩 칼이 뻗어있어 7개의 칼날을 가지고 있는 칼이다. 이와 비슷한 백제 칠지도 하나가 일본에 있어 백제와 일본의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17.부여 나성

종 목 사적 제5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염창리 565

시 대 백제

백제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둘레 8㎞의 성이다.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부여시가지 외곽을 둘러싸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양에 있는 나성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성 중의 하나이며,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긴 538년경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부소산성의 동문이 있던 자리에서 시작하여 금강변까지 흙으로 쌓아만든 것으로, 지금은 약간의 흔적만 남아있다.

성의 바깥쪽 벽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안쪽 벽은 완만하여, 성위에서 말을 달릴 만한 길이 있고 곳곳에 초소가 있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필서봉에는 횃불을 올리던 봉수터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성안에는 백제의 왕궁을 비롯하여 관청·민가·절·상가 및 방어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성의 전체적인 구조는 남쪽과 서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또 물길도 파놓아서 자연적인 2중구조를 이루고 있다. 부여나성은 청산성·청마산성과 함께 수도보호를 위한 외곽방어시설로 중요한 성이었다.

18.부여 청산성

종 목 사적 제5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6

시 대 백제

부소산 동쪽 500m 지점의 낮은 구릉 위에 있는 백제 산성으로, 흙으로 쌓아만든 산성이다.

백제 무왕 6년(605)에 사비에서 웅진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하여 나성과 함께 쌓았다. 외성의 북쪽 성벽은 나성과 연결되어 있어, 나성의 취약점을 보강하고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독립된 산성이라기보다는 백제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부소산성과 연결하여 쌓았던 보조산성으로 보인다.

약 300m 정도의 내성과 500m 정도의 외성으로 이루어진 2중구조의 산성으로 보이지만, 내성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산봉우리를 빙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동북쪽 성벽의 윤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안 서부와 북부에 당시의 건물터로 보이는 곳이 남아있다.

19.부여 쌍북리 요지

종 목 사적 제9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30

시 대 백제

충남 부여군 쌍북리에 있는 백제의 토기 및 기와를 굽던 가마터로, 1941년 5월에 부여 시가지 계획도로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가마는 땅에 묻힌 상태여서 분명하진 않지만, 길이 약 4m, 폭 135㎝, 높이 90㎝ 정도의 크기였다. 굴뚝 부분에서 아래로 3㎝ 정도가 남아 있고 아궁이 부분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가마터 앞쪽으로 도로가 완성되면서 가마의 앞부분이 잘리게 되었으며, 현재 가마터는 시멘트로 석실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이 가마터 부근이나 산등성이 너머의 경작지에서는 많은 수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어서 그 전체 영역이 현재 파악된 지역보다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가마의 일부만 남아있지만 부여읍 안에 남아있는 유일한 토기 및 기와 가마터로서 그 의의가 크다.

20.부여 궁남지

종 목 사적 제135호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

시 대 백제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로와 물가·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연못의 규모 또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일종의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한다.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린다.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21.부여 정림사지

종 목 사적 제301호

지 정 일 1983.03.26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시 대 백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22.부여 능안골 고분군

종 목 사적 제420호

지 정 일 2000.07.22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75-7

시 대 백제

백제 능산리 무덤 동쪽에 있는 백제나성(사적 제58호)이나 청마산성(사적 제34호)과 함께 있는 백제 무덤이다.

1995∼1996년 사이에 조사되어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30여기, 돌덧널무덤(석곽묘) 20여기, 독무덤(옹관묘) 4기 등을 발견하였다. 홑무덤(단장묘)이나 합장묘, 어린아이 무덤 등 다양한 형태로 매장되었는데, 주 · 사 등의 옷감 및 금귀고리, 은제관장식과 띠드리개장식(요대장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형식과 출토된 유물을 통해 6∼7세기경 백제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백제 후기 무덤형식과 의복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23.부여 화지산 유적

종 목 사적 제425호

지 정 일 2001.01.04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05

시 대 백제

부여 궁남지(사적 제135호) 동쪽에 위치한 화지산(해발 10∼48m인 야산)은 백제 이궁지인 망해정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곳으로서, 지난 '86년에 충남대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 초석과 와편들이 다량 출토된 유적지이다.

2000. 5월부터 8월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추가 발굴조사한 결과에서도 백제에서 조선시대에 걸친 건물지, 분묘, 목책시설 등 다양한 유구 및 유물(건물지5, 석곽묘11기, 토광묘<민묘>18기, 석축시설, 출토유물 50점 등)이 확인되어 이 일대가 백제시대 이후 계속적으로 거주지 또는 묘역으로 활용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24.부여 관북리 유적

종 목 사적 제428호

지 정 일 2001.02.05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33 외

시 대 백제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33번지에 위치한 이 유적은 현재 왕궁지로 알려져 있으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남쪽일대 184필지 95,048㎡(28,780평) 중 33필지 2,102㎡는 '83년 9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43호 전백제왕궁지로 지정되어 있다.

'82년부터 이 일대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가 발견되었고, '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삼국시대의 궁궐 중 고구려의 안학궁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신라와 백제의 왕궁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백제시대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 유적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25.부여 능산리 사지

종 목 사적 제434호

지 정 일 2001.09.29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5-1 외

시 대 백제

능산리 절터는 부여능산리고분군(사적 제14호)과 부여나성(사적 제58호) 사이에 위치한 백제시대 절터유적으로, 1992년부터 2000년까지 6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이른바 일탑일금당의 전형적인 백제 가람형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1993년 이 절터 내의 공방으로 생각되는 건물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출토되어 백제의 높은 금속공예기술 수준과 예술 역량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향로와 함께 출토된 '백제창왕명사리감(국보 제288호)'에는 사리를 모신 때와 공양자 및 절이 세워진 연대를 알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사리감에 새겨진 기록으로 보아 이 절은 왕실에서 지은 국가 사찰로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군에 축원을 빌기 위한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창건연대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역사학과 건축공학, 고고학, 미술사학의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26.부여 구드래 일원

종 목 명승 제63호

면 적 2,519,062.67㎡

지 정 일 2009.12.09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1 등

‘구드래’는 부소산 기슭의 백마강 가에 있는 나루터로,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추측된다.

『삼국유사』에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 드리러 가는 길에 사비수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께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 이 곳을 ‘자온대’라 불렀고, 이 이름이 구들돌, 구드래로 변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백제와 왜를 오가는 배들이 이 나루로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들어왔는데, 왜가 백제를 부를 때 ‘구다라’라고 부른 것은 ‘구드래’와 관련된 것이라고도 한다.

구드래 나루를 건너 울성산 남쪽 기슭에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세운 왕흥사가 있고, 옛 문헌에 ‘사비의 강’으로 기록된 백마강이 부소산을 감싸며 흐르고 있다.

백마강 양쪽에는 왕흥사와 호함리 절터, 부소산성, 부여나성을 비롯한 당시의 유적들이 있는데,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유서깊은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27.보부상 유품(1)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30-1호

지 정 일 1973.07.16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계백로 352 (동남리 16-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저산8구 상무좌사 보부상이 사용했던 유품이다. 저산8구(苧産八區)란 모시가 많이 생산되던 부여 · 홍산 · 남포 · 비인 · 한산 · 서천 · 임천 · 정산 등의 8읍을 말하고, 상무좌사(商務左社)란 등짐장수로만 이루어진 조직을 가리킨다. 이 조직에는 최고 고문인 영위가 있고 그 다음으로 반수가 있었으며 그 아래로 실무를 담당하는 장무원이 있었다.

상무좌사 보부상 유품으로는 이들이 사용하던 도장 4개, 보부상의 증명서인 신표 2매, 물미장(촉작대)과 패랭이가 있다. 특히 물미장(촉작대)과 패랭이는 보부상 단체의 상징이 되는 유물이다. 물미장은 등짐장수의 지게를 버티는 끝에 촉(물미)을 박은 작대기로서, 조선 태조가 하사하였다는 물미장을 본 떠 만든 후, 8각으로 용의 문양을 조각해 놓아 ‘용장’이라고도 한다. 패랭이는 평소에 보부상이 쓰고 다니는 모자로서, 특히 매년 음력 2월에 열리던 보부상 명절인 총회 때에는 모자의 양쪽에 솜방망이를 달아 장식하였다. 이밖에 총회 때 사용되던 청사초롱과 『비변사완문』을 비롯한 전적류가 약간 남아 있다.

이 유물들은 한말 보부상의 역사와 조직 및 그 기능과 상업활동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28.보부상 유품(3)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30-3호

지 정 일 1980.11.29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계백로 352 (동남리 16-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저산 8구상무우사의 보부상 유품이다. 저산8구란 모시가 많이 나는 부여 · 홍산 · 남포 · 비인 · 한산 · 서천 · 임천 · 정산 등 8읍을 말하는데,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상행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유품으로는 우사조직의 고문격인 영위의 도장과 실무자가 사용한 도장 및 도장을 넣어두던 상자가 있다. 이 밖에 깃발 2매, 각 읍의 군수나 현감이 상무우사의 좌상이나 회원 집사 등을 임명하는 차정서 25건, 진영의 장이나 관찰사에게 올린 소지 43건, 행정기관에서 받은 전령 등이 남아 있다.

각종 상무사 관계 서류인 전적도 18종 남아있는데, 이들 문서는 특히 지방 관청과 보부상 단체와의 관계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9.전 박신용장군 의대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10호

지 정 일 1980.04.0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박신용 장군(1575~1627)은 광해군 10년(1618)에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권지중군이 되었으며, 정묘호란때 후금의 군사와 싸우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고종22년(1885)에 유의각을 세우고 이 유물들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1874년 민병승이 찬한 신도비명이나 1896년 이설의 유의각비문에 의하면, 당시에 시신을 찾지 못하여 집에 있던 박신용 장군의 유의와 신발은 허묘를 만들어 매장하였으며, 그 후 숙종 11년(1685)에 병조참지를 증직받고 영조 27년(1751)에 정려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 의복들의 형태로 미루어 박신용 장군 사후 숙종에서 영조대 사이에 증직, 정려되는 과정에서 후손에 의하여 몇 차례에 걸쳐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단령과 철릭, 괘자 등의 형태가 박신용 장군의 생존 시기의 특성을 보이지 않고, 그보다 100여년에서 200여년 이후인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특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유물로는 관복1점, 청철릭, 홍철릭 각1점과 전복으로 입었던 답호와 허리에 매던 대 3점이 남아있다.

관복은 깃모양이 둥근 단령이며 소매가 넓은 홑겹의 모시로 만든 옷으로 길이는 134㎝이다. 아쉽게 가슴과 등뒤에 수놓인 흉배가 없는 것이 흠이다. 청철릭은 푸른색의 철릭으로 철릭이란 조선시대 문무관리들이 외국사신으로 파견될 때나 국난을 당했을 때 임금을 호종할 때 착용하던 옷이다. 이것은 푸른색 명주로 만들었고 품이 32㎝, 치마길이는 94㎝이다. 홍철릭은 청철릭과 비슷한 크기와 모습을 하고 있으나 붉은색 명주로 만들어 졌다. 전복은 평상복위에 걸쳤던 것으로 소매가 없고 덧 대는 천인 무와 섶이 없는 옷이다. 겉은 보라색이고 속과 동정은 흰색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가 퍼진 모양이다.

30.부여 여흥민씨 고택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92호

지 정 일 1984.12.24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왕중로 87 (중정리 537-1)

시 대 조선시대

나지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넓직한 터에 남향으로 자리잡은 조선 후기의 주택이다. 사랑채 기와에 ‘숭정 87년’(1705)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건립연대와는 관련이 없는 듯하며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一'자 모양의 대문채 뒷쪽에 안채가 있고, 안채와 대각선상에 사랑채가 배치되어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 앞쪽으로는 최근에 복원한 줄행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왼쪽부터 부엌·큰방·대청·작은방·안마루 순으로 구성된 8칸집으로, 오른쪽에 돌출하여 덧붙여진 안마루가 특이하다. 사랑채는 광과 중문간·부엌·사랑방·마루로 배치하였는데, 안채와 비슷한 구조기법을 보이고 있지만 안채보다 높게 지어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중문은 들어서면서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1칸 꺾어 통하게 하였다.

전형적인 양반집의 배치를 보이고 있는 집으로 주위에 있는 오래된 나무들이 예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31.부여 군수리 고택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93호

지 정 일 1984.12.24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신기정로94번길 17-8 (군수리 463-2)

시 대 조선시대

군수리 사지 옆 평야마을에 동향으로 세운 초가이다. 안채와 헛간채, 그리고 최근에 지은 헛간채가 있다. 안채는 건축양식으로 보아 18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헛간채는 1938년에 지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안채는 안마당을 앞에 두고 '一'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큰방과 작은방·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왼쪽 뒤로 헛간채가 있는데, 방과 광·잿간·헛간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형태이다. 부엌에는 조왕신을 모시는 가정신앙이 살아 있다. 마당과 뒤안 등에는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석물들이 많이 흩어져 있다.

대체로 지을 당시의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안채가 초가로는 격이 높은 민가이다.

32.전세 맹고불 유물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225호

지 정 일 1990.10.10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고불 맹사성(1360∼1438)의 유품 5점(옥적, 백옥방인, 채석포도문일월연, 수정죽절비녀, 목칠도형배)이다. 맹사성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1386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후,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좌랑을 시작으로 1427년 우의정이 되었다. 우의정으로 있으면서『태종실록』편찬의 감수를 맡았는데, 세종임금이 실록을 보고싶어 하자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사관이 두려워 일을 할 수 없다.” 하며 반대했다. 집을 들어오고 나갈때는 항상 소를 타고 다녀 사람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몰랐다고 한다.

유품 5점 중 옥적은 피리의 일종으로 백옥으로 만든 것이며, 백옥방인은 손잡이에 당사자를 큼직하게 새긴 옥도장이다. 채석포도문일월연은 우리나라에 많이 있는 자색 벼루의 일종이며, 수정죽절비녀는 수정을 대나무 밑둥처럼 다듬어 머리를 만들고 몸통에 구리판을 말아 끼운 비녀이다. 목칠도형배는 해당화의 밑둥치로 만든 표주박으로, 휴대하여 쓰는 음료수잔이다.

유품들 가운데 옥적과 도장에 새긴 시문구 등은 음악과 시에 조예가 깊었던 맹사성선생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33.부여 신동엽 가옥 터

종 목 등록문화재 제339호

지 정 일 2007.07.03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신동엽길 12 (동남리 501-21)

시 대 조선시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시인 신동엽이 살았던 집의 터이다.

민중의 강렬한 저항의식을 시화(詩化)한 신동엽(1930∼1969)은 이 자리에 있던 가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결혼한 뒤에도 살았다.

1985년 유족과 문인들이 이곳에 새롭게 건축물을 지어 현재 기념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신동엽의 주요 저서로는 《삼월》, 《발》, 《껍데기는 가라》 등이 있다.

2019.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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