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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정약용의 업적 좀 알려 주세요
kj**** 조회수 2,240 작성일2018.04.12
학교 숙제 여서 그런데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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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丁若鏞, 1762 ~ 1836 , 영조 38 ~ 헌종 2 >  
 
실학 사상을 집대성한 조선의 대학자 정약용 

조선 후기의 실학 사상을 집대성했으며 여러 방면에 뛰어난 천재적인 학자였다. 
저서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이 있다.


정약용이 세상에 남긴 업적은 무엇일까? 
정약용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 했다 

정약용은 토지와 사회 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실학과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자고 한 북학파의 주장을 서로 보완하여 실학을 집대성했다. 그는 또 학문을 연구하는데 있어 이론만 따지는 것을 버리고 대신 이론과 실천을 함께 갖추자고 주장했다.

500 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책을 지은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제시하여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제거하고, <경세유표>에서는 국가와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위한 원칙을 제시했다. 또 <흠흠신서>를 통해 죄인을 다스리는 형벌에 억울한 피해자가 없도록 지방관의 의식과 행동에 관한 지침을 제시했다.

그는 또 화성을 세울 때, 서양의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거중기와 수레를 직접 제작한 후 실제로 사용해 성을 쌓는 비용을 크게 줄이기도 했다.

2018.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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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선생님은 수원화성을 건설할때 거중기를 제작하여 건축기간을 많이 단축하셨고,

모함을 받아 유배되있는 동안에 여러 책을 쓰셨습니다.

그중 3권을 소개해드리자면

1.경세유표

2.흠흠신서

3.목민심서가 있겠네요

제가 6학년이라 이번에 배운 것밖에 써드리지 못하겠네요^^

부디 도움되길 바라겠습니다ㅎㅎ

2018.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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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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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집대성, 북학과의 만남

『여유당전서』정약용의 학문은 이익의 학문과 서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북학파, 채제공, 노론학자들 간의 교분과 토론 등을 통하여 그 폭이 확대되었다.

다산 정약용을 흔히 성호학파의 좌파로 분류하고, 실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직접 성호 이익( )을 사사한 것은 아니다. 그가 15세 때 다시 벼슬길에 오른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야 비로소 이익에 대하여 알게 되었는데 이때는 이미 이익이 사망한 상태였다. 이익의 가르침은 유고(稿)를 통한 것이었다. 고향 마재에서 약현(), 약전(), 약종 세 형 밑에서 기초 학문을 익힌 정약용은, 서울에 온 15세 때에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 등 남인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성호 이익의 학문에 접하게 되었고, 성호의 제자들을 통해 사숙함으로써 성호학파의 막내로 입문하였던 것이다.

그의 가문이 재등용된 것은 정조가 즉위하면서였다. 그 후 그의 영달은 정조의 후의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정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 북학파와 교유한 것은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어 정조의 문화 정치 상징 기관인 규장각에서 일하면서였다. 이때 맺은 북학파와의 교분은 그의 인생 후반기에 가서 추사 김정희( )와의 교제로 이어진다. 정조 조정에서 장기간 재상을 지낸 채제공과의 인연 또한 그의 경세 사상과 관련이 있다.

그의 서학 사상 수용에는 이벽()의 영향이 컸다. 이벽은 정약용 맏형수의 아우로서 사돈 간인데, 23세 때인 1784년 4월 집안 일로 그와 만나 서학의 상세한 안내를 받고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뒷날 그에게서 『천주실의 』를 얻어 보고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종교적 차원으로 발전을 한 것이다.

1818년 유배에서 풀려 귀향한 이후에는 당색을 초월하여 학문적 교유를 했다. 환갑이 되던 1822년 봄 김매순()1)과 경의()에 대한 문답을 하고, 6월에는 신작()2)과 『주례 』의 육향지제()를 논했다. 72세 때인 1833년에는 홍석주()3)가 연경에서 가져온 완원()의 『십삼경교감기 』를 빌려 읽었고, 『상서』에 대해 토론했다. 홍석주와 김매순은 연대문학()으로 당대에 날리던 학자들인데, 이 노론계 학자들과의 토론은 정약용의 학문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실학자 정약용의 면모는 경학 연구와 경세론()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된다. 『상서』를 핵으로 하는 경학 연구는 성리학자로서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었다. 정약용이 살다 간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은 조선이 중세 농경 사회에서 근대 상공업 사회로 변화하는 시기이므로, 중세 농경 사회에서는 합리적 사상이었던 성리학이 더 이상의 시대적 역할을 상실했을 때였다. 이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근기남인 학파는 원시유학인 육경학의 연구로 선회했지만, 시대는 그보다 좀더 전진된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정약용은 실학으로 제기된 북학 사상에 주목하고, 과학 기술에 관심을 집중, 전환함으로써 북학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그의 경세론 부분은 이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다.

기중기(왼쪽)와 거중기(오른쪽)

정약용은 선교사 J. 테렌츠가 중국에 소개한 기중기를 참고하여 거중기를 제작, 수원성 축조에 활용하였다.

정약용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종래의 세계관을 탈피하여, 지구는 둥글고 자전하며 지구상에는 수많은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기술을 천시하던 종래의 유교적 통념을 비판했고,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기술의 발전을 확신했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인륜을 가졌다는 점 외에 기술을 소유한다는 점과,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는 점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기술 문명에서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서양의 근대 기술 문명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므로 부국 강병 및 이용후생과 직결되는 농업 기술, 방직 기술, 군기 제조 기술, 의료 기술의 혁신을 무엇보다 중요시했다. 이용감()이라는 관청을 신설하여 ‘북학으로 오로지 직책을 삼을 것()’ 을 주장한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약용의 문학관은 기본적으로 도문일치론()에 입각했다. 문학 작품은 ‘도()’ 라는 철학 내지 사상을 탐구하는 학문적 축적에서 발원하는 것이지 손끝의 잔재주나 기예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당시의 퇴폐적인 문풍()을 비판하고 순정()한 문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조의 문체반정에 적극 동조한 데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스스로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시는 긴요한 것은 아니지만 성정()을 도야하는 데 무익한 것은 아니다.”하여 시의 공용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소설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3,000수에 가까운 시와 부()를 비롯하여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현존하는 『여유당전서 』에 수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실학의 집대성, 북학과의 만남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2002. 12. 10., 현암사)

1. 정약용의 키워드


시대 ▶ 1762년~1836년
별명 ▶ 정조의 남자, 실학 보이, 발명왕, 원고 기계
좌우명 ▶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 정치를 하자.
요즘 드는 생각 ▶ 어떻게 하면 농민들이 토지를 고루 나눠가질 수 있을까?
취미 ▶ 발명
역사적 중요도 ▶ ★★★★☆
시험 출제 빈도 ▶ 높음

2. 정조의 남자라고 불린 뛰어난 실학자


정약용과 정조는 서로 떼놓고 이야기하기 힘들 정도로 상대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에요.

정약용은 정조의 남자라 불릴 정도로 정조의 깊은 사랑을 받으며 학자로서, 관리로서 성장했지요.

정약용은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실학자이기도 해요. 정조가 세운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일했지요.

이후 정조가 죽자 유배지에서 약 500여 권의 책을 썼어요.

3. 수원 화성을 지을 때 큰 역할을 하다


정약용은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건설할 때 중심 역할을 했어요.

정조는 미리부터 성 쌓기에 관련된 책들을 구해 정약용에게 연구하도록 했지요.

정약용은 정조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어요. 서양의 기술 서적,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책까지 모조리 연구하며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답니다.

4. 거중기를 만들어 화성 건축 기간을 앞당기다


화성에 가 본 적이 있나요? 그 정도 규모의 성을 쌓으려면 당시 기술로는 약 10년이 걸리는 대공사였어요.

하지만 정약용 덕에 수원 화설의 건축 기간은 2년 9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지요.

정약용은 『기기도설』이라는 서양 책을 참고하여 무거운 돌을 쉽게 들어 올리는 거중기라는 기계를 만들었어요.

그 덕에 수원 화성을 지을 때는 노동력을 예전보다 덜 사용하고도 성을 쌓을 수 있었답니다.

5. 배다리를 만들어 정조의 화성 행차를 돕다


정약용은 또 다른 정조의 고민거리를 해결해 주었어요. 정조가 아버지의 능과 화성이 있는 수원에 가기 위해서는 한강을 건너야만 했지요.

임금과 함께 가는 일행의 수는 꽤나 많았어요. 이 인원이 모두 배로 건너는 것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과학적이지 못했지요.

그래서 정약용은 배다리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배를 가로로 잇대어 연결한 다음 그 위에 판자를 깔고 또 흙으로 덮었지요.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고도 빠르게 한강을 건널 수 있게 된 거지요.

6.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펼치다


정약용은 현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학을 연구하는 학자이기도 했어요.

당시 조선은 땅을 가진 양반 지주들은 부자로 떵떵거리고 사는 반면 정작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자신의 땅도 없는 사람이 많았어요.

정약용은 이런 상황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지요.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이 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정약용은 부패한 조선 사회를 위해 농업 부문을 가장 먼저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답니다. 특히 토지 제도를 개혁해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자고 하였지요.

7. 고종훈의 5분 강의 - 정약용

출처: 생방송 한국사 6


2018.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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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룽
지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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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이다. 실학자로서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을 주장한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가 한국 최대의 실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개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을 떠올리면 오랜 시간 동안 겪어야 했던 귀양살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귀양살이는 그에게 깊은 좌절도 안겨주었지만, 최고의 실학자가 된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귀양살이라는 정치적 탄압까지도 학문을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 학문적 업적을 이뤄낸 인내와 성실, 그리고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성실을 제일로 친 사람이었다. 그의 방대한 저작은 평생을 통하여 중단없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탄생한 것이다.

수학과 관료생활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진주목사의 벼슬을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마현은 한강의 상류로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정약용은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세 이전에 이미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을 편찬했다.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은 약용의오른쪽 눈썹에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나뉘어 '삼미()'라 불린 이유로, 큰 형 약현이'삼미집'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어릴 적 스승은 부친이었다. 10세 나이에 경사()를 읽기 시작하고, 16세부터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를 읽었다.

마현에 터를 잡은 그가 서울 출입을 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15세에 서울 회현동 풍산 홍씨 집안으로 장가들면서부터이다. 본격적인 입신의 생활은 20대부터였다. 22세에 초시에 합격하였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교유 관계를 넓혔다. 성균관 재학 시에 이미 정조에게 인정을 받았고 28세에 마지막 과거시험인 대과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갔다.

정약용은 23세에 이벽()으로부터 서학(西)에 관하여 듣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서학에 심취했던 과거로 인해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정약용은 20대 초반에 서학에 매혹되었지만, 이후 제사를 폐해야 한다는 주장과 부딪혀 끝내는 서학에 손을 끊었다고 고백했지만, 천주교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오해를 받았다.

천주교 문제가 터지기 전, 그의 관료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관직은 희릉직장()으로부터 출발하여 가주서(), 지평(), 교리(), 부승지() 및 참의() 등으로 승승장구하였다. 주교사()의 배다리 설계, 수원성제와 기중가() 설계 등 빛나는 업적도 많았다. 한때나마 외직으로 내몰리기도 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고마고() 개혁, 가좌부(簿) 제도 개선, [마과회통()] 저작 등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정약용은 가장 이상적인 관료가였다. 배다리와 기중가의 설계에서 이미 재능을 펼쳤지만, 그의 저작에서 엿보이는 정치관은 기본적으로 민본()이었다. 정약용은 왕정시대에도 주민 자치가 실현되기를 소원한 인물이다. 조선후기를 살았던 인물이었지만, 소박하게나마 민주주의를 지향한 인물이었지 않았을까.

[네이버 지식백과] 정약용 [丁若鏞] - 실학을 집대성하여 부국강병의 꿈을 꾸다 (인물한국사)

2018.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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