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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기생 한우(寒雨)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비공개 조회수 9,015 작성일2008.08.02

기생 한우(寒雨)는 임제와 주고받은 시로도 유명하다고 알고 있는데요.

한우의 일생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분 있으신가요?

어떻게 살고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이런 내용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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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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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예절, 의식 1위, 사회문화 1위, 폭행 15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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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드립니다.

 

기생(妓生) 한우(寒雨)[년대미상]
기생(妓生) 한우(寒雨)는 재색을 겸비하고 시서에 능했으며, 거문고와 가야금이 뛰어났고, 노래 또한 명창이
었다지요. 그녀는 풍류남아 임제가 부르는 한우가(寒雨歌) 한 곡조에 마음의 빗장을 풀고 깊고도 불같이 뜨거운 정염의 밤을 보내고 일편단심으로 풀 숲의 바람처럼 스쳐간 짧은 한 순간의 사랑을 간직한 채
임제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다 一生(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당시의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임제의 선비와 주고 받는 문장의 시조가 있을 뿐이지요.

옛날 우리선조들의 발 자취를 남녀 구분이 뚜렸하여 함부로 여성들의 품의에 대해 기록이 드물지요.

왕가가 아닌 이상 찾기는 어렵습니다.

 

기생(妓生) 한우(寒雨)에 대해 아래에 잠깐 기록을 했습니다만 그것도 임제(林悌)가 있어 기록이 있으나 나머지는 전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참고 : 고려나 조선시대에 있어서 기생은 천인(賤人)계급에 속했습니다.



 가야금의 선율(旋律)에 밤은 깊어가고
 
 
1.  한우가(寒雨歌)-임제(林悌)와 한우(寒雨)의 풍류(風流)
 
사색당쟁이 싫어서 벼슬도 버리고 산골에 묻혀 살다 죽은 천재시인 임제(林悌).
조선 팔도 전역의 많은 기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또 한편으로는 많은 기녀들을 울리고 눈물 짓게 했던 임제는 풍류한량이자 자유 분방한 시인이다. 가는 곳마다 여인이 있고, 술이 있고, 시가 있었다. 안 가 본 색주가가 없고, 모르는 기생이 없고, 그의 발길이 가지 않은 명승지가 없었다. 산수로 오유(娛遊)하며 풍류 속에서 살았다. 마치 조선 최후의 풍류남아 안민영(安玟英)과 대비 될만하다고나 할까? 
 
수 많은 여인들과 염정을 뿌렸던 그는 한우에게는 차가운 사람이었다. 사랑도, 세상도, 인생도 한 갓 뜬구름 같다며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의 여인 기생 한우(寒雨)가 붙잡는 옷소매를 뿌리친 것을 보면....
 
기생 한우(寒雨)는 재색을 겸비하고 시서에 능했으며, 거문고와 가야금이 뛰어났고, 노래 또한 명창이었다. 그녀는 풍류남아 임제가 부르는 한우가(寒雨歌) 한 곡조에 마음의 빗장을 풀고 깊고도 불같이 뜨거운 정염의 밤을 보내고 일편단심으로 풀 섶의 바람처럼 스쳐간 짧은 한 순간의 사랑을 간직한 채 임제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다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북천이 맑다커를 우장 업시 길을 나니
산의는 눈이 오고 들에는 챤비 온다
오늘은 찬비 마자시니 얼어 잘가 하노라
임제(林悌)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
원앙침 비취금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맛자신이 녹아 잘까 하노라
한우(寒雨)
 
임제의 한우가(寒雨歌)에 화답하여 기생 한우가 곱디 고운 손으로 퉁기는 가야금 선율에 맞추어 부른 노래로 뜨겁고도 은근한 열정단심(熱情丹心)이 잘 드러나 있다. 이만한 멋과 연심(戀心)을 은근하고 적나라 하게 표현한 시가 동서고금을 통하여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시조는 그 수변(修辨)의 솜씨에서도 뛰어난다. 기생 이름인 한우의 순수한 우리말은 곧 찬비가 된다. 따라서 '찬비'는 기생 '한우(寒雨)'를 은유한 것이고, '마자시니''비를 맞다'는 뜻도 되지만  '맞이한다()'의 은유이다. '오늘은 그리던 한우 너를 맞았으니'의 뜻이다.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자게 되었다찬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니 얼마나 차가운 여인이겠으며 그러니 얼어 잘 수밖에 더 있겠는가 라는 직역도 가능하지만, '얼어 잘까''임 없이 혼자 웅크리고 자는 이불 속의 쓸쓸함' 을 암시하고 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한우의 화답은 더욱 뛰어난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무엇 때문에 찬 이불 속에서 혼자서 주무시렵니까. 저와 같이 가슴 맞대고 따뜻하게 주무십시요,' 하는 은근한 정담(情談)이다. 찬비 맞았으니 마땅히 언 몸을 녹여 자야지요 하고 임제의 꽁꽁 언 손을 자기의 고운 손으로 감싸 쥔 채 뜨거운 가슴에 묻게 하는 기생 한우의 다정다감한 모습은 우리의 숨결을 일 순 멈추게 한다. 비록 이름은 찬비이지만 실제로는 뜨거운 가슴을 지녔기에 아무리 꽁꽁 언 몸이라도 포근히 녹여 드릴 수 있다는 기생 한우의 풍류와 사랑........
 
불타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여인이 어찌하여 한우(찬비)라는 이름을 가졌을까?
그 면면(綿綿)한 정한(情恨). 이런 경우를 백낙천은 '비취금 차가운데 누구와 같이 잘까(鴛鴦瓦冷霜華重 翡翠衾寒誰與共)'라고 탄식했으나 한우의 시에 미치지 못한다. 이쯤 되면 도저히 남자들에게 노래와 춤과 웃음과 하룻밤 풋사랑을 파는 기생이랄 수 없다. 뛰어난 시인이다. 진정 낭만을 알고 사랑을 불태울 줄 아는 그런 여인상이다.

!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의 한이여.......
 
 
낭만도, 정취도, 사랑의 향기도 잃어버린 채 현재를 메마르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저 두 연인의 짧은 하룻밤의 사랑의 뜨거움 속에 맴도는 그 사랑의 절절함이 또 그 아련함이 너무나 멀기만 한 것 같다.  400여 년 전의 이들의 로맨스야말로 가히 시대를 넘나드는 사랑의 압권이 아닐까. 오늘의 숨 쉴 틈도 없이 빠른 속도를 바탕으로 휩쓸려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진본청구영언(珍本靑丘永言)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임제는 자를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라 하며 금성인(錦城人)이다. 선조 때에 과거에 급제, 벼슬은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타며, 노래를 잘 불러 호방한 선비였다. 이름난 기생   한우를 보고 이 노래를 불렀다. 그날 밤 한우와 동침하였다.
 
 그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음은 아쉬운 일이다. 그녀에 대한 기록으로는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에는 '규수(閨秀)', 해동가요 에는 '명기구인(名妓九人)'이라 하여, 아홉 기생 중에 넣은 것이 전부다.
 
 
2.  임제의 문학
 
임제(林悌)는 자()를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 또는 겸재(謙齋)라 하며 본관은 나주이다. 절도(節度)()의 아들로 명종 4(1549)에 나서 선조 20(1587)까지 산 사람이다. 선조 9년에 생원 진사에 급제, 1577년에 알성시에 급제하여 벼슬은 예조정랑 겸 지제교에 그쳤으나, 재주가 뛰어나고 문장이 탁월하여 시를 잘 쓴 풍류남아였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에는 그의 인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고집이 있어 벼슬에 높이 오르지 못하였으며, 선비들은 그를 법도 밖의 사람이라   하여 사귀기를 꺼려 하였으나, 그의 시와 문장은 서로 취하였다.
일찍이 그는 속리산에 들어가 대곡(大谷) 성운(成運)에게 사사(師事)하였으며, 이율곡, 허균, 양사언 등과 교우하였다.
 
그는 또한 우리 소설사에서 '화사(花史)'라는 가전체소설(의인소설)을 써서 의인문학(疑人文學)의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소재영님은 <백호(白湖)와 석주(石洲)의 소설사적 위치>에서 이렇게 말한다.
백호 임제와 석주 권필(權畢)은 우리 소설사에서 작품의 새 스타일을 개척한 양대 작가로 재인식되어야
  한다. 의인문학을 꽃피운 화사(花史)에서 임제의 소설가로서의 재능을 본다면, 심성의 차원 높은 형이상학 수성지(愁城志)를 통해 그의 창조적 태도나 사상의 깊이를 재확인한다.... 더욱이 이들 작품은   작가의 생애에서 우러난 강렬한 작가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어 진정한 문학정신의 구현이란 점에서도   높게 평가할 만하다. 

그는 이씨 조선의 대표적 멋쟁이요 한량(閑良)이었다. 40을 채우지 못한 채 요절한 그였지만, 여인들과 많은 염문과 정화(情話)를 뿌리고 간 사람이다.
 
한 번은 임제가 좋아하는 기생에게 부채를 선사하였다. 부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막괴융동증선지(莫怪隆冬贈扇枝)           엄동에 부채를 선사하는 이 마음을
이금년소기능지(爾今年少豈能知)
            너는 아직 나이 어려 그 뜻을 모르겠지.
상사반야흉생화(相思半夜胸生火)
          그리워 깊은 밤에 가슴에 불이 일거든
독승염증육월시(獨勝炎蒸六月時)
            오유월 복더위 같은 불길을 이 부채로 식히렴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 부채를 보내는 심사는 심술궂지만, 그 차원 높은 역설의 논리엔 정회(情懷)와 낭만(浪漫)이 넘친다. 정녕 그리운 정경이다.
 
그는 한시문에 능하여 백호집(白湖集)에는 주옥같은 작품 700여수가 전하는데, '막여정이간(莫如精而簡)'이라 한 종제(從弟) 임서(林壻)'후식(後識)'을 보면, 그는 양보다 질에 치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시뿐만 아니라 시조 6수를 남겼는데 모두가 여인들과의 사랑의 노래다. 
 
 패강가(浿江歌)
 
패강아녀답춘양(浿江兒女踏春陽)               평양의 아가씨들 불놀이를 가는데
강상수양정단장(江上垂楊正斷腸)  
            강변의 수양버들 애를 끊게 하누나.
무한연사약가직(無限烟絲若可織)
                  하늘하늘 실버들로 비단을 짠다면은
위군재작무의상(爲君裁作無衣裳)
                임 위한 춤옷이나 지어서 드릴 것을
  
 규원(閨怨)  
   
십오월계녀(十五越溪女)         열다섯 갓 넘은 어여쁜 아가씨
수인무어별(羞人無語別)
          수집어 말 못하고 임을 보내고,
귀래엄중문(歸來掩重門)
         돌아와 겹겹이 문 걸어 닫고는
읍향이화월(泣向梨花月)
           이화(梨花)에 달 밝은데 눈물 짓누나
 
 
3.  임제의 청춘과 유랑(流浪)
 
 임제와 기생 일지매(一枝梅)와의 로맨스는 유명한 이야기다.
 일지매(一枝梅)는 색향으로 이름난 평양의 명기였다. 그녀는 용모자태와 문장가무가 뛰어났는데, 그런 만큼 성품이 매우 도도했다.()도 권력도 그녀를 사로잡을 수 없었다. 뭇 남성들이 그녀와의 하룻밤 염정(艶情)을 위하여 줄을 서는 그런 대상이었다.

 어느 해 여름, 임제가 평양에 들렀다. 일지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시재(詩才)를 동원하여 그녀를 굴복시키고 싶었다. 남루한 생선장수의 옷 차림으로 황혼 무렵 그녀의 문전을 찾아 몸종과 생선을 흥정하는 체하며 시간을 끌어, 마침 어둑어둑해지자 드디어 그 집 문간방에서 하루 저녁 자고 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어스름한 여름 저녁이 깊어가자 홀로 쓸쓸한 방에서 팔을 베고 누워 창 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달이 떴는지 때마침 교교한 달빛이 창살에 흘러 들고 있다. 그때 낭랑한 거문고 소리가 달빛을 타고 들려왔다.

 그 날 저녁 따라 주연(酒宴)의 은성(殷盛)함에 비해서 홀로 있는 밤은 일지매에게 못 견디게 외로움을 안겨 주었다. 밤 깊어 엄습하는 고독이 그녀로 하여금 거문고를 희롱하게 했다. 적막한 달밤의 청아한 거문고 소리는 잠 못 들어 심란한 나그네 임제의 방에까지 흘러 들어왔다. 임제는 마침 이 때다 싶어 허리춤에서 피리를 꺼내 거문고 소리에 화답했다. 절세의 화음이 여음을 남긴다.

 놀란 것은 일지매. 자신의 거문고 소리에 화답한 사람은 누구일까? 일지매는 끌리듯 뜰에 내려섰으나 기척도 없다. 담장 너머를 쳐다보며 기웃거려도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그냥 섬돌 위에 올라서는 일지매.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쉬며 탄식이 새어 나온다.
 
"원앙금을 누구와 함께 잘까...."
 일지매의 독백.
 "나그네의 벼갯머리 한 끝이 비었는데...."
 임제의 대구(對句).
 
일지매는 다시 한 번 놀란다. 문간방에 든 사람은 생선 장수였는데, 틀림없는 생선장수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녀는 문간방 앞으로 다가가며 말을 건넨다.
 
"어인 호한(好漢)이 아녀자의 약한 간장을 녹이는고...."

 새옷을 갈아 입은 한량과 술상을 사이에 둔 일지매!  정담(情談)과 화창으로 밤 가는 줄 모른다.
 
 
4.   한번 떠나가면 돌아올 줄 모르느니
 
견송도명기 황진이총상 작사조지 (見松都名妓 黃眞伊塚上 作詞弔之)       
 
이 시조는 임제가 평안평사가 되어 부임하면서 황진이를 찾았더니, 벌써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장단에 있는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 읊었다는 것으로 '송도의 명기 황진이의 무덤을 보고 이 노래를 지어 조문하다.
 
(見松都名妓 黃眞伊塚上 作詞弔之)'란 기록이 해동가요에 실려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뭇쳣난다.
() 잡아 권()하리 업스니 글을 슬허하노라
 
 이 작품에 대해 유몽인의 어우야담 에는 백호(白湖)가 진이(眞伊)의 무덤에서 치제(致祭)할 때 부른 노래란 기록이 이렇게 전한다.
 
금송도대로변(今松都大路邊) 유진이총(有眞伊塚) 임자순(林子順)  위평안평사(爲平安評事)  
위문제진이(爲文祭眞伊)  졸피조평(卒被朝評)
 
지난날 술잔을 들며 시로써 화창하던 일이 어젯일 같거늘, 벌써 타계하여 무덤엔 잡초만 우거졌구나.! 허망한 것은 인생! 그 아름답던 자태, 그 요량한 노랫소리, 눈앞에 삼삼하여 귓가에 쟁쟁한데 정녕 그대는 죽었는가? 아니면 나를 놀래 주려고 짐짓 누워 있는 거냐?
           
서화담의 죽음을 슬퍼하며 
 
()은 녯 산이로되 물은 녯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거든 녯 물이 이실소냐.
인걸(人傑)도 물과 갓도다 가고 아니 오난도다
 
 서화담(徐花潭)의 죽음을 한탄하던 황진이. 그녀 자신이 임제의 한탄의 대상이 된 것이다.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遺感)

 공산목락우소소(空山木落雨簫蕭)         빈 산엔 잎이 지고 궂은 비만 내리는데,
상국풍류차적막(相國風流此寂寞)
             상국(相國)의 풍유로움이 이제는 적막하구나.
 추창일배난경진(추창一盃難更進)            슬프다 한 잔 술을 다시 권키 어려우니
 석무가곡즉금조(昔無歌曲卽今朝)      옛날의 그대 노래가 바로 그대로구려.
 
 
 광해군 시절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 풍자하여 이름을 떨쳤던 석주 권필이 송강의 묘를 지나며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한 것이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遺感)이다.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불렀던 주인공 정철도 또한 남의 노래의 객이 되었다. 그것이 인생유전(人生流轉)의 법칙(法則)이며 자연(自然)의 섭리(攝理)이던가! 
 
서화담의 주검을 놓고 시를 남겼던 황진이의 송도 대로변에 있는 무덤에는 백호 임제가 술 한잔을 올려놓고 그 허망함을 노래하였고 그 몇 년 후에는 송강의 묘소에서 석주 권필이 송강의 장진주사를 아무리 불러도 대작할 상대는 묵묵부답으로 하늘은 여전히 짓 푸른 가운데 텅 빈 공허를 담은 술 한잔을 따르고 있다.
 
결국 한번 죽은 뒤에는 아무리 불러봐도 대답조차 없는 빈 메아리뿐이거늘 . 
 

 
북천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오다
오눌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1. 북천(北天) - 북녘 하늘
2. 맑다커늘 - '맑다 하거늘'이 줄어 든 것
3. 우장(雨裝) - 비옷
 
  
 
 


북녘 하늘이 맑다고 하기에 우장도 안 가지고 길을 떠났더니,
가는 도중에 날씨가 나빠져서 산에서는 눈이 어리고, 들에서는 찬비가 내리는구나
이래저래 오늘은 찬비를 맞았으니, 할 수 없이 얼어빠진 몸으로 잘 밖에 도리가 없겠구나.

 
 
 
  
 
이 시조는 <한우가(寒雨歌)>라고 하는데 온통 중의법으로 되어 있다. <찬비>란 당시 평양의 기생이었던 한우의 이름을 빗댄 것으로서, 은근히 그녀의 마음을 떠본 것이다. 곧 풍류객인 작가가 한우와 대작을 하다가 주흥이 도도해지자 <찬비를 맞았으니 얼어 자야겠다>고 한 것이다. 그 노래를 들은 한우는 그것이 곧 자기에게 보내는 애정의 표현임을 깨닫고 즉시 화답하는 시조 한 수를 지었던 것이다.
재치 있는 두 남녀의 감칠맛 있는 은근함과 운치가 넘치고 있다. 동시에 이 시조를 읽으면서 우리는 조선 시조의 한 속성을 알게 된다. 그것은 시조의 창작 태도이다. 극히 소수의 작가를 제외하고는 시조란 즉흥적인 노래였다는 점이다. 시조를 짓기 위하여 애쓰고 문학성을 발휘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락이나 취미를 본위로 하여 즉흥적으로 읊어 나간 것이 대부분의 시조이다.
고려말의 단심가와 하여가도 그런 태도로 지어진 것이다.
 
  
 
  
 평양의 명기 한우(寒雨)를 찾아가서 부른 노래인데 <寒雨 = 찬비>라는 이름에 빗대어 이렇게 읊었으니, 족히 작자의 풍류남아로서의 멋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한우가 화답한 노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임제[1549-1587]
한문소설인 추성지(秋城誌)의 작자로서, 선조초에 등제(登第)하여 벼슬이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이르렀으나, 벼슬에는 그다지 뜻이 없어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두루 찾아 다니며 짧은 일생을 풍류적으로 보내었다 한다.

 

 

 

답시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도 찬 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1. 어이 - '어찌'의 옛말. 어째서
2. 무삼 일 - 무슨 일로
3. 원앙침(鴛鴦枕) - 원앙새를 수놓은 베개로서 부부가 함께 베는 베개
4. 비취금(翡翠衾) - 비취는 물가에 사는 쇠새로서 온몸이 청황색의 아름다운 깃털로 덮여 있다. 비취색의 이부자리
 
  
 
 


어째서 얼어 자겠나이까? 무슨 일로 얼어 자겠나이까?
원앙새 수놓은 베개와 비취색 이불을 어디다 버려 두고서, 이 밤을 얼어 자려고 하시나이까?
오늘은 서방님께서 찬 비를 함빡 맞고 오셨으니, 덥게 몸을 녹여 가며 자 보려 하나이다.

 
 
 
  
 
이 시조는 임제의 <한우가>의 화답으로 지은 것이다. 임제는 대과에 급제하여 잠시 벼슬에 나갔으나 당시 선비들이 동서로 갈라져 다투는 것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 다니면서, 시와 술로써 여생을 보내다가 죽은 사람이다.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고 호방하고 쾌활한 시구와 염문을 남겼다. 이런 성격의 임제가 평양 명기 한우의 마음을 떠 보려고

북창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아 잘까 하노라

하고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한우는 즉석에서 받아 위의 시조를 불렀다고 한다. 임제의 마음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임은 물론이다. 우리는 이 시조를 통하여 조선 시대 선비들의 풍류와 여유, 이에 수응하는 기녀들의 재치를 엿볼 수 있다.

 
  

 

 

 


 
 
한우[년대미상]
선조대의 평양 명기로서, 백호 임제가 부른 노래 <북천이 맑다커늘……>에 화답한 노래가 위에 나오는 시조이다.
 

 

http://user.chollian.net/~kdong06/sijo/gs10_002.html

 

님의 답변이 너무 허술해서 송구스런 마음 헤아릴 길어 없습니다.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두 손 모아 빌겠습니다.

 

2008.08.02.

  •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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