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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임사홍은 왜 조선의 대표 간신이자 '소인'이 되었나?...연산군 '흥청망청'&채홍사와의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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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임사홍은 왜 조선의 대표 간신이자 '소인'이 되었나?...연산군 '흥청망청'&채홍사와의 관계는?
  • 류수근 기자
  • 승인 2018.04.08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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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류수근 기자]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잇속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공자의 말이다. 

조선시대 517년 역사를 통해 대표적인 ‘간신’을 꼽으라면 누가 될까? ‘임사홍’이라는 인물도 그 범주에 들어갈 듯하다.

8일 오후 방송되는 KBS 1TV '역사저널 그날‘은 ’간신‘ 2편으로 ’공공의 적‘ 임사홍에 관해 샅샅이 조명해 본다.

최원정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역사저널 그날’은 최태성 강사, 이익주 교수, 원동연 영화제작자, 임윤선 변호사 등이 패널로 출연해 우리 역사의 커다란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이다.

 

'역사저널 그날' 임사홍 [사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제공]

 

지난주 방송에서는 ‘간신’ 1편으로 세조부터 중종까지 5대에 걸쳐 정계에 머물면서 고변(고자질)으로 수많은 피를 불러왔던 유자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패널들은 높은 지위를 누리면서도 서얼 출신이라는 한계를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유자광의 불운한 출신에 주목했다. 

임사홍(1445~1506)은 조선 전기 권세를 잡았던 인물로, 세조 11년이던 1465년 알성문과에 급제해 정계에 입문했다. 두 아들이 각각 예종과 성종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나 성종초 승지인 임사홍이 주변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 마음이 맞지 않는 도승지를 음해한 죄목으로 1478년(성종 9년)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연산군이 즉위한지 6년이 지난 해에 유배생활에서 풀려났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사사된 내력을 연산군에게 알려 1504년 갑자사화의 비극을 불러온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중종반정 이후 추살(몽둥이로 쳐서 죽임)되고 부관참시되었다.

 

'역사저널 그날' 임사홍 [사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제공]

 

이같은 임사홍의 행적은 유자광의 그것과 대비된다. 유자광은 예종 때 남이 장군이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하여 이른바 ‘남이의 옥(獄)’을 주도했고, 1498년(연산군 4년)에는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있음을 내세워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사헌부 대사헌 등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임사홍은 형편없는 소인(小人)입니다.(중략)”(성종실록, 성종 23년)

성종 시기, 대간들은 한 남자를 ‘간신’이라는 표현도 부족해 ‘소인(小人)’이라 불렀다. 그의 이름은 바로 임사홍이었다. 연산군 대까지 임사홍을 따라다닌 ‘소인(小人)’이라는 불명예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임사홍은 어쩌다 조선의 대표 간신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임사홍은 조선의 27명의 왕 중 제대로 된 업적을 찾아볼 수 없는 연산군에게 전국에서 연회에 쓰일 기녀들을 모집하기 위해 혈안이 됐던 ‘채홍사’였다.

당시 연산군은 미인을 전국 단위로 모집하는 것도 모자라 등급까지 나누어 관리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연산군의 횡포에 백성들의 울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계속되는 연회에 연산군은 ‘흥청망청’의 아이콘이 되었다. 당시 연산군의 곁에 붙어 있던 간신이 바로 임사홍이었다.

공신의 아들이었던 임사홍은 효령대군의 손녀사위로 든든한 뒷배까지 갖추었다. 뿐만 아니라 18세에 과거에 급제할 만큼 뛰어난 능력도 겸비했다. 능력과 출신 모두 조선 조정에서 무시할 수 없을 만한 존재감을 지녔던 임사홍이 소인배로 산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흙비[土雨]가 내렸다.’(성종실록, 성종 9년 4월 1일)

어느 날, 조선 왕실은 자연재해로 인해 혼란에 빠진다. 임사홍을 비롯한 대간들은 조선 시국을 둘러싸고 공방을 벌이게 되고. 이후 임사홍은 대간들 사이에 ‘소인(小人)’으로 낙인 찍혀 몰락하고 유배까지 보내진다.

 

'역사저널 그날' 임사홍 [사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제공]

 

유배지에서 쓸쓸한 세월을 보낸 임사홍은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한다. 

“작은 소인(小人) 숭재, 큰 소인 사홍이여! 천고에 으뜸가는 간흉이구나! 천도(天道)는 돌고 돌아 보복이 있으리니, 알리라, 네 뼈 또한 바람에 날려질 것을.” (중종실록, 중종 1년)

관직에 복귀한 임사홍은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며 신임을 얻는다. 심지어 임사홍은 연산군의 친모 ‘폐비 윤씨’의 죽음을 언급하고 이를 들은 연산의 광기는 갑자사화로 표출된다.

연산군의 총애를 잃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쓰던 임사홍은 자신의 아들까지 희생양으로 삼기에 이른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잔치를 열었다. 그에게 있어 권력은 아들과도 바꿀 수 있는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이날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임사홍이 왜 이처럼 간신으로 살 수밖에 없었는지를 따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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