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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김소월시인(급해요)
비공개 조회수 6,853 작성일2015.05.25
김소월시인의 가는길 시적화자,시대적배경,작가의삶,가치관,작가의상황좀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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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7위, 문예창작인 37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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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山)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요점 정리




 지은이 : 김소월(金素月)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민요적, 전통적, 여성적

 율격 : 3음보. 7,5조의 변형

 형태 : 불규칙형. 4연 배행

 제재 : 가는 길

 특징 : 간결한 구조와 탁월한 언어 구사, 유음, 비음 등의 활용으로 음악적 효과를 거둠

 주제 : 이별의 아쉬움과 그리움. 지난날에 대한 회상에서 오는 그리움

 의의 : 우리 민족의 내면에 흐르는 보편적 정한(情恨)을 진솔하게 표현

 출전 : <개벽>(1923)


 내용 연구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그립다 - 하니 그리워 : 그립다고 말하려 하니 그리움은 울컥 치솟는다는 의미로 화자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직설적으로 표현됨)


그냥 갈까(입밖으로 낼 수 없었던 사랑이었음을 암시)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미련의 여운을 드러내는 기능) [그냥 갈까 - 다시 더 한 번 : 그냥 가 버릴까 단념하면 그래도 미련 때문에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아진다.][그립다/ 말을 할까 _ 다시 더 한 번 : '그립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그 말을 하고 나니 그것은 모호하고 유동적인 상태로부터 하나의 분명하고 고정적인 상태로 바뀌어 어렴풋하던 그리움은 분명한 화자의 마음이 되어 새삼 못 견디게 임을 그리게 된다. 그래서 잊고 떠나려해도 임의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그는 희미하게 멀어져 가는 임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다시 뒤돌아 본다]- 제 1연 - 제 2연 : 그리움과 미련으로 인한 내면 갈등


저 산(山)에도 가마귀(까마귀. 비관적인 생의 인식을 반영하는 객관적 상관물), 들에 가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시간적 배경이 드러남)

지저귑니다.(져 산(山)에도 - 해 진다고 / 지저귑니다. : 그래도 머뭇거리고 있는 화자에게 까마귀는 길을 재촉한다. 날이 저무니 어서 떠나자고 자꾸만 재촉한다.) 

 

앞 강물 뒷 강물(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과 삶의 표상으로 떠나는 임을 나타냄)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대상이 내면화되면서 주객(主客)의 융합이 이루어진 시행)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흐릅디다그려'의 준말).(앞 강물 뒷 강물 - 흐릅디다려. : 화자의 곁에서 흐르는 강물마저도 연이어 흐르면서 갈 길을 재촉한다. 먼저 흐른 물은 따라오라고. 나중에 따라 흐르는 물은 빨리 따라가자고 재촉하는 시간의 긴박성이 드러나는 상황이고, 움직임의 심상을 느낄 수 있다. 화자에게 '따라오라'고 하던 '강물'은 곧바로 화자의 내면이 되어 '따라가자'고 하고 있다. 또한 주객의 융합을 이루고 있다. 흘러가는 강물은 떠나가는 임을 형상화한 것이고 유음과 비음 등 매끄러운 느낌의 자음을 사용하여 강한 리듬감을 형성하고 있고, 강물 흐름의 지속성을 나타내고 있음)[저 산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 연달아 흐릅디다려 : 이별을 재촉하는 시간의 흐름을 까마귀의 울음소리와 강물의 흐름이라는 자연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낸 표현이다. '해질녘'과 '까마귀'라는 배경은 이별의 정한을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강물의 무심한 흐름 또한 이별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화자의 애절한 심정을 강화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제 3연 - 제 4연 : 떠나기를 재촉하는 외면적 상황

< 까마귀와 강물의 의미 : 이별의 안타까움과 슬픔의 정서를 환기시키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까마귀'는 화자의 비관적인 생의 인식을 반영하고, 안타까운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상물로서 이별의 정한을 강화하고 있다. 흐르는 '강물' 역시 사랑하는 임을 따라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화자에게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재촉함으로써 이별의 아픔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객관적 상관물이란 '어떤 특별한 정서를 나타낼 공식이 되는 한 무리의 사물, 정황, 일련의 사건으로서, 바로 그 정서를 불러일으키도록 제시된 외부의 사실들'을 일컫는 말로 엘리엇이 세운 이론이다. 이는 정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이미지의 제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정서를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1.  시는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심리적 반응, 곧 정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중심으로 다음 활동을 해 보자.

⑴ 이별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떠올려 보자. 자신이 막상 떠나려고 할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생각해 보고, 이러한 경험을 시적 화자의 정서와 비교해 보자.

이끌어 주기 : 학생들은 시를 머리로 읽으려는 경향이 있다. 시가 주는 느낌이나 시의 정서에 공감하기보다는 논리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 활동은 시가 논리의 산물이 아니라 정서의 산물이며,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 설정하였다. 학생들의 구체적인 체험과 결부하여 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예시답안 :

 시는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심리적 반응, 곧 정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별의 상황에 대한 정서적 반응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즉, 헤어지는 사람과의 관계라든가 이별의 원인이나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싫은 사람과의 이별이라면 시원하고 후련한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대개의 경우 이별은 아쉬움과 미련을 남기게 마련이다. 나의 경우도 그랬다. 헤어지기 싫지만 피치 못한 상황에서의 이별이라서 그런지 슬픔과 아쉬움, 미련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 동안 잘해 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더더욱 그랬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별 노래가 그토록 절실하게 다가왔던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이별의 상황에 처해 있다. 이별의 이유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별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립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어렴풋하던 그리움이 그 말을 하고 난 뒤부터는 하나의 선명한 실체로 바뀐다. 그리하여 새삼 못 견디게 임이 그리워지고, 이별이 아쉬워지며, 마침내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망설이게 된다. 2연의 말줄임표에는 이러한 그리움과 아쉬움, 망설임의 정서가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심리적 체험은 이별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몇 마디 되지 않은 말로 이처럼 섬세하게 그리움과 망설임이 뒤섞인 상태를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이 시가 공감을 주는 요인은 이처럼 이별의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미묘한 심리를 절묘하게 표현해 낸 데 있다.

⑵ ‘지저귑니다’, ‘흐릅디다려’와 같은 말투는 시에 어떤 분위기를 형성하는지 말해 보자.

이끌어 주기 : 이 활동은 어조가 시의 분위기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어조란 시적 화자의 정서가 반영된 독특한 말씨나 말투를 일컫는다. 어조를 통해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시적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시적 화자의 태도를 파악할 수 있다. 시의 어조는 시의 분위기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모든 시에는 그만의 고유한 어조가 있게 마련이며, 어떤 어조가 더 좋다거나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시적 화자가 자신의 강인한 의지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단호하고 강인한 어조로, 자신의 소망을 절대자에게 기원하는 시라면 경건한 기도조의 어조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이 시의 어조를 이해하도록 지도한다.

예시답안

  시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시적 화자는 여린 성격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임을 몹시 그리워하면서도 ‘그립다’는 말조차 못하는 소극적이고 여성적인 존재이다. ‘지저귑니다’는 ‘지저귄다’보다 훨씬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을 주는 말이며, ‘흐릅디다려’는 ‘흐릅디다그려’의 준말이다. 여기서 ‘-디다(그)려’라는 종결 어미는 자신이 체험한 사실을 청자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할 때 쓰이는 말로, 이별의 상황에 대한 화자의 애상적인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 ‘지저귑니다’, ‘흐릅디다려’와 같은 말투는 시적 화자의 여성적이며 소극적인 태도와 대응되면서, 애상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2  ‘시는 자신의 정서를 간결하면서도, 운율 있는 언어로 표현한다.’는 말과 관련하여 다음 활동을 해 보자.

⑴ 구성·창작 각 연에 나타난 시적 화자의 심정을 산문으로 표현해 보고, 이를 원작과 비교해 보자.

이끌어 주기 : 동일한 내용을 각각 시와 산문으로 표현해 보면, 비록 표현하고자 한 내용이 같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표현된 글이 주는 느낌이나 의미가 상당히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문은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고, 시는 분위기나 정서를 더 잘 느끼게 해 준다. 실제 활동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예시답안

1연 : 그립다고 말을 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선뜻 말하지는 못하겠다. 말하려고 생각을 하니 더욱 그리움이 사무친다.

2연 : 말을 하면 더 떠나기가 어려울 것 같고, 그래서 그냥 갈까 싶은데 그래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돌아보게 된다.

3연 :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산과 들에서 지저귀는 까마귀들은 해 지기 전에 가야 한다고 재촉을 하는 것 같다.

4연 : 흐르는 저 강물은 어서 가자고 연달아 흐르며 나를 재촉한다.

 산문은 시적 화자의 심경을 직설적으로 전달하고,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마음의 상태를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화자가 지니고 있는 정서나 심리 상태 등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것은 오히려 시 쪽이다. 산문이 뜻을 이해하기에 적절하다면, 시는 마음이나 기분 상태 등을 그대로 느끼기에 적절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이는 시와 산문에서 언어가 운용되는 방식이 다른 데서 기인한다. 시는 운율을 가진다. 운율은 리듬을 형성하고, 리듬의 반복이나 변화는 읽는 이의 감정을 흥분시키거나 가라앉히면서 의미를 강화하고 인상적으로 만들어 준다.

⑵ 구성·창작

 이 시는 글자 수나 행의 배치가 일정하지 않은 것 같지만 낭송을 하다 보면 일정한 율격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동일한 율격으로 고쳐 써 보고, 고쳐 쓴 것과 원작이주는 느낌의 차이를 말해 보자.

 이끌어 주기 : 이 활동은 운율의 개념을 이해하고, 운율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바로잡기  위해 설정하였다. 학생들은 대부분 어떤 시인은 주로 어떠한 율격을 사용하며, 어떤 작품에는 어떠한 율격이 사용되었다라는 것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낯선 작가나 새로운 작품을 접하게 되면 몹시 당황하게 되며, 시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낭송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교육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시를 소리내어 읽다 보면 운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가운데 운율에 대한 인식은 높아지게 된다. 따라서 시란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낭송을 전제로 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고 활동하도록 지도한다. 이 활동은 운율을 고려한 읽기 활동뿐만 아니라, 운율을 고려하여 시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시킴으로써 시 창작 활동에 대한 방법론적인 지도로 이어진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먼저 1, 2연의 운율과 3, 4연의 운율을 동일하게 조정해 보도록 하고, 이를 원작이 주는 느낌과 서로 비교해 보도록 한다. 그리고 시의 운율을 변화시켜 보는 것을 통해 운율이 시의 의미 형성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설명해 보도록 한다.

예시답안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山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이처럼 시의 내용을 바꾸지 않고 연과 행의 배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동일한 율격이 반복되는 시로 고쳐 쓸 수 있다. 원작과 새로 고쳐 쓴 위의 시를 비교해 보면, 시의 내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도 시가 주는 느낌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의 후반부에서 가마귀와 시냇물이 화자의 심정과는 반대로 떠나는 길을 재촉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화자는 한편으로 마음이 바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련이 남는다는 것 등에 대한 실감이 원작에 비해 덜 느껴진다는 것이다. 원작의 경우는 3연과 4연에서 두 연 분량을 한 연으로 만듦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호흡이 빨라지고 읽는 속도가 빨라져서 재촉받는 심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만약 고쳐 쓴 것과 같은 율격을 사용한다면, 이러한 의미 구조는 약화되고 화자가 느끼는 심리적 긴장감은 이완될 것이다. 

(3) 이 시에서 가장 리듬감을 잘 살려 표현한 연을 찾아보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설명해 보자.

이끌어주기 : 반복은 운율형성의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동일한 글자 수의 반복(음수율), 동일한 길이를 가진 소리 묶음의 반복(음보율), 동일한 음운의 동일한 위치에서 반복(음위율), 동일한 통사 구조의 반복, 소리의 음성적 자질을 이용한 반복 등 다양한 방법이 사용된다.

 이시는 모든 연에 걸쳐 세 마디 가락을 반복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 연에서는 음보율 외에 소리의 음성적 자질을 활용하여 리듬감을 살리고 있다.

예시답안

 이 시에서 유난히 리듬감 있게 읽히는 곳은 마지막 연이다. 모든 연이 세 마디 가락을 중심으로 운율을 형성하고 있지만, 마지막 연에서는 주로 울림소리를 사용하여 운율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마지막 연을 소리내어 낭송해 보면, 강물이 부드럽게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울림소리 중에서도 'ㄹ'음운을 유난히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은 화자에게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강물의 흐름을 제시한 구절이다. 이러한 강물의 흐름은 운율에 의해 뒷받침되면서 실제로 강물이 흘러가는 듯한 인상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3. '시는 마음의 그림'이라는 말과 관련하여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이 시를 내면 풍경을 그린 것으로 나누어 보자.

이끌어주기 : 시에서 정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된다.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표출되는가 하면, 다른 대상물에 정서를 이입하여 드러나기도 하고, 화자의 정서와 관련이 있는 객관적 상관물을 끌어 들여 표현하기도 한다. 시의 정서를 파악하는 것은 곧 시의 주제를 아는 것이며, 정서 표출 방법을 이해하는 것은 곧 시를 효과적으로 이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시 창작의 효과적인 방법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시적 화자의 정서가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 찾아보도록 한다. 그리고 시에 등장하는 자연물과 시적 화자의 정서가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는지 생각해 보도록 한다.

예시답안 :

 이 시는 기ㆍ승ㆍ전ㆍ결의 전통적인 4단 구성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내면 풍경을 그린1,2연과 외면 풍경을 묘사한 3,4연으로 나눌 수 있다. 1,2연에서는 임과 헤어지기를 아쉬워하는 심정이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3,4연에서는 이별의 안타까운 심정을 직접적으로 진술하는 대신, 화자의 망설임이 '가마귀'와 '강물'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해 진다고 지저귀는 '가마귀'와 어서 따라 오라고 재촉하는 '강물'은 미련 때문에 머뭇거리는 화자의 안타까운 처지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읽는 이에게 이별의 애상감을 고취시키고 있다.

(2) 내면 풍경을 그린 부분과 외면의 풍경을 그린 부분을 구분하여 낭송해 보고, 어떤 호흡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지 말해 보자.

 이끌어주기 : 앞의 2-(2)와 관련되는 활동이다. 앞의 활동이 운율의 변화에 따른 느낌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이 활동은 한 걸을 더 나아 가 운율과 의미가 서로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이 활동을 통해 운율이 단순히 읽는 즐거움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의미와도 관련됨으로써, 시적 인상을 강화하는 데에도 기여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예시답안 :

 시적 화자의 내면 풍경을 그린 1,2연은 음보 단위로 행을 구분하여 느린 호흡으로 읽힌다. 그러나 외면 풍경을 묘사한 3.4연은 두연 분량을 한 연의 형태로 배치함으로써 빠른 호흡으로 읽도록 하였다. 특히 4연의 3,4행은 빠른 속도로 읽도록 음보를 배치하여 실제로 강물이 흘러가며 재촉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러한 율격의 배치는 시의 의미와도 무관하지 않다. '가마귀'와 '강물'은 화자의 행동을 재촉하는 자연물로서, 임을 떠나기 싫어 망설이는 화자의 안타까운 심정과 갈등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운율의 구성이 1,2연의 느리고 망설이는 느낌과 대조되면서, 아쉽고 떠나기 힘든 내면과 떠나야만 하는 상황 사이의 거리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지속과 변화, 흐름의 철학

 이 작품은 지속과 중단, 그리고 변화라는 흐름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선 '가는 길'과 '흐르는 강물'은 인생과 자연의 원리가 지속(duration)에 근거함을 비유적으로 말해 준다. 기ㆍ승ㆍ전ㆍ결이라는 4연 구조로 짜여진 이 시는 다시 1,2연과 3,4연으로 구분된다. 먼저 1연은 '그립다', 말을 할까(중단)', 하니 그리워(변화)'라는 세 가지 감정의 기복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리움이라는 지속적인 감정이 겪고 있는 갈등의 표출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본질적인 모습이 된다. 2연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갈까/그래도/다시 더 한번……'이라는 구절 속에는 단념과 미련이라는 중단과 지속의 갈등이 개재되어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 속에는 미완의 긴장이 형성됨으로써 시의 서정성을 강화하게 된다. 사랑은 지속과 중단, 그리고 변화의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하나의 흐름을 이뤄가게 되는 것이다. 이점에서 사랑은 생의 원리와 근본적인 동일성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지속과 변화, 혹은 지속과 중단과 변화라는 흐름의 원리 위에 놓여짐을 의미한다. 3연에서는 예의 상관물이 등장한다. 여기에서는 가마귀가 그것이다. '저 산'과 '들'에서 '西山에 해 진다고 지저귀는' 가마귀는 퍼스나의 시적 인식이 비관적인 것에 연결돼 있음을 말해 준다. 가마귀는 비관적인 생의 인식을 반영하는 정서적 상관물에 해당하는 것이다. 4연에서 강물도 만찬가지이다. '앞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흐름으로서의 그리움(사랑)이며, 흐름으로서의 생의 원리를 제시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강물'은 '길'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지속과 변화의 표상이다. 그리고 이들은 앞과 뒤에서 서로 밀고 당기는 힘으로서 작용하게 마련이다.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라는 강물의 밀고당김은 바로 체념과 미련, 지속과 변화, 이성과 감성 등이 서로 갈등을 이루는 사랑의 모습이자 인생의 모습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움으로서의 사랑과 변화로서의 인생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과 긴장을 이루며 전개되어 간다는 점에서 '가는 길'은 '흐름'의 원리로서 사랑과 인생을 파악한 작품으로 이해된다.(출처 : 김재홍,'한국 현대 시인 연구')


 시어와 정서 : 시를 읽으면 마음속에 어떤 울림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시어에 의해서 환기된 시인의 정서를 느끼기 때문이다. 정서란 어떤 대상 혹은 상황으로부터 유발된 심리적 반응을 일컫는 말이다. 흔히 인간의 감정을 기쁨, 슬픔, 분노, 즐거움 등과 같은 일곱 가지 감정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시에서 표현되는 감정은 훨씬 다양하고 섬세하다. 가령 슬픔이라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서글픔, 섭섭함, 안타까움, 눈물겨움 등 정도나 빛깔이 다른 숱한 감정 상태가 제시될 수 있다. 이처럼 복합적이며 미묘한 감정의 무늬를 전달하기 위해서 시에서는 함축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운율의 효과 : 시에서는 언어의 운율적 사용을 중시한다. 시의 운율은 시적 인상을 강화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미적 쾌감을 유발한다. 이는 같은 뜻이라도 말소리에 규칙성이 있을 때 의미가 더욱 인상적으로 전달할 수 있으며, 소리의 규칙성이 읽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적 화자의 복합적인 심정은 세 마디 가락의 운율을 다양하게 배치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제시된다. 음보 단위로 행을 구분하여 배치한 1, 2연은 느린 호흡으로 읽힘으로써, 이별을 망설이는 화자의 애틋한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화자에게 이별을 재촉하는 상황으로 묘사된 3, 4연은 한 줄에 여러 음보를 배치하여 빠른 호흡으로 읽히도록 구성하였다. 이러한 운율 구성은 이별을 망설이는 화자의 내면과 떠나야만 하는 상황 사이에 긴장감을 조성함으로써 읽는 이에게 이별의 안타까움과 애상감을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운율의 형성 방법 : 운율을 형성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반복하는 것이다. 반복은 동일한 글자 수의 반복(음수율), 동일한 길이의 소리 묶음의 반복(음보율), 동일한 음운의 동일한 위치에서 반복(음위율), 동일한 통사 구조의 반복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또, 의미적으로 대응되는 구절을 서로 짝짓거나, 음악적인 성질이 강한 울림소리를 반복하여 율동감을 줄 수 있다.


 어조와 분위기 :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속담이 있다. 말의 내용 못지 않게 어떤 말투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기분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말투는 일상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에도 있다. 시에서는 이를 어조라고 하는데, 시 전체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조는 종결 어미의 종류, 시어의 부드러움과 딱딱함, 시어의 음성적 자질, 시행의 길이와 호흡, 경어체·기도체와 같은 문체의 유형 등에 의해 형성된다.


 시적 상황과 정서 : 시적 화자는 이별의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임을 그리워하면서도 평소에는 ‘그립다’는 말조차 하지 못한다. 그가 ‘그립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어렴풋하던 그리움이 그 말을 하고 난 후부터는 하나의 선명한 실체로 바뀐다. 그리하여 새삼 못 견디게 임이 그리워지고, 이별이 아쉬워지며, 마침내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망설이게 된다.


 이해와 감상


 이별의 상황에서 촉발되는 자아의 내면 심정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는 이 시는, 전체적으로 3음보의 율격으로 짜여 있다. 그런데 1연과 2연에서는 1음보를 한 행으로 처리하고 있는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행의 배치로 인해 각 행마다 휴지(休止)가 생기는 효과가 발생하며, 그러한 휴지는 시적 자아가 님을 향해 못내 아쉬워서 선뜻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심리 상태를 적절하게 환기시키고 있다. 반면에 3연과 4연에서는 앞의 두 연에 비해 3음보를 1행으로 처리하는 가운데, 3연의 두 번째 구절과 4연의 첫 구절은 중간에 행을 나누고 있다. 즉, 앞의 두 연에 비해 상대적으로 행 구분을 억제하고 3음보를 1행으로 처리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행의 배치는 산야(山野)의 까마귀가 해가 지니 빨리 가라고 재촉하고, 앞뒤의 강물들이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주변의 상황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이 시는 이별의 상황 앞에서 떠나기 싫어하는 화자의 심정이 애상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상황은 갈 길을 재촉하는데 마음은 미련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는 화자의 아픔이 여성 어조와 전통적 율조에 실려 독자로 하여금 애상감에 젖게 한다.

 못내 아쉬워 선뜻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서정적 자아의 심리적 상태가 잘 형상화된 이 작품은 기, 승, 전, 결의 4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앞의 두 연을 한 단락으로 하여 서정적 자아의 내면적 감정(심리적 갈등과 방황)이 제시되었고, 뒤의 두 연은 자연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는데 서정적 자아의 심리를 반영하는 정서적 상관물로서의 자연이 제시되었다.

 이 시에서의 그리움은 시인이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그리움이다. 작중 화자인 '나'는 그리운 '상대'에게 말을 하지도 못하고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마음만 졸이고 있다. 그러다가 3연으로 들어가면서 자연의 세계를 노래하면서 그 애절함의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 이처럼 간결한 구조, 어조의 형식을 가지고 전해 주는 애절한 감동이 김소월 시의 주조를 이루는 정서이다.

 또 '강물, 흐르는 물, 연달아, 흐릅디다려' 등의 유음, 비음, 모음으로 구성된 시어들이 사용되어서 물이 흘러가는 듯한 부드러운 음향감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해와 감상2

 마음 속에 움직이는 감정은 논리적인 생각과 달라서 자기 스스로도 그 모습이나 크기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감정들은 가슴 깊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행동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고, 어떤 때에는 뚜렷한 모습이 되어 밖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작품, 특히 앞의 두 연에서 우리는 바로 그러한 예를 본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라는 구절은 얼핏 생각하기에 시에나 있을 법한 이상한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시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경험이겠는가? 이 구절에서 '그립다'라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게 하는 것은 물론 마음 속에 있는 그리움이다. 즉, 그리움이 먼저 있고 그립다는 말이 나중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립다'라는 말을 할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 속에 고여 있던 그리움은 갑작스런 바람을 만난 물결처럼 출렁이며 일어나다.

 즉, 그립다라는 말을 생각하는 순간 그 때까지 어렴풋하던 그리움은 새삼 절실하게 또렷한 모습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이런 문맥을 음미하건대 위의 작품에 나타난 그리움은 평소에 차마 입밖에 내어 말하지 못하였으면서 그리운 이가 있는 곳을 떠나는 발길을 떼어 놓지 못하고 있다. 그는 그냥 갈까 하다가 그래도 다시 한 번 더 돌아보고픈 마음의 흔들림 속에 있다. 몇 마디 되지 않는 말로 이처럼 섬세하게 그리움과 망설임이 뒤섞인 상태를 표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머지 두 연은 주위의 풍경을 통해 그의 심경을 간접적으로 암시해 준다. 셋째 연에는 산과 들을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까마귀가 등장한다. 까마귀들은 서산에 해가 진다고 지저귄다. 또 앞뒤의 강물은 작중 인물의 아쉬운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제 갈 길을 흐르며, 마치 어서 따라 오라고 부르는 듯이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풍경은 하루 해가 저무는 시간의 쓸쓸함을 배경으로 하여 작중인물의 그리움과 아쉬움을 더욱 절실하게 한다. 즉, 제 1, 2연이 마음속의 움직임을 노래한 데 비하여, 제 3, 4연은 이에 대비되는 바깥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이처럼 간결한 구도와 말씨 가운데 '가는 길'의 머뭇거리는 그리움과 아쉬움은 더욱 잘 살아나고 있다. [김흥규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 중에서]


이해와 감상3

  '가는 길'의 시적 화자는이별 상황에 놓여 있다. 그는 그냥 갈까 하다가 그래도 다시 한번 더 돌아보고픈 마음의 흔들림 속에 있다. 그는 그리워하면서도 평소에는 '그립다'는 말조차 못하는 여린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립다'라는 말을 할까 하고 마음 속에 되뇌어 보는 순간 마음 속에 고여 있던 그리움이 새삼 절실하게 밀려온다. 이 시는 이별의 상황에서 느끼는 그리움과 망설임, 그리고 아쉬움이라는 미묘한 심리를 간결한 표현과 율동감 있는 언어와 여성적 어조를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소월 특유의 3음보 율격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시행의 배치가 일률적이지 않고 다양하게 구사되어 있다. 즉, 내면 풍경에 해당하는 1·2연은 음보 단위로 따로 떼어져 길게 읽히게 해 놓았고, 바깥 풍경에 해당하는 3·4연은 빠른 템포로 읽히게 해 놓았다. 전반부의 느린 호흡은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심정 때문에 그렇고, 후반부의 빠른 호흡은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상황 때문에 그렇다. 특히 마지막 연은 울림 소리인 'ㄹ'을 자주 사용하여 실제로 강물이 흘러가는 인상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출처 : 한계전 외 4인 공저 문학교과서)


 심화 자료



 소월 시의 한(恨)과 민요와의 관계

 소월 시의 저변에 흐르는 한(恨)은 한민족의 심층에 깔린 정서이다. 이것은 고려속요나 시조에서 살펴볼 수 있거니와, 그 외에도 구전(口傳)하는 민요나 민담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것들이다. 여러 민요를 살펴보면 소월이 그의 시에서 노래한 이별의 한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민요에 내포된 한의 정서는 특히 비기능요(非機能謠-노동요 같은 어떤 기능성을 띤 노래가 아닌 민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한국 민요의 정서가 소월 시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점은 여러 평가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김소월의 시사적(詩史的) 위치

 김소월의 시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와 민요적 율격에 밀착되어 있다. 표면에 그리움, 슬픔, 한(恨) 등 비극적 사랑의 정감이 있으면서도 이면에는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을 담고 있으며, 그 심층에는 험난한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삶의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고자 하는 초극(超克)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 참뜻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도 소월 시는 서구 편향성의 초기 시단 형성 과정에 있어서 한국적인 정감과 가락의 원형질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민족시, 민중시의 소중한 전범(典範)이 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향토성(鄕土性) : 그의 시는 거의가 향토적인 풍물, 자연, 지명을 소재로 삼고 있다.

 (2) 민요풍(民謠風) : 오랜 세월 동안 겨레의 정서 생활의 가락이 되어 온 민요조의 리듬으로 이루어졌다.

 (3) 민족 정서(民族 情緖) : 시의 주제와 심상은 민족의 설움과 한(恨)의 정서를 활용, 민족의 보편적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김소월 시의 '이별'과 만해 시의 '이별' 

            

 김소월의 시와 만해의 시는 공통적으로 '임'과의 '이별' 을 가장 중요한 시의 모티프로 삼고 있다. 그러한 두 시인에게 '이별'이 지니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김소월에게서 '임'과의 '이별'이 지니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김소월에게서 '임'과의 '이별'은 어쩔 수 없이 강요된 것으로, 그 이별의 상태가 극복될 가능성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초혼(招魂)' 같은 시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김소월에게 있어서 '임'은 항상 과거의 존재, '나' 와 근원적으로 합일될 수 없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만해에게 있어서 이별'은 다른 의미로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서 '이별'은 외부에 있어서 강요된 것이라기 보다는 새롭고 높은 차원의 '임'과 만나기 의해서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해의'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방법적 계기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별' 속에는 '임'과의 만남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김소월의 시에서는 억누를 길 없는 비애와 절망을 안으로 삭이는 한의 정서가 강조되는 반면, 만해의 시에서는 이별로 인한 비애와 슬픔이 새로운 만남의 대한 기대와 예견의 의해 극복되어 가는 모습이 강조된다.


 김소월論


 우리말의 아름다움 살린 김소월

 김소월(1902-1934)을 빼고 우리 시를 논할 수 있을까?

한국 근대시를 전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김소월이라는 이름 석자는 반드시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될 필수 코스 같은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그의 시는 우리 주변에서 대중적인 폭넓은 이해와 사랑을 동시에 얻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역대 앙케이트 표본 조사 자료를 검토해 보면, 그는 거의 매번 우리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하나로 손꼽혀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런 결과가 다소간 부풀어진 측면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소월의 시는 제대로 읽어보지 못 했을망정,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그의 문명(文名)을 접해 본 사람들의 경우 본인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기 어색한 심사에서 '나의 애송시인=김소월'이라는 편리한 도식 위에 잠시 스스로를 맡겨 버린 경우도 결코 적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민족시인 김소월 신화의 형성 과정에는 순전히 풍문만을 듣고 모여든 이와 같은 불특정 다수의 허수 독자들의 참여가 크게 작용하였던 것도 사실이리라. 그렇다면 그의 시가 가진 마력은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들을 그 답으로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의 시의 주조를 이루는 여성 편향성과 이별의 정한, 대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그 좌절로 이어지는 낭만적 인식 구조 등은 우리 민족 본래의 기본 정조와 닿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널리 알려진 [진달래꽃]을 위시하여 [접동새],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못잊어] 등 소월 시의 대부분은 어떤 메꾸어질 수 없는 간극,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에서 비롯되는 그리움 같은 것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것은 곧 그의 시가 우리 사회의 기층을 이루는 민중들의 삶과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뜻한다. 동시에 그것은 일제 치하 망국민으로서 민족 전체가 겪어야만 했던 수난이나 설움과도 일정 부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변인(outside)적인 인식과 태도는 일단 전통적인 것에 근거한 것으로 판단되지만, 시대사적인 측면에서 재해석할 때 더욱 그 의미가 뚜렷하게 부각될 수 있다. 그의 시가 당대는 물론 후대 독자들에게까지 폭넓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로 바로 이러한 측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별, 그리움 등 민족의 전통적 정서와 가락 표현한 시 써

 둘째, 그의 시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서와 가락의 맥을 잇고 있으며, 동시에 근대적 발상 및 양식, 조어법에도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주고 자신의 출신 지역인 서도(평안도) 지방을 중심으로 구비 전승되어 내려오는 민요와 잡가를 수집하여 이를 새롭게 재창작해 냄으로써 시대 변화에 걸맞은 새로운 시형(민요조 서정시)으로 발전시켰다.


바드득 이를 갈고

죽어 볼까요

 

창가에 아롱아롱

달이 비친다

 

눈물은 새우잠의

팔굽 베개요

봄꿩은 잠이 없어

밤에 와 운다

 

두 동달이 베개는

어디 갔는고

언제는 둘이 자던 베개 머리에

죽자사자 언약도 하여 보았지        ― [원앙침] 일부

 

3음보의 기본 음보와 7.5조의 기본 음수율을 보이고 있는 이 시는 소월이 자주 사용하던 민요조 서정시의 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전술한 '원앙침' 외에도 우리들에게 익숙한 '가는 길', '산', '팔베개 노래' 등의 작품은 전통적인 율조와 가락에 바탕을 두고 이를 새롭게 재창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는 재래의 민요가 갖는 운율 상의 정직성으로부터 탈피하여, 다양하고도 융통성 있는 변형과 파격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측면은 그로 하여금 스승인 안서 김억(金億)의 그늘에서 벗어나 우리 시사에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셋째, 그의 시는 그간 자주 사용되었던 한자어나 생경한 외래어의 사용을 가능한 한 배제하는 대신, 우리 주변에서 점차 사라져 가고 있던 고유어, 토착어들을 발굴하여 이를 갈고 닦아 그것의 아름다움을 생생히 펼쳐 보여 주고 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 [접동새] 일부

 

산새는 왜 우노, 시메 산골

영(嶺) 넘어 가려고 그래서 울지       ― [산] 일부

 

퍼르스럿한 달은, 성황당의

데군데군 헐어진 담 모도리에

우둑히 걸리었고, 바위 위의 가마귀 한 쌍, 바람에 나래를 펴라.

― [찬 저녁] 일부

 

전통적인 가락 변형시키고, 고유어. 토착어 사용해 우리말의 아름다움 살려

 위의 인용시들에 사용된 '불설워'(-[접동새]), '시메 산골'(-[산]), '데군데군', '담 모도리'(-[찬 저녁]) 등의 시어는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이 가진 아름다움을 가장 수준 높은 차원에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후대 시인인 정지용, 서정주 등과 더불어 한국 시의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한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상에서 지적한 사항들과 함께 어떤 무엇보다도 소월 시가 갖는 가장 큰 장점  은 청소년층으로부터 중장년,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연령에 구애됨이 없이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와 함께 널리 국민적 애송 시인으로 자리잡고 있는 한용운, 윤동주 등의 시가 상대적으로 청소년 독자층에 치우친 것과는 구별되는 면이다. 우리 모두에게 소월이 진정한 국민 시인, 민족 시인으로 칭송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글쓴이 : 김유중 / 1965년생, 서울대, 카톨릭대 강사]




김소월(金素月,1902.9.6 - 1934.12.23), 본명 : 정식(廷湜)

1. 서 문

소월은 1902년 9월 6일(음력8월2일) 외가인 평북 구성군 서산면 왕인동에서 태어났다. 본가는 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단리로 공주 김씨 120여 가구가 모여사는 집성촌이다. 남단리는 평안도 8대 명산의 하나인 능한산(凌漢山)을 등에 지고 있는 아늑하고 아름다운 남향 마을이다. 동네 앞쪽으로는 서해 바다가 보이고 기름진 논밭이 바닷가까지 풍요롭게 펼쳐져 있었다. 이처럼 산과 들,바다가 한데 어우러진 고향의 자연은 소월의 영혼과 시적 감수성을 형성하는 원천이 되었다.

소월의 생애와 문학에서 관심이 많이 가는 대목이 상실감이나 단절감으로 점철된 그의 문학과 생애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이는 드물 것이다. 특히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구성시대에 그가 운영했던 신문사 지국 경영실패를 그 원인으로 제시하는 예라든가 그의 비극적인 생애를 결정지은 요소로 시대적 요인을 제시하는 예들은 소월시 연구에서 광범위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물론 사업의 실패나 식민지 시대라는 외부적 요인이 그의 문학과 비극적인 죽음에 영향을 미쳤다는 관점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한 이러한 관점들이 극단화될 경우는 한 인간이 환경적 요인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관점, 즉 환경결정론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소월의 생애에 불우한 환경적 요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의 주체적 인간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월은 의지적으로 그러한 비극적세계의 추구해나간 요소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하에서는 소월의 최후의 심경이 고백되어 있는 서간문에 대한 상세한 검토와 소월의 숙모인 계희영의 증언들을 기초로하여 소월의 비극적인 생애와 문학이 유소년기부터 장년기에 이르는 그의 전생애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진행된 삶의 스타일로서의 측면을 갖고 있다는 점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유서'에 나타난 소월의 내면 세계와 이전 시기의 자기 암시들

소월은 1934년 12월 23일에 죽음을 맞이한다. 구성에서 9년째 살고 있었던 소월은 이 해 가을,그간 방문한 적이 없었던 고향 곽산 남산리를 방문한다. 그의 숙모 계희영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소월은 그 가을에 구성에게 곽산 남산리에 돌아와서 조상님의 무덤을 다 찾아 알뜰히 돌보았다. 해마다 추석이 되어도 십년간 한번도 오지 않았던 소월이었는데,이번에는 곽산을 찾아와서 일일이 뒷산에 다니며 무덤의 떼가 잘 자라는지 돌보았고 허술한 무덤은 잘 다듬어 떼를 입혔다.

이렇한 소월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왜 저러고 다니지?"/했을 뿐이어다. 소월은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고향에 와서 하직인사를 했던 것이엇으나 아무도 알지 못하엿다.

소월은 고향을 떠나서 구성 남시로 내려가 9년동안 두문불출하고 은거생활을 계속하며 나날을 보냈다./그리고 가정 생활에 대해서 도 매무 무관심하였고 온종일 술에 취해서 살았다. 날이 갈수록 문밖 출입을 소월은 더욱 싫어했다 그러던 어느날 무슨 생각에 장에 갔었는지 돌아오는 길에 생아편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이기도 하나 김소월은 구성의 남시에서 9년동안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영위하였고 음주로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마지막 해 죽음을 불과 3-4개월 앞둔 시점에서 그간 돌아보지 않았던 고향을 방문하여 묘소들을 돌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 의거해 볼 때 우리는 김소월의 고향 방문이 죽음을 앞둔 자 특유의 행동 스타일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 시점에서 소월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어느정도 결단을 내려둔 상태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추측을 내려 볼 수 있다.

당시 소월의 내면세계는,고향 방문 직전에 쓴 그의 서간문 속에 생생하게 드러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멧해만에 선생님의 수적을 뵈오니 감개무량하옵니다 그 우에 보내주신 책 망우초는 재삼 파열하올 때에 바로 함께 잇서 모시든 그 옛날이 안전에 방불하옴을 깨닷지 못하였습니다. 제 망우초는 근심을 이저버린 망우초입니가 이저버리는 망우초이니까 닛자하는 망애초입니까 저의 생각 가터서는 이 마음 둘데업서 닛자하니 이리 불너 망우처라 하엿스면 조켓다 하옵니다.

나)저게 구성와서 명년이면 십년이옵니다. 십년도 이럭저럭 짤븐 세월이 아닌 모양이옵니다.산촌와서 10년잇는 동안에 산천은 별로 변함이 없서 보아도 인사는 아주 글러진 듯합옵니다. 세기는 저를 버리고 혼자 압서서 다라간 것 갓사옵니다. 독서도 아니하고 습작도 아니하고 사업도 아니하고 그저 다시 잡기 힘드는 돈만 좀 노하보낸 모양이옵니다. 인제는 또 돈이 없으니 무엇을 하여야 조켓느냐 하옵니다.

다)오젼 호『삼천리』에 이러한 절구가 잇섯습니다.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浮雲自體本無質,生死去如亦如是라 하엿사옵니다. 저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옵니다 조조하지 말고 초조하지 말자고 그러하옵는데 이 글을 이용하신 그 분이 생가운명좌담회석에서는 운명을 부정하야스니 역시 사람의 심리란 『몰르겟다』하얏사옵니다.저는 술이나 한 35배 마신 후이면 말을 아니하면 말지 어쨋든 제맘나는 양으로 하겠다 생각이옵니다.

라) 자고 이래로 중추명월을 일커러 왓사옵니다. 오늘밤 참밧게 달빗 월색 옛날 소설에느 여자다리 란간에 기대여서서 흐득흐득 울며 사의 유혹에 박덕한 신세를 구슬프게도 울든 그 달빛 그 월색이 백서와 지지 안케 밝사옵니다. 오늘이 열사훗날 저는 한 십년만에 선조의 무덤을 차저 명일 고향 곽산으로 뵈오려 가려 하옵니다.

마)지사는 비추라고 저는 의토야 도겟사옵니까 만은 근일 멧멧칠 부는 바람에 베옷을 버서노코 무명것을 입고 마른 풀대 욱스러진 들까에 섯슬 때에 마음이 어쩐지 먼먼 거출은 마음이 먼 멀은 어느시절 옛나라에 살틀하다 지금은 넘어도 소원하여진 그 나라에 잇는 것가티 좀 설어워 지옵니다.

편지의 마지막에 유명한 『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三水甲山韻)』이 첨부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한 이 서간문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자료다.라)의 기록에 따르면 이 글은 마지막 고향 방문 지전에 쓰여진 자료 임이 틀림없다. 또한 이 편지가 자신이 아버지 대신 흠모했던 스승인 인서에게 쓴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소월이 자신의 내심을 비교적 편하게 혹은 사소연하는 심정으로 드러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서간문은 소월의 생시의 마지막 심경을 보여주는 자료 즉 공식적인 유서를 남겼다는 기록을 확인해 볼 수 없는 그의 '유서'를 대신할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는 자료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소월은 우선 스승 안서에게서 받은 "망우초(忘憂草)"라는 시집명에 자신의 심경을 투사한다. 자신의 "마음 둘 데 없어 일자"하는 심경이 '망우초'라는 제명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스승의 의도가 나름대로 개입되어 있을 시집명에 자기 심경의 대뜸 투사하는 이러한 태도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면 용납도기 어려운 것이었을 것이다. 김소월이 자칫 실례가 될 수도 있는 고백을 이렇게 성급하고도 일방적으로 했다는 것은 그 만큼 당시의 소월이 절박한 자신의 심경을 고백할 곳 혹은 하소연할 곳을 찾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마음 둘데 없"다는 고백은 물론 이 자료를 처음으로 나타나는 대목은 아니다. 20년대 중반에 쒸어졋던 그의 작품들 속에서 흔히 목격되는 예로서 가령 『길』과 같은 작품에서는 그런 요소가 매우 요약적인 형태로 제시되어 있다.


어제도 하루밤
나그네집에
가마귀 가악가악 울며 새웠소

오늘은
또 몇십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가오

말마소 내 집도
정주 곽산
차가고 배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에 길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알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진달래꽃」 소수(1925년「문명」 발표작)

소월은 곽산이라는 고향이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정주 할 곳이 없는 나그네와 같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십자로"로 상징되는 다양한 인생 행로 한 가운데에 서서 자신만이 갈 길이 없다고 노래한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 길이란 무엇이었을까 만약 이 시가 김소월의 삶의 진수를 정직하게 고배해놓은 것이라면 이 길은 현실을 초월하는 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 초월의 길이 여의치 않을 것일 때는 그것은 도피로 점철된 삶이거나 혹은 그것에 종지부를 찍은 선택, 즉 죽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범부들의 욕망이 뒤얽혀 돌아가는 세상사에 대한 혐오감이나 기피증은 비단 소월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보통 사람들의 경우는 이 혐오증이 생활의 필요성이나 자신의 타락 때문에 희석되거나 또는 이 세계를 바꿔보려는 노력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극복되는 형태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김소월의 경우는 특이하다. 그의 경우는 이러한 혐오증이 청춘기의 일시적 취향니나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희석된다거나 극복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한 이 세상과의 이별이라는 일찌감치 실천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소월은 장손임에도 불구하고 9년 동안이나 조상의 묘소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했던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고향을 돌아보고 조상들의 묘소를 돌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죽음이 이 세상과의 이별을 뜻하는 통과의식의 하나인 것이라면 그리하여 '흙에서 나온 자가 흙으로 돌아가는'과정을 뜻하는 것이라면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오게 된 그 원초적인 공간을 닷 한번 돌아보는 것은 당연한 순리인 것이 아닐까. 

소월의 이러한 생의 과정은 생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비극적인 요소를 내표하고 있는 것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자신으 ㅣ고통을 잊고 안식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귀향의 의미 즉 자궁회귀 본능의 구현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죽음에 임하는 소월이 고백한 내용들 역시도 이십대 시기의 그것과 연속성을 갖고있다. 조상의 무덤을 돌아보는 모티브 역시도 예외는 아니다."진달래꽃"에 수록되어있는「열락」,「무덤」이 대표적인 예인데 이중 「무덤」을 보기로 한다.

그 누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붉으스럼한 언덕,여긔저긔
돌무덕이도 음즉이며,달빛헤
소리만남은 노래 서리워엉겨라

옛조상들의 기록을 무더둔 그곳!
나는 두루찾노라,그곳에서,
형적없는 노래 흘너 퍼져,
그름자가득한 억덕으로 여긔저긔

그누구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소리
부르는소리,부르는 소리,
내넉슬 잡아끄러헤내는 부르는 소리.

-「무덤」전문

무엇이 소월을 부른다는 것일까 소월은 이'부른다'는 표현을 주술처럼 자꾸 반복한다. 이 소리가 들려오는 공간은 '달빛'이 내리는 '붉으스럼한 언덕'이며 돌무더기가 움직이는 공간이며,그림자가 가득한 공간이다. 이 음산하고도 불길한 공간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밝은 생의 소리일 리는 없다. 소월은 그 정체성을 분명히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그긔 '넋을 잡아 끌어 헤내는'소리가 대낮으로 싱징되는 삶의 공간,원활하고 기운찬 삶의 현실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시 속에서 상실감이라는 동일 모티브가 지속되는 일반적 특성을 고려해 볼때,그리고 위의 김소월의 최후의 유서 내용을 고려해 볼때 이 소리는 스스로 죽음을 찾아나선 소월의 비극적인 최후를 직감할 수 있게 하는 정서로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재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한창 누릴 때인 20대에 이미 소월은 자신의 죽음을 일찌감치 불렀던 것이 아닐까

1934년 훨씬 이전부터 죽음의 세계를 동경해 온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이 맞다면 그는 언제부터 이러한 자기 암시의 세계를 시작했는가 그 경과는어떤 것이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당연히 수순일 것이다.

3.유소년기의 자기 암시와 비극적인 인생 스타일의 문제

앞글에서 계속 확인해 온 자료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김소월은 1932년 취중에 직접 '죽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음은 이 해 숙모인 계희영과의 대화 내용을 기록한 자료다.

그런데 언제부터 술인가?
벌써 오래 되었어요
삼촌이 술 마신다고 걱정하던 네가 무슨 일아냐? 너도 예수나 믿자.
숙모님이나 잘 믿으세요 나느 예수도 못 믿어요 나는 죽는 길밖에 없어요
하더니 다시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술상 치워라" 하고 나는 색시에게 말한 뒤 엄한 얼굴로 소월에게 말했다
너 취했구나, 그토록 똑똑하던 네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니
"숙모님! 정 정신은 똑똑해요 취하지도 않았어요. 숙모님 평양 가서 잘 사세요 이제는 고개에 다 올랐으니 내리막길입니다. 고생 발뿌리만 보지 말고 고개 들고 사세요."
나의 물음에 동문서답으로 다른 말만하며 울고 말하고 하는 모양을 보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더 이상 말도 못하고 나도 울었다.

대화문의 핵심적인 문맥을 믿어보기로 한다면 당시 김소월은 친지 중에서는 가장 편하게 대하던 숙모에 대한 생에 대한 자신의 자세를 요약적인 방식으로 털어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월은 당시 분명한 자의식 아래 음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으며 남은 생의 과정은 '죽는 길'외에는 다른 딜이 남아 있지 않은 '내리막길'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앞장에서 인용한 자료들과 함께 김소월이 자신의 죽음에 관해 명료한 자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진달래꽃'이 나온 시절인 1920년대 중반부터 이미 소월은 20대부터 죽음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상실'이라는 문학적 주제와 함께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예화들은 일곱살부터 열두 살 사이에 이르기까지 소월이 보여준 성향을 보여주는 예다.

가)며느리 들은 모두 머리를 풀고 울었다. 소월은 그때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인데도 내 곁에 끓어 앉아 우리들과 같이 슬피 울었다./소월의 작은 숙부는 열넷이었는데도 잘 울지를 못했는데 어쩌면 소월은 그렇게 슬프게 울었던지 후에 두고두고 칭찬을 받았다.

나) 이 날밤에는 웬일이지 이상하게도 하늘 멀이 떠있는 별만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서 슬픈 표정을 띠며 듣고 있었다. 이야기는 계속되어 오작교의 이별 대목까지 오자 소월은 그만 눈물을 주르르 흘렀다.....

"형님,그만 해 주소. 이 자식 눈물 흘리는 꼴이 보기 사납수다" 하며 소월을 비웃었다.
"갓놈 왜 우노?"
"울고 싶어요. 나는 외로와요"
하며 또다시 눈물을 흘렀다/소월의 고모는 우는 꼴이 보기 싫고 재
수없다고 소월을 책망하면서 삼 광주리를 들고 방으로 홱 들어가 버렸다.

다) 여덟살의 소월은 자기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된 것 같아 깊은
감동과 함께 슬픔을 느긴 모양이다. 세상에 태어난 후 인생의 슬픔
을 느껴 처음 흘린 귀한 첫 눈물이었다. 소월은 아마 이때쯤부터 아버지의 불행과 비애를 느꼈던 것 같다. 차츰 자기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몸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집안의 슬픔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벌어지낟는 사실을 아는
지혜가 자라면서 마음의 슬픔도 같이 자랐던 것이다.

라)소월이 열두살 되던 해 팔월에 전국에 장질부사(열병)이 유행했는데 
남산리도 예외없이 이 병의 세력이 밀어닥쳤다.....제일 먼저 기력
이 약하신 노씨 할머니께서 자리에 눕게 되시고 차례로 소월도 감염
되었다. 그때가 바로 소월의 생일달이었다. 옛부터 사람이 생일달에
큰병을 앓으면 죽는다는 말이 있어서 소월의 어머니는 이 말을 절대
적으로 믿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귀동이자 장손이 앓아 눕게 되자 

누구보다도 가장 애타게 걱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걱정하는 중에 소월의 병은 회복기에 들어섰고 영양만 섭취하면
곧 자리를 뜰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는데도 소월은
"나는 죽어 나는 죽을 거야" 하면서 도무지 음식을 전폐하고 먹으
려 들지 않았다.

"열이 다 내렸구나. 인제 머리 안 아프지?"
"예"
"그럼 무얼 좀 먹어야지"
"난 죽을 텐데 뭘 먹어요"
"왜"
"생일달에 병나면 나쁘다는데요"
.....중 략.....

"엄마는 생일달에 병에 걸리면 죽는다고 울기만 하는 걸, 난 싫어요.

가)와 나)에서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알기 어려운 나이인 일곱 살짜리 아동이 어른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곡을 잘 했다는 사실, 오작교의 이별 대목을 듣다가 청승맞게 울었다는 사실,'나는 외롭다'고 고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소월은 모두 남의 비극을 보고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소월은 아동답지 아하게 자신의 슬픔에 대한 모종의 깊은 자각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소월은 12세때 닥친 장티푸스 감염 때"나는 죽을 거야,나는 죽을 거야"를 반복한다.

철이 들면서부터 소월은 점점 쾌활하고 명랑했떤 옛날의 성격이 줄
어들고 그늘진 얼굴을 할 때가 많아지면서 조용히 앉아서 글이나 쓰고
잇을 때가 많았다./특히 오산 중학에 가서 한 학기를 마치고 돌아온 소월은 몰라 볼 정도로 사람이 달라져서 새색시 같이 얌전해졌다.

소월의 성격이 우울하고 고독감을 느끼는 원인은 아버지 때문이었던 것이다.
"나의 아버니느 왜 저렇게 되셨나?"
하는 근심과 슬픔이 항상 소월의 머릿속에 그림자처럼 뒤따라다녔던
것이다. 학교에서 소월의 가정사정을 모른 애들은 계모가 아니면 부
모없이 자라난 학생인 줄로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선생님까지도 그렇게
자기르보는 것 같다고 선생님이 자기보고 한 말을 되풀이 했다.

"너 왜 그리 기운이 없어 보이냐?"/ 부도도 제대로 못 둔 놈이 무슨
기운이 있겠어요?"
이 입버룻 같은 대답으로 선생님께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했다.

소월은 친구가 없었다 하나밖에 없던 친구 상섭이가 장가간 후 바깥
출입이 줄어서 멀어졌으니 친하던 단 하나의 친구도 잃어버린 셈이다
그래서 소월은 누구도 찾아가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고 이야기하며 긴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다. 다만 소월이 찾아간 곳은 책 한권 들고 한적한 뒷 울안으로 올라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산 중학2학년 그러니까 소월이 열다섯 되던 그해 여름방학 때
있었던 이야기다. 소월의 모습은 무척 쓸쓸해 보였으며 몹시 실의와 실
망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소월은 철이 들면서부터 늘 울적한 표정을
짓고 지냈으며 혼자서 외롭게 깊은 명상에 잠기곤 했는데 이 날은 유별
나게 힘이 없고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슬픔의 표정이 역력히 어려 있었다.

어른이 된 뒤의 소월의 성격적 특성이 그대로 이 증언 속에 요약되어 있음
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소월의 스승인 김억은 소월의 성격에 모질고
외골수적인 데가 있었으며,처세에 불리한면,즉 세속적 삶에 대한 적응을
거부하는 면모가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물론 계희영은 소월의 아버지 상실 체험이 소월의 이러한 면모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러한 진단은 발달심리나 정신분석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충분히 타당하며 또한 기왕의 연구사에서도 많은 지적이 나온 바 있다. 왜냐하면 사내 아이에게 있어서 '아버지"란 바람직안 남성상으로서의 모
델이 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성인으로서의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규범과 금지 체계를 전수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월이 문단 생활을 비롯하여 개인 사업 등등의 면에서 즉 세속 생활 세계에 대한 적응에 사실상 실패했다는 사실 혹은 그것을 거부했다는 사실은 아버지 상실이란는 개인적 요인이 얼마나 소월의 인생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잘 입증해 주고 있는 예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숙모님께서는 사는 게 재미가 있어요?
전 집이란 것이 재미가 없어요 어디 훨훨 새들처럼 날아나 다녔으
면 좋겠어요. 누구처럼 만주에나 갔으면 좋겠어요
집을 떠나 있으면 집이 그리워 못 견디게 생각이 나는데 막상 집에
와 봐야 마음을 주고 정 붙일 곳이 없어요 숙모님이 세간을 나서 그런
가 봐요

나야 세간을 나갔어요 네가 집에 없으니 마찬가지지 이렇게 와서
만나 보는 것이 더 좋지 않니?
남들은 장가들고 재미가 나겠다라고 하지만 이렇게 귀찮아서야 어디
재민들 있겟어요
그것이 재미지 네가 재미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야

이팔청춘이라는데 나는 왜 봄이 없고 가을날만 같을까요?
넌 별소리 다 하는구나 할아버지가 꾸중을 좀 하셨다기로서니 그렇
게 까지 비관할 게 뭐란 말이냐?
숙모님도 다 아시면서 그러시네요 제가 무엇이 기쁘겠어요 나라가
있습니까 아니면 아버지 어머지가 계십니까?

어머니야 멀쩡하게 살아계시는데 넌 별소리 다 하는구나
어머니가 계시면 뭘해요 밤낮 울기만 하시는 어머니가 나와 무슨
의논할 상대가 돼야 말이죠 내 어머니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에요
가장 불쌍한 사람은 우리 모자뿐이에요
그런 생각하지 말고 나는 우리 집안의 복덩어리다. 그렇게 생각을

고쳐 보려무마. 나는 적어도 중학공부를 하는 큰집의 장손이다라는 마
음을 먹어 보란 말이야 왜 자꾸 그런 비감한 생각만 하고 있느냐 말이다
전 큰집도 장손도 다 귀찮고 싫어요

스스로 죽음을 선태개 간 김소월의 생과 그 내면적 특성이 이미 원형적인 형태로 요약이 되어 있는 자료가 아닐까. 열두 살의 소년 소월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은 너무도 소년답지 않다. 그것은 생이 허망한 것이며,생의 기쁨을 추구할 만한 곳은 이 세상에는 없다. 고향 역시도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공간이 아니다. 내게 정주가 가능한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그대로 성년기의 김소월의 작품의 중요 모티브가 되어 있는 점에 대해서는 재론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천재시인이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었어도 자주의 아들로서 유복한 삶의 환경을 갖고 있었어도 그의 이러한 사고방식과 인생 행로는 크게 바뀐 적이 없었던 듯하다. 그는 기이할 정도로 변화가 없는 길을 선택해나가다가 결국은 죽음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다. 인용이 중복되기는 하나「길」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글을 맺는다.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4. 결 말

김소월의 비극적인 생애와 문학이 형성되게 된 원인으로 아버지 상실의 문제, 식민지 시대의 질곡 문제,개인적인 사업의 실패 등의 외부적 요인을 제시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외적인 환경의 불우성이 개인에게 깊은 영향을 준다는 이러한 논리는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견해라고 생각이 된다. 
그러한 환경적 요인을 과소평가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생의 여러 문제들을 환경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대하면서 생각과 행동을 선택해나가는 개인의 주체적인의지에 의해 발생하는 측면을 강하게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소월의 생애와 문학을 살펴보고 그는 자신이 맛보아야 했던 아버지 상실의 고통이나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좌절감 등을 다른 보상책을 통해 해소.승화시켜 나가는 길을 선택해 나갔던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된다.

그는 유소년기부터 기이할 정도로 슬픔이나 단절감,고독감,죽음 등의 세계에 집착을 하거나 혹은 그것을 자기 암시라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반복하는 성향을 보여준다. 이것은 김소월이 단순한 환경의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그러한 비극적인 생애와 문학의 길을 선택해 나가는 인생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왜 김소월이 그러한 인생 스타일을 스스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 본질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소월의 유년기 부터 그런 인생 스타일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현재 입장에서는 이 질문에 누구도 명쾌하게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에 대한 완벽한 대답은 소월의 출생 이전의 세계에 대한 탐색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누가 어떠한 대답을 내린다해도 학문적 담론으로서 성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미지의 신비 영역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생사를 초월한 지역에서 존재한다는 무의식에 대한 보다 깊은 탐구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을 듯도 하다.

다만 인간 정신의 탐구에 있어서 절대적인 한계를 갖고 있는 우리가 현재의 입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김소월이라는 한 인간의 그렇게도 비극적인 생애가 자신의 온전한 책임하에 조리정연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인생 행로의 주체적인 선택이 그다지도 참담했다는 점에서 김소월은 우리에게 심각한 화두를 던지고 있으며, 그 사실을 확인하는데 그치더라도 우리는 커다란 소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지점에서 결론을 짓도록 한다.

 

 

 

김소월의 생애
 
■ 가족사항

조부는 공주 김씨의 金相疇이고, 부친은 金性燾, 모친은 張景淑이다. 仁姐라는 여동생이 있고,洪明熙의 딸 洪實丹을 아내로 맞이하다.
슬하에 장녀 龜生, 차녀 龜媛, 장남 俊鎬, 차남 殷鎬, 삼남 正鎬, 사남 洛鎬 등 4남 2녀를 두다.


 

■ 1902년

본명은 廷湜이고 필명/아호는 素月이다.
고향(본적)은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일명 남산동) 569번지이다. 평안북도 구성군 구성면 왕인동 외가에서 9월 7일(음력으로 8월 6일) 태어나다.

북한ㆍ연변 자료에 의하면, 소월의 출생년도는 1903년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착오이다. 최근의 북한자료(리동수 지음 김재남 해제, 《북한의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 연구》, 살림터, 1992, 240면)는 이를 바로잡고 있다.


 

■ 1904년

부친이 정주ㆍ곽산간 철도를 가설하던 목도꾼들에게 몰매를 당했고, 이로 인해 정신이상을 일으켜 죽을 때까지 폐인생활을 하였다. 북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 부랑자들에게 구타를 당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때 광산업에 종사하여 재산을 모으기도 했던 조부 김상도의 각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자라다.


 

■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조국이 식민지화의 길로 치닫게 되다.

이 때를 즈음하여, 유학과 한문에 소양이 높은 할아버지의 훈도 밑에서 구학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수많은 민담ㆍ민화 등을 들려주었던 숙모 桂熙永이 숙부 應悅에게 시집옴으로써 소월은 그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되다.


 

■ 1909년

남산보통학교(일설에 의하면 사립학교)가 설립되자 머리를 깎고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다.

아버지의 정신병으로 인하여 집안은 더욱 쪼들리게 되었으나 할아버지의 훈도와 할머니ㆍ어머니의 지성어린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하다.


 

■ 1914년

연변ㆍ북한 쪽 자료에 의하면, 이 시기에 <긴 숙시(熟視)>를 썼고 이것을 후에 《근대사조》(1호,1916)에 발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1915년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다. 5월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안서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다.

이 때 소월시의 원천(源泉)이 된 한시ㆍ민요ㆍ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1916년

세살 많은 홍실단(일명 丹實) 여사와 결혼하다.

연변ㆍ북한 자료에 의하면, 남산학교를 졸업한 후집에서 쉬다가 이 시기에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하여 시를 짓기 시작했고, <먼후일>을 썼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부 연변ㆍ북한 자료에 오산학교 입학 시기를 1917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소월이 15세(공식적인 나이로는 14세)에 해당되는 년도는 1916년이다.


 

■ 1919년

북한 자료에 의하면, 동급생을 선동하여 이들과 함께 3ㆍ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잡혀가던 도중에 요행히도 몸을 피하였다고 한다.

4월에 <춘조>를 탈고하다.


 

■ 1920년

이 시기에 <그리워>(창조 5호, 1920. 3) 등과 <거친 풀 흐트러진 모래동으로>(학생계 창간호, 1920.7)를 발표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하다.
<춘조>를 《학생계》(3호, 10)를 발표하다.


 

■ 1922년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하다. 동급생에 나도향이 있었고 한 반 아래에 박팔양이 있었으나 특별한 교우관계를 갖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ㆍ1운동 이후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느낌을 주는 <함박눈>(개벽 28호, 10)을 발표하다.


 

■ 1923년

배재고보(7회)를 우수한 성적으로(총 44명중 4등) 졸업하다. 고향에 돌아와 평북 정주군 림포면 사립학교 교원이 되다. 아동교육에 종사하면서 시창작에 정진하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서정시를 창작하고, 그것들을 《개벽》 등에 발표하다. <장별리>도 이 때 지은 작품이다.

사립학교 교원생활이 창작이나 집안살림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이 시기에 집안이 더욱 피폐해져 가다.
처가의 도움으로 일본 동경에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하다. 학자금이 제대로 조달되지도 않았고 상과에 취미도 없어 괴로운 학창생활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하여 10월경 귀국하다.

이즈음에 서울생활을 하게 되고 나도향 등과 어울렸던 것으로 보이며, 이 때의 서울생활의 느낌을 시로 읊은 것이 <서울밤>과 <不稱錘秤> 등이 아닐까 추측된다.


 

■ 1924년

김동인 김찬영 주요한 김억 전영택 김유방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가담하여 서울에 체류하였으나, 곧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방현)에서 사망할 때까지 동아일보 지국일을 맡아보며 소일하다.

그러나 《東亞日報社史 1》의 기록에 의하면 소월이 동아일보지국장 일을 맡기 시작한 것은 1926년 8월부터이고, 그만둔 시기는 927년 3월이다.


 

■ 1925년

유일한 시론 <詩魂>(《개벽》 59호, 5)을 발표하고, 이해 말에 《진달내》(12)을 매문사에서 상재하다. 1934년6월 사남 낙호가 출생하다.

12월 23일(일설에 의하면 24일)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 자택에서 사망/자살하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마약 중독으로 추정된다.
《조선중앙일보》(12.30)에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씨의 돌연사망 기사가 났고, 《동아일보》(12.30)에 소월의 사망을 알리는 기사와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찍은 흐릿한 소월 사진이 소개되다.

소월은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터진고개에 묻히다.


 

■ 1935년

김기림 김동인 김동환 김억 이광수 이은상 유도순 박종화 박팔양 정지용 등 문인 백여명이 서울 종로에 있는 백합원에서 소월을 추모하는 모임을 가지다.

안서가 《조선중앙일보》(1.22-26)에 <요절한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을 쓰고, 이어 《신동아》(2)에 소월을 추모하는 <弔詩>를 발표하다. 김억이 쓴 <요절한 박행시인 김소월에 대한 추억(3)>(《조선중앙일보》 1.23) 본문에 소월의 친필이 소개되다.


 

■ 1939년

《여성》에 소월의 <박넝쿨타령> <성색> <세모감> <술과 밥> <절제> 등 유고 시편이 발굴되어 발표되다.
김억이 박문서관에서 《소월시초》를 펴내다.

소월의 묘를 서산면 왕릉산으로 이장하다.


 

■ 1956년

정음사에서 《소월시집》이 간행되다.


 

■ 1966년

백순재ㆍ하동호가 양서각에서 《못잊을 그사람》을 펴내다.
이 시집은 200여 편의 소월시를 원본과 대조하는 작업을 보여주어 소월시 전집 발간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된다.


 

■ 1968년

3월에 한국일보사에서 한국신시 60년 기념으로 서울 남산 시립도서관 앞에 金忠顯의 글씨로<산유화>를 새겨넣은 소월 시비를 세우다.


 

■ 1975년

배제 38회 졸업생인 소월을 기리고자 배제고교 동창생들이 6월에 <진달래꽃>을 새겨넣은 소월시비를교내에 세우다.


 

■ 1977년

《문학사상》(11)에서 소월의 육필유고를 발굴하여 《미발표 소월 자필 유고시집》을 게재하다.


 

■ 1978년

<봄의 맘> 등 50여편의 육필유고인 <주인없는 노래>가 '소월의 작품인가, 안서의 작품인가'라고 《문예중앙》(봄호)에서 문제를 제기하다.

문학사상사에 의하여 소월의 초상화가 완성되어 문인들에게 배포되다.


 

■ 1980년

김종욱이 홍성사에서 《원본 소월전집(상 하)》를 펴내다. 이 시집에서 소월의 육필원고가 하권 첫부분에 영인되어 공개되다.


 

■ 1986년

문학사상사에서 소월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윤주은이 교문사에서 《밧고랑우헤서-김소월시전집ㆍ평론》을 펴내다.


 

■ 1990년

한국문인협회 주최로 동방플라자미술관에서 [한국근대작고문인 유묵ㆍ육필 100인전(1990. 2. 5 - 2.10)이 열린 바, 김소월의 <무제> 일부가 그의 육필 유고로 공개되다.

문화부 주관 한국인 재발견운동--9월의 문화인물로 김소월이 선정되다.

한국역사인물보존회에 의뢰하여 소월의 초상화를 제작한 바, 컴퓨터 토탈 스캐너(Computer Total Scanner)를 이용하여 1934년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과 그의 삼남 김정호, 손자 김영돈의 모습을 참조하여 소월의 인물화를 완성하다.

조각가 최만린이 소월흉상을 제작하다. 시화전 및 한풀이 공연이 문예진흥원 마로니에 광장에서, 김소월 가곡의 밤이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김소월 관련 자료 전시회가 교보문고에서 열리다.
 

 

김소월, 그의 아들, 그리고 손녀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詩人의 눈물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교과서에, 대중가요에
누구나 하나쯤은 외우는

"아버지 작은 기념관 하나라도"
南으로 온 시인의 아들은
가난과 싸우다 쓸쓸히
꿈 못 이루고 하늘로

"아… 할아버지, 아버지"
시인의 손녀도 의지할 곳 없이

'가리비 팍팍 뿌리옵소서'
피자 회사에서 받은
단어 사용료 몇푼이
할아버지가 준 유일한 유산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교과서에서만, 노래로만
작은 기념관 하나 없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의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김소월‘먼 후일’) 서울 행당동 소월공원에 있는 김소월의 흉상. 소월의 오른쪽 뺨에 비둘기가 흘린 분비물이 눈물처럼 남아 있다. / 채승우 기자rainman@chosun.com

 

#진달래 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나는 소월(素月)이다

 

나는 노래했다. 봄에는 고향 평북 정주의 야산에 흐드러진 '진달래꽃'을, 낙엽 떨어지는 겨울 밤엔 어머니와의 대화를 '부모'로 읊었다. 내 시(詩) 주머니는 말 그대로 '화수분'이었다.

조국은 아름다웠지만 시대는 엄혹(嚴酷)했다. 내 나이 두살 때 나귀에 먹을 것 실어오던 아버지는 일본인 철도노동자에게 맞아 정신을 놓고 말았다. 여덟살 때 겪은 국망(國亡)은 내 육신(肉身)이 스러질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곽산 남산보통학교 나와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교장으로 계신 오산중에 입학해선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한동안 일경(日警)을 피해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어느 불행한 시인이 말했던가, 우울(憂鬱)은 시를 꽃피우는 자양분이라고.

오산중 교사였던 스승 김억(金億)의 추천으로 나는 1920년 동인지 '창조' 5호에 첫 시를 냈다. 그 후 5년간 154편을 썼다. 내 생애 가장 화려했던 시기는 1922년이었을 것이다. 그 한 해에만 '먼 후일' 등 30편을 썼던 것이다.

생(生)의 화려한 날은 짧다. 1927년 동아일보 평북 구성(龜城)지국 경영에 실패한 뒤 난 술독에 빠져 지냈다. 1934년 12월 27일 이승과 하직했을 때 조선일보는 '청년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 별세'라는 기사로 내 죽음을 알렸다.

'진달래꽃이라는 시집을 발행해 시단에 이채를 나타내이던, 재질이 비상튼 청년시인 김정식씨가 침묵으로 일관하던바 뇌일혈로 급작스레 별세해 유족들의 애통하는 모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나는 세상에 아들 넷과 딸 둘을 남겼다. 그들의 소식이 북한의 주간 '문학신문'에 연재된 탐방기(探訪記)-'소월의 고향을 찾아서'에 전해진 바 있다. 2004년 '문학사상'에 소개된 글은 1966년 5월 10일부터 7월 20일 사이 쓴 것이다.

탐방기에 따르면 장남 준호(俊鎬)는 고향 정주 곽산에서 목수를 하고 있다고 한다. 둘째 아들 은호(殷鎬)는 평북 경공업총국의 상급지도원이라고 한다. 유복자였던 넷째아들 낙호(洛鎬)는 평양의 설계연구기관의 연구사라고 한다.

딸 구원(龜元)을 비롯해 영실, 정옥, 영철 등 손자들은 고향 인근 문장리에 산다고 했다. 이 글엔 내 호 '소월'이 고향 마을, 일명 진달래봉으로 불리는 소산(素山) 위에 걸린 달에서 유래했다는 주민들의 증언도 나오고 있다.

북한에서 난 처음엔 민족주의·애국주의 시인으로 추앙됐다. 그러더니 1967년에는 돌연 봉건·유교 사상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시대별로 변한 북한의 나에 대한 평가를 남에 있는 평론가 권영민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풍부한 시흥(詩興)과 고운 리듬과 절제있는 표현으로 사실주의적으로 노래했지만 그의 문학활동은 민족해방투쟁으로 연결되지 못했고 3·1운동 이후의 시대적 변천에 따라오지 못했다."(조선문학사·1956년)

"소월의 시가에 떠도는 애수(哀愁)는 잃어진 것에 대한 비애로서 극히 낭만적인 색조를 띠게 된 것이 사실이다. 사실주의적 시인인 김소월은 제한된 한계에서나마 당시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해방전 조선문학·1958년)

"소월의 세계관은 협애해 현실에 혁명적으로 침투하지 못했고 그의 시 문학이 구현하는 애국주의, 인민성, 생활전망성도 그만큼 제한적이어서 비판적 사실주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조선문학사·1964년·주체사상이 등장한 뒤)

"깊은 비애의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1920년대 시단에서 민요풍의 시를 개척하고 발전시켰지만 노동계급의 계급적 이념과 인민적 입장에서 출발하지 못해 1920년대의 시대적 높이에 이르지 못했다."(조선문학사·2000년 발간본)

 

 

#부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랴?
 

 

나는 시인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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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의 삼남(三男) 정호는 소월이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1932년 태어났다. 위로 두 형과 두 누나가 있었고 나중에 유복자(遺腹子) 남동생이 있었다. 18세 때 6·25가 터졌다. 그에게 어머니(홍단실·洪丹實)가 이리 권유했다.

"너만이라도 남으로 가라…." 전쟁 때 그 길은 인민군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전쟁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인의 아들은 포로로 붙잡혔다. 인천형무소, 부산과 거제포로수용소를 거쳐 그는 반공(反共)포로로 풀려났다.

그는 그 후 국군에 자진 입대해 1955년 제대했다. 군 복무를 마쳤지만 갈 곳은 없었다. 철도청에 근무하던 친척의 주선으로 교통부에 임시직으로 취직했다. 월급이 쌀 한 가마니였지만 그때 그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날 수 있었다.

결혼은 했지만 시인의 아들은 반년이 채 안 돼 결혼반지까지 팔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곤궁한 처지에 빠진 그는 1958년 동아일보의 기자에게 자신이 '소월의 친자(親子)'임을 알렸다. 그래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홍익회에서 4년을 일한 뒤 나와 레코드 외판원을 할 때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를 찾아가 도움을 청해봤다. 미당은 그리 사는 소월의 아들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미당은 정호의 딱한 사정을 월탄 박종화, 시인 구상에게 전했다.

그들은 "소월의 하나뿐인 아들이 남에서 외판일 하는 걸 북이 알면 얼마나 악선전하겠느냐"며 당시 국회의장 이효상(李孝祥)에게 추천서를 써줬다. 그 덕에 정호는 국회에 취직했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은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8년간 열심히 일했지만 이번엔 아내의 신부전증이 악화된 것이다. 치료비 마련을 위해 남편이 택할 길은 몇푼 안 되는 퇴직금에 기대는 것뿐이었다. 시인의 아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한 가지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고민했다.

서울 남산에 있는 것을 비롯해 소월 시비(詩碑)가 전국에만 13개나 되고 남산에 '소월로'라는 길이 만들어졌으며 1986년엔 문학상도 제정됐지만 정작 아버지의 문학을 기릴 조촐한 기념관 하나 없는 현실을 아들은 안타까워했다.

한때 라이온스클럽 회장을 지낸 이가 10억원을 모으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그이가 지병으로 쓰러지자 기탁금이 전부 반환된 것이다. 8년 전 소월 탄생 100주년 되던 해 각 예술단체가 떠들썩한 심포지엄을 열고 시 낭송회를 가졌다.

그렇지만 그것뿐이었다. 누구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의 아버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시인의 아들은 4년 전 아버지 품으로 돌아갔다. 그가 못다 이룬 이승의 꿈은 다시 이승에 남은 아들과 딸에게로 이어졌다.

 

 

#초혼(招魂)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어!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어!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자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나가 앉은 산 우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나는 시인의 손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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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과 2007년, 소월은 한국 현대시 100년 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다. 전문지 '시인세계'가 창간호를 냈을 때와 한국시인협회 조사 결과였다. 당시 두 단체의 설문에 국내의 내로라하는 시인과 평론가들이 대부분 참가했다.

2008년엔 KBS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시민 1만8298명이 답했는데 거기서도 '진달래꽃'이 애송시(愛誦詩) 1위였다. 그 뒤가 윤동주(尹東柱)의 '서시'(序詩)와 '별 헤는 밤', 김춘수(金春洙)의 '꽃', 천상병(千祥炳)의 '귀천'이었다.

김정호씨 사후, 소월의 혈육은 딸 김은숙(50)과 아들 김영돈(48)뿐이다. 아들은 인천시 부평에 사나 언론 접촉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충남 아산에 사는 김은숙은 시인에 대한 국민의 사랑을 말하자 "소용없는 얘기"라고 했다.

―서울에서 어떻게 충청도로 왔습니까.

"흘러흘러 왔어요. 남편이 무역회사, 운수업을 했었습니다. 사정이 어려워졌을 때 아는 분이 이곳에 땅이 있다길래…."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그리 어려웠나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후 이사를 스무 번도 넘게 했대요. 생활은 늘 어려웠고 의지할 곳이라곤 없는 힘든 삶이었어요. 나중에 봉천동에서 독채 전세를 얻긴 했지만요."

―그런 부모가 원망스러웠습니까.

"아버진 정이 그리웠는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대단했어요.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저희들에겐 잘해주셨어요. 형편이 안 됐을 텐데 번듯한 옷도 사주셨고요. 본인들은 어려워도 자식들에겐 뭔가 해주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제 동생은 이런 얘기하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이상한 소문이 사실처럼 알려지는 것도 싫어하고."

―이상한 소문이 뭡니까.

"기자들이 '미당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식의 기사를 많이 썼어요. 학교 다닐 때 육성회비 정도 받았을 뿐인데, 자꾸 과장된 기사가 나니 동생이 화를 냈어요. '왜 자꾸 구질구질한 내용이 나가게 하느냐'고요. 저흰 미당 선생님이나 구상 선생님을 명절 때 찾아뵌 정도인데. 미당 선생님은 제 결혼식 때 주례를 서주셨어요."

―할아버지가 남긴 작품의 저작권이 있지 않나요.

"그건 이미 시효가 다 지나 소용없는 거고. 할아버지 때문에 돈 받아본 적은 딱 한 번 있어요. '미스터 피자'라는 회사에서 영화배우 문근영이 출연해 '가리비 팍팍 뿌리옵소서' 뭐 이런 광고를 했을 땝니다."

―가리비를 팍팍?

"그 회사 사장님이 할아버지 시를 좋아하신대요. 그래서 단어 사용료조로…."

―숙모라는 분이 소월의 모든 인세를 챙겨갔기 때문에 정작 소월의 가족들이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그 부분은….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뭘."

―작고한 김정호 선생은 할아버지(소월)에 대해 무슨 말을 했습니까.

"평생 소원이 자그마한 할아버지 기념관 하나 짓는 거였어요.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요. 북에 있는 형제들도 만나고 싶어했어요. 소문으론 꽤 괜찮게 산다고 하는데 웬일인지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냈는데도 이뤄지지 않았어요. 탈북자들에게 물어보니 쉽게 만날 수도 있다는데, 반공포로여서 불허(不許)한다는 말도 있고, 하여간 아버지에겐 그게 한(恨)이 됐을 겁니다. 전 아니지만 아버진 예술 방면에 재주가 특별했어요."

―무슨….

"아코디언 연주, 그림, 서예, 글쓰기 등 못하는 게 없었어요. 언젠가 할아버지 육필(肉筆) 원고가 나왔다고 해서 봤는데 아버지 필체와 너무 닮아 깜짝 놀란 기억이 납니다."

―김 선생 묘소는 근처인가요.

"아버진 연세 드셔서 성당에 나갔어요. 지금 모신 곳은 경기도 김포의 납골당이고, 어머니 묘소는 아산시 송악면에 있어요. 그 옆에 아버지 묏자리도 마련해 놨었는데…. 앞으로 합장해드려야죠. 그 생각만 하면 속이 상해요."

―소월의 가족이란 사실이 부담이 됩니까.

"학교 다닐 때는 스트레스였지요. 소월의 손녀라는 이야기가 도니 글을 쓸 때마다 무척 신경이 쓰였어요. 아마 그런 게 없었다면 꽤 잘 썼다는 이야길 들었을 텐데 할아버지를 연상하고 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게 보였겠지요."

 

 

#왕십리

 

비가 온다
오누나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가도 왕십리 오네.

웬걸, 저 새야
올랴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리어 운다.

중학교 1학년 신입생에게 나눠주는 국어 교과서는 모두 23종 92권이다. 이들 교과서에 가장 많이 실린 것도 그의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이었다. 모두 19회다. 2위가 허균(許筠)의 '홍길동전', 3위가 박완서의 글이었다.

대중가요 가수들 역시 그를 사랑했다. '진달래꽃'(마야) '개여울'(정미조) '부모'(유주용) '산유화'(송민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라스트포인트)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활주로) '못 잊어'(장은숙) '초혼'(이은하) 등이다.

―소월의 자손인 걸 감추고 싶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요. 아버지도 할아버지 기념관 한번 마련해보겠다고 이북5도민회다 뭐다 하며 평생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소용이 없었거든요. 저희들도 마찬가지고."

―왜 기념관이 마련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까.

"아무래도 저희가 북에서 왔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남쪽에 터전이 있으면 동료나 제자들이 그래도 뭔가를 해주잖아요."

―국민들의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요.

"관심이 없던 건 아니에요. 오래전에 아버지와 어머니 스토리가 라디오 드라마로 방송된 적이 있어요. '절망은 없다'는 제목이었는데 굉장히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내용이었어요. 그때 많은 분들이 편지도 보내오고 어머니 관절염 치료제니 금침 같은 것도 보내주셨어요. 하지만 그것뿐이었어요. 기자들도 수없이 찾아왔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고요."

―최근까지의 언론보도를 보면 아산에서 가든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 '송일정'이라고 닭백숙·닭볶음탕·보신탕·붕어찜 같은 걸 팔던 집이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던 해에 접었습니다."

―영업이 안 됐나요.

"처음엔 괜찮게 됐지요. 개고기 맛이 좋기로 주변에선 꽤 소문이 났거든요. '소월의 손녀가 하는 집'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인근에 있는 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오셨어요. 특히 국어 선생님들이요. 그런데 와서 보곤 전부 아무것도 없구나 하고 서운해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1981년 전두환(全斗煥) 정부 때 금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그 훈장증과 '김 선생'이란 분이 1977년 고물상에서 할아버지 육필 원고를 발견했는데 복사본을 받아 식당에 걸어놓았지요. 저희는 할아버지의 흔적이라 생각했지만 번듯한 문학관 있는 다른 시인들과 비교해 보면 초라해 보였을 겁니다."

―소월의 육필원고에 대해선 '진본(眞本)이다 아니다' 하는 설이 많습니다.

"할아버지가 동아일보 지국장 하시던 시절에 쓴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보니 예전에 신문사에서 쓰던 원고지에 쓴 글이었어요. 낙서 비슷한 것도 있었고. 이어령 선생님이 해석도 해주셨는걸요."

―그걸 왜 소월의 자손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그걸 구입할 사정이 됐으면 구입했을 텐데, 그럴 형편이 아니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송일정 접고 나서 훈장증과 훈장 2개, 육필원고 사본(寫本)은 모두 동생에게 줬어요."

―그럼 진짜 원고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김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줄로만 알지요. 연락은 자주 못 하지만요."

―그런데 하필이면 왜 보신탕집을….

"충청도에 왔을 때 빈땅에서 개를 길렀거든요. 많을 때는 700~800마리를 키웠습니다. 제 가든은 규모가 컸어요. 테이블이 14개에 방도 2개 있었거든요."

―'송일정'을 접은 진짜 이유는 뭔가요.

"남의 빚보증을 잘못해줘서…. 아쉬운 게 있어요. 전 송일정이 잘됐으면 그 한쪽에 자그마한 할아버지 기념관 하나 짓는 게 소원이었어요. 그걸 이루지 못했으니. 송일정을 그만둔 뒤에는 아산 시내에서 조그맣게 삼겹살집을 하다가 그것도 3년 전에 그만뒀습니다."

―그럼 지금은?

"남의 식당 일 돕고 있어요. 남들에겐 '알바'라고 말하지만 그냥."

―자제는.

"고3된 아들 하나 있어요. (혹시 문학적 재능이 있느냐고 묻자) 아니에요, 그 아이는 이공계입니다."

 

 

#산

 

산새도 오리나무
우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嶺) 넘어갈라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나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리
돌아서서 육십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년 정분을 못잊겠네

 

 

미스터리-소월의 얼굴

 

소월 초상화<사진>는 1990년 제작됐다. 당시 문화부가 소월을 '9월의 문화인물'로 정해 한국역사인물화연구회에 초상화 제작을 의뢰했다.

지금까지 소월의 유일한 진영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여러 인물을 합성한 것인데 소재가 불분명하다.

소월의 진영(眞影)은 1934년 동아일보 게재 사진+남으로 내려온 셋째 아들 김정호(2006년 사망)+그의 손자 김영돈(48)의 사진을 참조해 만든 것이다.

포털 사이트 '한국학' 카테고리에 실려 있는데 그 다음이 해괴하다.

현재 문관부는 "누가 그렸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창고인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에도 이 자료가 없다. 소월 연구가인 서지학자 김종욱(72)씨에게 연락하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1990년 당시 이어령(李御寧) 장관이 나를 불러 옥문성 화백과 소월 초상화를 만들어보자고 해 셋이 연구해 그렸다"는 것이다. 옥 화백(67)은 경남 거제 출신이라고 한다. 국민들이 애송하는 시인은 얼굴조차 미상(未詳)인 것이다.

 

 

나태주 시인과 함께 떠나는 명시여행(17)

 

엄마야 누나야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한국 시인 가운데 그 대표작을 들기가 쉽지 않은 시인으로 나는 서슴없이 서정주와 김소월과 정지용을 든다. 그것은 이들의 작품이 수준 미달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나 완미(完美)한 작품이 많고 빼어난 작품이 많아서 그렇다. 나더러 김소월(金素月, 1902-1934, 본명 金廷湜)의 대표작으로 한 편만 꼽으라면 어쩔 수 없이 복수로 대답하는 도리밖에 없겠다. 「산유화」,「진달래꽃」, 「초혼」… 그리고는 한참 만에 「엄마야 누나야」란 시를 말하겠다. 

엄마야 누나야」는 시인의 20세 때인 1922년 1월 월간지 <개벽> 19호에 발표한 작품이다. 시인의 여타 작품들이 다분히 비애감에 젖어 있는데 비해 이 작품만은 아주 해맑은 게 특징이다. 동요처럼 읽힌다.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가요 톤으로 작곡되어 널리 애송되는 노래이기도 하다. 정말로 그럴까? 누군가한테서 듣기론 요즘 4대강 개발 반대 시위현장에서 자주 부르는 노래가 이 노래라 한다. 김소월 시인의 시가 그런 쪽으로 쓰여지다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겠다.

김소월은 한국시가 겨우 싹이 나서 자라기 시작하는 모판 상태에서 나와서 너무나도 좋은 작품을 많이 남긴 시인이다. 눈부신 신화적인 시인이다. 그러나 평생을 되는 일 없이 불행하게 살았다. 나도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김소월 시인도 외가에서 태어났다. 2세 때 아버지가 일본인한테 두들겨 맞고 정신이상자가 되어 할아버지 밑에서 양육되었다. 14세 때 손위여자와 조혼하였고 오산학교를 거쳐 일본에 유학(동경상과대학) 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공부를 포기하고 귀국해 여러 가지 일에 손을 대면서 하는 일마다 실패를 경험한다. 할아버지를 도운 광산업, 땅을 팔아 차린 동아일보사 지국. 실의 속에 술과 한숨으로 살다가 결국은 32세 때 아편을 먹고 음독자살을 한다. 부인더러도 같이 죽자했으나 4남 2녀를 둔 부인은 차마 자녀들 생각에 그러지 못했노라 전한다. 

그러나 선생님 복은 많았던 것 같다. 유년시절을 돌보아준 할아버지는 한문을 가르쳐준 스승이었고 숙모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준 분이었으며 오산학교 시절에 만난 시인 선생님 김억과 교장으로 있던 조만식 선생은 그의 평생 마음의 지킴이가 되어준 분들이다. 김소월에게 시를 가르쳐준 사람은 김억이다. 더러는 두 사람의 시가 소재이나 분위기, 제목 같은 데서 엇비슷하게 얽혀 있음을 본다. 그러나 김억의 시를 김소월의 시에 비길 바가 아니다. 이런 데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스승 김억으로서의 보람이요, 시인 김억으로서의 굴종이다. 

내가 지금까지 가장 좋아한 시인은 김소월이고 가장 좋아한 가수는 이미자다. 쉬운 것 같지만 도저히 쉽지 않은 두 사람의 노래와 시. 그들의 시와 노래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이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같다.

2015.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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