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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山)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요점 정리 지은이 : 김소월(金素月)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민요적, 전통적, 여성적 율격 : 3음보. 7,5조의 변형 형태 : 불규칙형. 4연 배행 제재 : 가는 길 특징 : 간결한 구조와 탁월한 언어 구사, 유음, 비음 등의 활용으로 음악적 효과를 거둠 주제 : 이별의 아쉬움과 그리움. 지난날에 대한 회상에서 오는 그리움 의의 : 우리 민족의 내면에 흐르는 보편적 정한(情恨)을 진솔하게 표현 출전 : <개벽>(1923) 내용 연구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그립다 - 하니 그리워 : 그립다고 말하려 하니 그리움은 울컥 치솟는다는 의미로 화자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직설적으로 표현됨) 그냥 갈까(입밖으로 낼 수 없었던 사랑이었음을 암시)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미련의 여운을 드러내는 기능) [그냥 갈까 - 다시 더 한 번 : 그냥 가 버릴까 단념하면 그래도 미련 때문에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아진다.][그립다/ 말을 할까 _ 다시 더 한 번 : '그립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그 말을 하고 나니 그것은 모호하고 유동적인 상태로부터 하나의 분명하고 고정적인 상태로 바뀌어 어렴풋하던 그리움은 분명한 화자의 마음이 되어 새삼 못 견디게 임을 그리게 된다. 그래서 잊고 떠나려해도 임의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그는 희미하게 멀어져 가는 임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다시 뒤돌아 본다]- 제 1연 - 제 2연 : 그리움과 미련으로 인한 내면 갈등 저 산(山)에도 가마귀(까마귀. 비관적인 생의 인식을 반영하는 객관적 상관물), 들에 가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시간적 배경이 드러남) 지저귑니다.(져 산(山)에도 - 해 진다고 / 지저귑니다. : 그래도 머뭇거리고 있는 화자에게 까마귀는 길을 재촉한다. 날이 저무니 어서 떠나자고 자꾸만 재촉한다.)
앞 강물 뒷 강물(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과 삶의 표상으로 떠나는 임을 나타냄)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대상이 내면화되면서 주객(主客)의 융합이 이루어진 시행)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흐릅디다그려'의 준말).(앞 강물 뒷 강물 - 흐릅디다려. : 화자의 곁에서 흐르는 강물마저도 연이어 흐르면서 갈 길을 재촉한다. 먼저 흐른 물은 따라오라고. 나중에 따라 흐르는 물은 빨리 따라가자고 재촉하는 시간의 긴박성이 드러나는 상황이고, 움직임의 심상을 느낄 수 있다. 화자에게 '따라오라'고 하던 '강물'은 곧바로 화자의 내면이 되어 '따라가자'고 하고 있다. 또한 주객의 융합을 이루고 있다. 흘러가는 강물은 떠나가는 임을 형상화한 것이고 유음과 비음 등 매끄러운 느낌의 자음을 사용하여 강한 리듬감을 형성하고 있고, 강물 흐름의 지속성을 나타내고 있음)[저 산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 연달아 흐릅디다려 : 이별을 재촉하는 시간의 흐름을 까마귀의 울음소리와 강물의 흐름이라는 자연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낸 표현이다. '해질녘'과 '까마귀'라는 배경은 이별의 정한을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강물의 무심한 흐름 또한 이별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화자의 애절한 심정을 강화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제 3연 - 제 4연 : 떠나기를 재촉하는 외면적 상황 < 까마귀와 강물의 의미 : 이별의 안타까움과 슬픔의 정서를 환기시키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까마귀'는 화자의 비관적인 생의 인식을 반영하고, 안타까운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상물로서 이별의 정한을 강화하고 있다. 흐르는 '강물' 역시 사랑하는 임을 따라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화자에게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재촉함으로써 이별의 아픔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객관적 상관물이란 '어떤 특별한 정서를 나타낼 공식이 되는 한 무리의 사물, 정황, 일련의 사건으로서, 바로 그 정서를 불러일으키도록 제시된 외부의 사실들'을 일컫는 말로 엘리엇이 세운 이론이다. 이는 정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이미지의 제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정서를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1. 시는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심리적 반응, 곧 정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중심으로 다음 활동을 해 보자. ⑴ 이별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떠올려 보자. 자신이 막상 떠나려고 할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생각해 보고, 이러한 경험을 시적 화자의 정서와 비교해 보자. 이끌어 주기 : 학생들은 시를 머리로 읽으려는 경향이 있다. 시가 주는 느낌이나 시의 정서에 공감하기보다는 논리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 활동은 시가 논리의 산물이 아니라 정서의 산물이며,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 설정하였다. 학생들의 구체적인 체험과 결부하여 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예시답안 : 시는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심리적 반응, 곧 정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별의 상황에 대한 정서적 반응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즉, 헤어지는 사람과의 관계라든가 이별의 원인이나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싫은 사람과의 이별이라면 시원하고 후련한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대개의 경우 이별은 아쉬움과 미련을 남기게 마련이다. 나의 경우도 그랬다. 헤어지기 싫지만 피치 못한 상황에서의 이별이라서 그런지 슬픔과 아쉬움, 미련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 동안 잘해 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더더욱 그랬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별 노래가 그토록 절실하게 다가왔던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이별의 상황에 처해 있다. 이별의 이유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별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립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어렴풋하던 그리움이 그 말을 하고 난 뒤부터는 하나의 선명한 실체로 바뀐다. 그리하여 새삼 못 견디게 임이 그리워지고, 이별이 아쉬워지며, 마침내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망설이게 된다. 2연의 말줄임표에는 이러한 그리움과 아쉬움, 망설임의 정서가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심리적 체험은 이별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몇 마디 되지 않은 말로 이처럼 섬세하게 그리움과 망설임이 뒤섞인 상태를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이 시가 공감을 주는 요인은 이처럼 이별의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미묘한 심리를 절묘하게 표현해 낸 데 있다. ⑵ ‘지저귑니다’, ‘흐릅디다려’와 같은 말투는 시에 어떤 분위기를 형성하는지 말해 보자. 이끌어 주기 : 이 활동은 어조가 시의 분위기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어조란 시적 화자의 정서가 반영된 독특한 말씨나 말투를 일컫는다. 어조를 통해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시적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시적 화자의 태도를 파악할 수 있다. 시의 어조는 시의 분위기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모든 시에는 그만의 고유한 어조가 있게 마련이며, 어떤 어조가 더 좋다거나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시적 화자가 자신의 강인한 의지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단호하고 강인한 어조로, 자신의 소망을 절대자에게 기원하는 시라면 경건한 기도조의 어조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이 시의 어조를 이해하도록 지도한다. 예시답안 시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시적 화자는 여린 성격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임을 몹시 그리워하면서도 ‘그립다’는 말조차 못하는 소극적이고 여성적인 존재이다. ‘지저귑니다’는 ‘지저귄다’보다 훨씬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을 주는 말이며, ‘흐릅디다려’는 ‘흐릅디다그려’의 준말이다. 여기서 ‘-디다(그)려’라는 종결 어미는 자신이 체험한 사실을 청자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할 때 쓰이는 말로, 이별의 상황에 대한 화자의 애상적인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 ‘지저귑니다’, ‘흐릅디다려’와 같은 말투는 시적 화자의 여성적이며 소극적인 태도와 대응되면서, 애상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2 ‘시는 자신의 정서를 간결하면서도, 운율 있는 언어로 표현한다.’는 말과 관련하여 다음 활동을 해 보자. ⑴ 구성·창작 각 연에 나타난 시적 화자의 심정을 산문으로 표현해 보고, 이를 원작과 비교해 보자. 이끌어 주기 : 동일한 내용을 각각 시와 산문으로 표현해 보면, 비록 표현하고자 한 내용이 같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표현된 글이 주는 느낌이나 의미가 상당히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문은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고, 시는 분위기나 정서를 더 잘 느끼게 해 준다. 실제 활동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예시답안 1연 : 그립다고 말을 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선뜻 말하지는 못하겠다. 말하려고 생각을 하니 더욱 그리움이 사무친다. 2연 : 말을 하면 더 떠나기가 어려울 것 같고, 그래서 그냥 갈까 싶은데 그래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돌아보게 된다. 3연 :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산과 들에서 지저귀는 까마귀들은 해 지기 전에 가야 한다고 재촉을 하는 것 같다. 4연 : 흐르는 저 강물은 어서 가자고 연달아 흐르며 나를 재촉한다. 산문은 시적 화자의 심경을 직설적으로 전달하고,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마음의 상태를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화자가 지니고 있는 정서나 심리 상태 등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것은 오히려 시 쪽이다. 산문이 뜻을 이해하기에 적절하다면, 시는 마음이나 기분 상태 등을 그대로 느끼기에 적절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이는 시와 산문에서 언어가 운용되는 방식이 다른 데서 기인한다. 시는 운율을 가진다. 운율은 리듬을 형성하고, 리듬의 반복이나 변화는 읽는 이의 감정을 흥분시키거나 가라앉히면서 의미를 강화하고 인상적으로 만들어 준다. ⑵ 구성·창작 이 시는 글자 수나 행의 배치가 일정하지 않은 것 같지만 낭송을 하다 보면 일정한 율격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동일한 율격으로 고쳐 써 보고, 고쳐 쓴 것과 원작이주는 느낌의 차이를 말해 보자. 이끌어 주기 : 이 활동은 운율의 개념을 이해하고, 운율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바로잡기 위해 설정하였다. 학생들은 대부분 어떤 시인은 주로 어떠한 율격을 사용하며, 어떤 작품에는 어떠한 율격이 사용되었다라는 것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낯선 작가나 새로운 작품을 접하게 되면 몹시 당황하게 되며, 시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낭송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교육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시를 소리내어 읽다 보면 운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가운데 운율에 대한 인식은 높아지게 된다. 따라서 시란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낭송을 전제로 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고 활동하도록 지도한다. 이 활동은 운율을 고려한 읽기 활동뿐만 아니라, 운율을 고려하여 시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시킴으로써 시 창작 활동에 대한 방법론적인 지도로 이어진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먼저 1, 2연의 운율과 3, 4연의 운율을 동일하게 조정해 보도록 하고, 이를 원작이 주는 느낌과 서로 비교해 보도록 한다. 그리고 시의 운율을 변화시켜 보는 것을 통해 운율이 시의 의미 형성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설명해 보도록 한다. 예시답안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山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이처럼 시의 내용을 바꾸지 않고 연과 행의 배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동일한 율격이 반복되는 시로 고쳐 쓸 수 있다. 원작과 새로 고쳐 쓴 위의 시를 비교해 보면, 시의 내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도 시가 주는 느낌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의 후반부에서 가마귀와 시냇물이 화자의 심정과는 반대로 떠나는 길을 재촉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화자는 한편으로 마음이 바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련이 남는다는 것 등에 대한 실감이 원작에 비해 덜 느껴진다는 것이다. 원작의 경우는 3연과 4연에서 두 연 분량을 한 연으로 만듦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호흡이 빨라지고 읽는 속도가 빨라져서 재촉받는 심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만약 고쳐 쓴 것과 같은 율격을 사용한다면, 이러한 의미 구조는 약화되고 화자가 느끼는 심리적 긴장감은 이완될 것이다. (3) 이 시에서 가장 리듬감을 잘 살려 표현한 연을 찾아보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설명해 보자. 이끌어주기 : 반복은 운율형성의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동일한 글자 수의 반복(음수율), 동일한 길이를 가진 소리 묶음의 반복(음보율), 동일한 음운의 동일한 위치에서 반복(음위율), 동일한 통사 구조의 반복, 소리의 음성적 자질을 이용한 반복 등 다양한 방법이 사용된다. 이시는 모든 연에 걸쳐 세 마디 가락을 반복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 연에서는 음보율 외에 소리의 음성적 자질을 활용하여 리듬감을 살리고 있다. 예시답안 이 시에서 유난히 리듬감 있게 읽히는 곳은 마지막 연이다. 모든 연이 세 마디 가락을 중심으로 운율을 형성하고 있지만, 마지막 연에서는 주로 울림소리를 사용하여 운율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마지막 연을 소리내어 낭송해 보면, 강물이 부드럽게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울림소리 중에서도 'ㄹ'음운을 유난히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은 화자에게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강물의 흐름을 제시한 구절이다. 이러한 강물의 흐름은 운율에 의해 뒷받침되면서 실제로 강물이 흘러가는 듯한 인상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3. '시는 마음의 그림'이라는 말과 관련하여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이 시를 내면 풍경을 그린 것으로 나누어 보자. 이끌어주기 : 시에서 정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된다.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표출되는가 하면, 다른 대상물에 정서를 이입하여 드러나기도 하고, 화자의 정서와 관련이 있는 객관적 상관물을 끌어 들여 표현하기도 한다. 시의 정서를 파악하는 것은 곧 시의 주제를 아는 것이며, 정서 표출 방법을 이해하는 것은 곧 시를 효과적으로 이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시 창작의 효과적인 방법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시적 화자의 정서가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 찾아보도록 한다. 그리고 시에 등장하는 자연물과 시적 화자의 정서가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는지 생각해 보도록 한다. 예시답안 : 이 시는 기ㆍ승ㆍ전ㆍ결의 전통적인 4단 구성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내면 풍경을 그린1,2연과 외면 풍경을 묘사한 3,4연으로 나눌 수 있다. 1,2연에서는 임과 헤어지기를 아쉬워하는 심정이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3,4연에서는 이별의 안타까운 심정을 직접적으로 진술하는 대신, 화자의 망설임이 '가마귀'와 '강물'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해 진다고 지저귀는 '가마귀'와 어서 따라 오라고 재촉하는 '강물'은 미련 때문에 머뭇거리는 화자의 안타까운 처지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읽는 이에게 이별의 애상감을 고취시키고 있다. (2) 내면 풍경을 그린 부분과 외면의 풍경을 그린 부분을 구분하여 낭송해 보고, 어떤 호흡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지 말해 보자. 이끌어주기 : 앞의 2-(2)와 관련되는 활동이다. 앞의 활동이 운율의 변화에 따른 느낌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이 활동은 한 걸을 더 나아 가 운율과 의미가 서로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이 활동을 통해 운율이 단순히 읽는 즐거움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의미와도 관련됨으로써, 시적 인상을 강화하는 데에도 기여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예시답안 : 시적 화자의 내면 풍경을 그린 1,2연은 음보 단위로 행을 구분하여 느린 호흡으로 읽힌다. 그러나 외면 풍경을 묘사한 3.4연은 두연 분량을 한 연의 형태로 배치함으로써 빠른 호흡으로 읽도록 하였다. 특히 4연의 3,4행은 빠른 속도로 읽도록 음보를 배치하여 실제로 강물이 흘러가며 재촉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러한 율격의 배치는 시의 의미와도 무관하지 않다. '가마귀'와 '강물'은 화자의 행동을 재촉하는 자연물로서, 임을 떠나기 싫어 망설이는 화자의 안타까운 심정과 갈등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운율의 구성이 1,2연의 느리고 망설이는 느낌과 대조되면서, 아쉽고 떠나기 힘든 내면과 떠나야만 하는 상황 사이의 거리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지속과 변화, 흐름의 철학 이 작품은 지속과 중단, 그리고 변화라는 흐름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선 '가는 길'과 '흐르는 강물'은 인생과 자연의 원리가 지속(duration)에 근거함을 비유적으로 말해 준다. 기ㆍ승ㆍ전ㆍ결이라는 4연 구조로 짜여진 이 시는 다시 1,2연과 3,4연으로 구분된다. 먼저 1연은 '그립다', 말을 할까(중단)', 하니 그리워(변화)'라는 세 가지 감정의 기복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리움이라는 지속적인 감정이 겪고 있는 갈등의 표출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본질적인 모습이 된다. 2연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갈까/그래도/다시 더 한번……'이라는 구절 속에는 단념과 미련이라는 중단과 지속의 갈등이 개재되어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 속에는 미완의 긴장이 형성됨으로써 시의 서정성을 강화하게 된다. 사랑은 지속과 중단, 그리고 변화의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하나의 흐름을 이뤄가게 되는 것이다. 이점에서 사랑은 생의 원리와 근본적인 동일성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지속과 변화, 혹은 지속과 중단과 변화라는 흐름의 원리 위에 놓여짐을 의미한다. 3연에서는 예의 상관물이 등장한다. 여기에서는 가마귀가 그것이다. '저 산'과 '들'에서 '西山에 해 진다고 지저귀는' 가마귀는 퍼스나의 시적 인식이 비관적인 것에 연결돼 있음을 말해 준다. 가마귀는 비관적인 생의 인식을 반영하는 정서적 상관물에 해당하는 것이다. 4연에서 강물도 만찬가지이다. '앞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흐름으로서의 그리움(사랑)이며, 흐름으로서의 생의 원리를 제시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강물'은 '길'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지속과 변화의 표상이다. 그리고 이들은 앞과 뒤에서 서로 밀고 당기는 힘으로서 작용하게 마련이다.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라는 강물의 밀고당김은 바로 체념과 미련, 지속과 변화, 이성과 감성 등이 서로 갈등을 이루는 사랑의 모습이자 인생의 모습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움으로서의 사랑과 변화로서의 인생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과 긴장을 이루며 전개되어 간다는 점에서 '가는 길'은 '흐름'의 원리로서 사랑과 인생을 파악한 작품으로 이해된다.(출처 : 김재홍,'한국 현대 시인 연구') 시어와 정서 : 시를 읽으면 마음속에 어떤 울림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시어에 의해서 환기된 시인의 정서를 느끼기 때문이다. 정서란 어떤 대상 혹은 상황으로부터 유발된 심리적 반응을 일컫는 말이다. 흔히 인간의 감정을 기쁨, 슬픔, 분노, 즐거움 등과 같은 일곱 가지 감정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시에서 표현되는 감정은 훨씬 다양하고 섬세하다. 가령 슬픔이라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서글픔, 섭섭함, 안타까움, 눈물겨움 등 정도나 빛깔이 다른 숱한 감정 상태가 제시될 수 있다. 이처럼 복합적이며 미묘한 감정의 무늬를 전달하기 위해서 시에서는 함축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운율의 효과 : 시에서는 언어의 운율적 사용을 중시한다. 시의 운율은 시적 인상을 강화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미적 쾌감을 유발한다. 이는 같은 뜻이라도 말소리에 규칙성이 있을 때 의미가 더욱 인상적으로 전달할 수 있으며, 소리의 규칙성이 읽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적 화자의 복합적인 심정은 세 마디 가락의 운율을 다양하게 배치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제시된다. 음보 단위로 행을 구분하여 배치한 1, 2연은 느린 호흡으로 읽힘으로써, 이별을 망설이는 화자의 애틋한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화자에게 이별을 재촉하는 상황으로 묘사된 3, 4연은 한 줄에 여러 음보를 배치하여 빠른 호흡으로 읽히도록 구성하였다. 이러한 운율 구성은 이별을 망설이는 화자의 내면과 떠나야만 하는 상황 사이에 긴장감을 조성함으로써 읽는 이에게 이별의 안타까움과 애상감을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운율의 형성 방법 : 운율을 형성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반복하는 것이다. 반복은 동일한 글자 수의 반복(음수율), 동일한 길이의 소리 묶음의 반복(음보율), 동일한 음운의 동일한 위치에서 반복(음위율), 동일한 통사 구조의 반복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또, 의미적으로 대응되는 구절을 서로 짝짓거나, 음악적인 성질이 강한 울림소리를 반복하여 율동감을 줄 수 있다. 어조와 분위기 :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속담이 있다. 말의 내용 못지 않게 어떤 말투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기분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말투는 일상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에도 있다. 시에서는 이를 어조라고 하는데, 시 전체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조는 종결 어미의 종류, 시어의 부드러움과 딱딱함, 시어의 음성적 자질, 시행의 길이와 호흡, 경어체·기도체와 같은 문체의 유형 등에 의해 형성된다. 시적 상황과 정서 : 시적 화자는 이별의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임을 그리워하면서도 평소에는 ‘그립다’는 말조차 하지 못한다. 그가 ‘그립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어렴풋하던 그리움이 그 말을 하고 난 후부터는 하나의 선명한 실체로 바뀐다. 그리하여 새삼 못 견디게 임이 그리워지고, 이별이 아쉬워지며, 마침내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망설이게 된다. 이해와 감상 이별의 상황에서 촉발되는 자아의 내면 심정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는 이 시는, 전체적으로 3음보의 율격으로 짜여 있다. 그런데 1연과 2연에서는 1음보를 한 행으로 처리하고 있는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행의 배치로 인해 각 행마다 휴지(休止)가 생기는 효과가 발생하며, 그러한 휴지는 시적 자아가 님을 향해 못내 아쉬워서 선뜻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심리 상태를 적절하게 환기시키고 있다. 반면에 3연과 4연에서는 앞의 두 연에 비해 3음보를 1행으로 처리하는 가운데, 3연의 두 번째 구절과 4연의 첫 구절은 중간에 행을 나누고 있다. 즉, 앞의 두 연에 비해 상대적으로 행 구분을 억제하고 3음보를 1행으로 처리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행의 배치는 산야(山野)의 까마귀가 해가 지니 빨리 가라고 재촉하고, 앞뒤의 강물들이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주변의 상황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이 시는 이별의 상황 앞에서 떠나기 싫어하는 화자의 심정이 애상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상황은 갈 길을 재촉하는데 마음은 미련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는 화자의 아픔이 여성 어조와 전통적 율조에 실려 독자로 하여금 애상감에 젖게 한다. 못내 아쉬워 선뜻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서정적 자아의 심리적 상태가 잘 형상화된 이 작품은 기, 승, 전, 결의 4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앞의 두 연을 한 단락으로 하여 서정적 자아의 내면적 감정(심리적 갈등과 방황)이 제시되었고, 뒤의 두 연은 자연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는데 서정적 자아의 심리를 반영하는 정서적 상관물로서의 자연이 제시되었다. 이 시에서의 그리움은 시인이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그리움이다. 작중 화자인 '나'는 그리운 '상대'에게 말을 하지도 못하고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마음만 졸이고 있다. 그러다가 3연으로 들어가면서 자연의 세계를 노래하면서 그 애절함의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 이처럼 간결한 구조, 어조의 형식을 가지고 전해 주는 애절한 감동이 김소월 시의 주조를 이루는 정서이다. 또 '강물, 흐르는 물, 연달아, 흐릅디다려' 등의 유음, 비음, 모음으로 구성된 시어들이 사용되어서 물이 흘러가는 듯한 부드러운 음향감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해와 감상2 마음 속에 움직이는 감정은 논리적인 생각과 달라서 자기 스스로도 그 모습이나 크기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감정들은 가슴 깊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행동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고, 어떤 때에는 뚜렷한 모습이 되어 밖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작품, 특히 앞의 두 연에서 우리는 바로 그러한 예를 본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라는 구절은 얼핏 생각하기에 시에나 있을 법한 이상한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시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경험이겠는가? 이 구절에서 '그립다'라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게 하는 것은 물론 마음 속에 있는 그리움이다. 즉, 그리움이 먼저 있고 그립다는 말이 나중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립다'라는 말을 할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 속에 고여 있던 그리움은 갑작스런 바람을 만난 물결처럼 출렁이며 일어나다. 즉, 그립다라는 말을 생각하는 순간 그 때까지 어렴풋하던 그리움은 새삼 절실하게 또렷한 모습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이런 문맥을 음미하건대 위의 작품에 나타난 그리움은 평소에 차마 입밖에 내어 말하지 못하였으면서 그리운 이가 있는 곳을 떠나는 발길을 떼어 놓지 못하고 있다. 그는 그냥 갈까 하다가 그래도 다시 한 번 더 돌아보고픈 마음의 흔들림 속에 있다. 몇 마디 되지 않는 말로 이처럼 섬세하게 그리움과 망설임이 뒤섞인 상태를 표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머지 두 연은 주위의 풍경을 통해 그의 심경을 간접적으로 암시해 준다. 셋째 연에는 산과 들을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까마귀가 등장한다. 까마귀들은 서산에 해가 진다고 지저귄다. 또 앞뒤의 강물은 작중 인물의 아쉬운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제 갈 길을 흐르며, 마치 어서 따라 오라고 부르는 듯이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풍경은 하루 해가 저무는 시간의 쓸쓸함을 배경으로 하여 작중인물의 그리움과 아쉬움을 더욱 절실하게 한다. 즉, 제 1, 2연이 마음속의 움직임을 노래한 데 비하여, 제 3, 4연은 이에 대비되는 바깥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이처럼 간결한 구도와 말씨 가운데 '가는 길'의 머뭇거리는 그리움과 아쉬움은 더욱 잘 살아나고 있다. [김흥규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 중에서] 이해와 감상3 '가는 길'의 시적 화자는이별 상황에 놓여 있다. 그는 그냥 갈까 하다가 그래도 다시 한번 더 돌아보고픈 마음의 흔들림 속에 있다. 그는 그리워하면서도 평소에는 '그립다'는 말조차 못하는 여린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립다'라는 말을 할까 하고 마음 속에 되뇌어 보는 순간 마음 속에 고여 있던 그리움이 새삼 절실하게 밀려온다. 이 시는 이별의 상황에서 느끼는 그리움과 망설임, 그리고 아쉬움이라는 미묘한 심리를 간결한 표현과 율동감 있는 언어와 여성적 어조를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소월 특유의 3음보 율격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시행의 배치가 일률적이지 않고 다양하게 구사되어 있다. 즉, 내면 풍경에 해당하는 1·2연은 음보 단위로 따로 떼어져 길게 읽히게 해 놓았고, 바깥 풍경에 해당하는 3·4연은 빠른 템포로 읽히게 해 놓았다. 전반부의 느린 호흡은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심정 때문에 그렇고, 후반부의 빠른 호흡은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상황 때문에 그렇다. 특히 마지막 연은 울림 소리인 'ㄹ'을 자주 사용하여 실제로 강물이 흘러가는 인상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출처 : 한계전 외 4인 공저 문학교과서) 심화 자료 소월 시의 한(恨)과 민요와의 관계 소월 시의 저변에 흐르는 한(恨)은 한민족의 심층에 깔린 정서이다. 이것은 고려속요나 시조에서 살펴볼 수 있거니와, 그 외에도 구전(口傳)하는 민요나 민담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것들이다. 여러 민요를 살펴보면 소월이 그의 시에서 노래한 이별의 한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민요에 내포된 한의 정서는 특히 비기능요(非機能謠-노동요 같은 어떤 기능성을 띤 노래가 아닌 민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한국 민요의 정서가 소월 시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점은 여러 평가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김소월의 시사적(詩史的) 위치 김소월의 시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와 민요적 율격에 밀착되어 있다. 표면에 그리움, 슬픔, 한(恨) 등 비극적 사랑의 정감이 있으면서도 이면에는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을 담고 있으며, 그 심층에는 험난한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삶의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고자 하는 초극(超克)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 참뜻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도 소월 시는 서구 편향성의 초기 시단 형성 과정에 있어서 한국적인 정감과 가락의 원형질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민족시, 민중시의 소중한 전범(典範)이 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향토성(鄕土性) : 그의 시는 거의가 향토적인 풍물, 자연, 지명을 소재로 삼고 있다. (2) 민요풍(民謠風) : 오랜 세월 동안 겨레의 정서 생활의 가락이 되어 온 민요조의 리듬으로 이루어졌다. (3) 민족 정서(民族 情緖) : 시의 주제와 심상은 민족의 설움과 한(恨)의 정서를 활용, 민족의 보편적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김소월 시의 '이별'과 만해 시의 '이별'
김소월의 시와 만해의 시는 공통적으로 '임'과의 '이별' 을 가장 중요한 시의 모티프로 삼고 있다. 그러한 두 시인에게 '이별'이 지니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김소월에게서 '임'과의 '이별'이 지니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김소월에게서 '임'과의 '이별'은 어쩔 수 없이 강요된 것으로, 그 이별의 상태가 극복될 가능성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초혼(招魂)' 같은 시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김소월에게 있어서 '임'은 항상 과거의 존재, '나' 와 근원적으로 합일될 수 없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만해에게 있어서 이별'은 다른 의미로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서 '이별'은 외부에 있어서 강요된 것이라기 보다는 새롭고 높은 차원의 '임'과 만나기 의해서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해의'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방법적 계기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별' 속에는 '임'과의 만남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김소월의 시에서는 억누를 길 없는 비애와 절망을 안으로 삭이는 한의 정서가 강조되는 반면, 만해의 시에서는 이별로 인한 비애와 슬픔이 새로운 만남의 대한 기대와 예견의 의해 극복되어 가는 모습이 강조된다. 김소월論 우리말의 아름다움 살린 김소월 김소월(1902-1934)을 빼고 우리 시를 논할 수 있을까? 한국 근대시를 전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김소월이라는 이름 석자는 반드시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될 필수 코스 같은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그의 시는 우리 주변에서 대중적인 폭넓은 이해와 사랑을 동시에 얻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역대 앙케이트 표본 조사 자료를 검토해 보면, 그는 거의 매번 우리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하나로 손꼽혀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런 결과가 다소간 부풀어진 측면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소월의 시는 제대로 읽어보지 못 했을망정,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그의 문명(文名)을 접해 본 사람들의 경우 본인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기 어색한 심사에서 '나의 애송시인=김소월'이라는 편리한 도식 위에 잠시 스스로를 맡겨 버린 경우도 결코 적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민족시인 김소월 신화의 형성 과정에는 순전히 풍문만을 듣고 모여든 이와 같은 불특정 다수의 허수 독자들의 참여가 크게 작용하였던 것도 사실이리라. 그렇다면 그의 시가 가진 마력은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들을 그 답으로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의 시의 주조를 이루는 여성 편향성과 이별의 정한, 대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그 좌절로 이어지는 낭만적 인식 구조 등은 우리 민족 본래의 기본 정조와 닿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널리 알려진 [진달래꽃]을 위시하여 [접동새],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못잊어] 등 소월 시의 대부분은 어떤 메꾸어질 수 없는 간극,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에서 비롯되는 그리움 같은 것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것은 곧 그의 시가 우리 사회의 기층을 이루는 민중들의 삶과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뜻한다. 동시에 그것은 일제 치하 망국민으로서 민족 전체가 겪어야만 했던 수난이나 설움과도 일정 부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변인(outside)적인 인식과 태도는 일단 전통적인 것에 근거한 것으로 판단되지만, 시대사적인 측면에서 재해석할 때 더욱 그 의미가 뚜렷하게 부각될 수 있다. 그의 시가 당대는 물론 후대 독자들에게까지 폭넓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로 바로 이러한 측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별, 그리움 등 민족의 전통적 정서와 가락 표현한 시 써 둘째, 그의 시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서와 가락의 맥을 잇고 있으며, 동시에 근대적 발상 및 양식, 조어법에도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주고 자신의 출신 지역인 서도(평안도) 지방을 중심으로 구비 전승되어 내려오는 민요와 잡가를 수집하여 이를 새롭게 재창작해 냄으로써 시대 변화에 걸맞은 새로운 시형(민요조 서정시)으로 발전시켰다. 바드득 이를 갈고 죽어 볼까요
창가에 아롱아롱 달이 비친다
눈물은 새우잠의 팔굽 베개요 봄꿩은 잠이 없어 밤에 와 운다
두 동달이 베개는 어디 갔는고 언제는 둘이 자던 베개 머리에 죽자사자 언약도 하여 보았지 ― [원앙침] 일부
3음보의 기본 음보와 7.5조의 기본 음수율을 보이고 있는 이 시는 소월이 자주 사용하던 민요조 서정시의 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전술한 '원앙침' 외에도 우리들에게 익숙한 '가는 길', '산', '팔베개 노래' 등의 작품은 전통적인 율조와 가락에 바탕을 두고 이를 새롭게 재창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는 재래의 민요가 갖는 운율 상의 정직성으로부터 탈피하여, 다양하고도 융통성 있는 변형과 파격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측면은 그로 하여금 스승인 안서 김억(金億)의 그늘에서 벗어나 우리 시사에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셋째, 그의 시는 그간 자주 사용되었던 한자어나 생경한 외래어의 사용을 가능한 한 배제하는 대신, 우리 주변에서 점차 사라져 가고 있던 고유어, 토착어들을 발굴하여 이를 갈고 닦아 그것의 아름다움을 생생히 펼쳐 보여 주고 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 [접동새] 일부
산새는 왜 우노, 시메 산골 영(嶺) 넘어 가려고 그래서 울지 ― [산] 일부
퍼르스럿한 달은, 성황당의 데군데군 헐어진 담 모도리에 우둑히 걸리었고, 바위 위의 가마귀 한 쌍, 바람에 나래를 펴라. ― [찬 저녁] 일부
전통적인 가락 변형시키고, 고유어. 토착어 사용해 우리말의 아름다움 살려 위의 인용시들에 사용된 '불설워'(-[접동새]), '시메 산골'(-[산]), '데군데군', '담 모도리'(-[찬 저녁]) 등의 시어는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이 가진 아름다움을 가장 수준 높은 차원에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후대 시인인 정지용, 서정주 등과 더불어 한국 시의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한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상에서 지적한 사항들과 함께 어떤 무엇보다도 소월 시가 갖는 가장 큰 장점 은 청소년층으로부터 중장년,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연령에 구애됨이 없이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와 함께 널리 국민적 애송 시인으로 자리잡고 있는 한용운, 윤동주 등의 시가 상대적으로 청소년 독자층에 치우친 것과는 구별되는 면이다. 우리 모두에게 소월이 진정한 국민 시인, 민족 시인으로 칭송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글쓴이 : 김유중 / 1965년생, 서울대, 카톨릭대 강사] 김소월(金素月,1902.9.6 - 1934.12.23), 본명 : 정식(廷湜)
김소월의 생애 ■ 가족사항 조부는 공주 김씨의 金相疇이고, 부친은 金性燾, 모친은 張景淑이다. 仁姐라는 여동생이 있고,洪明熙의 딸 洪實丹을 아내로 맞이하다. 슬하에 장녀 龜生, 차녀 龜媛, 장남 俊鎬, 차남 殷鎬, 삼남 正鎬, 사남 洛鎬 등 4남 2녀를 두다.
■ 1902년 본명은 廷湜이고 필명/아호는 素月이다. 고향(본적)은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일명 남산동) 569번지이다. 평안북도 구성군 구성면 왕인동 외가에서 9월 7일(음력으로 8월 6일) 태어나다. 북한ㆍ연변 자료에 의하면, 소월의 출생년도는 1903년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착오이다. 최근의 북한자료(리동수 지음 김재남 해제, 《북한의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 연구》, 살림터, 1992, 240면)는 이를 바로잡고 있다.
■ 1904년 부친이 정주ㆍ곽산간 철도를 가설하던 목도꾼들에게 몰매를 당했고, 이로 인해 정신이상을 일으켜 죽을 때까지 폐인생활을 하였다. 북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 부랑자들에게 구타를 당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때 광산업에 종사하여 재산을 모으기도 했던 조부 김상도의 각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자라다.
■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조국이 식민지화의 길로 치닫게 되다. 이 때를 즈음하여, 유학과 한문에 소양이 높은 할아버지의 훈도 밑에서 구학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수많은 민담ㆍ민화 등을 들려주었던 숙모 桂熙永이 숙부 應悅에게 시집옴으로써 소월은 그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되다.
■ 1909년 남산보통학교(일설에 의하면 사립학교)가 설립되자 머리를 깎고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다. 아버지의 정신병으로 인하여 집안은 더욱 쪼들리게 되었으나 할아버지의 훈도와 할머니ㆍ어머니의 지성어린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하다.
■ 1914년 연변ㆍ북한 쪽 자료에 의하면, 이 시기에 <긴 숙시(熟視)>를 썼고 이것을 후에 《근대사조》(1호,1916)에 발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1915년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다. 5월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안서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다. 이 때 소월시의 원천(源泉)이 된 한시ㆍ민요ㆍ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1916년 세살 많은 홍실단(일명 丹實) 여사와 결혼하다. 연변ㆍ북한 자료에 의하면, 남산학교를 졸업한 후집에서 쉬다가 이 시기에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하여 시를 짓기 시작했고, <먼후일>을 썼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부 연변ㆍ북한 자료에 오산학교 입학 시기를 1917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소월이 15세(공식적인 나이로는 14세)에 해당되는 년도는 1916년이다.
■ 1919년 북한 자료에 의하면, 동급생을 선동하여 이들과 함께 3ㆍ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잡혀가던 도중에 요행히도 몸을 피하였다고 한다. 4월에 <춘조>를 탈고하다.
■ 1920년 이 시기에 <그리워>(창조 5호, 1920. 3) 등과 <거친 풀 흐트러진 모래동으로>(학생계 창간호, 1920.7)를 발표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하다. <춘조>를 《학생계》(3호, 10)를 발표하다.
■ 1922년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하다. 동급생에 나도향이 있었고 한 반 아래에 박팔양이 있었으나 특별한 교우관계를 갖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ㆍ1운동 이후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느낌을 주는 <함박눈>(개벽 28호, 10)을 발표하다.
■ 1923년 배재고보(7회)를 우수한 성적으로(총 44명중 4등) 졸업하다. 고향에 돌아와 평북 정주군 림포면 사립학교 교원이 되다. 아동교육에 종사하면서 시창작에 정진하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서정시를 창작하고, 그것들을 《개벽》 등에 발표하다. <장별리>도 이 때 지은 작품이다. 사립학교 교원생활이 창작이나 집안살림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이 시기에 집안이 더욱 피폐해져 가다. 처가의 도움으로 일본 동경에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하다. 학자금이 제대로 조달되지도 않았고 상과에 취미도 없어 괴로운 학창생활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하여 10월경 귀국하다. 이즈음에 서울생활을 하게 되고 나도향 등과 어울렸던 것으로 보이며, 이 때의 서울생활의 느낌을 시로 읊은 것이 <서울밤>과 <不稱錘秤> 등이 아닐까 추측된다.
■ 1924년 김동인 김찬영 주요한 김억 전영택 김유방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가담하여 서울에 체류하였으나, 곧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방현)에서 사망할 때까지 동아일보 지국일을 맡아보며 소일하다. 그러나 《東亞日報社史 1》의 기록에 의하면 소월이 동아일보지국장 일을 맡기 시작한 것은 1926년 8월부터이고, 그만둔 시기는 927년 3월이다.
■ 1925년 유일한 시론 <詩魂>(《개벽》 59호, 5)을 발표하고, 이해 말에 《진달내》(12)을 매문사에서 상재하다. 1934년6월 사남 낙호가 출생하다. 12월 23일(일설에 의하면 24일)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 자택에서 사망/자살하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마약 중독으로 추정된다. 《조선중앙일보》(12.30)에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씨의 돌연사망 기사가 났고, 《동아일보》(12.30)에 소월의 사망을 알리는 기사와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찍은 흐릿한 소월 사진이 소개되다. 소월은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터진고개에 묻히다.
■ 1935년 김기림 김동인 김동환 김억 이광수 이은상 유도순 박종화 박팔양 정지용 등 문인 백여명이 서울 종로에 있는 백합원에서 소월을 추모하는 모임을 가지다. 안서가 《조선중앙일보》(1.22-26)에 <요절한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을 쓰고, 이어 《신동아》(2)에 소월을 추모하는 <弔詩>를 발표하다. 김억이 쓴 <요절한 박행시인 김소월에 대한 추억(3)>(《조선중앙일보》 1.23) 본문에 소월의 친필이 소개되다.
■ 1939년 《여성》에 소월의 <박넝쿨타령> <성색> <세모감> <술과 밥> <절제> 등 유고 시편이 발굴되어 발표되다. 김억이 박문서관에서 《소월시초》를 펴내다. 소월의 묘를 서산면 왕릉산으로 이장하다.
■ 1956년 정음사에서 《소월시집》이 간행되다.
■ 1966년 백순재ㆍ하동호가 양서각에서 《못잊을 그사람》을 펴내다. 이 시집은 200여 편의 소월시를 원본과 대조하는 작업을 보여주어 소월시 전집 발간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된다.
■ 1968년 3월에 한국일보사에서 한국신시 60년 기념으로 서울 남산 시립도서관 앞에 金忠顯의 글씨로<산유화>를 새겨넣은 소월 시비를 세우다.
■ 1975년 배제 38회 졸업생인 소월을 기리고자 배제고교 동창생들이 6월에 <진달래꽃>을 새겨넣은 소월시비를교내에 세우다.
■ 1977년 《문학사상》(11)에서 소월의 육필유고를 발굴하여 《미발표 소월 자필 유고시집》을 게재하다.
■ 1978년 <봄의 맘> 등 50여편의 육필유고인 <주인없는 노래>가 '소월의 작품인가, 안서의 작품인가'라고 《문예중앙》(봄호)에서 문제를 제기하다. 문학사상사에 의하여 소월의 초상화가 완성되어 문인들에게 배포되다.
■ 1980년 김종욱이 홍성사에서 《원본 소월전집(상 하)》를 펴내다. 이 시집에서 소월의 육필원고가 하권 첫부분에 영인되어 공개되다.
■ 1986년 문학사상사에서 소월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윤주은이 교문사에서 《밧고랑우헤서-김소월시전집ㆍ평론》을 펴내다.
■ 1990년 한국문인협회 주최로 동방플라자미술관에서 [한국근대작고문인 유묵ㆍ육필 100인전(1990. 2. 5 - 2.10)이 열린 바, 김소월의 <무제> 일부가 그의 육필 유고로 공개되다. 문화부 주관 한국인 재발견운동--9월의 문화인물로 김소월이 선정되다. 한국역사인물보존회에 의뢰하여 소월의 초상화를 제작한 바, 컴퓨터 토탈 스캐너(Computer Total Scanner)를 이용하여 1934년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과 그의 삼남 김정호, 손자 김영돈의 모습을 참조하여 소월의 인물화를 완성하다. 조각가 최만린이 소월흉상을 제작하다. 시화전 및 한풀이 공연이 문예진흥원 마로니에 광장에서, 김소월 가곡의 밤이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김소월 관련 자료 전시회가 교보문고에서 열리다. 김소월, 그의 아들, 그리고 손녀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詩人의 눈물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아버지 작은 기념관 하나라도" "아… 할아버지, 아버지" '가리비 팍팍 뿌리옵소서'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 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나는 소월(素月)이다
나는 노래했다. 봄에는 고향 평북 정주의 야산에 흐드러진 '진달래꽃'을, 낙엽 떨어지는 겨울 밤엔 어머니와의 대화를 '부모'로 읊었다. 내 시(詩) 주머니는 말 그대로 '화수분'이었다. 조국은 아름다웠지만 시대는 엄혹(嚴酷)했다. 내 나이 두살 때 나귀에 먹을 것 실어오던 아버지는 일본인 철도노동자에게 맞아 정신을 놓고 말았다. 여덟살 때 겪은 국망(國亡)은 내 육신(肉身)이 스러질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곽산 남산보통학교 나와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교장으로 계신 오산중에 입학해선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한동안 일경(日警)을 피해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어느 불행한 시인이 말했던가, 우울(憂鬱)은 시를 꽃피우는 자양분이라고. 오산중 교사였던 스승 김억(金億)의 추천으로 나는 1920년 동인지 '창조' 5호에 첫 시를 냈다. 그 후 5년간 154편을 썼다. 내 생애 가장 화려했던 시기는 1922년이었을 것이다. 그 한 해에만 '먼 후일' 등 30편을 썼던 것이다. 생(生)의 화려한 날은 짧다. 1927년 동아일보 평북 구성(龜城)지국 경영에 실패한 뒤 난 술독에 빠져 지냈다. 1934년 12월 27일 이승과 하직했을 때 조선일보는 '청년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 별세'라는 기사로 내 죽음을 알렸다. '진달래꽃이라는 시집을 발행해 시단에 이채를 나타내이던, 재질이 비상튼 청년시인 김정식씨가 침묵으로 일관하던바 뇌일혈로 급작스레 별세해 유족들의 애통하는 모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나는 세상에 아들 넷과 딸 둘을 남겼다. 그들의 소식이 북한의 주간 '문학신문'에 연재된 탐방기(探訪記)-'소월의 고향을 찾아서'에 전해진 바 있다. 2004년 '문학사상'에 소개된 글은 1966년 5월 10일부터 7월 20일 사이 쓴 것이다. 탐방기에 따르면 장남 준호(俊鎬)는 고향 정주 곽산에서 목수를 하고 있다고 한다. 둘째 아들 은호(殷鎬)는 평북 경공업총국의 상급지도원이라고 한다. 유복자였던 넷째아들 낙호(洛鎬)는 평양의 설계연구기관의 연구사라고 한다. 딸 구원(龜元)을 비롯해 영실, 정옥, 영철 등 손자들은 고향 인근 문장리에 산다고 했다. 이 글엔 내 호 '소월'이 고향 마을, 일명 진달래봉으로 불리는 소산(素山) 위에 걸린 달에서 유래했다는 주민들의 증언도 나오고 있다. 북한에서 난 처음엔 민족주의·애국주의 시인으로 추앙됐다. 그러더니 1967년에는 돌연 봉건·유교 사상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시대별로 변한 북한의 나에 대한 평가를 남에 있는 평론가 권영민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을 풍부한 시흥(詩興)과 고운 리듬과 절제있는 표현으로 사실주의적으로 노래했지만 그의 문학활동은 민족해방투쟁으로 연결되지 못했고 3·1운동 이후의 시대적 변천에 따라오지 못했다."(조선문학사·1956년) "소월의 시가에 떠도는 애수(哀愁)는 잃어진 것에 대한 비애로서 극히 낭만적인 색조를 띠게 된 것이 사실이다. 사실주의적 시인인 김소월은 제한된 한계에서나마 당시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해방전 조선문학·1958년) "소월의 세계관은 협애해 현실에 혁명적으로 침투하지 못했고 그의 시 문학이 구현하는 애국주의, 인민성, 생활전망성도 그만큼 제한적이어서 비판적 사실주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조선문학사·1964년·주체사상이 등장한 뒤) "깊은 비애의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1920년대 시단에서 민요풍의 시를 개척하고 발전시켰지만 노동계급의 계급적 이념과 인민적 입장에서 출발하지 못해 1920년대의 시대적 높이에 이르지 못했다."(조선문학사·2000년 발간본)
#부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나는 시인의 아들이다 <dd> </dd><dt>
소월의 삼남(三男) 정호는 소월이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인 1932년 태어났다. 위로 두 형과 두 누나가 있었고 나중에 유복자(遺腹子) 남동생이 있었다. 18세 때 6·25가 터졌다. 그에게 어머니(홍단실·洪丹實)가 이리 권유했다. "너만이라도 남으로 가라…." 전쟁 때 그 길은 인민군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전쟁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인의 아들은 포로로 붙잡혔다. 인천형무소, 부산과 거제포로수용소를 거쳐 그는 반공(反共)포로로 풀려났다. 그는 그 후 국군에 자진 입대해 1955년 제대했다. 군 복무를 마쳤지만 갈 곳은 없었다. 철도청에 근무하던 친척의 주선으로 교통부에 임시직으로 취직했다. 월급이 쌀 한 가마니였지만 그때 그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날 수 있었다. 결혼은 했지만 시인의 아들은 반년이 채 안 돼 결혼반지까지 팔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곤궁한 처지에 빠진 그는 1958년 동아일보의 기자에게 자신이 '소월의 친자(親子)'임을 알렸다. 그래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홍익회에서 4년을 일한 뒤 나와 레코드 외판원을 할 때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를 찾아가 도움을 청해봤다. 미당은 그리 사는 소월의 아들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미당은 정호의 딱한 사정을 월탄 박종화, 시인 구상에게 전했다. 그들은 "소월의 하나뿐인 아들이 남에서 외판일 하는 걸 북이 알면 얼마나 악선전하겠느냐"며 당시 국회의장 이효상(李孝祥)에게 추천서를 써줬다. 그 덕에 정호는 국회에 취직했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은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8년간 열심히 일했지만 이번엔 아내의 신부전증이 악화된 것이다. 치료비 마련을 위해 남편이 택할 길은 몇푼 안 되는 퇴직금에 기대는 것뿐이었다. 시인의 아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한 가지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고민했다. 서울 남산에 있는 것을 비롯해 소월 시비(詩碑)가 전국에만 13개나 되고 남산에 '소월로'라는 길이 만들어졌으며 1986년엔 문학상도 제정됐지만 정작 아버지의 문학을 기릴 조촐한 기념관 하나 없는 현실을 아들은 안타까워했다. 한때 라이온스클럽 회장을 지낸 이가 10억원을 모으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그이가 지병으로 쓰러지자 기탁금이 전부 반환된 것이다. 8년 전 소월 탄생 100주년 되던 해 각 예술단체가 떠들썩한 심포지엄을 열고 시 낭송회를 가졌다. 그렇지만 그것뿐이었다. 누구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의 아버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시인의 아들은 4년 전 아버지 품으로 돌아갔다. 그가 못다 이룬 이승의 꿈은 다시 이승에 남은 아들과 딸에게로 이어졌다.
#초혼(招魂)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어!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 마디는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나는 시인의 손녀다 </dt><dd> </dd><dt>2002년과 2007년, 소월은 한국 현대시 100년 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다. 전문지 '시인세계'가 창간호를 냈을 때와 한국시인협회 조사 결과였다. 당시 두 단체의 설문에 국내의 내로라하는 시인과 평론가들이 대부분 참가했다. 2008년엔 KBS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시민 1만8298명이 답했는데 거기서도 '진달래꽃'이 애송시(愛誦詩) 1위였다. 그 뒤가 윤동주(尹東柱)의 '서시'(序詩)와 '별 헤는 밤', 김춘수(金春洙)의 '꽃', 천상병(千祥炳)의 '귀천'이었다. 김정호씨 사후, 소월의 혈육은 딸 김은숙(50)과 아들 김영돈(48)뿐이다. 아들은 인천시 부평에 사나 언론 접촉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충남 아산에 사는 김은숙은 시인에 대한 국민의 사랑을 말하자 "소용없는 얘기"라고 했다. ―서울에서 어떻게 충청도로 왔습니까. "흘러흘러 왔어요. 남편이 무역회사, 운수업을 했었습니다. 사정이 어려워졌을 때 아는 분이 이곳에 땅이 있다길래…."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그리 어려웠나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후 이사를 스무 번도 넘게 했대요. 생활은 늘 어려웠고 의지할 곳이라곤 없는 힘든 삶이었어요. 나중에 봉천동에서 독채 전세를 얻긴 했지만요." ―그런 부모가 원망스러웠습니까. "아버진 정이 그리웠는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대단했어요.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저희들에겐 잘해주셨어요. 형편이 안 됐을 텐데 번듯한 옷도 사주셨고요. 본인들은 어려워도 자식들에겐 뭔가 해주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제 동생은 이런 얘기하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이상한 소문이 사실처럼 알려지는 것도 싫어하고." ―이상한 소문이 뭡니까. "기자들이 '미당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식의 기사를 많이 썼어요. 학교 다닐 때 육성회비 정도 받았을 뿐인데, 자꾸 과장된 기사가 나니 동생이 화를 냈어요. '왜 자꾸 구질구질한 내용이 나가게 하느냐'고요. 저흰 미당 선생님이나 구상 선생님을 명절 때 찾아뵌 정도인데. 미당 선생님은 제 결혼식 때 주례를 서주셨어요." ―할아버지가 남긴 작품의 저작권이 있지 않나요. "그건 이미 시효가 다 지나 소용없는 거고. 할아버지 때문에 돈 받아본 적은 딱 한 번 있어요. '미스터 피자'라는 회사에서 영화배우 문근영이 출연해 '가리비 팍팍 뿌리옵소서' 뭐 이런 광고를 했을 땝니다." ―가리비를 팍팍? "그 회사 사장님이 할아버지 시를 좋아하신대요. 그래서 단어 사용료조로…." ―숙모라는 분이 소월의 모든 인세를 챙겨갔기 때문에 정작 소월의 가족들이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그 부분은….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뭘." ―작고한 김정호 선생은 할아버지(소월)에 대해 무슨 말을 했습니까. "평생 소원이 자그마한 할아버지 기념관 하나 짓는 거였어요.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요. 북에 있는 형제들도 만나고 싶어했어요. 소문으론 꽤 괜찮게 산다고 하는데 웬일인지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냈는데도 이뤄지지 않았어요. 탈북자들에게 물어보니 쉽게 만날 수도 있다는데, 반공포로여서 불허(不許)한다는 말도 있고, 하여간 아버지에겐 그게 한(恨)이 됐을 겁니다. 전 아니지만 아버진 예술 방면에 재주가 특별했어요." ―무슨…. "아코디언 연주, 그림, 서예, 글쓰기 등 못하는 게 없었어요. 언젠가 할아버지 육필(肉筆) 원고가 나왔다고 해서 봤는데 아버지 필체와 너무 닮아 깜짝 놀란 기억이 납니다." ―김 선생 묘소는 근처인가요. "아버진 연세 드셔서 성당에 나갔어요. 지금 모신 곳은 경기도 김포의 납골당이고, 어머니 묘소는 아산시 송악면에 있어요. 그 옆에 아버지 묏자리도 마련해 놨었는데…. 앞으로 합장해드려야죠. 그 생각만 하면 속이 상해요." ―소월의 가족이란 사실이 부담이 됩니까. "학교 다닐 때는 스트레스였지요. 소월의 손녀라는 이야기가 도니 글을 쓸 때마다 무척 신경이 쓰였어요. 아마 그런 게 없었다면 꽤 잘 썼다는 이야길 들었을 텐데 할아버지를 연상하고 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게 보였겠지요."
#왕십리
비가 온다 여드레 스무날엔 웬걸, 저 새야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중학교 1학년 신입생에게 나눠주는 국어 교과서는 모두 23종 92권이다. 이들 교과서에 가장 많이 실린 것도 그의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이었다. 모두 19회다. 2위가 허균(許筠)의 '홍길동전', 3위가 박완서의 글이었다. 대중가요 가수들 역시 그를 사랑했다. '진달래꽃'(마야) '개여울'(정미조) '부모'(유주용) '산유화'(송민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라스트포인트)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활주로) '못 잊어'(장은숙) '초혼'(이은하) 등이다. ―소월의 자손인 걸 감추고 싶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요. 아버지도 할아버지 기념관 한번 마련해보겠다고 이북5도민회다 뭐다 하며 평생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소용이 없었거든요. 저희들도 마찬가지고." ―왜 기념관이 마련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까. "아무래도 저희가 북에서 왔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남쪽에 터전이 있으면 동료나 제자들이 그래도 뭔가를 해주잖아요." ―국민들의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요. "관심이 없던 건 아니에요. 오래전에 아버지와 어머니 스토리가 라디오 드라마로 방송된 적이 있어요. '절망은 없다'는 제목이었는데 굉장히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내용이었어요. 그때 많은 분들이 편지도 보내오고 어머니 관절염 치료제니 금침 같은 것도 보내주셨어요. 하지만 그것뿐이었어요. 기자들도 수없이 찾아왔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고요." ―최근까지의 언론보도를 보면 아산에서 가든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 '송일정'이라고 닭백숙·닭볶음탕·보신탕·붕어찜 같은 걸 팔던 집이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던 해에 접었습니다." ―영업이 안 됐나요. "처음엔 괜찮게 됐지요. 개고기 맛이 좋기로 주변에선 꽤 소문이 났거든요. '소월의 손녀가 하는 집'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인근에 있는 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오셨어요. 특히 국어 선생님들이요. 그런데 와서 보곤 전부 아무것도 없구나 하고 서운해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1981년 전두환(全斗煥) 정부 때 금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그 훈장증과 '김 선생'이란 분이 1977년 고물상에서 할아버지 육필 원고를 발견했는데 복사본을 받아 식당에 걸어놓았지요. 저희는 할아버지의 흔적이라 생각했지만 번듯한 문학관 있는 다른 시인들과 비교해 보면 초라해 보였을 겁니다." ―소월의 육필원고에 대해선 '진본(眞本)이다 아니다' 하는 설이 많습니다. "할아버지가 동아일보 지국장 하시던 시절에 쓴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보니 예전에 신문사에서 쓰던 원고지에 쓴 글이었어요. 낙서 비슷한 것도 있었고. 이어령 선생님이 해석도 해주셨는걸요." ―그걸 왜 소월의 자손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그걸 구입할 사정이 됐으면 구입했을 텐데, 그럴 형편이 아니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송일정 접고 나서 훈장증과 훈장 2개, 육필원고 사본(寫本)은 모두 동생에게 줬어요." ―그럼 진짜 원고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김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줄로만 알지요. 연락은 자주 못 하지만요." ―그런데 하필이면 왜 보신탕집을…. "충청도에 왔을 때 빈땅에서 개를 길렀거든요. 많을 때는 700~800마리를 키웠습니다. 제 가든은 규모가 컸어요. 테이블이 14개에 방도 2개 있었거든요." ―'송일정'을 접은 진짜 이유는 뭔가요. "남의 빚보증을 잘못해줘서…. 아쉬운 게 있어요. 전 송일정이 잘됐으면 그 한쪽에 자그마한 할아버지 기념관 하나 짓는 게 소원이었어요. 그걸 이루지 못했으니. 송일정을 그만둔 뒤에는 아산 시내에서 조그맣게 삼겹살집을 하다가 그것도 3년 전에 그만뒀습니다." ―그럼 지금은? "남의 식당 일 돕고 있어요. 남들에겐 '알바'라고 말하지만 그냥." ―자제는. "고3된 아들 하나 있어요. (혹시 문학적 재능이 있느냐고 묻자) 아니에요, 그 아이는 이공계입니다."
#산
산새도 오리나무 눈은 나리네, 와서 덮이네.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미스터리-소월의 얼굴
소월 초상화<사진>는 1990년 제작됐다. 당시 문화부가 소월을 '9월의 문화인물'로 정해 한국역사인물화연구회에 초상화 제작을 의뢰했다. 지금까지 소월의 유일한 진영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여러 인물을 합성한 것인데 소재가 불분명하다. 소월의 진영(眞影)은 1934년 동아일보 게재 사진+남으로 내려온 셋째 아들 김정호(2006년 사망)+그의 손자 김영돈(48)의 사진을 참조해 만든 것이다. 포털 사이트 '한국학' 카테고리에 실려 있는데 그 다음이 해괴하다. 현재 문관부는 "누가 그렸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창고인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에도 이 자료가 없다. 소월 연구가인 서지학자 김종욱(72)씨에게 연락하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1990년 당시 이어령(李御寧) 장관이 나를 불러 옥문성 화백과 소월 초상화를 만들어보자고 해 셋이 연구해 그렸다"는 것이다. 옥 화백(67)은 경남 거제 출신이라고 한다. 국민들이 애송하는 시인은 얼굴조차 미상(未詳)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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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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