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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물열전

유청신

흙수저에게도 기회와 희망이 있던 시대

고려 승상 영밀공 유청신 공덕비

고려 승상 영밀공 유청신 공덕비

간신이라는 오명을 얻다

영어 공부의 붐이 식을 줄 모르는 오늘날처럼, 외국어 습득이 신분상승의 사다리 역할을 하던 때가 우리 역사에 또 있었다. 세계제국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700년 전 고려 사회에서는 몽골어가 각광을 받았다. 유청신(柳淸臣, ?~1329)은 몽골어 역관 신분에서 최고위직 시중의 반열에까지 올랐고, 고려 국왕은 물론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1215~1294, 재위 1260~1294)의 총애를 받았다. 더욱이 그는 요즘의 ‘흙수저’ 같은 처지의 최하층 부곡인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았고,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도 극명하게 갈렸다.

“앞장서서 입성책(立省策)을 제안한 유청신과 오잠(吳潛)은 고려에서 재상을 지낸 자들입니다. 남을 헐뜯고 이간질을 하다 왕에게 죄를 지은 두 사람은 모국을 뒤엎어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자들입니다. 입성책을 제안한 그들은 애초부터 우리나라〔원나라〕에 충성을 바칠 마음이 없었습니다. …… 더욱이 원나라와 고려는 의리상 군신관계이며, 혈연상 장인·사위관계입니다. 두 나라는 편안함과 위태로움,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해왔습니다. 미치광이 같은 두 사람의 말을 받아들여 국왕과 자신들을 팔아먹으려는 그들의 간사한 꾀가 통하게 되면 정치와 교화가 크게 잘못될까 두렵습니다. 제가 두 사람의 입성책에 반대하는 여섯 번째 이유입니다.”

- 《고려사》 권125, 유청신 열전

1323년(충숙왕 10) 1월 유청신 등이 원나라에 고려를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입성론을 올렸다. 위의 글은 왕관(王觀)이라는 자가 입성론에 반대하며 원나라 재상에게 올린 글의 일부다. 왕관은 통사사인(通事舍人)이라는 관직을 역임한 원나라 사람이다. 직책으로 보아 그는 외교와 통역 업무를 담당해 고려인을 상대한 인연이 있고 그 사정을 잘 알아 반대상소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청신 등은 원나라를 위한 충정이 아니라, 고려 국왕 충숙왕에게 지은 죄를 모면키 위해 입성론을 제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청신 등이 제기한 입성론의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왕관의 글에 따르면 유청신 등이 제기한 입성론은 그 이전의 것과는 다른 성격이었다.

이전의 입성론은, 일본 정벌을 위해 원나라가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征東行省)이 고려 내정을 간섭하고 지배하는 기구로 점차 성격이 변질됨에 따라, 정동행성 대신 원나라 중서성의 분성(分省)인 행중서성(行中書省, ‘행성’이라 부르기도 한다)을 설치하자는 정도였다. 그러나 유청신이 제기한 입성론은 고려의 국호와 국체를 부정하고 고려를 원나라의 일부로 편입시키자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입성론은 원나라 사람 왕관의 문제제기에 앞서 고려 조정에서도 큰 문제가 되었다.

유청신과 오잠 등은 (입성론 때문에) 두려워 귀국할 수 없었다. 유청신은 원나라에 9년을 머물다가 죽었다. 그는 배우지 못해 아는 것이 없었다. 임기응변에 능했고, 권세가에 의지해 권력을 농단함으로써 나라에 큰 해를 끼쳤다. 당시 묘부곡(猫部曲, 유청신 고향) 사람이 조정에서 벼슬을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참설이 떠돌았다. 묘부곡은 또한 고이부곡(高伊部曲, 고이는 고양이의 방언)으로 불렸다. 유청신의 아들 유유기(柳攸基)는 관직이 판밀직사(判密直事, 종2품)였다. 유유기의 아들 유탁(柳濯)은 따로 열전이 있다.

- 《고려사》 권125, 유청신 열전

물론 위의 글은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초기 역사가들이 유청신에 대해 내린 평가이다. 묘부곡(혹은 고이부곡) 출신이 벼슬을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참설을 소개했는데, 이는 이곳 출신 유청신을 두고 한 말이다. 유청신은 입성론을 주장했기 때문에 《고려사》 〈열전〉의 간신전(姦臣傳)에 실리는 불명예를 떠안았다.

유청신은 원나라에서 처음 호두나무를 가져와 심었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의 광덕사에는 그가 심은 호두나무라 여겨지는 나무(천연기념물)와 함께 ‘유청신 선생 호도 시식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유청신은 원나라에서 처음 호두나무를 가져와 심었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의 광덕사에는 그가 심은 호두나무라 여겨지는 나무(천연기념물)와 함께 ‘유청신 선생 호도 시식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출처 : ⓒ박종기>

그러나 당대인의 평가는 달랐다

유청신은 정말 간신이었을까? 고려시대 당시의 평가는 어떠했을까?

366년(공민왕 15) 5월 시중 유탁(柳濯)이 운영하던 진종사(眞宗寺) 공사가 끝났다. 낙성식에 승려 33명을 초청해 화엄법회를 열었다. 공민왕도 향과 물품을 보냈다. 장안의 공경진신들이 달려와 축하했다. 10일 동안 열린 법회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 생각하건대 영밀공(英密公, 유탁의 조부 유청신)은 지원(至元, 1264~1294) 연간 커다란 명성을 얻었다. 그 후 충선왕과 충숙왕 때 13년간 재상을 역임했다. 유청신은 일찍이 이 사찰(진종사)을 중건했고, 그의 무덤도 이 절의 서쪽 언덕에 있다. 자손들이 세시 때마다 성묘했으나, 절이 오래되어 허물어지려 했다. 손자 유탁은 이를 걱정해, “못난 손자가 선조의 자취를 계승할 수 있게 된 것은 조부께서 아름다운 터전을 만들어 놓아 우리가 그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절은 할아버지 묘역 안에 있으니, 사찰을 새로 짓고 할아버지의 화상(畫像)을 모셔 그 은혜에 보답하는 제사를 지내야 한다”라고 했다.

- 《목은문고》 권1, 진종사기

시중 유탁(柳濯, 1311~1371)이 유청신의 원찰을 2년간 수리해 낙성식을 한 사실을 이색이 기록한 글이다. 위 글에 따르면, 1329년 원나라에서 사망한 유청신은 그가 생전에 중건한 이 사찰에 묻혔다. 그가 죽은 지 37년 만에 유탁은 할아버지의 덕업(德業)을 계승하기 위해 사찰을 새롭게 단장했던 것이다.

이색의 유청신 묘정비와 사당

이색의 유청신 묘정비와 사당

이색은 유청신을 충선왕과 충숙왕 시절 13년 동안 재상을 지낼 정도로 명성을 얻은 인물로 평가했다. 공민왕도 낙성식에 향과 물품을 보냈고, 당시 장안의 공경진신이 참석해 10일간 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고려사》 찬자의 평가대로 유청신이 간신이었다면, 그를 기리기 위해 사찰을 새로 단장하고 법회를 여는 일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국왕이 관심을 보일 정도로 사후 약 40년이 지난 시점에도 유청신에 대한 평가가 그리 각박하지 않았다. 또한 이색은 1379년(우왕 5) 무렵 유청신을 기려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영밀공(유청신)이 원나라에서 부지런히 달려오니 (英密西來一騎塵)
국왕은 서울에서 정사에 전념하네 (君王在鎬政凝神)
원 황제가 내려준 금패가 번쩍이는 관복이 따뜻하구나 (金符照耀衣安燠)
국왕을 뵈올 때는 기쁜 기운이 새롭구나 (上謁君門喜氣新)

- 《목은시고》 권16, 〈인하여 두 시중을 읊다(因詠兩侍中)〉 중에서

이색은 유청신이 고려와 원나라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두 나라의 현안을 잘 처리해 원나라 황제와 고려 국왕의 신임을 얻은 사실을 칭찬했다.

유청신, 역관으로 출세하다

유청신은 양인의 최하층 사람들이 거주하는 부곡지역 출신이다. 부곡인은 군현지역에 거주하는 주민과 같은 양인 신분으로서, 국가에 조세와 역을 부담한 공민(公民)이었다. 그러나 고려 초기 어떤 지역이 국가의 뜻에 반하는 죄를 범할 경우 그 지역 주민들은 부곡인으로 묶여 특정의 역을 추가적으로 부담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사회경제적으로 빈곤하고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요즘 말로 흙수저에도 미치지 못하는 하층민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신분을 상승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유청신은 몽골어에 능한 역관이 되었다. 당시 역관은 사신을 따라 외국에 가서 통역을 전담하는 기능직이다. 부곡 출신인 그가 역관이 되고, 더 나아가 높은 고위직으로 신분상승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유청신의 원래 이름은 유비(柳庇)이다. 유비라는 이름이 《고려사》 기록에 처음 나온 것은 1280년(충렬왕 6)이다. 이해 5월 왜구가 합포에 침입해 어부들을 납치하자 고려는 이 사실을 원나라에 보고한다. 다음 해에 2차 일본 원정을 앞두고 있는 원나라에게 왜구의 동태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황제에게 보고한 것이다. 황제는 고려 군사로 왜구를 방어하라는 조칙을 내렸는데, 이 조칙을 갖고 온 사람이 바로 유비이다.

이듬해인 1281년(충렬왕 7) 7월 몽골과 고려 군사들이 태풍으로 일본 정벌에 실패하자, 유비는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기 위해 원나라에 간다. 이때 그의 관직은 무반직인 낭장(郎將, 정6품)이었다. 그는 군인 출신이 아니지만, 당시 역관에게 내려진 관직은 대부분 무반직이었다.

조선시대 역관의 학습과 역과시험을 위해 간행된 몽골어 회화책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

조선시대 역관의 학습과 역과시험을 위해 간행된 몽골어 회화책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그가 역관으로 원나라를 오간 시기는 1280년부터 1304년(충렬왕 30)까지 24년간이다. 이후에는 역관이 아니라 고위관리가 되어 국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갔다. 1329년(충숙왕 16) 사망할 때까지 그는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에 충실했다.

유청신이 역관으로 처음 활동하던 시기는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돈독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때이다. 그런 와중에도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의 일본 원정, 만주 일대에 근거를 둔 원나라 황족 내안(乃顔)의 반란, 내안의 부하였던 합단(哈丹)의 고려 침략 등 여러 사건이 있었고,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의 갈등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는 역관으로서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을 완화하고 안정시키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러던 중 고려 국왕의 신임을 얻기 시작하면서 권력의 중심부로 다가갈 기회를 잡는다.

유청신의 처음 이름은 비(庇)다. 장흥부에 소속된 고이부곡 출신이다. …… 나라 제도에 부곡인은 공을 세워도 5품을 넘을 수 없었는데, 유청신은 몽골어를 잘해 여러 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일을 잘 처리했기 때문에 충렬왕의 사랑을 받았다. 충렬왕은 특별히 교서를 내려, “유청신은 조인규를 따라 힘을 다해 공을 세웠다. 출신을 따지자면 그는 5품에 머물 수밖에 없으나, 특별히 3품의 벼슬을 내린다”고 했다. 또 그의 출신지 고이부곡을 고흥현(高興縣)으로 승격했다.

- 《고려사》 권125, 유청신 열전

부곡인은 제도상 5품 이상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국왕은 유청신에 대해 예외규정을 만들어 3품인 대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이해 만주지역에서 황족 내안이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는 고려 국왕의 출정을 명령했다. 국왕의 출정 사실을 알리러 원나라에 갔던 유청신이 출정을 중지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가지고 귀국했다. 직접 출정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노심초사 하던 국왕에게 황제의 출정 정지 명령을 가져온 유청신의 귀국은 커다란 기쁨이었다. 때문에 국왕은 규정을 바꾸면서까지 유비를 3품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또한 유청신의 출신지 고이부곡도 고흥현으로 승격시켜 주민들까지도 무거운 조세 부담에서 벗어나게 했다. 1287년(충렬왕 13)의 일이다.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다

유청신은 1297년(충렬왕 23)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종 2품)로 승진해 마침내 재상이 된다. 그러나 재상이 되기 전 그는 세자 시절의 충선왕을 보필하는 측근이었다. 또한 세자 충선왕을 모시고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를 알현해 정치 현안을 논의할 정도로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세자〔충선왕〕가 황궁 자단전에서 황제를 뵈었다. 정가신과 유비가 세자를 수행해 함께 갔다. (원나라의) 정우승(丁右丞)이란 자가 “강남(옛 남송)의 전함은 크지만 선체가 약해 적선과 부딪히기만 하면 부서져버려 일본 정벌에 실패했습니다. 만약 고려국에게 고려선을 제작해 다시 정벌한다면 일본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건의했다. 황제가 일본 정벌에 대해 묻자, 홍군상(洪君祥)은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큰일이므로 먼저 사신을 파견해 고려의 의사를 타진한 후 정벌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답했다. 황제는 그렇게 하자고 했다.

- 《고려사》 권30 충렬왕 18년(1292) 8월

지난 1291년(충렬왕 17) 나〔충선왕〕는 정가신(鄭可臣), 유청신과 함께 자단전(紫檀殿)에 가서 ‘같은 성끼리 혼인을 할 수 없는 것은 천하의 이치다’라는 황제의 조칙을 받았다.

- 《고려사》 권33, 충선왕 복위년(1308) 11월
원 황제 쿠빌라이의 초상

원 황제 쿠빌라이의 초상 <출처 : Wikimedia Commons>

쿠빌라이 황제는 외손자 충선왕을 특별히 아꼈다. 그러한 충선왕을 모시고 황제를 뵐 정도로 유청신은 권력의 핵심에 다가서 있었다. 《고려사》 기록에는 유청신이란 이름은 충선왕 복위년인 1308년 처음 나타난다. 다른 기록(이색의 〈유청신 묘정비〉)에 따르면, 쿠빌라이 황제가 그에게 유청신이라는 이름을 내려 개명하게 했다고 한다. 황제의 신임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유청신이 황제의 총애를 받은 또 다른 원인은 다민족 다언어 제국 몽골이 통번역을 중시한 데 있다.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지배층과 다양한 민족을 통치했던 몽골의 지배구조상 현지와의 소통을 위해 현지어를 몽골어로 옮기거나 그 반대의 작업을 하는 것이 필요했다. 몽골 제국은 통번역을 전담하는 인원을 조직적으로 양성하고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중시했다. 당시 통역원을 ‘켈레메치(kelemechi) 통사(通事)’, 번역원을 ‘비체치(bichechi) 역사(譯史)’라고 했다. 유청신이 활동하던 대덕(大德) 연간(1297~1307)에 전체 관료의 4.29퍼센트(1,147명)를 차지할 정도로 통번역 관료가 많았고,1) 이들이 대우를 받았다. 고려도 원 제국의 정책에 부응해 1274년(충렬왕 즉위년) 몽골 역관을 양성하는 사역원(司譯院)을 설치했다.

가문의 영광은 계속된다

역관이자 부곡인 출신인 유청신이 출세한 이후 아들 유기, 손자 탁이 모두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유유기는 밀직사(密直司, 중추원)의 최고위직인 판사(종 2품)를 역임한 사실 외에 별다른 기록은 없다. 유탁은 공민왕 때 무공을 세워 관료 최고의 지위인 시중의 자리에 오른다.

1354년(공민왕 3) 원나라에 반기를 든 장사성(張士誠)을 진압하는 고려군의 부사령관으로 참전해 중국 대륙에서 전공을 세웠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는 공민왕을 안동까지 수행했고, 개경을 수복해 일등공신에 책봉되었다. 1363년(공민왕 12)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세우려는 원나라의 군사를 물리쳤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출처 : 문화재청>

유탁은 이같이 공민왕을 위기에서 구해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공헌했지만, 조야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리하게 노국공주의 영전(影殿) 공사를 강행한 공민왕을 비판하다 죽임을 당할 정도로 성품이 강직했다. 이색은 다음의 시에서 그러한 유탁을 칭송했다.

시중(유탁)이 세운 공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니 (侍中功業近無雙)
세상을 주무른 영웅들이 모두 시중에게 항복했네 (並世英雄盡乞降)
하루아침에 요망한 중〔신돈〕의 독배를 받았네 (一旦鷲翁成鴆毒)
원한을 씻으려면 장강의 물을 퍼내야 하리 (洗冤應是挹長江)

- 《목은시고》 권16, 〈인하여 두 시중을 읊다〉 중에서

또한 유탁은 합포 만호로서 순천 장생포(長生浦)를 침략한 왜구를 격퇴한 바 있다. 기뻐한 군사들이 〈동동(動動)〉이라는 곡을 지어 그의 은덕을 찬미한 가사가 전해지고 있다.

유탁이 합포 군사를 이끌고 합류하자 (柳節制來合浦軍)
남쪽을 도적질하던 왜구가 그 기세를 보고 구름같이 흩어졌구나 (望風南寇散如雲)
전전긍긍하던 군사들이 서로 공을 칭송하며 (憧憧人士爭相頌)
기뻐하여 동동이라는 노래를 지었네 (喜動成歌動輒動)

- 이유원, 《임하필기(林下筆記)》 권38 해동악부(海東樂府), 〈동동〉

유탁의 동생 유준(柳濬, 1321~1406)은 태조 이성계의 막료로서 위화도회군에 동참했다. 그 공으로 조선 건국 후 원종공신에 책봉되었고 그의 딸은 태조의 후궁인 정경궁주(貞慶宮主)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대개 3대에 걸쳐 5품 이상 관료를 배출하면 귀족가문이라 했다. 3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했으니, 고흥 유씨 일가는 고려 후기 신흥 권문세족 가문이 되었다.

다시 읽는 원 간섭기

12세기 후반 무신정권에 대항해 전국에 걸쳐 봉기와 항쟁을 일으킨 주역은 무신 권력자들의 불법적인 토지 탈점과 공물 수탈에 시달린 하층민들이다. 이들의 활동은 무신정권의 붕괴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원이 고려를 지배하면서 고려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커다란 변화를 겪었고, 그러한 변화는 오히려 하층민들에게 커다란 기회가 되었다.

특히 일본 원정과 내란 진압 등 전쟁에서 무공으로, 몽골어에 능통한 역관으로, 혹은 원나라 황실에서 환관이나 공주가 되어 고려와 원나라에서 새롭게 지배 권력층으로 편입하는 현상이 원 간섭기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같이 군인, 역관, 환관, 공주가 되는 것이 신분상승의 주요한 통로였다. 그러한 통로는 전통의 귀족가문이 아니라 부곡인 등 주로 하층민이 이용했다. 그런 점에서 원 간섭기는 우리 역사에서 민초들이 지배층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와 희망의 시기로 읽힌다.

부곡인은 양인 신분이지만 일반 농민에 비해 차별을 받아 실질적으로는 노비와 비슷한 처지였다. 양인과 천인 두 신분의 경계를 넘나든 일종의 ‘경계인(境界人)’이었던 것이다. 서로 다른 세계를 넘나들고 경험한 경계인이야말로 그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규제와 통념을 극복하려는 계층의식이 어느 계층보다도 강했다. 더욱이 자국과 타국을 오갔던 역관 역시 경계인의 속성을 지녔다.

이러한 시대 변화에 편승해 역관 출신의 부곡인 유청신은 세계제국 원 황제의 총애를 받는 등 권력층의 핵심세계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원의 지배가 고려 기득권층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주었을지언정, 잃을 것이 없는 하층민에게는 오히려 희망과 기회의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사대부 중심의 정치질서를 구축하려던 조선 초기 역사가들에게 하층민의 지배층 진출은 결코 달가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은 각자 고유한 역할이 있다는 이른바 사민(四民) 분업론 위에서 ‘사(士)’ 계층만이 권력계층이 되어야 한다는 신분관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유청신이 간신전에 실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출처

제공처 정보

  • 저자 박종기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고려시대 부곡인과 부곡 집단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교수,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및 한국중세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고려사의 재발견》, 《동사강목의 탄생》, 《새로 쓴 5백년 고려사》, 《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 《왕은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가》(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고려사 지리지 역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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