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물재조명4]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기획인물재조명4]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유청신(柳淸臣)은 누구인가?
  • 김헌규 기자
  • 승인 2015.12.13 1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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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덕매당리유청신신도


천안의 대표적인 특산물인 호두를 고려후기 유청신이 광덕사에 처음으로 시배했다고 전해져 오지만 그 진실에 대해 알아본다.
고려후기의 대표적인 간신 유청신(柳淸臣, 1257년~1329년)은 고려(高麗)의 무신(武臣), 외교가(外交家)다. 본관은 전남고흥(高興)이고, 시호(諡號)는 영밀(英密)이다. 장흥부(長興府) 고이부곡(高伊部曲) 출신이며, 처음 이름은 비(庇)이다.
공민왕 재위 시 시중을 지낸 유탁(柳濯)이 청신의 손자이다. 국가 제도상 부곡리는 비록 공적이 있어도 5품 이상 승진할 수 없었는데, 유청신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담력이 있었으며 몽골어를 배워 누차 사신을 따라가 원나라에서 응대를 잘 했으며 이후 계속되는 활약으로 충렬왕의 신임을 받아 낭장에 임명됐다.
이후 승진을 거듭해 여러 요직을 거쳐 고흥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왕의 특명으로 고향인 고이부곡이 고흥현으로 승격됐다.

◆유청신 몽골어 잘해 원나라 사신으로
    왕래
유청신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호두나무를 가져와 천안의 광덕사에 심고, 일부는 집 뒤 후원에 심은 것과 지금 광덕사 뜰에 보호수가 그것이라 전하고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유청신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여러 번 왕래하면서 원나라에서 그의 삶, 상당부분을 그곳에서 보냈으며 심왕의 ‘입성책동’으로 인해 후환이 두려워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결국 유청신은 원나라에서 죽어, 임금의 명으로 예장으로 장례를 지냈으며, 화상으로 하여금 영정을 그리고, 한림학사 조맹부로 하여금 신주를 썼다.
그의 손자 탁이 할아버지인 유청신을 모시고 원나라에서 살다 신주를 모시고 돌아왔으며, 고국에서는 신발과 옷으로 풍덕 신종사 뒤에 장례를 모셨다고 전해져오고 있다.
‘고려실록’이나, 유청신의 기록인 ‘실암실기’, ‘고흥유씨세보’ 등을 보아도 천안에 다녀간 기록이 없다.
더구나 천안과 연고가 없는 전남고흥사람으로 광덕사에 호두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신빙성이 전혀없어보인다.

◆광덕호두나무, 수령 350년… 유청신이 산 시기와 400여 년 차이
 더욱이 광덕사 호두나무는 수령이 350년 정도며, 유청신이 살아온 시기와 약 400년 정도의 시간적 차이가 있다. 
유청신이 심었다는 것은 허구임이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고려사 간신열전에 기록돼 있는 인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한 인물이다.
또 천안 매당리에 있는 유청신의 사당은 시신을 모시고 고흥으로 가는데 매당리에서 상여가 움직이지 않아 이곳에 장례를 모셨다는 전설 또한 허구라는 것이다.
이에 천안향토회 김종식연구원은 “시신은 원나라에서 장례를 모셨고 고국에서는 풍덕에 옷과 신발로 가묘를 써서 장례를 지냈다.”며 “광덕 매당리에서 상여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전설 또한 매당리의 사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고 밝혔다.  
몽골어를 잘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 내왕한 것은 사실이고, 그 공으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낭장에 임명된 것도 사실이다. 고려시대에는 부곡리가 5품을 넘을 수 없었지만 특별히 임금의 허락으로 장군에 올랐다.
이후 승진을 거듭해 1294년(충렬왕 20)에 우승지가 되었고, 1296년에는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임명돼 재추의 반열에 올랐다.
다음해에 세자(忠宣王충선왕)의 요청에 의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감찰대부(監察大夫)에 임명됐으며, 조인규(趙仁規)·인후(印侯)와 함께 원나라에 파견돼 충렬왕의 전위표(傳位表)를 전달했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광정원부사(光政院副使)로서 참지기무(參知機務)를 겸했고, 곧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했다.
그러나 충렬왕이 복위하고, 인후 등에 의해 한희유무고사건(韓希愈誣告事件)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돼 원나라에 압송됐다.
1299년에 차신(車信)·최유엄(崔有淹)·오인영(吳仁永)·유복화(劉福和)·홍선(洪詵) 등 충선왕 지지자들과 함께 파직됐다. 그 뒤 다시 복직돼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랐다.
당시 원나라에 억류돼 있던 충선왕의 환국을 위해 노력하다가 1307년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武宗) 옹립의 공으로 실권을 장악하자 도첨의찬성사·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로 중용됐다. 이 때 원나라 황제로부터 청신이라는 이름을 받아 개명했다.
1310년(충선왕 2) 정승에 임명되고 고흥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곧 도첨의찬성사 고흥군으로 강등됐지만 1313년에 다시 정승에 올라 1321년(충숙왕 8)까지 재임했다. 1320년에 원나라에서 충선왕이 고려인 환관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의 참소를 받아 티베트(吐蕃)로 유배됐다.

◆‘심왕옹립운동’, ‘입성책동실패…
     원나라서 죽음
-고려사 간신 전에 기록된 인물
다음해에 충숙왕 역시 참소를 받아 원나라로 소환되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으며, 그곳에서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 등과 함께 심왕 고(瀋王 暠)와 결탁해 ‘심왕옹립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원나라에 계속 머물면서 오잠(吳潛)과 함께 고려에 원나라의 내지(內地)에 설치된 행성(行省)을 두자는, 이른바 ‘입성책동(立省策動)’을 벌였으며, 충숙왕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고 무고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심왕옹립운동’과 ‘입성책동’이 모두 실패하고 1325년에 충숙왕이 환국하자, 처벌이 두려워 고려에 돌아오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죽었다.
말년의 심왕옹립운동과 입성책동 때문에 ‘고려사’의 ‘간신전(姦臣傳)’에 수록됐다. 시호는 영밀(英密)이다.
유청신은 그 자신이 정승의 지위에 올랐으며 아들 유유기(柳攸基)와 손자 유탁(柳濯)에 이르기까지 재상을 배출한 세족가문이다.
충렬왕·충선왕·충숙왕 3대에 걸쳐 고려왕실을 섬긴 인물이면서도 유청신은 간신 열전에 입전되어 있는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김종식연구원은 “유청신이 간신 열전에 실리게 된 배경인 입성론이 갖는 당시의 정치현실이나 ‘고려사’ 찬자의 유청신 인품에 대한 상반된 평가 등이 존재하고 있다.”며 “유청신은 천안과는 무관한 사람으로  기록이나 정황들을 살펴보면 광덕사에 호두나무를 처음 심었다고 하는 것은신빙성이 없으며, 고흥유씨 후손들이 조상숭배 차원에서 만들어낸 허구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이제부터 천안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천안의 대표적인 특산물인 호두나무를 처음으로 시배했다는 잘못된 인식을 조속히 바로 잡아야한다는 것이다.
매주 4회,천안 시티투어 코스에도 들어가 있는 광덕사, 이곳에서 호두나무의 역사를 강론하는 관광해설사 역시 관광객들과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전해주고 있어 조속히 시정해야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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