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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천안시 광덕면의 문화재
wjad**** 조회수 1,997 작성일2014.03.27
광덕면에 있는 문화재 모두를 알려주셨으면 해요. 고장에 있는 문화재를 알고 싶은 사람이에요.특히 사진과 상세한 설명을 해주셨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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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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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 동남구 광덕면의 문화재)

 

1.천안 광덕사 감역교지


종 목  보물  제1246호 
지 정 일 1997.06.12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사길 30 (광덕리)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세조 3년(1457) 8월 10일에 왕이 충청남도 천안에 있는 광덕사와 개천사에 내린 교지이다.


이것은 두 사찰의 잡역을 경감하라는 내용이며, 체제와 형식에 있어서 예천 용문사교지(보물 제729호), 능성 쌍봉사교지(보물 제1009호)와 같으며, 대상 사찰명과 발급일자가 다를 뿐이다. 단, 쌍봉사에 발급한 교지와는 날짜까지도 같다.


이 문서는 국왕이 직접 내린 것으로 조선 전기 사패교지의 형식을 알려주는 자료이며, 세조 때의 불교정책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2.천안 광덕사 조선사경


종 목  보물  제1247호  
지 정 일 1997.06.12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사길 30 (광덕리) 
시 대 조선시대


충남 천안 광덕사에 전해지는 사경(寫經)이다. 사경이란 불경의 내용을 정성스럽게 옮겨 적고, 화려하게 장식하여 꾸민 것을 말한다.


백지에 먹으로 쓴 ‘부모은중경’과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으로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부모은중경은 부모의 은혜를 크게 10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은혜를 갚기 위해 공양하며 경전을 읽고 외울 것을 권장하고 있다. 다른 경전과 달리 각 내용에 따른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은 부처의 힘을 빌리거나 수행을 통해 모든 죄악을 없애고 장수하는 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부모은중경의 끝에 남은 기록을 통해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1396∼1486)이 부인·아들과 함께 시주하여 만든 책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 불교 진흥에 큰 역할을 했던 효령대군의 불교신앙을 살펴볼 수 있으며, 불교 문화사 및 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3.광덕사 노사나불괘불탱


종 목  보물  제1261호 
지 정 일 1997.08.08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640 광덕사 
시 대 조선시대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열 때 법당 앞에 걸어 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화를 말하며, 광덕사의 이 괘불은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그린 것이다.

 

전체적인 구도는 머리에 보관을 쓴 노사나불을 다른 형상보다 크게 그려 중앙에 배치하고 주위에 2대보살·2대제자·사천왕을 그려 넣은 모습이다. 본존은 타원형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둥근 머리광배에는 작은 부처 7구를 표현하였다.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고 양 손은 어깨 높이 정도로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손모양을 취하고 있다. 붉은색의 옷과 매듭, 옷깃의 둥근 모양 장식 등이 어우러져 화려함이 돋보인다. 주변의 인물은 좌우대칭으로 나타나 있는데 어깨 부분의 양쪽에는 2대 제자가 묘사되어 있고 그 아래쪽으로는 2대보살이 있으며 둘레에는 사천왕상이 배치되어 있다.

 

붉은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배경에는 군데군데 구름을 그려 넣어 밝고 선명한 채색과 더불어 화려함을 더해준다. 

 

 

4.천안 광덕사 호두나무


종 목  천연기념물  제398호 
면 적 7,506㎡(보호구역)
지 정 일 1998.12.23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사길 30 (광덕리) 


호도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이며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란다. 우리나라에서는 황해도 이남 지역에 주로 분포하며, 약 20m까지 자란다. 꽃은 4∼5월에 피고, 9월에 둥근 열매가 익는다.


이 호도나무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18.2m이며, 지상 60㎝의 높이에서 두 개 줄기로 갈라져 가슴높이의 둘레가 각각 2.62m, 2.50m이다. 호도나무 3m 앞에는 이 나무의 전설과 관련된 ‘유청신 선생 호도나무 시식지’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약 700년 전인 고려 충렬왕 16년(1290) 9월에 영밀공 유청신 선생이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임금의 수레를 모시고 돌아올 때 호도나무의 어린 나무와 열매를 가져와 어린 나무는 광덕사 안에 심고, 열매는 유청신 선생의 고향집 뜰 앞에 심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의 나무가 그 때 심은 것인지의 정확한 근거자료는 찾지 못하고 있다. 이곳 마을에서는 이것이 우리나라에 호도가 전래된 시초가 되었다 하여 이곳을 호도나무 시배지(처음 심은 곳)라 부르고 있다.


이 호도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5.광덕사 부도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

지 정 일 1978.12.30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640 
시 대 조선시대


절 주변에 호도나무가 많기로 유명한 광덕사는 신라 진덕여왕 6년(652) 자장이 창건하였다. 절내의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산기슭에 4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는데, 각각 청상당 부도, 적조당 부도, 우암당 부도, 무명 부도라 일컫는다.

 

청상당 부도는 청상스님의 사리를 모신 부도이다. 스님은 조선 선조 36년(1603)에 출생하여 현종 12년(1671) 은적사에서 입적하였는데 그 제자들이 스님의 사리를 얻어와 이곳 광덕사에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형태는 전체가 거의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부와 탑신부 그리고 머리장식을 갖추고 있다. 기단부는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뉜다. 연꽃무늬가 펼쳐진 아래받침돌 위에 6각의 가운데받침돌이 놓여 있는데, 각 면에 난간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은 둥근 모습이고, 그 위로 6각의 지붕돌이 놓여 있다. 꼭대기에는 화려한 머리장식이 조각되어 있다. 광덕사『사적기』에 따르면, 조선 현종 13년(1672) 경에 이 부도를 세웠다 한다.

 

적조당 부도는 전체가 8각을 이루어, 기단부와 탑신부 그리고 머리장식을 갖추고 있다. 기단부는 아래와 윗받침돌에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그 사이 8각 가운데받침돌은 각 면마다 난간을 새겼고 한쪽면에 ‘적조당’이라는 글씨를 새겨 사리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탑신의 몸돌은 둥글고, 6각 지붕돌 꼭대기에는 보륜(바퀴모양의 장식)과 보주(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놓여 소박한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우암당 부도의 기단부는 둥근 아래받침돌 위로 가운데받침 ·윗받침돌이 놓여 있는데 무늬는 두지 않고, 다만 ‘우암당’이라 새긴 글씨만 있을 뿐이다. 탑신은 타원형의 몸돌과 6각 지붕돌이 있고 그 위로 둥근 머리장식이 솟아 있다.

 

무명 부도는 연꽃무늬를 새긴 아래받침돌 위에 8각의 가운데받침돌을 올리고 세 줄의 연꽃잎을 새긴 윗받침돌을 얹어 기단을 마련하였다. 가운데받침돌은 8면마다 신장상(神將像:불교의 법을 지키는 신)을 1구씩 돋을새김 하였는데, 그 수법이 대담하고 우수하다. 탑신은 종모양을 하고 있어서 둥글고 길쭉하며, 꼭대기에는 보주를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광덕사『사적기』의 기록이나, 전체적인 형태, 둥근 탑신의 모습 등으로 보아 모두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6.광덕사 삼층석탑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

지 정 일 1985.07.19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640 
시 대 고려시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의 석탑이다.

 

위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고, 특히 탑신의 1층 몸돌에는 문모양 안에 자물쇠를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윗면에는 급한 경사가 흐르고, 네 귀퉁이는 위로 치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노반(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 : 엎어놓은 그릇 모양)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아래층 기단의 기둥 장식이 생략되고,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드는 점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7.광덕사 대웅전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46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640 
시 대  근대


광덕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가 지었고 흥덕왕 때 진산조사가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리기 전에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서 가장 큰 절 중 하나였다고 한다.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1983년에 완전히 해체하여 복원하였는데 처음보다 크게 세웠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에는 석가여래와 그의 제자인 약사여래, 아미타여래 불상을 모시고 있으며, 불상 뒤쪽에 영조 17년(1741)에 제작된 탱화가 있다.  


8.광덕사 천불전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47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638 
시 대  근대


광덕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가 지었고 흥덕왕 때 진산조사가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리기 전에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서 가장 큰 절 중 하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대웅전과 천불전을 다시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있는 천불전은 옛 건물을 1975년에 완전히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안쪽에는 목조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가섭과 아난존자를 모시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왼손가락끝으로 오른손가락을 덮어 누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세 불상 뒤로는 천불이 그려진 탱화 3점이 걸려 있었다. 이 탱화는 광덕사의 사적기가 제작된 조선 숙종6년(1680) 당시에도 오래된 듯 보여 그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1999년 12월 화재로 소실되었다. 


9.광덕사 석사자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52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640 
시 대  미상


광덕사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 양쪽에 놓여 있는 2기의 돌사자상이다.

 

받침돌을 따로 두지 않고 한돌로 조각하였는데, 하늘을 바라 보는 얼굴은 거의 수평으로 되어 있으며 사람 얼굴 모양을 하고 있다. 머리털은 구름무늬를 이루고 있고, 입은 약간 벌린 모습으로, 그 안에 이빨도 표현하였는데, 사실성은 떨어진다. 

 

 

10.광덕사 부도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53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산175-1 
시 대  통일신라시대


광덕사 뒷편의 작은 봉우리에 자리하고 있는 사리탑으로, 진산화상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진산화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흥덕왕 대에 이 절을 새로이 고쳐지었다.

 

탑은 종 모양을 이루고 있는 형태로, 낮은 바닥돌 위로 4각 기단을 마련하여 종 모양의 탑신을 올려놓았다. 탑신에는 ‘진산화상’이라는 글귀를 새겨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꼭대기에는 탑신과 한돌로 이루어진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솟아나 있다.

 

각 부분에 특별한 꾸밈을 두지 않은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이다.

 

11.남양서씨 3세 정려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256
시 대  조선시대


광덕면사무소에서 신흥교를 건너 매당리 629번 도로를 타고 풍세 방향으로 간다. 약 700m 가면 당하리 도로변 약 40m 지점에 남양서씨 효자정문이 있다.

 

정려는 정면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익공식 건물로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으며 방형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다. 내부에는 3매의 현액이 걸려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효자통정대부서한장지려] [효자학생서충좌지려] [효자절충장군행룡양위부호군서충필지려]


서한장의 자는 우천이며 천안 원일면 사람이다. 장령 정연의 아들이요 효자 충필, 충좌의 종손이다. 부공이 기절함에 우수 제4지를 잘라 화약하여 진쇄하여 드리니 능히 구하지 못했다. 모부인을 받들매 원지로 힘을 쓰고 가담에 힘을 써 감지로 봉양하였다. 매사에 보부인 봉양에 힘쓰고 매일 일찍 일어나서 가묘에 배례하고 석시에도 여일하였다. 모부인의 병에도 우수지를 절단하여 출혈권구하고 한편 화약을 만들어 진하였다. 급사에 속지에 오래 머문 것이 성질이 되어 복결후 5월에 마침내 돌아가니 향년 38세요 때는 숙종 4년 무오였다. 그 후 18년인 숙종 21년에 순무사 송광윤이 조서를 오려 정물을 리여에 세웠다.


효자 서충필의 자는 언식이니 관향이 남양인이다. 부친은 숙질로 다년간 송욕에 누워 있었다. 공이 곤제 충좌로 더불어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병이 위독하여 분을 맛보고 고약으로 경중을 살피었다. 그 부친이 병질을 지니고 8순상수를 한 것은 충필 형제의 효성의 소치이다. 부공이 몰함에 상제와 폄장은 모두 예문을 따랐으며 이후 3년 만에 애훼하여 뼈만 남았다. 복결 후에도 제당을 세우고 조석재전을 받들어 노경에 이를수록 지성을 다하였다. 모원씨도 88세의 고령을 살았으니 임진에 피난할 새 판여에 모시고 갔으며, 우애가 지극하여 향이에 경모의 대상이 되니 읍선생이 일향의 공론을 감사하게 신보하여 전문이 구중에 들어 정려의 뜻을 받았다.


효자 서충좌의 자는 경식이니 유순부위 곤의 아들이다. 충좌는 어려서부터 인품이 정돈하여 부모를 섬기매 성경을 다하고 형장을 섬기매 효제로서 극진하였다. 선조 4년 기모 원씨가 병이 들어 고통이 감하니 홀로 모친을 모시었다. 일야로 구요 하더니 충좌가 병이 들었다. 그러다가 하루 아침에 모부인 원씨의 병세가 악화된 충좌가 질병을 무릅쓰고 부엌에 나가 칼을 잡고 단지하여 화약을 드리니 순경에 기맥이 통하여 차도가 있으니 성효를 신명이 굽어보았다 하겠다. 양선과 장미는 사리상 당연한 것이어서 향리의 권수가 3첩에 이르니 40품관과 50 모색이 상보하였다. 최 군수 윤이 감사에게 신보하니 선조7년의 일이다. 서충좌는 충필의 계제로서 사친에 형들과 더불어 효성이 지극하였다. 명나라에서 정면을 내리던 날에 미행을 백씨와 신씨에게 미루고 양근 땅으로 피벽 하였다. 조정에서는 해읍에 합복을 명하고 판서로 증직하였다.
 

 

12.고흥유씨 정려


소 재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1
시 대  조선시대


유청신의 시는 영밀이며 고려 충헌왕44년(1257)에 고흥양류동에서 출생했다. 충경왕 7년(1266) 10세때에 왜구의 침입으로 부모를 따라 고흥군 점암면 안양리 팔영산 석굴로 피난하였으나 왜적에게 발각되어 모친을 해치려하자 대신 죽기를 원하니 왜적도 감격하여 모친을 모면하였다. 그 효성을 아름답게 여겨 정려를 세워주었다.


영밀공께서 원나라에 사신으로 29차에 걸쳐 왕래 할때 호두를 은밀하게 가져와서 광덕면에 처음으로 재배하여 전국에 보급하게 되었고 호도 생산이 다량으로 수확 되고 있다. 천안하면 상징적인 먹거리 호두과자는 다량 생산 되는 호두를 원료로 개발되어 전국적으로 유명한 먹거리중의 하나이다.


유청신의 신도비는 높이210cm(비신 높이150cm)이며 목은 이색의 찬문으로 조선조에 건립한 것이다. 신도비 윗쪽 산기슭에는 유청신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고흥유씨 정문은 유청신의 정려를 비롯하여 유의신(선조때),유연(영조때), 유흥우(영조때)등의 정려인데 매당리(하금곡)에는 숙종조에 정려를 받은 효자유언의 정려가 있어 광덕면 매당리 일대가 유청신이하 고흥유씨의 세거지가 되어 있음을 알수있다.


유의신의 자는 언정이며 천안광덕 사람이다. 의신은 어려서 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향당에 칭송이 자자 하였다. 선조계미(1583)에 무과에 급제 하였으며 선조24년에는 왕의 탑전에서 시사회를 개최하여 무예를 겨루었는데 이때 의신이 거수(으뜸자리)를 차지하여 상사가 심후하고 특히 변장에 제수되어 이진 권관이 되었다. 의신이 즉시 부임하여 진심으로 군졸을 무휼하고 병기의 수리와 제조에 힘쓰며 평시에 병기를 갖추지 않으면 급할때 응 할수 없다 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의 무리가 바다를 덮어 쳐들어 왔다. 이때 유의신이 일치 단결하여 결전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여러 장수와 병졸들을 제압 하였다. 주장 이억기는 크게 기뻐하여 의신으로 선봉장을 삼으니 오합지졸 임에도 가덕 포전양에서 대적과 직충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역전해서 크게 승첩하였다. 주장이 의신의 전공을 조정에 올리니 훈련첨정으로 특진시켜 그 공을 차지하였다. 그 후 승승전전 하다가 이름높은 한산도해에 참전하였다. 이때에도 정신부전 하여 적을 사살하니 그 수가 부지기수 였다. 이때에 홀연히 적탄에 맞아 전사 하였다.


문화재가 많이 소장되어 있는 천년지장도량 광덕사와 함께 고흥유씨 정문을 가족, 천지들과 함께 다녀 보면서 풍부한 볼거리와 더불어 효자이야기를 나눈다면 화목한 가정생활에 윤활유가 될것이다.
 

 

13.유씨 정려각 (효자 유언 정려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256
시 대  조선시대


광덕면사무소에서 신흥교를 건너면 매당리 하금곡마을이 나온다. 정려는 하금곡마을에서 중금곡으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정려는 남향을 바라보며 세워져 있는데 주변을 철책으로 보호시설을 한 후 시멘트로 기단을 조성하여 세웠다.

 

정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4면은 홍살을 시설하였으며 도리식 건물이다. 원형의 초석 위에 원주를 세웠으며, 하방 아래는 고맥이 시설을, 창방 위에는 소로를 4개 올렸다. 내부의 중앙 상단에 현판을 걸었다. 「효자통정대부유언지려 숙묘구년계해10월 일 명정 금상 20년 갑신 3월 초 구일 중갈」

 

유학 유언은 천안 원일면 사람이니 갑오생 이다. 모친 정씨가 괴질이 있었는데 늘 극진히 봉양했다. 어느 날 모친이 기절해 괴는 망극하여 칼로 손가락을 베어 주혈하니 얼마 후 회생하시었다. 갑인 8월 모친이 기절하니 기서 때와 같이 절지하고 익년 8월에 모친이 또 기절하니 절지 주혈 하였으나 구하지 못하였다. 괴는 애통해 마지않고 늘 묘에 가서 통곡하면서도 돌아와서 병든 부친께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여 중의를 모아 방백에게 아뢰고 1년인 계해 10월에 정문을 세웠다.
  

 

201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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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직접정리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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