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탕 청문회였다. 모두가 예상했던 그대로다. '의혹'이라 부를만한 건 없었다. 몇 가지 쟁점이 될 '혹'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윤석열을 낙마시키기엔 미미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윤석열이 괜히 윤석열인가. 낙마할 정도의 의혹이 있었으면, 밉상 of the 밉상이었던 근혜 누나 시절에 진작 날아갔을 것이다. 애초에 내용이 중요한 청문회가 아니었다.
자유한국당은 국회로 돌아올 명분이 필요했다. '민생 대장정'이라며 야심차게 국회를 박차고 나갔는데, 전국을 돌며 드러난 건 민생이 아니라 황교안 대표의 바닥뿐. 별다른 성과가 없어 우물쭈물하는 사이 국회 정상화 타이밍은 날아갔고, 패스트트랙 수사가 옥죄어오고, 지지율까지 떨어지는 4중고 와중에 윤석열 청문회의 기회가 주어졌다. 건질 게 없어도 덥석 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한국당 앞에는 중대한 문제가 남았다.
'질 게 뻔한 전쟁에 누가 나설 것인가.'
이 난제를, 자유한국당은 쉽게 해결했다.
여기서 정갑윤 의원이 빠지고 김진태 의원이 대타로 출전했다
출처 - <아이엠피터>
국회선진화법을 어긴 의원들을 선수로 내보낸 것이다. 곧 검찰 조사를 받아야 하는 의원들을 검찰총장 청문회에 내보낸다? 오호라. 어짜피 건질 내용은 없으니 나가서 '각자의 정치'를 맘껏 해보라는 전략이다. 과연,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생존 정치의 달인들이다.
해서 이번 청문회 관전기는 색다른 프레임으로 접근해 보려 한다. 겉으로는 평범한 청문회처럼 후보자를 엄격하게 꾸짖으면서도 생존기술을 마구 발휘하는 자한당 의원들의 숭고한 싸인을 캐치해보려는 것이다.
매라비언의 의사소통 법칙에 따르면, 커뮤니케이션에선 메시지보다 용모, 표정, 제스쳐 등 시각적 요소가 중요하다고 한다. 나는 이 법칙을 철저하게 따랐다. 그랬더니 자한당 의원님들의 약팍한 말에 감춰진 묵직한 진심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 이은재 의원, 19 S/S 사퇴복
이.은.재. 라는 이름 석 자를 우리 모두의 가슴 깊게 각인시킨 한 마디. 사퇴하세요! 그때 그녀는 빨간 자켓과 흰색 블라우스를 입었다. 이른바 사퇴복이다.
오늘도 그녀는 빨간 재킷과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청문회장에 등장했다.
이게 사퇴복이라는 걸 몰랐다면 당신은 하수다. 그때와 같은 사퇴복을 입었다는 걸 캐치했다면 당신은 중수다. 만약 고수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이 옷은 그때와 같은 사퇴복이 아니라는 걸.
자세히 보면, 두 자캣은 색만 비슷할 뿐 다른 옷이다. 카라 부분을 보면 확연이 차이가 드러난다. 블라우스 역시 마찬가지. 예전 옷은 목이 없는 블라우스고 오늘 입은 신상 사퇴복은 카라가 있는 블라우스다.
이쯤 되니, 메시지가 너무나 노골적으로 느껴진다.
'눈치가 보이니 사퇴복과 비슷한 걸 입었지만,
이건 사퇴복이 아니다.
윤석열 후보, 사퇴하란 말 안 하겠으니
나도 사퇴시키지 말아줘'
2. 김도읍 의원, 네 마음에 Knock Knock
나경원 원내대표 체제에서 순식간에 자한당 에이스로 떠오른 김도읍 의원. 법사위 간사이기도 한 그이기에 날카롭고 예리한 질의를 할 것으로 기대를 듬뿍 받았지만, 그는 청문회를 시작하자마자 이상 행동을 보였다.
이건 뭔가. 펜을 만지막 만지작 하는 건 무슨 싸인인걸까. 오랜 시간 그들의 싸인을 연구했던 나로서도 알아차리기 힘든 제스쳐였다. 그런데,
아아. 이것으로 게임오바.
윤석열 후보자와 아이컨텍을 한 상태에서 10초에 무려 18번 눈을 깜빡인 것이다. 이거, 누가 봐도 모스부호 아닌가. 남중생 짝사랑도 아니고 청문회장에서 이토록 노골적인 메시지를 보내다니.. 이건 좀 심하셨다.
나는 모스부호를 해석할 수 없는 관계로 메시지까지 읽을 순 없었지만, 윤석열 후보자는 같이 눈을 깜빡여주며 확실히 수신했다는 싸인을 보내는 걸 알 수 있다. 과연 고수들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짐작컨데 이런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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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E L P M E
3. 김진태 의원, 블링블링 쇠고랑
김진태 의원이 주로 차는 시계는 세 종류이다.
갈색 가죽 시계, 검은색 시계, 그리고 근혜 누나가 하사하신 은색 태극기 시계.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번 청문회엔 은색 태극기 시계를 차고 왔다.
그.런.데. 청문회 내내 그의 손목이 블링블링 하는 게 신경 쓰여서 자세히 봤더니 오른쪽에 은색 팔찌를 차고 오셨다.
왼손에 은색 시계, 오른손에 은색 팔찌. 이른바 블링블링 쇠고랑 패션의 완성이다. 이게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답은, "양정철을 왜 만냤나"고 윤석열 후보를 갈구는 그의 질의에서 찾을 수 있었다.
김 : 금년 6월 달에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우리 당에서 양정철 전 의원을 고발한 것을 알고 있어요?
윤 : 금년 6월에요? 그건 (양정철과 만난 건) 그 전이었으니까….
김 : (소리높여) 하여튼! 금년에 고발된 거 알고 있냐구요!
윤 : 알고 있습니다.
김 : 그러면 곧 피의자가 될 사람을 몇 달 전에 만나는 것은 적절한 겁니까!
윤 : 아니 당시엔 알 수 없고..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다고 검찰총장 후보자를 공격한다? 아무리 바보천치멍충망충이라도 그런 사람은 없다. 게다가 그는 제1 야당의 에이스, 김진태 의원아닌가. 이것은 고도의 함의가 있음이 분명하다.
양손은 블링블링한 은색으로 깔 맞추고, 미래를 알지 못했다고 갈구는 김진태의 싸인. 오직 한 가지 해석밖에 가능하지 않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과거의 나는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고, 블링블링 쇠고랑을 찰 위기에 처했다. 나는 지금 후보자 당신에게 소리치고 있지만, 사실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과거의 나를 다그치는 것이다.'
이상으로 자한당 의원님들의 숭고한 싸인 해독을 마친다. 고백컨데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의원님들의 생존스킬이 워낙에 고도화되어 있었던 탓이다.
쨌든 싸인은 전달됐고 청문회는 끝났다. 큰 이변이 생기지 않는 이상, 후보자는 검찰총장에 임명될 것으로 보인다.
남은 건 싸인을 받은 윤석열의 선택이다. 소신대로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지 고도로 암호화된 메시지를 받아들일지, 지켜볼 필요도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지켜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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