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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기원전 시대와 관련된 유명한 신화는 어떤 것이 있나요?
kin_**** 조회수 145,961 작성일2008.02.22

지식iN과 함께하는  < 10,000 BC >  이벤트 질문입니다.

 


" 기원전 시대와 관련된 유명한 신화는 어떤 것이 있나요? "


 

위 질문에 좋은 답변을 해주신 분들 중에서 추첨을 통해 감사의 선물을 드립니다. 지식iN 여러분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1. 이벤트 기간 : 2008년 02월 22일 - 03월 05일

2. 당첨자 발표 : 2008년 03월 06일

3. 경품 내용 :  - 예매권 150명 (1인 2매, 300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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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단군신화가 제일 유명하죠 

 

환웅(桓雄)은 단웅(檀雄) 또는 신웅(神雄)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환인, 환웅, 단군의 신주를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사라고 하는 곳이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古記)》, 《세종실록》〈지리지〉에 인용된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의하면, 환웅은 환인의 서자이자 단군의 아버지이다.

 

사서에 설명된 환웅

《삼국유사》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옛 기록을 인용하여 단군신화를 설명하였다.

[편집] 삼국유사

환웅은 인간 세상에 뜻을 두어 환인으로부터 천부인 3개를 받아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에 내려와, 그 곳을 신시(神市)라 부르고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 등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였다.

어느날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와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하자, 각자에게 신령한 1주와 마늘 20개를 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서 이것만 먹고 산다면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곰과 호랑이가 삼칠일을 버텼고, 곰은 여자가 되었으나 호랑이는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혼인할 곳이 없어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이 잠시 인간의 몸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단군왕검이다.

[편집] 조선왕조실록

상제 환인(桓因)의 서자인 웅(雄)이 세상에 내려가 사람이 되려 하여 천부인 3개를 받아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그 손녀로 약을 마시고 사람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단군(檀君)이다.

[편집] 야사에 설명된 환웅

규원사화》와 《부도지》에 환웅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규원사화》에서는 환웅이 '신시씨(神市氏)'로 불리운다

2008.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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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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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단군신화가 제일 유명하죠 

 

환웅(桓雄)은 단웅(檀雄) 또는 신웅(神雄)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환인, 환웅, 단군의 신주를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사라고 하는 곳이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古記)》, 《세종실록》〈지리지〉에 인용된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의하면, 환웅은 환인의 서자이자 단군의 아버지이다.

 

사서에 설명된 환웅

《삼국유사》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옛 기록을 인용하여 단군신화를 설명하였다.

[편집] 삼국유사

환웅은 인간 세상에 뜻을 두어 환인으로부터 천부인 3개를 받아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에 내려와, 그 곳을 신시(神市)라 부르고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 등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였다.

어느날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와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하자, 각자에게 신령한 1주와 마늘 20개를 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서 이것만 먹고 산다면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곰과 호랑이가 삼칠일을 버텼고, 곰은 여자가 되었으나 호랑이는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혼인할 곳이 없어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이 잠시 인간의 몸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단군왕검이다.

[편집] 조선왕조실록

상제 환인(桓因)의 서자인 웅(雄)이 세상에 내려가 사람이 되려 하여 천부인 3개를 받아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그 손녀로 약을 마시고 사람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단군(檀君)이다.

[편집] 야사에 설명된 환웅

규원사화》와 《부도지》에 환웅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규원사화》에서는 환웅이 '신시씨(神市氏)'로 불리운다

2008.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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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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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맞는지 몰겠지만 주몽신화!!

 

이름은 주몽()·추모()·상해()·추몽()·중모()·중모()·도모() 등이 전한다.

그를 주몽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조에 나와 있다. "시조 동명성왕()은 성이 고씨()이고, 이름이 주몽()이다[추모() 또는 중해()라고도 하였다]. 그의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에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도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동명왕을 부르는 호칭이 많은데, 이는 당시에는 발음이 같거나 비슷하면 다른 한자로도 같은 이름이나 지명 따위를 표기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부여왕() 해부루()가 죽고 금와()가 즉위하였는데, 이때 금와왕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났다. 유화는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자기를 유인하여 사통()하고는 돌아오지 않아 부모에게 쫓겨나 우발수에 살고 있다 하므로, 금와왕은 유화를 데려다 궁중에 유폐시켰다.

어느날 유화는 햇빛을 받고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남아()가 나와 성장하니 이가 곧 주몽이다. 주몽이 7세 때 이미 활을 잘 쏘는 등 영특하고 총명하자 금와왕의 장자 대소() 등 일곱 왕자 및 여러 신하들이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유화 부인의 뜻을 따라 화를 피하여 졸본부여()로 남하, BC 37년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성()을 고()라 하였다. BC 36년 비류국()의 왕 송양()의 항복을 받았고,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하였으며, BC 33년 행인국()을 정복하고, BC 28년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2008.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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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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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Sumer)는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남쪽 지방이다.

수메르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대략 기원전 3500년 부터 수메르 지방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기원전 2000년 쯤에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아카드지방에 살던 셈족 계통의 아카드 사람들이 수메르 지방을 점령하고 바빌로니아를 세웠다

수메르의 어원

"수메르인"이란 말은 그들의 뒤를 이은 아카드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에 사는 사람을 부르던 말이었다.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상기가(sag-giga) "검은 머리 사람들"[1]이라고 불렀고, 그들의 땅은 키엔기르(Ki-en-gir) "수메르말을 쓰는 사람들의 땅"[2][3][4]이라고 불렀다. 아카드어 "슈메르"는 아마도 이 것의 방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왜, 아카드인들이 이 남쪽 땅을 "슈메루"[2][4]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성경의 "시날"(Shinar), 이집트의 "신그르"(Sngr), 히타이트의 "산하르"(Sanhar)는 모두 "수메르"의 서방 방언으로 볼 수 있다.[

수메르인은 솀어족이 아니고, 언어학자들이 수메르어의 바탕이 된 기저 언어를 찾을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때 침입자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기록은 초기 우바이드기(기원전 5200년~4500 또는 6090~5429)에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한 이후에 문화적 단절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이 지방에 정착한 수메르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풍푸한 충적토로 비옥해진 땅을 경작하였다.

당시에는 강우량이 현재 보다 적었기 때문에, 척박한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거주하려 한 모든 인종들의 도전은, 티그리스 강유프라테스 강을 잘 관리하여 농업용수와 식수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수메르어에는 운하, 제방, 저수지등에 관련된 단어가 많이 발견된다. 수메르 인들은 북부지방에서 농업 기술을 습득한 뒤에 남쪽으로 내려온 농부들이었다.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우바이드 토기는, 북부의 사마라 유적(기원전 5700년~4900)의 토기와 연속성이 발견된다. 사마라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 중류 지방에서 최초로 원시적인 형태의 경작을 시작한 부족들이다.

우바이드 유적과 사마라 유적의 유사성은 라르사 근처의 텔 아웨이리 (1980년에 프랑스 발굴단에 의해 발굴됨)에서 발견된 사마라 토기와 유사한 전기 우바이드 토기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북부 지방의 농부들은, 신전 중심의 사회구조를 만들어 내고, 수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면서, 남쪽의 보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되면서, 남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편집] 도시국가

고대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 티그리스
제국도시
수메르: 우루크 · 우르 · 에리두
키시 · 라가시 · 니푸르
아카드 제국: 아카드
바빌론 · 이신 · 수사
아시리아: 아슈르 · 니네베
두르샤루킨 · 님루드
바빌로니아 · 칼데아 · 엘람
아모리 · 후르리 · 미탄니
카시테 · 우라르투
연대기
수메르의 왕
아시리아의 왕
바빌론의 왕
언어
아람어
수메르어 · 아카드어
엘람어 · 후르리어
신화
에누마 엘리시
길가메시 · 마르두크

기원전 4세기후반 까지, 수메르는 10여개의 독립된 도시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도시국가들은 대체로 수로와 경계석으로 둘러쌓여 있고, 중앙에는 도시의 수호신이나 수호여신을 모시는 사원이 위치하였다. 도시는 엔시라고 불리는 성직자나 루갈이라고 불리는 왕이 통치하였다.

다음은 수메르의 주요 도시들 위치순서대로(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나열한 것이다. 괄호 안은 현재의 도시 이름이다.

중소 도시:

[편집] 역사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은 선사시대의 우바이드기와 우루크기에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9세기경 초기 왕조 시대부터 역사적 기록들이 드물게 발견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26세기라가시기부터는 많은 자료들이 발견되고 있다. 고대 수메르는 기원전 24세기아카드 제국이 들어서면서 막을 내린다. 이후 구티인 지배 시기를 지나, 기원전 22세기 "수메르 부흥기"를 맞았다가, 20세기경에 아모리인이 침입한다. 아모리인의 이신 왕조는 기원전 1730년, 메소포타미아바빌로니아 지배하에 들어갈 때까지 유지된다.

[편집] 우바이드기

우바이드기(期) 동안에 특징적인 양식을 갖는 양직의 도기류들이 메소포타미아페르시아만 영역에 분포되고 있다. 당시 수메르인의 종교적 중심지는 에리두였으나, 인근의 도시인 우루크가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에리두를 추월하게 된다. 고고학적으로 우바이드기에서 우루크기로의 이동은 느린 물레에서 만들어진 채색 토기에서, 빠른 물레에서 양산하여 만든 비채색 토기로 바뀌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제4우바이드기에서 초기우루크기로의 이러한 변화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대략 기원전 4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편집] 우루크기

우루크기 (기원전 4500년~3100년)에 이르러, 대량의 물품이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운하와 수로를 통해서 거래되면서, 거대한 신전중심 도시들이 많이 세워졌고, 집권화된 관료층이 전문화된 일꾼들을 고용하였다. 이 시기에 노예 제도가 시작되었다는 많은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많은 공예품과 우루크의 식민지들이, 터키의 타우루스 산맥과, 지중해 서안, 이란 중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수메르 상인들과, 이민자들에 의해서 우루크기의 문명은 모든 주변세력에게 영향을 미쳤고, 점차 주변세력들도 경제적으로네 문화적으로 비교될 만큼 성장하였다. 그러나 수메르의 도시들은 먼 거리의 식민지를 무력으로 제압할 만한 군사력은 갖추지 못했다.

우루크기의 끝은 기원전 3200년~2900년 경의 기후 변화 시기와 일치한다. 이 시기에 홀로세 최적기후(Holocene climatic optimum)라고 불리는 따뜻하고 습도가 높은 기후가 끝나고, 건조한 기후가 지속되었다.

역사적 기록들은 대체로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루갈안네문두(Lugal-Anne-Mundu)와 같은 왕은 지중해, 타우루스, 자그로스까지 영역을 넓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보다 조금 전에, 에리두 문화가 우루크 문화로 넘어가는 역사적 과정의 신화와 관련되어 있는 엔메카르길가메시와 같은 왕들도 넓은 지역을 통치하였다.

[편집] 초기 왕조

고대 수메르의 왕들의 목록이 초기 왕조들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많은 고대 왕명표와 마찬가지로, 전설적인 이름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목록에서 다른 문서에서 찾을 수 있는 첫번째 왕은 에타나(Etana)로, 키시의 첫번째 왕조의 13번째 왕이다.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첫번째 왕은 키시엔메바라게시(Enmebaragesi)로 왕조의 22번째 왕이자, 끝에서 두번째 왕이며,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도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당시 패권이 키시에서 우루크로 넘어갔던 것으로 미루어, 길가메시우루크의 전설적인 왕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움마의 제사장-왕, 루갈자게시(Lugal-Zage-Si)는 라가시 왕조를 전복시키고, 우루크를 정복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고, 페르시아 만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그는 솀어족아카드사르곤[5]이 등장하기 이전의 마지막 수메르인 왕이었다.

[편집] 라가시 왕조

라가시 왕조는 많은 유적들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중 기록상 최초의 제국은 에안나툼의 제국으로, 그는 수메르의 키시, 우루크, 우르, 라르사 등 모든 도시들 실질적으로 지배하였고, 경쟁 도시였던 움마로 부터는 조공을 받았다. 또한, 그의 영토는 페르시아 만을 따라 엘람의 일부까지 미쳤다. 그는 통치를 위하여 공포(terror)정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된 독수리 석비에서 적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편집] 아카드 왕조

솀어족아카드어기원전 2800년경 부터 사용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기원전 2500년경 부터는 완전히 고대 아카드어로만 씌어진 책을 찾을 수도 있다. 고대 아카드어가 가장 널리 사용된 기간은 사르곤왕 때에(기원전 2350년~2330년) 경이지만, 그 기간에도 대부분의 행정관련 서판에서는 서기들이 주로 사용하던 수메르어로 씌어져 있다. 겔브(Gelb)와 베스텐홀츠(Westenholz)는 세가지 고대아카드어 방언--사르곤이전, 사르곤시대와 아가데지방, 우르 제3 왕조기--을 구별해 냈다.

아카드어수메르어는 대략 1000년정도 (기원전 2800년~1800년) 지속되다가 결국에는 수메르어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소르킬드 야콥슨(Thorkild Jacobsen)은 사르곤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의 역사적 연속성의 단절이 거의 없다고 보고, 솀어족수메르어의 충돌이 너무 많이 강조되었다고 주장한다.[6] 그러나, 적어도 사르곤엘람을 정복했을 때 엘람인들에게 아카드어를 잠시동안이나마 강요했던 것은 분명하다.

[편집] 구티족 지배

아카드 제국이 구티족에 의해 무너진 뒤, 새로운 수메르의 지도자, 라가시구데아(Gudea)가 부흥하기 시작하였고, 예술이 발달하고, 사르곤을 따라 신권 정치를 표방하였다.

[편집] 수메르 부흥기

그 후로, 우르-남무 왕, 슐기 왕 등의 우르 제3 왕조가 북부 메소포타미아 까지 영향력을 미치면서 마지막 수메르 부흥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미 수메르 지역은 아모리족이 대거 유입되면서 솀어족의 성격이 더욱 진해져 있었다. 아모리족은 후에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한다. 중세에 라틴어가 계속해서 사용되었던 것 처럼, 설형문자가 계속해서 쓰이는 동안에는 수메르어도 여전히 학교에서 종교적 언어로 가르쳐졌다.

생태학적으로는, 수메르 땅의 염분의 증가로 인하여 농업 생산력이 감소하였다. 농업 용수의 증발량이 많아 지면서 토양에 녹아있는 염분이 증가한 것이 농업을 어렵게 만들었다. 기원전 2000년경 부터는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여, 규모가 작은 도시 부터 서서히 수메르 문화가 와해되어 간다.

[편집] 쇠망

엘람인의 침략과, 이비-신 지배 하(기원전 2004년)에서의 약탈 이후, 수메르는 다시 아모리 족의 지배하여 들어간다.(이 때 청동기시대로 접어든다.) 기원전 20세기~18세기의 아모리족 도시국가는 수메르의 왕명 목록에 "이신 왕조"로 기록되어 있고, 기원전 1730년 함무라비왕의 바빌로니아로 넘어간다.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토양의 염분 증가로 인한, 남부 이라크 지방으로부터 북부 지방으로 의 인구이동 시기와 일치한다. 이 지방에서 토양 염분 증가 문제는 아주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경작된 토지에 배수가 잘 되지 않은 상황에서, 건조한 기후로 인한 수분의 증발은 토양 속에 소금 결정을 축적시키고, 결국은 수확량을 결정적으로 줄어들게 만들었다. 아카드 왕조우르 제3 왕조 동안, 보다 염분에 더 강한 보리를 많이 경작하기 시작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하여, 기원전 2100년~1700년 사이 인구는 거의 3/5로 줄어들었다.[7]

 

1. 성씨(姓氏)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한반도(韓半島)에 세워지기 전에는 한반도 이곳저곳에서 쓰는 언어(言語)가 가지각색이었지요. 서북지방, 중부지방, 서남지방, 동남지방, 제주도를 비롯한 남해안 등으로 서로 지역에 따라 달리 사용하였지요. 그러다가, 기원전 100년 경부터 즉, 지금으로부터 2100 ~ 2000년전 무렵에 지구에 대격변(大激變)이 일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곳저곳에서 민족들이 이동하기 시작했지요. 먼저 만주(滿洲)나 연해주(沿海洲) 지역의 민족들이 남하(南下)하기 시작하여, 점차 그 물결은 중국 내륙으로 파급(波及)되고, 그와 함께 한반도 전역(全域)에서도 민족대이동(民族大移動)이 일어났지요. 이는 일본 열도에서도 마찬가지로서, 쿠슈(九州)에 있던 왜(倭) 왕국이 무너짐과 동시에, 쿠슈에 있던 귀족들은 동쪽의 혼슈(本州)지방으로 동진(東進)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한반도에서는 만주와 서북지방의 귀족이 남하하여 지금의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으로 들어갔지요. 그러나 그 지역은 이미 가야국(伽倻國)과 마한국(馬韓國)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지구 대격변으로 인한 민족 대이동에는 속수무책, 그 결과 과거의 왕국은 힘을 잃고, 그 대신 한강 유역부터 동진(東進)하면서 이주자(移住者)들이 세운 새로운 왕국들이 속속 탄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왕국은 사실 지금과는 달리 조그만 읍락국가(邑落國家)로서, 각 고을마다 왕국(王國)이 다른 형편이었지요.

이 때 가장 먼저 성씨(姓氏)를 사용한 종족은 한문자(漢文字)의 원형(原形)을 사용하던 부여족(夫餘族)이었지요. 곧 나라 이름을 문자(文字)로서 밝힌 부족이 한반도 최초의 성씨(姓氏) 국가(國家)로 남게 되었답니다. 한자(漢字)의 승리이자, 진(秦)나라의 공(功)도 없지 않아 있었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전에 있었던 나라들이 가문(家門)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지요. 가령 고령(高靈)의 김씨(金氏)는 부여족이 남하하기 전부터의 한반도 토박이이지만, 성씨를 사용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서야 쇠 '금' 또는 '김'으로 개종(改宗)하였답니다. 고령(高靈)이 망하면서 경주(慶州)와 김해(金海)로 편입(編入)되었지요.(1) 같은 계열의 한씨(韓氏)는 '가야' 또는 '가락'을 한자로 바꾸면서 현재의 음(音)처럼 '한'이 되었지요. 이와 비슷한 사례(事例)는 엄청 많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반도의 토박이들도 자신들의 언어를 고집하다가 결국 한자로 기록되면서, 각자 달리 자신들의 음(音)에 맞추어 한자로 표기한 것이지요. 성씨를 표기하게된 원인 중에는 중국에서도 한반도로 이주하는 귀족들의 영향이 컸습니다. 오히려 이들 중국이나 만주에서 넘어온 귀족(貴族)들이 사용하는 수많은 성씨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過言)은 아닙니다.

여하튼 새로운 이주자들에게 밀리면서 한반도의 일부 귀족들은 일본 열도로 건너갔지요. 모두 자신들의 가문(家門)인 성씨(姓氏)를 가슴에 품고 말이지요. 곧 한 부족의 구성원은 모두 같은 성씨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어찌보면 각 읍락국가 별로 나름대로의 성씨를 달리 갖고있었지만, 점차 한문(漢文)이 넓게 사용되면서 간추려지고, 또한 전쟁으로 인한 상호(相互) 편입(編入)이 이루어지면서, 지금처럼 간추려지게 되었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현재처럼 성씨를 사용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로지 왕족(王族)과 귀족(貴族)들만이 소유한 것으로서, 달리 말하면, 지금의 성씨는 곧 수많은 전쟁을 통하여 획득한 전리품(戰利品)이나 다름없었으며, 곧 자기 부족(部族)과 가문(家門)의 과시(誇示)이자, 영광(榮光)이었지요. 현재의 성씨(姓氏)는 2000년간 한반도 부족(部族)의 역사기록(歷史記錄)이자,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證人)이며, 그 모두 한자(漢字)로 표기(表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1999-06-19 발표)



(1)여기에서 말하는 고령(高靈)의 김씨(金氏)는 신라 박혁거세 이전의 청동기시대의 종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령 김씨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2. 단군(檀君)

단군(檀君), 한민족(韓民族)에게 매우 친숙한 이 명칭은 그저 단순하게 신화(神話)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단군(檀君)은 고조선(古朝鮮) 당시에 군왕(君王)에 대한 존칭으로서, 나라의 제사(祭祀)를 드리는 제사장(祭司長)이라는 의미에서 '단(亶, 檀, 壇)'이라고 붙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단(Dan)'이라는 존칭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의 저쪽 끝인 아일랜드(Ireland) 신화(神話)에서도 가장 평화스러운 신성(神聖)한 종족(種族)으로 알려진 '단안(Danann)'이라는 여신(女神)이자 여왕(女王)의 부하들이 등장하는데, 이 '단안'이 바로 단(亶)의 왕비(王妃)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Canann) 지역에서는 '단(Dan)'이라는 히브리인(Hebrew)이 나라를 다스린 곳을 단(Dan)이라고 이름붙이고, 그리이스에서도 초기의 왕들은 모두 '단(Dan)'을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이 모두 성경(聖經)이 나오기 이전의 일들입니다. 그러니까 유럽에서 단(Dan), 돈(Don)은 이 '단(亶, 檀, Dan)'에서 비롯되었으며, '담(Damm, Madam)'은 '단안(Danann)'에 비하여 낮은 여귀족(女貴族)에 대한 존칭으로서, 여성을 뜻하는 우리말의 '암'과 같은 어원(語原)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이같은 어휘(語彙)는 고인돌을 비롯한 거석문화권(巨石文化圈)에서는 모두 비슷한 존칭(尊稱)이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단(亶, 檀, 壇, 땅)이 지상(地上)을 다스리는 지엄한 존재를 부르는 말이었고, 하늘을 다스리는 신(神)은 환(桓, 하늘)이었는데, 나중에는 같은 음의 한(韓, 漢, 汗)으로 바뀌어 군왕(君王)의 종족 또는 군왕(君王)이 다스리는 나라 이름으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가나안 지역과 그리이스를 빼놓고는 모두 신(神)과 같은 존재를 '단(Dan)'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마디로 상고시대(上古時代)에는 단군(檀君)들이 유라시아 전역을 통치하였는데, 동쪽의 아시아에는 남자인 단(Dan)이, 그리고 서쪽의 유럽에는 여자인 단안(Danann)이 통치하게끔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말미암아 거석문화는 막을 내리고 거석문화를 바탕으로 동양에서는 진(秦), 서양에서는 그리이스, 로마에서 새로운 시대가 등장한 것이지요.
(1999-10-13 발표)





 

3. 영국인의 선조는 한국인 (Koreans are the Ancesters of English People)

영국(英國), 즉 잉글랜드(England), 웨일즈(Wales), 스코트랜드(Scotland), 그리고 아일랜드(Ireland)와 영국의 식민지(植民地)인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는 지금부터 4000년전 이상되는 과거에 아시아인(Asians)들이 서쪽의 죽음의 땅을 찾으러 갔다가 살게된 곳입니다. 선사시대(先史時代)에는 죽음이 또 하나의 '저세상(the other world)'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많은 아시아인들이 브리티쉬(British) 제도(諸島)로 이주(移住)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이 남긴 언어(言語)는 아직도 웨일즈 지방에 방언(方言)으로 남아있으며, 스코트랜드와 특히 아일랜드에서는 가장 분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즉 문장(文章) 마지막에 동사(動詞)가 따르는 우리 한글의 문법(文法)이 이들 웨일즈와 아일랜드 고어(古語)에 남아있으며, 또한 수많은 고인돌(Dolmens)과 거석유적(Megaliths)들은 대부분 아시아에서 이주한 비이커족(Beaker People)들이 만들었지요. 스토운헨지(Stonehenge)와 애브버리 둘레돌(Avebury Circle) 등 수많은 영국과 아일랜드 유적들은 대부분 아시아에서 이주한 비이커족이 남긴 것입니다. 그런데 비이커(beaker)라는 것은 바로 신의주(新義州)에서 평양(平壤) 사이에서 많이 출토되는 '미송리형 단지'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한반도(韓半島)의 많은 고인돌들은 이스라엘(Israel)과 요르단(Jordan), 러시아(Russia) 코카사스(Caucasas) 지방에서 발견된 고인돌들의 원형(元型)이며, 지중해(地中海)의 코르시카(Corsica, Corse) 섬에서는 돌널무덤(Cists)과 함께 우리나라의 개석식(蓋石式) 고인돌과 탁자식(卓子式) 고인돌이 발견됩니다. 또한 이같은 고인돌들은 피레네(Pyrenees) 산맥에서도 발견되면서, 프랑스와 그리고 브리티쉬 제도로 연결되지요. 그런데 유럽의 모든 대형 거석유적들은 모두 우리 한반도의 고인돌에서 파생(派生)된 것들입니다. 인도(India)의 고인돌은 한참 늦은 시기에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브리티쉬 제도의 둘레돌(環狀列石, Stone Circle)은 원래 스페인(Spain)과 포르투갈(Portugal)에서 건너간 한반도 고인돌 종족의 후손(後孫)들의 영향을 받아, 우리말로 '뫼'라고 부르는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에서 비롯된 구조입니다. 그러니 영국에서의 둘레돌이 얼마나 늦게 만들어졌는지 알만 하지요. 이 '뫼'라는 말은 영국에서 무어(Moor)라는 말로 남아있으며, 이 무어인(Moors)들이 바로 웨일즈 지방과 잉글랜드 서남쪽의 콘월(Cornwall) 지방, 그리고 아일랜드에 살던 아시아인들의 후손(後孫)입니다.(1)
(1999-10-18 발표, 2003-03-14 보충)



(1) 무어(moor)는 보드민무어(Bodmin Moor), 다트무어(Dart Moor), 엑스무어(Exmoor), 노스욬무어(North York Moor) 등 영국 중남부 지역의 황무지 고원지대를 일컫는 말인데, 그 원래의 뜻은 개활지(open land)로서, 평원에 솟은 언덕 정도로 여기면 적당하다. 이 고원지대에 크고작은 거석문화 유적지들이 지천으로 산재하고 있는데, 현재는 일년내내 거센 비바람을 맞아 기후가 최악으로서 아무도 살지못하는 지역이지만 청동기와 철기시대에는 나무와 꽃이 피고 샘이 솟는 기후좋은 지역이었다는 점이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 이런 점은 특히 원시고원족(일명 하이랜더, Highlander)이 거주하였던 스코틀랜드 고원지대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지금의 무어인의 명칭 자체는 고아시아족 계통이지만 대개의 잉글리쉬인들이 그렇듯이 영국을 점령한 침략자들은 기존의 거주민들의 문화를 통째로 훔쳐 자신의 것으로 도용하였다는 역사적인 증거들이 많다. 영국해안에는 해안단구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필자가 보기에 원래 잉글랜드는 바다 지역으로서, 영국제도 전체가 지반이 떠오르면서 바다가 육지로 바뀐 지역이어서 처음부터 주인이 없던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지층변동을 수만년전 또는 수억년전이라 말한 것은 전혀 근거없이 말한 것으로 완전히 엉터리 학설이다. 영국 고고학을 보면 거석문화를 전후하여 이같은 엉터리들이 지천으로 깔려있는데, 지금으로서 이것들을 제대로 증명하라 하면 제대로 증명될 것이 거의 없다해도 과언은 절대 아니다.

(2) 이처럼 필자가 보기에 기원전후의 영국역사는 엄청난 오류들이 많이 있다. 영국 역사는 그 근간을 로마의 기록에서 찾고 나머지는 아일랜드 수사들의 기록에서 인용하는 것으로 알고있다. 그런데 분명 고고학적인 자료에서는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의 철기 문화 이후인데, 이것이 뒤죽박죽된 경우들이 많아 도무지 종 잡을수 없게끔 되어 있다. 즉 숨기는 것이 많다는 말인데, 영국이 말하는 자신들의 역사에서는 로마가 물러간 이후에 색슨족이 침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필자의 잘못 판단도 물론 있지만 실상 그다지 틀린 것은 아니다. 기원전후 영국은 한마디로 개판이어서, 제멋대로 조작하여도 그것을 입증 또는 반박할 만한 근거자료가 희박하다. 워낙 아일랜드는 북유럽 문화의 전통있는 근원지로 알려져 있었으며, 그에 반해 영국은 일자 무식한 해적들이 사는 곳으로, 살인강도와 도둑질을 본업으로 삼는 부족들이 많았다. 전통적으로 영국의 재력은 오로지 정보원을 많이 두어 국민을 압제하고 착취하는 식민통치에서 나오는데, 과거 영국에서 중국 도자기의 보유는 곧 부유한 재력을 뜻하는 것으로, 중국 도자기의 밀무역과 아시아에서의 해적질에서 근대 초기 영국의 자본이 형성되었다.

(3) 또한 색슨족(Saxon)은 대개 독일의 작센(Sachsen) 지방에서 건너온 종족으로, 영국에서 거석문화 이후에 영국으로 들어온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작센은 곧 우랄산맥 주변에 퍼져있던 용맹한 무사 코작(Kozak)인들과 인도 북부를 점령했던 무사귀족 사카(Saka)인들과 상통하는 점이 있는데, 코작과 사카는 터어키(색륜-탁륜-튜르크-토이기)족과 함께 근본이 아시아족으로서, 그 근간이 동아시아의 색륜족으로 알려져 있다. 색륜은 곧 한반도 북방 동이족으로서, 색에서 작 또는 탁으로 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잉글랜드의 이주민이었던 앵글로 색슨족은 단군시대에 만주 일대에서 서로 앙숙이었던 앙골(앙骨, Angol)과 숙신(肅愼, Sukshin, Jushen)과 발음이 통하여 색슨족의 어원이 숙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에서 라이프찌히(Leipzig) 근처의 할(Halle, 또는 쌀, Saale)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엘베(Elbe)강 유역의 작센 지방 또한 그 대부분 지역이 원래 바다이었다.





 

4. 동이족(東夷族)의 고인돌(Dolmens of DongEes)

우리나라에는 고인돌이 참으로 많고 많습니다. 남북한 할것없이 나즈막한 언덕과 평지에는 크고작은 고인돌이 수없이 산재하고 있는데, 이러한 고인돌이 바로 역사시대 이전의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런데 남북한의 한반도와 현재 중국 땅에 속해있는 요녕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의 동북삼성(東北三省)은 원래 한반도와 같은 종족인 동이족(東夷族)들의 근거지이었으며, 고인돌이 바로 동이족들이 만들었던 돌무덤입니다. 원래 동이족 출신인 진시황(秦始皇)이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우선 동이족(夫餘族, 현재 길림성 지역)의 한자(漢字)를 차용하여 나라의 글로 삼았으며, 책력(冊曆) 또한 동이족에게서 차용하여 수없이 교정하면서, 그들의 책력으로 바꾸었지요. 그리고는 동이족들의 모든 역사와 증거물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과거의 책들을 보지못하게 금지시켰습니다. 산동반도(山東半島) 또한 동이족 지역이었는데, 진시황에게 가장 처참하게 당한 곳이 이 산동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산동지역에서는 고인돌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요. (1) 나머지 요동반도를 비롯하여 길림성 지역에는 아직도 수많은 고인돌들이 남아있습니다.

우습지요. 이런 찬란한 역사를 갖고있는 동이족은 사실 처음에는 그런 진시황을 우습게 알았지요. 오로지 과거의 명성에만 매달리기 바쁜 처지라 새롭게 등장하는 새 물결을 미쳐 눈치채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엄청난 사실이 숨어있었습니다. 바로 천지개벽(天地開闢)이지요. 바다가 땅으로 바뀌고 땅이 바다로 바뀌는 엄청난 변혁(變革)을 겪고난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방랑생활(放浪生活)을 시작한 때가 천지개벽 이후의 일입니다. 그 때가 바로 중국대륙에서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이지요. 이 이후에는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주로 만리장성(萬里長城) 동쪽의 요서지방(遼西地方)에서부터 점차 새로운 청동기(靑銅器)가 들여오면서 고인돌을 만들던 동이족들도 중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지요. 그 전까지는 거꾸로 모든 것이 동이족에서 비롯하였지만, 천지개벽 이후에는 오히려 야만족으로 강등되고 뿔뿔이 배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유랑생활을 시작하였지요. 사실 동이족은 원래 해양족(海洋族) 출신이었거든요.

천지개벽 이전에도 동이족들은 서쪽으로 항해하면서 베트남(Vietnam)을 거쳐 인도(India) 북부, 그리고 팔레스타인(Palestine) 지역, 그 다음에 이디오피아(Ethiopia), 그리고는 지중해(地中海)에서 위력을 과시하였습니다. 이스라엘(Israel)을 비롯하여 요르단(Jordan), 그리고 터어키(Turkey) 중부, 러시아(Russia) 남부의 흑해(黑海) 연안 까프까즈 지방까지 배를 통하여 그들의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중해 연안의 유럽인(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동부)들의 원조들은 이 동이족의 고인돌에서부터 영향을 받아 점차 더욱 커다란 고인돌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곧이어 대규모의 거석건축물들을 만들기 시작하였지요. 그러나 지중해로 이주한 일부 동이족들은 알프스(Alps) 계곡을 지나 독일(Germany) 남부로 들어가 또 다른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가 현재의 영국(Scotland)과 아일랜드(Ireland)로 건너가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지요. 그러니 브리튼(Britain) 섬에서의 둘레돌(環狀列石, Stone Circle)은 우선 이베리아(Iberia) 반도인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다시 동이족의 영향권에 들어갔습니다.

이렇듯이 최소한 지금부터 2500년 이전에는 우리의 한반도(韓半島)와 만주(滿洲)지역은 전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전세계의 고인돌과 거석문화가 사실 한반도에서 시작되었으니까요. 황해도(黃海道) 황주(黃州) 일대는 이 고인돌 시대에 가장 중심되는 지역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고인돌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곳이지요. 평양일대는 주로 천지개벽 이후에 확산되었지요. 사실 한강일대는 이 고인돌 시대에 가장 애매모호한 곳입니다. 분명 황주에서 고인돌 문화가 일어날 때 한강(漢江) 유역에서는 또 다른 기존의 나라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고인돌 문화에 밀려 고령(高靈)을 거쳐 김해(金海)와 부산(釜山)으로 이주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고인돌 문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봉토분(封土墳) 문화를 개척하였지요. 그러니 고령을 비롯한 김해 지방은 전세계 봉토분의 출발지인 셈이지요. 그러나 황주에서 비롯한 고인돌이 요동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중국 내륙의 문화와 충돌하여 규모가 커졌으며, 여기에서 김해를 비롯한 남해안 세력과 함께 발길을 해외로 돌린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러한 봉토분조차 고인돌과 돌무지무덤과 함께 지중해를 거쳐 서쪽으로 서쪽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보여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프랑스 브르따뉴(Bretagne) 지방입니다. 비록 나중에는 브리튼 섬에서 쫓겨간 브리튼족들이 더욱 거석문화를 확대시키고 성장시켰지만, 원래에는 프랑스 동남부의 지중해 연안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세계의 고인돌과 거석문화가 몽땅 한반도와 요동반도에서 비롯한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곳이 있었지요. 이 한반도와 요동반도의 고인돌로서는 전세계의 모든 거석문화가 일목요연하게 해명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지금은 얼어붙은 북극(北極) 근처의 카라해(Kara) 어디쯤에 있는 빙판(氷板) 속에 그 열쇠를 풀어줄 흔적들이 남아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2000-01-28 발표)



(1)산동성 태산(太山) 근처의 제(齊) 나라 지역에는 과거에 여러 기의 탁자식 고인돌들이 남아있었다고 전하는데, 모택동 시절에 문화혁명(文化革命)을 치르면서 모택동의 홍위병들에 의하여 모조리 파괴되어, 현재 산동반도에 남아있는 고인돌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5. 고대 역사의 심각한 오류 (Fatal Errors in Ancient History)

현재까지 일반에게 알려져 있고 학교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가르치고 있는 기원전의 선사시대와 고대의 역사는 그 대부분 유럽의 역사학계에서 제기한 학설을 기초로 한 것들입니다. 특히 방사성탄소(放射性炭素) 등 고고학적 유물과 흔적을 통하여 그 대강의 연대를 측정하였다는 절대연대는 사실 그 어느 누구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검증(檢證)할 수 없는 가장 불확실한 연대이지만, 그렇다고 확실하게 부정할 수도 없는 연대로서, 그저 각 나라에서 주장하는 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현재 우리가 알고 배우고있는 고대와 선사시대의 연대들은 가장 분명한 절대연대(絶對年代)라고 하지만, 오히려 가장 부정확한 추정연대(推定年代)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대연대가 나오게 된 동기는 사실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 산재한 고인돌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언제 이러한 고인돌을 만들었는지 매우 궁금했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이집트에 있는 거대한 초대형 피라미드가 유럽 학계에 알려지면서 영국과 프랑스 학자들은 우선 이집트 고대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기 시작하였고, 당연히 고인돌의 연대는 그 이전으로 여겼지요. 이러한 과정에서 지중해를 비롯한 유럽의 고대와 선사시대의 연대가 성립되었으며, 이 이집트 왕조의 연대에 맞추어 다른 지역의 연대들이 차츰차츰 정해지기 시작하였지요. 물론 이 연대를 성립하는 가장 중추적인 역할은 당연히 조상 대대로 고인돌을 숭배하였던 영국의 학자들이었지요.

그래서 현재 알려져 있는 고인돌의 연대는 영국에서 처음으로 주장되었으며, 그 연대를 대략 기원전 2000년에서 3000년 정도로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스페인의 어느 거석 묘지에서 기원전 4000년경이라는 엄청난 측정 결과가 나오게 되었는데, 물론 이 연대를 가장 반겼던 이들은 영국 학자들이었지요. 그 이후에는 고인돌이 만들어지던 시기를 기원전 2000년에서 4000년경으로 확립시키고 이를 보급시켰지요. 그런데 이렇게 억지로 때려 맞추다 보니 프랑스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프랑스 서해안의 브르따뉴(Bretagne) 지방에 널려진 고인돌을 비롯한 초대형 거석유적들이 전설에서는 그저 기원 전후의 골(Gauls)족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영국과 보조를 맞추어 이제는 골족이 아닌 그 한참 이전인 기원전 20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고대 선사시대 역사에서 무려 2000년이라는 가공할 시간적 공백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또한 여기에 맞추다 보니 유럽의 고인돌이 외계인(外界人)이 만든 유적이라고 까지 말하게 되었는데, 더욱 가관인 것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엉터리 작가들이 여기에 상상으로 완벽하게 포장하여 그러한 거석 유적들이 1만년전 또는 2만년전에 만들어졌다는 등, 아예 선사의 역사를 상상과 허구로 멋지게 꾸며 놓았지요. 그나마 양심있는 유럽 학자들은 자신들의 고인돌이 흑해(黑海) 연안의 코카사스(Caucasus, Kavkaz) 지방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즉 유럽의 백인종(白人種)의 근본(根本)과 유럽 역사의 출발을 카프카즈(코카사스) 지방에서 찾고있는 것이지요.(3)

그런데 이렇게 줄기차게 코카사스 지방을 바라보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유럽 왕족의 전통 속에는 항상 동쪽과 동방(東方), 동양(東洋)이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자신들의 조상과 그 뿌리 또한 동양이었다는 오래된 전설과 믿음 때문입니다. 제3제국을 꿈꾸었던 히틀러와 그의 측근 히물러가 추구하였던 새로운 원동력은 우스꽝스럽게도 선사시대부터 전해지는 신비스러운 절대 왕권유지의 비결과 도구이었으며, 그 혈통을 아리안족(Arians, Aras)으로 보았고, 그 흔적을 찾느라고 인도의 곳곳을 헤집고 다녔지요. 나찌(Nazis)의 상징인 네 개의 갈고리(Swastica)는 십자가(Cross)의 원형(原型)이며, 절대 왕권의 상징이었는데, 한국과 일본, 중국, 인도 등지의 동양에서는 이를 주로 '卍'자로 표현하였지요. 이 '卍'자는 사실 태극(太極)의 또 다른 상징적 무늬입니다. 즉 사방(四方)으로 굽이쳐 뻗어가는 사태극(四太極)(1)이라고나 할까요. 히물러를 비롯하여 유럽의 신비주의자(神秘主義者)들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성궤(聖櫃) 또한 돌로 짜여진 빛나는 석관(石棺)을 말합니다. 아마도 빛나는 벽옥(碧玉)으로 만든 석관(石棺)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러한 벽옥제(碧玉製) 석관(石棺)은 아직 발견된 바가 없지만, 한(漢)나라 시대에는 석관 대신에 주검을 감싸는 옥의(玉衣)를 만들었는데, 이 옥의는 주검을 감싸는 형태만 남아있고 그 안의 시신은 건드리는 즉시 먼지로 변하기 때문에 바로 이런 옥의를 두고 서양인들이 성궤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돌로 만든 관을 사용하였던 종족은 오로지 동이족(東夷族)으로서, 요동(遼東)과 길림(吉林), 산동(山東), 남북한의 한반도(韓半島), 쿠슈(九州), 오끼나와(沖繩)에서만 발견되는데, 그 중심되는 지역이 바로 한반도입니다.(2)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 최고의 전설인 아서(Arthur) 왕과 마법사 멀린(Merlin) 이야기는 스토운헨지(Stonehenge)와 고인돌(Dolmen)에 관련된 전설이며, 영국에서의 절대적인 왕권 유지의 도구는 단순한 돌덩어리와 검(劍)이었습니다. 영국의 국회의사당과 유명한 교회 안에는 이와 비슷한 돌이나 직검(直劍)에 관한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은 물론이고,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직검의 원형(原型)인 돌단검(石短劍, 磨製石劍)이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또한 진시황(秦始皇)의 무덤에서 출토된 보검(寶劍)도 직인검(直刃劍)이 아닌 곡인검(曲刃劍)으로서, 한반도와 요동지역에서만 출토되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에서 변형된 것입니다. 또한 이 비파형동검도 요동(遼東)지역이 아닌 남한에서 출토되는 돌단검에서 변형된 것으로, 돌단검의 검날(劍身)과 검자루(劍把)가 함께 이어지고 여기에 다시 또 다른 검자루가 덧붙여지면서 만들어진 형태입니다. 그러니까 요동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단검은 바로 남한의 남해안 지역에서 먼저 만들어지고, 그 후에 요동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코카사스와 그리이스에서 출토된 청동검들은 남해안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단검의 변형으로, 입사귀와 비슷한 엽인검(葉刃劍)이며, 영국과 유럽에서 출토되는 직인검은 남한에서 만들어진 돌단검과 형태가 비슷합니다. 이를 보고 일제시대에 일본의 어느 유명한 고고학자(考古學者)는 유럽의 검을 모방해서 우리나라의 돌단검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였는데, 남한의 고인돌에서 돌단검들이 엄청나게 출토되면서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분명 고인돌과 그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통하여 보면 유럽의 고인돌과 그 유물들은 우리의 한반도에서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 학자들, 그 가운데 특히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자신들이 거창하게 세워놓은 절대연대(絶對年代)와 그 연대기(年代記)를 나열하면서 오히려 거꾸로 유럽에서 한반도로 전파되었다는 주장을 합니다. 즉 자신들이 만든 연대에서는 분명 2000년이라는 엄청난 시간 차이가 있거든요. 그들의 말 대로라면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는 과거에 갑자기 아인슈타인이 말한 시간이동(時間移動)이 생겨서 그 모두들 타임머신(TimeMachine)을 타고 왔다갔다 했다는 말이지요. 이러자 북한에서는 근간에 이같은 유럽식 절대연대 측정 붐이 조성되어 영국이 만든 절대연대와 비슷하게 맞추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북한과 남한에서는 고인돌 제작연대가 서로 2000년 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2000년의 차이, 이 차이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분명 어딘가에서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은 분명합니다. 근 200년간 계속 이렇게 단추를 잘못 끼우다가 지금와서는 그걸 도저히 어찌 고칠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영국인들이 자랑삼아왔던 전 세계의 역사(歷史) 연대기(年代記) 편년(編年)이 몽땅 잘못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문제점과 잘못이 드러난 이상 한시빨리 시정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오류를 안다 하더라도 영국인들 스스로 그 오류를 자인(自認)해야 되는데, 지금까지 쌓아놓은 공든 탑이 헛수고로 돌아가는 마당에 그저 앉아서 자신들의 치욕을 반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분명 우리가 알고있는 모든 역사에는 엄청난 오류(誤謬)가 있으며, 그 속에는 고의적으로 꾸며놓는 엄청난 음모(陰謀)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2000-09-17 발표, 2003-01-23 수정, 2004-08-06 주석 보충)



(1) 실상 사태극(四太極)이란 말은 없으며, 그 대신 윷무늬(柶板文)를 말한다고 할 수 있는데, 십자환주형(十字環周形)의 윷 무늬 자체는 옛 하도(舊 河圖) 이전의 것으로서, 환역(桓易, 易)을 말하는 것이어서, '卍'자 무늬는 음양(陰陽) 태극(太極)의 변화(易)를 사시사방(四時四方)에 맞추어 좀더 세분(細分)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2) 오끼나와(沖繩)는 유구(琉球)와 나패(那覇)가 합쳐진 말로, 유구(琉球)의 현지발음은 '유쿠', '오끼'로서 옥(玉)을 말하고, 나패(那覇)의 현지 발음은 '나하', '나와'로서 곧 나라(國)를 말한 것으로, 오끼나와의 원래 발음은 한글의 옥나라(玉國)라고 할 수 있다. 오끼나와 주둔 미군들에 의하여 시작하여 미국인들에게 아주 좋다는 뜻의 속어로 쓰이는 '오키도키(Okidoki)'는 한글의 옥도끼(玉斧, Okdoki)를 말한 것으로, 오끼나와의 원주민들 가운데 한반도 이주민들이 많아 한글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오끼나와에서는 무덤을 '거북이'라는 뜻으로 부르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고인돌(支石)을 거북바위, 즉 구암(龜岩)이라 말하는 것과 상통하며, 괌(Guam)섬도 원래 구암(龜岩)에서 비롯한 말로 볼 수 있다.

(3) 아주 오래된 전설과 기록에 의하면 지구는 아시아 대륙에만 해가 떠 있었고, 나머지 시베리아, 유럽, 아프리카 지역에는 해가 뜨지 않아 밤만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의 형질에 벰파이어, 늑대인간 등의 선천적인 음기가 잠재하게 되었으며, 그후 유럽이 지금처럼 해가 뜨면서 주로 카프카즈 지역에서 온 인류와 아시아의 극동과 이란 지역에서 온 우수 혈통의 인종이 합쳐져 현재의 유럽인종과 유럽 문화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6. 한반도의 검(劍)은 전 세계 모든 검(劍)의 조형(祖形)

한반도에서 고인돌이 만들어지던 상고시대(上古時代)에는 진흙을 빚어 토기를 만들었으며, 돌을 곱게 다듬어 돌단검을 만들었다. 이러한 돌단검은 세석기(細石器)의 좀돌날을 끼웠던 뼈칼집에서 비롯하여, 돌활촉과 돌창촉과 함께 짐승의 정강이 뼈를 갈아만든 골검(骨劍)으로 발전하였는데, 두만강(豆滿江) 유역의 연길(延吉, Yenji) 지방과 그 근처의 연해주(沿海州) 지방의 구덩널(土壙墓)에서는 이같은 골검들이 자루가 있는 것(有柄式)과 없는 것(有莖式) 등 다양한 모양으로 출토된다. 이 때를 전후하여 고인돌에서 돌단검이 출토되기 시작하는데, 자루달린 돌단검은 대체로 황주 일대에서 시작되어 남한 지역에서 확산된 것으로 여겨진다.

돌단검은 이제까지 일본 학자가 주장한 대로 '마제석검(磨製石劍)'으로 불리웠는데, 돌화살촉에서는 돌을 쪼개서 만든 깬돌화살촉(打製石鏃)과 다듬어만든 간돌화살촉(磨製石鏃)의 구분이 분명하다. 그러나 돌검에서는 북한 지방에서만 극소수 깬돌창검(打製石槍劍)이 출토되고 나머지는 모두 간돌검(磨製石劍)으로, 사실 돌검의 대부분이 간돌검이라 깬돌검과 간돌검이라는 구분이 적합치않다. 그래서 필자는 간돌검(磨製石劍)이라는 용어 대신에 '돌검(石劍)'이나 '돌단검(石短劍)'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제까지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일본에서 출토된 모든 돌단검들을 종합하여 보면, 그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또한 고인돌 시대에 국한되어 있고, 중기 이후에는 청동검과 같이 출토되거나 청동검만 출토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고인돌 이후 커다랗게 뫼(封土墳)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돌검과 청동검은 사라지고 그 대신 쇠검(鐵劍)이 등장하게 된다.

한반도와 요동반도에서 출토되는 모든 돌검을 종합하여 보면 한강 유역을 경계로 하여 크게 남북으로 구분되는데, 북쪽에는 거의 전부 검(劍)과 창(槍)이 복합되어 있는 것으로, 검뿌리라고도 말하는 슴베(莖部)만 달려있는 슴베달린(有莖式) 돌창검이며, 남쪽에서는 거의 대부분 손잡이(柄部, 劍把)가 달려있는 자루달린(有柄式) 돌단검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루달린 돌단검도 남한의 각 지역에서 매우 다양한 모양들이 출토되고 있어 그 흐름을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인데, 주로 한강(漢江) 하류에서 상류로, 그리고 낙동강(洛東江) 상류에서 하류로, 남한을 관통하여 대각선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거창(居昌) 무릉리(武陵里) 산포(山浦)에서 출토된 돌검은 아예 검마디(劍節, 칼날멈추개)가 부드럽게 다듬어지면서 검몸(劍身, 검날)과 검자루(劍把)가 이어져 검몸의 중간부분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비파형 검몸을 모여주게 된다. 여기에서 비롯하여 비파형동검의 모양이 나온 것으로 보여지는데, 남해안 지방과 요동지방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은 중국 오르도스(Ordos, 鄂爾多斯, 河套, 옛 綏遠省) 지방과 러시아의 카라숙(Karasuk) 지방의 청동검들의 모양에 비하여 앞선 시기의 모양을 보여준다. 이렇듯이 고대 한반도의 돌단검과 청동검들은 전 세계의 모든 검들의 조형을 보여주고 있어, 이런 점에서 전 세계 처음으로 검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곳이 한반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청동검들이 출토되는 중국 황하(黃河) 중상류의 오르도스(鄂爾多斯) 지방, 그리고 요서(遼西)의 내몽골(內蒙古) 지방에서는 요동과 남해안 지방의 것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에다 좀더 정교한 청동검들이 출토되는데, 그 모두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청동검과 돌검에서 변한 것이다. 특히 비파형동검에서 비롯한 좁은놋단검(細形銅劍)은 검몸(劍身)과 검자루(劍把), 그리고 마구리(劍把頭飾) 장식의 조립식(組立式) 구조를 갖추고있는데, 이러한 조립식 청동검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중국의 요녕성(遼寧省) 지역과 한반도(韓半島), 그리고 일본의 쿠슈(九州) 섬에서만 볼 수 있다. 전 세계 청동검의 모든 모양들은 대부분 하나로 이어진 구조(一鑄式)로서, 이러한 조립식 구조이거나 비파형동검에서 변화한 모습들이어서, 전 세계 모든 검들의 조형(祖形)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이족(東夷族) 지역에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과거 일본과 영국 학자들은 한반도의 검들이 모두 러시아 남부의 카라숙(Karasuk)과 오스트리아 중부의 할슈타트(Hallstatt) 지역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러한 가설(假說)에 맞추어 청동검을 모방하여 한반도의 돌검들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제까지 발표된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방법을 통한 절대연대는 그 진위여부를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유명한 보검인 월왕(越王) 구천(鳩淺)의 검과 진시황의 병마용갱(兵馬俑坑)에서 출토한 진시황(秦始皇) 보검(寶劍)은 일명 '도씨검(桃氏劍)'이라는 청동검과 같은 모양으로, 한반도 남북 여러 곳에서 이같은 도씨검들이 말기형 비파형동검과 함께 출토되어, 비파형동검에서 좁은놋단검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에 도씨검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일명 '안테나식(觸角式)'으로 말하는 쌍조형(雙鳥形) 마구리장식의 청동검은 돌검의 'T'자형과 누에고치형 마구리장식에서 변화한 것으로, 카라숙에서는 한반도의 조립식 구조를 하나로 연결하여 만들었다.

검(劍)은 가운데 등줄기(脊部)를 중심으로 하여 그 양쪽에 날(刃部)이 있는 것을 말하며, 칼(刀)은 한쪽에 날이 있는 것을 말하는데, 전투와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것은 칼이었으며, 검은 오로지 제의용(祭儀用)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인도의 무굴(Mugul) 제국에서는 반달 모양의 언월도(偃月刀)가 사용되었으며, 고대 유럽에서는 양날 직검(兩刃直劍)이 실제로 사용되어 한반도의 경우와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특히 '검(劍)'이라는 명칭은 단군(檀君) 왕검(王儉)이라는 명칭에서와 같이 신적(神的)인 군장(君長)을 뜻하고 있는데, 원래의 돌검은 이러한 신성(神聖)한 상징물(象徵物)로 의인화(擬人化)되어 검몸(劍身)에 검눈(劍眼)이 새겨져 있다. 이 검눈은 검몸에 길다랗게 두줄의 홈이 파여져 있는 것으로, 과거 일본 학자들은 이 두줄의 홈이 살상하면서 피가 쉽사리 빠질 수 있게끔 혈로(血路) 역활을 한다고 여겨서 피홈(血溝)으로 불러 왔었지만,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두개의 구멍이 새겨진 '눈돌(雙穴石器)'에서 볼 수 있듯이 매장자의 신분을 표시한 지석(誌石)의 일종으로 이러한 돌검이 껴묻거리로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방상시(方相氏, 또는 방상씨)' 장승(長生)에서 볼 수 있는 4개의 눈은 바로 이러한 검의 양쪽 면에 새겨진 4개의 검눈을 모아놓은 것으로서, 방상시 신(神)은 검(劍)의 또 다른 형태로 여길 수 있다. 주대(周代)에 방상시(方相氏)는 벼슬 관직으로서, 주검을 매장할 때에 곰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황금으로 만든 4개의 눈을 달고, 무덤에서 꺾창(戈)으로 널과 구덩이의 네 귀퉁이를 찌르면서, 무덤 구덩이로 들어오는 염병(染病)이나 악귀(惡鬼)를 쫓는 일을 맡아보았다. (1)
(2001-03-12 발표, 2002-04-11 수정, 2003-04-13 보충)



(1) 영국이 만든 공상과학 영화 '에이리언(Aliens)'을 보면 영화 속 외계인은 길죽한 짐승 머리에 날카로운 앞이빨이 달려있으며, 그 안에서 다시 또 다른 머리가 들어있다. 그런데 이 외계의 짐승 머리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달린 곰의 두개골 상부와 그 모습이 대강 일치하고 있으며, 두개골 안에 또 다른 머리가 들어있다는 점에서 곰의 머리를 뒤집어쓴 방상시의 모습과 일치한다. 시베리아 일부 지역에서는 근대까지도 사제장이 이같은 곰의 머리 또는 두개골을 뒤집어쓰고 제의를 하였다고 알려지는데, 미국 인디언들도 이처럼 추장이 곰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제의를 하였던 종족이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륙에서 매우 흔한 이름인 뱅상(Vincent, 빈센트)은 무덤을 지키는 토지신인 '방상'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다.





 

7. 하(夏) 나라 이전의 단군조선(檀君朝鮮)

기원 후 한반도의 고대 역사는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삼국시대(三國時代)로 통칭하고 있으며, 그에 덧붙여 나중에 신라에 의하여 복속된 가야(伽倻)의 여러 소국들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한반도에서 기록과 유물을 통하여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고대 국가로서, 우선 고구려, 백제, 신라를 꼽고 있으며, 이들 삼국은 각자 지도부가 서로 달라 다른 나라로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기원전의 삼국시대 이전의 시대는 고조선(古朝鮮) 또는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두리뭉실하게 얼버무리며 통칭하고 있는 형편이다. (1) 그러나 동이(東夷)의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비롯하여 중국(中國)의 사서(史書)에서는 이 시대에 한반도와 요동에서 매우 독특한 국가 체제가 성립되어 있었다는 점을 간간이 언급을 하고 있다.

즉, 삼국시대 이전에는 삼한(三韓)이 통치하는 삼조선(三朝鮮)이 있었는데, 이 삼조선은 진조선(辰朝鮮), 번조선(番朝鮮), 막조선(幕朝鮮)으로서, 이들 세 나라를 각각 진한(辰韓), 번한(番韓), 막한(幕韓)이라고 불리는 3명의 단군임금(檀君王儉)과 여러 군장(君長)들이 통치하였으며, 환웅(桓雄)이 이들 여러 임금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왕검(王儉)은 '임금'이라는 한글의 음역(音譯)으로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은 땅(地, 檀, 達)을 다스리는 군주이며, 환웅(桓雄)은 하늘(天, 桓, 韓)을 다스리는 군주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들 삼한(三韓)은 각각 처음부터 발해(渤海)로 불려졌던 황해(黃海)의 연안에 영토를 두었는데, 번조선은 연(燕) 나라의 땅이었던 현재의 북경(北京) 근처의 하북성(河北省) 일대와 요서(遼西) 지역, 진조선은 요동(遼東)과 만주(滿洲)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막조선은 그 위치가 분명하지 않으나 아마도 과거의 마한(馬韓) 지역인 현재의 남한지역이었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그러다가 지구대격변(地球大激變)과 함께 9년간의 대홍수(大洪水)가 일어나면서, 중국(中國)의 중원(中原) 지역이 모조리 바닷물에 잠기게 되었다. 그 이후에 물이 빠지면서 황하의 물줄기가 바뀌면서 중원 지역이 새로 만들어지고, 해마다 황하의 물줄기가 바꿔지게 되면서, 현재처럼 황하 하류 지역에는 황토(黃土)가 수십미터 높이로 쌓이면서 광활한 중원이 형성되었다. 이 때 가서야 중국의 중원에서는 가까스로 나라라는 것이 성립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왕(禹王)이 세운 하(夏) 나라로서, 이 당시 요동과 한반도는 삼조선(三朝鮮) 이전의 전기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해당한다. 우(禹)는 동이족 출신인 순(舜) 임금의 신하이었는데, 현재의 상해(上海) 부근의 도산(塗山), 즉 홍수로 인하여 진흙탕으로 뒤덮인 회계산(會稽山)에서 단제(檀帝, 天帝)가 보낸 태자(太子) 부루(扶婁)를 만나 회합(會合)하였고, 부루를 통하여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가 적혀진 황제중경(黃帝中經)이란 책을 얻어가, 전에 쌓았던 적석산(積石山) 제방이 다시 무너지자, 황하의 물길을 그대로 놔두면서, 자연적으로 황하의 치수(治水)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禹)는 치수의 공(功)을 단제(檀帝, 天帝)에게 인정받아 하(夏)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이 하(夏) 나라가 중원이라는 신대륙에 들어와 처음으로 세워진 나라로서, 하(夏) 나라의 종족을 화하족(華夏族)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화하족이 중국 본연의 한족(漢族)의 기반을 이룬다.

요(堯)는 도당(陶唐) 나라의 임금이었고, 순(舜)은 유우(有虞) 나라의 임금이었으며,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의 신농국(神農國), 그리고 상(商) 나라와 함께 현재의 태행산(太行山)에서 북경 북쪽의 연산(燕山) 일대, 그리고 산동(山東) 지역에 흩어져 있었는데, 대홍수 이후에 이 모든 나라들이 충돌하면서 수시로 변화가 매우 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요서 북방과 요동 지역,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홍수의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은 관계로 나라가 안정되어 있어, 대홍수 이후에 새로 넓혀진 황해(黃海) 연안 지역을 진번조선이 우선적으로 차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황하의 물줄기가 산동 북쪽으로 바뀌면서 산동(山東) 남쪽의 연안(沿岸) 지역도 진번조선(眞番朝鮮)에서 차지하게 되었고, 중원의 구주(九州)를 감독할 낭야국(琅邪國, 現 大汶口 근처)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2) 나중에 다시 옛부터 동이족(東夷族)이 건너가 곳곳에 거주하였던 발해 연안 지역을 고구려(高句麗)에서 다시 한번 차지하게 되었으며, 남이족(南夷族)이 거주하였던 오월(吳越) 지역도 나중에 다시 점유(占有)하여 고구려(高句麗)의 영토로 삼게 된다. 이 때 오월(吳越) 지역은 백제군(百濟軍)의 힘으로 평정되었는데, 백제는 고구려의 아우(弟)가 되는 나라로서, 군 병력을 형(兄)에게 빌려준 셈이었다. 이런 점에서도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나라에 속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나중에는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삼묘족(三苗族)은 원래 북방의 동이족에서 분리된 동이의 일파로서, 주로 남해(南海)와 장강(長江, 揚子江) 하류 일대에서 남이(南夷)를 형성하다가 나중에 황해(黃海) 연안(沿岸)과 중원(中原) 지역으로 확산되어 화하족(華夏族)과 더불어 한족(漢族)의 기반을 이루게 된다.

어쨌든 하(夏) 나라의 우왕(禹王) 이전에는 이 산동의 서쪽 지역을 헌원(軒轅)이 차지하면서 치우(蚩尤)와 대립하여 전쟁을 여러 차례 치렀는데, 치우가 사고(事故)로 죽으면서, 황하 하류 지역을 헌원(軒轅)이 차지하여, 그후부터 황제(黃帝)로 불려지게 되었고, 이때 중원에서는 동이족을 이겼다는 기념으로 응룡(應龍, 黃龍)을 만들어 축제를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폭죽(爆竹)이 발명되면서 이천년을 넘게 중원(中原) 한족(漢族)의 전통을 이루게 된다. 이 때 치우는 배달(倍達)의 군장인 환웅(桓雄)으로서, 처음으로 구리와 철을 캐내어 병기(兵器)를 만들었다고 하였으며, 그의 휘하에 요서(遼西)에는 대요(大撓)와 산동(山東)에는 창힐(倉힐)을 두었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치우가 죽으면서 창힐은 헌원의 휘하에 들어가 창힐은 중원에서 글자(契, 書)의 창시자(創始者)로 대접받게 된다.

하후씨(夏后氏, 夏) 나라 이후에는, 서쪽의 상(商)과 동쪽의 은(殷) 나라를 거쳐, 주(周) 나라 말기(末期)에 이르러 이족(夷族) 출신인 정(政)이 옛 영토에서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周, 西周) 나라를 동쪽으로 몰아내고 진(秦) 나라를 세우게 되었는데, 대홍수 이후에 다시한번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는 혼란기를 틈타 중원이라는 신대륙(新大陸)에서 새로이 형성된 중원 지역의 6개국을 모조리 병합하면서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루게 된다. 그후에 다시 발해(渤海)와 황해(黃海) 연안의 동이족(東夷族)들을 모조리 병합하게 되었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발해와 황해 연안에 거주하였던 단군 휘하의 동이족의 여러 귀족들이 수하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한강(漢江, 漢水) 이남의 남한(南韓)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길림(吉林) 지역의 부여(夫餘)에서도 남한의 마한(馬韓) 땅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과거의 진조선과 번조선의 왕족과 귀족들이 남해안으로 이주하여 각각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을 세우게 되어, 다시 한반도에서 삼국(三國)이라는 삼위일체(三位一體) 방식의 통일(統一) 체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각기 다른 나라로 알고있지만, 실상은 통일된 조선(朝鮮)이라는 한 나라에서 연방국(聯邦國)의 주(州)처럼 정치적으로 지역적으로 구분되어 유지되었는데, 이 구분을 중국의 사가(史家)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여 오늘날까지 혼란을 가중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요동과 한반도에 산재한 고인돌의 분포를 보면, 전기(前期)의 양식(樣式)은 황해도(黃海道), 요동(遼東), 길림(吉林)의 세 지역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고, 후기(後期)의 양식은 요동(遼東), 북한(北韓), 남한(南韓)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형식상 후기에 산동지역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이 산동 지역이 포함되면서 동이족이 중원의 화하족과 충돌하게 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래서 중원에서 희귀하게 발견되는 돌무덤은 오로지 돌널무덤(石棺墓)이거나 후기(後期)의 돌방무덤(石室墓)이며, 이와 더불어 봉토분(封土墳)이 나타나는데, 이들 대부분 동이족의 흔적을 보이고 있으며, 진시황(秦始皇) 이후에 가서야 중원에서는 돌방무덤(石室墓)의 양식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원래 중원의 무덤 양식은 황토를 깊숙하게 파고 들어가거나, 굴을 'ㄴ'자 형으로 파고 들어가 주검을 매장하였으며, 아니면 애초부터 주검을 그대로 버렸는데, 산동(山東) 남부 지역의 이층대(二層臺) 무덤 양식은 분명 한반도 남부의 이단토광묘(二段土壙墓)에서 그 규모가 커졌다고 할 수 있으며, 은허(殷墟)의 무덤도 이와 관련되어 나온 무덤 양식이다.

이렇듯이 중원의 화하족(華夏族)은 원래 매장(埋葬)에 관심이 없는 종족이었는데, 동이족의 영향을 받으면서 중원에서 조상숭배(祖上崇拜)와 제사(祭祀), 그리고 매장(埋葬)의 관습이 형성되었으며, 한반도의 동이족처럼 삼신사상(三神思想)이 깃들여졌다. 그래서 동이의 한반도에서는 전통적으로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하고, 그 대신 중원에서는 진(秦) 나라 이후에 사방의 사이족(四夷族)을 제압하면서 사방관념(四方觀念)이 형성되어 중원에서는 4라는 숫자를 즐겨 이용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01-10-02 발표, 2003-03-14 수정, 2004-08-06 주석보충 )



(1) 단군조선과 고조선을 구분하여 말했으나 이는 필자의 착오로, 평양성에 처음 나라를 세울 때부터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내세웠으며, 그 후 지금까지 조선이라는 동일 국호를 사용하고 있는데, 단지 군장이 어느 혈통인가에 따라 단군조선, 기자조선, 이씨조선 등으로 구분하여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삼조선은 단군조선에서 분할하여 분조된 나라이지만, 형식적으로 단군 휘하에 속하고 있어 단군조선으로 구분해야 하며, 대부여와 부여는 단군조선의 혈통이지만 단군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새로 성(姓)을 내세웠기 때문에 단군조선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2) 중국의 창조신으로 추앙받는 복희(伏犧)는 원래 신시(神市)의 신하로서 지금의 산동 서남부 지역에 가서 진(陳)나라를 세워 통치하다가 여와(女와)에게 나라를 물려주게 된다. 이 진나라 지역이 치우가 중원을 공략하면서 발판으로 삼았던 곳이고, 그후 단군조선 때 남국(藍國)으로 불리면서 치우의 후손들은 남진하여 오월(吳越) 나라를 세우고, 뒤이어 강남의 삼묘족(三苗族)과 합세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산동의 진 나라 지역을 진대(秦代) 서불(徐市)의 옛 고장이었던 낭야(琅耶)로 칭한 것이 분명하여, 복희의 진(陳)이 곧 낭야이자, 회대(淮岱)의 서이(徐夷)의 뿌리와 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 후기 단군 때에 번조선(番朝鮮)은 산동 북쪽에 있었으며, 도이(島夷)는 곧 회대를 말한다.





 

8. 이이제이(以夷制夷)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오랑캐는 오랑캐로서 제압한다, 라는 글귀는 수천년 넘게 이 지구상 전역에서 적용되어 그 효험을 확실하게 인정받은 글귀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이천년이 훨씬 넘게 동아시아, 아니 그로부터 확산되어 지구상 전 세계에서 역사가 쓰여진 이래, 아시아와 유럽 대륙 동서남북 전 세계 어디에서나 빠짐없이 통용된 전쟁과 분규 해결의 원칙으로서, 손자병법(孫子兵法)의 근본을 이루게 한 병법(兵法) 중의 하나이다. 곧 어느 다루기 힘든 종족을 다루고자 할 때에는 그와 비슷한 종족의 힘을 키워서 서로 싸우게 하고, 그 때의 혼란한 틈을 타서 그 양쪽을 공격하여 한꺼번에 양쪽을 제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이(夷)가 곧 동이(東夷)로서, 동이는 예(濊, 穢)로부터 산동(山東), 요서(遼西), 요동(遼東), 길림(吉林), 북한(北韓), 남한(南韓), 구주(九州)를 함께 포함(包含)하여 말하는 것으로서, '오랑캐 이(夷)'는 곧 전 세계 인류 문화의 최초(最初), 최고(最古)의 기원지(起源地)를 뜻하는 말이다. 비록 조선시대(朝鮮時代)를 창출(創出)한 태조(太祖) 이성계는 신설한 자신의 왕권을 돈독하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한반도의 조선족(朝鮮族)을 중국 중원(中原)의 화하족(華夏族) 보다 낮은 지위로 낮추면서, 북방(北方, 北夷) 고유의 인(仁) 중심의 불교(佛敎)를 옛 나라인 고구려(高句麗, 北方)와 신라(新羅, 南方)에서 파생된 이차적(二次的) 종교(宗敎)로 격하시키고, 그 대신에 공자(孔子)에게서 확립된 예(禮) 중심의 유교(儒敎)를 일차적(一次的) 종교로 우선하게 되었다. 공자는 주(周, 東周) 나라 춘추시대(春秋時代)에 활동한 산동(山東) 출신으로, 춘추 이전에 산동은 삼조선(三朝鮮)에 속하였다.

유교(儒敎)는 단군(檀君) 치우천왕(蚩尤天王) 이래,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접어들면서, 삼조선(三朝鮮)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의 개별적인 군소정당(群小政黨)들이 날카로운 날의 청동기를 획득하면서, 함부로 인명(人命)을 살상하고, 흉기(凶器)가 인륜(人倫)을 앞서게 되자, 이에 반대하여 나오게 된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사상(思想)이다.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이(夷)는 동방(東方)에 사는 사람들을 뜻한다. 많은 사람들이 활(弓)을 들고 다니고, 큰 사람(大人)들이 많다. 또한 옛 글자의 인(仁)과 같은 뜻이다. 이(夷)들은 어질어서 오래 사는데, 군자(君子)들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는 나라이다." 라고 하였다. 즉 이(夷)는 활을 사용하는 큰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제까지 이씨(李氏) 조선시대에 통하였던 오랑캐와는 사뭇 다른 뜻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어찌해서 이(夷)가 오랑캐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는지, 또한 오랑캐가 진정 무슨 뜻인지도 현재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로 그저 옛부터 그렇게 해석되어 온 것인데, 하다못해 동서고금을 통하여 가장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있는 산해경(山海經)에서도 이(夷)와 조선(朝鮮)이라는 말은 있지만, 오랑캐나 또는 그와 비슷한 말 조차 없다. 보통 사이족은 '오랑캐 이(夷)', '오랑캐 만(蠻)', '되 융(戎)', '오랑캐 적(狄)'이라 하여, 우리 스스로 오랑캐라는 뜻으로 이만융적을 해석하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특히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되'라고 부르고, 나중에는 중국의 한족(漢族)을 포함하여 '되' 또는 '떼'라고 통칭하여서, 오랑캐란 말은 주로 한반도 고대 종족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오랑캐란 말을 혹자는 개와 사람이 섞여진 반인반수(半人半獸)로서 오낭구(五囊狗) 또는 여진족(女眞族)의 일파인 올량합(兀良哈)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부 소수 종족을 일컫는 말이어서, 사이족(四夷族)을 뜻하는 오랑캐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단지 중국 섬서(陝西) 지방의 서이(西夷)는 동이(東夷)의 환웅(桓雄)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반고(盤固, 盤瓠)의 후손으로, 이들을 견융(犬戎, 西戎)이라 하여 '견자(犬子)'라고 별칭으로 부르면서 개(犬)와의 관련을 말하고 있는데, 이들을 한반도에서는 오랑캐라 하지 않고 '되'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중에 '되'라고 불렸던 북방의 여진족(女眞族)은 숙신(肅愼)에서 출발하여 흑수(黑水)로 갈라진 종족으로, 여진의 김씨(金氏)는 고구려의 후예가 되는데, 북구에서는 이들을 오로진(Orogin, 알金)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이 철광원석을 뜻하는 금속(金屬, Ore)을 발명하여 북구에 영향을 준 종족이라고 할 수 있다.(1) 그래서 고려와 조선시대에 북방 여진족을 멸시한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화친하여 좋은 사이를 유지하려 했었다.

징기스칸의 몽고 제국에서는 한반도 종족을 일컬어 색륜족(索倫族)을 뜻하는 '소롱고'라고 불러왔는데, '소롱고'와 '오랑캐'의 발음이 비슷하여, 오랑캐는 곧 소롱고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소롱고는 '시라(尸羅)'와 통하여 '신라(新羅)'로 이어지고 있다. 더구나 고구려(高句麗)의 전신(前身)인 탁리국(탁離國)은 곧 색리국(索離國)이자 고리국(고離國)으로서, 기록마다 약간씩 달리 쓰여졌는데, '탁', '색', '고'자는 지상에 높게 세운 나무덧널(木槨)과 고인돌(支石墓)에서 비롯한 글자로서, 고대 한글에서 '돌'과 '석(石)'의 발음이 뒤섞여 혼용되면서 분리되어 나온 것과 같은 차원으로 여길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터키족(Turkey)은 돌궐(突厥), '튜르기', '투르캐(Turkiye)'라고 하여 색륜족, 색족, 스키타이족, 색슨족과 같은 어원을 이루는데, 자식(子息) 또는 색(索)에서 비롯하여 러시아와 북구의 이름에서 사람을 뜻하는 말인 '새끼', '시키', '스키(ski)'가 되었듯이, 오랑캐의 '캐'는 기(旗)와 마찬가지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옛말에 '어린아해'라 해서 아이를 '아해'라고 하였듯이, 결국 '캐'는 대인(大人)에 상대되는 어린 사람이나 그 종족을 일컫는 말로 볼 수 있으며, '오랑'은 아라, 아랑, 알량과 같은 어원으로 볼 수 있어, 오랑캐는 '아리아해' 또는 '아리아기', 즉 '알(卵)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사이족의 북쪽 지역은 주로 천손설화, 남쪽 지역은 주로 난생설화가 전해지는데, 유난하게도 만주 지역은 천손설화에 뒤이어 난생설화가 나오면서 서로 겹치고 있다. 결국 이씨(李氏) 조선시대에 통하였던 '오랑캐 이(夷)'는 개(犬)하고는 전혀 상관없으며, 난생설화를 통하여 등장한 '아리아해', 또는 '아랑기' 정도에서 그 어원을 짐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오랑캐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난생설화의 집단을 일컫는 말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아리랑과 서리랑은 큰 알과 작은 알을 뜻하는 한글 고어이며, 김수로왕은 작고 귀중한 쌀알(살)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어, 아리랑은 오랑캐와 상통하고 있다.(2)

그런데 이(夷)자도 처음에는 '주검 시(尸)'자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것도 오랑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로 부터 한반도에서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더 대접받는다고 하였다. 즉 주검을 매우 중요시하였다는 말로서, 이와 관계되어 '오랑캐 이'자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은대(殷代)의 갑골문(甲骨文) 상형(象形)에서 '시(尸)'자는 무릎을 앞으로 모아 구부려 앉은 사람 모습으로, '주검 시(尸)'자가 '활 궁(弓)'자와 서로 통하여, '주검 시(尸)'자가 곧 '활 궁(弓)'자가 되는데, 주대(周代) 이후에 '시(尸)'자는 '주검 시(屍)'와 '동쪽 사람 이(大 + 尸)'로 구분되고, 인(人), 인(仁) 자가 함께 사용되다가, 후한대(後漢代)에 이르러 시(尸)는 완전히 주검(屍)의 뜻이 되었고, 그 대신에 이(夷; 大 + 弓)자가 등장하였다. 그러니까 이(夷)자는 후한(後漢) 이후에 나온 글자로서, 보통 '활 궁(弓)'자에 '큰 사람 대(大)'자가 복합되어 '활을 든 동쪽의 큰 사람들'을 뜻하게 되었는데, 즉 이 당시에 한반도 종족은 키가 크고, 얼굴이 큰 종족이란 점을 알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중원에는 작다는 뜻이 포함된 초(楚, 草)와 민(민, 民)이 사용되었고, 일본에서도 작다는 뜻이 포함된 왜(倭)자가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문자로 살펴보면 이(夷)는 키가 큰 종족으로, 처음에는 무릎을 굽힌 모양으로 대표되다가, 나중에는 활(弓)로 대표되었는데, 고대의 아시아에서 유독 한반도에서만 돌활촉(石鏃)과 돌칼(石刀), 돌검(磨製石劍)이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래서 상고시대의 한반도는 활(弓)과 검(劍), 칼(刀)을 발명한 곳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夷)는 '활을 든 큰 사람들'에서 더 나아가 '도구를 사용하는 동쪽 사람들'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夷)들은 수시로 이주하면서 점차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살았는데, 그 들 사이로 널다란 중원이 새롭게 형성되자, 사이(四夷)들은 옛 영토에서 그 중심의 중원으로 모여들었고, 그러면서 하(夏), 은(殷, 商), 주(周) 나라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주대(周代)에 이르러 중원의 화하족(華夏族)과 사이족(四夷族)이 중원 각 지역에서 다투기 시작한다. 이 때가 주(周) 나라의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로서, 이 난국(亂局)을 주왕(周王)은 봉건정책(封建政策)으로 무마하였는데, 사이족 출신과 그 후손들이 주왕(周王)의 책봉(冊封)을 받아, 각 지역의 제후(諸侯)와 귀족(貴族)으로 활약하면서, 구이족(九夷族)을 이루게 되었다. 이 당시 요동(遼東)과 대동강(大洞江) 유역의 조선(朝鮮, 古朝鮮), 장강(長江) 이남의 초(楚), 요서(遼西)의 연(燕), 산서(山西)의 진(晉)과 섬서(陝西)의 진(秦) 지역들이 사이(四夷)의 옛 영토로서, 여기에 산동(山東) 남부의 낭야(瑯邪, 琅邪, 琅耶, 齊)를 포함하면 '천하(天下)'가 된다.

그러니까 진시황이 중원을 차지하면서 사방의 사이족이 세운 여섯나라(六國)를 병합하려 하자, 이에 대항하여 사이족 오랑캐들이 합종연횡(合縱連衡)을 주창하여 진시황에게 대항하였는데, 진시황의 책사(策士)인 이사(李斯)가 사이족의 미묘한 역학관계(力學關係)를 이용하여 적은 힘으로 이들 모두를 통합할 때에 나온 말이 이이제이(以夷制夷)이다. 이 글귀는 그후 이천년 넘도록 수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다가 19세기에 들어서 영국인들이 주도가 되어 중국을 침략하면서, 오히려 서양인들에게 알려지고, 이에 덩달아 조선, 중국, 일본이 서로 싸우게 되면서 이 글귀가 수시로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글귀로 인하여 가장 처참하게 피해를 당한 곳이 동이족의 근거지인 우리 한반도로서, 같은 피를 나눈 동족(同族)이 세 군데로 갈라져 지금까지 50년 넘게 남한(南韓)과 북한(北韓), 그리고 요동(遼東)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청(淸) 나라 때에 요동(遼東)은 청(淸)의 조상 땅이라 하여 조선족(朝鮮族) 주민들을 완전히 소개하고 이주시켜 대부분 공지(空地)로 되었으며, 청 말기에 영국의 꼬임으로 일본군이 들어가 만주국(滿洲國)을 세우려 하면서 한족(漢族)들이 들어가 살게 되었고, 그리하여 현재처럼 중국의 땅이 되었다. 즉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들이 영국(英國)이 주도가 된 서양인과 일본인들로서, 한반도에서는 아직도 우리 스스로 이 글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2-04-26 발표, 2002-07-24 수정보완, 2003-05-07 주석보충)



(1) 연금술(鍊金術)을 영어로 알케미(Alchemy)라 하고, 라틴어로 알키미아(Alchymia)라고 하는데, 이는 알(al) + 금오(kimiya)에서 온 말로, 금오(金烏)는 곧 금속제조를 뜻하며, 알김[alkim], 또는 알금[alkum]과 상통한다. 화학을 뜻하는 영어인 케미스트리(Chemistry)도 한글의 구모, 고마(固麻), 금오(金烏)와 상통하여 어원을 금오로 볼 수 있다. 고마(固麻)는 웅신(熊神)을 뜻하며, 그 가운데 특히 금오(金烏)는 태양 또는 신검(神劍)을 뜻하는데, 서융이 만든 곤오검의 곤오(金+昆. 金+吾.)는 주조된 황동(黃銅)을 뜻한다. 금(金)[kum, kim]을 중국어로는 진[chin], 일본어로는 긴[kin]이라 발음한다. 동양에서도 황동과 놋쇠를 처음에는 금(金)이라 불렀는데, 중세 유럽인들은 황동을 황금으로 오해한 경우가 많았으며, 이를 돌에 마술을 부려 만든 금으로 오해하였고, 나중에는 이를 '철학자의 돌'이라 불렀다. 동이의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연금술은 말 그대로 황동과 유석 제조와 황금 제련을 말하며, 처음에는 황동, 나중에는 황금과 유석으로 왕관을 만들었으며, 서이, 서융의 섬서, 감숙 지역에서는 삼원합금으로 황동을 주조하였다.

또한 술(酒)을 영어로 리쿼(Liquor)라 하고, 술의 주정(酒精)을 알콜(Alcohol)이라 하는데, 알콜은 아랍어의 알쿨(alkuhl)에서 온 말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곧 한글의 앓다, 얼큰하다, 얼근, 얼결, 얼떨결, 얼다(취하다)의 어원과 상통한다. 한글에서의 술(酒)은 이슬(露), 서리(霜)와 같은 어원으로 그 원뜻이 '김이 서리다'와 같은 뜻의 증류된 정제액을 말하며, 증류하기 위한 시루는 극동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탁주인 막걸리는 맑아지다, 묽다, 도토리묵과 같은 어원으로 진한 쌀국을 물에 타서 묽게 만든 것을 뜻한다. 그리고 불(火)을 뜻하는 영어인 파이어(fire)는 그리이스, 로마의 피로(pyro), 퓨로(puro)에서 온 말로, 원래는 그 출처를 모르는 푸르(pur)에서 왔다고 한다. 푸르는 곧 한글의 부르[bur], 불[bul]과 상통하며, '불 화(火)[hwa]'자와도 상통하는데, 화를 중국어로는 후오[huo], 일본어로는 가[ga], 또는 비[bi]라고 발음한다. 또한 점화하다, 불꽃이 일다라는 뜻의 영어인 이그나이트(ignite)는 한글에서 익은[ign], 익다, 일그러지다, 이글거리다와 상통하며, 그 어원을 구리(銅), 구리다(臭), 구르다, 고리(環), 굽다(折), 굽다(燒)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영어에서 무지(無知)라는 뜻의 이그노런스(ignorance)는 희랍어의 그노시스(gnosis), 그리고 크노소스(Cnossos), 크노우쓰(Knowth), 크녹나래(Knocknarea)와 같은 어원으로 보고 있으며, 영어권에서 '크노'의 '크'자는 뺀 채로 발음하는 것이 보통이다.

(2) 다시 생각해보니 '캐'는 나라의 뜻으로, "11. 한글은 영어의 어원"이라는 문단을 참조하기 바란다.





 

9. 외계인(外界人)은 조작입니다(Outer Aliens are fake).

이제까지 서양인들이 줄곳 주장해온 외계인은 몽땅 사기와 거짓입니다. 하다못해 중국 대륙에서도 어떤 비행접시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납치해 갔다느니, 또는 대낮에 공중으로 납치당해 외계인들한테 이상한 수술을 받았느니, 또는 미국 모처에 외계인 시체가 있다느니 하는 소문과 근거 자료는 영국 정보기관에서 몽땅 거짓으로 조작한 것입니다.

서양인들이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특징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어린애 체격처럼 깡마른 작은 체격에 비하여 매우 커다란 머리통이 달려있으며, 잠자리눈처럼 크고 둥근 안구(眼球)가 튀어나왔고, 가슴에는 철갑이나 이상한 금속제 갑옷을 두르고 투구를 썼으며, 팔다리에도 군데군데 철갑으로 무장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하며, 알에서 태어나고 집은 반구형으로 이상한 광채가 빛나는 번들거리는 집에서 살고 있으며, 기기묘묘한 무기로 무장하였는데, 희안하게도 매우 온순한 성격을 갖고있으며, 기묘한 음악을 잘 다룬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 영국인에게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국인들의 조상들은 이러한 외계인들에 의하여 매우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한반도의 역사는 매우 오래됩니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역사만해도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말입니다. 한반도 최초의 나라는 환국(桓國), 그 다음이 배달(倍達) 또는 신시(神市), 청구국(靑丘國), 그 다음이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나중에 부여(夫餘)가 분리되면서 삼조선(三朝鮮)이라고 개칭하였지요. 이 당시에 단군조선은 주로 요동과 길림 등지의 만주 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남한은 단군조선의 영역이었지만, 만주와 북한에 비하여 늦게 개발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과거부터 배달의 자손이라고 대대로 조상들로부터 들어왔습니다. 이 배달이 신시 청구국으로 말하는 배달(倍達) 나라입니다. 배달은 밝달, 박달, 부르달, 불땅으로 이어지면서 나중에는 푸른들(靑丘)과 통하게되는데, 이는 처음 청룡이라 하여 푸른 용암이 솟구쳐 나오면서 너른 들판이 형성되었기에 푸른 언덕이라 하여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누런 황토가 넘쳐나는 중국 중원에서 보면 동이족 땅은 푸른 언덕이어서 푸른 색을 동방을 뜻하는 색깔로 삼았고, 이래서 수천년간 아시아에서 동방을 뜻하는 색깔은 푸른색이 되었습니다. 즉 선사시대부터 가장 살기 좋은 땅이 한반도이었으며, 세상 누구나가 가고 싶어하는 천국(天國), 즉 '푸른들'에서 비롯된 말인 파라다이스(Paradise)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신장에 비하여 얼굴이 유난히 큰 체형들이 발견되며, 또한 인류 최초로 화살과 활을 발명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신시시대에 백두산 아래 만주의 어느 곳에서 우연히 청동(靑銅)을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남한의 돌검(磨製石劍)과 요동의 구리(銅)가 합쳐지면서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나오게 되었고, 곧이어 꺾창(戈)과 투겁창(矛) 등의 무기들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기록에서는 이 때 배달의 환웅(桓雄)인 치우(蚩尤)가 처음으로 구리와 쇠로 무기를 만들어, 현재 북경(北京) 서쪽의 탁록 들판까지 진출하여 중원 출신의 헌원(軒轅)과 전쟁을 벌였으며, 십년간 싸운 끝에 치우는 죽고 헌원은 황제(黃帝)가 되었다고 합니다. 치우의 죽음과 더불어 배달 나라는 끝나고 단군조선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 때가 요순시대(堯舜時代)입니다. 이 당시 전쟁과 더불어 중원을 비롯한 중국에서도 처음으로 청동기를 만들게 되었고, 곧이어 주(周) 나라의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중국 최고의 청동기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치우가 헌원과 전쟁할 당시에 구리와 청동에 대하여 무지몽매하였던 중원의 화하족(華夏族)과 서이족(西夷族)은 치우가 전쟁을 벌일 때마다 짙은 안개가 끼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내리쳤다고 하면서 두려움에 몸을 사렸지요. 그는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 하여 구리로 만든 투구를 쓰고, 철로 만든 가면을 썼으며, 군데군데 구리와 철로 장식을 한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전장에 나섰다고 합니다. 근대까지 일본의 장군(쇼군)들이 착용하였던 갑옷과 가면이 바로 치우가 썼다던 동두철액과 비슷할 것입니다. 일본은 고립된 섬인 만큼 천년넘게 똑같은 의례와 의식이 남아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또한 한무제(漢武帝) 이전까지 중국은 동이족의 전통과 예를 그대로 받아들여 나라의 제도로 삼았는데, 그러한 사례가 주례(周禮)에 남아있습니다. 이 주례에 소개되는 방상시(方相氏)는 무덤에 들어오는 악귀를 물리치는 한반도의 토지신으로, 네 개의 황금눈을 달게 되어있는데, 이는 곧 단군(檀君)을 검(劍)과 견주어 의인화한 것으로, 석상과 장승을 통하여 보면 아마도 구리로 만든 퉁방울같은 모양의 눈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런 청동기시대에 부여, 거창 등지의 남한(南韓) 지역을 비롯하여 요서(遼西), 길림(吉林) 지역에서는 아주 특이한 모양의 집을 만들었습니다. 반구형(半球形)으로 봉토분처럼 집을 만들었는데, 겉면에는 진흙을 두툼하게 바르고, 표면을 연마하여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도록 하고, 출입구는 꼭대기 중앙에 만들어 사다리를 타고 드나들었습니다. 집을 수풀 속에 만들면 그 모양이 마치 커다란 알이 보금자리에 들어있는 모양처럼 보이게 됩니다. 또한 집안에서 불을 피우면 그 연기와 빛이 하늘까지 직선으로 뻗어 올라가 불을 처음 본 미개인이라면 마치 하늘과 반구형 집이 빛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리하여 이들의 신앙은 한결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인물이 알(卵)에서 태어난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입니다. 그런데 이 알 모양의 반구형 집은 한반도 특유의 서로 다른 재료의 결합방식에서 창안된 구조로서, 남한에서 비롯하여 점차 북쪽으로 확산되어 나중에는 북극 지방 에스키모의 '이글루'라는 반구형 눈집으로 남게 되었고, 이것이 북미대륙으로 건너가면서 인디언 특유의 지붕출입구가 나오게 됩니다.

얼굴에는 동두철액을 뒤집어 쓰고, 검, 꺾창, 투겁창 등의 기묘한 무기를 들고 있는데, 막상 그 사람은 허여멀건 피부의 사람 모양으로, 그 생김새가 자그마한 키에 머리통은 크며, 가끔 퉁방울 같은 금속제 눈을 달고 있다. 살고있는 집은 둥그런 알 모양처럼 생겼는데, 어디로 들어가는지 갑자기 없어졌다 갑자기 나타나고, 수시로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집으로 이어져 있다. 또한 이들에게 몽둥이나 돌로 내리쳐도 꿈쩍 안하면서도 이들이 순간적으로 이상한 무기를 휘두르면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 마구 쓰러져 버린다. 그리고 어딘가 데리고 들어가면 그 집안은 괴이한 모양의 장식으로 가득 차 있는데, 막상 상대해보면 온순한 성격으로, 자신들 이상으로 뛰어난 머리에 많은 지식과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는 매우 이상한 모양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들 종족의 군장인 위대한 신의 이름은 알(Al), 아라(Ara), 또는 아리(Ari), 알라(Ala), 알리(Ali), 알루(Alu)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러니까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을 때에 정복과 전쟁 등의 이유로 유럽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처음으로 대하는 무지몽매하였던 유럽의 선사인들은 이들을 아리안(Arian) 또는 알리언(Alien)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 말은 곧 그 전대(前代)에 들어온 고인돌 문화와 더불어 외지에서 들어온 매우 뛰어난 문화의 소유자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영국인들이 주축이 되어 우주 바깥의 외계에서 들어온 외계인이 지구를 건설했다는 이야기는 그저 헛된 망상과 거짓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이와 관련된 모든 소문과 증거자료는 전부 조작된 것입니다.(1)
(2002-05-27 발표, 2004-08-06 수정 )





 





 

10. 치우기(蚩尤旗)

치우(蚩尤)는 고대 한반도 동이족의 초기 국가인 배달(倍達) 청구국(靑丘國)의 14대 임금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었습니다. 배달 나라는 원래 백두산 아래의 길림(吉林) 지역을 영토로 하였는데, 청구국으로 불렸던 당시에 이곳에서 청동(靑銅)이 발명되면서, 검(劍)과 꺾창(戈)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이 꺾창으로 만주에서 더 나아가 하북(河北)과 요서(遼西)를 차지하고 있던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와 충돌하고 중원(中原)에서는 헌원(軒轅)과 충돌하여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쟁과 더불어 배달 나라는 막을 내리고, 배달의 마지막 임금인 단웅(檀雄)과 웅씨왕녀(熊氏王女) 사이의 아들이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이 요동(遼東) 아사달(阿斯達)에 세워진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그가 바로 단군왕검(檀君王儉)입니다. 이 당시 치우가 중원에서 죽고, 그의 부하들이 산동(山東)에 머물면서 회대(淮岱)를 포함하여 구려(九黎)를 세웠으며, 구려의 백성들이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양자강(揚子江) 유역의 호북(湖北)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남이족(南夷族)을 이루는데, 이들이 바로 초(楚), 오(吳), 월(越) 나라의 근간이 됩니다. (1) 그 후 산동에는 다시 낭야국(琅邪國), 번한(番韓, 番朝鮮)이 세워집니다. 그래서 옛부터 우리 선조들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초(楚)의 항우장사(項羽壯士)를 그렇게도 수없이 말했던 것이지요. 항우는 진시황(秦始皇)이 죽고 천하가 어지러운 가운데 유방(劉邦)이 나서자 스스로 자결하여 자신을 따라주었던 초의 백성들을 유방에게 맡기게 되며, 이리하여 유방은 한(漢, 孝)의 고조(高祖)가 됩니다.

고대부터 나라와 군대의 상징인 깃발에는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 등의 짐승을 그렸거나, 오로지 문자로 표시하였습니다. 한반도의 귀면(鬼面)과 중국의 귀면은 신석기시대 유물과 옥기(玉器)를 통하여 보면 모조리 멧돼지(豕, 亥)의 형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조형(祖形)이 두만강 유역에서 발견됩니다. 더구나 치우가 군주로 있었던 구려에서는 필강(疋絳)이라 하여 혜성(彗星)처럼 길게 뻗은 붉은 기운을 치우의 분신(分身)으로 여겼다고 하였는데, 그래서 치우의 깃발 모양이 굽어진 불꼬리가 달린 세모꼴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연(鳶)과 그 모양이 비슷하다는 말이지요. 깃발은 단군왕검이 승천하였을 때에도 내세웠다고 하는데, 이 때의 깃발이 아마도 장례 때에 사용하는 명정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장례시 영구(靈柩) 행렬 맨 앞에는 붉은색의 명정(銘旌)을 앞세우고, 그 뒤에는 노란색의 공포(功布)와 흰색의 만장(輓章) 깃발들을 들고 가게 됩니다. 조선시대 사용했던 군기(軍旗)에서도 세모꼴이나 네모꼴 천에 꼬리들이 달려있었으며, 그 안에 주로 신령시하는 영물이나 짐승, 또는 글자를 수놓았는데, 절대로 송곳니난 멧돼지 같은 귀면을 그리지 않았으며, 멧돼지를 그렸으니 당연히 뿔같은 것은 더구나 없었습니다. (1)

하상대(夏商代)의 도철문을 비롯한 사실적인 표현들은 대부분 무식한 인민(人民)들이 사람을 해치는 흉물을 제대로 알게끔 하여 기피하고 없애야 하는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고 기록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의 상징으로 웅상(雄常)이 있는데, 이는 그저 나무로서 신목(神木)을 말한 것이며, 마을 입구에 세워놓은 장승(長生)에서 마을에 들어오는 마귀(魔鬼)를 퇴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얼굴을 무섭게 표현하였습니다. 그 밖에 한반도 전통의 무늬는 거의 대부분 문자에 가까운 추상적인 무늬이거나, 고대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영물을 군왕이나 나라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현재도 쓰고 있는 봉황 무늬는 단군 때부터 영물로 알려진 봉황을 소재로 한 것으로, 닭(鷄)에서 변형하여 암수로 구분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한자의 상형문자는 치우 이후 은대(殷代)에 나오게 되니, 치우가 사용하였다는 깃발은 그저 붉은색의 세모꼴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상적인 무늬로서 대표적인 것이 국기(國旗)에 나타나는 태극무늬(太極紋)이며, 이와 비슷하게 삼태극(三太極)이 있고, 삼원(三元, 三圓)이 있습니다. 또한 그 이전에는 환주십자문(環周十字文)의 윷무늬(柶板文)와 연꽃무늬(蓮花文)가 있었는데, 윷무늬는 동이족의 확산과 더불어 지중해 연안 지역과 독일, 아일랜드 등지의 유럽 전역에서 환주십자문(環周十字文)으로 되었고, 뒤이어 스위스, 영국 등지에서 십자문(十字文)으로 발전하여, 이 십자문이 고대부터 유럽 카톨릭 국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영국(英國)에서도 십자(+)와 간방의 X자를 합친 미자문(米字文)을 국기로 사용하는데, 십자문은 사방을 다스린다는 의미가 담겨있고, 간방의 X자문은 그 사이의 나머지 영토를 다스린다는 의미가 담겨져, 예로부터 유럽에서 간방의 무늬는 제후국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X자문을 상징으로 하는 스코트랜드는 십자문인 잉글랜드의 제후국이라고 나타낸 셈이지요. 십자문과 같은 성격이 독일 나찌의 스와스티카(Swastica) 무늬입니다. 결국 이들 모두 한반도 동이족의 십자형 윷무늬 이후에 나온 것으로, 영국에서 국기로 사용하는 푸른 바탕에 붉은 미자문은 한반도 동이족의 속국(屬國)을 상징한 것에 불과합니다.

또한 연꽃무늬는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사용한 무늬로 대체로 윷무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꽃무늬와 윷무늬가 복합되어 일본 구주(九州)로 넘어갔는데, 그래서 구주의 왜국(倭國) 가운데 일부 제후(諸侯)는 십자(十字)에 간방(間方)을 더 그은 미자문(米字文)으로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미자문(米字文) 또는 국화문(菊花文)의 일종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국화문에는 미자문 가운데에 동그란 원이 있습니다. 이것을 좀더 변형하여 빨간 색으로 햇살이 뻗는 태양처럼 만든 것이 태평양전쟁 때에 사용한 일본의 일장기(日章旗)로서, 이 일장기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 한국민을 마구 죽일 때 사용한 총칼에 걸려져 있던 것입니다. 붉은 색의 일장기에 들어있는 미자문은 한국인들의 피로 물들여져 5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더구나 치우천왕과 관련된 깃발을 만들 때에 미자문을 넣는다는 것은 그렇게 피로서 나라를 지켰던 우리 조상들을 욕보이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2)
(2002-06-28 발표, 2004-08-06 수정)



(1) 필자는 처음 삼묘족(三苗族)을 치우 후손으로 보았으나, 여러 문헌과 정황으로 보아 강남의 섬 지역이 지금처럼 내륙이 되기 전에 기존에 거주하였던 남이(南夷)의 원주민을 일컫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래서 월의 구천이 삼묘를 교화시키고 옷을 입히는데 일조를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지금의 중국 지도부는 근간의 외교 활동으로 보아 삼묘족을 근간으로 두는 등소평을 시작으로 하여 회대, 즉 오월 지역에서 성장한 남이에 뿌리를 두는 것으로 여겨진다.

(2) 이조시대까지도 군대에서 사용하였던 깃발 가운데 붉은 색의 세모꼴 천에 연(鳶)처럼 꼬리가 달린 깃발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와 똑같은 깃발들이 중국에서도 발견된다. 여러가지의 고대 기록을 참조하건데, 최초의 깃발은 분명 치우 때에 등장하였는데, 이 당시에는 화산 폭발과 용암 분출로 세상이 어지러울 때이었다. 그래서 용암이 지표면에 흘러가는 것을 용(龍)이라 말하고, 화산폭발로 날아오는 불덩어리를 주작(朱雀)이라 말했으며, 이러한 화기(火氣)로 인하여 세상의 온갖 사기(邪氣)와 악기(惡氣)를 없애주는 바람(風)과 빛(光)을 봉황(鳳凰)이라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 봉(鳳)은 풍(風)이고, 황(凰)은 광(光)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783년 일본 아사마 화산이 폭발할 때 그 모습을 그린 그림이 남아있는데, 시뻘건 용암이 분출하는 모습이 마치 물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올라가는 모습으로, 그 형상이 분명 구름과 번개에 싸여 용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과 흡사하다. 이같은 수직상승의 용암 분출은 1822년 베수비오(Vesvio) 화산에서도 관찰된 바가 있는데, 대개 화산재 구름은 3,000m 정도 솟구치고, 간혹 용암줄기가 2,000m 정도까지 솟구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1888년 일본 반다이 대지진 때에는 원추화산 전체가 폭발로 무너져 내렸는데 이 때의 그림에서 용암 분출 모습이 미자문 일장기의 모습과 똑같다. 즉 미자문 일장기는 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화산 폭발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적을 제압하는 도구로서의 최초의 깃발은 이런 불덩어리를 표현한 것으로서, 길다란 세모꼴에 불꼬리가 줄줄이 달려있는 모양이라 할 수 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연은 불이 솟아올라가는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곧 용암 덩어리들이 하늘로 솟구치는 상황을 재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용에 대한 기록과 자세한 내용은 변광현의 저서, '검의 기원'에 수록되어 있다.


 

200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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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건국신화 온조신화

 

백제를 세운 온조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둘째 아들이다. 고구려, 신라와는 달리 알에서 깨어났다는 설화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백제의 시조 온조의 이야기는 대충 이러하다. 주몽은 졸본 부여에 와서 둘째 공주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은 비류이고 둘째 아들은 온조였다.

   한편 주몽이 북부여에서 나올 때 두고 온 예씨 부인도 아들을 낳았는데 유리였다. 유리 태자가 졸본 부여에 와서 왕위를 이어받자 비류는 이 곳에 남아 있는 것이 불편할 것이라 생각하고 온조와 함께 오간, 마려 등 10여명의 부하들과 남쪽으로 내려가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한산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들이 넓고 기름져서 농사를 짓고 살기에 좋아 보였다.

   그러나 비류는 그 곳 땅이 못마땅하여 아우 온조와 나누어 미추홀(지금의 인천 부근)로 떠났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광주 부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가 기원전 18년이었다.

   한편 비류가 정착한 미추홀은 토지가 습하고 물맛이 짜서 살기에 적당하지 않아 비류를 따르던 백성들을 모아 다시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2008.02.22.

  • 출처

    네이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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