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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김해김씨...
조회수 8,781 작성일2014.01.22
제가 김해김씨인데 김해김씨는 조상김수로말고 다른김해김씨은 없나요?
추가내공100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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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엉조림은 아람농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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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결혼 1위, 사람과 그룹 5위, 창원시 1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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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저는 결혼정보회사를 운영하는데요.

 

김수로왕 말고도 김해김시 시조가 있는것 같아요.

아래 내용을 참고해 보세요^^

 

# 김해씨가 가락이랑 우륵이랑 법흥으로 나눠어져 있는데

가락의 시조는 수로왕이구요

우륵의 시조는 충선이구요

법흥의 시조는 염이라고 합니다.

 

# 김해김씨(金海金氏)[가락]
 
▣ 유래
 시조 : 김수로왕(金首露王)
시조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가락국에는 본래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아홉 촌장이 각 지방을 다스렸는데 서기 42년 3월에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소리가 났다. 아홉 촌장과 사람들이 올라가자 "산봉우리에 흙을파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약 머리를 내지않으면 구어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면 곧 임금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하자 그대로 하였더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땅에 닿아 있었다. 그 끈의 끝에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이것을 열어 보니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이것을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가자 다음날 이 알이 여섯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제일먼저 나온 아이 이름을 수로(金首露, 42~199.3.23)로 하고 그달 보름에 왕으로고 나라 이름을 가락(대가야)이라하고,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 이상은 "삼국유사" 중에서 -
그중 먼저 나온 수로는 금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으로 하였다. - 이상은 "개황력(開皇曆)" 중에서 -
이 수로왕을 시조로하는 성씨가 바로 김해김씨이다. 김해는 가락국의 고도로서 지명도 여러가지로 변했으나 고려 충선왕 때 김해부가 설치됨으로써 본관을 김해로 하였으며 가락김씨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수로왕이 즉위 7년에 아유타국(현재 인도 중부지방의 고대국가)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 33~189.3.1)을 왕비로 맞이하여 10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로 왕통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의 간곡한 요청으로 왕비의 성인 허(許)씨(태인허씨)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화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이씨가 있으며 세 성씨가 다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도 '가락중앙종친회'로 하였다.

김해김씨의 중시조는 수로왕의 12세손인 김유신(金庾信)장군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자이며 무열왕의 딸 지소 부인(智炤夫人)과 혼인하였다. 할아버지는 신라의 장군이자 각간(角干)인 김무력(金武力, 구형왕의 막내 아들)이고, 아버지는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김서현(金舒玄), 어머니는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 인물
 경파
경파의 파조인 김목경(金牧卿)은 고려 충정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당시 혼란한 국정을 개탄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누차 왕에게 상소 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생을 마쳤다.
김목경의 맏아들 김보(金普)는 공민왕이 세자 때 국가의 사절로서 중국의 북경에 갈 때 시종(侍從)한 공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김보의 6세손 김영견(金永堅 : 동지중추부사), 김영서(金永瑞 : 현감), 김영정(金永貞 : 성종 때 대사헌), 김영순(金永純 : 한성판관) 4형제가 빼어났으며,
숙종때 명신 김우항(金宇杭)은 김영정(金永貞)의 후손으로 1713년(숙종 39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사군파
사군파에서는 파조인 김익경(金益卿)의 손자 김진문(金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이색(李穡), 박자검(朴自儉) 등과 함게 은둔 생활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김추(金錘)는 도총관(都摠管)을, 넷째 아들 김석(金錫)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막내 김조는 세종 때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할 때 장영실(蔣英實)과 함께 간의대(簡儀臺), 자격루(自擊漏), 혼천의(渾天儀)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한다. 특히 그는 벼슬이 옮겨질 때마다 몽은제(蒙恩祭)를 올리는 충신으로서도 이름이 났고, 세종이 평소의 소원을 묻자 "백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榻 : 임금이 앉는 제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化) 앞에 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한 것으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전한다.

한편 김진문(金振門)의 6세손 김극희(金克禧)가 명사수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조카 김완(金完 :
학천군 김극조의 아들)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 때 남원대첩(南原大捷)에 공을 세웠던 그는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 할 때 벽동(碧潼)의 성(城)을 사수했던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우(金宇)의 아들 김여준(金汝峻)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 : 인조의 맏아들 인열왕후 한씨의 소생)와 인평대군(璘坪大君)을 호종한 1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중국 심양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關)에서 세자를 소리내어울렸다는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용력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해 온 청나라 장수 우거(禹巨)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병자호란의 굴욕과 인질로 잡혀가는 세자를 호종하는 비애 등 백성들의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후 세자가 돌아와 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잊어 과거의 시제(時題)에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하였다 한다.

송상현(宋象賢), 유극량(劉克良)과 더불어 삼충절(三忠節)로 일컬어진 김동광은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재직시 임진왜란 일어나 성이 함락되자 좌우를 피난시키고 성의 정문 앞에 조복단장한 채 관인을 쥐고 단좌하여 적에게 저항하다가 참살당하여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삼현파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1세조인 김관(金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김극일(金克一)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극일의 아들 김맹(金孟)은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김준손(金駿孫), 김기손(金驥孫), 김일손(金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김일손은 1486년(중종 1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이 등극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니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일손은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김일손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 때의 영의정(領議政) 남곤(南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김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삼현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는 김일손의 조카이며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 김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김일손의 증손 김언유(金彦諭)는 고양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비(碑)와 병풍, 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김언유의 아들 김현성(金玄成)은 광해군 때 폐모론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경서(金景瑞)와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여 중국어에 능통했던 김덕승(金德承),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김예직(金禮直), 조선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金弘道)가 유명했고, 충효정려(忠孝旌閭)를 사액(賜額)받은 김진희(金晋熙)와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김천택(金天澤) 등이 있다.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김극검(金克儉) : 문과(文科) 세조12년(1466) 중시 일등(一等) 장원급제
김기손(金驥孫) : 문과(文科) 성종13년(1482) 친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유신(金庾信) : 문과(文科) 중종11년(151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명악(金命岳, 1821 辛巳生) : 문과(文科) 철종5년(1854)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세진(金世鎭, 1838 戊戌生) : 문과(文科) 고종13년(1876)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경준(金敬濬, 1862 壬戌生) : 문과(文科) 고종23년(1886) 함경도도과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빈(金○, 1862 壬戌生) : 문과(文科) 태종16년(1416) 중시 을과(乙科)
김현성(金玄成, 1542 壬寅生) : 문과(文科) 명종19년(1564) 식년시 병과(丙科)
김덕승(金德承, 1595 乙未生) : 문과(文科) 광해군11년(1619) 별시 을과(乙科)
김상환(金商煥, 1699 己卯生) : 문과(文科) 영조11년(1735) 정시 을과(乙科)
등 모두 128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128명, 무과 536명, 사마시 471명, 역과 59명, 의과 39명, 음양과 15명, 율과 33명, 주학 8명)
* 과거 급제자는 본관이 같고 계통이 다른 본관과 구분이 안된 것이다.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 김해
김해(金海)는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 일대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洛東江)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가락국(駕洛國)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여 왔다.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680년(문무왕 20)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바꾸어 양주(良州: 梁山)의 관할로 두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김해부(金海府)로 개칭되었고 임해현(臨海縣)으로 다시 강등되었다가 곧 임해군으로 승격되었다. 995년(성종 14)에 김해안동도호부(金海安東都護府)로 개칭하여 영동도(嶺東道)에 속하였다가 1012년(현종 4) 김해군방어사로 강등되었으나 1018년부터는 의안군(義安郡: 昌原)·함안군(咸安郡)·칠원현(漆原縣: 漆原面)·웅신현(熊神縣: 鎭海)등을 영현으로 삼았다. 1270년(원종 11) 방어사(防禦使) 김훤이 인접지역인 밀성(密城)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1293년(충렬왕 19) 현으로 강등되었다. 1308년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하였으나 1310년(충선왕 2) 김해부(金海府)로 격하되었다. 1413년(태종 13) 김해도호부로 승격되어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김해군이 되었고, 1918년에 좌부면과 우부면이 김해면으로 통합되었다. 1931년에는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김해군의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하여 분리 되었으며 1995년에는 김해군과 통합하여 김해시가 되었다.


 

 김해김씨(金海金氏)[우록]
 
▣ 유래
 시조 : 김충선(金忠善)
시조 김충선(金忠善,1571~1642, 자는 선지, 호는 모하당)은 본래 일본인으로 성은 사(沙)씨이며 이름은 야가(也可)이다.
그가 임진왜란때 21세의 나이로 일본군 가등청정(加藤淸正, 가또오 기요마사)의 좌선봉장(左先鋒將)으로 삼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4월 13일 부산 동래에 상륙 했다.
조선의 문물과 인정, 풍속에 감탄하여 상륙한지 1주일만인 4월 20일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晋)과 김응서(金應瑞)에게 "내가 못난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가 약한 것도 아니나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 앞서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어 귀순하고싶다."라는 편지를 보내 귀순의 뜻을 밝힌 후 귀순하였다.
귀순 후 조선의 장수로 울산과 경주, 영천 등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그는 조선에 화포와 조총을 만드는 법과 사용술을 보급하였고, 18개 지역의 왜적의 성을 탈환하는 등 눈부신 업적과 전공을 세우자 권율장군과 어사 한준겸(韓浚謙)이 왕에게 간청하여 정이품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선조가 그를 친히 불러 이름을 김충선으로 하사 하였다.
1603년(선조 36년) 북방에서 여진족이 국경을 어지럽히자 국경방어를 자청하여 10년간 국경을 지키다 물러났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다시 출정해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의 목을베어 평정에 공을 세웠다.
1627년(인조 5년)의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모아 경기도 광주의 쌍령(雙嶺)에서 매복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어 무훈을 떨쳤다.
그는 서른살이 되던 해 진주 목사(晋州牧使)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友鹿洞)에 뿌리를 내리고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풍(家風)으로 살다가 1642년(인조 20년) 72세로 세상을 마쳐 가창골에 세워진 녹동서원(鹿洞書院)에 배향되었고, 정헌대부 지중추부사(正憲大夫 知中樞府事), 병조참판(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지금 그의 후손들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 많이 살고 있으며 우록동에 살았기 때문에 우록김씨라고도 불리운다.

- 묘소는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 삼정산에 부인의 무덤과 나란히 있다.
 
▣ 인물
 김충선은 슬하에 아들 5형제를두었는데 장남 김경원(金敬元)이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둘째 김경신(金敬信)은 공조참판(工曹參判)에 각각 추증되었고, 셋째 김우상(金右祥)은 상호군(上護軍)을, 넷째 김계인(金繼仁)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으며, 막내 김경인(金敬仁)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어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경원의 둘째 아들 김진영(金振英)이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참찬관(參贊官)을 역임했고, 김여삼(金汝三)은 노모가 죽자 삼성산(三聖山)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이나 시묘(侍墓)를 극진히 하여 "효행록(孝行錄)"에 실렸으며, 김용하(金龍河)는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벼슬을 사직하여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풍을 지켰다.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김극검(金克儉) : 문과(文科) 세조12년(1466) 중시 일등(一等) 장원급제
김기손(金驥孫) : 문과(文科) 성종13년(1482) 친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유신(金庾信) : 문과(文科) 중종11년(151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명악(金命岳, 1821 辛巳生) : 문과(文科) 철종5년(1854)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세진(金世鎭, 1838 戊戌生) : 문과(文科) 고종13년(1876)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경준(金敬濬, 1862 壬戌生) : 문과(文科) 고종23년(1886) 함경도도과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빈(金○, 1862 壬戌生) : 문과(文科) 태종16년(1416) 중시 을과(乙科)
김현성(金玄成, 1542 壬寅生) : 문과(文科) 명종19년(1564) 식년시 병과(丙科)
김덕승(金德承, 1595 乙未生) : 문과(文科) 광해군11년(1619) 별시 을과(乙科)
김상환(金商煥, 1699 己卯生) : 문과(文科) 영조11년(1735) 정시 을과(乙科)
등 모두 128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128명, 무과 536명, 사마시 471명, 역과 59명, 의과 39명, 음양과 15명, 율과 33명, 주학 8명)
* 과거 급제자는 본관이 같고 계통이 다른 본관과 구분이 안된 것이다.

출처: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02300981&qb=6rmA7ZW06rmA6rCA6529IOyasOuhnSDrspXtnaU=&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RW91u35Y7v4ssbOp4Slssssssso-457770&sid=Ut90HHJvLDIAAGd0Eo4



# 김해 씨는 크게 가야 수로계 김해 씨, 신라 알지계 김해 씨, 일본계 김해 씨로 나눈다. 일본계 씨는 임진왜란때 귀화한 일본인 장수 충선(사야가)을 시조로하는 사성 김해 씨가 있는데 김해 씨 사성파 또는 우록 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충선과 함께 귀화한 성인(사여모)도 본관을 김해로 하였다가 최근에 함박 씨로 본관 이름을 바뀌었다.

김해 씨는 가야 수로계을 선(先金), 신라 알지계을 후(後金)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후의 시조는 경순왕 3남 렴, 중시조는 그의 후손 시흥으로 최초 본관은 녕이었는데 고려말 지역통합으로 본관이 김해로 바뀌었다가 조선말 왕명으로 본관을 녕으로 복원하였지만 여전히 (후) 김해씨 익화파(益和派), 종남파(從南派), 법흥파(法興派), 종민파(宗敏派)등은 본관을 김해로 하고 있다. (후) 김해법흥파는 기존 후, 씨와도 구별된다. 법흥파 1세조 춘(金春)은 시흥의 8대손으로 그의 8촌 문기가 사육신과 관련하여 화을 당하자 황해도 풍천으로 피신했다가 1471년 평안도 용천군 동하면 법흥동으로 세거지를 옮겼다. 후손들이 그를 춘을 1세조로 하고 김해 법흥파 또는 법흥 씨라고 하였다.

김해라는 지명은 통일 신라 말기(756년)에 생겨난 지명으로, 처음 김해을 본관으로 하였던 성본은 고려 말기 지역 통합으로 에서 김해 씨로 개칭한 신라계 김해 씨(후, 後金)이다. 가야계 김해 씨(선, 先金)의 원래 본관 이름은 가락 였는데, 가락은 특정 지역명이 아니므로 조선 시대에 본관 이름을 가락 씨의 발원지인 김해로 개칭하였다. 이후 신라계 김해 씨(후, 後金)와 혼선이 빚어져 후(後金)의 본관을 녕으로 복원하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김해라는 본관을 먼저 사용한것은 후(後金)이었기 때문에, 후(後金)의 일부는 본관을 김해로 하고 있다.

김해 는 가야 설화에 등장하는 수로왕에 연원을 두고 유신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김해 씨는 인구가 많은 성씨로 2000년 조사에 따르면 400만명이 보고 되었다고 한다. 주요 인물로는 유신, 홍도, 기창, 정치인 대중, 종필, 국회의원 유정, 형오, 종률, 무성, 배우 명민, 수미, 가수 장훈, 태우, 개그맨 현철 신영, 아나운서 성주, 보민등이 있다.

 

 

법흥 씨의 시조 , 또는 후의 시조 시흥의 8대손이다. 춘은 백촌(白村) 문기(金文起)의 8촌 동생으로, 문기가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가문이 멸문하는 화을 당하게 되자, 당시 김해 군수 춘은 황해도 풍천으로 피신하여 1471년(성종 2년)에 평안도 용천군 동하면 법흥동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춘(金春)을 입향 1세조로 하고 본관을 법흥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춘의 묘소는 실전되고 평북 용천군 동상면 덕향산에 제향하였으나 남북이 분단되어 근황을 알 수 없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02300981&qb=6rmA7ZW06rmA6rCA6529IOyasOuhnSDrspXtnaU=&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RW91u35Y7v4ssbOp4Slssssssso-457770&sid=Ut90HHJvLDIAAGd0Eo4

2014.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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