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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한국의위인....
danc**** 조회수 991 작성일2009.07.27

초딩인데염.... 방학숙제로 위인조사가 있어염 그래서 좀 도와 주시면 ........ 안될까요?

 

하지만 이상한말 적지마세요

만일 적으면 신고 합니다.

 

내공 60으로 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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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ll****
태양신
한국사 100위, 영어 독해, 읽기, 문화재 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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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답변이 됐길 바랍니다^^

 

위인 18명에 대하여 -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

안중근 대한제국의 교육가, 독립운동가, 대한의병 참모중장이다.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브쵸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된 것을 기회로 삼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곧바로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다. 

 

김구 (1876~1949)

김구는 을사조약 체결에 저항하여 이준, 이동녕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10년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에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으나 감형되어 1914년에 출옥되었다. 3·1운동 후에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가 충청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했으며, 한국광복이 되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반탁했다. 그 후, 1945년 8·15 광복을 맏아 귀국하여 반탁운동을 지휘,민주의원 부의장 , 민족통일 본부 부총재를 지냈다. 1948년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라는 유엔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 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안, 평양에 가서 정치회담을 했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김구는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노력하다가 반대파의 안두희에게 암살되었습니다.

 

유관순(1902~1920)

유관순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1일 아오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헌병에 의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 당하고 유관순은 주모자로 잡혀 고된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굴하지 않았다.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 항의하고, 일제법률에 의하여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윤봉길(1908~1932)

윤봉길은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김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및 상하이 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 공원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 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중일본공사 시게마쓰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

안창호는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우리민족에 긍지를 알리는데 힘썼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의 농장이나 오랜지농장들을 만들어 한국인들에게 미국에서 잘살수있도록 도와주었다. 1907년에는 비밀조직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안창호선생은 대성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평양에 세운것으로 청년들에게 고등교육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그는 언론활동도 했다. 신민회에서 운영하는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하였다. 당시 영국인 베델이 운영하는 이 신문은 발행인이 영국인으로 인해 더많은 민족기사를 쓸수있었다. 그는 청년학우회를 새워 청년들을 키우는데 힘썼고 한일 합방이후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국무총리등을 맡아 열심히 일했으며, 한국 독립당을 창당했지만 적발되어 그후 감옥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보내다가 돌아가셨다. 

 

김좌진( 1889~1930, 충남 홍성 출생)

김좌진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대한 광복단 가입, 북간도로 이동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이 되고, 사관 양성소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1920년 10월, 다른 독립군 부대와 힘을 합쳐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청산리 대첩' 이다. 만 4일간 10차례의 전투의 결과는 일본군 사망자 2천여명, 독립군 희생자는 1백여명 이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 운동을 한 김좌진의 애국심은 본받을 만 하다.

 

이봉창(1900~1932)

이봉창은 1931년 중국 상하이 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에 가입, 임시정부 국무 위원 김구의 지시를 받고 일본 왕 히로히토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에는 양이섭과 이춘태도 연루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왕이 만주국 푸이와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에서 히로히토를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그는 조사과정에서 배후인물인 김구의 신원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가공의 인물 백정선으로 둘러댔다. 그는  그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게 되었다.

 

홍범도(1868~1943)

홍범도는 의병전쟁 및 항일독립전쟁기의 대표적 장군으로 봉오동(鳳梧洞)·청산리(靑山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민족주의와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철저한 무장투쟁노선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1927년 정식으로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공화국으로 옮겨져 연금으로 생활했다. 1943년 10월 크슬오르다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채호(1880년 12월 8일 ~ 1936년 2월 21일)
신채호는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로, 국사 연구와 교육을 중시하였다. 기존의 왕과 영웅 중심의 전근대적인 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사학을 내세웠다. 그의 민족사관은 일제에 의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 주체적 역사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저서《조선상고사》에서 특히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았다. 1930년 5월 대련법정에서 유가증권위조 및 동행사, 치안유지법위반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고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옥사하였다.
 
황현(1855.12.11~1910.9.10)
황현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우국지사이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권이 강탈되자 '문변삼수'라는 시를 지어 을사 5적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는 한편, '오애시'를 지어 민영환,조병세 등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한 애국지사를 애도하고 우국충정을 기렸다. 황현 선생은 1910 8월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국록을 먹은 적은 없지만 선비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1910 9 10일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태종 무열왕 (604~661)

신라의 2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54~661년입니다.

이름은 김춘추로, 인품이 높고 외교력이 뛰어나 선덕 여왕 때는 당나라와 외교를 해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654년 진덕 여왕이 병으로 숨을 거두자, 당시 상대등 알천의 추대를 받아 진골 출신으로는 최초로 왕위에 오른 뒤 법률을 새로 만들고, 군사력을 기르는 등 나라의 힘을 키워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660년에는 태자 법민(훗날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 명의 군사로 하여금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문익점 (1329~1398)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호는 삼우당입니다.

1363년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간 문익점은 목화밭을 구경하고 목화의 씨에서 실을 뽑아 무명 옷감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문익점은 귀국할 때 원나라의 엄한 감시를 피해 목화 몇 송이를 따서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따랐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물로나 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목화씨를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세종 (1397~1450)

조선의 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418년~1450년입니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고 인쇄술을 발전시켜 월인천강지곡, 고려사, 삼강행실 등의 책을 펴냈습니다.

1443년엔 우리 민족의 빛나는 문화 유산 가운데 하나인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장영실을 시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고, 해시계(앙부일구), 물시계(자격루) 등의 천문 과학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농업과 의학 분야의 책도 많이 펴냈으며, 박연에게 명해 국악을 발달시켰습니다.

또한 김종서로 하여금 4군 6진을 설치하게 하고, 이종무로 하여금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하는 등 국방에도 힘썼습니다.

 

성삼문 (1418~1456)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입니다.

1447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와 수찬을 거쳤습니다.

그 후 정음청에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개 등과 함께 한글을 만들기 위해 명나라를 13번이나 오가면서 연구를 계속하여 1443년 훈민정음을 만들어냈습니다.

1455년 수양 대군(훗날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을 다시 왕으로 세우려고 계획했으나 김질의 배반으로 거사가 실패하여 붙잡혀 죽었습니다.

 

강감찬 (948~1031)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위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이 있다

 

신사임당 (1504~1551)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는 조선중기 여류 서화가.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본관은 평산이고, 호는 사임당·시임당·임사재이다.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침공·자수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또한 안견의 영향을 받은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산수·포도·풀·벌레 등을 잘 그렸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허준 (1546~1615)

1546년 3월 5일에 태어난 허준은 1569년 홍담,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의관으로서 출사하였습니다.

이후 자신만의 뛰어난 의술로 왕실의 갖가지 병을 고쳐 내의로서의 명성을 높입니다.

1575년 선조의 중병을 고쳐 신망을 얻게 되어 어의로 임명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그의 건강을 돌보게 됩니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사망하자 책임 추궁을 당한 끝에 결국 파직당하고 의주로 문외출송되었습니다.

1610년 당시의 모든 의학 지식을 망라한 임상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을 편술을 완료하였습니다.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친 이후 그해 음력 11월 22일 귀양이 풀리고 내의원에 복직 되었고, 그 뒤 허준은 후진 양성과 의서 편찬 및 의서 수리 등을 맡다가, 1615년 음력 8월 17일에 사망하였습니다.

 

원효 (617~686)

신라의 승려로, 648년 황룡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불도를 닦았으며 661년 승려 의상과 함께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길에 당항성의 한 무덤에서 해골바가지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뒤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 공주와 혼인하여 설총을 낳았으며,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불교의 사상을 노래로 만들어 퍼뜨렸습니다.

또한 원효 대시는 금강삼매경을 쉽게 풀이한 금강삼매경론을 펴내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책을 펴냈습니다.

2009.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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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jb****
영웅
영어, 사회, 도덕, 수학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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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유신

 -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의 12대손이며, 신라 명장 김서현의 아들로, 어머니는 신라 왕족이었던 만명 부인이다. 15세 때 화랑이 되어 낭도들과 더불어 몸과 마음을 닦았다. 654년 진덕 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김춘추를 임금으로 내세우고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룰 준비를 했다. 660년에 소정방이 거느린 당나라 13만 대군과 연합하여, 정예군 5만을 이끌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년에 나당 연합군을 편성하여 김유신은 총사령으로 경주에 남고, 김인문, 김흠순 등이 고구려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이로 인해 김유신은 태대각간이라는 제일 높은 벼슬 자리에 올랐다.

 

2. 장보고

 - 일명 궁복, 궁파. 어려서부터 바다를 잘 알고, 무예에도 뛰어났던 장보고는 일찍이 당나라 서주로 건너갔다. 당나라 무령군 소장에까지 오르게 된 장보고는 신라인들이 당나라 해적에게 노비로 잡혀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해적을 모조리 없앨 결심을 하고 신라로 돌아왔다. 해적이 날뛰는 것을 막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에 진을 설치하고 전략적 거점을 마련해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또한 해상 교통로를 장악하여 당나라 및 신라, 일본 사이의 무역을 중재하고, 스스로 대선단을 만들어 국제 무역을 하여 일본, 당나라 간의 무역을 좌우했다. 그러나 846년 자객 염장에 의해 살해되었다.

 

3. 신사임담

 - 조선 시대 문인. 서화가. 본명은 인선, 사임당은 당호이며, 임사재라고도 했다. 어려서부터 바느질과 그림 그리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이미 8세 때에 안견의 그림을 그대로 그려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나중에는 초충도를 많이 그려 훌룡한 화가가 되었다.

 

4. 유관순

 - 유관순은 천안에서 태어나 독립 운동을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잡혀 죽게 되었다.

 

5. 이순신

 - 이순신 장군께서는 어렸을 때 전쟁놀이를 좋아하셨고, 그 덕분에 무과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다. 1591년 친구 유성룡의 추천을 받아 전라 좌수사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북선을 나대용과 같이 만들어 싸웠다. 결국은 큰 공을 세워 삼도 수군 통제사에 까지 오르셨다. 그러나 원균의 모함을 받고 권율 장군 아래에서 백의 종군을 하였다. 원균의 칠천량 해전에서 죽게 되자 이순신 장군은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에 오르게 된다. 1598년 노량 해전 때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총탄을 맏고 돌아가셨다.

 

6. 세종대왕

 - 세종대왕께서는 집현전을 만들어 훌륭한 학자를 배출하고, 훈민정음을 배포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글을 잘 쓸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고, 검소하셔서 귀한 음식을 드시지 않으셨다.

2009.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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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du****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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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한글을 창조하신분

이순신=나라를 구하신분

안중근=이토히로부미를 총살함

유관순=3.1운동때 만세운동을 하다가 꽃다운 나이에 고문을 받고 사망

김좌진=청산리 대첩의 영웅

 

2009.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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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sc****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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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이다.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과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훈련원참군()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가 되었다. 이때 호인()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3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충렬사팔사품(통영충렬사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출처 : 백과사전

의견 5이순신입니당

그 외 답변들 2

2009.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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